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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진출을 위한 실전 지침서

醉月 2009. 8. 4. 08:40

[머리말] 우리 민족의 DNA 속에 펄펄 끓는 商人 기질

朴勝俊 朝鮮日報 중국전문 대기자 (sjpark@chosun.com

 商人(상인)들이란 원래 중국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 고대에 商(상)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상인이었다. 때문에 상인이라면 바로 중국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중국 사람들은 모두 상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인들은 ‘韓商(한상)’이란 말을 만들어 냈다. 상인들이 사는 세상에 비집고 들어가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웃통을 벗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한상이다.
 
  1990년대 초 갓 중국에 진출한 한 한국 무역회사 부장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딸에게 베이징(北京)의 시장을 구경시켜 준다고 데리고 간 일이 있었다. 시장에 갔더니 한 중국인이 원숭이를 팔고 있었다….”
 
  그 중국인은 원숭이가 무척 얌전하며, 밤이 되면 조용히 잠을 잔다고 했다. 한국인 무역회사 부장은 딸이 조르는 통에 원숭이를 사서 데리고 집으로 왔다. 웬걸, 원숭이는 얌전하지도 않고 밤이 되자 끽끽거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그 부장은 원숭이를 끌고 시장으로 가서 중국인에게 따졌다. 중국인의 말은 간단했다.
 
  “훈련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여기 두고 갔다가 사흘 뒤에 와라, 훈련을 단단히 시켜놓겠다….”
 
  사흘 뒤에 딸과 함께 시장으로 간 부장은 자신이 속은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원숭이값은 지불한 뒤였고, 그 상인은 시장을 떠난 뒤였다.
 
 
  원숭이 사건
 
  물론 그 중국 상인을 제대로 된 상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걸작은 그 한국인 부장의 말이었다.
 
  “저는 원숭이 값으로 800위안(약 15만원)을 날렸지만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그래도 한국의 무역회사 부장인데, 나를 속인 중국인들로부터 반드시 내 돈을 찾아오고 말테다….”
 
  그 무역회사 부장은 원숭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인과 계약을 맺을 때 각종 조건을 신중하게, 또 꼼꼼하게 따지는 습관을 갖게 됐고 지금은 또 다른 대기업의 사장급 중국본부장으로, 중국 현장에서 한국 세일즈맨들을 지휘하고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 7년 동안 중국시장에서 올 6월 말 현재 1만2101대의 굴착기를 팔아 캐터필러, 히타치 등 쟁쟁한 글로벌 굴착기 업체들을 제치고 중국 내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산둥(山東)성 옌타이(烟台)에 있는 두산인프라코어의 굴착기 공장은 1997년 첫 번째 외환위기가 오기 직전에 대우그룹 金宇中(김우중) 회장의 판단에 따라 지은 공장이다. 물론 김 회장의 멀리 내다보는 안목도 훌륭하고, 현재 굴착기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두산인프라코어의 경영진도 훌륭한 기업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굴착기가 캐터필러니, 히타치니 하는 세계적인 업체의 굴착기들을 제치고 중국 내 시장점유율 1위를 하고 있는 데는 根性(근성)으로는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한상 비즈니스맨들의 땀과 눈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상 비즈니스맨들의 땀과 눈물은 그들의 출장 스케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오늘 옌타이에서 상담을 하고, 그날 저녁도 안 먹고 비행기를 타고 중국 남부 윈난(雲南)성 소수민족 지역의 마을로 찾아간다. 이른바 ‘希望工程(희망공정)’이라는 이름의 시골벽지 빈곤가정 아동들을 위한 장학금을 전달한다. 그리고 밤에는 그 마을 有志(유지)들과 밤새도록 배갈을 마시며, 환심을 사기 위해 폭탄주도 제조해 먹이기도 한다.
 
 
  “야 임마 그래프 봤어? 뭐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마을을 빠져나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또 다른 도시로 날아간다. 굴착기를 사겠다는 연락이 오면 중국의 대도시건 사막 오지건 어디든 날아갈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굴삭기 세일즈맨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중국 시골길을 가다가 많은 사람이 나와 토목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종종 봅니다. 그러면 모두 몰려 나와 집단 작업을 하고 있는 그 마을 사람들이 미워집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 참 나 … 우리 굴착기 한 대 얼마 한다고… 마을에서 돈을 모아 한 대 사면 저런 고생 안 해도 될 텐데…’ 그런 생각을 말입니다.”
 
  이쯤 되면 상인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韓商(한상)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중국 시골마을에서 뭣 하러 돈을 들여 굴착기를 사서 땅을 파겠는가.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동작업을 하면 그만인데….
 
  그러나 그런 중국 시장을 연구하고, 파고들고 해서 지난 7년 동안 판 1만2101대의 굴착기 한 대 한 대마다에는 끈질긴 한상들의 商魂(상혼)이 서려 있는 것이다.
 
  날로 커 가는 중국 휴대전화 시장에서 노키아, 모토롤라와 시장점유율을 놓고 매일같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삼성차이나 朴根熙(박근희) 사장과 LG차이나 禹南均(우남균) 사장과 함께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다 보면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박 사장은 식사를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운다. 피워 물었다가 절반도 못 피우고 끄고, 또다시 피워 물고, 또 끄고…. 박 사장 앞의 재떨이에는 얼마 안 가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다. 그러면 박 사장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말한다.
 
  “건강에 나쁜 줄은 알지만… 에이 자식들…, 그래프를 쳐다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담배라도 피워야지…. 근데 담배도 소용이 없어. 전화를 걸어야지. ‘야 임마. 그래프 봤어? 뭐 하는 거야, 대체! 빨리 끌어올려 임마!’ 그렇게 소리치고 나면 어쨌든 그래프가 올라가기는 가거든.”
 
  박 사장은 그렇게 말해 놓고는 특유의 겸연쩍은 웃음을 흘린다. 욕을 먹은 중국 내 휴대전화 판매 지점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그런 웃음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나라 상인들이 판매량 그래프를 보면서 진정으로 화를 내고, 화가 나서 전화하고, 전화를 받은 쪽은 또 욕을 먹고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 분발하고, 전화를 받으면 뛰어서 판매량을 어쨌든 끌어올리고….
 
  이들이 과연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또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뛰고 있는 것일까. 옆에서 보기에 이들 한상은 나름의 고집과 각오가 있어 뛰는 것이지 특별히 소속된 회사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뛰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아. 길부터 뚫어줘야지”
 
  중국 내 휴대전화 판매량에서 삼성보다 다소 뒤진 LG의 우남균 사장도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우 사장은 “언젠가는 삼성도 모토롤라도 노키아도 꺾는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현재는 다소 뒤져 있어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지만,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중국어로, 영어로, 우리말로 번갈아 구사언어를 바꿔 가며 오늘도 중국 전역을 누비고 다니고 있다.
 
  우리 민족의 DNA 어디에 그런 상인 기질이 감춰져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왜 조선왕조 500년, 아니 수천 년 역사를 통해 그 상인 기질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아무래도 士農工商(사농공상)이라는 말로 사회 구성원을 분류한 유교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농공에 이어 제일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상인 근성이 1960, 1970년대의 산업근대화와 함께 다시 발현된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국에서 파는 롤케이크가 부모와 한 자녀만으로 구성된 중국인들의 가정 생활습관에는 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고, 한국에서 파는 롤케이크의 절반 크기의 롤케이크를 뚜레주르 매장에 내놓아 ‘대박’을 쳤다는 CJ차이나 朴根太(박근태) 사장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런 박 사장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중국 시장 개척을 위한 수많은 일화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 전 회장이 어느 날 중국 남부에 버스공장을 세우라고 하자 담당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거긴 아직 도로도 뚫려 있지 않은데요…”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직원에게 김 전 회장이 했다는 말은 이렇다.
 
  “이 사람아. 버스공장을 세우려면 우선 도로부터 뚫어줄 생각을 해야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지금 중국 시장을 누비고 있는 한상들은 우리 민족의 DNA 속에도 상인의 기질이 감추어져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상인의 DNA 鹽基(염기)를 추가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상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기 시작한 한상들의 성공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보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

趙東錫 청도리커의료기계유한공사 총경리 매출액 1400여 억원, 중국 전역에 1300여 개 대리점 개설      

 “5년 내 연간 매출액 5000억원 달성, 중국 내 100대 기업으로 성장할 것”
온열치료기·온열매트로 중국 내수시장 석권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eaglebsk@chosun.com
조동석 청도리커의료기계 유한공사 총경리.
 山東(산둥)성 칭다오공항에서 승용차로 10분 정도 달리자 루이진(瑞金) 거리에 청도리커의료기계유한공사 본사가 눈에 들어왔다. 在中國(재중국) 한국인회장인 鄭曉權(정효권) 동사장이 2002년 세운 가정용 의료기기 생산업체다.
 
  이 회사는 창립된 지 6년 만에 중국내 가정용 의료기기 시장을 석권했다. 주력 제품은 온열치료기, 온열매트, 무릎관절 초음파 치료기다. 작년 매출액은 약 1400억원. 회사 직원은 제조공장 다섯 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포함해 총 600여 명에 달한다. 사업 초기부터 중국 내수시장을 목표한 덕분에 현재 33개 省(성)·市(시)에 1300여 개 대리점을 두고 있다. 대리점과 협력업체 직원까지 포함하면 10만여 명에 달한다.
 
  중국시장을 짧은 기간에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趙東錫(조동석) 청도리커의료기계유한공사 총경리의 말이다.
 
  “리커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사업 아이템이 좋았습니다. 가정용 의료기기는 건강산업과 실버산업이 결합된 제품입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중국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특히 2003년 발생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이후 그런 현상은 더욱 강해졌어요.”
 
  조동석 총경리는 “제품 하나당 200만원이 넘는 高價(고가)정책을 편 것도 맞아떨어졌다”며 “중국에는 보이지 않는 중산층이 많다. 이들이 중국의 소비패턴을 좌지우지한다”고 했다.
 
 
  무료체험방식 마케팅 대성공
 
청도리커의료기계유한공사 본사.

  ‘리커’가 중국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은 이 회사만의 독특한 마케팅에 있다. 리커의료기계는 ‘무료체험 방식’을 통해 제품을 판매한다. 고객이 대리점을 방문해 무료로 기계를 사용한 후 효과가 있으면 구입하는 방식이다. 조동석 총경리는 “하루 평균 300명이 전국의 각 대리점을 찾아와 무료 체험을 한다”며 “이들 중에는 몇 달에 걸쳐 대리점을 방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고객이 직접 사용하고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가장 과학적이죠. 무료 체험자가 제품을 구입하는 비율은 평균 10%입니다. 낮은 수치로 보이지만 다른 사업과 비교하면 그렇지 않아요. 중국 사람들은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서 남의 말을 잘 믿지 않아요. 몇 번을 직접 확인한 후에야 구입을 결정합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이것은 문화혁명 이후 중국사람들에게 생긴 습관이라고 해요. 우리는 이 같은 중국 소비자의 특징을 간파했던 겁니다. 직접 써 보고 구입하도록 판매전략을 짠 거죠.”
 
지난 4월 쓰촨성에서 열린 리커의료기계 창립기념 행사에 리커의료기계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
고객 1만여명이 참석해 회사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마케팅 성공을 이끌어낸 또 하나의 전략은 대리점 조직 강화였다. ‘리커’는 대리점 사장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영업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리점의 성공이 곧 회사의 성공을 견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동석 총경리의 말이다.
 
  “대리점을 열겠다는 사업자에게 창업을 지원해 주고 교육을 꾸준히 시켜 왔어요. 현지방문을 통해 재교육에도 신경을 썼지요. 이렇게 하다 보니 대리점을 통한 판매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대리점 사장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너나 할 것이 대리점을 개설하겠다고 본사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리커의료기계는 일선 판매조직인 대리점을 보호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한 대형 유통업체로부터 어마어마한 제안을 받았지만 대리점 판매망을 보존하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정효권 동사장의 말이다.
 
  “중국에 ‘궈메이’라는 가전제품 양판점이 있어요. 전국에 3000개 매장을 갖고 있는 대형 유통회사입니다. 궈메이가 ‘우리 매장에 의료기를 납품하면 한 매장에서 매월 다섯 개 이상을 팔아 주겠다’고 제안하더군요. 매출액을 계산해 보니 연간 3000억원에 달해요. 가만히 앉아서 매출 3000억원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온 겁니다. 정말 고민되더군요. 욕심이 안 난다면 사람이 아니죠. 하지만 궈메이의 제안을 거절했어요. 판매망이 이중화되면 가격이 이중화되어 대리점이 망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회사의 기반도 흔들리죠.”
 
 
  ‘리커’의 세 가지 뜻
 
정효권 청도리커의료기계 동사장은 사업 초기부터 사회공헌에 신경을 써 왔다.
정효권 동사장이 소년소녀 가장의 집에 방문해 격려금을 전달하고 있다.

  ‘리커’의 성공요인에는 브랜드 네이밍을 잘했다는 점도 들어있다. 리커는 한자로 麗可(려가)로 표현한다. ‘아름다워 좋다’는 뜻이다. 중국 사람들은 ‘커(可·좋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리커’를 발음하면 ‘아름다워 좋아 좋아’라는 뜻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기억된다고 한다. 회사 이름을 직접 작명한 정효권 동사장은 “이름에는 여러 가지 비밀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麗(려)는 고구려의 ‘려’를 뜻하는데, 다시 말해 ‘려’에는 한국의 의미가 들어가 있죠. 리커에는 ‘한국인이 만들면 모든 것이 잘된다’는 뜻이 들어 있어요. 또 리커를 영문자로 표기하면 ‘LIKE’가 되는데 이 단어는 영어로 ‘라이크(좋아하다)’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회사라는 속뜻도 들어 있어요.”
 
  사업 초기부터 회사 이윤의 상당 부분을 중국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 사회에 과감히 재투자한 것이다. 이는 리커의료기계를 중국 사회에 회사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황수철 공장장(오른쪽)과 배철한 기획실장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리커의료기계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하는 중국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을 공식 후원했고, 2005년 9월에는 國政(국정) 자문기구인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가 주최하는 세계 석학들의 토론장인 ‘21세기 논단’을 후원했다.
 
  2006년에는 중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에 140만 위안(약 3억원)을 지원했다. 중소기업으로서 감히 엄두도 못 내는 CCTV 황금시간대에도 광고방송을 내보내 브랜드 이미지를 알리기도 했다.
 
  리커의료기계는 현재 가정용 의료기기 시장에서 신화적 존재로 평가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잘나간 것은 아니다. 사업 초창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건강 관련 제품을 만든다는 이유로 생산허가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2003년 중국 전역을 강타한 사스로 회사는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자본금은 바닥이 나 통장에는 800위안(약 16만원)만 남았던 것이다. 다행히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회사는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중국 브랜드 건설 10대 걸출 인물에 선정
 
정효권 동사장은 중국 체육 선수단을 꾸준히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04년 중국 여자핸드볼 국가대표단을 후원할 때의 모습(오른쪽 양복 입은 사람이 정효권 동사장).

  ‘리커’는 2003년 8월 첫 제품을 만들어 칭다오 시내에 대리점 세 곳을 개설했다. 회사는 대리점이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조동석 총경리의 말이다.
 
  “대리점 사장에게 처음부터 무료 체험관을 열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했어요. 그랬더니 판매실적이 늘기 시작했어요. 영업에 본격적인 불꽃이 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11월이었습니다. 이듬해 1월부터 온열치료기 등 제품 가격을 300위안(약 6만원)씩 올리기로 하고 2004년 연말에 특별 판촉행사에 들어갔어요. ‘서둘러 사면 돈을 아낀다’는 생각에 소비자들이 몰렸습니다. 한 달 만에 2만5000대를 팔아 2억5000만 위안(약 500억원)의 매출이 발생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졌어요. 그때부터 매출은 눈덩이처럼 늘어났습니다.”
 
  조동석 총경리는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은 우리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아주 높다”며 “좋은 품질을 바탕으로 고객을 한 가족처럼 여기는 마케팅 전략에 고객들이 감동하고 있다”고 했다.
 
  ‘리커’가 독특한 마케팅과 회사 문화로 성공신화를 만들어 가자 중국 정부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정효권 동사장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선정한 ‘人民公僕(인민공복)’ 편집위원회에서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인민공복’이란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중국 사회에 공헌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정효권 동사장은 2006년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개최된 제2회 중국 브랜드 영향력 정상논단에서 ‘중국 브랜드 건설 10대 뛰어난 기업가’로 선정됐고, 이듬해에는 ‘중국 브랜드 건설 10대 걸출 인물’로 선정됐다. 2008년 9월에는 칭다오市(시)로부터 경제와 사회발전에 공헌한 외국 투자자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상인 琴島賞(금도상)을 수상했다.
 
  ‘리커’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중국 시장에서 대성공을 이뤘다. 그러나 ‘리커’ 경영진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 눈치다. 黃守喆(황수철) 공장장의 말이다.
 
  “우리가 만든 제품은 95% 이상이 중국에서 팔리지만 아직도 대리점이 개설되지 않은 곳이 많아요. 미개척 시장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죠. 향후 5년 내에 연간 매출액 5000억원 정도 되는 회사가 될 겁니다. 그런 후 중국 내에서 100대 기업 안에 들어야겠지요. 우리 회사는 아직 젊습니다. 직원들도 젊고요. 갈 길이 한참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에 배가 고픕니다.”
  
  천연화장품 시장에 도전
 
  ‘리커’는 올해 대리점 1500개 개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제품 연구개발에도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李鍾旭(이종욱) 연구실장은 “최근 들어 소비자들이 제품의 외관과 디자인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를 반영한 첨단 의료제품을 만들 예정이다.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리커’는 수익다각화를 위해 작년부터 화장품 사업을 본격화했다. ‘리커’의 자회사로 청도효성일화유한공사(총경리 金且亨)를 설립해 천연화장품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裵哲漢(배철한) 기획실장은 “이 회사의 작년 매출액이 12억원에 불과하지만 우리만의 판매방식을 적용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배 실장의 말이다.
 
  “올해에는 화장품 판매조직을 대폭 늘릴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의료기 판매 대리점을 이용하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새 제품은 새 조직을 통해 팔아야 해요. 우리는 중국 내수시장을 개척하는 비법을 터득했어요. 화장품 시장에는 경쟁자가 아주 많아요. 그런 시장에서 당당히 승자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리커’와 ‘효성일화’를 중국 시장에서 모두 성공시켜 중국 내수시장 개척의 전도사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權五哲 웨스트엘리베이터 대표이사  서부개발 붐 타고 24시간 풀 가동      

新生 업체가 충칭시의 名브랜드에 선정
초기 투자비 절감 위해 대도시 아닌 郡 지역에 공장 설립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권오철 웨스트엘리베이터 대표이사.

 

 중국 충칭시(重慶市)에서 서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둥량현(銅梁縣). 인구 81만명이 거주하는 이곳은 중국의 상징이 된 龍(용)춤의 발상지다. 이곳 金龍(금룡)공업지구에는 웨스트엘리베이터라는 둥량현의 유일한 한국기업이자 외국 합자기업이 진출해 있다.
 
  2006년 韓中(한중) 합작으로 설립한 웨스트엘리베이터는 현재 연간 600대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무빙워커를 생산하고 있으며, 매출 200억원에 직원 수는 100명이다. 웨스트엘리베이터 설립자인 權五哲(권오철·52) 대표이사는 “작년부터 주문량이 밀려들어 공장을 24시간 가동해도 수요를 따라잡기 어려워 현재 충칭 인근에 또 다른 공장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베이징이나 상하이, 충칭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둥량현이라고 하는 우리의 郡(군)단위 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서부개발이 시작됐기 때문에 앞으로 서부지역에 엘리베이터 수요가 많아질 것에 대비한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에 520개 엘리베이터 업체가 있는데 대도시는 경쟁이 너무 심합니다. 브랜드 인지도를 덜 따지는 외곽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신생 브랜드의 약점을 가릴 수 있어 유리합니다. 또 생산제품을 대부분 인근 지역에 공급하기 때문에 물류비용도 줄일 수 있고요.”
 
  권오철 대표는 “충칭 시내만 하더라도 땅값이 비싸고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신생업체가 기업을 시작하려면 초기투자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면서 “군단위 지역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후 대도시로 진출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권 대표가 외국기업으로, 그것도 이름도 없는 新生(신생) 엘리베이터 회사를 사업 개시 2년 만에 성공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그만의 ‘뚝심 경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엘리베이터 중국 주재원 생활
 
웨스트엘리베이터의 공장내부. 사진은 에스컬레이터와 무빙워커 생산 라인이다.
필자가 찾아간 날 마침 단오 휴일을 맞아 생산라인을 잠시 멈췄다.

  권 대표는 현대엘리베이터 출신이다. 1982년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부에 入社(입사)한 권 대표는 1986년 현대중공업이 엘리베이터 사업을 시작할 때 차출되면서 엘리베이터와 인연을 맺었다. 1990년대 중반 권 대표는 현대엘리베이터 勞組(노조)위원장에 출마하려다 회사와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1995년 현대엘리베이터가 중국 상하이에 진출했고, 권 대표는 중국 법인에 합류해 중국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회사에서 엘리베이터 생산부터 설치, 보수까지 全(전) 공정에 대한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제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법인장이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집사람에게 ‘6개월 만 중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고서 나온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권 대표는 1996년경 중국의 한 작은 엘리베이터 회사를 중견 기업으로 만든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이 회사는 나중에 권 대표와 인연을 맺게 된다.
 
  “저장성(浙江省)에 ‘메룽’이라는 엘리베이터 회사가 있었습니다. 한 달에 엘리베이터 3~4대 정도를 만들던 동네 공업사 수준의 기업이었는데 제가 주문을 하면서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 이 회사는 엘리베이터만 한 달에 900대, 에스컬레이터를 120대 이상 생산하는 큰 기업이 됐습니다.”
 
  2005년 권 대표가 현대엘리베이터를 사직했을 때 메룽의 사장은 권 대표를 자신의 회사 부사장으로 스카우트 했다고 한다. 그때 권 대표의 월급이 한 달에 8만원(당시 환율로 10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권 대표의 설명.
 
  “거기에 연말에 해외수출 이익금의 20%를 저에게 주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따져보니 연봉이 18억원 정도 되더군요. 저는 6개월 만에 그 회사 매출을 두 배로 올렸습니다. 저는 현대엘리베이터를 사직하고 엘리베이터 회사들의 원가절감을 위한 컨설턴트를 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공장을 한 번만 둘러보면 원가 절감을 위한 밑그림이 그려집니다.”
 
 
  원가절감, 품질관리에 전력투구
 
  권 대표는 메룽의 부사장직을 수락하면서 사장에게 “회사 원가절감 개선업무에 대한 全權(전권)을 달라”고 해 약속을 받아 냈다고 한다.
 
  “부사장에 취임하자마자 간부회의를 소집했어요. 회의 전에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내 발언이 끝난 다음에 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자꾸 제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면서 발언을 하는 겁니다. 저는 두 번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계속해서 끼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테이블에 있던 재떨이를 들어 그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모두 제 말에 꼼짝을 못하더군요. 초반에 직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행동했던 겁니다. 다음날 사장이 재떨이를 유리에서 깡통으로 바꾸어 놓았더군요.”
 
  권 대표는 이어 공장장에게 “지난 1년 동안 쓰지 않은 장비, 부품, 資材(자재)를 전부 야적장에 쌓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공장의 기본은 정리, 정돈, 청소, 청결입니다. 공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현대엘리베이터에서 했던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자 공장 분위기가 싹 바뀌었습니다. 당시 일본 후지텍엘리베이터가 메룽의 제품을 납품받고 있었는데 후지텍엘리베이터 사장이 메룽 공장을 방문했을 때 공장 시스템이 완전히 바뀐 것을 보고 감동해서 한 달에 10대 정도 주던 주문량을 100대로 올렸습니다.”
 
