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봄으로 흘러드는 강. 남녘의 화신(花信)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강은 섬진강입니다. 첫 꽃을 일찌감치 터뜨린 섬진강변의 매화는 지금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몇 번이고 여정을 망설였습니다. 감염병의 창궐로 문밖을 나서기도 주저되는 상황에서 봄날의 꽃소식을 전하는 게 혹여 여행을 부추기는 일이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전남 광양 다압마을의 활짝 핀 매화나무 아래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현수막과 ‘손님이 없어서 죽을 맛’이라는 강 건너 경남 하동 상인들의 한탄 앞에서 혼돈스럽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야속하게도, 올해는 섬진강을 지나는 봄의 속도가 참으로 빠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봄꽃 보러 가시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모두 다 안타까움 속에서 숨죽이며 외출마저 자제하고 있는 사이에 봄이 어디쯤 왔는가에 대한 목격담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더불어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또는 계절을 건너가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봄꽃이 피었다가 지고 신록의 시간이 다가오면,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때까지 ‘Life & 여행’은 갑갑한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대리만족의 작은 위안이었으면 합니다. # 지리산 자락에 산수유 만개하다 구례는 지금 산수유꽃으로 온통 노랗다. 따듯했던 겨울 덕인지 구례의 산수유 개화는 예년에 비해 보름 이상 빠르다. 지리산 만복대 아래 자락의 산동면 일대로 접어드는 길에는 노란 산수유꽃이 만개해 봄의 노란빛을 화사하게 뿜어내고 있다. 산수유로 이름난 산동면 마을 중에서 꽃이 가장 이르게 피는 곳은 반곡마을. 이른 봄 담장 너머로 피는 산수유꽃으로 ‘꽃담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반곡마을의 산수유는 노란 꽃망울을 일제히 터뜨렸다. 서시천 물길을 따라 놓인 나무 덱 주위가 노란 물감을 칠해놓은 듯하다. 꽃은 이리 화려한데 봐줄 사람은 없다. 돌담과 시냇물을 끼고 산수유 군락지를 도는 짧은 걷기 길인 ‘꽃담길’에는 마을 주민들만 삼삼오오 봄볕 아래 나와 걱정을 나눴다. 한 할머니는 만개한 산수유를 둘러보면서 ‘이 좋은 걸 우리만 본다’고 아쉬워했다. 반곡마을의 산수유꽃은 이번 주말쯤이 절정이다. 반곡마을뿐만 아니라 지리산 다름재와 숙성치 아래 달전마을도, 견두산 아래 계척마을과 현천마을도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됐다. 돌담을 두른 마을이 산수유꽃과 어우러져 가장 아름다운 봄 풍경을 갖고 있다는 상위마을은 지대가 높아 산수유꽃이 반곡마을과 딱 1주일쯤의 시차를 두고 피고 있다. 올봄은 예년보다 한참 이르게 산수유꽃이 피고 있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올해에는 보지 못하는 풍경도 있다. 해마다 이른 봄 산동마을에 산수유가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이면 지리산의 만복대 능선에 흰 눈이 쌓여 있는 날이 많았다. 반곡마을 서시천에 서면 지리산 설경과 만개한 산수유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흰 눈과 노란 꽃은 겨울과 봄이 교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겨울이 워낙 따뜻했던 데다 눈 대신 비가 잦아 지리산의 눈은 자취도 없다. 반곡마을이나 상위마을보다 더 고즈넉한 풍경을 갖고 있는 곳이 자그마한 저수지를 끼고 있는 현천마을이다. 매해 산수유꽃 축제가 펼쳐질 때마다 상위마을 일대는 북새통이었지만, 현천마을만큼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감염병 확산으로 올해는 축제가 취소됐으니 그렇지 않아도 한적했던 현천마을이 올해는 더 고즈넉하다. 현천마을에는 성근 돌담을 따라 황토를 이겨 바른 토담집이 들어선 마을 곳곳에 대숲이 울창하다. 대숲의 초록과 산수유의 노랑이 선명하게 어우러진다. # ‘화개(花開)’에 이름처럼 꽃이 피다 지리산 아래 경남 하동의 맑은 계곡 이름이 ‘화개’다. 화개(花開), 말 그대로 ‘꽃이 피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화개에는 지금 순백의 매화가 절정이다. 화개의 봄꽃이 아름다운 건 ‘바탕색’ 덕분이다. 바탕색이란 다름 아니라 화개계곡을 끼고 구불구불 넘실거리는 차밭 이랑의 초록색이다. 