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문학인도, 실패한 정치인도
* 성공과 실패는 다만 한때에 행하여지는 것이나, 시비의 분별은 곧 만세에 정해지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서 사관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한때의 득실을 기록하여 그것으로 만세의 시비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할 수는 있어도 사기는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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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이라는 말에는 얼마간 환상적인 분위기가 담겨져 있다. 특히 조선조 시대의 경우가 그렇다. 요즈음은 영어의 단어를 많이 왼다던가, 수학적인 재능 등으로 '신동'임을 말하지만 조선조의 경우는 얼마나 어려서, 어떤 내용의 한시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그 신동임을 확인하고 평가하였다.
설혹 다섯 자, 네 줄로 매듭지어지는 오언절구의 짧은 한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운자를 써야 하고 또 기승전결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등 작법상의 제약과 어려움이 있었기에 대단한 천재성이 요구된다.
우리들의 심저에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새겨진 매월당 김시습의 경우가 이른바 조선 시대 '신동'의 개념을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에 능히 글을 알았다고 하였고, 말은 늦게 깨치고 더듬거렸으나 총기는 일찍 깨여서 글을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놀랍게도 세 살에 시를 지어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는 대목이 이르면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도홍유녹삼월막]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무는구나.
[주관청침송엽노로]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였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
[무뇌성하처] 비도 안 오는데 천둥 소리는 어디서 울리나,
[황운편편사방분] 누른 구름 점점이 사방으로 흩어지네.
이 세 편의 시가 신동 김시습이 세 살 때 지은 것인데, 마지막 두 줄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광경을 보고 읊은 것이라니 그 착상과 비유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다섯 살에 '대학'을 깨치고 글을 짓는데 막힘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 하자, 세종조의 명신 허조가 몸소 김시습의 집을 찾아와 시험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 자를 넣어 시를 지어 보아라."
노목개화필불노: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허조는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대왕은 지신사(승지의 별칭) 박이창으로 하여금 어린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다시 시험해 보게 하였다.
동자지학백학무청공지말: 동자의 공부가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도다.
어린 김시습의 화답은 막힘이 없었다.
성주지덕황용번비해지중: 성군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뒤집으며 노는 듯하도다.
박이창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지켜보던 좌중 또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이창은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며 신동 김시습에게 물었다. "저 그림을 두고도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예." 그것은 강가에 작은 정자가 있고, 그 밑에 빈 배가 매어져 있는 그림이었다. 김시습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소리내 읊었다.
소정주택하인재: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이쯤되면 신동의 영특함이 넘어섰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김시습은 시적인 재능으로 그 신동 됨과 천재성을 입증하였지만, 산문의 경우라면 선조조의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의 예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난설헌은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아주 환상적인 글을 지어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광한전백옥루'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전각이기에 난설헌의 천재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대저 보옥으로 만든 차일은 창공에 걸려 너울거리고, 구름 같은 휘장은 색상의 한계를 떠나 그저 황홀하기만 하며, 은다락은 햇빛에 번쩍거리고 노을 같은 주두는 헤매는 속세의 티끌 세계를 벗어났도다
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명문(더구나 한자로 된^5,5,5^)을 어찌 여덟 살 난 여아가 쓴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 같은 천재성으로 그녀는 후일 동양삼국(조선, 중국, 일본)에서 으뜸가는 여류시인으로 추앙받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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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모든 학문은 문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문자를 체계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처음 대하게 되는 '천자문'의 구성이 4자시 250수로 되어 있었으므로 시를 통해 우주를 알고, 시를 통해 자연과 역사를 알게 하였으며, 또 인성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도덕적인 가치도 시를 통해 터득하게 하였다.
지우필개 덕능막망 내게 잘못이 있음을 알았거든 반드시 고쳐야 하고, 내가 능히 할 수 있을 일을 얻었거든 잊지 말아야 한다.
위태롭고 욕스러운 일이 잦으면 곧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것이니, 숲이 있고 물이 있는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옳을 지어다.
두 가지 경구는 모두 "천자문"에 적혀 있는 구절이지만, 삶의 지혜를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네 살짜리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에게 이 같은 구절을 수백 번씩 외게 하여 몸에 익히게 하는 인성교육의 방법도 본받을 만하지만, 그것을 문학적인 형식을 통해 이해시키고자 한 지혜로움에는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명심보감", "통감", "소학", "논어" 등에 기술된 아름답고도 가치있는 내용을 되풀이 읽게 함으로써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혹은 그것을 지행해야 하는 이치까지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동시에 도모하다가, 결국 "시경"에 이르러 문학의 이치로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살피게 하는 안목을 갖게 하는 교육과정을 오늘 우리들의 찌들고 맹목적인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실로 옛 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온고이지신의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겠는가.
