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우리 육신이 숨이 끊어져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하세요?
▷ 그 문제에 대해서 가끔 의문을 가져 보았지만 아직 그럴싸한 답을 찾지는 못했소.
▶ 만약 삶이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제 이야기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도 곰곰 생각해 보세요. 여기 한 방울의 물이 있다고 합시다. 시간이 지나면 물은 저절로 말라 없어지지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물이 없어졌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이 물은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간 것이랍니다. 이렇게 증발한 물은 구름이 되어 머물렀다가 비가 되어 다시 내리죠.
이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치를, 인간의 육안으로 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이해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은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돌고 돕니다.
▷ 그럼 불가에서 주장하는 윤회설이 정말이란 말이오?
▶ 그 이야기를 지금 다 하자면 복잡합니다. 선업을 쌓으면 선계에 나고 악업을 쌓으면 지옥고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일 뿐이고 선과 악의 구분도 참으로 애매합니다. 어쨌거나 사람의 한살이는 늙어 숨 끊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죽음이란 것은 이번 생에 입었던 육신의 옷을 벗는 것이지 영혼 그 자체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랍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얼로 어머니의 알에 오게 되는 것이지요. 설마라고 말씀하시고 싶겠지만 부모 뜻대로 자식을 만들 수는 없답니다.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 마음대로 아기가 나오던가요? 이렇게 영계로 한 번 갔다 되돌아오는 시간은 약 500년이 걸린답니다. 물론 달관하기 전에는 자신이 전생에서 누구였다는 것을 알 수가 없죠. 그러나 역사를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큰 사상들은 대체로 500년을 주기로 파동을 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2000년 전에 석가와 공자가 있었다면 1500년 전에는 야소교가, 그리고 15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율곡과 퇴계, 서화담, 토정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잖아요.
▷ 글쎄.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로구만.
▶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을 알면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랄 때가 있을 거예요.
▷ 그럼 반야는 우주의 비밀을 다 풀었다는 말이오?
▶ 어렴풋이...
▷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지 말고 이야기를 확실하게 해주시오.
▶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밤하늘에 별이 떠서 칠성별이 반짝이면 숨김없이 다 말씀드리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축축히 젖어 나오고 있었다.
▷ 아니, 반야. 지금 울고 있잖소?
▶ 괘념치 마세요. 철이 들고, 그것도 남자 앞에서는 처음 흘려보는 눈물인걸요.
그 아픈 기억을 세삼 되살리기가 무엇합니다만 제가 살던 별에서 죄를 얻어 귀양을 간 곳이 평생 한숨으로 베를 짜야 하는 직녀성이었어요. 서방님이 귀양 와 살던 견우성 바로 옆의...
▷ 아니, 그럼 나도 하늘 사람이었단 말이오?
▶ ...
▷ 울지만 말고 대답을 해보시오, 반야.
▶ 서방님과 저는 원래 같은 별에 살던 남매였답니다. 제가 누이, 서방님은 동생... 그런데 우리는 사랑에 눈이 멀어 천도 복숭아를 훔쳐 먹은 죄로 각각 다른 별로 귀양을 가게 되었어요.
▷ 정말 꿈같은 소리로군.
▶ 제가 꾸며서 하는 소리라 생각해도 상관이 없어요. 서방님은 전혀 기억 나지 않는 일일 테니까요. 그리고 벌써 수만 년 전의 일이니까요.
▷ 수만 년 전의 일이라고?
▶ 수천 년 전의 일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겠지요. 하여튼 선천시대로 접어들면서 하늘 나라에서는 대사면령이 내려졌습니다. 아름답게 빛나는 초록별 지구로 떠날 사람을 대거 선발한 거죠.
▷ 반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 글쎄요. 어쨌든 서방님은 당분간 잠자코 듣기나 하세요. 우리가 살던 별나라. 참 좋은 곳이지요. 고통도 질병도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마찰이 없으면 바퀴가 굴러갈 수 없든 하늘 나라에서만 영원히 머물러 있으면 완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없답니다. 아니 성장이야 하겠지만 지구에 비하면 엄청난 세월이 필요하죠. 억센 숫돌에 칼날을 세우기가 쉽듯 빠른 시간 안에 자기 완성을 이루자면 은하계 가운데서도 가장 고통 많은 지구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 당신의 그 성격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시군요. 첫 새벽이면 남자가 대문 빗장을 열어야 하듯이 당신은 후천의 문을 열어야 할 사람.
▷ 후천의 문은 또 뭐요?
▶ 한 시대의 상징이랍니다.
▷ 시대의 상징?
▶그렇습니다. 짧은 시간에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만 칠성별에서 온 우리들에게는 생각만으로도 모든 것을 해결하던 상념시대가 있었으며, 육신을 지닌 유체시대가 있었고, 물질에 눈을 뜬 물질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물고기좌로 접어든 1500년 전부터는 선천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 선천시대는 또 무어요?
▶모든 가치관이 거꾸로 통용되는 시대를 말합니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원래 한 조상, 한 뿌리의 자손들인데 네 나라 내 나라가 어디에 있다고 신라, 고구려, 백제로 갈라져 형제끼리 죽이고 죽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다가 기어코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했지요. 그러나 손바닥만한 땅덩이를 통일했다고 우쭐대었을지 몰라도 정신은 사대주의에 물들어 스스로 당나라의 종임을 자처하지 않았던가요? 후삼국도 마찬가지, 고려가 왜 그렇게 끊임없는 외침을 당했을까요?
▷ 반야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군.
▶ 제 말씀을 이해해 주시다니 고마워요. 고려는 한민족의 맥을 이었지만 불도 때문에 나라가 망했어요. 힘으로 일어선 조선은 어땠나요?
지금까지 피의 회오리가 그칠 날이 없죠? 문무는 어느 것이 먼저랄 수는 없지만 변경에서 나라를 지켜야 할 칼 찬 병사들이 호시탐탐 권력을 넘보고, 목민관이 되어야 할 문관은 매관매직에 백성들 고혈을 빨 궁리나 해대고...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사람이 어떻게 차별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선비를 가장 위에 놓고 상민을 천하게 보며,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고리백정이나 소백정은 아예 사람 취급
도 하지 않으니 항차 후천시대가 밝아올 500년 도안 이런 병폐는 극을 이룰 거예요.
▷ 그것을 막을 수는 없소?
▶ 없지요. 겨울이 지나가야 봄이 오듯 선천시대 말기로 접어드는 항차 500년 세월이 가장 큰 걱정입니다.
▷ 그럼 반야가 말하는 후천시대가 밝아오면 어떻게 되는 거요?
▶ 사람들은 겨우 짐승 수준을 면합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합니다. 이것은 짐승들의 생리지요. 제 것만 알고 남의 것을 모르며 모을 줄만 알고 쓸 줄은 모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은 모르며, 자기가 하는 것은 옳고 남이 하는 것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승의 습성입니다. 후천시대가 와야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겨우 인식하게 되며, 나눔과 화해와 아낌과 용서,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조금씩 체험하게 되죠. 그 선구자 역할을 서방님이 해야 합니다.
▷ 내가 과연 그런 거창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도 의문이지만 하필이면 왜 나요?
▶ 불평, 불만은 소용이 없습니다. 광대 놀음을 보세요. 자기 맡은 역할이 옴중이면 옴중 행세를 해야 하는 겁니다.
▷ 그럼 반야는?
▶제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첫 새벽에 대문을 여는 것이 남자가 할 일이라면 불씨를 살려놓고 물동이를 이고 나가는 것은 아낙네의 몫입니다.
▷ 반야.
▶ 예?
▷ 나는 원래 새벽잠이 많은 편이니, 좀 귀찮겠지만 반야가 후천시대의 대문을 열고 물동이를 이고 나서면 안 되겠소?
▶ 농담을 하실 여유까지 생기신 것 보니 저의 마음 든든합니다. 제 욕심 같아서는 선천시대에 여성들이 죽자고 고생을 했으니 서방님 어깨에 물 지게까지 지워 내보내고 싶습니다만...
▷ 참, 나하고는 그렇다 치고 격암하고는 대체 어떤 인연이오.
▶ 그분은 전생에 나의 스승으로...그는 제 몸을 범한 죄로 저보다 일찍 인간 세상으로 귀양온 분이에요. 그는 예언자로 살라는 명을 부여 받았죠.
