문화&사상

선시(禪詩)감상_06

醉月 2011. 1. 19. 08:50

회주에서 소가...

 

懷州牛喫禾
益州馬腹漲
天下覓醫人
灸猪左膊上


회주에서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가 터졌다
천하의 명의를 찾아서
돼지 왼쪽 어깨 위에 뜸을 떠줘라

 

帝心 杜順(제심 두순) 선사 (557 ~ 640)
중국 화엄종 스님. 옹주(雍州) 만년(萬年) 사람으로 속성은 두(杜), 이름은 법순(法順)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인성사(因聖寺)의 위진(魏珍)에게 선업(禪業)을 받았다. 뒤에 종남산에 숨어 살며<오교지관 五敎止觀> <화엄법계관문 華嚴法界觀>을 지었고, 일대 불교를 판단하여 5문으로 나누고, 또 10현문(玄門)의 단서를 열어 화엄종의 교망(敎網)을 크게 펼치다. 당나라 태종이 지성으로 귀의, 제심존자(帝心尊者)란 호를 주었다. 항상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아미타불”을 염하라고 권하고, 오회(五悔)란 글을 지어 정토(淨土)를 찬탄하기도 했다. 정관(貞觀) 14년 11월 84세에 입적, 후세에 그를 화엄종의 초조(初祖)라 부르다.

 

백척간두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百尺竿頭座底人
雖然得入未爲眞
百尺竿頭進一步
十方刹土現金身

백척간두에 앉아 있는 사람이여
비록 앉아 있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참으로 시방세계에 대자유인이 되리라

장사 경잠(長沙 景岑 ? ~ 868)
당대(唐代)스님. 남악(南嶽)문하. 장사는 주석지명. 어려서 출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처음에는 녹원(鹿苑)에 머물렀지만, 이후에는 한 곳에는 정주하지 않고 유랑하면서 한 생을 마침. 앙산 혜적(仰山慧寂)과의 문답에서 앙산을 차서 넘어뜨릴 정도의 기용(機用)을 지니고 있어, 대호(大虎) 또는 초현(招賢) 대사, 잠대충(岑大蟲)이라고도 부름.

 

오도송 증 동림 총장로(悟道頌贈東林總長老)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개울물 소리는 곧 부처님 법문이요
산빛은 그대로 부처님 몸이니
어젯밤 동림사 조실 팔만사천 법문을
다른 날에 어찌 사람들에게 바쳐 얘기할 수 있으리

소식(蘇軾 1036~1101)
사천성에서 태어났다. 호는 동파(東坡). 王安石의 정치개혁에 반대하는 시를 썼다가 귀양 갔다.
당송 팔대가(唐宋 八大家) 가운데 한 사람.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宋 4대 書家 가운데 한 사람.
禪에도 깊이 통달해 상총조각(常總照覺) 선사의 법을 이어받아 <悟道頌>을 짓기도 했다. 저서에는 <東坡集>(115권)이 있다.

 

 

감자를 쇠똥불에....

糞火但知黃犢味
銀鉤那識紫泥新
更無心緖收寒涕
豈有功夫問俗人


감자를 쇠똥불에 구워 먹으니 다만 쇠똥 맛만 알겠는데
은구들이 어찌 자니의 새로움을 알리오
다시 마음 언저리 차가운 눈물 콧물도 닦지 못한 나이거늘
어찌 속인보다 못한 내게 공부를 물으러 오는가


나찬선사(懶瓚禪師)
명찬화상이라고도 함. 생몰연대 미상, 당대 사람, 북종(北宗)임.
崇山普寂에게 참학하여 법을 계승하였다. 湖南省의 南岳에 은거하였는데 그 모습이 세속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게을렀기 때문에 懶瓚·懶殘 이라고 불리워졌다.
天寶 초년(742년)에 南岳寺에 들어가 20년을 지냈다. 남악사에 있을 적에 李必이 그 절에서 은거하였는데 10년 후에 재상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과연 이 필이 뒤에 예언한 대로 재상이 되었다. 大明禪師라고 시호를 받고 《남악나찬화상가》가 전해지고 있다.
길거리를 다니며 쇠똥에 감자를 구워 먹었다고도 한다.