조선 시대를 살았던 뛰어난 경세가나 명성을 남긴 정치가는 모두가 문학을 바탕으로 인격을 도야하고 교양을 넓혔으며, 또 자신의 의지도 그런 방법으로 토로하였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론이라는 면에서 살핀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이라기보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이거나, 생활로서의 문학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의 사대부로 문학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었던 사람들은 정승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훌륭한 정치가로서의 명성을 남기지는 못 했다.
다시 말해서 성공한 문학인이기에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경우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교산 허균일 것이다. 송강 정철은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조 가사문학의 쌍벽이자 우리 문학사를 여는 큰 별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송강 정철을 천재적인 시인으로 평가하고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가사문학을 상찬하는 데만 주력해 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도 송강 정철을 그렇게만 보아왔고, 더구나 정철 최초의 가사인 관동별곡에 내 고향 강릉 경포대와 강문포구의 절경을 노래하고 있어 남다른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개지륜이 경포로 내려가고 십리빙환을 다리고 고쳐 다려 장송을 혼 속에 싫도록 펴지시니 물결도 잔잔하여 모래를 헤이로다 고주해람하여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너머 옆에 대양이 거기로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4백여 년 전에 쓰여진 위의 정경은 지금의 실경과도 별로 다를 게 없다. 나는 지금도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에 즐겨 오르고 강문교도 자주 건너는 편이다. 그때마다 "관동별곡" 의 이 대목을 흥얼흥얼 외면서 송강가사의 진수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송강 정철은 조선 시대의 선비가 그러했듯 문인이기 전에 관직에 등용된 공직자였고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살았던 정치인이었다. 그의 가사문학에는 통한으로 점철된 정치인 정철의 번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의 가사문학은 천재적인 시재로서의 문학성을 집대성한 것일 뿐, 인간 정철의 진면목은 파악하기는 태부족일 뿐이다. 선조는 정철을 이렇게 말했다.
정철은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행동은 올바르며 그의 혀는 곧 직언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움을 줄 뿐이며, 직에 임하여서는 불고가사, 몸이 쇠척하도록 온 힘을 다했고, 충성과 절의는 초목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다 아는 바이니 참으로 이른바 군계일학이며 전상의 맹호라, 만약 그를 벌한다면 이는 마치 주운을 베는 것이나 같다.
임금이 신하를 평하는 글로는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침이 마르게 자신을 극찬한 바로 그 선조의 명으로 파직을 되풀이하였고, 끝내는 귀양살이까지 하게 된다. 동서로 갈라진 정쟁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은 이른바 서인의 거벽이었고, 그는 꺾일지언정 휘어질 줄 몰랐던 탓으로 타협은 고사하고 차선도 몰랐다. 그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였다.
명종의 사촌 형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탐내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처족을 모함하여 마침내 처남을 죽이고 처가의 재산을 탈취한 사건이 있었다. 정철이 이 사건을 맡게 되자 명종은 그에게 관대히 처분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정철은 왕명을 거부하고 경양군을 중형(사형)에 처했다. 법도와 정의를 으뜸으로 여기는 공직자의 표상이자 용기있는 행동이 아닐 수가 없다. 그후 정철은 명종의 미움을 사게 되어 벼슬길이 막히는 등의 불이익을 당했으나 그럴수록 정철의 강직한 성품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송강 정철의 강직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도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옛 간관의 풍도가 있다.
정철은 대쪽같은 선비의 기상으로 이미 젊은 날에도 끊임없는 핍박과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함으로써 마침내 파직되어 부처되기에 이른다. 이때의 사단을 여기에 소상히 적을 겨를이 없으나, 이 또한 임금(선조)의 내심을 헤아리지 않은 채 명분과 공론을 내세웠던 당당한 모습이었다.
조선조와 같은 봉건군주시대에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임금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공론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에게 밀어닥칠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설혹 그 주장이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송강 정철은 명종, 선조의 2대에 걸쳐 어의에 거슬리는 공리공론을 내세웠으면서도 58세를 일기로, 더구나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세상을 마감할 수가 있었던 것은 기적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그가 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주기를 주장하였으나 옳고 그른 일을 분명하게 가렸기 때문일 것이며, 그에게 내려진 시호가 문청이라는 사실로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송강 정철에게 밀어닥치는 곡절은 그가 죽음 다음에도 삭탈관직과 복직을 거듭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강직히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사계 김장생이 우암 송시열에게 물었다. "송강 정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송시열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 부형께서 일찍이 정철은 청직하나, 속이 비좁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에 김장생이 다시 부연하였다. "옳은 말이오. 정철은 자신이 청백하고 아무런 혐의가 없음만 믿는 안하무인으로, 이것이 끝에 가서 일세의 원수같이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지."