▷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 아직은 몰라요. 그러나 언젠가 귀띔은 해주고 가야지요.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그분은 다음 생에 문필가로 다시 오게 될 거예요.
▷ 문필가?
▶ 예. 문필가로 와서 왜곡되고 숨겨진 역사를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세상 모든 것은 유형과 무형으로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 하늘에는 음양을 대표하는 일월이 있고, 땅에는 밝음과 어둠이 있듯이 역사에도 음양이 있어요.
▷ 그건 또 처음 들어보는 소리인걸.
▶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닙니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드러난 양이라면 발해는 숨은 음, 신라가 양이라면 가야는 음, 백제가 양이라면 서백제는 음에 해당하지요.
▷ 발해, 가야 이야기는 알겠는데 서백제 이야기는...
▶ 그럴 거예요. 서백제는 중국 양자강 일대에 있었지요. 아니, 오늘날의 중국이라 해야지요.
▷ 우리의 영토가 그렇게 넓었소?
▶ 그 이야기는 지금 당장 않겠어요. 아, 별이 돋아 오는군요. 이제 절 좀 안아 주세요. 꼬옥...
▶ 서방님...
▷ 왜 그러시오?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 보시오. 이제 우리 사이에 흠이 될 것이 뭐가 있소?
▶ 제 명상을 방해하지 말고 서방님도 옆에 누워 보세요.
▷ 자, 이렇게 누웠소.
▶ 누우셨으면 아주 정한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 조금 전에 반야가 견우성이니, 직녀성이니, 우리는 칠성별에서 왔느니 온통 별이야기를 들려주던 기억이 새롭소. 저 밤하늘에 무수하게 빛나는 별들이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단 말이오?
▶ 서방님도 북극성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으시겠죠?
▷ 물론.
▶ 그 북극성을 싸고 도는 작은 국자처럼 생긴 일곱 개의 별이 보이죠?
▷ 그건 북두칠성 아니오.
▶ 우리 민족들은 그 별 어디에선가 온 사람들이에요.
▷ 반야.
▶ 예?
▷ 반야는 별자리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 같은데 우리 인간들이 별에서 왔다니, 그것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오?
▶ 그럼 서방님은 어디서 왔습니까?
▷ ...
▶ 왜 대답을 못 하시죠? 그럼 죽어서는 어디로 갈 것 같아요?
▷ 부끄럽지만 두 가지 다 모르겠소.
▶ 그럼 제 말이 틀린 것이든 맞는 것이든 잠자코 들어주실 수 있겠어요?
▷ 물론이오. 내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 제가 아득한 옛날 우리 조상들의 영혼이 저 은하계에서 영적 진화를 위해 가장 고통 많은 별, 지구로 왔다는 말씀을 드렸죠?
▷ 그렇다고 해둡시다.
▶ 그런 어정쩡한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듣기 싫으시면 관두세요.
▷ 아니, 아니, 내 말 뜻은 그게 아니라...
▶ 제가 아무리 입 아프게 이야기를 해드려도 서방님이 한 귀로 흘려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자, 자, 내가 잘못했소. 이젠 절대 방해하지 않을 테니 차근차근 별 이야기를 들려주시구랴.
▶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들어주세요.
▷ 그렇게 하겠소, 반야.
▶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제가 조금 전에 아득한 옛날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6만 년 전 쯤의 일이에요.
▷ 6만 년 전?
▶ 예. 6천 년 전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은하계의 별들 중에서도 우리 민족들이 가장 먼저 지구를 찾아왔어요. 4만 2천 년 전에는 또 다른 여러 별무리 가운데에서 영혼들이 날아와 저마다 독특한 인종과 문명을 이루었고, 1만 년 전에는 성단에서 많은 영체인들이 이주를 해왔는데, 우리 선조이신 환인님들은 지금은 바다 및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없는 무우 대륙에 첫 발을 내디뎠죠. 그리고는 드넓은 땅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신적인 생활을 영위하다가 그 대륙이 곧 침몰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북쪽의 넓은 호수(바이칼 호)를 기점으로 해서 지금 명나라 땅이라든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았지요. 그러나 그때의 삶은 죽음의 상태를 초월한 영적인 삶을 누렸죠.
▷ 그런 일이 과연 가능했소?
▶ 가능하지요.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하나된 착하디착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무엇을 더 차지하려는 욕심도 없었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다 보니 모나고 거칠 것이 없었지요.
▷ 반야, 잠깐만...
▶ 왜 그러세요?
▷ 반야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소? 아니면 그런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 명상을 통해 알았지요. 명상을 오래 하다 보면 시공을 초월하는 그런 경계가 열립니다.
▷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이오?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냥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가가면 돼요.
▷ 그게 아니라 반야의 이야기가 너무 엄청나서...
▶ 수만 년의 시간에 묻힌 역사를 말하자니 엄청날 수밖에요.
▷ 좌우지간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시오.
▶ 예. 우리가 이 지구를 찾아오고 난 수천 년 뒤에 또 다른 별에서도 많은 무리들이 지구로 이주를 해왔습니다. 이들은 사람과 비슷한 육체를 지니고 왔기 때문에 곰족, 여우족, 너구리족 등 자기 종족 고유의 형상을 하고 지구에 안착을 했는데, 이들의 씨족이 점점 늘어나자 골치 아픈 일이 서서히 생기게 되었습니다.
▷ 골치 아픈 일이라니?
▶ 그들은 사람 행색을 했으되 아직 동물의 습성이 남아있어서 살인과 방화, 강간과 전쟁 등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평화롭던 지구는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영적인 삶을 영위하던 우리 조상들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의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 수준을 낮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이오?
▶ 쉽게 설명하면 어린아이 어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봬면서 우는 아이에게 불경을 들려준들 효과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삼강 오륜을 설하겠습니까? 오직 어린아이 수준에 맞추어 도리도리 까궁, 이렇게 달래는 수뿐입니다.
▷ 반야의 설명을 듣고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오. 그래서는?
▶ 짐승을 가두자면 우리가 필요하듯이 환웅대성존께서는 태백산(중국의 감숙성)에다 나라를 열었습니다. 신시 개천시대를 열기 전에 이미 12개의 소국가가 형성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때까지는 영체의 시대였습니다. 법과 채찍으로 백성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로 백성들을 보다듬었지요. 신시 개천시대를 지나 단군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유체의 시대로 부르는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8조 금법만으로 얼마든지 백성을 다스릴 수 있었으며, 역대 단군의 머리 뒤에는 휘황찬란한 광배가 항상 빛나고 있어서 나쁜 무리들은 저절로 항복할 정도였습니다.
▷ 꿈 같지만 전혀 맹랑한 소리로는 들리지 않는군.
▶ 그 당시에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남자 단군뿐만 아니라 여자 선군이 있어서 단군은 바깥일을, 그리고 선군은 안의 일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근본을 잊어버린 오가(뱀족, 범족, 너구리족 등)들이 오만 가지 추악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단군과 선군은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삼일신고와 참전계경 같은 책을 만들어 백성들 교화 행도에 힘쓰는 한편,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 나쁜 사람들은 먼 섬으로 추방을 시켰는데, 그 귀양을 간 무리들이 오늘날 왜국의 조상인 셈이지요.
▶ 명나라의 시조라고 받드는 태호 복희씨도 태우 환웅(기원전 3512)의 자손으로 중원으로 건너가 곰족과 범족의 시조가 되어 부족을 형성했고, 오제(소호, 전욱, 제곡, 요, 순) 또한 우리 한인과의 혼혈아들이었습니다.
▷ 그건 쉽게 믿어지지 않는데?
▶ 그러니까 제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세요. 갈고 환웅(기원전 3071)께서는 흑해 근방에 흩어져 사는 종족들을 통합해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었죠. 이렇게 환웅 18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 조상들은 미개한 종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주고 선군(여자 단군)들은 길쌈하는 법과 베 짜기, 장 담그기 등을 가르쳤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기기 시작해 단군 왕검께서는 이들 무리를 모아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기원전 2453). 밝다를 뜻하는 조선이란 국호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천지만물 간에는 반드시 음과 양, 그리고 중이 있어
조화를 이룬다고 했으니 천지인 삼수리에 맞추어 삼조선을 세우게 되었는데 진한, 마한, 변한이 바로 그것입니다.
