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선후기 문인의 東遊 체험과 한시

醉月 2013. 10. 6. 01:30

조선후기 문인의 東遊 체험과 한시
1. 머리말
조선 영조 때의 산수화가로 유명한 崔北(七七)은 한쪽 눈이 아주 나빠 안경을 걸치고 그림을 그렸다는데, 술버릇과 기벽으로도 유명한 기인이다. 언젠가 그는 외금강 九龍淵에서 술에 취하여 통곡하다 웃다가 하다가는 "천하명인 최북은 천하명산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 연못에 뛰어들려고 하였다. 구룡연은 2백척 높이의 폭포가 심연을 알 수 없는 연못으로 떨어지는 그런 곳이라고 한다. 곁에 사람이 마침 최북을 만류하여 떠메고 산 밑에 내려와 평평한 바위에 누이자, 헐떡대고 있다가는 갑자기 일어나 휘파람을 길게 불었는데, 그 소리가 수풀에 메아리를 이루어 새들이 짹짹거리고 날아갔다고 한다. 南公徹의 문집인 {金陵集}에 실려 있는 [崔七七傳]에서 읽은 이야기다. 천하명산의 기기괴괴한 형세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때로는 악마적이기까지한 천재성을 촉발하여 발산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평범한 속물들을 두렵게 하고 왜소함을 절절히 깨닫게 만드는 것일까?


18세기의 문인화가인 姜世晃(1713∼1791)이 "산에 다니는 것은 인간으로서 첫째가는 고상한 일이다. 그러나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은 가장 저속한 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장사꾼, 품팔이, 시골 노파들까지도, 마치 금강산을 갔다오지 않으면 사람 축에 끼지나 못하는 듯이 여겨 그곳을 찾는 것을 보고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76세 때 맏아들의 임지인 淮陽에 就養간 참에 동해안을 寫景하고 내금강에 들어가려고 회양에 들른 金弘道와 金應煥과 함께 일부 구간을 동행하였고, 그 감동을 [遊金剛山記]의 문장과 {楓嶽壯遊帖}의 화첩에 담아내었다.

 

정조 19년(1795)에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곡식을 덜어 구호한 萬德이란 여인이 있어, 그 소원을 묻자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일반의 여자들은 바다를 지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정조는 만덕에게 女醫의 직을 주어 藥院에 속하게 한 뒤, 역마를 내주어 금강산을 유람케 하였다. 박제가의 [送萬德歸濟州詩]가 있다. 조선후기의 금강산은 누구나 다 유람을 바라던 명산이었다. 李用休도 崔七七이 그린 풍악도에 쓴 畵題 [題楓嶽圖]에서 "우리나라에 태어나 풍악을 보지 못하였다면 泗州를 가보도고 대성인 공자묘를 배알하지 않는 것과 같다"(生左海, 不見楓嶽, 如過泗州, 不謁大聖)고 하였다. 금강산을 '高山仰止'의 至高한 경지에 빗대어 찬미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명산으로는 妙香山·金剛山·頭流山을 꼽아 왔다. 그 가운데 묘향산은 雄, 금강산은 秀, 두류산은 肥饒함을 친다. 광해군·인조 연간의 시인 任叔英이 쓴 [贈任述之序]의 허두에도 이러한 평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산은 진작부터 '秀'의 美로 논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과 회양군에 위치하는 태백산맥의 일부로, 일부는 통천과 옛 간성에까지 걸쳐 있다. 태백산맥 분수령 서쪽에 회양군에 들어 있는 지역을 내금강이라 하고 분수령 동쪽에 거의가 고성군에 들어 있는 지역을 외금강이라 하며, 고성군 해안선 쪽에 바다에 있는 경승을 해금강이라고 한다.


이미 고려말부터 금강산을 실제로 유람하고서 詩와 遊記를 적는 일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여러 문인들의 金剛山錄이나 東遊記가 單行되어 두루 읽히고 금강산을 화폭에 대한 그림과 그 題畵詩文도 나왔다. 여행행로를 골간으로 견문을 기록하고 산천경물을 묘사하는 散文遊記도 여럿 나왔으며,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한글기록물도 서넛 존재한다. 한편 금강산의 비경을 묘사한 회화에 관하여 언급한 題畵 가운데 걸출한 것으로는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李用休의 [題楓嶽圖]({탄 炭+欠 만 曼=欠 集})를 들 수 있다.

 

모두 3편인데 첫편에서는 "殷七七(시절에 관계없이 아무때나 꽃을 피웠다는 당나라 때 도사)은 아무때나 불시에 꽃을 피웠다. 崔七七은 흙을 사용하지 않고도 산을 일으킨다. 둘다 경각에 이루어내니, 기이하도다"(殷七七, 非時開花, 崔七七, 不土起山. 皆以頃刻, 異哉)라고 하여, 崔北의 화필을 칭송하였다. 또 제3편에서는 "옛날 사람이, 아무 산은 조화옹이 어린 시절에 만든 것이어서 허술하다고 한 말이 있다. 내가 생각건대, 이 산은 조화옹이 老成해지고 솜씨가 익숙하게 된 뒤에 별도로 新意를 내어 창조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천하에 어찌 이 산과 방불할 만한 산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昔人云, 某山是造化幼少時所作故草草. 余謂, 此山乃其老成手熟後, 又別出新意 造者. 不然, 天下何無一山與之彷彿也)라고 하였다. 금강산의 비류할 바 없는 절승을 상상케 하는 말이다.


이렇게 조선후기의 문인들이 東遊의 실지 체험을 중시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금강산 일대의 유람을 통하여 天遊를 시도하고자 한 것이었다. 莊子는 大林丘山이 비록 사람의 마음을 틔워주는 연유일 수 있지만 六根(耳目口鼻心志)이 속박을 당하여 마음에 여유를 지니고 노니는 天遊를 하지 못한다면 정신은 그러한 大林丘山을 즐길 수 없다고 하였다. 금강산은 곧 大林丘山으로서, 기왕의 누정이나 서실이 위치한 小景의 안온한 공간과는 다른 체험을 하게 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체험한 시인들은 小景이 아닌 大景을 노래하여 豪情과 壯色을 담은 大句를 남겨, 豪邁한 氣魄을 담은 시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한 시속에 담겨져 있는 산수자연은 '飛動美'를 지닌 것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금강산의 모습은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속된 유흥의 수단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六根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안온함이 있다. 오욕칠정에 물든 나를 버리고 맑은 영혼의 '참된 나'를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산수자연의 참모습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인식 속에는 자연을 완전하고도 조화로운 세계로서 인식하는 자연관이 근저에 놓여 있다. 莊子가 말한 '맑은 마음'[心齋]의 상태에서 천지의 정신과 왕래하는 경지, 劉 이 말한 "마음이 사물과 교유한다"는 미학적 경지는 조화로운 완전한 자연 세계에 인간이 완전히 동화된 정신태도를 가장 적확하게 지적한 말로 환기된다.

 

도연명의 [飮酒] 시는 바로 이런 경지를 포착해 그린 것이요, 蘇軾이 [書李伯時山莊圖後]에서 "그 정신은 만물과 교류하고 그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관통했다"고 한 것이도 그것이다. 전통시대의 우리 문인들이 승경지를 중심으로 樓臺亭閣을 얽어두고 시문을 즐긴 것은 주변 풍광에서 그러한 정신태도를 지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들은 궁극적으로는 밖으로 사물을 사물에 구함이 없이 안으로 자기에게 기댐이 없는 완전한 자유의 경지인 '獨化'의 상태를 지향한다. 산수자연은 현실생활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속된 잡념을 버리고 순수하고 참된 나를 찾아가가는 공간을 마련하여 준다. 蘇軾의 [舟中夜起] 시를 보면, "밤 깊어 사방천지 적막한중에, 나홀로 그림자와 즐기고 있다"(夜深人物不相管,我獨形影相嬉娛)라고 하여, 현실적 고통을 통하여 깨달음과 초월에로 자세를 드러내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산수자연은 시인과 동떨어져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과 '사물의 정신'이 교감하는 순간의 일체감과 동일감을 지닌 세계 그 자체이다.
금강산 유람은 바로 그러한 '맑은 마음'[心齋]의 상태, 천지의 정신과 왕래하는 경지, 劉 이 말한 "마음이 사물과 교유한다"는 미학적 경지를 가장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다.