  권 대표의 설명.
 
  “당시 후지텍엘리베이터 사장이 저를 불러 ‘당신의 경영 마인드가 뭐냐’고 묻기에 ‘우리나라가 원래 일본 기업의 경영방식을 도입했는데, 당신들과 다를 것이 뭐 있겠느냐. 물건을 제값 받게 해 주는 것이 나의 경영 마인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권 대표가 메룽엘리베이터에 6개월 정도 근무했을 무렵 충칭에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대리점 직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제가 현대에 있을 때 판매를 맡겼던 친구들인데 일을 정말 잘했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가 메룽의 부사장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와서 같이 엘리베이터 사업을 하자고 권유하더군요. 그때 저도 개인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권 대표는 먼저 충칭시 둥량현에 부지를 확보해 공장 건립을 시작했다. 땅값이 싸고, 서부개발로 건설붐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곳을 공장 설립 입지로 택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쓸 기술자들을 메룽에 취업시켜 미리 일을 배우게 했다고 한다.
 
 
  기둥만 세운 상태에서 준공식
 
둥량현 정부 관계자들과 웨스트엘리베이터 직원들의 식사장면. 충칭시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권오철 대표이사(가운데 정면 사진)는 지방 정부 공무원들(사진 정면 왼쪽이 둥량현 현장)을 자주 만나 현지 진출 한국 기업인들의 민원을 건의하곤 한다.

  권 대표는 1년 후 메룽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사무실도 없어서 둥량현 정부 청사의 사무실을 세 칸 빌려서 썼습니다. 외국 합자회사니까 우리가 잘돼야 세금을 많이 내지 않겠느냐고 정부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죠. 그 후 2007년 1월 한국의 엘리베이터 업체 사장 20명과 중국 건설업계 사장, 정부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준공식을 했습니다.”
 
  권 대표는 “한마디로 웃기는 준공식이었다”고 회고했다. 공장의 기둥만 박아 놓은 채 지붕도 없고, 엘리베이터를 생산할 기계설비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준공식을 했기 때문.
 
  “근처 도로는 포장이 전혀 안된 상태였고, 직원들 숙소도 없었습니다. 준공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술 하나만 믿고 밀어붙인 것이죠.”
 
  권 대표는 “사업은, 시작하기 전에는 모든 요소를 꼼꼼하게 확인해 봐야 하지만 일단 투자가 시작되면 무서운 속도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투자금이 투입되는 순간 일분일초가 모두 돈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란다.
 
  그때부터 권 대표의 뚝심 경영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만들 용접기 하나 없는 상태에서 수출 물량을 확보한 것이다.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고, 공장 짓는 데 돈도 많이 들어가는데 앉아서 놀 수는 없잖아요. 저는 한국의 유명 반도체 회사인 S社(사)의 생산라인에 들어가는 리프트 납품을 따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기계를 한 번만 보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 때문에 S사 관계자들에게 현장에 설치된 리프트를 보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을 하니까 저를 믿고 계약을 한 것이죠.”
 
  권 대표는 S사에 납품한 실적은 나중에 중국 내수시장 영업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한국의 유명 반도체 회사에 리프트를 납품할 정도면 믿을 수 있다는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 대표의 설명.
 
  “S사 관계자들이 우리 공장에 와 보고 ‘당신 같은 황당한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더군요. 아직 완성도 되지 않은 공장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납기 내에 물건을 제작할 수 있겠느냐는 거죠. 저는 ‘어쨌든 당신들이 원하는 납기에 원하는 품질의 물건을 납품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설득했어요.”
 
 
  공무원을 내 편으로 만들어라
 
  권 대표는 중국에 있는 엘리베이터 제작회사를 동원해 주문회사가 원하는 품질의 물건을 만들어 납품했다. 이후 한국의 H엘리베이터와 엘리베이터 주문 생산 계약을 맺는 등 회사 설립 초반에 한국과 수출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본격적으로 중국 내수시장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건설회사가 신생 엘리베이터 업체의 물건을 자기들 빌딩에 집어넣겠습니까. 이름도 없는 회사 엘리베이터 장착했다가 괜히 빌딩 값 내려간다고 모두 꺼렸어요.”
 
  권 대표는 신생 브랜드의 약점을 뛰어넘기 위한 ‘묘안’을 생각해 냈다. 충칭시의 名(명) 브랜드로 지정받는다는 계획이었다. 권 대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맥과 기술을 동원해서 명 브랜드 신청을 했다.
 
  “충칭시 관계자들이 심사를 나왔는데 제대로 시설도 갖추지 못한 이런 신생 업체가 어떻게 명 브랜드를 신청했느냐며 의아해했습니다. 저는 명 브랜드라는 것이 품질이 좋고, 계속해서 新(신)제품을 개발해서 소비자를 만족하게 하면 그것이 바로 명품 아니냐고 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했어요. 제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충칭시 관계자들이 아무 막힘없이 설명을 하는 저를 보고 믿고 명 브랜드를 허가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중국 내수시장을 뚫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권 대표는 “특히 둥량현의 공무원들이 우리가 처음 진출한 외국기업이라 많은 신경을 써주고 있다”며 “공무원들과 관계를 잘 다져놓지 않으면 외국인이 사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둥량현에서 발주하는 빌딩에는 대부분 우리 회사 제품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둥량현에서도 현지 기업이 잘돼야 세금을 많이 거둘 수 있기 때문에 건설회사들에 우리 회사 물건을 많이 선전하고 밀어줍니다. 중국은 官(관)의 힘이 크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죠.”
 
  필자가 찾아간 날은 단오 휴일이었는데 권 대표는 집에서 쉬고 있는 둥량현 縣長(현장)을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권 대표는 현장에게 “한국의 제일 큰 신문사에서 일부러 우리 회사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왔다”며 필자를 소개했다.
 
  권 대표는 “엘리베이터 영업은 어떤 건물이 설계가 들어가면 이미 그곳을 대상으로 한 영업은 끝이 나야 한다”며 “현재 우리 회사가 이렇게 바빠진 것도 모두 작년에 영업을 잘해 놓은 결과”라고 말했다. 권 대표는 영업사원들에게 특별한 영업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영업사원들이 영업대상자인 건설업체 관계자를 직접 찾아가서 곧바로 영업을 하면 효과가 없습니다. 그 사람 주변 인물부터 파악해서 주변 사람들과 먼저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영업대상자에게는 생일과 결혼기념일 등에 꾸준하게 엽서와 꽃을 보내면서 호기심을 유발합니다. 그 후 적당한 때가 되면 평소 사귀어 놓았던 영업대상자의 친구와 같이 그를 만납니다. 그렇게 하면 효과가 거의 100%입니다.”
 
  그 외에도 권 대표는 영업부서에서는 영업대상자들이 좋아하는 술, 음식, 기호 등을 꼼꼼하게 리스트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동북3성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일부러 원가보다 싸게 물건을 내보내기도 한다고 한다.
 
  권 대표는 “같은 돈을 써도 좀 더 값어치 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는다”며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음식을 주문할 줄 몰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유명 식당에 가서 그곳 식당의 메뉴에 있는 모든 음식을 다 시켰습니다. 중국 돈으로 600원 정도 나왔는데 맛있는 음식은 따로 적어놓고 다음에 그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계산을 해 보니 이렇게 해서 2년 정도가 되니 600원 투자한 금액이 빠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매번 무슨 음식인지 모른 채 시켜서 못 먹고 남기는 것보다 한 번 투자해서 계속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더 이익 아닙니까.”
 
  권 대표는 중국 진출을 고려하는 기업인이 있다면 절대로 동업자의 말만 믿어서는 안되며 A부터 Z까지 꼼꼼하게 자신이 직접 챙겨야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준비 없이 중국에 왔다가 실패하는 한국인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저는 무조건 돈을 들고 중국에 오려는 사람을 보면 차라리 그냥 2년 정도 관련업체에 취업해서 일을 배우며 중국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라고 조언합니다. 그만큼 중국 사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아무리 친해도 서류는 글자 하나까지 소홀하게 해서는 안되며, 정확한 계약을 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100% 자기 투자로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韓人會를 적극 활용하라
 
  권 대표는 “나처럼 오랜 세월 함께 일해서 상대를 충분히 파악한 경우가 아닌 상태에서 합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제 경험상 중소기업일 경우 경쟁이 심한 대도시를 피해서 군 단위 지역에서 시작하는 것도 리스크를 줄이는 좋은 방법입니다. 또 마케팅이나 홍보는 정부 관계자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투자를 시작하기 전에는 신중해야지만, 일단 투자금액이 송금됐으면 그때부터는 무조건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권오철 대표는 마지막으로 중국에 진출하려는 기업인은 현지 韓人會(한인회)를 적극 활용할 것을 당부했다. 중국 내 한인들이 80만명인데 이들이 중국 전역에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과 관련한 정보를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권오철 대표는 현재 재중국한인협회 부회장이자 충칭한인협회장, 충칭 둥량현 정부 상공회의소 고문직을 겸하면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인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쪹
 


  ▣ 권오철 대표의 중국 비즈니스 성공 노하우
 
  ‘중국에서 하지 말아야 할 50가지’
 
  경영 및 직원관리 부분
  ▶회사도장(인감)을 직원에게 맡기지 말자
  ▶직원에게 전권위임의 위임장을 써주지 말자
  ▶대표로서 자신에게 관대하지 말자
  ▶대표가 직원과의 문제를 직접 1 대 1로 처리하지 말자
  ▶직원복리에 인색하지 말자
  ▶직원 앞에서 화내지 말자
  ▶회계상의 문제점을 직원들에게 알리지 말자
  ▶월급 차이를 너무 두지 말자
  ▶직원 채용 시 출신지역 편견을 갖지 말자
  ▶사문화될 규정은 만들지 말자
  ▶직원을 툭툭 때리지 말자
  ▶직원 몸에 손대지 말자
  ▶중국 내수영업을 하는 경우 영업업무를 직원에게만 맡기지 말자
  ▶회사 안에서 방언을 쓰지 말자
  ▶집에 사무공간을 두지 말자
    
  ‘중국에서 해야 할 50가지’
 
  내수시장 진출 부분
  ▶중국 내수시장을 공략하자
  ▶중국 내수 전문가를 키우자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자
  ▶高價(고가) 시장을 공략하자
  ▶직원보다 전문가가 되자
  ▶시장조사는 전문가에게 맡기자
  ▶근로자의 보험은 법대로 행하자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자
  ▶직원들을 칭찬하자
  ▶능력이 된다면 회계직원은 한국인으로 두자
  ▶출장은 직접 다니자
  ▶컨설팅료를 아끼지 말고 컨설팅 업체를 적극 활용하자
  ▶사기꾼을 조심하자
 

丁海益 두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 총경리  중국 굴착기 시장 7년 연속 판매 1위      

중국 굴착기 시장 20% 점유, 고객만족도 6년 연속 1위
중국에서 29종의 굴착기와 41종의 지게차 생산,
중국 전역에 38개 대리상과 361개 영업거점 보유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eaglebsk@chosun.com

정해익 두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 총경리.

 

 20代(대) 젊은 청년의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려 내렸다. 15m 높이의 공장 천장은 내리쬐는 뙤약볕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烟台)경제개발구에 위치한 두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총경리 丁海益·이하 두산공정) 생산공장에는 한국인 40여 명을 포함해 1600여 명의 직원이 더위를 잊은 채 굴착기 생산에 전념하고 있었다. 북쪽 보하이(渤海)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열기를 식히기에는 부족했다.
 
  1994년 설립된 두산공정은 15년이 지난 지금, 중국 최고의 건설장비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굴착기 시장의 20%를 점유해 7년 연속 판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인민일보가 실시하는 고객만족도 평가에서도 2004년 이후 1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두산공정은 한국 두산인프라코어의 중국법인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건설부문(굴착기·지게차·트럭), 공작기계·자동화시스템(터닝·머시닝센터·초정밀), 엔진소재(건설·산업기계), 방산특수사업(대공포·장갑차·함포), 산업차량(스키드스티어로더) 등 5개 사업군을 운영하는 기계전문 기업이다.
 
  두산공정은 중국 현지에서 29종의 굴착기와 41종의 지게차를 생산한다. 굴착기 중 비싼 모델은 대당 4억원이다. 두산공정의 작년 매출액(굴착기 분야)은 66억 위안(韓貨 1조3200억원)으로 업계 최고를 기록했다. 丁海益(정해익) 총경리의 말이다.
 
  “우리 회사는 캐터필러, 고마쓰, 히타치 등 세계 유명 건설장비 업체보다 중국시장에 늦게 뛰어들었어요. 후발주자인 만큼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지요.”
 
  두산공정은 법인 설립 2년 뒤인 1996년부터 굴착기를, 1998년부터 지게차를 생산했다. 2000년에는 ISO 9001 국제품질표준 인증을 획득했고, 이듬해 ISO 14001 국제환경표준 인증을 취득했다.
 
  두산공정은 2003년 굴착기 생산판매 누계 1만 대를 돌파하면서 ‘위대한’ 기록을 계속 만들어 갔다. 2007년 업계 최초로 연간 판매량 1만 대를 달성했고, 2008년 10월 생산판매 누계 6만 대를 돌파했다.
 
 
  베이징올림픽 직전에는 한 달에 3000대씩 생산
 
전병식 생산기술부장이 완성된 굴착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두산공정의 연간 최대 생산능력은 굴착기의 경우 1만7500대, 지게차는 7000대다. 그동안 회사에 투입된 총 투자액이 7300만 달러다. 중국의 굴착기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두산공정은 중국 전역에 38개 대리상과 361개 영업거점을 보유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건설기계 산업을 대표하는 최고 기업이 된 것이다. 全炳植(전병식) 생산기술부장의 말이다.
 
  “작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한 달에 3000대씩 생산했어요.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죠. 작년 하반기에 경기침체가 없었다면 상당한 기록을 세웠을 겁니다. 올해 하반기부터 중국 경기가 살아나면서 다시 판매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두산공정이 세계 유명 장비업체를 따돌리고 중국 시장을 장악한 비결은 뭘까. 정해익 총경리는 “초창기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직원이 땀을 흘린 결과”라고 했다. 대우중공업 출신으로 법인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는 정해익 총경리는 “중국시장에 진입하면서 고객 특성에 부합하는 제품을 개발했고, 제품 차별화와 기업 현지화를 실현한 것이 성공비결”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1992년 韓中(한중) 수교 당시 중국의 굴착기 시장은 연 4000~5000대에 불과했어요. 더구나 일본산 중고 제품의 비중이 높아 시장성이 낮았습니다. 그런데 시장을 면밀히 조사해 보니 중국에 진출한 선진 업체들의 시장 장악력이 상당히 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요. 중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과 생산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진출을 결정했죠.”
 
  당시 한국 본사는 비효율적인 유통망 체계, 국토 면적이 넓어 지역간 특성과 구매 패턴이 다르다는 점, 유명 메이커 제품 간 성능과 품질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두산공정은 전국을 담당할 수 있는 유통망 구축에 나섰다. 직영판매와 대리상 제도를 동시에 운영하며 애프터서비스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판매상을 혹독히 교육했다. 마침내 2002년 두산공정은 중국 전역을 커버하는 100여 개의 독점 영업망을 구축했다.
 
  두산공정은 현지 특성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펼쳐 나갔다. 기존 업체들이 100% 현금 위주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역으로 할부제도를 실시했다. 그러자 현금이 모자라 구매를 꺼렸던 잠재고객이 실제 구매층으로 바뀌는 결과가 나타났다. 1997년 이후 건설장비 시장이 50% 이상 확대되면서 두산공정의 굴삭기는 날개 달린 듯 팔려 나갔다.
 
 
  지역 특성에 맞는 제품 개발
 
립 중인 굴착기 본체.
  정해익 총경리는 “고객 특성에 맞는 제품을 개발한 것도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 했다.
 
  “중국 고객들은 가격에 민감하면서도 제품의 성능을 매우 중시했어요. 합리적 가격과 뛰어난 성능이 관건이었지요. 그래서 기본 성능에 충실한 굴착기를 만들자는 전략을 폈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넓어 지역마다 기후 환경과 작업 조건이 달라요. 여름철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덥지요. 가동시간이나 작업강도를 보면 세계에서 최악입니다. 당연히 공사현장에서 작업부하가 걸릴 수밖에요. 우리는 과열과 漏油(누유) 현상을 막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죠. 한마디로 열대지방을 기준으로 굴착기를 만든 겁니다.”
 
  두산공정은 한겨울에 영하 수십 도씩 내려가는 북쪽 지방과 3000m가 넘는 서부 고원지역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굴착기도 개발했다. 전병식 생산기술부장의 말이다.
 
  “공기밀도가 낮은 고원지역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굴착기 엔진을 만들었지요. 지역특성을 살린 제품을 만들었으니 안 팔리면 그게 더 이상하죠. 현재 중서부 고원지역에서 우리 제품은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어요.”
 
  정해익 총경리는 “우리가 중국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빠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차별화 전략도 한몫했다”고 했다. 두산공정은 전국 360여 개 판매대리상이 AS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비시설까지 구축했다. 본사는 판매대리상에 대한 교육과 지원을 계속 늘려 서비스 강화활동을 전개했다. 두산공정의 올해 애프터서비스 목표는 ‘중국 어느 지역이든 12시간 이내에 수리를 완벽하게 이행한다’는 것이다.
 
  정해익 총경리는 성공요인으로 ‘기업의 현지화’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두산공정이 중국 현지에서 사업을 시작해 내수시장을 독자적으로 개척하며 성장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고 했다. 두산공정은 현지화의 일환으로 관리자급에 중국 현지인들을 대거 앉혔다. 현지 직원의 정서에 맞는 인센티브 제도도 실시했다. 人事(인사)문제는 노동조합과 협의해 부작용을 없앴다.
 
  두산공정은 ‘이윤은 적당히 추구하고 그 대신 사회에 많이 보답하자’는 두산그룹의 취지에 따라 중국 내에서 공익사업을 활발히 펼쳐 왔다. 정해익 총경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사업하기 위해서는 사회공헌활동은 필수가 됐다”며 “옌타이에서 ‘두산공정’ 하면 공익사업 많이 하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중국 관영방송인 CCTV에도 공익사업을 많이 하는 기업으로 소개됐다고 한다. 두산공정은 옌타이시에서 세금을 많이 내는 기업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사회공헌활동은 미래를 내다보는 경영전략”
 
젊은 근로자들이 굴착기 엔진을 조립하고 있다.
  두산공정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공익사업은 ‘두산 희망공정’이다. 이 사업은 2001년부터 중국 공산당 청년단이 추진하는 희망공정사업 프로젝트에 동참해 지방 낙후지역에 소학교를 지어 주는 사업이다. 두산공정은 2008년 현재 16개 省(성)에 20여 개 학교를 지어 주고 매년 학교당 25만 위안(50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온난공정’이라는 사업도 특별하다. 두산공정은 2007년 11월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에 2000만 위안(40억원)을 들여 ‘온난공정두산배훈중심’이라는 기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기계조립·용접·가공·수리 등을 가르친다. 향후 중국 내 고급기술 인력 양성소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두산공정은 지난해 쓰촨성 지진 재해 때 굴착기를 현장에 지원하는 등 총 1018만 위안을 쏟아 부었다. 당시 중국 CCTV가 지진 피해 복구현장을 보도하면서 ‘DOOSAN’ 로고가 적힌 굴착기를 화면에 연일 내보냈다. 두산공정은 뜻하지 않게 중국 전역에 自社(자사) 브랜드를 알리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됐다.
 
  이 일로 두산공정은 중국을 돕는 진정한 이웃이라는 인식이 중국인들 마음속에 각인됐다고 한다. 쓰촨성 굴착기 시장의 경우 두산공정의 점유율은 2007년 말 14.2%에서 1년 만에 21.6%로 급상승했다.
 
  이밖에 두산공정은 옌타이한국학교 건립에 250만 위안을, 사회적 약자 지원에 매년 10만 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두산공정은 2007년 미국의 중장비업체인 ‘밥캣’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8톤 이하 소형 굴착기 시장에 강하다. 두산공정은 중국 정부가 국내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회간접자본과 사회인프라 구축에 한창이라는 점을 감안해 굴착기 신제품을 대거 출시할 예정이다.
 
 
  “중국 국토개발의 선봉대”
 
옌타이에 위치한 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
  趙光鉉(조광현) 사업관리부장은 두산공정의 향후 목표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세계시장과 마찬가지로 중국 내수시장에서도 건설장비 업체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요. 소비자의 특성과 니즈(needs)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소득이 늘어나면서 제품의 편의성도 중시합니다. 지역별 특성도 강화되고요. 우리 두산공정은 기존의 영업망을 대형화해야 해요. 내구성과 고객 만족에 초점을 맞춘 제품도 만들어 내야 하고요. 타사 제품에 비해 뛰어난 애프터서비스도 계속 유지해 나갈 겁니다.”
 
  정해익 총경리는 “우리 회사는 중국 국토개발의 선봉대 역할을 해 왔다”며 두산공정의 指向像(지향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 정부와 사회로부터는 ‘믿을 수 있고 책임을 다하는 기업’, 종업원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내 직장’, 사회 초년생에게는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 고객에게는 ‘富(부)를 가져다 주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 협력업체에는 ‘더불어 발전하고 싶은 기업’이라는 평을 받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겁니다.” 계속

丁海益 두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 총경리    

중국 굴착기 시장 20% 점유, 고객만족도 6년 연속 1위
중국에서 29종의 굴착기와 41종의 지게차 생산,
중국 전역에 38개 대리상과 361개 영업거점 보유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eaglebsk@chosun.com

정해익 두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 총경리.

 20代(대) 젊은 청년의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려 내렸다. 15m 높이의 공장 천장은 내리쬐는 뙤약볕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烟台)경제개발구에 위치한 두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총경리 丁海益·이하 두산공정) 생산공장에는 한국인 40여 명을 포함해 1600여 명의 직원이 더위를 잊은 채 굴착기 생산에 전념하고 있었다. 북쪽 보하이(渤海)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열기를 식히기에는 부족했다.
 
  1994년 설립된 두산공정은 15년이 지난 지금, 중국 최고의 건설장비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굴착기 시장의 20%를 점유해 7년 연속 판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인민일보가 실시하는 고객만족도 평가에서도 2004년 이후 1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두산공정은 한국 두산인프라코어의 중국법인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건설부문(굴착기·지게차·트럭), 공작기계·자동화시스템(터닝·머시닝센터·초정밀), 엔진소재(건설·산업기계), 방산특수사업(대공포·장갑차·함포), 산업차량(스키드스티어로더) 등 5개 사업군을 운영하는 기계전문 기업이다.
 
  두산공정은 중국 현지에서 29종의 굴착기와 41종의 지게차를 생산한다. 굴착기 중 비싼 모델은 대당 4억원이다. 두산공정의 작년 매출액(굴착기 분야)은 66억 위안(韓貨 1조3200억원)으로 업계 최고를 기록했다. 丁海益(정해익) 총경리의 말이다.
 
  “우리 회사는 캐터필러, 고마쓰, 히타치 등 세계 유명 건설장비 업체보다 중국시장에 늦게 뛰어들었어요. 후발주자인 만큼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지요.”
 