▷ 거참,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 그러실 겁니다. 좌우지간 선군의 시대에 광활한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기가 불편해서 삼조선을 다시 각각 셋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곧 구한(북부여, 부여, 북옥저, 남옥저, 숙신, 낙랑, 청구, 남국, 고구려)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의 선군들은 모두 깊은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이셨기 때문에 법이란 것이 특별히 필요 없었고, 울타리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남자 단군들이 치세를 할 동안 여자 선군들은 아녀자들이 지켜야 할 바를 교육시켰죠.
▷ 정말 그렇소?
▶ 예. 이때만 하여도 우리 선조들은 남녀의 차별 없이 저마다 맡은 직분에 충실했는데 깨우친 존재들이 하늘 나라로 다시 가버리자 그만 균형이 깨어져 물리적으로 힘이 센 남자들이 무력으로 나라를 세워 통치하기 시작했고, 그 남성들의 횡포를 막아보자고 밀라(기원전 2360) 여선군은 설화국이라는 여인 왕국을 건설해 여자들의 심신을 단련케 하셨으니 이것이 신라 화랑의 모태가 된 것이지요.
▷ 그 뒤는?
▶ 한마디로 여인들의 한과 눈물로 얼룩진 역사가 펼쳐집니다. 서로 한 형제인 줄 모르고 죽이고 죽는 악순환을 거듭해 왔을 뿐 아니라 힘이 약한 여인들은 남자의 노리개가 되어 짐승처럼 일을 해주고, 얻어맞으며 남성에 대한 증오의 칼을 갈았죠. 그 뒤 세월이 흘러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 넘어오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집니다. 고구려는 힘의 상징, 백제는 예술의 상징, 신라는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 거참, 듣고 보니 전혀 맹랑한 소리만은 아닌 것 같군.
▶ 흘러가 버린 역사를 두고 누군들 자신 있게 다가올 세월을 점칠 수 있겠습니까만 음의 역사, 다시 말해서 신비의 너울을 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발해, 서백제, 가야의 역사가 제대로 밝아지는 날이 후천 개벽 시대가 열리는 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그 세월이 대강 언제쯤 되겠소?
▶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강 500년쯤 뒤가 될 겁니다.
▷ 반야.
▶ 말씀해 보세요.
▷ 반야는 어떻게 지난 일과 앞으로 다가올 세월까지 예지할 수 있소?
▶ 역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 역을 알다니?
▶ 삼라 만상은 모두 돌게 되어있습니다. 돈다는 것은 원시반본을 뜻하지요. 하루살이가 아닌 다음에는 오늘 아침에 떴던 해가 내일 아침에 다시 뜰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루의 역이라 부르지요. 보름달이 이지러졌다가 다시 뜨는 것은 한 달의 역이고 춘하추동이 바뀌는 것은 1년의 역이라고 대강 이렇게 설명드릴 수가 있는데, 천년 만년 살 수 없는 인간들이다 보니 대부분 1년 역 정도밖에 모르지요. 그러나 역사는 순환하다고 했습니다. 10년 주기, 20년 주기로 바뀌는 역이 또 있지만 사람들은 500년 주기의 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어요.
▷ 반야 말마따나 100년을 못다 사는 인간인데 어떻게 500년 전의 일을 알며, 또 500년 뒤에 올 세월을 점칠 수 있단 말이오?
▶ 그것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 간단하다니?
▶ 밤하늘의 별들이 증거가 되어주니까요.
▷ 해와 달도 아닌 별이?
▶ 예. 태양을 중심으로 12성좌가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1년 안에 열두 달이 있으며, 예를 들어 물병좌가 태양을 완전히 한 바퀴 도는 데는 2천년이 걸리게 됩니다.
▷ 그럼 지금은 무슨 별자리가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소?
▶ 수어좌입니다.
▷ 수어좌?
▶ 예. 물고기좌라고 생각하면 한결 이해가 빠를 줄 압니다. 물고기좌는 앞으로 500년 뒤 물병좌에게 그 자리를 넘겨 주고 자기의 길을 가게 될 거예요.
▷ 까막눈으로 어떻게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소?
▶ 하늘의 별을 모려면 상당히 많은 훈련을 해야 합니다.
▷ 별 보는 훈련은 어떻게 하는 거요.
▶ 처음부터 무리를 하면 한 돼요. 자칫하다가는 고개를 못 쓰게 되는 수가 있으니까. 처음에는 가장 눈에 잘 띄는 별자리부터 익히는 것이 좋을 겁니다. 북극성과 북두칠성, 즉 칠성별 자리는 아신다고 하셨죠.
▷ 물론...
▶ 북두칠성은 달리 큰곰 자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북극성에서 가까운 바가지는 작은곰 자리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두 별자리 사이에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지요.
▷ 어떤?
▶ 큰곰 자리부터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북두칠성을 똥바가지라는 지저분한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관을 메고 가는 낭자들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겁니다.
▷ 관을 메고 가는 낭자?
▶ 예. 국자 손잡이 가장 끝에 있는 별의 이름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 글쎄...
▶ 파군성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어요.
▷ 파군성이라?
▶ 예. 조조, 유현덕이 나오는 삼국지 이야기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제갈공명이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일곱 자루의 촛불을 켜두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답니다. 주문을 외우고 난 다음 하늘을 올려 보니까 커다란 유성 한 개가 북두칠성 쪽으로 날아오면서 상서롭지 못한 빛을 발하고, 파군성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운명이 다한 줄 알았는데, 아니나다를까 부하 장수가 제갈공명이 기도드리고 있는 방문을 여는 바람에 일곱 자루의 촛불은 모두 꺼지고 공명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답니다.
▷ 그것 참...
▶ 서방님.
▷ 왜 그러오?
▶ 서방님은 운명과 숙명에 대해서 아십니까?
▷ 어깨너머로 한 공부가 돼놔서...
▶ 서방님 나름대로의 생각은 있으실 것 아닙니까?
▷ 글쎄. 어떻게 보면 운명이 있는 것 같고, 어찌 보면 없는 것도 같고...
▶ 누구에게 물어도 비슷한 답이 나오지만 운명이란 글자 그대로 움직 일 수 있는 명이예요. 만약 팔자가 돌덩이처럼 굳은 것이라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일을 하고 새끼를 치겠어요?
▷ 하긴 그래. 손금이 나쁘다는 소리를 듣고 칼로 손금을 판 사람도 있다니까...
▶ 그 정도의 각오와 자세라면 운명아 내가 간다, 비켜라! 하고 큰소리 칠 수 있을 거예요.
▷ 그럼 숙명은?
▶ 숙명은 이 세상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 어째서?
▶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집니다. 이것이 해의 숙명이라면 인간의 숙명은, 태어났으되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것처럼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명을 부여받아 태어난 것이지요.
▷ ...
▶ 왜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죠?
▷ 반야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시구려.
▶ 사실 서방님은 한 달 전에 가셔야 할 몸이었어요. 저는 제 남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한 번 뵈온 다음에 보내드리고 싶어서 하늘에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 하하하. 쓸데없는 소리. 내가 그리 쉽게 죽을 인물 같아 보이오?
▶ 서방님은 제 말을 믿지 않으시겠지만, 초저녘에 작은 유성 하나가 파군성을 범했어요.
▷ 그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 서방님이 500년 뒤에 다가올 후천 도수의 문고리를 잡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예요.
▷ 반야가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결코 실없는 농담 같지는 않은데, 까짓 이왕 죽었다 살아난 몸, 대체 두려울 것이 무엇이오? 염라대왕의 수염이라도 뽑으라면 뽑겠소.
▷ 서방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지금 심정은 어떠합니까?
▷ 편하오. 한없이 편안하오.
▶ 정말이세요?
▷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소? 당신이 키우고 있는 격암이란 친구만 아니었다면 자칫 굶어 죽을 뻔했는데, 오늘까지 살아 당신을 만나고 또 운우지정까지 나누었으니 지금은 눈을 감는다 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소.
▶ 서방님 몸 어딘가에다 표를 해놓아야 해요.
▷ 표를 해?
▶ 그래야 우리는 다음 생에 만나더라도 서로 남남이 아니라는 것을 얼른 알아볼 수 있지요.
▷ 그건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은데?
▶ 왜요?
▷ 내 등허리에는 일곱 개의 점이 있고, 또 반야의 얼굴은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데...