 

2. 금강산 유람 체험의 여러 양태
금강산에 대하여는 南孝溫이 일찍이 유람의 과정을 산문 [금강산기]로 남기고 李珥도 전 노정을 한시로 엮은 [楓岳行]이라는 장시를 남긴 만큼 조선 전기에도 많은 遊記와 한시가 나왔는데, 李滉은 1553년(명종 8) 가을에 洪仁祐(應吉)의 {遊金剛山錄}를 두고 序를 지어, 산수 유람을 方外之遊로서 예찬하면서, 동시에 금강산의 진면목을 궁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세상에서 정말로 方外에 뜻을 두는 자들은 모두 이 산을 한번 보고 싶어하지만, 朝市에 眷戀하여 雲霞와는 아주 동떨어져 거리를 두고 있으니, 岷嶺을 상상하느라 그저 수고로울 뿐이고 仇池의 꿈도 이미 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행히 한 두 사람 직접 가서 유람하였어도, 그 기이한 광경을 다 보고 장대한 모습을 구극에까지 찾아보아 산 전체의 요령을 얻어서 우리 동쪽 한 구석 나라의 鉅麗를 전부 망라한 예는 아주 드물다. 무릇 名山異境이란 것은 실로 天地의 秘藏이요, 靈眞의 窟宅이니, 어찌 사람마다 능히 다 엿볼 수 있겠는가?

 

이황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深遠을 窮極하여도 뜻이 고단하지 않고, 險艱을 歷履하였으나 기운은 더욱 굳세다. 奧妙함을 즐기고 幽靜함에 탐닉하여도 玄虛함에로 떨어지지 않고, 奇怪를 좋아하고 詭瑋를 숭상하여도 荒誕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絶頂에 올라 六合을 어루만지고  風을 몰아 鴻 에 초월하며, 鉅海의 물굽이를 보고 淸湖에서 탁영하여서, 感慨가 없어지지 않고 즐거움[樂]이 끝이 없는 것으로 말하면, 胸次에 얻은 바의 것이 어찌 그저 우뚝하게 높고 움푹하게 높은 데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거기에 妙와 術이 있었으리니, 物의 형상화가 공교한 것과 승경을 기록함이 아름다운 것은 언급할 여유가 없을 정도이리라.

 

이황은 遊山遊水에서 "奧妙함을 즐기고 幽靜함에 탐닉하여도 玄虛함에로 떨어지지 않고, 奇怪를 좋아하고 詭瑋를 숭상하여도 荒誕에 가까이 하지 않는" 태도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玄虛로 빠진다는 것은 도가적인 은일로 潔身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고, 荒誕에 빠진다는 것은 潔身에서 더 나아가 亂倫을 범하는 것이리라.

 


한편 李珥는 1576년(선조 9)에 홍인길의 {금강산록}에 서문을 썼는데, 홍인길의 글이 奇景의 묘사를 궁진한 '빼어남'(奇)의 측면을 찬미하였다. 遠遊가 시문가의 養氣에 유용하다는 관점에서였다.
그 글은 상세하되 번잡하지 않고, 곱디곱되 한껏 뽐내지를 않앗다. 산의 뿌리와 지맥, 물의 수원과 지파, 구름을 삼키고 연무를 뿜어내는 모습, 가지를 모으고 선 수풀과 무리져 엉켜 있는 바윗돌 등등 千態萬狀이 一筆로 다 거두어져 있어서 군더더기이거나 부족하거나 한 것이 다시 없으니, 읽는 이로 하여금 문밖을 나서지 않고서도 일만 이천 봉우리가 또렷이 눈에 들어와 있게 한다. 글이 이 경지라면, 山水와 함께 그 빼어남(奇)을 함께 할 만하다.

 

東遊를 통하여 기운을 動蕩하게 한다는 것은 실은 조선중엽, 후기만의 새로운 체험 양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權近도 1396에 表箋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明에 使行가서 明 太祖에게 지어 보인 24首의 應製詩 가운데 [金剛山]({陽村集} 권1)의 시를 배치하여, "東遊便欲凌高頂, 俯視鴻 一 胸"이라고 하였다. 그보다 앞서 고려시대의 林椿은 관동을 유람할 때, 司馬遷이 會稽에 가서 禹穴을 구경한 뒤 정신과 문장이 疏宕해지고 雄壯해 졌다는 것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 뒤 행정기의 성격을 띤 李穀의 [東遊記]와 譜風土의 뜻을 담은 安軸의 [關東瓦注]가 나오는 등, 東遊는 '사인묵객'들의 염원으로 되었다. 그 뒤 東遊의 체험에서 이루어진 시를 行錄으로 엮은 것들이 다수 나왔고, 그것들이 '山水痴'에도 불구하고 허약한 몸과 바쁜 벼슬살이로 인해 직접 행람할 수 없는 이들에게 '臥遊'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李滉과 李珥의 글은 東遊의 두가지 양태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동유를 노래한 시와 문은 자연 속에 노닐어 평소의 불만불평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감흥을 얻고자 하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 있는가 하면, 산수미를 발견하여 형상화하려는 순수예술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다. 더구나 관동 일대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민족사의 간단 없는 흐름이 이루어진 생활 공간으로서 '歷史美'를 지니고 있다. 산하가 이루는 풍경은 인간 주체의 삶에 의하여 부단히 변화한다. 관동의 산하는 여행자의 눈에 소외된 채로 사물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 주체를 매개로 재구성된다. 조국 산하의 풍경 속에 인간 주체가 있다는 사실을 한시와 한문 작가들은 일찍부터 인식하였다. 자연미와 역사미와 풍경(경관)이 시인의 붓끝에서 재창조되어, 삶 자체를 반성하는 진지한 자세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중엽 이후로 그 東遊라는 一大事가 대다수의 문인들에 의하여 결행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념의 세계에서  胸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이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문인들의 대여행 체험으로서 일반화될 뿐만 아니라, 여항인들까지도 동유에 나서게 된 것이다. 종래 금강산을 보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사대부가 아닌 기층민들도 금강산 유람을 결행한 일이 많았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東遊는 그러한 속설에 지배된 여행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의 해방을 갈구한 행위였다. 실제로 서울을 떠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기 위하여는 한달 남짓한 시일이 요구되었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여러 從行人을 대동하는데다가 견마꾼과 견여꾼을 수시로 징발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 여행은 일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였던 것이므로 동유는 하나의 결단 행위였다.