  두산공정은 법인 설립 2년 뒤인 1996년부터 굴착기를, 1998년부터 지게차를 생산했다. 2000년에는 ISO 9001 국제품질표준 인증을 획득했고, 이듬해 ISO 14001 국제환경표준 인증을 취득했다.
 
  두산공정은 2003년 굴착기 생산판매 누계 1만 대를 돌파하면서 ‘위대한’ 기록을 계속 만들어 갔다. 2007년 업계 최초로 연간 판매량 1만 대를 달성했고, 2008년 10월 생산판매 누계 6만 대를 돌파했다.
 
 
  베이징올림픽 직전에는 한 달에 3000대씩 생산
 
전병식 생산기술부장이 완성된 굴착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두산공정의 연간 최대 생산능력은 굴착기의 경우 1만7500대, 지게차는 7000대다. 그동안 회사에 투입된 총 투자액이 7300만 달러다. 중국의 굴착기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두산공정은 중국 전역에 38개 대리상과 361개 영업거점을 보유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건설기계 산업을 대표하는 최고 기업이 된 것이다. 全炳植(전병식) 생산기술부장의 말이다.
 
  “작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한 달에 3000대씩 생산했어요.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죠. 작년 하반기에 경기침체가 없었다면 상당한 기록을 세웠을 겁니다. 올해 하반기부터 중국 경기가 살아나면서 다시 판매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두산공정이 세계 유명 장비업체를 따돌리고 중국 시장을 장악한 비결은 뭘까. 정해익 총경리는 “초창기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직원이 땀을 흘린 결과”라고 했다. 대우중공업 출신으로 법인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는 정해익 총경리는 “중국시장에 진입하면서 고객 특성에 부합하는 제품을 개발했고, 제품 차별화와 기업 현지화를 실현한 것이 성공비결”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1992년 韓中(한중) 수교 당시 중국의 굴착기 시장은 연 4000~5000대에 불과했어요. 더구나 일본산 중고 제품의 비중이 높아 시장성이 낮았습니다. 그런데 시장을 면밀히 조사해 보니 중국에 진출한 선진 업체들의 시장 장악력이 상당히 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요. 중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과 생산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진출을 결정했죠.”
 
  당시 한국 본사는 비효율적인 유통망 체계, 국토 면적이 넓어 지역간 특성과 구매 패턴이 다르다는 점, 유명 메이커 제품 간 성능과 품질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두산공정은 전국을 담당할 수 있는 유통망 구축에 나섰다. 직영판매와 대리상 제도를 동시에 운영하며 애프터서비스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판매상을 혹독히 교육했다. 마침내 2002년 두산공정은 중국 전역을 커버하는 100여 개의 독점 영업망을 구축했다.
 
  두산공정은 현지 특성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펼쳐 나갔다. 기존 업체들이 100% 현금 위주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역으로 할부제도를 실시했다. 그러자 현금이 모자라 구매를 꺼렸던 잠재고객이 실제 구매층으로 바뀌는 결과가 나타났다. 1997년 이후 건설장비 시장이 50% 이상 확대되면서 두산공정의 굴삭기는 날개 달린 듯 팔려 나갔다.
 
 
  지역 특성에 맞는 제품 개발
 
조립 중인 굴착기 본체.
  정해익 총경리는 “고객 특성에 맞는 제품을 개발한 것도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 했다.
 
  “중국 고객들은 가격에 민감하면서도 제품의 성능을 매우 중시했어요. 합리적 가격과 뛰어난 성능이 관건이었지요. 그래서 기본 성능에 충실한 굴착기를 만들자는 전략을 폈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넓어 지역마다 기후 환경과 작업 조건이 달라요. 여름철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덥지요. 가동시간이나 작업강도를 보면 세계에서 최악입니다. 당연히 공사현장에서 작업부하가 걸릴 수밖에요. 우리는 과열과 漏油(누유) 현상을 막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죠. 한마디로 열대지방을 기준으로 굴착기를 만든 겁니다.”
 
  두산공정은 한겨울에 영하 수십 도씩 내려가는 북쪽 지방과 3000m가 넘는 서부 고원지역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굴착기도 개발했다. 전병식 생산기술부장의 말이다.
 
  “공기밀도가 낮은 고원지역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굴착기 엔진을 만들었지요. 지역특성을 살린 제품을 만들었으니 안 팔리면 그게 더 이상하죠. 현재 중서부 고원지역에서 우리 제품은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어요.”
 
  정해익 총경리는 “우리가 중국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빠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차별화 전략도 한몫했다”고 했다. 두산공정은 전국 360여 개 판매대리상이 AS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비시설까지 구축했다. 본사는 판매대리상에 대한 교육과 지원을 계속 늘려 서비스 강화활동을 전개했다. 두산공정의 올해 애프터서비스 목표는 ‘중국 어느 지역이든 12시간 이내에 수리를 완벽하게 이행한다’는 것이다.
 
  정해익 총경리는 성공요인으로 ‘기업의 현지화’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두산공정이 중국 현지에서 사업을 시작해 내수시장을 독자적으로 개척하며 성장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고 했다. 두산공정은 현지화의 일환으로 관리자급에 중국 현지인들을 대거 앉혔다. 현지 직원의 정서에 맞는 인센티브 제도도 실시했다. 人事(인사)문제는 노동조합과 협의해 부작용을 없앴다.
 
  두산공정은 ‘이윤은 적당히 추구하고 그 대신 사회에 많이 보답하자’는 두산그룹의 취지에 따라 중국 내에서 공익사업을 활발히 펼쳐 왔다. 정해익 총경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사업하기 위해서는 사회공헌활동은 필수가 됐다”며 “옌타이에서 ‘두산공정’ 하면 공익사업 많이 하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중국 관영방송인 CCTV에도 공익사업을 많이 하는 기업으로 소개됐다고 한다. 두산공정은 옌타이시에서 세금을 많이 내는 기업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사회공헌활동은 미래를 내다보는 경영전략”
 
젊은 근로자들이 굴착기 엔진을 조립하고 있다.
  두산공정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공익사업은 ‘두산 희망공정’이다. 이 사업은 2001년부터 중국 공산당 청년단이 추진하는 희망공정사업 프로젝트에 동참해 지방 낙후지역에 소학교를 지어 주는 사업이다. 두산공정은 2008년 현재 16개 省(성)에 20여 개 학교를 지어 주고 매년 학교당 25만 위안(50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온난공정’이라는 사업도 특별하다. 두산공정은 2007년 11월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에 2000만 위안(40억원)을 들여 ‘온난공정두산배훈중심’이라는 기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기계조립·용접·가공·수리 등을 가르친다. 향후 중국 내 고급기술 인력 양성소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두산공정은 지난해 쓰촨성 지진 재해 때 굴착기를 현장에 지원하는 등 총 1018만 위안을 쏟아 부었다. 당시 중국 CCTV가 지진 피해 복구현장을 보도하면서 ‘DOOSAN’ 로고가 적힌 굴착기를 화면에 연일 내보냈다. 두산공정은 뜻하지 않게 중국 전역에 自社(자사) 브랜드를 알리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됐다.
 
  이 일로 두산공정은 중국을 돕는 진정한 이웃이라는 인식이 중국인들 마음속에 각인됐다고 한다. 쓰촨성 굴착기 시장의 경우 두산공정의 점유율은 2007년 말 14.2%에서 1년 만에 21.6%로 급상승했다.
 
  이밖에 두산공정은 옌타이한국학교 건립에 250만 위안을, 사회적 약자 지원에 매년 10만 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두산공정은 2007년 미국의 중장비업체인 ‘밥캣’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8톤 이하 소형 굴착기 시장에 강하다. 두산공정은 중국 정부가 국내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회간접자본과 사회인프라 구축에 한창이라는 점을 감안해 굴착기 신제품을 대거 출시할 예정이다.
 
 
  “중국 국토개발의 선봉대”
 
옌타이에 위치한 산공정기계중국유한공사.
  趙光鉉(조광현) 사업관리부장은 두산공정의 향후 목표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세계시장과 마찬가지로 중국 내수시장에서도 건설장비 업체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요. 소비자의 특성과 니즈(needs)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소득이 늘어나면서 제품의 편의성도 중시합니다. 지역별 특성도 강화되고요. 우리 두산공정은 기존의 영업망을 대형화해야 해요. 내구성과 고객 만족에 초점을 맞춘 제품도 만들어 내야 하고요. 타사 제품에 비해 뛰어난 애프터서비스도 계속 유지해 나갈 겁니다.”
 
  정해익 총경리는 “우리 회사는 중국 국토개발의 선봉대 역할을 해 왔다”며 두산공정의 指向像(지향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 정부와 사회로부터는 ‘믿을 수 있고 책임을 다하는 기업’, 종업원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내 직장’, 사회 초년생에게는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 고객에게는 ‘富(부)를 가져다 주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 협력업체에는 ‘더불어 발전하고 싶은 기업’이라는 평을 받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겁니다.”

李金揆 란다이-코파스 중국법인 사장  한국 기업은 기술, 중국 기업은 설비 투자하여 중국시장 개척     

  한국에서 디자인을 하고 제품개발과 제조는 중국에서 韓中 윈윈하는 최적의 합작방식

 

   

이금규 란다이-코파스의 사장.

 수많은 한국 기업이 合資(합자)를 통해 중국에 진출하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변속기와 차량 부품 생산업체인 코파스(KOPARS)처럼 중국 현지 기업의 생산시설을 100% 활용해 중국 진출에 성공한 韓中(한·중) 合作(합작) 사례는 흔치 않다.
 
  코파스는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하나인 충칭시(重慶市)의 비산현(壁山縣)에 위치하고 있다. 인구 3000만명의 충칭은 중국 정부가 서부개발의 중심도시로 집중 육성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외의 많은 기업이 몰려드는 곳이다.
 
  코파스가 진출한 비산현은 인구 61만명으로, 충칭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3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최근 충칭시가 비산공업구를 중심으로 工業縣(공업현)으로 집중 발전시키고 있는 지역이다. 비산공업지구에는 기계, 방직, 가구, 건축, 의약, 식품 산업이 밀집해 있다.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 본사를 둔 코파스는 2006년 충칭의 자동차와 오토바이 미션 생산 전문업체인 란다이(藍黛)실업유한공사와 50 대 50으로 자본을 투자해 ‘란다이-코파스 파워트레인 테크놀로지’라는 합자기업을 설립했다.
 
  코파스 중국법인의 李金揆(이금규·49) 사장은 “우리 두 회사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형식의 합작을 택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파스의 선진기술 및 해외영업 능력과 란다이의 생산 및 중국 내수시장 능력을 합친 방식입니다. 원래 란다이는 해외 수출 실적이 없던 회사였습니다. 현재 란다이-코파스의 매출 40%가 해외 수출에서 나옵니다. 우리와 합작을 하면서 란다이는 비산현에서 수출 1위 기업이 되었습니다.”
 
  1992년 설립한 코파스는 자동차 변속기(미션)와 미션 관련 부품을 완성차 회사에 공급하는 회사다. 이밖에도 자동차 엔진과 실린더 블록 등 엔진 관련 부품, 전·후륜 현가장치 등 각종 자동차부품 및 자동차부품 생산용 기계설비와 생산라인을 생산하고 있다.
 
  코파스는 1999년 자동차 관련 부품을 아웃소싱하면서 중국에 진출했으며, 2007부터는 란다이와 합작으로 본격적인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현재 충칭 란다이-코파스의 직원은 112명, 매출은 3200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6명이 근무하고 있다.
 
 
  핵심기술만 보유, 생산은 아웃소싱
 
란다이-코파스에서 생산하는 차량 변속기와 변속기 내에 들어가는 기어의 모습.
  코파스는 자동차 변속기의 경우 한국에 자체 생산시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코파스 중국법인의 이금규 사장은 “코파스는 부품과 장비를 생산하는 ‘핵심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술을 바탕으로 아웃소싱 생산 방식을 택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인건비와 환율 변동 등으로 물건을 팔 때마다 손해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또 자체 생산라인이 없이 30개 이상의 외주 업체의 품질과 납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 중국에 생산공장이 있어 납기문제와 기술적인 문제를 직접 관리할 수 있고, 납기, 품질, 원가 면에서 고객의 요구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코파스가 란다이의 사업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술력과 해외영업력 때문이다. 코파스의 주요 해외 수출국은 이란이다. 이 사장은 “현대가 자동차 산업 초창기에 이란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했을 정도로 이란은 중동에서 자동차 산업이 앞선 나라”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란다이-코파스의 생산라인 현장. 중국 대부분의 생산 현장에서는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이 일을 한다.
  “코파스는 이란에 자동차 부품 및 자동차 생산관련 설비를 수출하면서 성장한 회사입니다. 코파스를 설립한 신형찬(49) 회장은 회사 설립 초반부터 이란 시장에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신 회장은 한국에서 근무할 때 출퇴근도 이란 현지시각에 맞춰서 할 정도입니다. 또 이란의 역사와 문화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란 사업 파트너들이 신 회장을 존경합니다. 이란의 특성상 정치 상황이 어려울 때가 많지만 코파스는 한결같이 파트너들에게 신뢰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지금까지 이런 굴지의 자동차 회사와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사장은 “란다이가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품질을 향상하고 수출을 통해 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정책과 코파스의 중국진출 전략이 맞아 떨어져 두 회사의 합작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대량생산 능력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지만, 생산기술과 품질관리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이르면 판매는 증가하지만 이익이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윤 상승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합작하고 보니 란다이의 중국 현지 공장도 원가 손실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는 중국 공장의 이윤 창출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기술지도와 품질관리 시스템을 이전했습니다. 우리가 개발한 신형 변속기 모델을 여기서 생산하기도 하고, 기존 중국 공장이 가진 여러 문제점을 개선하는 작업도 진행했습니다.”
 
 
  중국 공장 관리목표, ‘5% 지시, 95% 확인’
 
충칭시의 長江 변(조천문 광장)에서 필자(가운데)와 함께 한 코파스 이금규 사장(오른쪽)과 남상준 이사.
  이 사장은 “예를 들어 부품적재방식, 생산라인 간 제품 이동방법, 공구관리방법, 검사방법, 생산라인의 레이아웃 등 모든 면에서 개선할 점을 찾아 기술지도를 했다”고 말했다.
 
  “중국에 진출해서 보니 작은 문제를 중요시 하지 않아 결국 커다란 품질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중국 작업자들의 고정관념도 너무 강해 의식전환이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공장의 관리목표를 ‘5% 지시, 95% 확인’으로 설정하여 끈기를 가지고 중국 작업자들이 따라올 때까지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납품을 하는 자동차 메이커들로부터 란다이 제품의 품질이 크게 향상됐고, 원가 절감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선 기술을 중국에 모두 이전하면 결국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냐는 질문에 이 사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독일은 설비 라인 하나를 수출하면 거기에 연관된 많은 기술을 같이 이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기업들은 현지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다음번의 오더(주문)와 연결이 됩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대부분 기술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배타적 성향이 강합니다. 특히 한국은 최첨단 자동차부품을 만드는 기술이 아직 초보단계입니다. 우리가 가진 정도의 기술을 이전하지 않는다고 우리 기술이 보호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국은 세계 유명 자동차 공장의 집합소이며, 각축장입니다.”
 
  이 사장은 “1990년대 초반에 중국에 진출했던 우리나라 자동차부품 기업들은 중국의 특수한 기업환경을 너무 몰라 대부분 실패를 했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모든 설비를 한국에서 직접 가져다가 공장을 지었기 때문에 제조원가가 높았습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공정 원가인 셈이죠. 제가 당시에 근무했던 TI중공업 칭다오(靑島) 공장에서도 지프에 들어가는 변속기를 개발해 중국의 자동차 회사에 납품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제품을 이탈리아 수입품과 비교해보니 가격 차이가 10%정도밖에 나지 않았어요. 중국 자동차 회사 입장에서는 그 정도 가격 차이라면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한국 제품을 쓸 이유가 없죠.”
 
  이 사장은 “당시 중국의 자동차부품 회사들은 같은 종류의 변속기라도 인민폐 1000원짜리에서부터 5000원짜리까지 만들 수 있도록 설비가 돼 있어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대의 부품을 자유자재로 공급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기업은 품질 수준을 낮추면서까지 그런 유연성을 발휘할 수가 없기 때문에 원가면에서 중국 로컬 기업들과 경쟁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닭을 빌려 계란을 낳게 한다’
 
공장 생산 라인 한쪽 탁자에 놓여 있는 직원들의 차. 중국인들은 언제 어디서든 차를 마신다.
  이 사장은 “중국은 아직도 틈새시장을 파고들 가능성이 많은 나라”라고 말했다.
 
  “중국처럼 저임금에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중국에 ‘借鷄下蛋(차계하단)’ 즉, ‘닭을 빌려 계란을 낳게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봅니다. 우리 코파스는 기술개발과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제조는 중국에서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이 우리처럼 중국을 적극 활용했으면 합니다. 우리 중소업체들도 신뢰성 있는 중국 기업과 합작하여 중국 기업이 보유한 기존 인프라를 이용하면 시너지 효과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장은 “중국을 우리의 경쟁상대로만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중국은 친구이자 우리가 함께 가야할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중국을 이해하려면 한국과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중소기업이 중국에 진출할 때 유의해야 할 점 몇 가지를 소개했다.
 
  “기업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 즉, ‘판매’입니다. 그래서 중국 국내 마케팅을 위해 합자 파트너를 많이 구하는데, 합자로 기업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모든 사업이 평탄할 때는 어떤 어려움도 서로 해결할 수 있지만,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경우 작은 異見(이견)도 조율하기가 힘이 듭니다. 따라서 하고자 하는 업종에서 경험이 풍부한 파트너 선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는데 가장 힘든 점이기도 하고요.”
 
  이 사장은 “합자로 기업을 할 때는 확실한 업무 분장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중국 측은 일반관리, 인원·재무·외주단가 관리, 對(대)관공서 관련 업무 등을 맡고, 한국 측은 개발·생산·기술·품질관리, 해외시장개척 등등을 담당하는 것이죠. 물론 그 전에 철저한 현지조사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요. 하지만 정작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중국 정부는 自國(자국) 기업 편을 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금규 사장은 “내가 1994년부터 중국의 많은 곳을 다녀봤는데 이곳 충칭 사람들의 성격이 한국 사람과 너무 비슷해서 놀랄 때가 많다”며 “이곳 사람들의 일에 대한 근성이 중국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높고 성품이 좋아 사업하기에 유리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인터뷰 후 이 사장의 안내로 공장의 생산 라인을 둘러보았다. 공장 건물마다 각종 자동차용 기어와 변속기를 만드는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어느 한 건물은 오토바이 변속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오늘날 란다이의 모태가 된 생산 라인이라고 한다.
 
  란다이-코파스는 공장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비산현 개발구 내에 현재 규모의 4배 정도 되는 대규모 공장을 짓고 있다. 2011년부터 본격 가동되는 새 공장에서는 자동변속기, 엔진 관련부품 등 생산 품목을 늘리고, 모든 시설을 자동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趙文衡 청도신신체육용품유한회사 총경리  스포츠용품으로 만리장성 쌓는다      

 1991년 중국 진출, 96년부터 중국 내수시장 공략, 연간 1억 위안의 스포츠용품 판매
현재 중국 스포츠용품 시장 점유율 15% 차지
    金容三 편집장/부장 (dragon03@chosun.com

축구공, 배구공, 핸드볼공으로 중국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조문형 청도신신체육용품 총경리.

 지구는 둥글다. 그라운드를 구르는 공도 둥글다. 그 둥근 공 하나로 세계 최대의 시장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석권할 꿈을 벼르는 기업이 있다. 청도신신체육용품유한회사(총경리 趙文衡)가 그 주인공이다.
 
  ‘STAR(스타)’라는 상표로 우리에게 친숙한 청도신신체육용품은 축구공, 농구공, 핸드볼공, 배구공 등을 생산하는 스포츠용품 전문 메이커다. 이 회사는 중국을 상징하는 간판기업 중의 하나인 세계적인 가전 메이커 하이얼의 칭다오(靑島) 공장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 길 하나 건너면 하이얼 공장인 관계로 하이얼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길 건너편에 있는 신신체육용품 회사를 자주 찾는다고 한다.
 
  이 회사는 1965년 한국에서 창업한 스포츠용품 메이커 신신상사가 모태다. 지금도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본사가 있다. 청도신신체육용품이 중국에 진출한 것은 韓中(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991년. 어느 기업보다도 발 빠르게 떠오르는 시장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겼다. 이 회사 趙文衡(조문형) 총경리의 설명이다.
 
  “회사가 중국에 진출한 것은 1991년이고, 저는 이듬해인 92년에 전무이사로 현지 공장 운영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의 중국 생활은 이제 18년째니, 거의 중국 사람이 다 된 편이라고 한다.
 
  “처음 칭다오에 도착했을 때 공장 주변은 온통 논밭뿐인 깡촌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가전 메이커로 성장한 하이얼도 우리가 진출했을 때는 냉장고만 생산하는 소규모 기업에 불과했어요. 우리 공장에 근무하는 중국 인력이 1200여 명인데, 초기엔 거의 걸어서 출퇴근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직원이 오토바이를 보유하고 있고,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중국 직원도 20여 명이나 됩니다.”
 
  지금은 수천 개의 한국 기업이 칭다오에 진출했지만 그 시절엔 신신체육용품 회사 하나뿐이라 외롭기도 하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1996년부터 중국 내수시장 뛰어들어
 
  진출 초기인 1991년부터 95년까지는 칭다오 현지에서 생산한 제품의 100%를 해외 수출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조 총경리의 설명.
 
  “스팔딩, 윙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주문을 받아 OEM(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으로 수출을 했습니다. 이 와중에 우리 회사가 생산하여 스팔딩에 납품되는 농구공이 세계 최고·최대의 농구잔치인 NBA 공인 게임구로 선정돼 지금도 NBA 경기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 팀 던컨, 케빈 가넷 등 쟁쟁한 NBA 스타들이 저희 회사가 만든 공으로 덩크슛도 꽂아넣고, 묘기대행진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전량을 해외수출에 의존하던 회사가 중국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린 것은 1996년부터다. 중국 내수시장 공략을 위해 회사는 스포츠용품 대리점 운영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제품의 구성을 다양화했다. 기존의 축구공, 배구공, 농구공, 핸드볼공, 테니스공 등의 주력 제품에다가 축구화, 배구화 등 스포츠화를 추가했고, 이어 각 구기종목에 필요한 유니폼, 트레이닝복은 물론 베드민턴 라켓, 테니스 라켓 등으로 라인업을 다양화한 것.
 
  20여 개의 대리점으로 내수시장에 첫발을 들여놓은 초기에는 매출액이 1400만 위안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제 본격적인 중국 내수시장에 뛰어든 지 13년 만인 2009년 현재 이 회사는 중국 전역의 주요 도시에 300여 개의 대리점을 확보하고 연간 매출액이 1억 위안(약 185억원)을 넘나들고 있다.
 
  2002년 월드컵 기간 중에는 CCTV 5 채널에 TV광고를 집중하여 ‘STAR’ 브랜드 이미지를 중국 전역에 알렸다고 한다. 현재 신신체육용품의 중국 내 시장 점유율은 15% 정도. 경쟁사는 아디다스, 스팔딩, 몰텐, 미카사 등 글로벌 스포츠 메이커라고 한다. 특히 축구공은 아디다스, 농구공은 나이키, 배구공은 몰텐과 미카사 등 쟁쟁한 스포츠 빅 메이커와 사활을 건 시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조문형 총경리의 설명.
 