▶ 그런 것은 별로 소용이 없어요. 전생의 기억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수가 있으니까...
▷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 서방님 팔뚝에 비늘을 붙여 보내드릴께요.
▷ 비늘을?
▶ 지금 별자리가 물고기좌에서 물병자리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 그렇소.
▶ 서방님께서는 지금 가시면 물고기좌 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인간 세상으로 다시 오시게 됩니다. 제가 붙여드릴 잉어 문신은 서방님을 무척 괴롭혀 드릴 거예요. 물론 서방님은 그 이유를 모르고, 팔뚝의 비늘 때문에 성격도 바뀌고 인생 항로도 결코 순탄치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는 날 팔뚝의 비늘이 저절로 떨어지거든 수어좌(물고기 자리)에서 보병궁(물병 자리) 시대로 접어드는 것으로 아소서.
▶ 저절로 알게 되어 있어요. 아, 먼동이 터 오는군요. 별빛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어서 나를 안아 주세요.
▷ 팔뚝에 새겨 준다는 잉어 비늘은?
▶ 조금 있다가 확인을 해보세요. 다음 생에 인간 세상으로 가시거든 별을 보는 훈련을 누구보다도 많이 하세요. 그냥 바로 하늘을 쳐다보면 고개가 아플 테니까 세숫대야나 단지 뚜껑에 진한 먹물을 갈아 놓고 그것을 통해서 별을 구경하세요. 물병자리를 생각하면서 술병으로 세월을 보내시지 마시고...
지리산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
첫눈이 천지를 가득 덮던 날, 좌선으로 하루 해를 보내던 노인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 격암아.
- 예, 어르신.
- 내가 아무래도 이 해를 못 넘길 것 같다.
-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 아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명색이 수도를 해온 사람이 자신의 앞길조차 모른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느냐?
- ...
- 그래서 하는 소리인데, 내 너와 약속을 하나 하자.
- 무슨...?
- 그 동안 곰곰 생각해 봤다만 이 비기를 그냥 한 줌의 재로 만들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기라는 말에 격암은 전신의 신경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격암은 조심스럽게 노인의 입만 지켜보았다.
- 그러나 비기에 적힌 것을 그대로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안 될 말...
- 저는 아직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만 어르신께서도 지난번 얼핏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보통 사람들은 알 수 없게 무슨 장난을 좀 해 놓으면 안되겠습니까?
노인은 격암의 얼굴을 한동안 정신없이 들여다 보았다.
- 네 생각도 정녕 그러하냐?
- 아둔한 제가 아는 것이 있습니까? 그저 어르신이 분부하시는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 이 비기의 비밀은 500년 뒤에나 풀리게 될 것이야.
- 왜 하필이면 500년 뒤입니까?
- 별자리가 그때 가서야 바뀌기 때문이니라.
- 후천도수의 시대가 온다는 말씀입니까?
- 그렇다. 이것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질서이다만 자칫 철 모르는 인간들이 비기를 엉뚱한 곳에 사용할까 우려되는구나.
-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은 없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일리가 있는 말이로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노래 한 곡을 불러줄 테니 잘 듣고 화답을 해봐라.
-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나는 너에게 양궁이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해 줬다. 이것은 쌍궁상화만궁이라
-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세인난지궁궁인가, 궁궁시구생이라네.
양궁불화배궁이요, 쌍궁상화만궁이라
이재궁궁비문인가, 사궁지간신공부라.
노소남녀유무식간 무문도통세부지라.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네가 알아들은 대로 이야기를 해보거라.
- 예. 잘못됐더라도 과히 꾸짖지는 마십시오. 제가 듣기로 세상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궁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교접의 이치라네. 등을 돌린 궁은 궁이 아니오, 서로 붙은 활등처럼 된 것이 참궁이라네. 세상 사람들은 궁궁이라고 하니까 그 속에 엄청난 비밀이라도 숨은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구 공부가 바로 신 공부로, 이것은 늙고 젊고, 무식하고 유식한 것에 상관없이 누구나가 다 도통할 수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 쉬운 이치를 모르더라, 하는 뜻이 아닙니까?
- 그 정도면 제법이다. 내가 한 수 했으니 이번에는 어디 네가 해봐라. 궁궁은 했으니 을을가가나와야 짝이 맞겠지.
- 제가 감히...
- 이 녀석이 또 나약해 빠진 소리를 한다. 첫 술에 배 부를 리 없으니 어디 네 흥 나는 대로 한 번 읊어보아라.
- 그럼...
격암은 목청을 가다듬고 노인의 흉내를 내었다.
대소상하물론 계급만무일실십공부라.
을을종횡십자는 을을상화궤원지수
배을지간공부 공자리재을을
도통지리자 하달상세부지라.
눈을 지그시 감고 격암의 물 흐르듯 이어지는 목소리에 취해 있던 노인이 격암을 덥석 껴안았다.
-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격암아. 내 너를 만난 것이 진정 기쁘구나. 어디 네 입으로 한 번 더 설명을 해보려무나.
뜻밖의 칭찬에 어리둥절해진 것은 격암이었다.
- 과찬의 말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나 궁궁의 이치를 알면 도통할 수 있다고 하시길래, 저는 대소 상하는 물론 신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이몸 공부로, 세상 사람들은 이 을을 속에 도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 장하다, 장해. 너라면 해낼 수 있겠구나. 자, 이제부터는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라. 궁궁을을이 나왔으니 전전가가 어이 없을쏘냐.
- 예, 부르십시오, 지필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구합체 입례지전 오구합체 극락지전 전전지리 분명하나,
세인불각 한탄이라.
대란전세 인심흉흉하니 입전권 얻기 어렵구나.
이재전전심전인가, 궤좌송경단전 이라
전중지전탄금전청아일곡운소고라.
어떠냐?
- 예, 사구(눈, 코, 귀, 입) 공부는 예의 근본이고, 거기다가 몸 공부까지 보태면 극락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이 그걸알지 못하니 안타깝다는 뜻은 알겠습니다만, 큰 난리가 닥쳐 인심이 흉흉해 사구 공부를 하기 어렵다 하셨는데, 그 난리가 닥칠 날이 언제이옵니까?
- 나도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멀지 않아 거센 피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 그게 언제쯤이옵니까?
- 지금은 밝힐 단계가 아니다.
- 막을 수는 없사옵니까?
- 없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요, 건너가야 할 과정이니라.
- 죄 없는 백성들이 엄청나게 죽어갈 것 아닙니까?
- 정한 이치지.
- 그럼 이 사실을 알고서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단 말씀입니까?
- 내 너에게 십승가를 가르쳐 주랴?
- 예. 경청하겠습니다.
- 이것은 설명이 없다. 네 스스로 그 뜻을 깨우쳐라.
팔만경내보혜대사미륵불지십승이요
의상조사삼매해인정도령지십승이요
해외도덕보혜지사상제재림십승이요
유불선이언지설말복합리십승이라.
격암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 보혜대사는 누구이시옵니까?
- 모른다.
- 정 도령은 실재했던 분입니까?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 모른다.
- 미륵님은 과연 오십니까?
- 이 머저리야, 모른다잖느냐!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십승이란 무얼 말함입니까?
- 칭찬을 조금 해줬더니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무엇을 한꺼번에 다 알려고 하지 말아라. 내 오늘은 ‘길지가’한 수만 더 가르쳐 주고 쉴 테니 그 답을 알겠거든 사람을 귀찮게 해라.
사삼쌍공근래로다 일구륙팔당치 않네
고해중생 다 오너라 구원방주 높이 떴네
풍랑파도 흉흉하나 산악파도 두려워 마라
신막별건곤해인조화 나타난다
평사삼리십승길지 우성재야우명성에
일척팔촌천인언을 부지부동 가련쿠나
도화류수무릉촌이 남해조선야귀발동작반하니
부지생로멸망입을 계촌궁효성조에
자하지중삼위성을 성산성지평천간에
감로여우심화발을 마이제제부지차안조이규규부지남지북지
우이명명 부지우왕마왕
노인의 목소리는 비단결처럼 고왔으나 격암은 정신이 아득해 왔다.
궁궁, 을을가는 그래도 들은 귀가 있어서 어떻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변덕 심한 노인이 잔뜩 심술을 부려 불러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무슨 수로 푼다는 말인가?
첫 부분부터 콱 막히기 시작했다.