송강 정철을 평가하는 이 같은 견해를 깊이 있게 살펴본다면 자신의 결백함만을 표준으로 삼아 불의를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학문이 높아지면 도량도 넓어지는데, 정철도 역시 학문이 낮은 탓이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찌 되었거나 송강 정철은 법도와 명분을 소중히 한 불출세의 선비였다.
사가들은 그를 말할 때, 천성이 소통하고 준결하다고 적었으며, 부모를 섬김에는 지효 하였고, 형제간의 우애는 화목을 으뜸으로 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 정철은 어떤 글이라도 세 번 읽으면 능히 암송하였고, 근사록, 주자의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시문을 잘했으며 글씨에 능했다고 적었다. 송강 정철.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가사문학을 읽으면서 문학사적인 의미에서는 성공한 문학인이지만, 실패를 거듭한 정치인 정철이라는 면에서는 문학사의 뒷장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의 전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되었던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던 선비의 표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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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과거에 등과하게 되고, 그것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기초가 되었던 것은 조선 시대의 제도나 관행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문장이나 시문의 대가는 대개가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었던 정치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사람들을 문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가 당대의 시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면서도 정승의 반열에 들지 못했던 것은 예술적, 문학적인 소양이 정치적인 성향을 앞서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 다시 말해서 문학적으로는 대성하였으되 정치적으로는 참담한 패배를 맛본 인물로는 교산 허균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 싹튼 저항문학의 효시이자, 개혁성향의 사회소설이요, 참여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홍길동전"의 내용은 적서의 폐단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만민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향해 떠나가는 이른바 핍박받는 민중들의 생생한 모습을,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문학적인 저항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더구나 유불선에 통달하였다고 평가받을 만큼의 지고한 학문을 갖추었던 교산 허균이 자신의 소설 "홍길동전"을 이 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완성했다는 점은 그의 양식과 용기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문학사적인 의미에서는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판서(지금의 장관)의 지위까지 올랐던 정치가 허균이 반란의 수괴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다면 정치적으로는 큰 실패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허균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누님, 난설헌 허초희를 함께 거론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난설헌 허초희의 관향은 양천이고, 자는 경번이다. 그녀가 강원도 강릉의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따님으로 태어난(1563: 명종 9년) 것은 거기에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조부 김광철은 학문이 깊고 풍류를 아는 예조참판이었다. 그는 지금의 강릉시 사천면에 있는 모기재에 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볼 만큼 자연과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먼저 태어난 난설헌이 그랬던 것처럼 교산 허균도 외조부의 무릎에 앉아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을 몸에 익히면서 자랐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자신의 호를 초당이라고 한 것은 장인의 고장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고, 허균이 호를 '교산'이라고 한 것은 외조부의 정자인 애일당이 있는 '모기재'에서 연유된 것이라면 그 고장의 풍광이 수려한 탓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그 고장의 생기와 숨결을 간직하려 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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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은 서평군 한숙창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나,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고 사별하였다. 그러니까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모인 강릉 김씨는 허엽의 재취가 되는 셈이다. 허엽과 김씨 사시에서 태어난 소생으로는 천하의 대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하곡 허봉과 허균 그리고 난설헌의 삼남매가 있다. 이런 연유로 허엽, 허성, 허봉, 허균, 허초희를 일러 당대의 오문장가의 가문이라고 하였다.
난설헌이 태어났을 때, 오라버니 허봉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으므로, 난설헌은 문장가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학문하는 분위기를 몸에 익힐 수가 있었고, 또 오라버니 허봉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는 천재 소녀의 문학적인 자질이 유감없이 개발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허균의 경우는 달랐다.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보낸 허균이 서울의 본가로 돌아왔을 때 참으로 훌륭한 스승과 만날 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달이었다.
이달은 뛰어난 학문과 글재주를 가졌으면서도 계집종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는데, 오직 허엽만이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면서 자신의 집에 드나들게 하였다. 물론 자식들의 학문을 보살피게 할 생각에서였다. 중형인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하였다 하여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불운도 겪었지만, 형기를 마치고 적지에서 돌아온 허봉은 아우인 허균에서 몸소 옛 글을 가르치는 한편, 친우 이달에게는 허균을 위해 이백의 시를 강론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으며, 또 자신과 절친했던 유성룡으로부터는 문장을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스승 이달에게서 당나라 시인들의 낭만적인 시세계를 배우면서 서얼의 뼈아픈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고, 통한과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스승의 모습에서 재주와 능력을 갖추었어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입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해야 하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모순에 격분하게 된다. 교산 허균의 '유재론'은 그렇게 싹트고 익어 갔다.