 

임종게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달 외로이 둥글어
그 빛이 삼라만상을 삼켰다
빛과 대상 다 잊어버리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이오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6~1912)
근대 스님. 처음이름은 동욱(東旭)이고 속성은 송(宋)씨다.
본관은 여산으로 전주출신이다. 9세에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 계허(桂虛)에게 출가하고, 14세에 동학사(東鶴寺) 만화(萬化)에게 배웠다. 23세 때 동학사에서 개강하였으나, 31세 때 여역이 창궐한 마을을 지나다가 생사의 긴박함을 깨닫고 학중(學衆)들을 해산한 뒤, 문을 닫고 좌선하며 묘지(妙旨)를 크게 깨달았다. 32세에 홍성(洪城) 천장암(天藏庵)에서 용암 혜언(龍巖 慧彦)의 법을 잇고, 그 후부터 도처에서 선풍을 떨치면서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금강산(金剛山) 마하연(摩訶衍), 설봉산(雪峰山) 석왕사(釋王寺) 등 여러 절에 머물렀다. 59세에 강계(江界), 삼수(三水) 등지에서 자취를 감춘 후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스스로 난주(蘭州)라 이름하다가,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에서 입적하였다. 이때 세수67세, 법랍은 59세였다.
문하에는 만공 월면(滿空 月面), 혜월(慧月), 수월 음관(水月 音觀), 한암 중원(漢巖 重遠) 등의 제자를 두었다.

 

아직 사람으로

 

快哉渾沌身
不飯復不尿
遭得誰鑽鑿
因玆立九竅
朝朝爲衣食
歲歲愁租調
千箇爭一錢
聚頭亡命叫


아직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 혼돈의 몸은 그지 없이 유쾌했고
밥 먹고 오줌누는 번거로움도 없었는데
어쩌다 누구에게 구멍을 뚫렸는가
그래서 사람이 되어 아홉구멍을 갖춘 몸이 되었는가
덕분에 날마다 입고 먹기에 허둥지둥
해마다 세금낼 걱정뿐
돈 한 푼에 천 사람이 다투어
와글와글 모여서 목숨 걸고 외쳐대네

* 혼돈(混沌)
혼돈은 <장자 莊子>응제왕편에 나오는 우화에서 유래한다.
남해의 임금인 '숙'과 북해의 임금인 '홀(忽)'이 중앙의 임금인 혼돈의 땅에서 모인 일이 가끔 있었는데 그 때마다 혼돈은 후한 대접을 하였다.
이에 감사한 숙과 홀은 혼돈에게 무엇인가 보답을 하려고 서로 상의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눈과 귀와 입과 코의 일곱 구멍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쉰다. 그런데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뚫어 주는 것이 어떨까?"
그래서 숙과 홀이 매일 한 구멍씩을 뚫었더니 혼돈은 7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천태 한산(天台寒山)
생몰연대 미상. 당대(唐代)승려지만 전설화되어 실제 인물이 어떤지는 불명.
천태는 주석 산명. 한산시(寒山時)가 그의 저작이라 함. 국청(國淸) 3은(隱)의 한 사람. 조당집(祖當集) 16과 송고승전(宋高僧傳) 2에는 위산 영우(潙山靈祐)를 천태산(天台山)에서 만난 것이 기록되어 있고, 고존숙어록(古尊宿語綠) 14와 지남(志南)의 천태산국청선사삼은집기(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 에는 조주 종심(趙州從諗)과 만나 문답한 것이 기록되어 있음. 또 당말(唐末) 5대(代)의 도사(道士) 두광정(杜光庭)의 불전습유(佛傳拾遺)에는 한산이 대력(大歷) 연간(766~779)에 천태산에 은거했던 일과, 그의 시를 서영부(徐靈府)가 3권으로 편집하고 서문을 썼다고 기술함. 또 관휴(貫休)의 선월집(禪月集)에도 한산을 경묘하는 시를 싣고 있어, 9세기에는 이미 한산의 전설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됨.

 

 한 표주박 술을

 

 

 

 

 

 

 

 

 

 

 

 

위응물(韋應物, 737~790?)
당나라 장안의 귀족으로 태어났다. 젊었을 때는 현종 황제의 근위로서 방탕무궤한 생활을 하다가, 현종이 돌아가자 느끼는 바 있어 교유를 끊고 글을 배웠으며, 시를 짓기는 쉰이 넘어서였다. 성품이 고결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앉는 곳에 향을 피우고 땅을 쓸었다 한다. 자기 집을 정사(精舍)라 부르며 탈속한 생활을 했고, 벼슬은 소주자사(蘇州刺史)에 이르렀다.