화개의 매실나무는 군락을 이루지 않고 차밭의 이랑에 군데군데 심어 있다. 화개뿐만 아니라 섬진강을 끼고 있는 하동의 차밭 주위에도 매실나무가 있다. 하필 차밭 주변에다 매실나무를 심은 건 열매보다는 꽃을 보고자 그리한 듯하다. 차밭의 초록과 드문드문 심어진 순백의 매화가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어우러지니 말이다. 2018년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된 하동 화개면의 차밭은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앗을 지리산에 심으면서 조성됐다니 그 역사가 자그마치 1200년에 이른다. 화개의 차밭 수확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올해 봄꽃이 이르듯 차밭의 이랑은 새순의 연둣빛이 완연하다. 화개의 차밭에서는 청명(4월 4일) 이전에 수확하는 ‘명전(明前)’을 시작으로 곡우(4월 19일) 이전에 따는 ‘우전(雨前)’, 입하(5월 5일) 이전에 따는 ‘세작(細雀)’, 5월 중순 이후에 따는 ‘중작(中雀)’을 거쳐 6월까지 차가 나온다. 아무래도 첫 차를 딸 때는 어려울 테고, 세작의 찻잎을 딸 무렵쯤 되면 무르익은 봄기운 속에서 근심 하나 없이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화개가 가진 봄의 색이 매화의 순백과 차밭의 초록이라면, 이에 못지않게 매력적인 것이 화개가 가진 ‘소리’다. 지리산 의신계곡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화개계곡 16㎞를 흘러내려 화개장터 앞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그래서 화개계곡은 어디에나 늘 물소리가 배경음악이 된다. 계곡의 물소리는 아침이나 저녁나절이 더 크게 들린다. 계곡의 맑은 물소리는 이쪽에다 숙소를 잡은 이들에게 지리산이 선사하는 선물과도 같다. 차밭의 초록과 매화의 순백을 내려다보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물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숙소가 ‘켄싱턴리조트 하동’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에다 딛고 선 자리도 고즈넉하다. 숙박요금도 부담스럽지 않다. 적어 두자.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고 찾아가면 조용하게 청량감을 맛보며 휴식할 수 있는 곳이니….
# 평사리와 섬진강을 감상하는 새 명소 예년에 섬진강의 봄꽃 구경은 구례에서 산수유를 보고,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의 화개를 거쳐 섬진교 건너 매화 흐드러진 광양으로 가는 게 순서였다. 화개에서 악양으로 이어지는 19번 국도변에는 지금 매화가 한창이다. 섬진강을 오른쪽 어깨에 끼고 국도를 달리는 내내 왼쪽 어깨 쪽으로는 초록색 융단 같은 차밭과 흐드러진 매화가 따라온다. 하동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꼽히는 곳이 소설 ‘토지’의 무대를 재현한 악양면 평사리의 최참판댁이다. 최참판댁은 소설을 TV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조성해놓은 세트장을 관광지로 개방한 곳. 엄밀하게 보면 최참판도 허구의 인물이고 최참판댁도 ‘가짜’지만,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건 한옥과 일대의 경관이 우리 시골 마을의 원형과 빼닮았기 때문이다. 최참판댁 사랑채와 별당, 장독대 뒤편에는 봐줄 사람도 없는데 매화와 산수유가 폭죽처럼 꽃을 터뜨렸다. 최참판댁 주변에는 평사리의 들과 섬진강의 물길이 내려다보이는, 아는 이들만 아는 조망의 명소가 있다. 형제봉 자락 아래 절집 한산사와 한산사에서 산길을 20분쯤 걸어 닿는 고소산성이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이 두 곳 사이의 벼랑에 ‘스타웨이’가 새로 문을 열었다. 스타웨이는 커피숍과 스카이워크로 이뤄진 전망대. 바닥을 철망과 일부 유리로 마감한 스카이워크에서는 섬진강의 물길과 평사리 들판의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이곳은 굳이 봄이 아니어도 좋다. 평사리의 논이 초록으로 물들 때도, 황금빛으로 일렁일 때도 좋다. 저무는 섬진강 풍경은 또 어떤가. 평사리에서 섬진강을 따라 더 내려가면 지리산 남쪽 능선의 구제봉 아래 자리 잡은 하동 먹점마을이 있다. 마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매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해발 400m 먹점마을에 피는 매화는 대부분 재래종이다. 점잖게 띄엄띄엄 꽃을 피운다. 꽃송이가 다닥다닥 붙어 피는 개량종과는 품격이 사뭇 다르다. 오래된 황토집과 굽은 길, 누추한 계단식 밭과 함께 어우러지는 먹점마을 매화는 수묵화로 그린 매화도 속의 꽃을 빼닮았다.