고금은 멀고도 오래고 천하는 넓으나, 서얼 출신이라고 하여 현자를 버리고, 어미가 개가한 자손이라 하여 재능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질 못했다. 우리 나라만이 그런 자손에게 영영 벼슬길은 막고 있다. 작은 나라, 더구나 양편에 적을 두고서도 반역을 도모할까 봐 그들의 재능을 쓰지 않고, 그들의 경세를 이용할 줄 모른다. 이렇게 스스로 환로를 막고서도 우리 나라엔 인재가 없다고 탄식한다.
허균이 뒷날 서양갑, 심우영 등 여강칠우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후원자가 되는 것도, "홍길동전"을 지어서 적서의 제도를 폐지하고 평등사상을 고양하고자 하였던 것은 모두가 그의 스승 이달의 영향을 받으면서 확립한 '유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허균은 누님 난설헌을 끔찍이도 따랐다. 여덟 살 어린 나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과 같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글을 지어 세인을 놀라게 했던 누님이 출가를 하고 나서부터, 만권 서적을 벗하면서 밤마다 독수공방으로 지새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는 정한으로 가득한 누님의 시가 바람결에라도 실려 오는 날이면 허균은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누님의 시에 심취하곤 하였다.
비단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 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밤에 홀로 앉아' 전문
선경(난설헌의 문학세계이기도 하지만)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던 그녀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절창이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마지막 두 줄^5,5,5^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젓는 것이 불꽃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는 절구는 오직 그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허균은 누님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착잡해 진다. 명문가에 출가하였으나 남편 복은 지지리도 없다. 밤마다 홀로 앉아 만권 서적을 벗하며 환상의 세계를 문장에 담아 본다 한들 어찌 지아비와 함께 하는 사랑만 하랴.
난설헌에게 밀어닥치는 불행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딸과도 사별해야 했다. 뒷동산 언덕 위에 어린 자식들의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 어미의 심정은 고사하고 그 참담한 아픔을 시를 써서 달래는 난설헌의 회한을 무엇이라고 형용해야 되는 것일까.
지난해 사랑하던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던 아들 잃었네.
슬프고도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섰구나.
사시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노라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아! 너희들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놀고 있으리
이제는 또다시 아기를 가진다 해도
어찌 무사하게 키울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곡자' 전문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로 난설헌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재였소 가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명시를 남길 만큼 다정다감했다. 그녀에게 마지막 설움을 안겨다 준 것은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던 오라버니 허봉의 죽음이었다. 난설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과도 같은 큰 좌절을 안겨다 주었다. 난설헌은 비탄에 잠겨 실성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가 스물 여섯 살, 난설헌은 일 년 동안을 통곡으로 지새우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 그렇다. 그녀는 한을 남기고 하곡 오라버니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떠나간 것이다. 꽃 같은 나이 스물 일곱 살에, 1589년 3월 19일의 일이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연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꿈에 노닐던 광상산의 노래' 전문
참으로 놀랍도록 아름답다. 또 환상적이다. 그녀가 꿈속에서 노닐었던 광상산은 물론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산이다. 그 산에 오르면 푸른 바다의 구슬 물이 손에 잡힐 듯하였고, 새 중의 새라고 하는 난새가 현란한 색채를 뿜어 내는 무릉도원이었다. 여기가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 하였던 이상 세계였으니 바로 선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부용삼구타'라고 적은 원시의 구절이다. 물론 '부용'은 연꽃을 말하는 것이지만, '삼구타'는 구구단으로 해석하는 것이기에 '스물 일곱 송이'가 늘어졌다가 다음 구절인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였다로 이어지고 있다면 그 스물 일곱이라는 수는 그녀의 짧은 생애와 같은 27이기에, 이로 미루어 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견을 우리는 선도사상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난설헌 허초희의 죽음을 천주에 삼한을 품고 갔다고들 애석히 여겼다. 첫째는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아닌 조선과 같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셋째는 인품과 시재를 겸비한 두목지와 같은 지아비를 만나지 못했고, 자녀가 없어 모성애를 알지 못하고 간 것을 한했다는 것이다.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시집과 시편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을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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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 허균이 진사시에 합격한 해(1589년), 난설헌은 정한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생애에 종지부를 찍으며 요절하였다. 허균은 누님의 시편들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문장과 시편을 함께 불태워 없애라는 누님의 유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선도사상으로 다듬어진 누님의 시세계라는 사실을 허균은 알고 있었기에 누님의 시가 있다는 곳이면 천릿길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허균은 자신에게 보내졌던 누님의 시편들과 난설헌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한편 한편 모아가기 시작하였고, 더러는 구전되는 것을 받아 적어서 재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모아진 시편이 모두 2백 10편, 허균은 그 시편들을 쓰다듬으며 누님의 환생만큼이나 기뻐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난설헌 허초희의 시편들이 이렇게 모아졌던 탓으로 후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난설헌의 시는 아우 교산에 의해 고쳐진 것'이라고 매도되기도 하였다. 허균은 누님의 시편들을 책으로 엮어서 서애 유성룡에게 보이면서 서문을 청했다. 유성룡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략) 이상하구나. 이건 여자의 글이 아니다. 어떻게 돼서 허씨의 집안에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나는 시학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보는 바에 따라 평한다면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하는 솜씨가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았다(후략).