  “내수 진출 초기에는 중국 제품이 노무 조악해 쉽게 시장을 파고들었습니다. 우리의 ‘스타’ 제품은 품질 면에서 나이키나 아디다스보다 내구성이나 품질이 더 우수하다는 평을 듣고 있어요.”
 
 
  전체 매출의 50%는 농구공
 
칭다오의 하이얼 공장 맞은편에 위치한 청도신신체육용품 회사. 옥상에 이 회사 상표인 ‘스타’를 알리는 커다란 입간판이 걸려 있다.
  필자는 조문형 총경리의 안내로 생산공장을 돌아보았는데, 각종 공의 생산과정이 30여 개 공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많은 인력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 업종이 노동집약적 장치산업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 조선족 직원도 2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조문형 총경리는 “진출 초기엔 조선족 직원이 70여 명 근무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든 편”이라면서 “초기에 언어문제와 현지인들과의 대화 등에 조선족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전체 제품 구성 중에서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은 농구공으로 전체 매출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이 축구공, 배구공, 핸드볼공 순이라고 한다. 조문형 사장의 설명이다.
 
  “중국은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등의 여파로 축구에 대한 열기가 싸늘한 편인 반면, 야오밍이라는 NBA 스타의 걸출한 활약 덕분에 농구 열기가 대단합니다. 야구는 이제 걸음마 단계기 때문에 별 인기가 없어요. 때문에 매출 비중은 농구공이 단연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회사는 중국 내에서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여자 프로축구팀 4개팀(인민해방군팀, 허베이성, 쓰촨성, 산둥성팀)의 스폰서를 맡아 축구공과 슈즈 등 각종 용품을 지원하고 있고, 중국 국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스포츠 대회를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조 총경리의 설명이다.
 
  “현재 우리 회사 제품이 중국의 각 省(성)별 시합의 지정구로 공인을 받아 경기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축구공의 경우 중국 전체 성 중의 절반 정도에서 지정 시합구로 공인을 받았습니다. 또 축구, 배구, 핸드볼 종목은 대학생리그의 지정구로 채택됐고, 핸드볼은 중국 전역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의 지정구로, 여자프로축구 시합에서도 저희 제품을 시합구로 지정받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올림픽이 끝난 다음해에 4년마다 중화인민공화국 운동회가 열리는데, 이 대회에 각 성 대표팀이 참가하여 차기 올림픽에 대비한 선수를 선발한다. 올해는 10월에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에서 11회 대회가 열리는데, 이 대회의 축구, 배구, 농구, 핸드볼 종목에도 ‘스타’ 제품이 시합구로 채택됐다고 한다.
 
 
  각종 경기의 시합 공인구로 채택돼
 
제11기 중화인민공화국 운동회에 농구경기 공인구로 지정된 스타 농구공.
  현재 ‘스타’ 제품은 중국 내수시장뿐 아니라 한국, 미국, 유럽 등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고 있다. 회사 전체의 매출 비중을 보면 수출이 60%, 중국 내수 40% 정도라고 한다. 한국의 경우 그동안은 테니스공 시장에서 낫소가 강세였는데, 중국에서 제조한 ‘스타’ 제품이 낫소를 누르고 한국 테니스공 시장의 70% 정도를 장악했다고 한다.
 
  또 한국에서 열리는 모든 핸드볼과 배구시합의 경우 ‘스타’가 시합 공인구로 지정됐으며, 한국 내의 모든 여자농구 경기도 ‘스타’가 시합 공인구로 지정됐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 여파로 미국 시장이 침체에 빠져 있는 반면 중국 내수시장은 연간 20%씩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회사는 큰 폭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내수시장의 적극적인 공략을 위해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에 직영매장을 개설했고, 올해 하얼빈과 우한(武漢)에도 직영매장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문형 총경리는 신신체육용품이 중국 내수시장에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내수시장 진출에 앞서 중국 소비자와 시장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시장과는 제품 구성이나 가격정책을 다르게 가야 한다는 점을 주목했어요. 중국 소비자들은 소득이 낮기 때문에 저가품 위주의 구매 패턴을 보이고 있어 고가 제품으로 분류되는 우리 제품을 구매하는 데 부담을 느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소득이 계속 높아지면서 고가품을 요구하는 계층도 늘어 우리는 중고가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제품으로 승부수를 띄웠어요.”
 
  이 전략은 적중했다. 나아가 공만 팔아서는 대리점 유지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제품 구성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쉽게 중국 내수시장을 파고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내의 ‘스타’ 제품 대리점은 성마다 10개소 정도씩 개설되어 주요 거점도시에만 문을 연 셈이다. 조 총경리는 “현재 우리 회사의 대리점은 각 성의 1급 도시(省급 도시)를 위주로 개설되어 있는데, 3년 내에 3급 도시(縣급 도시)까지 진출해 중국 내수시장에서 본격적인 경쟁체제를 갖추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대리점망이 탄탄하게 확보되면 머지않아 ‘스타’ 브랜드가 중국 전역을 석권하여 공으로 만리장성을 쌓을 것이다.
 


  ▣ 조문형 총경리가 조언하는 중국 내수시장 공략비법
 
  1. 중국의 법규를 준수하라.
  중국에서 편법은 통하지 않는다. 중국의 모든 법규를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 내수시장 공략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2. 중국 거래처에 나의 진면목을 보여라.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술자리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술을 잘 못 마시더라도 빼거나 숨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솔직한 인간관계가 오래 쌓일 때 비즈니스도 무르익는다.
 
  3. 품질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
  제품의 품질이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품질에 대한 모든 준비가 끝나면 해당 제품을 살 소비자가 누구인지, 소비자와 시장을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 품질이 뛰어난 제품이 있으면 파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중국 시장이다.
 
  4. 직원들을 최대한 잘 대우하라.
  중국의 직원들은 한 푼이라도 더 주는 회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직원들에 대한 처우가 좋아야 이직률이 낮아진다. 이직률이 낮아지면 자연히 품질도 좋아지고,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李汐宰 청도대신메라민산업유한공사 총경리    

건축자재인 방화장식판 업계의 절대강자로 떠올라 이번 경제위기 회복 국면에서 큰 시장 서게 될 것    

金容三 편집장/부장 (dragon03@chosun.com

이석재 청도대신메라민 총경리.

 얼마전 중국에서 시작된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전 세계가 음식물 공포에 떤 적이 있다. 허베이성(河北省)에서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 분유에 멜라민을 섞어 팔면서 시작된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중국에서 아기 6명이 목숨을 잃었고 어린이 29만6000여 명이 신장결석 등으로 치료를 받았다.
 
  이 사건은 중국 국내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멜라민이 들어간 우유 제품이 전 세계의 식품회사에 원료로 공급되면서 전 지구적 차원의 공포로 비화됐다. 결국 중국 당국은 멜라민 분유를 제조·유통시킨 主犯(주범)을 체포하여 사형·무기징역형에 처하는 등 극약처방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멜라민은 식품이나 음식에 들어가면 큰 문제가 발생하지만 인류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화학물질이다. 이런 화학물질을 회사명에 새긴 기업이 있다. 이름하여 청도대신메라민산업유한회사(대표 이석재 총경리).
 
  이 회사의 본사는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대신메라민이다.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중국에 수출하다가 2000년 3월, 칭다오(靑島)의 청양구(城陽區)에 300만 달러를 투자하여 현지공장을 설립하고 2001년부터 중국 내수시장 공략에 나섰다.
 
  대신메라민의 주력 생산제품은 열경화성수지를 합성한 내장 마감재인 방화장식판. 가로 120×세로 240cm 규격의 합판 모양을 한 제품을 연간 100만 장 정도 생산하는데, 장당 판매가격은 75위안 정도라고 한다.
 
  제품은 주로 나무로 만든 사무용 책상의 겉면에 부착하거나 일반 가구, 주방용 싱크대, 바닥재, 서류함, 실내 인테리어의 겉면을 장식하는 마감재로 쓰인다.
 
  칭다오의 청양구 토림촌에 위치한 회사를 방문했을 때 공장 건물면적은 3000㎡로 넓었지만 작업라인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30여 명에 불과해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든 과정이 기계화, 자동화된 탓이다. 이 회사의 李汐宰(이석재) 총경리는 “우리 회사는 기술집약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인력 의존도가 크게 낮은 편”이라고 말했다.
 
 
  高新技術 제품에 선정돼
 
  회사 이름에 ‘메라민’이 들어간 이유를 묻자 이 총경리는 “원료를 반응, 배합, 건조하는 과정에 멜라민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전 작업과정이 자동화, 기계화됐지만 원료를 배합하여 반응을 일으키고, 표면에 멜라민을 입혀 건조시킨 다음 열프레스에 넣고 찌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하우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무나 시장에 진입할 수 없는 업종이라고 한다.
 
  대신메라민은 2004년 중국 정부로부터 高新技術(고신기술) 기업 및 고신기술제품으로 선정됐다. 이는 한국으로 치면 첨단기술 제품을 생산하는 유망 중소기업에 해당하는데, 고신기술 기업으로 지정되면 세금 특혜가 있고, 지역에 따라 지방정부에서 토지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단다. 이 총경리는 “고신기술 기업으로 선정되는 과정이 대단히 까다롭고 복잡하지만, 중국 내수시장에 진출하려면 지정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대신메라민은 또 2002년부터 해마다 건축자재업체 녹색건축자재 추천제품으로 선정됐고, 2003년에는 중국 中經産品質量(중경산품질량)보장센터로부터 우량 건축자재로 선정됐다.
 
  이석재 총경리는 2000년 초 현지공장 법인장으로 칭다오에 진출한 후 지금까지 중국에서 기업활동을 지휘하고 있다. 현지공장을 설립하여 생산과 마케팅 활동을 시작하면서 회사는 매년 20~30%씩 성장했다고 한다. 지난해 매출액은 약 5000만 위안. 이 총경리의 설명이다.
 
  “우리는 진출 초기부터 철저히 중국 내수시장 장악을 목표로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생산시설을 확장하면 얼마든지 더 큰 매출을 올릴 수 있지만, 중국은 시장이 워낙 넓어 한 회사가 전 지역을 상권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우리 힘 닿는 곳까지 제품을 보급하기 위해 현재 중국 국내 50곳에 대리점을 열고, 6000여 취급점(판매점)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하이난도(海南島)와 하얼빈에도 대리점을 개설했는데, 거리가 워낙 멀어 물류비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최근의 경제위기를 체험하면서 생산설비를 확장하지 않은 게 오히려 건실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중국 시장의 특성을 알아야 성공한다
 
이석재 총경리가 작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회사는 자동화, 기계화가 이루어져 공장 내부에서는 거의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다.
  중국 시장에서 대신메라민의 경쟁상대는 중국 기업과 미국, 독일, 이탈리아 제품. 품질 면에서 중국 기업들의 제품은 외자기업들보다 뒤지기 때문에 低價(저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신메라민 제품은 高價(고가) 시장에서 미국, 독일과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총경리의 설명.
 
  “우리나라의 사례를 연구해 보면 가구문화는 아파트문화가 생기면서 고급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일반주택에는 가구는 물론 식탁조차 없는 집이 허다했어요. 우리 회사 제품은 특성상 가구나 식탁, 아파트 바닥과 벽면 인테리어 등에 집중적으로 사용됩니다. 때문에 중국에서 아파트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우리 회사 제품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총경리는 이번 미국發(발) 경제위기가 회복세로 돌아서면 중국에 큰 시장이 서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 총경리는 “중국에서의 비즈니스는 한국과는 그 양상이 크게 다르다”면서 “중국 시장의 특성을 잘 이해해야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를 분양할 때 실내장식과 도배 등을 다 해서 수요자에게 넘겨주는 반면 중국은 건물만 지어서 분양을 합니다. 때문에 변기, 싱크대, 하다못해 수도꼭지, 전등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시설을 사용자들이 시설해야 해요. 이런 특성 때문에 중국에서는 샘플을 만들어 실수요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 물건이 팔리질 않습니다. 제품을 선전할 수 있도록 대리점에 실물 샘플을 제작해서 공급해 주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어요. 이런 샘플을 제작하고 나눠주는 마케팅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는 “한국의 한 건설회사가 중국의 아파트 분양시장의 특성을 역이용하여 한국식으로 마감재까지 건설회사가 시공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례도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2001년 진출 초기 종업원 1인당 최저임금이 360위안이었는데, 올해 현재 760위안입니다. 우리 회사의 경우 평균임금이 1500위안으로 저렴한 인건비에 의존해 왔던 업종의 기업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어요. 과거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 가운데는 저렴한 노동력과 토지비용 등을 기반으로 한탕 벌어서 나가겠다는 업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으로 중국 시장에 접근한 기업들은 거의 망했습니다. 중국에서 돈을 벌었으면 중국에 재투자를 하고, 중국 시장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중국 내수시장에서 성공할 수가 없어요.”
 
 
  세금도 못 내면서 주말마다 골프를?
 
대신메라민 제품(왼쪽)과 짝퉁 제품(오른쪽). 천신이란 가짜 상표가 나돌아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중국 내수시장에 진출하려면 상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 총경리의 설명에 의하면 초기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주로 중국에서 생산을 하여 해외로 수출하는 패턴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생산 CEO 위주로 인력 풀을 구성하여 중국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기계와 원료를 한국에서 들여다 생산을 하는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와중에 중국 정부도 노동법, 세제 등에서 특혜를 주었고 기업활동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중국 특유의 인간관계(이른바 ‘관시’)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은 임가공 수출에만 급급했을 뿐 중국 내수시장 진출을 위한 브랜드 관리에 소홀했다고 한다. 이석재 총경리의 설명.
 
  “생산형 CEO 중심으로 중국에 진출하다 보니 각종 제도나 세법이 바뀌는 것에 대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중국 정부에 불만을 늘어놓곤 했어요. 중국 정부 관리들과 대화를 해 보면 ‘한국 기업들은 적자라서 세금도 못 낸다고 우는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기업경영이 어려우면서도 최고급 승용차 타고, 주말마다 골프 치러 다니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을 위해 할 것은 안 하면서 건의사항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중국은 무서운 나라입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자기업들의 경영상황을 손금 들여다보듯 체크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상황이 되면 철저한 자료를 들이대며 세금 추징을 합니다. 때문에 중국 관련법을 준수하고 정당한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이석재 총경리는 중국에 대한 이해를 보다 깊게 하기 위해 주변 지역에 위치해 있는 한국 기업인들과 함께 孔子(공자)를 공부하는 모임인 사단법인 박약회의 칭다오 지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 총경리는 “중국 내수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브랜드 관리가 중요하며, 특히 상표등록을 소홀히 했다간 큰 낭패를 당한다”고 설명했다. 대신메라민도 짝퉁 상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 제품은 초기부터 브랜드 관리에 신경을 써 왔기 때문에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이미 중국 진출과 동시에 15건의 상표 등록도 해 놓았어요. 어느 날 시장에 나가 보니 우리 회사(大信) 이름과 비슷한 天信(천신)이란 상표를 단 짝퉁 제품이 나돌고 있더군요. 그래서 곧바로 법적 제재를 가해 짝퉁 제품의 유통을 막은 적이 있어요. 중국에서 내수를 하려면 토지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표등록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업활동이 곧 애국
 
  실제로 몇 년 전 다이어리 제작회사가 중국 진출을 준비하다가 이미 같은 이름으로 누군가가 중국에 상표등록을 해 놓아 포기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진출을 준비 중인 한국 기업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내수시장을 파고들려면 중국 판매 네트워크 사람들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합니다. 저는 대리점이나 판매점과 거래를 하면서 그들에게 베푼 만큼 돌아온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먼저 우리 제품을 현장에서 판매해 주는 사람들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면 우리에게도 똑같은 이익이 돌아옵니다.”
 
  이 총경리는 “초기 시장진출 단계에서는 먼저 한 도시를 집중 공략하고, 이 도시에서 기반을 잡으면 省(성) 차원으로 확대하여 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드는 단계별 접근전략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 산둥성(山東省) 지역에는 1만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데, 이 중 70~80% 정도가 칭다오 지역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칭다오 지역 한인회의 통계에 의하면 칭다오 지역에 진출한 한국인이 8만여 명, 유동인구는 15만여 명으로 거대한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석재 총경리의 말이다.
 
  “중국, 그중에서도 칭다오가 위치한 산둥성 지역은 외국이 아니라 한국과 한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회사는 진출 초기에 기계설비를 한국에서 가져오고, 원료의 60%는 한국에서 수입해다 썼어요. 때문에 중국 진출기업이 늘면 늘수록, 양산 시스템을 구축하면 할수록 한국의 對中(대중) 수출은 늘어납니다. 우리는 중국에서 기업활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조국을 위한 애국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죠.”
 

沁相德 만도 쑤저우 법인 총경리    

 2002년 7월 중국 진출, 조향장치와 ABS 브레이크 100만대분 생산
기술과 품질로 차별화 시도, 중국 자동차 기업에도 만도의 부품 공급
   

심상덕 총경리가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이 직접 쓴 액자를 가르키고 있다.

 

 만도(MANDO)는 2009년 8월 月刊朝鮮의 ‘中國 내수시장을 잡아라’ 부록에 소개되는 몇 안되는 대기업 계열회사다.
 
  재중국 한인회 측은 “대한민국 모든 기업 가운데 만도기계가 중국에 가장 빨리 진출했고, 그만큼 중국을 잘 이해하는 기업”이라며 추천 이유를 밝혔다. 만도는 현재 중국에 6곳의 법인이 있다. 한인회 측은 이 가운데서 쑤저우(蘇州) 법인을 추천했다. 만도가 중국에 가장 먼저 설립한 법인이기 때문이다.
 
  만도는 故(고) 鄭仁永(정인영)씨가 설립한 한라그룹 계열인 종합 자동차부품회사다. 자동차 부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자동차를 멈출 수 있게 하는 제동장치, 원하는 방향으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도록 하는 조향장치, 노면으로부터 자동차에 전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해 주는 완충장치다. 이들 장치는 엔진과 더불어 자동차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제품이다.
 
  만도는 지난해 이런 부품을 현대·기아차, GM 등에 공급해 2조4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홍보실 관계자는 “지난 2000년 만도는 한라그룹에서 매각되어 계열 분리됐다가 2008년 창업자의 차남 鄭夢元(정몽원·54) 한라그룹 회장이 만도를 다시 찾아와서 제2의 도약기를 맞았다”고 했다.
 
  쑤저우 가오신(高新)개발구에 있는 만도 쑤저우 법인을 찾았다. 이곳은 상하이 푸둥공항에서 약 200㎞ 떨어져 있다. 상하이에서 쑤저우, 우시(無錫)까지 새로 난 왕복 8차선의 고속도로를 통해 달리니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沁相德(심상덕·52) 상무(총경리)를 만나 쑤저우 법인과 공장에 관해 대략 설명을 들었다.
 
 
  품질이 생명이다
 
김용걸 상무보가 자신이 국산화한 스티어링 밸브를 설명하고 있다.
  심 상무에 따르면, 현재 만도는 중국에 생산법인 4개(쑤저우, 베이징, 톈진, 하얼빈), 영업을 담당하는 중국 영업실, 중국 내 R&D를 담당하는 북경연구소, 2개의 주행시험장이 있다. 동계차량 테스트를 위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헤이허(黑河)에 겨울 테스트장을 보유하고 있고, 하계에는 베이징 밀운지역 테스트장에서 중국만도에서 개발된 신제품을 차량에 장착하여 테스트하고 있다. 심상덕 상무의 설명이다.
 
  “쑤저우 법인은 2002년 7월 설립, 중국법인 가운데 가장 먼저 진출했습니다. 주요 생산품은 조향장치와 브레이크 제품인 ABS를 100만 대분 생산합니다. 진출 초기에는 기아차에 납품을 시작으로, 베이징 현대와 옌청(鹽城)에 있는 기아차 전 차종에 이들 부품을 공급합니다.”
 
  ― 현대·기아차 외에 다른 공급처가 있나요.
 
  “상하이GM, 중국 현지 완성차 회사인 체리자동차(奇瑞氣車), 장안기차, 길리기차에도 공급합니다. 최근에는 중국 기업들이 저희 제품을 점점 많이 쓰고 있어요.”
 
  중국 공장답게 부지가 넓었다. 전체 부지는 9만1000㎡(약 2만7000평). 넓은 부지 위에 사무동, 조향 1공장과 2공장, ABS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심상덕 상무의 설명.
 
  “쑤저우 법인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기본기술 노하우를 한국 만도연구소에서 이전받습니다. 이 기술을 베이징에 있는 연구소에서 중국 현지에 맞게 기술을 적용해서 넘어온 데이터로 저희가 제품을 생산합니다. 쑤저우 공장 내에 모든 시험설비가 갖춰져 있어 제품성능 시험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심 상무와 함께 사무실 곳곳을 구경하며 설명을 들었다. 사무실 한쪽 벽면에 같은 크기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 안에는 ‘最高의 品質’이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심상덕 상무의 얘기.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게 ‘품질’입니다. 이 글도 정 회장이 직접 썼어요. 만도는 지난 2000년 한라그룹에서 계열 분리됐습니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모기업인 한라그룹이 흔들려서 구조조정을 한 거죠. 창업주인 정인영 회장은 만도를 마지막까지 잡고 있었습니다. 先代(선대) 회장이 그만큼 만도를 놓치기 싫어한 건 만도가 한라그룹의 모태이며 기술력, 품질 경쟁력을 가진 우수한 기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인영 회장은 만도를 어쩔 수 없이 매각하고 난 후, 만도 직원들과 한라 직원들에게 ‘우리는 만도를 잊지 않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회장은 만도를 다시 인수하지 못하고 2006년 세상을 뜨셨어요.”
 
 
  IMF 당시 매각됐다가 다시 매입
 
  심 상무는 1989년 한라그룹에 입사해 만도에서 직장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하지만 만도가 계열분리된 후 만도를 떠나 한라그룹 다른 계열사에서 근무하다 지난 2008년 만도에 다시 복귀했다. 이 때문인지 정인영 회장과 만도 매각을 얘기할 때,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 나왔다.
 
  심 상무는 “2008년 정몽원 회장이 만도를 다시 찾아 왔을 때, 선대 회장 얘기를 하며 많이 울었다”며 “정 회장이 만도를 재인수한 이유도 역시 만도의 기술력과 품질이기 때문에, 정 회장이 품질을 강조한다”고 했다.
 
  지난 2008년 3월 23일 만도를 찾아온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당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술력이 경쟁력입니다. 기술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둘 것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기술회의를 직접 주재할 겁니다.”
 
  ― 만도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입니까.
 
  “만도는 현대자동차의 발전과 더불어 함께 커 온 회사입니다. 지금이야 현대·기아차 계열에 부품회사가 있지만 2000년까지만 해도 만도가 자동차부품 회사로는 독보적이었어요. 현대가 해외로 나가서 자동차를 파는데, 만도의 부품이 좋지 않으면 욕을 먹는 건 현대입니다. 게다가 만도가 생산하는 제품은 엔진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제동장치와 조향장치까지 공급했습니다. 현대차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저희 만도도 일조했다고 자부합니다.”
 
  만도는 제동장치의 대표격인 ABS 장치를 가장 먼저 국산화에 성공했다. ABS 국산화 이후, 이보다 성능이 한 단계 뛰어난 제어장치(TCS·Traction Control System)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TCS는 ABS의 기능에 빙판길이나 언덕길에서 가속할 때 바퀴가 헛돌거나 미끄러지는 것을 막는 기능이 보태진 제품이다.
 