명산의 유람은 동시에 養生의 방법으로도 적극적인 의미를 지녔다. 조선 중기의 문인 楊士彦(1517∼1584)이 {蓬萊詩集}에 [楓嶽中臺]·[狗峴]·[盧 春井]·[獐項嶺]·[歡喜峴]·[白雲橋]·[山映樓]·[揄岾寺]·[梨岾]·[佛頂菴觀日出] 등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10수의 시를 남긴 것은 동유 체험의 과도적 형태를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獐項嶺] 시의 "羽盖登寥廓, 狂遺七寶鞭. 天關開白日, 鵬路掃蒼烟. 萬壑孤 外, 千山一笑邊. 安期何似者, 自 上方仙."는 그의 특이한 도가적 삶과 풍모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일상성을 극복하고자 한 문인들의 東遊와는 달리 낭만적인 遊山이었다. 정조 연간에 남인의 落拓한 문인 鶴洲 許 (자 正叔, 陽川人)은 장년에 壹鬱한 심사를 떨쳐버리고 養生家의 말을 따라 名山에 노닐었는데, 그도 楓嶽에 노닐고, 毘盧에 오르고 바닷길로 海金剛을 찾아보고 돌아와 일시 삼각산 남쪽 松石 사이에서 綸巾道服으로 소요하였다. 당시 불우한 선비들이 養生의 한 방법으로 명산 유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여러 동기에서 東遊를 결행하지만, 東遊의 실제 체험은 遊客의 바람을 만족시켜 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李家煥은 "금강산은 이름이 높아서 유람하러 오는 車馬가 遝至하여, 티끌과 먼지가 나날이 쌓여간다"고 하였다. 탈속과 양생을 추구하러 동유를 결행하지만, 그곳에는 오히려 車馬의 雜沓이 있을 뿐이어서, 그 자체가 하나의 俗의 세계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東遊의 체험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반성 또한 없지 않았다.


金正喜는 權敦仁의 東遊 소식을 묻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海嶽이 솟아나오고 영록(신령한 물굽이)이 모습을 드러낸 곳에 曇無竭菩薩은 앞에서 인도하고 永述(신라 때 삼일포에서 놀았던 四仙. 영랑과 술랑을 합하여 칭한 말)은 뒤를 맡아서, 안으로는 萬瀑洞이 있고 밖으로는 九龍淵이 있는데, 지팡이와 肩輿로 一行이 단란한 가운데 갖가지 신령한 동굴과 갖가지 神宇(즉 佛寺)는 필경 어떠하던가요? 大人相을 보아고 宰官身을 드러내시면서 연로하신 몸으로 이 一大事를 성취하셨으니, 그것이 어찌 작은 인연이겠습니까? 혼탁한 像末(석가의 교법이 행하였던 正法의 세상 뒤인 像法과 末法의 세상)의 시대에는 거의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매양 이 산에서 노닐고 돌아온 사람 가운데 혹은 '본 것이 들은 것만 못하다'고도 하는데, 이 말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옛날 武侯(제갈공명)의 밑에 있었던 한 늙은 군졸이 晉 나라 때까지 생존하여 있었는데, 혹자가 무후에 대하여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무후가 살았을 때에는 보기에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후가 죽은 뒤에는 다시 이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을 옮겨다가 이 산의 公案으로 삼고자 합니다.

 

신화와 전설, 불법의 세계가 혼효되어 있는 금강 세계의 유람이 지닌 의미를 곱씹어 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遊山 때보다도 유산 체험 뒤에 남는 감동과 그 의미의 확대가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금강산 유람에서는 인간의 왜소성이 자각되거나 반대로 장엄산하 앞에서 의식의 고양을 경험하기는 하였으나, 인간을 혐오하는 사상은 나오지 않았다. 이를테면 王維의 산수시가 淨心을 가지고 外景을 대하여 '淸淨한 自性'을 추구함으로써 空·寂·閑 따위의 선취를 표현한 것과 같은 것이 금강산을 노래한 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곧 禪的 산수시를 발견할 수 없다. 선적 산수시는 자연의 事物事象을 열거하는 듯 보이지만,  悟克勤이 말한 "頭頭 외물이 아니다. 하나하나 본래심이다"라고 한 말에 나타나듯 근원적 주체성이 완전히 객체인 境으로 화해 버린 '心境一如'의 상태를 드러낸다.

 

금강산을 노래한 산수시는 그러한 靜的인 심상이나 태도가 아니라 왜소성의 환기, 일상성의 극복, 본래성의 지향과 같은 動的인 심상과 태도를 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금강산 일대의 경색은 번민이 없어진 공활하게 맑은 풍경, 고양된 의식이 투영된 장대한 광경으로서 묘사된다. 북송 때의 蘇軾이 발견한 것과 같은 역동적 자연의 모습이 금강산 시에서 주로 나타난다. 소식은 機心을 벗어던지고 자유정신을 획득하여 탈속적이고 초연한 모습을 시 속에 드러내었다고 평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자연을 노래할 때에는 혹은 미친 듯 환희하기도 하고 혹은 경탄해 마지 않는 격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후자의 모습이 금강산 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앞서 말하였듯이 조선후기에는 금강산 유람과 관련하여 많은 시문이 지어져, 單行되거나 문집 속에 수록되어 전한다. 단행된 산문 유람기 가운데는,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한글기록물도 서넛 존재한다. 여기서는 소론의 학자 徐榮輔가 기록한 [楓嶽記]({竹石館遺集}) 가운데 첫머리를 인용하여, 금강산에 어떠한 승경이 있는지를 일별해 두기로 한다.

 

동국의 명산의 으뜸은 풍악의 산이다. 거기의 나무가 대부분 단풍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또 金剛山이라고도 하고   山이라고도 하는데, 산길이 처음으로 승려들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므로 불교의 용어가 들씌워진 것이다. 이 산은 동해 가에 임하고 북에서부터 비스듬히 남쪽으로 퍼져서 萬物肖洞이 되어 溫井嶺을 거쳐서 毘盧峰이 되었는데, 줄기와 가지가 깔리고 극도의 변화를 다 이루어 가득하게 깔리고 구불구불하며, 떨기친 봉우리들이 위로 뽑아나서 나란히 수려하고, 高城 땅을 가로지르고 淮陽 땅에 서려 있으며, 동쪽을 外山이라 하고 서쪽을 內山이라 한다. 그 우뚝 높이 솟은 봉우리들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 비로봉이 가장 높아서 남쪽을 향하여 터억 버티고 있다.

 

그 앞에는 衆香城이어서, 멀리 뻗어가 다시 쭝긋 일어서서는 望高臺가 되었다. 그 왼켠은 具其淵이고 오른켠은 九龍瀑布이며, 그 뒤는 內水岾이니, 산의 안팎이 여기에서 경계를 이룬다. 그 洞天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長安寺洞이니, 內山의 第一曲이다. 靈源洞이니 百塔洞이니 百川洞이 이니 하는 것이 있는데, 백천동은 온산의 뭇 계곡물이 모이는 곳이다. 그곳을 거슬러 오르면 表訓寺洞으로, 거기에는 大伽藍이 있다.

 

그 위는 正陽寺洞이고, 또 서너리를 가면 왼켠으로는 靑鶴臺를 끼고 오른켠으로는 小香爐峰을 끼고 있으며, 그곳이 萬瀑洞인데, 거기에는 須彌水가 지나간다. 또 북쪽으로 올라가면 八潭洞과 迦葉洞이 있다. 衆香城의 아래에 있는 것은 白雲洞이고, 毘盧峰 아래에 있는 것은 圓寂洞이다. 內水岾을 넘으면 曉雲洞이고, 서너리를 채 가지 않은 곳에 船潭洞이 있으며, 다시 서너리를 가면 楡岾寺洞이다. 洞府가 宏敞하고 佛宇가  麗한 곳이 中內院洞인데, 百塔洞과 서로 表裏를 이루고 있다. 望高臺는 淑氣가 亭毓(즉 양육)하여 이루어낸 것이다. 百川橋洞이니 鉢淵洞이니 神溪寺洞이니 하는 모두 洞府는 계곡물이 있어서 만들어내었다. 대개 그 봉우리들은 모두 흰돌을 쌓고 작은 조각들을 중첩한 것이고, 그 물들은 모두 옥을 튀기고 구슬을 울리듯( 玉鳴瑤)한다. 그 洞府는 혹은 구부러지고 꺾어지고 에둘러 가거나, 울창하여 그윽하고 아득하게 깊숙하며, 혹은 환하게 툭트여 즐길 만한데, 혹은 험하여 오를 수가 없거나 혹은 너무 가파라서 오래 있을 수가 없으니, 隱淪이나 서식할 만하고 靈仙이나 거처할 만하다.