허균은 누님 난설헌의 시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자칫 사장될 수도 있었던 천재 여류시인의 시편들을 세간에 알렸고, 시를 사랑하는 사대부들은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절절하게 전달되는 정한의 미학과 선도사상의 깊이에 탄성을 토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의 여류문학이 기방이나 그 주변에서만 생성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내당에도 실재하고 있었음이 비로소 입증된 셈이었다. 허균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난설헌의 시를 조선보다 땅덩이가 더 크고 넓으며, 수준 높은 문학이 실재하는 중국에 알림으로써 누님의 시적인 천재성을 이백이나 두보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었다. 난설헌 허초희의 시집이 간행된 때로부터 9년 뒤인 1598년에 이르러서야 허균은 중국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주지번에게 "난설헌집"을 보여 줄 수가 있었다.
주지번의 감동과 경탄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허균은 누님 난설헌의 시세계를 중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뜻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협력을 요청하였다. 주지번은 허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난설헌집"은 중국에서 간행되어 조선 여류시의 진수를 뽐낼 수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난설헌집"은 다시 일본에서까지 발간되어 널리 읽히게 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동양 삼국에서 으뜸가는 여류시인으로 칭송받게 하였다. 모두가 누님 난설헌을 아끼고 따르면서 그녀의 선도사상을 흠모하였던 교산 허균의 눈물 겨운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
교산 허균의 문학적인 인생은 나무랄 데 없이 빛나는 것이었지만, 관직에 입사하여 그 직이 높아지는데 비례하여 그의 행적은 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주자학을 학문과 행실의 근간으로 삼는 유학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되, 그로 인한 고질적인 제도와 관행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따라서 개혁적인 차원에서의 참여의식을 분출한 때가 많았다. 허균의 '호민론'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대체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인식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을 항민이라 한다. 이들은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다. 다음은 살이 닳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모은 재산을 착취당하고 혼자 우는 백성들이 있다. 이들은 위정자를 원망하는 백성, 즉 원민이라 한다. 이들은 그렇게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다음으로 호민이다. 이들은 잘못되어 가는 세상일에 불만을 품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잠적한다. 이들이 몸을 감추는 것은 잘못된 세상을 자기 손으로 바로 잡을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다. 이들이 무서운 존재들이다. 이들이 주먹을 흔들며 개혁의 뜻을 외쳐 대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 모여든다. 이렇게 되면 수종하던 항민들도 호응한다.
이른바 민초들의 저항의식을 자극하고 예견할 수 있는 '호민론'은 "홍길동전"의 주제의식으로 구체화되면서 허균의 삶을 관통하게 된다. 허균은 유학의 나라에서 태어나 주자학을 익혀서 관직에 등용되었고, 판서의 반열에 오를 만큼 학문에 통달했으면서도 제도의 모순점에 대해서는 개혁의지를 날 세웠던 진보적인 사상가였고, 배불숭유하는 나라의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불경에 통달하여 퇴청 후에는 먹장삼을 걸치고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하여 간관들의 탄핵을 받은 바 있었으며, 강원도 삼척부사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여서는 기생들과의 스캔들이 문제되어, 또 부처를 섬겼다는 비방이 추가되어 임지에 도착한 지 13일 만에 파직되는 등 그의 행적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허균을 말할 때 유, 불, 선에 통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교산 허균은 47세가 되던 해(1616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다섯 달만에 파직된다. 그의 파격적인 행적으로 미룬다면 파직은 예정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겠지만, 다시 1년 뒤에 좌참찬으로 발탁되는 것은 기적적인 그의 회생이라기보다는 광해조 말기의 난정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허균은 누님 난설헌처럼 자신에게 닥쳐오는 비극적인 종말을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이미 4년 전에 자신의 문집을 완벽하게 정리한 다음, 절필을 밝히고 있다.