사람이 한가로우니

 

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
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


사람이 한가로우니 월계수 꽃이 뚝뚝 떨어지고
밤이 고요하니 봄 산이 텅 비었네
달이 솟으니 산새가 깜짝 놀라
때때로 봄 산골에서 울음 우네

왕유(王維 699~762?)
당(唐)나라의 시인ㆍ화가.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ㆍ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ㆍ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ㆍ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與黃師是(여황사시)

 

簾捲穿窓戶不扃
隙塵風葉任縱橫
幽人睡足誰呼覺
倚枕床前有月明


주렴을 뚫어진 창문에 말아두고 사립문 빗장은 채우지 않으니
문틈 먼지와 낙엽이 이리저리 날리네
하릴없는 사람은 잠에 떨어졌는데 누가 불러 깨우리오
베개 침상에 기댄 앞에 밝은 달만 있노라

- 함께 금강경을 공부하던 친구 황사시에게 보냄

소동파 (蘇東坡, 1036.12.19 ~ 1101.7.28)
중국 북송 때의 시인.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생.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강촌

 

淸江一曲抱村流
長夏江村事事幽
自去自來梁上燕
相親相近水中鷗
老妻畵紙爲棋局
稚子敲針作釣鉤
多病所須唯藥物
微軀此外更何求

맑은 강 한 구비 마을을 안고 흘러가니
긴 여름 강촌이 일마다 그윽하네
절로 가고 절고 오는 건 서까래 위 제비요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운 건 물 속에 백구로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아이는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
병 많은 내가 바라는 바는 오직 약물 뿐이요
적은 몸 나는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

두보 (杜甫, 712~770)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최잔고목이 찬 수풀에

 

崔殘枯木倚寒林
幾度逢春不變心
樵客遇之猶不顧
人那得苦追尋


최잔고목이 찬 수풀에 의지해 있으니
봄을 여러 번 맞아도 마음 변치 않네
나무꾼도 고목은 돌아보지 않는데
목수는 어찌하여 괴로이 찾으려 하는가

대매 법상 선사(大梅 法常, 741-808,752-839)
당대 남악하, 양양(호북성)사람 성은 정씨, 유년부터 형주 옥천사에서 수학한 후 관년에 수구하고 경론을 연구하다가 선에 뜻을 두고는 마조하에서 깨달음을 얻다. 정원12년(736) 사명남쪽 매자진의 은거처였던 대매산에 주하다. 거주하기 40년 즉심즉불, 비심비불의 종풍을 선양하였으며 개성원년(836) 호성사를 짓고 6~700의 대중을 이끌다가 동사년 9월 88세로 시적. 진사 강적이 비문을 짓다. 제자에 항주천룡, 신라가지, 신라충언 등이 있다.(조당집15, 송고승전11, 전등록7, 회요4, 회원3) 저서로는 [대매산상선사어록1권]이 있다.

 

사대는 나의 존재가 아니며

 

四大非我有
五蘊本來空
以首臨白刃
猶如斬春風


사대는 나의 존재가 아니며
오온도 본래 공이라
흰 칼을 목에 대니
봄바람 베는 것 같네

승조법사(338~414)
장안(長安)에서 태어 났으며 처음에는 노자와 장자에 심취하였다.
뒤에 지겸(支謙)스님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 불교에 귀의 하였다.
어느날 황제가 불러 벼슬을 주어 나라의 기둥으로 쓸 작정이었으나 가지 않아 어명을 어긴 죄로 참살을 당하였다.
그 때 죽음을 일주일만 보류해 달라고 하여 보장록(寶藏錄)을 지었다.
그리고 위의 게송을 지었다. 스님의 저서는 보장록 외에 반야무지론, 열반무명론, 물불천론이 있으며 스님의 나이 서른 한살에 세상을 떠났다.

 

절이 흰구름 가운데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


절이 흰구름 가운데 있으니
흰구름을 스님이 쓸지 않네
손님이 찾아오니 사립문은 비로소 열리고
골짜기마다 소나무 꽃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조선 중기의 승려. 속명은 최여신이며 보통 서산대사라 불린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1534년 진사 시험에 떨어진 뒤 지리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승과에 급제하여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데 공을 세웠다. 그는 선종과 교종으로 분리된 불교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삼교 통합론'을 내세워 유교,불교,도교를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을 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청허당집>, <선교결>, <심법요초>, <운수단>, <설선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