 

서영보는 금강산이 隱淪과 靈仙만이 거처할 수 있고 일반인들은 오래 있을 수 없을 만큼 險絶하고  凜하다고 하였다. 바로 그 점이 유람자들로 하여금 안온한 靜閑을 느낄 수 없게 한 이유요, 금강산 유람의 한시에서 小景을 소재로 한 淸閑의 풍격을 낳지 않았던 이유라고 생각된다. 서영보는 금강산의 위치를 기술하면서 어떤 고을에서 몇 리 떨어져 있다는 식으로 적지를 않았다. "동해가에 임하고 북에서부터 비스듬히 남쪽으로 퍼져서"라는 식으로 그 웅대한 스케일을 상상하게 하였다.

 

3. 조선후기 문인의 금강산 한시
금강산과 관련한 시로는 정조가 文臣들에게 7언 50운의 排律로 지어올리게 한 [金剛萬二千峰]의 응제시가 朴齊家, 李晩秀 등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동유의 직접 체험을 서술한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금강산 어구에 이르러 영, 정조 때 남인의 문인이었던 李獻慶은
초천의 첫째 다리 건너오니
흰 바위 맑은 모래, 물빛에 흔들리고
조계수 한잔 물에 입안 가득 향내음
속세의 띠끌 생각 예와서 사라진다
來渡初川第一橋, 淸沙白石水光搖.
曹溪一酌香生齒, 人生塵根到此鎖.

 

라고 하였다. 금강산 일대의 산수자연은 사대부들의 생활 공간 속의 안온한 자연경관과는 사뭇 달랐다. 그곳은 曹溪의 물이 흘러 人生의 塵根을 죄다 소멸시켜 주는 공간이었다. 곧 觀照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성을 환기시켜 주는 장엄산하로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 문인들은 금강산에 불교식의 이름이 붙은 것을 못마땅해 하였고, 사찰이 많은 것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들도 매순간 일상성과 본래성의 번전을 경험하는 구도자로서, 금강산의 장엄한 광경이 일상성으로부터의 탈각을 촉구하는 체험을 거기서 겪었던 것이기에, 기실은 유불의 교리상의 차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조 때 문인 李宜顯은 釋迦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좋구나 이 절간 누대 북쪽은
깎아 세운 벽이 푸른 허공에 참예하고
높이 빙둘러서 속세 먼지를 끊었구나
아침에는 구름, 저녁이면 노을, 제절로
好是寺樓北, 削立凌碧空.
廻高絶 埃, 雲霞自朝夕.
그는 地藏峰도 노래하였다. 불교를 비난하려는 뜻은 毛頭 없다.
수려한 경색은 쇠를 쌓은 섰고
嵐氣 사라진 뒤에는 또 아지랑이
위대하여라 조화의 공이여
그 원기가 여기에 結晶하였도다
秀色立積鐵, 嵐靄互明滅.
偉哉造化功, 元氣此融結.

광해군 때의 任叔英은 [登毗盧峰]에서, 금강산의 광대한 세계를 자못 커다란 기상으로 노래하였다. 비로봉은 금강산을 하나하나 발밑에 두고 내려다 볼 수 있는 절벽 산이라고 한다.

개골산 정상에서 온 세상 바라보니
광대무변 대천세계, 풍진을 떠나 있다.
동해 물 길어다가 봄술을 담아내어
억만 사람들을 취케 하련다.
皆骨山頭望八垠, 大千超越隔風塵.
欲傾東海添春酒, 醉盡 中億萬人.

 

주자학이 발달한 이후로 조선조의 산수시는, 대립을 포함하고 초월하는 근원적 실재인 하늘의 생생운행하는 모습을 산수자연 속에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사람과 동물 및 만물은 각각 개체적인 것으로서 독자의 위치와 의의를 지니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다른 것을 범하는 일 없이 전체로서 조화있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소이는, 그 생성이 무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관철하는 一味의 도리, 즉 理에 의하여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은 인욕에 의해 심하게 장애를 입어 理의 생생운행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유가, 특히 주자학에서는 불가에서처럼 속세간과 자연을 二諦로 확연히 양분하려 하지 않고 속세간의 일용응연처에서도 천지인물의 공공의 도리를 발견하라고 주장하지만, 속세간의 저러한 속성은 리의 생생운행을 체득할 수 있게 하는 산수자연에의 조회를 수시로 요청한다.

 

인조 때 李景奭은 산문과 시를 한데 아울러 [楓嶽錄]을 남겼다. 조화의 一大妙觀을 궁람할 수 있는 歇惺樓를 노래한 시 가운데 한 수를 보면 진리의 본래성을 획득하려는 지향의식을 토로하였다. 헐성루는 正陽寺 東禪堂의 동쪽에 있는 누각으로 금강의 일만 이천 봉이 누각 앞으로 향하여 있는 듯하며, 화강함의 白馬峰과 푸른 색의 大香爐峰·小香爐峰이 특히 잘 보인다고 한다.

 

공중에 뜬 옥골은 비 개어 새롭고
구추의 서리 진 후 정신 더욱 맑도다
붉은 꽃 단풍 잎은 모두가 가식이니
잎과 꽃 없는 것이 비로소 참모습
玉骨浮空霽色新, 九秋霜後更精神.
花紅葉赤渾爲假, 無葉無花始是眞.

 

17, 8세기에 들어오면 노론계 지식인들인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하들은 서로 금강산 기행을 고무하는 한편, 금강산 기행의 체험을 시문으로 엮어내어 그들 사이에서 금강산과 관련된 한시문이 대량으로 나왔다. 李秉淵은 金化縣 수령으로 있을 때인 1712년에 정선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여,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海岳傳神帖}으로 엮고, 3천자의 장편 시를 지었다. [내가 풍악에 노닐 때에 게을러서 시를 짓지 못하다가, 올라가 다 본 뒤에 마침내 구경한 바를 한데 몰아 3천 자로 서술한다.

 

감히 시라고는 할 수 없고 그저 지나쳐 온 바를 기록할 따름이며, 말이 저속한데다 운자까지 중복하여 놓았으니, 독자게서는 비웃지 마시라]라는 긴 제목이 붙어 있다. 그 전반부에서는 금강산의 생성을 우주 만물의 생성 이치 속에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가 금강산을 주유하고 얻은 흥취를 총괄한 장편의 시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의 금강산 시 가운데 절묘한 것으로는 [正陽寺]를 들 수 있다.

 

본래 정양사는 천일대에 마주하고 있는데, 그 부근은 일기가 고르지 않다. 김창협의 [東遊記]에 "천일대에 오르니 이는 정양사의 앞기슭이다. 마침 흰 눈이 온 골짜기에서 나와 한줄기 길로 합쳐지니 그 모습이 마치 가벼운 비단을 이리 저리 폎쳤다가 말았다가 하는 듯하여 잠깐 사이에 변하여 일정치 않았다.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가리개에 덮힌 듯하여 어떤 때는 반만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머리카락 만큼 가늘게 보이기도 하여 고운 자태가 생생하였다"고 적었다. 이처럼 일기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현란한 미의 연출을 이병연은 이렇게 시로 표현하였다. 잠시도 멈춤이 없는 우주자연의 운동을 깊이 경험한 것이다.