- 사삼쌍공근래로다. 4와 3 두 허공이 가까이 오도다.
여기서부터 망망해지는데다 일구륙팔당치 않네. 1, 9, 6, 8은 또 무슨 소리인가?
노인이 일부러 나를 골려주기 위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것일까?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또다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 고해중생 다 오너라, 구원 방주 높이 떳네. 풍랑파도 흉흉하나 산악파도 두려워 마라. 비밀은 이 속에 있는 것일까? 노인은 분명 길지가라 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미구에 불어닥칠 피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 남자면 지리산 같은 심산 유곡을 택해야 된다는 그 말인가?
그렇다면 앞에 나온 4와 3, 1, 9, 6, 8 같은 수수께끼 숫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혹시 주역의 수리가 아닌가?
4는 4 진뢰요, 천둥이며, 움직임이고, 방향은 동쪽이요, 용을 상징하며 인체에서는 발이다.
3은 3 이화요, 불이며, 붙음이고, 남쪽을 의미하며, 짐승은 꿩이요, 눈이 불이다.
자, 그렇다면 첫 문장은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4와 3, 즉 천둥, 번개와 불은 동남쪽에서 시작될 테니 눈 가진 자 일찌감치 발로 뺑소니를 쳐라?
그럼 1, 9, 6, 8은 당치 않다고 했으니 여기에 속지 말라는 뜻인가?
격암은 골치 아픈 것은 일단 접어두고 다음으로 건너뛰었다.
풍랑파도 흉흉하나 산악 파도 두려워하지 말라 했다. 산악 파도란 또 무엇이겠는가? 태산처럼 밀려오는 파도? 아니면 산속에도 불어닥칠 피의 회오리 바람?
노인은 귀 뒤에 묘한 말을 했다.
귀신이 장막을 둘러치듯 별세계가 있어 해인 조화가 나타난다고 했다.
해인조화 평사삼리십승길지
수성재야우명성에 일척팔촌천인언을
부지중동 가련쿠나 도화류수무릉촌이
남해조선야귀발동작반하니 부지생로멸망입을
계촌궁효성조에 자하지중삼위성을
성산성지평천간에 감로여우심화발을
마이제제부지차안조이규규부지남지북지 우이명명 부지우왕마왕
바다는 끝없이 출렁인다. 그 바다에 도장을 찍어? 해인 조화 있는곳은 깨끗한 금모래가 삼리에 걸쳐 있고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풀밭에 울음소리 들리면 한 자 여덟 치되는 하늘 사람의 소리를 가려 듣지 못하고 움직일 줄 모르니 가련쿠나. 복사꽃 피는 이승의 극락이 조선 남쪽에 있건만 야차(밤 귀신) 같은 무리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니 살고 죽는 갈림길을
계수나무 궁에 샛별이 비칠 때 천, 지, 인 혹은 삼신은 거룩한 산과 땅 사이 내를 낀 들판에 하늘에는 꽃비 오고 마음 밭을 열었구
나.
거룩한 성인의 소리는 마이동풍 격이 되고 철딱서니 없는 새 새끼 울부짖듯 남쪽인지 북쪽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구나. 소 울음소리를 모르니 소 새끼, 말
새끼처럼 근본을 잃고 방황하는구나.
격암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던 노인이 비을 열었다.
- 그래, 어디까지 풀었느냐?
- 사삼쌍공근래로다, 하는 주역의 4 진뢰와 3 이화의 뜻을 빌려와 미구에 병화가 일어날 것을 경계하신 말씀은 아닌지요?
- 이 머저리야, 내 그럴 줄 알았다. 거기에 왜 난데없는 주역이 나오느냐? 차라리 소리나는 그대로 읽어 사는 죽음을 삼은 삶을 의미해 죽고 사는 것이 다 헛되지만 생사의 갈림길이 멀지 않았다고 해석을 했더라도 내가 기특하다며 칭찬을 해주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 모양이니 뒤는 더 들어볼 필요가 있겠느냐?
답을 알 때까지는 내 곁에서 얼씬거리지도 마라.
- 어르신...
- 듣기 싫다. 나는 아까부터 많이 참고 있다. 너는 이 지리산처럼 좋은 땅에 있을 자격도 없다. 꾸릴 것도 없는 짐이니 어서 산을 내려가거라.
노인은 깍지를 끼고 벌렁 드러누웠다.
격암은 여기서 더 버티고 있어보았자 조금도 덕이 될 것이 없겠다고 판단했다.
- 어르신이 정 그러신다면...
노인은 몸만 약간 움찔해 보였을 뿐 끝까지 들은 척도 안했다.
눈 덮인 지리산은 막막했다.
사뿐히 내려 쌓인 눈의 무게를 감당 못해 노송 가지는 찢기고 한 길이 넘게 쌓인 눈은 하얗게 죽음의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격암은 알고 있었다. 노인이 진심으로 자신을 미워해 쫓아낸 것도 아니고, 또한 봄이 올 때까지는 한 발짝도 이 지리산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한대에 익숙한 격암이었으나 눈보라 속에 산 식경 가까이 서 있었더니 사지가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짐승 가죽으로 감쌌으나 귓바퀴는 떨어져 나갈 듯하고 호흡조차 곤란한데 머릿속만이 명중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노인이 지닌 비기는 진품일까?
그리고 정말 노인은 반야의 남편이었던 사람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쉽게 답이 나와주지를 않았다.
격암은 노인이 기거하는 토굴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눈앞인데 데리고 다니던 짐승을 잡아 육포로 만든 노인이 산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가?
격암은 이 모두가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한 달 남짓 노인과의 짧은 생활이었지만 그 정체만큼이나 신비스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배달 겨례를 위해 무엇인가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사 빌었던 내 간절한 기도 소리가 천상에 닿았는지 모르지.
그러나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하면 노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까?
격암은 노인이 궁궁가를 불렀을 때 을을가로 받아주자 그렇게 기뻐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 그래, 바로 그것이야.
격암은 바위 밑에 쭈그려 앉아 사위가 벌써 어두워 오는 줄도 모르고 머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나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놈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대체 무얼 했는가? 내 가까웠던 사람들은 대부분 저승으로 갔다.
못난 이 목숨이 홀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노인도 그랬지만 반야가 옛날에 격암의 수명을 점쳐준 일이 있다. 그 예언이 사실로 맞아떨어진다면 기껏 10년 정도 이 세상에 머문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다음 내 영혼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북두칠성 별에서 왔다니 저 별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중 일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고, 밝은 날 노인을 만나 그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지리산 토굴 속에서 노인이 지닌 비기를 열어봐야 한다.
만약 그 비기까지도 엉터리라면 나는 정말 모든 미련을 깨끗이 정리하고 새처럼 풀처럼 그리 살다 죽으리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격암은 자신의 심중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생명 예언 들어보소. 세상만사 허무 중에 깨달을 일만 남았어라. 문장 호걸 영웅들도 불우한 세월 한탄 말고 잠 깰 때요. 입산방도 저 군자들은 어느 세월에 산문열꼬? 아미타불 염불승도 피흉추길 하산할 때라. 세상 돌아가는 이치 잘 살펴서 생사 보아 거래하소. 의심 없는 쾌지사를 사월천중 일렀다네. 인신의 변화가 무궁무진한 때가 언제이며, 하강 시대 언제인가? 무지한 세상 사람들이 알 리 없는 가운데 새로운 기운 하나가 꿈틀내니 그 기운은 조상이 될 조짐이요, 물은 맑고 산은 높아 정기가 처처에 서렸도다. 하늘의 해와 달
이 번갈아 들며 자세하게 보여주네. 어화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소.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십 공부에 달려 있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잘났다고 뽐을 내지만 머리 좋고 학덕 높은 선비들은 알고 보면 헛공부요. 천문지리 안다 해도 시절조차 모르는 철부지 그 아닌가.
격암은 밤새 눈 한 번 붙이지 못했지만 별로 춥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리산을 감싼 백설 위로 조심스럽게 아침이 밝아오는 광경은 과연 장관이었다.
아, 천지의 변화는 이렇게 질서 정연하거늘 하나의 띠끌에도 미치지 못할 인간들은 무엇 때문에 갈 길을 몰라 갈팡질팡 하는가?
출발부터 잘못된 내 인생이 아닌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밭 가는 농부가 되었던들 이런 기막힌 삶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고 되돌려질 성질의 일도 아닌 것, 화담의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히 살아왔다.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놈이다. 산을 배워라.