마흔세 살 되도록 글이나 짓는다고,
천금을 널리 털어 애쓰며 버티었네.
시와 문장 열 권을 방금 옮겨 쓰길 마쳤으니,
오늘부턴 이 몸이 다시는 시를 짓지 않으리
'문집을 다 엮고 나서' 전문
급기야 정치가 허균에게 비극적인 종말이 밀어닥친다. 허균의 애제자인 예조좌랑 기준격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허균의 반정계획을 고발하는 비밀상소를 두 번에 걸쳐 올린 것이었다. "광해군일기" 9년 12월 24일 조에, 성공한 문학인이자 행동하는 양식이었던 교산 허균의 비극적인 종말을 예고하는 기준격의 상소가 실려 있다.
비밀상소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이 다소 께름칙하지만, 여기에 그 비밀상소의 전문과 형이 집행되기까지의 과정을 옮겨 놓는 것은 교산 허균이 '폐모론'에 연루되어 사형이 되었다는 등, 그에 대한 마지막 정리가 대단히 애매하고 미흡한데서 오는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를 불식하기 위한 고충임을 헤아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삼가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역변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역적의 뿌리는 실로 허균인데 그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신은 몹시 분통합니다. 지금 허균이 역적 의를 세워서 서궁을 끼고 정사를 보게 하려 한 진상을 일일이 진달하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전하께서는 아마 죄인을 알게 될 것이고 종묘 사직도 공고해질 것입니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신의 아비의 안부를 묻고 이어 말하기를, "의창은 선왕이 아끼던 자식이었으므로 매번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너의 아비의 저지로 옹립할 수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마 의가 출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옹립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또 신해년 겨울에 신의 아비가 역시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연흥이 나로 하여금 정세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윤수겸에게 청혼해 달라고 하였다. 연흥은 수겸이 일찍이 도감의 군사들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에 혼사를 맺고서 큰일을 시행하여 시체 두 구를 끌어내고 대군을 세워서 대비로 하여금 정사를 대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뼈가 저리고 가슴이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두 시체는 누구를 말하느냐고 천천히 물었더니, "임금과 동궁이다. 오늘 내가 연흥과 함께 가서 윤수겸을 만나 보고 청혼을 했다. 윤수겸이 비록 싫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윤이 뭐라고 하던가?" 하니, 들어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허균이 또 말하기를, "연흥을 통하여 궁중의 사실을 얻어 듣건대 임금에게는 이러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지금 연흥에게 지휘 받고 있지만 일이 성사된 뒤에는 내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무력을 행사하여 연흥도 함께 죽임으로써 나의 권력을 가장 크게 만들고 대비를 끼고 온 나라를 호령하여 다른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책이다. 그리고 상에게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황제에게 모두 진달할 것이다. 그리고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폐지하고 적자인 의를 세웠다고 한다면 은을 1만여 냥까지 쓰지 않아도 일은 순조롭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권력을 잡는 것은 좋지만 심가 집에서는 그대의 집을 원망하고 있으니 심가가 뜻을 이루게 되면 그대의 집은 크게 패망하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때 신이 그의 표정을 보니 의기양양하여 곁에 있는 사람은 안중에 없는 듯이 행동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상소하려 하였으나 그 당시 온 조정이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막론하고 모두 신의 집을 미워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혹시 신을 위협하고 죄를 뒤집어씌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백방으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 혼사를 중지시키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사약 조희형을 불러서 이르기를, "듣건대 심가와 윤가 사이에 혼사말이 있다고 한다. 그대는 윤가와 서로 알고 있으니 꼭 나를 위하여 윤가에게 말하기를 '아무리 김가와 허가가 정세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권하더라도 따르지 말아야 한다. 허가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간사한 사람이니 만약 그의 말을 따른 뒤에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라." 하였습니다.
그후 며칠이 지나자 희형이 돌아와 말하기를, "윤가는 생원님의 분부에 따라 혼사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수겸은 즉시 신과 절친한 사람인 송구를 청하여 손을 잡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김가와 허가가 와서 혼사 문제를 말하여 내 몹시 민망스러웠다. 만약 기생원이 혼사를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꼭 기모에게 달려가 만나 보고 혼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주고 고맙다고 해달라." 하였다 합니다. 그 당시 심가와 김가는 신을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허균이 윤수겸에게 혼사를 권한 전말이 명백하게 드러났고, 수겸, 희형, 송구가 다 살아 있으므로 속일 수가 없는 일입니다. 수겸이 신의 덕을 입어 혼사를 하지 않았지만 만약 혼사를 하였더라면 어찌 균에게 나쁜 영향을 받아 나라에 화를 끼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용렬하지만 속으로는 노중련과 이병길의 높은 의리를 본받아 혼란된 것을 배제하고 큰 화변이 확대되기 전에 방지하고서도 감히 공로를 말하지 않았으니, 신을 일러 화단 사전에 방지하였다고 말하더라도 옮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균은 역적의 주모자입니다.