 

정양루 모서리에 우그르르 천둥이 울리더니
천일대 앞에 잠깐 비 뿌리다간 걷혔다
천만 겹 먹장구름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저녁햇살 거꾸러져 또다시 비껴 온다
正陽樓角殷輕雷, 天一臺前雨乍開.
且看崩雲千萬疊, 夕陽顚倒又橫來.
노론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금강산] 절구가 있다. 천지간에 우뚝 선 금강 일만이천봉을 마주하여 느낀 特立獨行하는 志士의 정신이 간결한 오언절구의 형식 속에 응축되어 있다.

산봉우리 구름과 함께 희어서
구름인지 산인지 가리기 어려워라
구름 간 뒤 산만이 홀로 섰으니
일만 이천 봉
山與雲俱白, 雲山不辨容.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峰.
다음 수에서는 문명와 문화의 중심이 중국에 있지 않고 우리나라에 있다는 자부심을 가탁하였다.
우리나라에 금강산이 나온 뒤로는
중국의 오악이 무색해졌다
신선 사는 굴집이 하도 많으니
서왕모도 西方에 난 것을 한탄하리라
東國金剛山, 中原五岳低.
神仙多窟宅, 王母恨生西.

영조 때의 노론계 팔문장가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히는 黃景源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여러 시를 남겼는데, 香爐峰 아래 石潭인 八潭을 노래한 8편의 연작시는 장엄산하와 대비되는 인간의 왜소성을 환기시켜 깊은 비애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 여섯째 수.
수많은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여섯째 연못 서쪽에는 계곡 어구가 멀리 바라보인다
단풍 숲은 길손을 전송하여 가을 빛이 저물고
우는 새 한가론 구름만이 적막하구나
鬱鬱奇峰凌碧 , 六潭西望洞門遙.
楓林送客秋光暮, 啼鳥閒雲兩寂寥.

 

唐詩 이후로 한시에는 자연의 완전성에 대비되는 인간의 불완전성이 더욱 뚜렷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추이하는 만물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의 생명도 시시각각 추이하여, 늙으막에 접근하여 간다는 사실이 비애를 낳는다. 인간도 자연의 하나인 이상 자연과 마찬가지로 질서와 조화가 충만한 세계를 만들 수 있을 터이어야 하거늘 실제로는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속에서 비애가 싹튼다.

 


영, 정조 시대에는 사대부 문인들만이 아니라 寒士나 여항의 문인들도 금강산을 유람하고 東遊錄·金剛錄 등을 역었고, 그것에 대한 題後도 많이 나왔다. 李用休의 [題許成甫東遊錄後]({탄만집}) 같은 단형의 奇文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용휴는 [沈大士楓嶽錄]({탄만집})에서 東遊는 燕貨之聚로 향하는 西遊나, 穀粟之府에 마음을 쏟는 南遊나, 佳冶者를 쫓는 北遊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즉 西遊·南遊·北遊가 火藏인 마음의 욕구를 따르는 여행이라면, 풍악을 찾는 東遊는 淸遊일 다름이라고 하였다.

 

나는 늘, 조물주가 耐性이 없거늘  奇하고 傑特한 광경을 海左의 朝鮮國 關東 지역에 시설하고 그 능력을 다하고 그 기교를 전부 펼쳐서 자긍하고 뽐내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더구나 나라에서 遊山을 금지하는 令도 없다. 그래서 겨우 걸음마만 할 줄 알면 모두 먹을 것을 싸매고 신발을 준비하여 동쪽으로 향하여 간다. 그런데 늙고 병든 사람은 늘상 동쪽으로 가려는 꿈을 꾸거늘, 조정이든 저자든 가릴 것 없이, 사람들 발걸음은 나날이 꾸역꾸역 서쪽으로 향하면서 "燕貨(중국의 물화)가 모이는 곳이라서"라고 말하고, 남쪽으로 향하면서는 "穀粟의 곳간이라서"라고 말하며, 북쪽으로 향하면서는 "예쁜 계집들이 꽃처럼 아름다워서"라고 말한다. 오직 동쪽 한 길만은 풀이 신발을 안보이게 뒤덮고, 종일토록 산새가 슬피 울면서 왕래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마음은 火藏이므로 熱處에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

 

楓嶽은 비록 좋기는 하지만 淸遊이기 때문에, 그곳은 버려두고 熱處로 내달려가는 것이다. 道書에 "洞天靈境(천하의 명산승경)에 발길을 옮겨 가본 사람은 仙籍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 조금도 그 점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이 산을 유람할 수 있겠는가? 靑松 沈大士는 보통의 일만 사람 속에 끼지 않고서 표연히 옷자락을 떨치며 동쪽으로 향하였으니, 나갈 때에 마치 길 안내하여 이끌어주는 자가 있듯이 하였다. 이 산과 宿緣이 있어서 丹臺에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가 유람을 기록한 여러 작품들이 淸曠하여 티끌이 없으리란 사실은 꼭 보고 난 뒤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또 듣건대, 沈大士가 동유할 때에 그 아들이 따라간다고 한다. 이 유람사는 한 姓 내에 한 사람이라도 실행기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부자가 함께 한다니 얼마나 盛事인가! 그를 위해 연적을 갈고  紙를 잘 펴고 이렇게 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가장 등람을 많이 문인으로는 申光河와 鄭瀾(滄海)을 꼽는다. 그 가운데서도 신광하가 등람의 참 경험을 하였고 시문이 탁월하다고 하여 고평을 받았다.

 


申光河(1732∼1796)는 백두산 등람 이후에 白澤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는데, 시 즐기기를 창포김치 즐기기보다 더했다고 丁若鏞이 말한 바로 그 시인이다. 그는 妙香山·  山(금강산)·五臺山·俗離山의 절정에 올라보았고 그 행로와 감흥을 시문으로 남겼다. 정조 2년(1778) 8월에 금강산 유람길에 오를 때에는 睦萬中과 李用休·家煥 부자가 序를 지어 주었다. 李用休의 [送申文初遊金剛山序]({탄만집})를 보면

 

금강산은 이름이 높아서 유람하러 오는 車馬가 遝至하여, 티끌과 먼지가 나날이 쌓여간다. 정유년(정조 즉위년, 1777년) 가을 8월에 하늘이 크게 비를 내려 한바탕 씻어내어 버리자, 本相(본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선비 가운데 문학도 있고 기이함을 좋아하는 사람인 申文初가 그 말을 듣고 그리로 갔다.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비에 씻기기 전에 본 모습은 병들고 때에 찌든 얼굴이고, 지금은 세수하고 목욕하여 모습을 바꾼 것이다. 손님을 끌어들이는 시기에 文初가 가는 것이므로, 마땅하고도 다행스럽다. 文初의 東遊는 마침 국내에 과거 고시에 합격한 擧人들이 대과에 응시하러 가는 날이니, 이것은 또한 仙人과 凡人의 分路處(分岐處)이기도 하다.

 

라고 하여, 범속한 선비들이 赴試하러 서울로 몰려드는 때에 큰 비 끝에 本相을 드러낸 금강산 속으로 표표연하게 떠나는 신광하의 탈속한 모습을 奇文으로 그려내었다. 신광하는 금강산 유람의 전말을 [東遊紀行]({진택집} 권11)으로 기록하였고, 그 때의 시를 {東遊錄}({진택집} 권4)으로 엮었다. 금강산 유람 끝에 양양부사로 있는 丁範祖(1723∼1801)를 찾아가 가서는 剪燭共賦하기를 38수에 미치고, 낙산사에서 聯句를 하였다. 신광하는 정조 11년(1787)에 다시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여 그 때의 시를 [楓嶽錄]({진택문집} 권8)로 엮게 된다.
신광하는 정조 2년의 금강산 유람 때에 [金剛山歌]·[毘盧峰歌]·[萬瀑洞歌]·[九龍瀑布歌]·[萬瀑洞題名石歌] 등의 歌行詩를 통하여 호방한 기상을 드러내었다. 그 가운데 [금강산가]는 이렇다.