그러고 보니 북으로 백두에서 시작해 남쪽 끝의 한라산까지 다 밟은 셈이다.
묘향에서는 반야를 만나 금방 듣도할 것 같은 착각에 들떴고, 사형 보우가 죽어 말이 되어 돌아왔다는 말죽거리에서 만난 이상한 노인과는 지리산에서 싫든 좋든 인연을 맺고 있다.
이것이 내 찾아 헤매는 것의 마지막이 될까?
격암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눈길을 터덜터덜 걸어 노인이 기거하는 토굴로 들어왔다.
또 한바탕 호된 꾸지람을 각오했는데 노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철없는 것아. 얼어 죽지 않고 용케 살아 돌아왔구나.
저도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래, 밤 새워 무슨 생각을 했는고?
가슴이 답답하여 노래 한 곡 지어 읊었습니다.
제법이다. 내 앞에서 그 노래를 다시 한 번 들려줄 수 없겠느냐?
부끄럽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만 웃으면서 들어주소서.
격암은 대강 생각이 나는 대로 어제 저녁 자신의 심경을 읊었다. 연방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애야, 격암아.
예?
썩 만족한 것은 아니로되 그만하면 같이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의논해도 좋을 성싶다.
격암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와락 치솟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형태를 스물세 가지로 나누어 일러줄 테니 명심해서 들어라. 도인이 되기 이전에 인간의 바탕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내 생각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마다로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생각에 끌려다니는 인간을 나는 가장 경멸한다.
격암은 속으로 뜨끔했으나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첫째, 불의이다. 옳지 못한 뜻을 가진 자. 그런 인간이라면 가르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어린아이에게 칼을 주는 것보다 못 하다.
두 번째는 그 영혼이 탁한 자다. 천성적으로 악한 영혼이 있다. 누천년을 두고 거듭나면서 마치 무딘 칼날을 숫돌에 갈듯 혼탁한 영혼을 정화해야 함에도 나쁜 귀신의 혼이 실려 남을 해롭게 하고, 마침내는 스스로도 속이는 인간은 사람의 탈을 쓴 악마로 봄이 옳다.
교화가 안 되겠습니까?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배워서 깨닫는 경우가 드물듯이 천성이 악한 자가 개과 천선하기를 바라는 것은 숯을 갈아 흰 물을 얻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행위니라.
세 번째로는 탐욕스러운 인간이다. 이 땅 덩어리 위에 인간만큼 탐욕스러운 동물이 없다. 돼지가 게걸스럽게 먹는다 하나 배가 차면 그만이요. 그 날랜 범도 한 끼 배 채우면 그만이지 겨울에 먹으려고 가을에 짐승을 잡아 갈무리해 두는 법이 없다. 인간이 씨 뿌려 가꾸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나 끝없는 탐욕을 멈출 줄 모르는 것은 결국 제 몸과 마음을 스스로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네 번째로 내가 싫어하는 인간은 악의에 찬 모진 놈이고,
다섯 번째는 시기, 질투가 많은 인간이다. 시기, 질투심은 인간만이 가진 나쁜 습성이다. 이런 인간들은 남이 잘못되는 것을 제 잘된 일보다 더 기뻐하지.
여섯 번째는 주둥이만 살아서 말 많고 까다로운 인간이고,
일곱 번째는 언쟁을 일삼는 놈이여,
여덟 번째는 사기꾼이다. 남을 속이는 놈이 나쁜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사기꾼에게 속는 인간도 사기꾼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예.
아홉 번째가 전갈처럼 악독한 놈이고,
열 번째가 수근수근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야깃거리로 삼는 인간이다.
열한 번째는 좋은 말만 골라해도 못다하고 갈 세상인데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자이며,
열두 번째는 영혼이 없다고 착각하는 자, 다시 말해 이 세상 한 번 살고 가면 그만이라고 착각하는 자와
열세 번째, 하늘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 너도 어제 저녁 똑똑히 경험을 했겠지만 천지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왜소한 존재더냐? 열네 번째는 남의 부녀자를 능욕하는 금수보다 못한 인간이며,
열다섯 번째는 교만한 자이고, 열여섯 번째는 자만에 찬 인간이니라. 교만이나 거만은 다 함께 스스로를 망치는 칼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예.
열일곱 번째는 악업을 도모하는 자요,
열여덟 번째는 부모를 거역하는 자이며,
열아홉 번째는 우매한 자이니라.
타고난 우매함도 죄가 됩니까?
우매하다는 것을 머리가 둔하다는 소리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한다. 내가 말하는 우매함이란 자신의 고정 관념에서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스무 번째는 약속을 어기는 자이며,
스물한 번째는 무정한 자,
스물두 번째는 자비심이 없는 자, 마지막
스물세 번째는 불의를 고치려 하지 않는 자다. 물론 완전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한두 가지의 결함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 결함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그 태도가 나쁘다는 것이다. 어젯밤 뜬 눈으로 새웠다니 잠을 좀 자두거라.
머리가 맑아지면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를 조금씩 해보자.
공부란 말에 격암은 귀가 번쩍 뜨였으나 노인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어서 못 이기는 척 모잽이로 쓰러져 누웠다.
얼핏 잠이 든 것 같았는데 환청이었을까? 격암의 귀에는 분명 지리산이 쩌엉, 쩌엉, 낮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잠을 그리 깊이 자느냐?
잠깐 눈을 붙인다고 했던 것이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을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자 단정히 앉아서 먹을 갈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격암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내일부터 공부를 해보자던 노인의 목소리가 새삼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맷돌을 돌리듯 아주 천천히 먹을 갈고 있었다.
격암은 묵향을 의식하면서 노인이 바닥에 깔아놓은 백지에 눈을 주었다.
정말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려나?
무엇인가 한마디는 꼭 해야 될 것만 같은데 붓을 잡는 노인의 행동이 너무 경건해 보여 격암은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마치 검술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 칼을 휘두를 때처럼 허공에 멈추었던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단숨에 위에서 아래로 일곱 자를 써 나갔다.
농자천하지대본
글을 다 쓴 후 붓을 던져버린 노인이 격암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너는 왜 아무런 말이 없느냐?
격암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히 힘찬 필체입니다.
아니나다를까 노인의 입에서는 호통이 터져 나왔다.
개 꼬리 3년 묻어 황모되는 법 없다더니 네 녀석이 꼭 그 꼴일세. 야, 이 머저리야. 가리키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 끝만 좇는 바보가 어디에 있느냐?
격암은 슬그머니 끓어오르는 부아를 다스리지 못했다.
어르신.
왜?
방금 어르신이 쓰신 글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이 아니옵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니?
농자천하지대본이란 어제 오늘 시작된 말도 아니고.
허어, 그럼 네 녀석은 농자천하지대본의 뜻을 바로 알고 있다는 말이냐?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뜻 그대로 농사를 짓는 것이 천하의 으뜸이.
네 이놈, 닥치거라!
격암의 말은 노인이 붓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네 놈은 한심하구나. 전생에 무슨 원수를 맺었질래 나하고 인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턱턱 막힌다. 야, 이 멍텅구리야. 땅 파먹는 농사꾼이 으뜸이라면 너는 무엇 때문에 도를 찾아 나섰느냐?
- 스스로 찾아 나선 적은 없었습니다.
- 그럼?
- 무엇을 해야 되겠다는 의지가 굳기도 전에 저는 이미 어떤 노장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러나 네 스스로의 의지가 생겼을 때는 얼마든지 길을 달리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
- 이미 늦어버린 다음이었습니다.
- 네 주둥이는 참으로 간사하구나. 그래,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더냐?
- 어르신께서는 또 꾸짖으실지 몰라도 저는 물이 흘러가듯 그저 출렁출렁 흘러가려 합니다.
노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그래, 이미 그리 되도록 되어져 있는 일, 어찌 네 탓이라고만 하리.
- 굳어진 운명을 말씀하심입니까?
- 닥치거라. 운명 따위는 없다.
격암은 물러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 어르신께서는 모든 것이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행해진다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 내가 언제?
- 그럼 어르신께서 지니고 다니시는 비기는 무엇입니까?
- 오라, 이 녀석이 아직도 비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군.
- 못 버리도록 만드시는 것은 어르신네가 아니십니까?