 
  올해 매출액 2800억원 예상
 
ABS 제조 공장 내부 모습.
  사무동에 있는 대회의실에서 鄭瑞敎(정서교) 관리부장에게 쑤저우 만도법인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정 부장에 따르면, 쑤저우 만도 법인은 현재 전체 직원이 460명으로, 현재 12명인 주재원 수를 빠른시일 내에 현지화를 실현해서 줄일 계획이다. 지난해 20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는데, 세계경제 불황 여파에도 불구하고 올해 매출액을 2800억원으로 잡고 있다고 한다. 정 부장의 설명이다.
 
  “중국 자동차 시장이 다소 불안하지만, 전동식 조향장치, ABS, ESC 등 신제품을 계속 출시하기 때문에 향후 매출액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매출액뿐만 아니라 이익도 늘어날 전망입니다. 지난해 만도가 한라에 다시 편입되면서, 불필요한 비용과 비효율적인 업무 체계를 대폭 없애고 바꿨습니다.”
 
  ― 예를 들어 어떤 비용이 줄었나요.
 
  “쑤저우 공장의 기존 재고관리 기간이 38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라가 인수한 후 심 상무처럼 만도를 잘 알고 있는 경영진이 들어와서 불과 1년도 안돼 재고관리 기간을 15일로 줄이더니 최근엔 12일로 만들었습니다. 재고로 쌓아 두는 날짜가 보름 이상 준 건 전체 비용절감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심 상무는 “주인 없던 회사에 주인의식을 가진 경영진이 들어온 결과”라며 이렇게 말했다.
 
  “선대 회장 계실 때부터 만도가 모든 직원에게 원하는 인간상은 ‘주인의식’이었습니다. 저희 법인은 중국인 관리직과 주재원이 모여 1년에 한 번씩 야간행군을 합니다.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함께 행군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만 알던 중국 직원들이 ‘우리’를 알아 갑니다. 주인의식은 ‘우리’라는 의식이 있어야 생기기 때문이에요.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만도가 가장 먼저 중국에 진출한 겁니다.”
 
  ― 중국에 언제부터 진출했습니까.
 
  “쑤저우에 법인을 낸 건 2002년이지만, 실제 준비를 하고 사무소를 베이징에 낸 건 1993년 한중 수교 직후예요. 선대 회장은 중국 수교 이전부터 중국을 주목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습니다. 이 때문에 1989년 입사 직후부터 선대 회장의 통역을 맡았어요. 당시 정확히 통역을 못해서 선대 회장 뵙기 민망해 회사를 며칠 안 나온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선대 회장은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수교 후 중국과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해지자, 중국팀을 구성하여 중국 전역을 답사했어요.”
 
 
  중국 시장 샅샅이 조사
 
  심 상무의 설명에 의하면 만도 중국팀은 東北(동북), 華中(화중), 華東(화동), 내륙 등 4개 권역으로 구분하여 동북3성에서부터 서쪽의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까지, 중국의 주요 도시, 지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정인영 창업주는 중국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양쯔강 이북지역을, 정몽원 現 회장은 양쯔강 이남 지역을 집중방문했습니다. 두 회장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직원들로부터 중국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직접 챙겼다.
 
  심상덕 상무의 얘기다.
 
  “초기 중국 출장 시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너무 변수가 많아서 고생한 적도 많았습니다. 출장 중 가방을 분실해서 여인숙 같은 여관에 묵으면서 출장을 다니기도 했어요. 31박 32일이라는 긴 출장을 끝내고 홍콩을 경유하여 귀국할 때, 비용이 부족해서 버스를 갈아타고 겨우겨우 도착한 기억이 납니다. 홍콩에 있던 한국식당에서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먹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더군요.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고 아무런 감정이 안 드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 겁니다.”
 
  ― 얼마나 중국을 돌아다녔습니까.
 
  “몇 년 동안 돌아다녔죠. 당시 중국의 재래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현지 업체를 포함한 여러 완성차 업체를 방문하고 자동차 부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죠. 쑤저우에 생산법인을 세운 건 훨씬 뒤의 일이지만, 이때 축적한 정보와 중국에 대한 시장조사가 현재 만도가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현대자동차가 1990년대 중반 중국에 진출할 때 만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현대차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어요.”
 
  ―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중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33개 국가가 모여 있는 합중국이라고 보면 됩니다. 딱 부러지게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저희 경험으로는 ‘끈기’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단시간에 이해하고 단시간에 파악해서 성공할 수는 없어요. 어렵더라도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참아 가며 달성해야 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과실을 주는 게 중국이라고 생각해요.”
 
  만도는 중국에서 2013년까지 8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부품 국산화
 
  사무동을 나와 ABS 공장과 스티어링(조향장치) 생산공장을 둘러봤다. 사무동과 공장 중간에 조성한 중국식 정자와 연못에서 직원들이 쉬고 있었다. 동행한 金容傑(김용걸·49) 상무보는 수많은 핵심부품을 국산화한 만도의 대표 엔지니어 가운데 한 명이다. 만도 입사 후 일본에서 근무했고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설립할 때 공장 설립을 주도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ABS 공장을 방문했다. 현재는 100만 대 분량을 생산하지만, 200만 대 분량까지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 공장이 꽤 넓었다. ABS 공장은 청결이 생명이라, 공장이 깨끗했다. 생산라인에 들어가려는 직원들은 하얀 방진복으로 갈아 입고 클린룸을 거쳐야 한다. 자동차 생산공장이라기보다는 의약품 생산공장처럼 보였다. 김 상무보는 “자동화가 되어 있어 가공기계 5대를 직원 한 명이 담당한다”고 했다.
 
  공장 입구에는 커다란 품질현황표에 녹색칩이 붙어 있었다. 이른바 그린칩으로, 이 공장에서 출하한 제품 가운데 고객들의 불만이 접수되지 않으면 붙인다. 만약 하나라도 불만이 접수되면 어떤 공정에 문제가 있는지 조사해서 그 공정에 빨간칩을 붙인다.고객들의 불만이 해소되야 빨간 칩을 뗄 수 있다.
 
  쑤저우 공장은 생산, 품질관리를 동시에 모니터링하는 컴퓨터 통합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곳의 품질 데이터는 10년 정도 보존하며, 생산되는 모든 제품에는 시리얼 번호가 부여돼 개별관리한다. 이 덕분에 제품 번호만 알면 컴퓨터를 통해 그 제품의 성능, 생산일, 생산라인, 책임자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김 상무보와 스티어링 생산공장을 둘러보는 중, 그가 작은 밸브 하나를 가져왔다. ‘스티어링 로터리 밸브’라고 했다.
 
  “제가 차장일 때 이 밸브를 국산화했습니다. 이 밸브가 스티어링 기어의 핵심이에요.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이 밸브를 전량 수입했어요. 그래서 저희 회사에서 저와 몇 명의 엔지니어를 일본 J社(사)에 보냈습니다. 일본에서는 당연히 기술을 안 가르쳐 주고 단순 견학만 시켰죠. 만도 직원 몇 명이 1주일 동안 연수를 가서 기계, 공장설비를 보고 온 후 1년 만에 전부 역설계를 했습니다. 그런 후에 저희 연수 책임자였던 J사 과장에게 설계를 보여줬어요. 이분이 우리 설계도를 보더니 ‘우리가 독일에서 배워서 5년 만에 성공한 걸 한 번 보고 1년 만에 성공하다니’ 하면서 깜짝 놀라더군요.”
 
  ― 밸브 하나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설계한 밸브를 제조하려면 설비를 갖춰야 하는데, 일본의 모든 기계, 설비 회사에 연락을 해도 구할 수가 없더군요. 결국 우리가 생산용 기계, 설비까지 다 만들었습니다. 그런 끈기가 오늘의 우리 기술의 원천입니다.”
최신 중국정보] 하반기 중국경제 전망
 기본적으로 성장률 8% 달성 문제 없을 것으로 예상.
  ―경제지표가 호전되고 있으며 내수경기와 관련된 자동차 판매량, 부동산 거래량이 회복되고 있고 재고 소진시간도 단축되고 있는 것으로 전망.
  ―中金公司(중금공사)의 하지밍 경제수석 박사는 올 GDP 성장률은 분기별로 호전되고 있으며, 1분기에는 6.1%, 2분기에는 7.4%, 3분기에는 8%, 4분기에는 9%에 이를 것으로 전망.
 
  수출도 하반기(4분기)에 마이너스에서 플러스 증가율로 반전될 것.
  ―현지 분석에 따르면 세계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있으며, 중국정부의 대외무역 안정을 위한 관련 정책 실시로 하반기에는 수출이 바닥을 찍고 플러스 증가율로 반전될 것으로 전망.
  ―하반기부터 수출이 회복되면서 감소율이 둔화될 것이며, 각종 수출진작정책이 하반기에 효과를 거두면서 4분기부터 플러스 성장을 보일 것으로 전망.
 
  거시경제정책, 11월에 조정 있을 듯.
  ―올 11~12월 초 중국 중앙경제공작회의 개최 시 현행 통화정책에 조정이 생길 것으로 예상.
  ―4분기 말쯤에 8% 성장률 달성이 가능하게 되면 경제정책 중점은 경제구조조정과 인플레이션 방지가 될 것임.
  ―정책조정이 있더라도 180도 대전환이 아니라 채권 매입, 금리 인상을 통해 유동성 회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됨.
 
  대외무역 급랭으로 기업의 생산과잉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내수확대정책을 통해 산업 회복을 하고 있으나 생산과잉은 아직 개선되지 않고 있음.
 
  또한 기업 경영난으로 재정수입 압박이 커지고 있음. 5월 기업 공업이윤율은 -22.9%로 1~3월보다 호전됐으나 여전히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취업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올해 600만명의 대졸 예정자와 600만명의 고졸생까지 합하면 1200만명의 실업압박이 있음.

 
  적극적인 재정 및 통화 완화정책으로 유동성 과잉 문제도 불거지고 있음.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금융연구소 샤빈 소장에 따르면 중앙에서 ‘안정적인’ 화폐 공급의 신호를 보내면 인플레이션, 생산과잉, 자산버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 완화정책은 하반기에 이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있음.
 
  <자료제공: KOTRA 베이징 KBC>

李晩炯 영화중공유한공사  “영화중공에서 일하는 총각을 사위로 두겠다”     

 어촌지역을 공업지구로 개조, 강철구조물 분야 도급순위 1위에 올라
철골제작·도장설비 능력 각각 月 평균 3000t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eaglebsk@chosun.com

이만형 영화중공유한공사 총경리.

 강철빔을 자르는 기계음과 용접 소리가 귀를 때렸다. 옌타이(烟台)시와 인접한 펑라이(蓬萊)시 부둣가에 위치한 영화중공유한공사(이하 영화중공). 13만7500㎡의 공장 부지에는 ‘H’ 모양의 강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공장에는 젊은 중국 청년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李晩炯(이만형) 영화중공 총경리는 “작년 하반기 들어 물량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소화해야 할 물량은 많다”고 했다.
 
  영화중공은 빌딩 철골과 석유화학 공장의 플랜트 철강구조물을 전문적으로 제작·설치하는 기업이다. 쉽게 말해 대형 빌딩이나 공장의 뼈대를 만들어 주는 회사다. 영화중공은 서울에 본사를 둔 영화엔지니어링의 중국법인이다. 영화중공이나 영화엔지니어링은 사실상 같은 회사다.
 
  1988년 설립된 영화엔지니어링은 1992년 충남 당진공장을 시작으로 여주, 홍성공장을 차례로 설립하며 회사 규모를 키웠다. 2000년 철강구조물 공장제작 1등급 자격을 취득한 후 수출물량을 늘려 2005년 수출 1000만 달러를 달성했다. 작년에는 수출 3000만 달러를 기록, ‘무역의 날’에 공로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시공능력 평가순위 강철구조물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영화중공 직원들이 한 데 모였다. 이들은 펑라이 어촌마을을 공업지구로 개조했다.
 
  총 투자금액 126억원
 
강철 구조물 회사로서 처음으로 설치한 아연도금장. 아연으로 도금한 철골의 수명은 50년이다.
  영화엔지니어링은 그동안 국내외 굵직굵직한 실적을 쌓아 왔다. 국내 실적으로는 여수 바스프뉴티디아이 공장 플랜트, 현대석유화학단지와 호남석유화학단지 플랜트, 동부제강 냉연플랜트 공사 등이 있다.
 
  해외 사업으로는 싱가포르 ECC 공사, 이란 사우스파, 러시아 사할린 LNG공장 건설 등이 있다. 지금은 알제리가 발주한 1만2000t짜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만형 총경리는 “세계 경기가 조금 살아나고 있어 오는 10월부터 물량이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작년 미국發(발) 경제 침체로 전년 대비 50% 이상 매출이 줄었어요. 하지만 최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에서 대규모 플랜트 사업이 다시 발주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을 종합해 보면 올해 말부터는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중국도 최근 들어 플랜트 공장을 새로 짓기 시작했어요. 큰 시장이 열리고 있는 셈이죠.”
 
  중국 현지 공장인 영화중공은 2002년 설립됐다. 김인호 영화엔지니어링 사장의 동생인 김인성씨가 중국법인 동사장을 맡고, 공장 운영은 엔지니어 출신의 이만형 총경리가 책임지고 있다.
 
  영화중공의 月(월) 평균 철골제작과 도장설비 능력은 각각 3000t이다. 그동안 투자된 금액은 韓貨(한화)로 126억원. 전체 공장 직원은 현지인을 포함해 400여 명이다.
 
영화중공은 철골구조물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자동화와 품질검사 시스템을 강화했다.
  이만형 총경리는 공장 설립 당시 부지 선정부터 공장 건설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진행했다. 이 총경리는 “현재 공장이 들어서 있는 곳은 과거 어촌마을이었다”며 “우리 회사가 들어서면서 어촌마을이 공업지구로 일대 변신을 이뤘다”고 했다. 이만형 총경리의 말이다.
 
  “입지를 선정할 당시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때만 해도 이곳 주변에 공장 운영에 필요한 시설들이 전무했거든요. 고민이 많았지만 원자재 가공무역을 하는 데 유리한 게 많아 이곳에 공장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다행히 강수량이 적어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우리 회사는 크고 긴 철골구조물을 만들기 때문에 넓은 부지가 필요하고, 비가 적게 와야 작업하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 회사가 이곳에 들어오자 다른 기업들이 하나 둘 입주하더군요. 지금은 이곳이 공단지역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영화중공은 펑라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高麟錫(고인석) 부총경리는 “펑라이 사람들은 우리 회사를 지역내 최고 직장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딸은 둔 부모들은 ‘영화중공에서 일하는 총각을 사위로 두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고 했다. 영화중공의 임금과 복지 수준은 지역 내에서 최고이기 때문이다. 영화중공 직원들은 타 회사에 비해 직원 훈련이 잘돼 있어 관련 회사의 영입 대상 1순위라는 평도 받고 있다.
 
  영화중공은 동종 업계 중에서 도급 순위 1위이다. 업계 최고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에는 철골구조물 제작의 정확성에 있다. 鄭在勳(정재훈) 설계실 차장의 말이다.
 
  “공장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게 정확성입니다. 정확성은 곧 설계도의 정확성을 의미하죠. 설계도가 잘못되면 공장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돼서는 안됩니다. 우리 회사는 웬만한 대기업도 갖추지 못한 설계실을 자체적으로 갖고 있어요. 우리의 강점은 컴퓨터 3D를 기반으로 입체적인 설계도를 만들어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객이 원하는 최상의 철골구조물을 제작하지요.”
 
 
  불량률 0%에 도전
 
  이만형 총경리는 “영화중공은 최근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높이기 위해 공정 진척도를 원청업체에 수시로 제공한다”며 “각 생산공정을 컴퓨터 도면에 서로 다른 색깔로 표시해 원청업체가 작업진행 속도를 인터넷상을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영화중공의 또 다른 경쟁력은 기술개발이다. 영화중공은 철골구조물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직접 아연도금을 실시한다. 페인트에 비해 수명이 50년까지 늘어났다. 영화중공은 공장 건물 한 개 棟(동) 전체를 도금장으로 사용한다. 물처럼 녹아 있는 230t의 아연로에 철골구조물이 들어갔다 나오면 마치 흰옷을 입은 것처럼 새하얗게 도금된다. 아연로에 들어 있는 아연의 가격은 대략 10억원. 하루에 추가하는 아연은 평균 2t이다.
 
  이만형 총경리는 “영화중공은 철골구조물의 절단에서 가공, 치수관리 등 전 과정을 자동화해 고품질을 보장하고 있다”며 “최신 자동화 시스템과 고급인력, 최고를 추구하는 장인정신으로 불량률 0%에 도전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鄭永彩 성보그룹 회장    “중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업 만들어라”     

외국인 최초로 지린성(吉林省) 영구 거주증 받은 ‘옌지의 영웅’
다른 도시들로부터 “건물 그냥 줄 테니 백화점 하나 열어 달라” 요청 받기도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정영채 성보그룹 회장.

 2006년 4월 10일, 지린성(吉林省) 옌지(延吉)시 성보호텔에서 작은 기념식이 열렸다. 鄭永彩(정영채) 성보그룹 회장이 외국인 최초로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로부터 ‘그린카드’를 받는 자리였다.
 
  그린카드는 고급관리자, 과학기술 전문가 등 외국인에게 비자 면제와 같은 다양한 혜택을 주는 영구 거주증이다. ‘이것만 내밀면 중국에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카드를 받는 외국인은 부러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일흔을 넘겨 주름진 얼굴의 정 회장이 이날 모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1992년 처음 옌볜에 온 이후 14년 동안 격변의 현장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시공 계약 과정에서 사기를 당해 수억 원의 손해를 봤고, 파이프와 전기선 등 건설 자재가 모두 불량품으로 납품돼 몇 번을 다시 주문해야 했다. 인민폐 150만 위안을 빼돌려 달아난 직원을 용서했고, 조선족들에게 ‘미친 한국×’이란 이야기를 들어 가며 건물을 완공해냈다.
 
  2009년 현재, 옌볜의 조선족 동포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곧 짐 싸 들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건물 공사에 훼방을 놓기 일쑤였던 그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한 옌볜 성보백화점은 매년 對韓(대한) 무역액 10억 위안(한화 2000억원)을 자랑하며 중국 최대의 한국 상품 집산지로 자리 잡았다.
 
  가난에 고통받던 상인들은 어느새 수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옌볜 부자’가 됐고, 정 회장은 지난 4월 선양(瀋陽)에 제2 성보백화점을 건립해 운영을 시작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혈혈단신으로 승부를 건 지 17년째, 정 회장은 어느새 옌볜 조선족의 ‘代父(대부)’가 돼 있었다.
 
 
  옌볜 땅 처음 보자 눈물
 
정영채 회장은 2006년 외국인 최초로 지린성 영구 거주증(그린카드)을 받았다.

  정영채 회장은 1933년 목포에서 태어나 자랐다.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군 제대 후 충남 서산에서 시작한 양화점은 꾸준히 성장했고, 1985년 정 회장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공장을 차리고 본격적인 모피사업을 시작했다.
 
  1988년 올림픽 이후 회사는 모피 붐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대로변에 건축면적 1만3000㎡ 건물을 지었고, 진도 모피에 무스탕을 공급해 많은 돈을 벌었다. 독립한 직원들이 회사 주변에 세운 공장만 10개가 넘었다.
 
  한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정 회장은 중국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1992년, 회사를 방문한 중국인들의 소개로 톈진(天津)을 방문한 그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시장과 사업 가능성에 감동했다. 이후 베이징(北京) 등 주요 지역의 의류산업체를 둘러본 그는 옌볜 지역에 정착을 결심했다. 정영채 회장은 1992년 처음 방문했던 옌볜의 풍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산도 들판도 우리나라와 같았어요. 논에서 한창 자라는 벼도 우리 것과 똑같았습니다. 우리말을 쓰고, 우리와 같은 생김새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죠. 마치 꿈결에나 찾아 헤매던 고향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나의 여생을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하리라’고요.”
 
  그가 처음 생각한 아이템은 모피였다. 한국에 본사를 두고 현지에 공장을 차려 해외 수출기지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의 주머니엔 두둑한 자금이 있었고, 작은 양화점을 피혁회사로 키운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계획은 수정됐다. 일자로 늘어선 칸막이도 없는 재래식 화장실과 1960년대 한국을 떠올리는 낙후된 공장, 이 모든 것이 정 회장의 눈에는 ‘황금 시장’으로 보였다. 그는 ‘생산’이 아니라 ‘소비’ 산업이 먼저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때 만난 사람이 조선족 金成順(김성순) 이사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牧丹江) 출신인 그녀는 어려웠던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학업에 열중해 공산당학교 교수직을 역임하던 엘리트였다.
 
  오랫동안 교직에 있어 사업을 전혀 몰랐던 김 이사는 “심부름이나 시키면 아는 데까지 도와주겠다”며 정 회장과 사업을 시작했다. 정 회장은 “첫 전화통화부터 인상이 좋았다”며 “어렵게 살아온 과정이 비슷해 많은 공감대가 있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
 
선양시 성보백화점 내부. 각종 한국 상품들로 가득하다.

  두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이념에 상처를 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정 회장은 어린 시절 남로당 출신의 형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전쟁 후에도 ‘좌익 출신 형’을 둔 이유로 말 못할 차별을 당했다.
 
  “사업이 커지다 보면 이곳저곳 도울 곳도 많고, 여러 성격의 단체에 가입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그런데 정부와 연결된 단체에 가입하려면 최종 단계에서 자꾸 취소가 되는 겁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님 때문이었어요.”
 
  정 회장은 “군대도 만기 전역했고, 단 한 번도 내 나라 조국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다”면서 “장학재단 하나 설립하려 해도 사람들이 방해를 해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충남 서산에서 사업이 좀 되던 시절이었어요. 함께 일하던 知人(지인)들과 돈을 모아 인근 학교에 학자금을 주고 학용품과 무료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했죠. 그런데 하루는 경찰서에서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묻더군요. ‘이 그룹의 의도가 뭐냐’고요.”
 
  김성순 이사는 문화대혁명 당시 옌볜인민출판사 편집부장이었던 아버지를 잃었다. 직장을 다니는 오빠들과 몸져 누운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키웠다. 엄동설한에도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녀야 했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을 겪어야 했다. 김 이사의 말이다.
 
  “소학교 3학년 시절이었어요. 하루는 친구들이 반동분자 재판한다며 구경하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따라갔는데, 저희 아버지더군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울며 고함쳤지만,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더군요. ‘자본가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홍위병에게 잡힌 아버지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죠.”
 
  서로 다른 나라에서 각기 다른 이념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업 동업자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바뀌었다. 현재 성보그룹은 정 회장이 55%의 자본금을, 김 이사가 45%를 보유한 韓中(한중) 합작기업이다.
 
 
  화합과 나눔의 기업
 
정영채 회장(가운데)과 김성순 이사(오른쪽)가 백화점 내 한 상점을 방문해 상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영채 회장은 옌볜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강조했다.
 
  “여기 와서 사업을 시작하니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절대 믿지 말라고 하고, 조선족들은 한국인들은 단물만 빨아 먹고 떠난다고 하더군요. 서로 싸우고 사기당하고…,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창업 당시 기업의 핵심 이념을 ‘화합과 나눔’으로 정했죠.”
 
  성보그룹이 진출한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구호가 있다. 바로 “화합으로 부를 창출하며 나눔과 기쁨을 함께하는 세상”이다. 정영채 회장은 “이 구호대로 했더니 성공은 저절로 오게 되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시행착오를 많이 해야 합니다. 손해도 좀 볼 수 있어요. 하지만 한 번 실망했다고 무조건 떠날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부터 돌아봐야 해요.”
 