대개 허균은 선왕을 해치려고 음모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공주목사로 있다가 파면 당하고 부안으로 돌아갔을 때 그 고을 수령은 바로 광세였는데, 균은 그와 함께 의를 세우고 권세를 잡을 것을 음모하였습니다. 또 경술년에는 죄를 받고 옥에 갇혔으며, 신해는 정월에는 귀양갔으며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는 균의 집이 광세와 문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상종하면서 감히 역적 음모를 하였습니다. 허균의 성질이 경박하고 또 망령되기 때문에 신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소진은 제 나라에 있으면서도 연 나라를 위하여 제 나라를 쇠퇴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허균은 김제남과 공모하면서 서울을 옮기자는 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참서의 본문에 없는 말을 더 써넣어 '첫째는 한, 둘째는 하, 셋째는 강, 넷째는 해이다'고 하였는데, 하라고 한 것은 교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인심을 원망하고 소란하게 한 다음 이어서 손을 쓰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허균이 공주목사 시절에 영을 셋이나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식객인 심우영, 윤계영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우영은 균의 처갓집 친족으로서 서로 친밀하기가 한몸과 같았다는 것은 온 나라에서 다 아는 바입니다. 허균이 일찍이 시문을 지어 우영에게 주기를 '나의 벗 심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고 우영의 시도 그 안에 뽑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계축년 뒤로 허균은 말하기를, "나는 복이 있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우영에게 준 시를 모두 가지고 와서 나의 문집 속에다 넣으려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터져서 나만 화를 면하였다." 하였습니다.
심우영과 서양갑은 모두 허균이 친히 기른 자들입니다. 균이 양갑의 자를 석선이라고 지어 주었으니 그것은 전설 속의 신선 황초평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킨 일에서 뜻을 취한 것입니다. 허균이 매번 하는 말이 '오늘날 영웅은 내가 본 바로 는 서석선뿐이다' 하였는데, 허균이 법망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축년에 허균이 태인에서 올라온 후에 말하기를, "옥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신경이 쓰여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데, 죄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오던 길에 선전관을 만나자 혼이 떨어져 나갔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을 그냥 지나가자 매우 기뻤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역적의 격문은 내가 지었지만 내가 우영으로 하여금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끝내 죄를 면할 수 있었는데,
허실은 어떻게 내가 지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단 말인가. 매우 잘못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경술, 신해년 간에 이르기를 '상이 법궁으로 이어하지 않으면 법궁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게 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묻기를 '이른바 주인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천시와 인사를 놓고 볼 때 대군이 마침내 주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계축년 전에는 허균이 스스로 말하기를 '의가 성사만 되면 원훈을 바로 이루게 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매번 말하기를, "이이첨의 집에 머리가 큰 뱀이 있는데 최영경과 김직재의 귀신이라고 한다. 그러니 얼마 후에 망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변란이 발생하여 몸둘 곳이 없게 되자 결국 이이첨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신이 계축년 가을 무렵 그에게 묻기를 '전에는 어찌 대비로 하여금 의를 왕위에 앉혀 놓고 수렴청정하게 하겠다고 해놓고 오늘날은 그를 폐위시키겠다고 하는가?' 하니, 허균이 대답하기를, "너는 나이가 어리니 무엇을 알겠는가. 말로를 걷는 사람은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다가 과녁을 세워야 세상을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마 허균의 성품이 경솔하지 않았다면 신은 필시 허균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마음도 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방자한 말을 함부로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그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신의 집안이, 그의 전일에 임금을 모해한 사실과 서궁을 부추겨 의를 세우려 했던 사실과 심가와 윤가의 혼사를 의논한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싫어하여 기필코 우리 식구를 다 죽이고자 기회를 틈타 모함을 하기에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신은 허균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인데, 알면서도 일찍이 진달하지 않은 죄는 마땅히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허균의 죄는 그 진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신의 아비의 차자는 시대 상황을 알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므로 그저 그릇된 일인 줄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남곤이 광국의 공훈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록 허균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어서 변무하는 일을 감당할 것이며, 대론의 경우는 삼사와 우의정, 동벽과 서벽의 다른 관리들이 응당 수일 안에 처리할 것이므로 허균과 같은 역적이 간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담당하면서 뒤로 물리고 또 물려 고의로 지연시키면서 오로지 신의 아비를 무함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적인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허균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천지간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게 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허균이 말하기를, "정협이 자복하는 날에 이원형이 먼 곳으로부터 손을 흔들며 오기에 내심 그의 공초에서 말이 나올까 우려했는데 도착한 후에 문초하였으나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겨우 모면하였다." 하였습니다. 균이 또 말하기를, "내가 만약 정권을 잡고 대비가 청정을 하게 된다면 내가 심이기가 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원상이 되어 온 나라의 일을 결정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렇듯 무뢰하고 패려스러운데다 흉악하기까지 한 허균의 죄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지금은 대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허균과 같은 역적의 도움이 없더라고 일을 변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을 모해하고 의창을 세우려 한 죄와 의를 내세워 서궁으로 하여금 수렴청정하게 하려 한 허균의 죄를 다스리소서.