- 너는 참, 되다 만 아이구나. 누굴 탓할 생각은 아예 마라. 쓰잘 데 없는 입씨름 그만두고 내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는 농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 아까 어르신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 농자가 농부란 말이냐?
- 그럼 다른 뜻이 있습니까?
- 농부는 두더쥐처럼 땅이나 파먹는 팔자고?
- 제 아둔한 머리로는 그렇게 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습니다.
노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격암의 얼굴을 한참이나 뜯어보았다.
- 너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 적이 있느냐?
- ...
- 왜 대답을 못 해? 반야 그년이 틀림없이 무어라 헛소리를 지껄였을 텐데...
- 저는 북두칠성 계열에서 온 악마라고 했습니다.
- 그래, 너는 그 말을 믿느냐?
- 저로서는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 하기야 그렇겠지. 그러나 격암아.
- 예.
- 만약 네가 별에서 온 것이 사실이라면, 고통 많은 이 땅에 온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 소같이 미련한 녀석 같으니라구. 칼을 갈 때 어떻게 하더냐?
- 무슨 말씀이신지?
- 너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콧구멍이 두 개인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칼을 갈 때는 당연히 거친 돌에 먼저 갈아서 보드라운 돌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 ...
- 그와 같은 이치로 격암 너는 자기 완성을 위해 고통 많은 이 땅으로 온 것이다. 왜 눈만 껌벅거리고 있느냐?
- 만약 이번 생에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 다음 생에 그만한 고통을 더 받아야지.
- 500년 뒤에 다시 온다는 것은 정말입니까?
- 이런 머저리 같은 인간을 좀 보게나. 자 이걸 잘 봐둬라.
노인은 지팡이로 바닥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 너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 동그라미가 아닙니까?
- 눈에 보인다고 보이는 대로만 말하지 말고 농담 삼아서라도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는 없느냐? 잘 봐둬라. 이 동그라미의 시작과 끝이 어디냐?
- 무시무종을 말씀하려 하심입니까?
- 그건 법당에 앉아 공밥 축이는 땡추들이나 할 소리다.
- 그럼?
- 물어보나마나 그 대답은 뻔할 것이다만 너 이 세상에서 휘어져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아라.
- ...
- 내 그럴 줄 알았다. 별빛도 휘어져 우리에게 온다. 만약 별빛이 바로 온다면 우리는 많은 별을 볼 수 없다. 휘어져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함이냐? 그 끝을 이어보면 돌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원래 출발을 했던 자리와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래도 농자천하지대본의 숨은 뜻을 모르겠느냐?
- 농자라 하옵시면?
- 농자를 자세히 뜯어봐라. 무엇과 무엇이 보태어진 글자냐?
- 굽을 곡과 별 진의 합성어이옵니다.
- 그렇다면 답은 벌써 나오지 않았느냐?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별이다. 그 별빛이 휘어져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자다. 즉 농자란 농사를 짓는 농부를 뜻함이 아니고 우주의 이치를 아는, 다시 말해서 역의 이치를 아는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 이제야 좀 눈이 열리는 느낌입니다.
-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다. 너는 까마귀 고기를 장복하는 것도 아니면서 걸핏하면 잊어먹는 데 선수니까. 내 입 부지런해지기 전에 몇 마디만 더하자. 굽을 곡이나 역이나 같은 말이다. 아무리 네가 머저리라도 그동안 먹은 밥술이 있고 들은 귀가 있으니 그 정도는 알고 있을 줄 믿는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는 두 가지뿐이다. 그 하나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무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변하되 변하지 아니하는 법칙, 즉 변화를 주도해 가는 원칙이 있다. 어제 낮과 오늘 낮이 같더냐? 그러나 해가 뜨고
지고 비슷한 주기로 하루가 바뀌어서 한 달을 만들고 1년을 만든다. 저녁에 모습을 감추었던 해가 아침에 다시 떠오를 때까지를 하루의 역으로 부른다면 보름달이 찼다 이지러지는 것이 한 달의 역, 그리고 춘하추동 4계절이 바뀌어 듦이 1년의 역이다. 이렇듯 이어보면 100년의 역, 그리고 1000년의 역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 어르신.
- 말해 보아라.
- 저는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 뭘 말이냐?
- 100년 뒤는커녕 내일 일도 점칠 수 없는 인간 아닙니까?
- 이런 답답한 놈아. 이 겨울 지나면 오는 계절이 무엇이냐?
- 봄 아닙니까?
- 봄 다음은?
- ...
- 인간은 한 치 코앞 일을 모른다고 자신의 능력을 격하시키지만 십수 년 살아온 대가로 1년 역쯤은 알고 있다. 아니 60년 역쯤은 안다고 해야지. 죽고 사는 코앞 일에만 집착을 하니까 그렇지 쉰이 지나면 주름은 깊어지고 피부는 거칠어진다. 환갑을 맞으면 손자를 볼 것이고, 그 다음은 죽을 채비를 해야 한다는 것쯤은 막연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느냐?
- 그건 그러하옵니다.
- 그렇다면 대체 뭐가 어려워 500년을 점치지 못한다는 거냐?
- 그러니 어르신께서 아둔한 이 인간을 깨우쳐 주십사고 무릎 꿇고 있지 않습니까?
노인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 네 놈하고 같이 있으면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지 뒤죽박죽일 때가 많다. 알고서 나를 떠보려 함인지 진정 몰라서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지...
- 진정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모른다고 해도 그렇다. 모르는 것은 스스로 알려고 노력을 해야지 남이 가르쳐 줄 때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도둑의 마음이다. 농부는 씨 뿌릴 봄을 기다린다. 그러나 너처럼 도둑 심보를 가진 인간들은 씨 뿌려 가구는 수고로움 없이 열매만을 똑 따먹는 가을을 학수고대한다. 농심과 도심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내 분명히 못박아서 하는 소리지만 다가올 세월은 선천에서 후천으로 접어드는 시대이기 때문에 농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도둑놈 심보를 가진 인간들이 활개를 치게 된다. 그 세월을 경계해 내가 지어둔 노래가 있다. 귀기울여 잘 듣거라. 이름하여 ‘조소가’라 하자. 내가 부를 테니 너는 받아 적어라.
- 예.
칠성별에서 온 저 가련한 인간들이 천우신조만 기다리네.
칠성의측피인천우신조
가소롭고 가소롭구나. 저절로 굴러오는 복을 기다림이 가소롭구나.
인아조소이칭수복만조소
속세 떠나 수도한다는 저 망할 도인놈들 꼬락서니 좀 보아라
이불구허망수도인물려세속하망생
도 닦아 천문을 읽고 지리에 통달한다지만 천통, 지통 좋아 마라. 똥통에 빠지겠다.
천통지통분통
소경 불알 만지며 천리를 안다 하는 것만큼이나 맹랑한 것이 도통이로구나.
소경불알망랑도통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는 똥통보다 못한 도인놈들아.
지각아인분통
이 이끼보다 못한 허접 쓰레기들아
지각도인야
원래 깨달음이란 소리도, 냄새도, 맛도 없는데 엉터리 같은 도인놈들의 말에 현혹되어 미쳐 날뛸 중생들이 걱정이로구나.
무성무미현적하리견이광신도
만약 얄팍한 속임수나 잔재주에 속아 갈 수 있는 하늘 나라라면 금방 만원 사태가 아니고 어찌하리.
우자신거천당인금시만원불입의
평생 자신을 깨우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는 찾아갈 지옥도 없으리.
종신우인지옥
자신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들이 쓸데없는 말에 현혹되어 귀중한 일생을 금욕한다 착각하며 아무런 재미없이 살다 가니 그 인생이 진정 가련쿠나. 생각해 보거라. 인간 칠십고래희라 함은 나이가 많아 저절로 기쁨이 찾아온다 함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사람이 칠십 평생을 살고 나면 나고 삶과 죽음의 큰 역을 알게 된다. 삶도 사랑해야겠지만 죽음도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바로 일흔인데...
불신지인비상천절기금욕무자미초로인생가련자고력대상견인간칠십고래희 호유세월차금세주사청루불리작일 인생금일사금일인생래일사
이 이치를 모르고서 헛되이 나이만 먹었다는 것은 밥 먹고 부지런히 측간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느냐?