  정 회장은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중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선 중국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고, 중국인 사업 파트너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빨리 바꿔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사업은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화점 위치를 제팡(解放)로 350호로 정한 후, 계약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가격이 3배까지 올랐다.
 
  “제가 시작하기 전에 한국인 50명이 와서 계약했다가 다 포기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비슷하겠거니 하면서 겁을 주는 거죠. 1㎡ 당 760위안이던 임대료가 계약하러 가니까 2200위안을 달라고 하더군요.”
 
  ―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일단 계약했습니다. 저는 자신이 있었어요. 확신을 가지고 덤비니까 저쪽에서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잔금 지불할 땐 1800위안으로 내려주더군요. 그래도 여기저기서 곧 실패할 거라며 말이 많았어요.”
 
  1995년 회사 초창기 시절, 출납 담당이 은행에서 150만 위안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는 공안국에 신고했고, 다음날 시 정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정영채 회장은 당시 회의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환율로 한화 1억원이 넘는 돈이었는데, 옌지(延吉)시 역사상 가장 큰 현금도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시장과 부시장, 공안국 관계자들이 긴급대책회의를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직원은 잡히면 총살이라고 하더군요. 신고를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같이 징역 몇 년 살고 반성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이곳에 와서 사업을 하는 목적과는 너무 다른 결과였습니다.”
 
 
  출납직원 도주사건
 
  한창 총살에 대한 논의가 오가던 중, 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발언했다.
 
  “저는 이번 사건을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150만 위안이 큰돈이긴 하지만 생명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또 벌 수 있습니다. 사형은 안됩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범인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며 펄쩍 뛰었다. 외자기업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수사본부를 차리고 본격적인 수사를 해 범인을 잡아 처벌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날 회사로 돌아온 정 회장은 도주한 직원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붙잡히면 사형을 당하니 연락이 되면 돈 가지고 멀리 도망가라고 일러 주라”고 했다.
 
  결국 직원은 전액을 가지고 돌아와 자수했고, 정 회장은 수사본부에 가서 “풀어만 주면 회사 직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겠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결국 그는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지만, 사건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다시 회사로 오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정 회장은 옌볜에 ‘한국에서 온 참 좋은 사람’으로 알려졌다. 조선족 동포를 끔찍이 아낀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져 나갔고, 성보백화점에서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다.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쳐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정 회장은 한국 사업을 모두 철수하고 옌볜에 모든 여력을 집중했다.
 
  현재 옌지시 중심가에 자리 잡은 성보백화점은 3080㎡ 부지(건물면적 2만2000㎡)에 5층 규모의 한국 상품 백화점과, 10층 규모의 호텔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올해 4월 문을 연 선양지점은 5300㎡ 부지(건물면적 3만㎡)에 백화점을 건설해 운영 중이다.
 
  직원 수는 총 160명, 업주와 판매사원까지 합치면 2000명으로 늘어난다. 고용 효과와 판매 효과는 지역 시장 경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옌볜대의 任范松(임범송) 중문과 교수는 “성보는 옌볜 최고의 민족기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성보백화점이 선양에 진출한다고 하니 지린성 부성장이 직접 선양까지 갔어요. ‘지린성에서 키운 기업이니 랴오닝성(遼寧省)에 가면 당신들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키우라’는 이야기를 하러 말입니다. 그만큼 성보가 조선족들의 어깨를 펴 줬습니다.”
 
 
  ‘부자의 꿈’ 이룬 조선족들 속속 나타나
 
  함께 자리한 길림신문사의 吳基活(오기활) 대외부장의 말이다.
 
  “옌지 성보가 너무 잘되니 각 성에서 와 달라고 난리입니다. 장쑤성(江蘇省)에선 자기네 성에도 백화점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죠,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시에선 5층 건물을 그냥 주겠다고 했습니다. 헤이룽장성 무단장에서도 백화점 하나만 더 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보에서 부자의 꿈을 이룬 조선족들이 속속 늘어났다. 한국산 이불을 중국 전역에 공급하는 安麗潁(안여영) 사장은 “한국인들이 처음엔 조선족 보따리장수라며 무시했지만, 지금은 ‘외국인 바이어’라며 모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한국에 갔을 땐 공항에서 벽에 붙어 손을 들어 올리고 검색을 당하는 일도 있었어요. 대구 서문시장에 옷감을 보러 갔는데 ‘안 살 거면 만지지도 말라’는 비아냥도 들었죠. 그래서 홧김에 옆집으로 가 그날 1억원치 현금으로 계약하고 컨테이너로 물건을 실어 왔습니다. 그 사람, 다시는 조선족이라고 무시 안 할 겁니다.”
 
  한국산 주방용품을 판매하는 林春玉(임춘옥) 사장은 일본에서의 일화를 소개했다.
 
  “상인 여러 명이 사업 아이템 시찰 겸 관광을 목적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어요. 한 도자기 판매점에 들렀는데, 상품이 너무 좋은 겁니다. 그 자리에서 계약하자고 하니, 일본인 주인이 망설이는 거예요.”
 
  ― 왜 그랬습니까.
 
  “물건이 없다는 거죠. 이렇게 많이 사려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겁니다.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계약서를 쓰다가 도저히 안되겠다며,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하대요. 그래서 주변 구경을 하고 오니 그때야 계약서와 물건을 내놓더라고요. 나갔다 오라고 한 이유를 물으니까, ‘손이 떨려 사인을 할 수 없어 그랬다’고 합니다.”
 
  임 사장 일행은 일본 여행 중 20피트 컨테이너 5대 분량의 상품을 계약했다. 그들이 다녀간 곳에선 그들을 ‘중국에서 온 큰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귀국을 하니 일본 영사가 선양에서 성보백화점까지 직접 찾아와 정 회장과 상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단다.
 
  정 회장은 더 이상 개인적인 욕심이 없다고 한다. 조선족 동포들이 성보백화점을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다.
 
  “모두가 ‘옌볜은 안된다’고 할 때 저는 ‘옌볜이기 때문에 된다’고 했죠. 이제 그 방식을 선양에 접목시키려고 해요.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옌지의 성보인들처럼 선양의 성보인들도 부자가 됐으면 합니다. 그게 다입니다. 저는 내 나라 한국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이렇게 일을 해 왔습니다.”
 


  ▣ 정영채 회장이 말하는 중국 사업 성공 5계명
 
  ㆍ중국에 뼈를 묻겠다고 각오하라. 한 1년 돈 벌고 돌아갈 생각이라면 오지 않는 게 낫다.
 
  ㆍ파트너가 중요하다. 중국에 온 이상 한국인 혼자선 중국인을 이길 수 없다. 동업자 선택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라.
 
  ㆍ기다려라. 단기 수익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라.
 
  ㆍ‘관시(關係)’는 만남이 아니라 감동이다. 식사 한 번 했다고 관시가 맺어진 것이 아니다. 상대를 감동시켜라.
 
  ㆍ중국인 직원을 인격적으로 믿고 대하라. 작은 것을 잃을지언정 큰 것을 얻게 된다.
 

咸弘萬 북경극동국제물류유한공사 회장    중국 기업이 독점하던 韓中간 이삿짐 시장의 60% 장악     

1994년 중국 진출하여 물류사업에 도전, 무역과 수산물가공업으로 영역 확장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함홍만 북경극동국제물류 회장.

 언제부터인가 ‘100만 在中韓人(재중한인)’이라는 말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한말~일제시대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亡國(망국)의 恨(한)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갔던 분들의 후손들, 흔히 ‘조선족’이라고 하는 우리의 피붙이들 말고, 기업활동이나 공부를 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있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100만명이나 된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중국에서 황급히 철수하는 유학생이나 기업인들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韓中(한중) 간을 오가는 그들을 따라서 움직이는 이삿짐 등 각종 物流(물류)의 量(양)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중 간을 오가는 이삿짐의 60% 정도를 취급하는 회사가 북경극동국제물류유한공사(대표 함홍만 회장)다.
 
  이 회사 咸弘萬 (함홍만) 회장이 중국에 발을 디딘 것은 한중 수교 2년 후인 1994년 10월. 1983년 부산에서 극동선박항공을 설립해 포워딩(수출입 물품을 그러모아 해운회사에 운송을 의뢰하는 사업-편집자 주)을 해 오던 그는 이 무렵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종래 허가제이던 포워딩업이 1988년 신고제로 전환되면서 업체가 난립,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함 회장은 해외로 수출되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많이 취급해 본 경험을 살려 베트남에서 무역업을 해 보려 했다. 하지만 기후, 음식, 문화 등이 너무 달랐다. 결국 석 달 동안 사업기회를 모색하다 귀국했다.
 
  마침 함 회장 사무실 옆에는 중국 비자업무를 대행해 주는 여행사가 있었다. ‘중국에나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서울∼톈진(天津) 간 비행기가 한 대 뜨던 시절이었다.
 
  1994년 10월, 함 회장은 중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후가 비슷했고, 조선족들이 있어 음식도 먹을 만했다. 물가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쌌다. ‘뭔가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 만에 귀국한 그는 사업에 필요한 자료들을 싸 들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온 후, 사람을 구하고 사무실을 열었다. 이듬해 3월 국가공상국의 허가가 났다. 극동선박항공주식회사 북경사무소, 극동선박해운의 베이징(北京)지사 개념의 회사였다.
 
 
  첫 거래에서 조선족에게 사기당해
 
극동국제물류 직원들이 한국으로 가는 이삿짐 화물을 트럭에 싣고 있다.
  첫 사업은 베트남에서 해 보려다가 접었던 무역업이었다. 1995년 5월, 첫 주문이 들어왔다. 하얼빈에 있는 조선족 사업가가 100만 위안어치의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주문한 것이다. 함 회장은 계약금 5만 위안만 받고 외상으로 물건을 팔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며칠만 기다려 달라”는 식으로 하루하루 대금 지급을 미루다 결국은 돈을 떼먹었다.
 
  법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생각에서 변호사를 구해 소송을 해 봤지만, ‘중국인과 재판을 해서 외국인이 이기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함 회장의 말이다.
 
  “중국에서 외상거래를 하면 안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죠. 중국 사람들 고유의 기질 때문인지 문화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외상거래가 많은데, 외상거래를 하면 돈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중국 공부를 톡톡히 한 셈이죠. 駐中(주중)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상회 등에서 펴낸 ‘한국기업 사기사건 피해사례집’에 제가 당한 일이 소개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함 회장은 당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알거지가 돼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생계는 한국에서 미용실을 하는 아내가 꾸렸고, 그는 카드 돌려막기로 하루하루를 이어 갔다.
 
  무역업에 실패한 후 그는 “내가 잘하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물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물류시장은 중국에서 미개척지였다. 함 회장의 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중국에서 택배업은 외국인 단독으로는 못합니다. 페덱스(FEDEX)나 DHL 같은 다국적 택배회사들도 합자법인의 형태로 중국에 진출해 있어요. 박람회나 전시회 관련 물품운송은 중국인들만 할 수 있어요. 외국인 물류회사는 항구까지만 운송할 수 있을 뿐 중국 내 운송은 못합니다. 만일 그걸 할 수 있다면, 떼돈을 벌었겠죠.”
 
  사실상 중국인들만이 참여하는 독점시장이었다. 이런 제약 속에서 함 회장의 눈에 해외이삿짐 시장이 들어왔다. 그동안 사귄 재중 한국인들도 그에게 “해외 이삿짐을 전문적으로 취급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사실상 중국인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가격이 형성될 리 만무했다. 함 회장의 설명.
 
  “물가나 인건비는 엄청 싼데 물류비는 미국보다 세 배쯤 비싼 거예요. 말도 안되는 얘기죠. 자기들이 독점하는 분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값을 매기는 거죠.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렴한 가격과 서비스로 승부
 
  다행히 화물운송업은 초기 자본이 그다지 많이 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마침 당시 베이징에는 한국행을 원하는 조선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 보다 쉽게 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임금을 따지지 않았다. 함 회장은 30명의 직원을 뽑는 한편, 대사관·관공서·대기업·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교민잡지에도 열심히 광고를 냈다.
 
  사업 운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말부터였다. 1992년 한·중 수교를 전후해 중국으로 건너왔던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들이 후임자들과 교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운송업체들은 ‘큰 것’ 한 건당 7000~8000달러를 받았지만, 함 회장은 2500달러를 받았다. 가격 경쟁력 외에도 그의 무기는 더 있었다. 한국인이라 커뮤니케이션이 잘된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 있는 본사를 통해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유학생들도 그의 고객이었다. 함 회장의 설명.
 
  “요즘에는 중국 책값이 과거보다 많이 비싸졌지만, 그때는 정말 쌌어요. 가방만 들고 중국으로 유학 왔던 학생들이 귀국할 즈음에는 그동안 사들인 엄청난 책들 때문에 이삿짐 운송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덕분에 하루에 일거리가 3~5건씩 들어왔다. 당시 이삿짐 한 건당 이윤이 50%에 달했다.
 
  “돈이 들어오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군요. 자고 깨면 ‘오늘은 돈이 얼마나 들어올까’, ‘이렇게 해서 부자가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나 싶던 1996년경 그는 뜻밖의 곤욕을 치렀다. 문화재 반출 혐의로 조사를 받고 벌금을 문 것이다. 함 회장의 설명이다.
 
  “한·중 수교 직후 한국에서는 중국 골동품 붐이 불었어요. 베이징에만 한국 골동품상이 300여 명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그들은 진짜 가짜 할 것 없이 골동품이나 공예품들을 한국으로 마구 실어 날랐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인들이 古代(고대) 문화재까지 반출해 간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물론 문화재를 반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어요. 非(비)문화재 확인을 받은 물품만 반출이 가능했지요. 그런데 중국인, 조선족 경쟁업체에서 우리 회사가 문화재를 밀반출하고 있다고 당국에 신고했어요. 중국국가문물국(한국의 문화재청)으로부터 분명히 비문화재라는 확인을 받았는데도 다른 직원이 나오더니 ‘문화재인 것 같다’고 하는 거예요. 기가 막히더군요. 덕분에 CCTV(중국중앙TV) 방송에 얼굴이 나가고, 벌금도 물고, 또 한번 비싼 수업료를 내야 했죠.”
 
  어려움은 또 있었다. 한국에서 데려온 직원들이 어느 정도 중국 상황에 적응했다 싶으면 독립해 나가서 자기 회사를 차렸다.
 
  “어제까지 직원이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회사를 나가 우리 회사 옆에 사무실을 내는 거예요. 그러고는 재직 중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서 우리 회사를 중상모략하고, 조선족 일꾼들을 빼가는 겁니다. 제가 중국에서 사업하는 지난 15년 동안 가장 어려웠던 일이 바로 데리고 있던 한국인 직원들의 이탈이었습니다.”
 
  함 회장은 “지금 우리 회사의 경쟁사가 두 개 정도 있는데, 모두 우리 회사에서 나간 사람들이 차린 회사”라면서 “창립 당시 직원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인데, 그는 漢族(한족)”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그의 사업운은 꺾이지 않았다. 1997년 말 닥친 外換(외환)위기는 그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됐다. 함 회장의 설명이다.
 
  “기업 주재원·유학생·사업가들이 무더기로 보따리를 싸는 상황 속에서, 일이 하도 몰려들어 밤새워 일을 해도 다 처리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때가 제게는 최대의 호황기였습니다.”
 
함홍만 회장과 극동국제물류 직원들.
 
  수산물 가공회사 등 설립
 
  운송사업이 안정궤도에 접어들면서 함 회장은 사업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1996년에는 무역회사인 천진대원국제무역유한공사와 북경극동무역유한공사를, 2002년에는 수산물 가공회사인 청도설악수산을 설립했다. 2004년에는 한국에 있는 극동선박해운의 베이징 지사 개념이던 북경극동선박항공주식회사 북경사무소를 현지 법인인 북경극동국제물류유한공사로 전환했다. 이는 그가 사업의 중심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옮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 회장은 “극동국제물류의 작년 매출은 3400만 위안 가량인데, 올해에는 600만~700만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이익률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어 15% 정도라고. 이사 화물이 70%를 차지하고, 이삿짐 이외의 해상화물이 20%, 항공화물이 10% 정도를 차지한다. 직원 수는 베이징 본사 근무 직원이 24명이다. 함 회장과 부장 한 명만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한족과 조선족들이다.
 
 
  수산물 가공회사 설립
 
  국내 언론에는 작년부터 글로벌 경제위기가 시작된 이래 “재중 한국기업인들의 야반도주가 늘었다”거나,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베이징 왕징(望京)거리에서 한국인들이 보따리를 싸고 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현지에서 이삿짐 운송사업을 하는 함 회장은 이런 보도에 대해 “다소 과장된 것 같다”고 말한다.
 
  “왕징거리에 살던 한국인이 8만~9만명인데,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1만명가량 줄었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이삿짐 이동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극동국제물류의 매출이 예년보다 늘기는 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성장세 때문인지, 중국에서 철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위안화 강세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무역회사인 대원국제무역과 극동무역은 작년에 370만 달러어치의 수출입(대행) 실적을 올렸다. 이익률은 극동국제물류와 마찬가지로 15%대. 함 회장은 “무역회사를 차린 것은 물류와 무역을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라면서 “올해에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위안화 환율 강세로 인해 수출이 다소 저조한 상태”라고 말했다. 대원국제무역의 직원 수는 35명, 베이징, 칭다오(靑島), 상하이(上海) 다롄(大連) 등지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함 회장의 사업 가운데 조금 뜻밖이다 싶은 것이 수산물 가공회사인 청도설악수산이다. 이 회사는 함 회장의 鄕愁(향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 고향이 강원도 고성군 거진입니다. 어린 시절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죠. 지금도 고향에서는 형님과 동생이 수산물 건조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여유가 생기면 수산물 가공·유통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오다가 2002년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함 회장에 의하면, 청도설악수산은 작년에 약 4000만 위안의 판매를 올렸으며, 올해도 지난해 수준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순이익률은 30% 정도. 직원 수는 많을 때는 40명 정도였으나 근래 파트타임 직원을 많이 쓰면서 13명 수준으로 줄었다고 한다.
 
  청도설악수산은 중국 內需(내수)시장을 겨냥하고 있다는데, 주요 생산품을 보니 굴비와 자반고등어, 젓갈류다. 이런 한국적인 수산물이 중국인들에게 통할까? 함 회장의 말이다.
 
  “매출의 70% 정도는 아직 조선족이나 재중 한인들을 상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해산물은 상류층이 먹는 음식’이라고 여기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은 음식을 깨끗하게 조리한다’고 알려져 있어 한국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매출이 계속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너가 직접 챙기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
 
칭다오에 있는 칭다오설악수산 직원들이 수산물 가공작업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사업가들처럼 함홍만 회장도 회사의 구체적인 실적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 열심히 사업을 개척해 온 데 대해서는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본인 스스로의 얘기처럼 아직 남들에게 내세우기에는 사업규모나 실적이 ‘왜소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15년 전 중국시장에 뛰어들어 물류·무역·수산물가공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온 그는 분명 ‘성공한’ 사업가다. 그에게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는 ‘철저한 확인 경영’을 첫 번째로 꼽았다. 그 이유로 그는 먼저 중국의 잦은 제도 변화를 들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외국인이 사업하기 힘든 나라입니다. 모든 제도가 自國民(자국민)에게는 유리하게, 외국인에게는 불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제도마저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나라입니다. 예컨대 작년까지만 해도 본국에서 사용하던 골프채를 중국으로 반입할 때에는 관세를 매기지 않았는데, 올해부터는 골프채 한 개만 면세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국가에서 제도를 정해도 실제 적용 여부는 지방에 따라 다릅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을 오너가 수시로 챙기면서 대응하지 못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남에게 사업을 맡겨 놓고 자기는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골프나 치러 다니다가는 깡통 차는 경우가 많아요.”
 
  함 회장은 ‘확인 경영’이 요구되는 또 다른 이유로 중국인들의 국민성을 들었다.
 
  “중국인들은 국민성 자체가 그다지 능동적이 아닙니다. 한번은 광저우(廣州)에서 베이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어요. 당연히 베이징 직행편이려니 했는데, 타고 나서 보니 상하이를 경유하는 비행기였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항공권을 발매할 때에 프런트에서 당연히 그 사실을 알려줘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직행편인지, 다른 곳을 경유하는 비행기인지는 네가 물어봐야 한다. 네가 묻지 않는데 내가 그걸 먼저 말해 줄 필요는 없다’는 식입니다. 중국인들은 죽기 살기로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컨테이너 물류작업을 할 때도 제가 직접 나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나중에 클레임이 들어옵니다. 클레임이 들어오면 그건 회사의 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현장에 나가 직원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경각심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직원들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는 대신 함 회장은 직원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다.
 
  “별일이 없는 한 매월 9일 월급날이면 물류 창고에 나가 직원들에게 월급봉투를 직접 주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격려해 줍니다. 또 결혼한 직원들을 포함해 모든 직원에게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굉장히 엄하게 대하는 편이지만, 잘 따라 주고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1년 정도 살아 보고 사업 시작하라”
 
  그는 “중국으로 사업을 하러 나오는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중국 시장을 철저히 연구해야 합니다. 1년 정도 살아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가족과 함께 나오세요. 교민들 사이에는 ‘중국에 혼자 나와 있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도 말고 돈거래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에 와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가족과 떨어져 있다 보면 자연히 술이나 여자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는 초기 3년 동안 혼자 중국에 나와 있었지만, 다른 한국인 사업가들에게는 가족과 함께 나오기를 권합니다.”
 
  함 회장은 재중강원도민회 초대회장(1998~2003년) 등을 지냈고, 지금은 재중한인회 수석부회장으로 있다. 그런 그에게 작년부터 국내 언론에서 곧잘 나오는 ‘중국인들이 嫌韓(혐한)감정’ 관련 보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건 일부 철없는 중국 젊은이들이나 네티즌들 때문에 나오는 얘기인데,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만나는 중국인들도 ‘혐한감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한국인들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요. ‘한국인들은 참 열심히 산다’ ‘작은 나라인데도 올림픽 등 스포츠에서 거두는 성과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가 중국인들 앞에서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曺晶鉉 웅진코웨이생활용품유한공사 董事長      

주력제품은 화장품. 10년 내 중국 내 10대 화장품 브랜드가 목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고급제품 만들어 연안지역에서 승부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조정현 웅진코웨이 생활용품유한공사 동사장.
 웅진코웨이 중국법인인 웅진코웨이생활용품유한공사가 취재 대상으로 잡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웅진코웨이가 중국에서 장사가 될까’ 하는 것이었다.
 
  웅진코웨이의 대표 상품인 정수기·공기청정기·비데·軟水器(연수기) 같은 환경家電(가전)제품들이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년 안쪽이었다. 중산층 가정 가운데도 아직 이런 제품들을 갖추지 못한 집들이 적지 않다 (고백하자면 필자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중국이 아무리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고, 이미 한국 부자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부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해도 그런 제품들이 중국에서 먹혀들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웅진코웨이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중국 베이징 자오양(朝陽)구에 있는 한 오피스 건물을 접하는 순간 반쯤 사라졌다. 현대적 감각을 살려 지은 건물은 외양부터 서울시내의 성냥갑 같은 건물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건물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깔끔하고 패기에 넘쳐 보이는 중국 젊은이들이 깔끔한 복도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면 웅진코웨이의 제품들이 먹혀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진코웨이의 현지법인장(상무) 曺晶鉉(조정현) 董事長(동사장)은 올해 나이 39세. 먼저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 현재 중국의 소득수준에 비추어 볼 때, 정수기나 공기청정기 등 웅진코웨이의 환경가전제품들이 잘 팔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조 사장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현재 우리 회사의 주력제품은 환경가전제품이 아니라 화장품입니다. 매출 가운데 화장품 대 환경가전제품의 비율은 70 대 30 정도입니다. 우리 회사(중국법인)에서 환경가전을 본격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하반기부터였습니다.”
 