 

그대는 보지 못하나 금강의 산이 곧추 사만 팔천 척 솟아나 있어
그곳이 바로 曇無碣이 거처하는 곳인 것을.
天光과 海色이 서로 갈고 마셔서
바위의 형상은 공중에 솟아나 萬古에 희도다.
二十八宿가 삼엄하게 벌려 있고
三十六帝가 너울너울 날아 올라 참예하는 곳.
하늘의 바람은 瑤臺의 白雪을 불어 떨어뜨렸고
일천의 벼랑과 일만의 洞府가 깨끗함을 다툰다.
해와 달은 그 속에서 배회하니
그것들이 드나들어 빛이 소멸함을 모르겠다.
大小 香爐峰과 衆香城은
옥처럼 영글어 찬란해 너무도 기특하나니
夕陽이 거꾸로 비쳐와 바위의 채색을 흔들고
靑天의 금대궐 은대궐을 내리비춘다.
穴網峰과 毘盧峰이 마주하여 솟아나고
普賢峰과 五老峰은 附耳(귀를 댐)하는 듯.
萬瀑洞은 百川橋에서 만나
一夜에 콸콸, 東海 물로 쏟아져가니
빠르면 벼락이 치듯하고
느리면 그 물결은 고운 무늬.
맑은 여울과 흰 바위가
서로서로 언제까지고 어우러져
물과 바람이 相生하여
요란스럽다간 그친다.
惡獸도 없고 독사도 없되
蒼鹿이 울고 靑 가 울부짖으매
震澤狂夫는 魂魄이 벌벌 떨려
손으로 바위를 붙잡고서 응시하노라.
天逸臺 앞에 桂樹가 하나 있어
萬年을 靑靑하여 푸르러서 죽지 않나니
桂樹은 뿌리는 靑銅처럼 구부러져
九龍이 싸 안고소 幽潭 속으로 들어간다.
桂樹 아래에 어떤 사람이 있는 듯하여
北斗를 타고 天紀를 밟는 듯.
나에게 五龍의 秘法을 주어
金泥와 玳檢이 靑雲의 상자에 담겨 있도다.
堯舜과 文王·康王은 아득하기만 하니
나는 옛 성인을 생각하며 탄식하나 어이 미치리.
듣자니 西方에 崑崙山이 있어서
그 위에선 星辰을 딸 수 있다나.
그 속에 西王母가 있어서
아침마다 紫宸(玉皇上帝宮)에 조회할 때
八駿馬가 하늘에서 오고
白雲이 車輪같은데
元氣가 出入하는 곳이어서
아침해나 저녁해가 神光을 머금었단다.
가로놓인 黃河가 구천리를 隔絶하여
나로 하여금 멀리 바라보며 괜스레 애간장을 끊게 하누나.
괜스레 애간장을 끊는 것이지,
그대는 못 보았나 금강 일만 이천 봉이 靑蒼(하늘)을 갈고 있는 형상을.
君不見金剛之山直上四萬八千尺, 乃是曇無碣之所宅.
天光海色相磨 , 石狀萬古空中白.
二十八宿森開張, 三十六帝參 翔.
天風吹落瑤臺雪, 千厓萬洞爭皓潔.
日月裵徊於其中, 不知出入光景滅.
大小香爐衆香城,   燦燦尤奇絶.
夕陽倒景搖石彩, 靑天照耀金銀闕.
穴網毘盧相對起, 普賢五老如附耳.
萬瀑洞會百川橋, 一夜奔流東海水.
疾則  , 徐則文綺.
淸瀨皓石, 相與終始.
水風相生,  然而止.
無惡獸兮與毒蛇,  蒼鹿兮啼靑 .
震澤狂夫驚魂魄, 以手據石而直視.
天逸臺前一樹桂, 萬年靑靑靑不死.
桂樹根如靑銅屈, 九龍抱歸幽潭裡.
若有人兮桂之下, 騎北斗兮履天紀.
授我以五龍之秘法, 金泥玳檢靑雲 .
堯舜文康已邈矣, 我思古人何嗟及.
吾聞西方有崑崙, 其上可以摘星辰.
中有西王母, 朝朝朝紫宸.
八駿天上來, 白雲如車輪.
元氣之所出入, 朝日夕日含神光.
黃河橫絶九千里, 使我遙望空斷腸.
空斷腸, 君不見金剛之萬二千峰磨靑蒼.

 

금강산을 중국의 곤륜산에 비길 만한 元氣의 출입처로 보았고, 그 속에서 원기의 혼융함을 체득한 충만된 정신 세계를 노래한 것이다.
금강산의 심장은 내금강의 摩訶衍이라고 한다. 마하연은 본래 신라 문무왕 원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곳에서 생을 마치려 하였고 고려의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김창협의 [東遊記]에는 "火龍潭에서 1리를 가면 마하연암이다. 뒤에 衆香城이 마치 병풍을 친 듯하고, 앞으로는 穴望峰과 曇無竭峰 등 봉우리가 병풍을 둘러친 듯 늘어서 있다. 참으로 이름난 가람이다"라고 하였다. 長安寺나 表訓寺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비하여 마하연은 괴이한 암벽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18세기 소북 계열의 시인 任希聖이 지은 [摩訶衍] 시({在澗集})는 俗塵의 세계만 盛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神宮에도 성쇠가 있음을 깨닫고는 推移하는 인간만물의 왜소성을 실감한 비애의 감정을 토로하였다.

 

八潭의 노님이 처음이자 끝이니
뭇 경승들을 몇번이나 편력하였던가.
편여는 인부들 발을 따라 높이 오르고
아스라한 바윗벽은 시선 따라 빙빙돈다.
衆香城이 차츰 가까워지자
다시 摩訶衍 승지를 얻었도다.
寶地의 境地가 절로 유별나매
靈宅의 명성을 견줄 데 없구나.
雲臺은 잠깐 정수리를 드러내고
曇竭은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었다.
澄明한 빛이 桂樹 수풀과 암합하고
햋빛이 비치는 단풍색이 현란도 하다.
이렇게 아스라히 먼 경지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참 흥취를 만끽한다.
애석한 것은 먼지덮힌 龕室이 닫혀 있어서
齋香 못 올린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
禪宮에도 盛衰가 있는 법이니
世界는 정말로 變幻이 심하도다.
떠나려다 다시 고개돌려 바라보매
여기에 온 것도 번개가 지나가듯 한순간.
八潭游始窮,  勝歷幾 . 輕輿逐趾高,  壁隨眼轉.
稍近衆香城, 更得摩訶衍. 寶地境自別, 靈宅名仍擅.
雲臺乍露頂, 曇竭全披面. 澄明桂陰合, 照爛楓色絢.
冥心坐超忽, 眞興溢顧眄. 所惜塵龕閉, 久關齋香薦.
禪宮有衰盛, 世界尤幻變. 將去復回首, 此來猶過電.