# ‘평온한 일상’의 소망에 바치는 기도 이제 섬진강 봄꽃구경의 하이라이트, 섬진강을 건너는 섬진교와 남도대교 사이의 광양 쪽 강변은 지금 온통 매화 천지다. 가장 먼저 이곳에서 매실나무를 심어서 사람들을 불러들인 이는 청매실농원의 홍쌍리(78) 명인이다. 농원의 시작은 5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물네 살에 부산에서 이곳으로 시집온 홍 명인은 밤나무 농사를 짓던 시아버지를 졸라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무슨 거창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사람 좀 보고 살자’는 게 이유였단다. 도시와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는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로 꽃 대궐을 만들어내면 사람들이 오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시아버지의 완고한 반대를 꺾고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게 반세기 넘게 자라서 이처럼 섬진강변 산비탈에 매화 만발한 농원이 됐다. 청매실농원뿐만 아니라 섬진강변 광양 땅은 매화로 그득하다. 청매실농원처럼 번듯한 농원도 있고, 슬레이트 농가에 딸린 작은 매실밭도 있다. 가로수처럼 길섶에 심은 나무도, 농가 마당에 심은 나무도 십중팔구 매실나무다. 그러니 지금 그 길은 꽃 천지다. 섬진강을 끼고 청매실농원 앞으로 이어지는 도로인 ‘섬진강 매화로’에는 강렬한 붉은색의 홍매화가 한창이다. 봄꽃들은 번잡한 세상사를 잊고서 가장 화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봄볕 쏟아지는 강변길을 달리는 내내 따라오는 매화 향기가 그윽했다. 광양 땅을 지나 섬진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시 구례 땅이다. 이쪽에서 최고로 치는 봄의 전망대가 있다. 문척면 죽마리 오산(531m)의 눈썹쯤의 암봉에 매달듯 지어낸 암자 사성암이다. 사성암은 바위 벼랑의 허공에 기둥을 올려 매달듯 지어놓은 암자의 풍모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암봉을 등 뒤로 두고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경치다. 암자 뒤편으로 난 돌계단 길을 잠깐만 올라서면 지리산의 연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가 있다. 멀리 지리산의 만복대와 성삼재, 차일봉, 노고단, 반야봉, 왕시루봉의 능선이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지고 지리산의 발치 아래로는 구례읍과 너른 들판이, 그리고 그 들판 한가운데로는 섬진강 물길이 굽이쳐 흘러간다. 돌계단 길을 내려서다 법당 뒤 벼랑의 귀목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은 이를 만났다. 저무는 햇살을 받아 나무는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그가 빌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두 손을 모으지는 않았지만 남도의 봄꽃을 보러 떠난 여정 내내 평온한 일상에 대한 소망이 기도처럼 따라왔다. 어서 빨리 되돌아갈 수 있기를…. ■ 봄에 피는 동백꽃 ‘春栢’ 동백(冬栢)은 겨울에 꽃이 피어 그렇게 부르는데, 같은 동백이라도 봄이 피는 것을 춘백(春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남 광양은 섬진강변의 매화로 이름났지만, 이른 봄에 백계산 아래 옥룡사 절터에 붉게 피어나는 동백, 아니 춘백도 못지않다. ■ 청매실농원 홍쌍리 명인 “꽃은 내년에도 피니 건강부터 챙기세요”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의 매실밭에서 거친 손으로 돌담을 쌓고 있던 ‘몸뻬’ 차림의 홍쌍리(78·사진) 명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봄꽃 구경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꽃이야 내년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피는 것이니 모두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자중자애하시라’는 얘기였다.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상춘객이 모여들던 매화축제는 진작 취소됐지만, 청매실농원에는 봄꽃을 보러 찾아오는 이들이 아직 드문드문 있다. 농원을 찾은 이들도 조심조심 농원을 둘러보고는 떠난다. 홍 명인은 꽃을 보러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고, 뜯어온 나물을 관광객들에게 팔아 빠듯한 살림에 보태는 할머니들도 있다며 농원의 문을 쉽게 닫아걸 수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 입장료도, 주차비도 없으니 농원 입장에서는 문을 열든 닫든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다. 농원은 지역 노인들이 농원 안으로 들어와 좌판을 까는 것을 허용해주고 있다. 홍 명인은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사람이 봐주지 않는 꽃도 모두 다 안타깝지만 겨울이 혹독하고 길수록 그해의 봄꽃이 더 반갑더라”고 했다. 50년 넘게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를 키워온 홍 명인의 경험에서 나온 얘기다. 홍 명인은 “어려운 시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사소한 것조차 다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는 섬진강을 찾아와서 여기다가 몸과 마음의 찌꺼기를 훌훌 다 털어내고 가시라”고 했다. 그때 봄꽃이 있든 없든, 그게 무슨 대수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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