 
  중국 웅진은 화장품 회사?
 
웅진화장품 판매원들과 조정현 동사장.
  알고 보니 코리아나화장품이 웅진그룹 계열사였다. 外換(외환)위기 후인 1998년 코리아나화장품을 매각하면서 국내에서는 화장품 시장에서 철수했지만, 중국에서는 Ruhen, Terreau, Heberi, Nouris, Cellart 등 5개 브랜드 150여 가지의 화장품을 생산, 판매해 왔다. 상품은 33위안짜리 저가품에서부터 450위안짜리 프리미엄급 제품까지 다양하다.
 
  그는 “중국인들의 요구에 맞는 화장품을 선양(瀋陽)에서 생산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면 ‘나이 들어서도 피부를 젊게 유지하기 위해 화장을 한다’는 응답이 많아요. 그런 요구에 맞는 화장품 원료들을 발굴해 제품을 개발, 생산하고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안전성 테스트까지 마친 후 상품을 내놓습니다.”
 
  조정현 사장은 1996년 웅진그룹에 입사, 1999년 웅진코웨이로 옮겼다. 웅진코웨이 제품을 가정에 설치 관리해 주는 코디사업부장으로 일하다가 2003년 34세의 나이로 웅진코웨이 중국법인장으로 부임했다. 역대 법인장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였다.
 
  그는 부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물건이 잘 안 팔리니까 원가가 높고, 직원들 처우는 미흡하고, 그러다 보니 직원들의 충성도도 낮고, 연구개발투자는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부임하자 “지금은 月(월) 매출액이 30만 위안에 불과하지만, 3년 내에 월 매출액을 3000만 위안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그는 웅진에서 만드는 화장품을 판매해 줄 딜러망 구축에 나섰다. 그는 “부임 이후 3년 동안 매달 20일 이상 지방에 상주하면서 우리 제품을 취급해 줄 딜러들을 찾아내는 데 목숨을 걸었다”고 말했다.
 
  타사 제품들에 비해 브랜드의 지명도나 제품 포트폴리오가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가 택한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산둥성(山東省) 등 연안지역, 특히 칭다오(靑島)에서부터 웅진 제품만 취급하는 화장품 브랜드점을 연다는 전략이었다. 조 사장의 회고다.
 
 
  고급제품을 만들어 비싸게 팔아라
 
  “2004년 12월 칭다오에서 화장품을 가장 많이 파는 여성사업가를 찾아냈어요. 넉 달을 쫓아다니면서 설득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3월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당신 열정에 속는 셈 치고 내 인생을 걸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성사업가 아래 있던 하부 판매망들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죠. 2005년 5월 칭다오 바닷가에서 그녀를 만났더니 ‘당신은 왜 하필이면 나를 찾아왔느냐? 당신 때문에 내가 패가망신하게 됐다. 당신과 일하기로 한 것은 내 일생일대의 잘못된 선택이다’라며 울더군요. ‘여기서 그만두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밖에 안된다. 끝까지 같이 가자’고 달랬습니다. 지금 현재 그는 다른 브랜드숍(대리점)보다 10배 정도 매출을 많이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웅진화장품의 성공 이유로 다음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최고의 재료를 써서 고급제품을 만들어 비싸게 팔았다. 조 사장은 “비록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은 낮았지만,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웅진화장품의 스킨로션은 450위안인데,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랑콤화장품에서 나오는 스킨로션 값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둘째, 브랜드숍 점주들에 대한 교육에 투자하면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했다.
 
  셋째, 브랜드숍, 대형할인점, 백화점 화장품 전문점, 미용실 등 다양한 유통경로를 개발하고 여러 가지 이벤트를 통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조 사장의 설명이다.
 
  “중국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은 화장품 방문판매가 금지돼 있습니다. 한국에서처럼 소비자들에게 自社(자사) 화장품의 장점을 설명하고 써 보도록 하는 길이 막혀 있는 셈이죠. 대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브랜드숍으로 손님들을 찾아오게 해서 무료 마사지를 해 주는 등의 방법으로 소비자 밀착영업을 했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매출에 대해서는 밝히기를 꺼렸다, 다만 자신이 처음 부임했던 2003년에 비해 100배 정도 매출이 신장됐으며, 현재 월 400만~500만 위안 정도의 이익을 내고 있다고만 밝혔다.
 
 
  품질과 서비스로 승부
 
중국 선양에 있는 웅진의 화장품 공장.
  화장품 사업이 안정되면서 조정현 사장은 웅진코웨이의 대표상품들인 환경가전 시장 개척에 나섰다. 조 사장의 말이다.
 
  “사실 2006년 이전까지는 본사에서도 ‘중국에서 환경가전은 좀 빠르지 않으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2005년 하반기에 시장조사에 들어가 이듬해 1월 시장조사를 마쳤습니다. 2006년 7월에 제품 론칭에 들어갔는데, 그해 하반기에 홍준기 사장이 오시고 이인찬 전무께서 해외사업을 맡으면서 탄력이 붙기 시작했어요.”
 
  웅진코웨이에서 판매하는 일반정수기는 3500위안, 냉온정수기는 9500위안, 공기청정기는 3500위안(10평형), 비데 3500위안, 연수기(뻣뻣한 물을 부드럽게 바꿔주는 기계)는 3900위안이다. 중국인들의 평균 소득수준을 감안하면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정수기가 60%, 공기청정기가 20%, 연수기와 비데가 각각 10% 정도라고 한다.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 대한 중국인들의 수요를 보여주는 듯하다.
 
  정수기 분야에서는 메이디, 친웬, 엔젤 등 현지업체들, 공기청정기 분야에서는 타이완계 회사인 야두, 일본의 파나소닉과 샤프, 하니웰 등이 경쟁 상대다. 이에 맞서는 웅진코웨이의 무기는 제품력과 서비스다. 조 사장의 설명.
 
  “정수기의 품질은 웅진이 세계 제일입니다. 재료에서부터 모든 부품을 타사 제품보다 우수한 것을 사용하니까요. 다만 한국에서는 식당 등에 세워두는 데스크 탑 형태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비해 중국에서는 싱크대 밑에 넣는 언더싱크형 제품이 9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디자인과 기능이 보강된 언더싱크형 신제품을 하반기에 출시할 예정입니다.
 
  공기청정기는 야두 제품보다 15~20% 정도 비싼 값에 팔립니다. 우리 회사 제품은 품질과 디자인 못지않게, 서비스가 뛰어납니다. 다른 회사에서는 제품 판매에 그치지만, 우리는 정수기 공기청정기 필터 교체, 6개월 무상서비스 등 서비스 차별화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 한국에서 공기청정기, 정수기, 비데 등의 보급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렌털시스템은 중국에서는 도입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렌털해 쓰는 비율이 90%에 달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구매비율이 70%에 달합니다. 하지만 현재 베이징, 톈진, 상하이, 칭다오 등지에서 100여 명의 코디(제품 설치 관리 및 서비스 요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건을 빌려 쓴다는 개념이 아직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단정한 외모와 친절한 서비스로 고객만족도가 95%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중국인들과는 외상거래하지 말라고 하던데, 렌털은 해도 됩니까?
 
  “한국에서는 렌털료를 자동이체하는데 중국에서는 아직 자동이체가 일반화되지 않고 있어요, 코디가 수금업무까지 처리하고 있습니다.”
 
 
  “3년 내에 중국 내 10대 화장품 회사로 키우겠다”
 
  조 사장은 “한국에서처럼 이들 제품이 일반화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예상보다 성장세가 늦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는 물을 끓여먹거나 값싼 생수를 사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기청정기의 경우 2004년 사스 사태 이후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정수기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어, 공기청정기보다는 정수기 쪽이 잠재력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정수기는 작년에 50% 이상 판매가 늘었고, 올해도 35% 이상 성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 웅진은 중국 현지에서도 환경가전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까.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60% 정도를 차지하고, 정수기 중 보급형 제품 일부를 현지에서 조립생산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더 커지면 본사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중국 현지생산을 늘리게 되겠죠.”
 
  ― 환경가전에 주력하면서 화장품에 소홀해지는 것은 아닙니까?
 
  “작년에 화장품이 259% 성장했고, 올해도 200% 이상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3년 내에 웅진화장품을 중국 내 10대 화장품 회사로 키우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에게 “세계 각국의 화장품들이 각축하는 중국시장에서 너무 큰 꿈 아니냐”고 말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하는 일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梁在完 북경 주황부동산 사장  “중국 부동산 개발은 제2의 영토확장”  

金南成 月刊朝鮮 기자 (sulsul@chosun.com

자신이 분양 중인 아파트 모형 앞에 서 있는 양재완 사장.

 베이징에 위치한 부동산 개발·분양업체 住皇(주황)부동산 직원들은 주말에 더욱 바쁘다. 주말이면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구경하기 위해 중국인 고객들이 몰려 오기 때문이다. 이 회사 김진학 본부장과 전용운 이사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에 교대로 쉰다. 梁在完(양재완·55) 사장은 하루도 쉬지 못한다.
 
  지난 6월 27일 왕징(望京)에 있는 주황부동산 모델 하우스에서 만난 양재완 사장은 아파트 1차 분양 114세대 판매를 독려하고 있었다. 양 사장에 따르면, 현재 90% 이상 판매가 끝났다. 현재 남은 물량은 10세대.
 
  지난해 말부터 분양을 시작한 주황부동산의 왕징신청(望京新城)단지 아파트는 세계적인 경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다. 양 사장이 아파트 내부에 삼성전자의 고급 가전제품과 시스템 에어컨을 설치하고 한국식으로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를 했기 때문이다. 양 사장은 “이렇게 분양회사에서 인테리어까지 마감을 해 주는 방식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스템이라 높은 분양가에도 불구하고 빨리 분양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는 아파트를 분양할 때, 대개 내부 인테리어를 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을 ‘모피방’이라고 합니다. 입주자가 분양받은 모피방에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 시공을 하는 거죠. 하지만 입주자들이 고급스러운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로 시공하기가 어렵습니다. 돈을 많이 줘도 만족스럽지 않죠. 저희 회사는 중국 고급 아파트의 이런 단점을 파고든 겁니다. 중국 상류층이 저희 아파트 분양 사무소를 찾아오면, 입을 ‘떡’ 벌리고 두말없이 계약을 합니다.”
 
 
  3.3㎡(1평)당 1200만~1500만원
 
베이징 왕징 거리에 있는 주황부동산 모델 하우스.

  양재완 사장과 함께 모델 하우스 2층에 있는 전시실을 둘러봤다. 그가 분양하고 있는 아파트는 173㎡(52평), 203㎡(62평) 두 가지 형태다. 분양가는 3.3㎡(1평)당 1200만~1500만원으로 한 채당 평균 7억~8억원이다. 3년 전 가격은 약 2억~3억원이었다. 3년 새 두세 배가 오른 셈이다. 양 사장의 설명.
 
  “중국 경제도 세계 경제 불황 여파로 주춤하고 있지만 중국 상류층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두껍습니다. 이들이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왕징처럼 생활환경이 좋은 곳의 아파트를 구입하기 때문에 계속 가격이 오릅니다. 한국의 강남처럼 베이징의 강남인 왕징 아파트 가격도 계속 오를 겁니다.”
 
  주황부동산 직원들은 가족 단위로 몰려 온 중국 고객들에게 전시실을 안내하느라 부산했다. 전시실을 들른 여성 고객들은 대개 명품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모델 하우스 주차장에는 아우디, 벤츠 등 고급 승용차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 주로 어떤 사람들이 아파트를 삽니까.
 
  “기업인들, 지방의 돈 많은 사업가들, 국영기업체 간부 등입니다. 또 왕징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한국기업인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과 사업을 하는 조선족 기업인들이 꽤 있습니다. 베이징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1인당 GDP는 약 7000달러 정도지만, 중국은 지하자금이 많습니다. 중국의 중상류층이 묻어 둔 돈이 상당합니다.”
 
  ― 돈 많은 사람들이 많아도, 지금처럼 분양가가 계속 오르면 분양이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저희 아파트를 건설한 중국 건설업체가 분양가를 계속 올리라고 요구합니다. 각종 자재, 인건비가 오르기 때문이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분양회사가 가져갈 이익금을 줄입니다. 이 때문에 저희도 애를 먹고 있어요.”
 
  주황부동산은 중국 아파트 시공사인 城建集團(성건집단·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을 건설한 회사)과 1600세대를 시공해 분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건집단에서 계속 분양가를 높이는 바람에 1차 114세대 분양이 끝나면 왕징 아파트 분양사업은 접을 계획이라고 한다.
 
 
  명품 쇼핑몰 사업에 뛰어들어
 
  주황부동산 모델 하우스를 둘러 본 후, 양재완 사장의 차를 타고 베이징시 순위구 호사위진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양 사장은 중국 국영회사인 순신집단과 합작으로 명품 쇼핑물 사업을 준비 중이다. 호사위진은 우리나라로 치면 과천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현재 고급 아파트와 상가 건설이 진행 중이다.
 
  일행은 새로 뚫린 京承(경승) 고속도로를 타고 20여 분 달려 호사위진에 도착했다. 호사위진 톨게이트에서 약 5분쯤 들어가자,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대형 실내체육관 규모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공사장 한쪽에는 ‘제7회 국제 꽃 박람회 개최’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 쇼핑몰에서 꽃 박람회를 개최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 건물은 처음부터 쇼핑몰로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순신집단이 오는 9월 25일부터 10월 10일까지 세계 꽃 박람회를 개최합니다. 순신집단이 꽃박람회를 열고 나서 남은 건물을 활용해야 하는 숙제가 생겼어요. 순신집단 총재가 고민하다 제게 연락을 했더군요. 지난해부터 제가 컨설팅을 한 결과 명품 쇼핑몰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왜 고급 쇼핑몰 사업입니까.
 
  “이곳은 서우두(首都) 공항에서 5분 거리고, 인근에 지하철이 들어 옵니다. 하지만 아직 외진 곳이에요. 여기다 오피스나 일반 상가를 분양해 봐야 기업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66만㎡ 부지에 연건평이 17만5000㎡, 지하 1층, 지상 6층에 철골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 규모면 아웃렛을 해야 하고, 현재 중국 주요 도시에 명품 아웃렛이 별로 없으니 명품 아웃렛이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순신집단에 단순한 명품 아웃렛 외에 명품 정품을 파는 매장을 함께 하자고 제안해 놓았습니다.”
 
  순신집단은 베이징시 토박이 국영회사로, 선전(深 )의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다. 농산물 회사로 시작해 건설회사, 부동산 회사 등 모두 6개 회사로 이뤄져 있고 지난해 매출액이 인민폐로 약 62억 위안(약 1조2000억원)이었다.
 
  순신집단의 주력 사업은 농축산업으로 지난해 돼지 800만 두를 도축해 시장에 공급했다. 순신집단은 몇 년 전부터 사업 다각화를 모색하면서, 부동산 전문가인 양재완 사장에게 부동산 컨설팅을 의뢰했다.
 
양 사장이 중국 국영회사와 함께 운영할 명품 아웃렛 조감도.
 
  중국 국영회사와 돈독한 신뢰 쌓아
 
  ― 양 사장께서 순신집단의 신뢰를 얻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중국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눈에 보이는 게 없으면 마음을 열지 않아요. 저는 왕징에서 부동산 분양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건설 중인 아파트와 모델 하우스를 보고 나서 ‘아, 이 사람이 부동산 관련 전문가구나’라고 인정을 한 겁니다. 저는 4년 전부터 저희 회사 비용으로 만든 용역보고서 등을 보여 주면서 순신집단의 주력사업을 부동산 개발업, 건설업 등으로 전환하라고 조언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부동산 거품이 꺼진다. 부동산 개발 붐은 지났다’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제 예측이 맞았습니다.”
 
  ― 순신집단과 합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04년부터 부동산 규제가 생기기 시작해서 지금은 외자 기업이 돈이 있더라도 함부로 중국 부동산을 매입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4~5년 전부터 순신집단 임원들과 꾸준히 접촉을 했습니다. 순신집단이 국영회사고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곳곳에 땅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부동산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땅이 많은 중국 기업과 손을 잡아야 하는데, 중국 민간기업과 손 잡으면 100전 100패예요. 처음에는 믿음을 주는 척하지만 막판에 가면 교묘한 방법으로 배신을 합니다. 아무리 중국에서 오래 활동한 한국 기업가라도 중국 민간기업의 교묘함에는 못 당합니다.”
 
  양 사장은 앞으로 명품 쇼핑몰 사업에 40%를 투자하고, 쇼핑몰 운영권을 가져올 생각이다. 순신집단에서도 양 사장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양 사장은 쇼핑몰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그는 “모든 조건을 갖춰도 자금을 동원하지 못해서 마지막에 엎어지는 게 부동산 개발업”이라며 “한국 은행들이 중국 부동산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아 놓치는 물건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달아오르는 중국 부동산 시장
 
명품 아울렛으로 사용할 건물 공사 현장 모습.
  양재완 사장은 1996년 중국에 진출한 이래, 자금력 부족으로 여러 번 사업을 중도 포기했다. 그는 2001년 성건집단과 합작으로 아파트를 건설하려 했지만 계약했던 땅값을 지불하지 못해 중국민항에 부지를 넘겼다.
 
  1996년에는 다롄(大連)에서 최고급 빌라 60채를 건설했다. 당시 다롄에 진출한 한국과 외국 기업들이 구매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터져 한국 기업들이 모두 다롄에서 철수했다.
 
  분양이 어려워져 자금이 상황이 악화되자 그는 중국에 있던 모 한국계 은행에 자금 요청을 했다. 돌아오는 답은 “모 건설회사에 5000만 달러를 대출해서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은행에서 당시 10억원을 대출해 줘 빌라를 완공할 수 있었다. 양 사장은 “한국 대기업과 은행이 중국 부동산 개발업에 소극적인 게 너무 안타깝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2001년 성건집단과 합작이 깨지고 나서 몇 년이 지났는데 한국 대형 건설업체 두 곳에서 ‘그 땅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고 문의를 해왔습니다. 당시 제가 부지 계약서와 구체적인 분양 계획까지 보여주면서 투자를 하라고 할 때는 모른 척한 기업들이었어요.”
 
  ― 우리 은행이나 기업에서 왜 중국 부동산 투자를 꺼리는 겁니까.
 
  “건설회사들은 지난 1997년에 크게 손해를 보고 나서 겁을 먹었습니다. 그 당시가 중국 부동산 1차 붐이었어요. 당시에 손해를 보고 나니 지난 몇 년간 2차 부동산 붐을 제대로 타지 못한 겁니다. 머뭇머뭇 거리다 2005년 무렵부터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했지만 2004년부터 부동산 규제가 강화돼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좋은 땅을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한국의 은행들은 대기업에만 대출을 해 주는 바람에 중소기업인 우리 같은 회사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거죠.”
 
  ― 좋은 땅을 가지고 있어도 한국의 은행들은 투자를 하지 않나요.
 
  “저희 같은 중소 부동산 개발회사들은 아무리 좋은 땅이 있어도 한국계 은행들로부터 대출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계 은행들은 ‘중국 부동산은 담보성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홍콩 대만 싱가포르 기업들은 중국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어 엄청난 돈을 벌어 가고 있어요. 부동산 개발은 과거 중동에서 오일 달러를 버는 것만큼 중요한 외화 획득 수단인데, 우리나라는 중국의 엄청난 부동산 시장에서 손을 놓고 있어요. 신라시대에도 중국에 신라방이 있었는데 베이징에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호텔 하나 상가 하나 없는 게 현실입니다.”
 
  ― 중국 부동산 시장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국계 은행들이 투자 가치를 보고 적극적으로 대출을 해 줘야 합니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 부동산 개발 기업을 살려줘야 해요. 오죽했으면 현재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부동산 개발 기업이 저희밖에 없겠습니까.
 
  또 중국은 이제 외자 기업들이 알짜배기 땅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요. 따라서 순신집단처럼 제대로 된 국영기업과 오랫동안 인연을 잘 맺어야 해요. 저는 중국에 진출한 이후 7년 동안 설과 추석을 모두 중국에서 보냈어요. 중국 합작 파트너의 고위 관계자들 고향에 따라가서 가족에게 선물을 주고 가족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장기적인 관시(關係)가 이제야 도움이 되는 게 중국의 현실입니다.”
 

孔成文 안휘코스몰 대표    “중국 내륙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선점하라”     

후진타오·우방궈·리커창의 故鄕 안후이성에서 명품 아웃렛 운영
허페이의 사위가 되다
   

金南成 月刊朝鮮 기자 (sulsul@chosun.com

공성문 안휘코스몰 대표 부부.

 주위에서 모르는 건 그렇다고 치자. 여행사에서 모르는 중국 도시라니. 지난 5월 중순,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合肥)發(발) 서울行(행)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 여행사에 전화했다. 담당 직원은 “처음 들어보는 도시”라며 “하얼빈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孔成文(공성문·51) 안휘코스몰(Kosmall) 대표에게 들은 대로 “올해 3월부터 허페이까지 直航(직항)이 개설됐습니다”라고 하자, 이 직원은 “잠시 후에 전화 드리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10분 후 “한국 사람들이 잘 안 가는 도시라서 몰랐다. 죄송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상하이(上海)에서 난징(南京)을 거쳐 허페이에 도착했다. 허페이는 난징에서 고속열차로 1시간 걸렸다. 약 300㎞로 달리던 열차는 허페이 근처에서 급격히 속도를 늦췄다. 매끈한 최신 고속철과 달리 허페이역과 허페이市(시)는 낡고 초라해 보였다.
 
  멀리 보이는 도심에는 고층빌딩이 별로 없었다. 허페이역에 내려서 마중 나오기로 한 공성문 대표를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
 
  잠시 후 공성문 대표가 휴대전화를 연방 누르면서 나타났다. 初面(초면)이었지만 휴대전화를 들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서로를 알아봤다. 공 대표는 “허페이시 전체가 30분 동안 휴대전화가 불통이었다”고 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는 공 대표의 말에, 서울에서 여행사 직원이 “허페이가 어디냐”고 되묻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쨌든 안후이성 허페이는 아직 未開發(미개발), 미지의 도시임에는 틀림 없었다.
 
 
  주변 인구가 5억명
 
  공성문 대표의 차를 타고 가면서 안후이성과 허페이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안후이성은 중국 중부에 위치하고 있고 저장성(浙江省), 장쑤성(江蘇省) 등과 인접해 있다. 성 전체 인구는 약 6500만명(2005년 기준), 省都(성도)인 허페이시 인구는 약 350만명이다. 2005년 기준으로 성 전체 GDP가 1305달러로 전국 평균의 80% 수준이지만, 향후 경제 발전 전망은 밝은 편이라고 한다. 공 대표의 설명.
 
  “안후이성은 남쪽으로 광둥성의 주장(珠江) 삼각주, 동쪽으로 상하이의 창장(長江) 삼각주라는 중국의 경제 핵심지역을 배후에 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에서 저장성, 장쑤성 등에 살고 있는 주변 인구가 무려 5억명이에요. 허페이는 창장(장강: 양쯔강)과 약 18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내륙이지만 운송 능력이 뛰어납니다.”
 
  지난해 말 허페이와 상하이 사이에 고속철도가 뚫려, 두 도시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세 시간으로 줄어 들었다. 공성문 대표는 “김 기자가 타고 온 그 고속철도로 상하이, 저장성 일대의 돈과 인력들이 허페이로 몰려 오고 있다”고 말했다.
 