 

한편 신광하의 [宿摩訶衍] 시는 생명의 源頭에서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는 순간을 노래하였다.
뭇 봉우리에 아침 안개 잠겨서
아물아물 얼마나 충만한지 모를 정도
길손은 元化 속에서 길을 잃고
승려는 太淸 곁에서 잠이 들었다
솟 바위는 별들과 다투고
울려나는 샘은 뇌우가 쏟듯하다
옷깃 열어제치고 감탄해 마지 않다가
문득 이 미친 늙은이를 조소하노라
衆峀浸晨霧,   不卞充. 客迷元化內, 僧睡太淸傍.
仰石星辰競, 鳴泉雷雨放. 披衣叫奇絶, 却笑老顚狂.
姜浚欽(1768∼?)도 금강산을 유람한 시들을 {金剛錄}({三溟集} 所收)으로 엮었는데, 그 가운데 摩訶衍을 노래한 시는 이렇다.
十里에 뻗은 藤蘿의 산길,
藍輿에 의지하여 술이 반쯤 깨었다.
바위는 얼굴바짝 일어서고
산은 佛頭 위에 푸르다.
造化가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賢才는 거반이 이름을 새겼다.
애석하여라 이 명승지가
일찍이 山海經의 {大荒東經}에 누락되다니.
十里藤蘿徑, 藍輿倚半醒. 石從人面起, 山在佛頭靑.
造化皆呈象, 賢才半 名. 惜玆名勝地, 曾漏太荒經.

金正喜는 進士 沈斗永의 금강산 시를 아껴서 그의 {雜著}에 摩暉嶺, 歇星樓, 毘盧峰, 白雲臺 등 4수를 싣고, 그 시구들이 모두 滄海를 거꾸로 뒤집고 은하를 구부려 쏟으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평하였다. 심두영이 摩暉嶺을 읊은 시는
이생이 먼저 마휘령에 올라 하는 말이
팔월 높은 산에 하얀 눈이 쌓였다나
옛날에 들은 말은 도무지 황홀터니
갑자기 대하고선 지극히 황당하다
멀리 보매 가을 일러 붉은 잎 전혀 없고
가까이 오매 해 높아도 석양이 많아라
쉰 넷의 나이에야 일을 마치고
이 몸이 오늘에야 금강에 들었구나
李生先上摩暉語, 八月高山白雪長.
昔者所聞都 惚, 猝然相對極荒唐.
遠看秋早無紅葉, 近到日高多夕陽.
五十四年能事了, 此身今日入金剛.
라고 금강산의 異景 속에 든 기쁨을 노래하였다. 歇星樓를 노래한 시도 역시 일상을 벗어난 方外之遊의 환희를 다음처럼 노래하였다.

 

드문드문 날아오르길 노한 듯이 하고
무리지어 읍하니 서로 사랑하는 것같다
만 이천봉 꼭대기서 마음을 풀었나니
하계에서의 삶은 前生 오십년
落落飛騰如共怒, 群群拱揖似相憐.
放心萬二千峰上, 下界前生五十年.

조선조 오백년 사직이 終焉을 고하려 할 때에 우뚝 나타난 松柏之士 崔益鉉(1833∼1906)도 50세 되던 1882년에 지기들과 금강산을 올라 보고 40편의 시를 남겼다. [4월 3일에 여러 벗들과 금강산을 가다](四月三日與諸友發金剛之行)라는 시 이하 40편이 문집인 {면암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이 기행에 앞서 7년 전에는 조정의 일을 바른 말로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려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온 일이 있었다. 금강산 유람은 어쩌면 혼란 속에 빠진 나라의 일을 걱정하여 생긴 마음의 병을 씻어내버리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행에서도 나라 일을 근심하는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北寬亭 시가 있다.

 

훨훨 행장을 떨치고 동쪽으로 향하지만
님 계신 데 돌아보니 근심을 누그려뜨리기 어렵다
서울은 이즈음 천번이나 난리를 겪었나니
요새 방어지는 몇년이나 험한 전쟁 겪었던가
이 곳에 세 성씨가 왔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시 보니 아름다운 뜰에 누대가 솟아 있군
먼저 여기 차지한 주인이 부러우니
세상밖에 한가히 노니는 그대가
翩翩  向東州, 回首難寬望美愁.
古都形勢經千劫, 重地關防閱幾秋.
曾聞巨室傳三姓, 更看名園聳一樓.
却羨主翁先據了,  然物外任閒遊.
姜浚欽의 [水石篇]({三溟集} 所收 [金剛錄])은 금강산의 자연미와 그 유람의 의미를 가장 적실하게 말한 歌行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山의 至靜과 水의 至動이 相謀하고 相射하는 곳이 금강의 자연미라고 강준흠은 지적하였다.
사람들은 금강산이 좋다 하는데
금강은 단지 水石일 뿐.
살만한 마을도 없는데다가
개간할 밭도 없다.
만약 水石의 경승이 없었다면
어찌 四方의 나그네를 불러모았으랴.
뽑아나서는 萬丈의 봉우리
깎여서는 千 의 벼랑.
차곡차곡 肺腑를 겹쳐둔 것같고
곧추곧추 劍戟이 뽑혀선 듯.
이것이 바위의 형승이니,
造化 자취 아닌 게 어디 있는가.
폭포는 하늘에서 내려쏟고
연못은 땅에서 터져 나오니
구비구비 鐵馬가 튀고
面面이  璃처럼 푸르고나.
이것이 물의 형승이니
귀신의 놀이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상상컨대 조물주가 천지를 열 때에
산을 이루고는 힘이 남자
바위로는 뼈를 만들고
물로는 혈맥을 통하게 하여
至靜과 至動이
서로 꾀하고 서로 맞힌 것이리.
우르릉 소리는 완연히 鐘鼓의 음악이요
급한 형세는 벼락을 낳고
갈고 닦이어서 산들은 죄다 수척하고
불끈 노하여 골짜기가 좁디좁다.
烟霞는 늘 윤기가 있어서
草木은 그 恩澤을 입고 있구나.
국내외에 그 이름이 너무도 잘 알려져
사람 발자국이 날마다 밟아나간다.
비낀 줄은 허공에 걸쳐 있고
매달린 사다리는 심벽의 연못을 굽어본다.
孟陽酒(春酒)에 풀린 몸으로
등산의 나막신 걸음이 끊이지 않누나.
왕왕 有心한 사람은
反觀하여 보탬을 얻는다.
수심하는 사람은 憤 을 풀고
용기 있는 사람은 奮擊을 생각하며
탐악한 자는 마음을 씻으려 하게 되고
겁많은 자는 進德을 하고자 하지.
人到金剛好, 金剛但水石. 旣無村可居, 亦無田可闢.
向微水石勝, 寧招四方客. 拔爲萬丈峰, 削爲千 壁.
重重積肺腑, 矗矗抽劍戟. 是爲石之勝, 誰非造化跡.
瀑從天上來, 潭從地中坼. 曲曲鐵馬騰, 面面 璃碧.
是爲水之勝, 誰非鬼神劇. 想當天地初, 成山有餘力.
故將石爲骨, 水以通血脈. 至靜與至動, 相謀亦相射.
聲殷宛鐘鼓, 勢急生霹靂. 刮磨山盡瘦, 奮怒谷爲窄.
烟霞有常潤, 草木承餘澤. 華夷摠聞名, 蹄指日交蹠.
橫約架空虛, 懸梯俯深碧. 支離孟陽酒, 絡繹謝公 .
往往有心人, 反觀得所益. 愁者釋憤 , 勇者思奮擊.
貪者欲洗心, 懦者欲進德.

 

至靜과 至動의 경지가 어우러진 금강의 자연 속에서 유람자는 反觀 즉 자기성찰을 하게 되며, 그로써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정신적 고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금강산의 至動의 경지를 대표하는 萬瀑洞을 두고, 정조 연간 남인의 영수로서 '華國手'로 꼽혔던 蔡濟恭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洞口의 動的 세계는 정적인 분위기를 지닌 比丘의 茶禮와 대비되어 그 지극함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난다.