기준격이 올린 비밀상소문의 전문이지만, 역모를 꾀했다는 확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산만한 내용과 허술한 진술로 일관하고 있다. 또 역모를 고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처리되는 과정이 애매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이 상소문에 담긴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역모를 고변한 상소문이라면 지체없이 관련자를 잡아들여서 사실의 확인을 서둘러야 하는데도, 몇 달 동안이나 방치하여 두었다는 사실이 같은 날짜의 실록에 '해설기사'로 등재되어 있음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상소를 오랫동안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가 무오년 윤4월 14일에 추국청에 계하하였다. 당신에 기자헌은 강가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준격이 이 상소를 올려 그의 아비를 구하였다. 허균의 세력도 이때부터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조정의 반응이 신통치 아니하자, 기준격은 이틀 뒤인 26일에 다시 비밀상소를 올려 허균의 반역모의를 고변하였지만 그 내용도 먼저 올린 비밀상소문과 대동소이할 뿐 더 새롭고 구체적인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과정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대목은 교산 허균이 기준격의 상소를 반박하는 비밀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문이 분실되어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실록이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을 고려한다면 교산 허균의 상소문은 누군가에 의해 파기되지 않고는 분실될 수가 없고, 또 분실되어서도 아니되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무고하였거나 모함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1617년 12월 26일자의 "광해군일기"는 우참찬 허균이 비밀리에 상소문을 올렸으나 그 내용이 유실되었음을 적었고, 다시 1618년 윤 4월 7일자에는 궁색하게도 허균이 올린 비밀상소문의 '대체적인 내용을 요약해서 등재' 한다는 애매모호한 기사까지 있고 보면 교산 허균에 대한 국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삼가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곽영의 상소에 신의 이름과 경준의 흉격 등의 말이 있습니다. 이에는 명확한 말의 출처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 곽영과 함께 궐정에서 신문을 받아 그 출처를 끝까지 캐내어 허실을 밝힘으로써 모함 당한 신의 원통함을 씻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물론 허균의 반대상소는 채택되지 않았고, 조정은 그를 국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모의 확증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이 사건을 의심하고 해괴이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형편이었고, 교산 허균의 자복을 받아 내지 못한 채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게 되었다. 물론 허균의 확실한 자복이 있을 때까지 국문을 계속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이같이 황망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관들은 '해설기사'를 써서 이 사건의 애매함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하인준과 황정필이 대체로 공초에 자복하였으나 또한 서로 미루고 핑계 대어 옥사의 실정을 다 캐내지 못했는데 국청이 급급히 허균을 아울러 죽이고자 계청하였으니, 이는 대게 이이첨이 옥사를 완결 짓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형을 받은 사람들은 불과 한두 차례의 형신에 잇따라 죽어 나갔으니 그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상황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광해군은 정승들과 의금부의 당상들을 거느리고 친국에 임했다. 잡혀 온 사람들은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문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혹독한 매질 속에서 작성된 현웅민의 공초는 음미해 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후의 흉서는 모두 신이 한 짓으로 허균은 모르는 일입니다. 단지 신만을 정형하소서. 허균이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친국이 더 길어지면 허균이 입을 열지도 모른다. 그가 입을 열어서 '서궁을 핍박한 일' 등을 거론한다면, 폐모의 난정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초에 적혀야 하지를 않겠는가.
이를 두려워한 이이첨 등은 서둘러 정형하기를 목청 높이 주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광해군이 이를 가납함으로써 친국을 끝내게 되었다. 교산 허균은 결안에 승복하지 않은 채 광해군 10년 8월 24일에 이르러 서쪽 저잣거리로 끌려 나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진실로 파란 많았던 인생을 마감하는 허균다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교산 허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헌은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허균을 역모의 괴수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기준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기자헌의 탄식에는 조선 선비의 양식이 담겨져 있었고, 또 "왕조실록"은 그것을 적어서 후세에 전하고 있음에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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