장출입지인변소
명색이 수도한다는 도인들도 그러할진대 가사에 매달린 지각 모자란 부녀자들임에랴.
출입도인불고가사광부녀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만을 능사로 아니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일지며 후천도수 열리면 어느 땅에 다시 설꼬?
일일삼식하처생
내 남 없이 남의 허황된 말 아예 믿지 마소. 천당 지옥입네 떠들던 인간들도 북망산천 못 면해 가네.
피소아아피소종결승리수인언 항시발언천당아 지각지옥일평지 수도인북망산천불면시래
극락 지옥이 내 마음속에 있듯이 부처는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속에서 찾으소. 그 찾는 비결이 무엇인가? 얼씨구 절씨구. 사구(눈, 코, 귀, 입) 공부 바로함이네.
심령아인운거지단단 피인을시구절시구 부유호일하망생
- 다 받아 적었느냐?
- 예. 어르신의 뜻이 바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아직 먹물도 덜 마른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제법이다. 잘 간직해 두거라.
- 이 조소가는 어디에 쓰시려 함인지?
- 너는 왜 하는 일마다 그 모양이냐? 농심을 잃고 열매만 똑 따먹으려는 인간들이 근본을 모르고 설쳐대는 날을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이르지 않더냐?
- 어르신.
- 왜?
- 개도 나갈 구멍을 보고 쫓으라고 했습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 어르신네 말씀마따나 가련하고 불쌍한 중생들도 희망을 가지고 기대어 볼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럼 이왕 내친김에 ‘극락가’도 불러주랴?
- 극락가라 하옵시면?
- 왜? 이제는 말 뜻도 모르겠느냐?
- 그게 아니오라 지옥 극락이 따로 없다는 것이 바로 어르신의 말씀 아닙니까?
- 이것아, 모르면 잠자코 듣기나 해라.
온다네 온다네, 극락 천국
극락 소식 가까이 와 있네.
학수고대하는 극락은 과연 어디메뇨?
스스로를 깨우치면 극락가는 길은 저절로 보이게 되어있다네.
무슨 재주로 스스로를 깨우치느냐? 그 비결은 십에 있네.
스스로의 목소리에 도취한 듯 노래를 읊고 있던 노인이 문득 정색을 했다.
십이란 무엇이냐?
염소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말로는?
아리랑 고개라고도 합니다.
고개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넘어야 합니다.
잘 말해 주었다. 그 아리랑 고개 넘는 법을 노래해 주마.
십자진리 깨우쳐서 망망대해 헤쳐 나갈 돛대로서 사용하소.
구원선이 따로 없다.
하늘 파도 드높아서 후천도수 밝아올 때
쓸데없는 세상 풍속, 헛된 소리 따르던 자,
내 젖 두고 남의 젖 맛들인 자.
허망되게 날려가네.
새 하늘 새 땅이 밝아올 때
명심하소 명심하소
우상을 따르고 헛된 말에 현혹되면 십 년 공부 허사로다.
바른 길은 어디에 열려 있는가?
내 마음 밭에 길이 있네.
왜 붓을 멈추느냐?
어르신.
왜 그러느냐?
자꾸 마음 밭, 마음 밭 하시는데 그 마음 밭은 어떻게 김을 맵니까?
진정 몰라서 묻느냐? 아니면 나를 떠보기 위해서냐?
제가 감히 어떻게 어르신네를‥‥‥.
내 분명 깨달음이 마음 밭을 김매는 호미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알려줬지 싶다.
우매한 중생들로서는 어떤 것이 바르고 어떤 것이 그른지 알아낼 수 없기에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그럼 ‘정각가’ 한 구절을 더 불러주랴?
아둔한 지도 알아들을 수 있게 차근히 설명해 주십시오.
그럼 내가 주욱 불러 나갈 테니 네 머리로 이해가 닿지 않는 부분은 물어 보아라.
불각정신원무심, 환희금시심화일, 천설도덕망실세‥‥‥.
처음부터 막힙니다. 어르신‥‥‥.
내 그럴 줄 알았다. 너는 항상 무엇이나 어렵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막히긴 뭐가 막히느냐, 이 답답한 녀석아. 깨닫지 못함을 한탄하는 것은 바로 마음자리를 모르기 때문이요, 마음자리를 모른다 함은 내가 억겁을 두고 거듭났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두고 보아라. 후천도수가 밝아오는 날 사람들은 비로소 세상에서 믿으라고 하던 것들이, 따르라고 하는 것들이, 그리고 서책 속에 들어있다고 착각했던 것들이 모두 허상이었음을 알고 허탈한 웃음을 보일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 공맹을 읽어 군자를 꿈꾸지만 문자로 기록된 것은 가고 없는 옛 사람의 발자취요, 이미 흘러가 버린 물인 것을‥‥‥입으로 천만 번 염불을 외운들 무엇하냐? 부처도 미륵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오호라, 안탑깝게도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내 도는 맞다 하고 남의 도는 그르다 하고, 내 말은 진리라 하고 남의 말은 망언이라 비웃는구나. 진정한 도의 모습은 냄새도 맛도 모양도 부피도 없음 일진대 우주의 이 큰 법을 모르니 사람들은 마치 조가비로 바닷물을 측량하듯 머릿속의 알음알이로만 만사를 해결하려 드는 도다. 학수고대
하는 정 도령은 하 세월에 올꼬?
어르신.
왜 그러느냐?
제가 어르신을 모신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누가 모시라고 하더냐?
물론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 드려서 제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어르신께서는 제가 무엇을 깊이 숨기고 계속 변죽만 울리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네 놈은 왜 그리 솔직하지 못하느냐?
저는 어르신에게 추호도 숨긴 것이 없습니다.
정말이냐?
제가 무엇 때문에 어르신을 속이겠습니까?
노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네 이놈 격암아!
예.
너 내눈을 똑바로 보거라.
격암은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을 감당 못 해 격암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속이는 것이 없다면서 무엇 때문에 외면을 하느냐?
그건‥‥‥.
닥치거라. 내가 네 놈의 그 얄팍한 속을 모를 줄 알았더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신경 쓴다는 격으로 나를 만나고 난 뒤부터 네 놈의 신경은 온통 비기에만 쏠려 있다. 이래도 내 말이 틀렸느냐?
궁금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 드려 그것이 지금 제 손에 넘어해도 무용지물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알고 있구나.
어르신. 제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제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비기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잊어버렸다고‥‥‥.
너는 또 한 번 속이고 있다.
노인이 끝까지 이렇게 나오자 격암도 끓어오르는 부아를 다스릴 수 없었다.
어르신께서 자꾸 속인다, 속인다 하시는데 대체 제가 뭘 속이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너는 너를 속이고, 나까지 속이려 하고 있다.
저는 속인 적이 없습니다.
당돌하구나, 불알 찬 사내 녀석이 왜 솔직하지를 못하느냐?
격암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가쁜 숨만 몰아 쉬었다. 물끄러미 그 모양을 보고 있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 한심한 위인 같으니라구‥‥‥그래, 반드시 네 탓만은 아니지. 옛다, 받아라.
노인은 토굴 벽에 세워둔 가죽 주머니를 격암 앞에 내던졌다.
놀란 것은 격암이었다.
아니, 어르신‥‥‥.
됐다. 내가 이승에 머무를 시간이 1년만 더 남았더라도 너에게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것이니 사흘 동안 그 비기를 가져라.
격암은 넋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초점이 풀어진 시선으로 무릎 아래 나 뒹굴어 있는 비기를 내려다보았다.
노인의 지적은 사실인가? 나는 저 비기를 갖기 위해서 그토록 비굴했는가?
꼴도 보기 싫다. 이놈. 그토록 갖고 싶던 것이 손에 들어왔으면 감싸쥐고 냉큼 사라질 일이지 새삼스럽게 내숭은 무슨 내숭, 네 놈이 여기 계속 있겠다면 내가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격암이 무어라 말을 할 겨를도 없었다.
이 눈 덮인 지리산에서 가면 어디를 가나, 격암은 황급히 노인의 뒤를 따랐다.
어르신‥‥‥.
이제 나를 부르지도, 따라오지도 마라. 사흘간 너에게 그 비기를 빌려준다고 했다.
그럼 어르신은 어디서‥‥‥.
그건 네 걱정할 바가 아니다. 시간을 아껴라.
말을 마친 노인은 눈밭을 휘적휘적 걸어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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