 

4. 또 하나의 東遊 체험
丁若鏞은 순조 23년(1823) 4월에 손자인 丁大林의 納徵禮가 춘천의 陶井村에서 있게 되자 동행하여, 두 번째로 춘천 협곡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일기}를 기록하였다. 이때 그는 춘천 일대를 돌아보고, 谷雲九曲을 유람하였다. 정약용은 1821년의 첫 춘천여행 때에는 시를 가지고 행로를 기록하였으나, {산행일기}에서는 수로를 별도로 기록하였다.

 

즉 소양정에서 소내의 사라담까지 240리 36탄의 수로를 자세히 기록하되, 갈 때는 생략하고 귀로는 자세하게 적었다. {산행일기}는 매일의 일자와 날씨를 먼저 기록하고, 점심을 한 장소와 저녁에 묵은 장소를 그 다음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매일의 노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행적, 관찰, 감상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매일의 총 잇수(里數)를 별도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나서 하루의 노정을 총평하거나 그날 지은 시를 적었으며, 동행한 이재의의 시가 있으면 부기하였다. 또한 사적이나 지명과 관련된 논문 혹은 의견 교환이 있으면 부기하였다. 정약용은 춘천 지역이 진작부터 우리민족의 주요한 활동중심지였다는 것을 지리학적으로 탐색하고 문헌의 조사결과와 대조하려는 의도에서 東遊를 한 것이었다. {산행일기}의 4월 20일의 기록에 [貊辨]을 부기하여, 춘천을 맥국으로 불러온 종전의 견해들을 반박하였다.

 

춘천은 맥국이 아니다. 貊이란 글자는 夷狄이나 戎蠻과 같은 글자이다. 정동방에 있는 것을 夷라 하고 정북방에 있는 것을 狄이라 하며 동북방에 있는 것을 貊이라 하고 동남방에 있는 것을 蠻이라 한다. [{周禮}에 이 설이 보인다.] 그런데 세상에 夷國이란 없고 또 狄國도 없거늘 어째서 유독 맥국만 있겠는가? 맥에는 여러 종족이 있어서, 濊貊·梁貊·小水貊·句驪貊 등 그 구별이 일정치 않다.

 

마치 島夷·萊夷나 赤狄·白狄의 부류가 구별이 일정치 않은 것과 같다. 따라서 맥을 두고 나라 이름을 칭할 수 없다. 맥족은 모두 중국의 동북방에 있다. 그런데 춘천은 중국의 정동방에 있으므로 춘천을 두고 맥이라 이름할 수 없다. 다만 한·위 무렵에 낙랑이 남으로 춘천에 이사와서, 혹은 漢의 관리(즉 중국 파견의 관리)가 와서 지키기도 하고 혹은 토착민의 추장이 빼앗아 점거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낙랑의 근본은 평양에 있었다. 평양이 쇠망하여 고구려에게 함락되자 고구려의 종족은 본래 맥족과 혼합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와 南韓 사람들이 춘천 지역의 부족을 낙랑과 한데 아울러서 맥인이라 불렀다. 춘천 지역민이 평양에서 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평양은 당시 句麗貊이었다. 가탐의 {군국지}와 김부식의 {백제사}는 이 점을 변별하지 못하고, 낙랑의 사람들이었던 춘천지역민을 잘못해서 맥인이라 하였다. 그 뒤 춘천지역민들이 지금까지도 모함을 입고 있어 벗어날 길이 없다. 하지만 {맹자}에 "맥 땅에는 곡물이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과연 그러한가? {한서} [조조전]에는 "胡貊의 땅에는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 두께가 여섯 자나 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과연 그러한가?

 

정약용은 춘천이 본래 낙랑이었으나, 순전히 오해의 결과 맥국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의 설은 조선 고종 말년에 {증보문헌비고}가 편찬될 때 그대로 수용되었다. 정약용은 경진년이나 계미년의 춘천 여행에서, 춘천이 본디 낙랑의 지부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이 설에는 문제점이 적지 않이 내재되어 있으나, 다만 정약용이 그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심정을 추론하자면 이러하다. 정약용은 맥족을 아직 국가를 지니지 못한 단계의 야만족이었다고 전제하여 맥족의 거주 지역을 반도의 동북방이나 만주 지역에 한정시켜 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춘천의 우두산을 {삼국사기}에 보이는 낙랑의 우두산성과 동일시하였다. 즉 정약용은 춘천을 역사적 연원이 오랜 古都로서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만큼 춘천에 대한 애정이 강하였던 것이다. 정약용이 춘천에 머문 시간은 서너 날에 불과하지만, 여행자로서의 정약용, 문학가로서의 정약용의 시각은 장기간 한 곳에 체류한 사람 이상으로 해부적이고 또 포괄적이다.

 

5. 맺는 말
조선 정조 때 四家의 한 사람인 朴齊家는 응제시인 장편의 [金剛山] 시를 남겼는데, 그 첫머리에
지팡이 집고 하루에 하나씩 오른다 해도
백년에 삼분의 일이어야 일주할 수 있지
携 一日一峰等, 百歲三分始一周.
라 하였고, 또
그림으로 그리려도 빠뜨리게 되니
천억으로 흩어두어 마음껏 찾아볼 일
縮入丹靑猶掛漏, 散爲千億恣窮搜

 

이라고도 하였다. 금강산이 이루는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 지를 극명하게 말한 구절이다. 이 글은 그 광대무변의 세계를 노래한 조선후기 한시 가운데 몇가지 양태를 살펴 보았다. 금강산 유람은 '맑은 마음'[心齋]의 상태, 천지의 정신과 왕래하는 경지를 가장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기회였다. 그런데 금강산은 險絶하고  凜하여 일반 문사들이 오래 거처할 수 없으며 오직 隱淪과 靈仙만이 서식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금강산을 유람한 문인들은 그곳에서 靜閑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금강산 유람의 한시에서 小景을 소재로 한 淸閑의 풍격을 낳지 않았고, 웅장한 풍격을 지니거나 인간의 왜소성을 돌아보는 진지한 자세를 담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글에서는 東遊의 한 체험 양상으로, 금강산 유람이 아니라 춘천 일대를 돌아본 丁若鏞의 예를 살펴보았다. 정약용은 谷雲九曲과 춘천 일대의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아름다움을 산문과 시로 적는 한편, 이 지역의 역사적 의의를 탐구하였다. 그의 東遊는 자연의 풍광을 즐기는 유람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고적답사를 겸한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는 문인들이 국내외의 대여행에 나서는 일이 많아졌다. 국외의 여행인 燕行이나 東 는 대여행(Grand Tour)이라 할 수 있는데, 국내의 여행인 東遊도 역시 대여행의 의미를 지녔다. "장사꾼·품팔이·시골 노파들까지도, 마치 금강산을 갔다오지 않으면 사람 축에 끼지나 못하는 듯이 여겨" 금강산을 찾았던 것은 일상에서 탈피하고 정신의 고양을 경험하는 東遊가, 사대부 문인들만이 아니라 기층민들에 의해서도 실행되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일본 사행에 따라간 여항의 문인들이 일본측 문사들과 후지산·금강산의 우열을 논쟁하였던 것은, 그만큼 금강산이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일반 여항 문인들에게까지 가장 사랑받는 명산으로 각인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후기에 東遊가 유행한 것은 '俗惡'한 풍조였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東遊는 사유의 공간을 확대하고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한 행위였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 예언자  (0) 2013.10.12
노중평의 우리 별 이야기_06  (0) 2013.10.08
지우필개 덕능막망  (0) 2013.10.03
격암유록  (0) 2013.10.01
이학의 開山, 주돈이  (0) 2013.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