  ― 안후이성을 대표하는 기업이나 업종이 뭡니까.
 
  “중국 제1의 토종자동차 기업인 치루이(奇瑞)자동차가 허페이 인근 우후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 외에 창평(장풍)자동차도 안후이를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어요. 허페이에는 경제기술개발특구가 있어요. 지난 1993년에 설립됐는데 유니레버, 코카콜라, 스미토모중공업 등 세계유수의 기업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기업이 들어오려고 준비 중이라는 얘기를 허페이시 관계자들에게 들었습니다.”
 
  허페이시는 도심이 크지 않아 역에서 공성문 대표가 운영하는 안휘코스몰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안휘코스몰은 아웃렛으로 한국과 외국 제품을 취급한다. 공 대표에 따르면, 코스몰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허페이시의 신개발구라고 했다. 이곳은 기존 중심가에서 3㎞, 허페이 신역에서 2㎞, 허페이 공항에서 25분 거리에 있다. 인근에는 월마트, 까르푸 등 외국계 대형 마트가 있고 배후에는 대규모 아파트, 주상복합건물이 몰려 있다.
 
 
  허페이 유일의 명품 아웃렛 운영
 
안휘코스몰 내부.
  ― 코스몰이 위치한 곳이 허페이시에서 중심가인가 봅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이 시의 舊(구) 도심입니다. 이곳에 대형 백화점 7개가 몰려 있어요. 최근 허페이시 정부가 신개발구를 중점 육성하면서, 상업의 중심이 구 도심에서 이곳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허페이시 전체에서 상업 발전 속도가 가장 빠릅니다. 월마트, 까르푸가 이곳에 입점했고 백화점 하나가 최근 문을 열었습니다.”
 
  공성문 대표와 함께 그가 운영하는 코스몰을 둘러봤다. 코스몰은 ‘U TOWN’이라는 복합빌딩지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복합빌딩은 4개 동으로 전체 규모가 1만2340㎡(4100평)로, 오피스텔과 아파트 750가구가 입주해 있다. 코스몰은 복합빌딩의 1~4개 층을 임차해 운영하고 있다. 1층은 잡화, 피혁, 화장품 등을 팔고 2층은 여성복, 캐주얼 매장이, 3층에는 스포츠 의류 가게가 입점해 있었다.
 
  ― 인근에 백화점이 8개나 있어서 경쟁이 치열하겠군요.
 
  “저희 코스몰은 지난해 9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지만 빠른 시간 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는 한국 브랜드와 외국의 유명 브랜드 제품을 싸게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아직 의류 제품이 한국 제품에 비하면 질이 떨어져요. 우리 이랜드, 갤럭시, 인디언 등의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중국 고객들이 만족해 합니다. 특히 3층에 있는 나이키 매장은 허페이 전체에서 가장 큰 매장이에요.”
 
  ―중국에 아웃렛 매장이 많습니까.
 
  “아직 아웃렛이 대중화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명품 브랜드를 갖고 싶어하는 욕구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허페이도 최근 몇 년 사이에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비자들이 한국과 외국의 고급 브랜드를 선호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런 브랜드를 백화점에서 사려면 매우 비싸죠. 저희가 질 좋은 고급 브랜드 제품을 싸게 팔고 품질을 보장해 주니까 금방 손님이 몰립니다. 아웃렛에서 나이키 제품 같은 유명 제품을 공급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유명 제품을 공급받는 비결이 있나요.
 
  “1997년부터 허페이에서 사업을 하며 맺은 ‘콴시’ 때문이죠. 물론 여기에는 중국인인 제 처의 영향도 컸습니다.”
 
 
  허페이의 사위
 
허페이시 新개발구 사거리.
  충남 대전에서 음식점을 크게 운영하던 공성문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중국에 오게 됐다. 그의 친구가 허페이에 골프 연습장을 운영했는데, 현지 중국인에게 사기를 당하게 됐다. 그는 중국 현실은 모르지만, 친구가 사업을 정리하는 것을 돕기 위해 허페이로 건너왔다.
 
  당시 중국 전체가 아직 미개발지역이었지만, 허페이는 더욱 낙후됐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고 한다.
 
  “당시 허페이는 우리나라의 1960년대 정도였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한국에서 사업을 한 걸 여기에 대입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더군요. 친구가 운영하던 골프 연습장을 제가 인수해 운영하면서, 중국 내륙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허페이에서 만난 아내 덕분에 중국어를 빠르게 배웠고, 妻家(처가) 인맥이 있어 허페이시 관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허페이에서 적응하기 위해 철저하게 현지화했다. 중국 관리들과 만날 때는 아열대 기후인 허페이의 여름에도 긴팔 정장을 했다. 이들과 함께 한국 공장을 안내할 때, 땀이 흘러 양복이 흥건히 젖어도 양복 윗도리를 벗지 않았다. 좁은 허페이에서 외국인이 중국 아내를 얻어놓고 딴짓한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 술집 출입도 삼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허페이에서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허페이의 사위가 되기 위해 악착같이 생활했습니다. 허페이는 지금도 한국인이 약 300명밖에 없어요. 제가 처음 왔을 때는 몇 십 명에 불과했어요. 몇 안되는 한국 사람들이 잘못 행동하면 우리나라 전체가 욕을 먹는 겁니다. 제가 안휘성 한국상회 회장을 오래하면서, 저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사람들에게 행동 잘하자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렇게 10여 년 생활한 덕분에 허페이에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습니다. 이곳 관리들은 ‘다른 나라 말고 한국 사람들과 한국 기업이 허페이에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허페이에 서울路가 생긴 이유
 
  공성문 대표는 허페이시 정부와 함께 지난 2007년 11월 서울에서 외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했다. 또 2008년 4월에는 ‘중국 화동지구 한국상인회 연합회 총회’를 허페이에서 열었다. 허페이에서 연합회 총회가 열린 건 처음이었다. 이 덕분에 많은 한국 기업인이 허페이에 대해서 알고 갔고, 투자도 여러 건 진행 중이다.
 
  “허페이에 한국 문화와 한국 전통을 알리고 싶어서 ‘한국 음식 만들기’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고, 김치 만드는 법을 중국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희 코스몰을 허페이의 한국 문화 중심지로 만들려고 해요. 이런저런 저희 상인회의 노력이 허페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저희 아웃렛 서쪽 거리 이름이 ‘서울路(로)’로 개명됐습니다.”
 
  공성문 대표는 허페이와 안후이성이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허페이는 중국 연안지역에 비해 인건비가 매우 저렴합니다. 대졸 초임이 보험을 포함해서 1500~2000위안(약 27만~30만원)이에요. 상하이나 연안지역은 평균 3500~4000위안이에요. 안후이성에서 가장 임금이 높은 허페이도 최저 임금이 600위안(12만원)밖에 안돼요.
 
  게다가 좋은 인재들이 몰려 있습니다. 중국 최고의 工大(공대) 가운데 하나인 안후이과학기술대가 허페이에 있고 성 전체에 150개 대학교가 있습니다. 허페이 경제기술개발구는 국가급 개발구로 관할 면적만 무려 53㎢입니다. 중국 정부는 연안지역을 30년간 발전시켰고, 이제 내륙으로 눈을 돌리고 있어요. 그 중심이 허페이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 대표와 허페이 공항으로 갔다. 인천과 직항이 개설된 공항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았다. 공 대표는 공항 건너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신공항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 국제공항으로 시작했는데, 국무원에서 ‘전 세계 모든 종류의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으로 만들라’고 지시를 내렸어요. 그런 공항은 현재 베이징 서우두, 상하이 푸둥공항밖에 없습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 리커창(李克强) 중앙정치위원회 상무부총리 등이 허페이와 안후이성 출신입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자신의 고향 상하이를 키웠듯이 이들 領導(영도)들이 허페이를 키우려고 합니다. 우리 기업인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에요.”
 

韓三洙 천진아로마골프유한공사 董事長    LST(레저·스포츠·테마파크) 사업을 선점하라     

전자부품 제조에서 레저·스포츠·테마파크 분야로 업종 다각화
중국인들의 소득증대에 발맞춰 아로마골프장 건설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한삼수 아로마골프 회장.

 중국 톈진(天津) 빈하이(濱海)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 톈진시 난카이(南開)구 楓林賓館(풍림빈관)에 도착했다. 호텔 건물에 들어서자 ‘톈진한국인회·톈진한국상회’라는 간판에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鄭玹稙(정현직) 한국인회 사무국장이 반겼다. 몸집이 큰 30대 젊은이였다. 그는 “한국인회는 교민들의 안전과 편의에 관한 사무와 함께 베이징주재 한국대사관의 위탁을 받아 여권 영사 업무도 처리한다. 한국상회는 이곳에 진출한 기업들의 노사 세무 기업 회계 등에 관한 일을 돕는다”고 말했다.
 
  필자가 취재하러 온 韓三洙(한삼수·51) 천진아로마골프유한공사 董事長(동사장)은 톈진한국인회 회장과 톈진한국상회 회장, 톈진한국국제학교 재단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정 국장에게 아로마골프에 대해 묻자 그는 웃으면서 “아로마 골프는 정 회장님의 사업 중에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이하 한삼수 동사장은 한삼수 회장으로 호칭).
 
  그의 말처럼 한 회장은 아로마골프유한공사 외에도 한성엘컴텍(렌큐)유한공사, 한성엘컴펙(톈진)유한공사, 천진한성엘컴텍광전자유한공사 동사장을 겸하고 있다.
 
  이들 회사들이 속해 있는 한성그룹(회장 韓玩洙)은 한성엘컴텍㈜을 주력기업으로 하는 연 매출 4000억원 규모의 중견 그룹이다. 1982년 콘덴서를 생산하는 한성전자로 출범한 한성엘컴텍은 휴대폰용 카메라 모듈(CCM·Compact Camera Module)과 키패드 등 첨단 IT 부품과 차세대 조명기구인 LED(발광다이오드) 등을 생산 수출한다.
 
  한완수 한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한삼수 회장이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4년. 하지만 그가 중국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92년이었다. 한완수 회장이 “앞으로 우리 회사는 중국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영업관리 담당 상무로 있던 그를 중국으로 내보낸 것이다.
 
 
  2년의 사전준비 끝에 중국 진출
 
  한삼수 회장은 “당시 우리 회사는 전자레인지용 고압콘덴서(HVC)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內需(내수)와 수출의 비중이 반반이었다. 노동집약적 제품인 HVC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국 진출이 필수적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건너온 그는 중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중국 전역을 돌면서 공장입지조사를 했다.
 
  1992년 당시 한성전자는 연간 매출액 100억원 정도의 회사에 불과했다. 이듬해 한성전자는 대우그룹 계열사이던 대우전자부품㈜ 안성공장을 인수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한삼수 회장에 의하면,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1994년 4월 한성전자는 톈진에 톈진한성전자유한공사를 설립했다. 한삼수 회장은 70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톈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한삼수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의 위성도시인 톈진은 성장할 수밖에 없고, 톈진의 성장 없이는 베이징의 성장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선전(深)이나 상하이(上海) 등이 먼저 발전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톈진이 중국 북방의 생산기지가 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가 톈진을 택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톈진시 공무원들의 열의였다.
 
  “톈진에 오던 날 공항에 마중 나와서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것을 시작으로 톈진을 떠나는 날까지 성의를 다해서 서비스를 하더군요. 사실 그것 자체가 다른 지역보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어요. 선전이나 상하이에서는 그런 서비스를 받아도 비즈니스 때문에 그러는 것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지역보다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진 톈진에서는 참 순수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1995년 톈진한성전자에서 첫 제품이 나와 20만 달러어치를 수출한 이래 한성전자는 세계 HVC 시장의 강자로 뛰어올랐다. 1994, 1995년 세계 HVC 시장의 38%를 점유했던 한성전자는 2000년에는 시장점유율을 52%까지 올렸다.
 
  한 회장은 HVC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로 “중국으로 일찍 진출해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중국 진출 초기에 품질관리상의 문제점은 없었습니까?
 
  “처음에는 다소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우리가 조금만 품질관리를 해 주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초기에는 한국에서 부품을 들여다 중국에서 조립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술력 있는 현지기업들을 눈여겨봐뒀다가 그들에게 점차 일을 넘기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1년 정도 지나니까 따라오더군요.”
 
  하지만 한성전자는 HVC 시장에 안주할 수 없었다. 시장 자체가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해 주기에는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한삼수 회장의 말이다.
 
  “전 세계 전자레인지 시장이 5500만 대 규모이고, HVC 시장은 우리 돈으로 450억~550억원 규모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전자 등이 전 세계 전자레인지 시장의 70%를 점하던 시절에는 우리 회사 제품을 많이 선호했는데, 지금은 중국 업체들이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중국 현지기업들의 제품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48%로 조금 떨어졌습니다.”
 
 
  한국 본사의 끊임없는 변신을 뒷받침
 
중국에 있는 한성그룹 계열사들은 본사의 변신을 뒷받침하는 생산기지 역할을 한다.
  한성전자는 2000년 한성엘컴텍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와 함께 성장에 한계가 있는 HVC 사업은 중국 톈진공장으로 넘기고 2001년 새로운 디스플레이 소재인 EL(Electro Luminescent·자기발광체)과 LED(Light Emitting Diode·발광다이오드), 휴대폰용 카메라 모듈(CCM)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한성엘컴텍은 2004~2007년 EL을 주력상품으로 해서 매년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2006년 이후 한성엘컴텍의 신성장동력이 된 것은 휴대폰용 카메라 모듈(CCM)이었다. CCM을 중심으로 연간 1500억~16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와중에 한성엘컴텍은 LED로 주력분야를 바꾸었다. 한삼수 회장에 의하면, 한성엘컴텍은 LED를 주력상품으로 해서 올해 매출은 500억원, 내년에는 200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조만간 1조원대의 기업으로 성장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한삼수 회장의 말이다.
 
  “한성은 모든 신기술의 주기를 3년으로 봅니다. 그 3년이 다 가기 전에 새로운 분야에 연구개발투자를 하면서 끊임없이 변신을 꾀하는 것이죠. 사업이 잘될 때 다음 사업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우리 회사는 처음 출발할 때에는 평범한 콘덴서 제조업체였지만, 그 후 전자레인지용 HVC에서 EL로, 다시 CCM에서 LED로 주력 제품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조그만 중소기업이 CCM을 한다고 하니까 다들 웃었죠. 하지만 아무리 대기업이 진출한 분야라고 해도 틈새시장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 틈새시장을 공략했습니다.”
 
 
  레저 사업에 뛰어들어
 
  한삼수 회장이 이끄는 한성그룹의 중국 계열사들은 본사의 끊임없는 변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한 회장의 말이다.
 
  “본사에서 새로운 품목에 투자를 하면 과거에 생산하던 품목은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깁니다. 한국 본사에서 생산하는 품목의 이익률이 5% 이하로 떨어지면 중국으로 옮기는데, 그러면 이익률이 6~7% 정도 납니다. 이런 식으로 새로 투자한 품목이 안정될 때까지 전에 생산하던 품목을 중국에서 생산하면서 본사를 지원합니다.”
 
  지금은 중견 IT기업 그룹인 한성그룹의 차세대 주력사업은 자원개발이다. 몽골에서는 금광개발,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자원개발, 농축산물업, 호텔업, 유통업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필자와 만난 다음날에도 한삼수 회장은 키르기스스탄으로 출장을 떠났다.
 
  한성그룹 본사의 생산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한삼수 회장은 2003년 LST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병대에서 사용하는 LST(Landing Ship Tank)라고 하는 상륙정 조선업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레저(Leisure) 스포츠(Sports) 테마파크(Theme Park)를 의미한다. 현재는 중국 톈진에서 아로마 골프장과 승마장을 운영 중인데, 앞으로는 스키장, 놀이동산, 주말농장, 콘도 및 빌라, 쇼핑센터, 물류유통센터 등을 갖출 계획이다. 이를 위해 설립한 회사가 톈진아로마골프클럽유한공사다.
 
  한삼수 회장이 LST사업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지난 15년 동안 톈진에서 사업을 하면서 앞으로 톈진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가 내다보였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2004년부터 토요일 휴무제가 도입됐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 4년 후쯤이면 중국 4대 직할시(베이징, 톈진, 상하이, 충칭)의 1인당 GRP(지역소득)는 4000달러를 넘게 될 것 같더군요. 소득이 늘면 레저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톈진 주위에는 이렇다 할 여가시설이나 관광지가 없어요. 골프장이 몇 군데 있지만, 그나마 시설이 낙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인구억제정책으로 1자녀 가정이 늘어나면서 어린이들이 ‘小(소)황제’로 떠받들어지고 있어요. 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식 자연농원이나 골프장을 들여온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회장은 “톈진시의 인구는 현재 1080만 명이지만 유동인구를 포함할 경우 1280만 명에 달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이미 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들 비중을 전체 인구의 5%로 잡더라도 그 수는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 레저사업을 하기에는 칭다오나 날씨가 좋은 남쪽 지방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런 곳들은 이미 다국적 기업들이 진출해 있습니다. 그런 곳에 자본이 넉넉지 않은 제가 진출해 봤자 1등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톈진에서는 1등을 할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의 톈진은 춥고 공기가 안 좋지만,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앞으로 더 좋아질 것입니다.”
 
 
  난관을 극복하고
 
톈진 따강구 官港삼림공원기지처 안에 있는 아로마골프장.
  하지만 LST 사업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난관이 닥쳤다. 한 회장의 말이다.
 
  “원래는 한성그룹 본사에서 투자할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본사에서는 투자를 포기했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할 수 없더군요. 결국 제 개인 돈으로 투자하기로 하고 제가 갖고 있던 본사 지분을 팔아 비용을 조달했습니다.”
 
  다음은 중국 공무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레저 시설이니 테마파크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그들에게 “더 많은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이런 시설들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2003년 9월 한 회장은 톈진시 따강(大港)구 정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앞으로 3년간에 걸쳐 총 1억 달러(1차 연도 2000만 달러, 2차 연도 3000만 달러, 3차 연도 5000만 달러)를 투자해 골프장 등 각종 스포츠 시설과 테마파크를 건립하고, 韓貨(한화)로 연간 100억원 이상의 흑자가 나면 구정부에 회사 지분의 10%를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업이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뜻밖의 사태가 터졌다. 한 한국 기업이 더 좋은 조건을 내걸고 나선 것이다. 그 회사는 1차 연도에 5000만 달러 투자, 회사 지분의 20%를 구정부에 주겠다고 제안했다. 구정부에서 회의가 열렸다. 한 회장의 회고다.
 
  “회의석상에서 ‘당신들이 그 사람에게 사업권을 주겠다면 나는 사업을 포기하겠다. 이미 300만 달러가 들어갔지만 보상은 필요 없다. 하지만 나는 이미 가슴 속에 이 사업이라는 아이를 배고 있다. 지금 사업권을 가져가더라도 내게서 이 아이를 떼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정부 공무원들은 5분간 정회를 했다가 다시 회의를 열더니, ‘이 사업은 당신이 하라’고 하더군요.”
 
  톈진에서 가장 큰 삼림공원인 탕고구 官港(관항)삼림공원 녹화기지(그린벨트) 안에 위치한 아로마골프장의 총 면적은 338만5200㎡에 달한다. 골프장은 1차로 88만㎡ 규모의 18홀 골프장에 이어 32만㎡ 규모의 9홀 골프장이 개설되면서 27홀 규모로 운영되고 있으며, 앞으로 36홀 규모로 확장될 예정이다. 현재 1일 내장객은 200명 수준으로 한국인 40%, 중국인 30% 정도라고 한다.
 


  ▣ 한삼수 회장이 말하는 중국 사업 성공비결
 
  1. 신뢰
  CEO로서 직원들을 신뢰하고, 직원들의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투명경영과 信賞必罰(신상필벌)이다. 본사에서 인센티브가 1억원이 나왔을 때, 직원 각각에게 100만원씩 나누어줬다. 내 몫은 700만원이 남았다. 직원들은 여기에 감동받고 더 열심히 일했다.
  물품이 海關(해관·세관)에 들어오면, 도착한 순서대로 처리가 된다. 한 번은 공장에서 쓸 부품이 토요일에 해관에 들어왔다. 다음날은 공무원들이 근무를 하지 않는 일요일이었다. 우리 직원들은 해관 공무원들을 설득해서 부품을 그날로 통관시켰다. 이렇게 능동적으로 일한 직원들에게는 그 일에 들어간 비용과 노력을 인정해서 인센티브를 줬다.
  회사규정이나 운영이 비합리적이고, 상벌제도가 엄격하지 못하면, CEO는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2. 열정
  열정을 가지고 일 자체를 좋아해야 한다. 남이 못하는 일을 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그로 인한 성취를 즐기다 보면, 돈은 자연히 따라붙는다.
 
  3. 치밀한 분석과 규정준수
  치밀하게 시장을 분석하고,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법규와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법규와 규정을 준수할 때 직원 등 남들 앞에서 떳떳하고 자신감이 생긴다.
 
[최신 중국정보] 광서북부만개발구 진출 유망업종   
 중국정부는 廣西北部灣(광서북부만: 중국-베트남 접경의 움푹 들어간 바다) 지역을 창장삼각주, 주장삼각주, 보하이만경제권에 이은 연해지역의 4번째 경제성장축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개발계획의 핵심 내용은 이 지역을 물류 거점과 외자기업 투자유치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반적인 한계가 있지만 이 지역의 자원과 입지, 발전가능성을 고려한 선별적인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계속
朴商見 북경세농종묘 총경리

   ‘바이위춘(白玉春)’‘자오춘(朝春)’으로 중국 채소종자 시장 석권     

중국 最大 규모 현지 연구소에서 세계적 수준의 채소종자 생산
“눈높이 낮추고 원칙을 지키는 正道경영 해야”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박상견 북경세농종묘 총경리.
 한 번 가정해 봅시다. 한국에 김치공장이 있어요. 세계화니 뭐니 하며 중국 시장 진출 계획을 세우겠죠. 그리고 경영진에서 ‘한 말씀’이 나옵니다. ‘인구가 13억인데 한 사람당 한 포기만 해도 13억 포기’라고요. 그런 생각으로 준비 없이 중국에 진출합니다. 결과는 뻔하죠. 망합니다. 문제는 한국인의 90%가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중국에 온다는 겁니다.”
 
  朴商見(박상견) 북경세농종묘 총경리는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준비 부족’을 꼽았다.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하면 무조건 실패합니다. 김치 한 포기가 한국에서 100원이라면, 중국 소득수준에선 10원에 팔아야 해요. 일단 매출에서 13억 포기가 아니라 1억3000만 포기로 줄어들죠. 더 중요한 사실은 대다수 중국인이 김치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는 “중국을 쉽게 보는 한국인들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며 “중국 시장뿐 아니라 문화 전반과 정치 배경 등에 대한 정확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북경세농종묘는 한국의 대표적 종묘회사인 농우바이오의 중국 현지법인이다. 韓中(한중) 수교 직후인 1994년 중국에 진출해 15년 만에 중국 종자시장에서 ‘큰손’으로 인정받는 등 독보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세농이 내놓은 ‘바이위춘(白玉春)’이란 이름의 무 종자는 중국 최고 명품종으로 손꼽힌다. 중국 ‘고급 무의 대명사’로 불리며 베이징, 톈진, 칭다오 등 중국 전역에 공급되는가 하면, 일부는 한국과 일본으로 수출된다. 산둥(山東)성 곳곳의 재래시장에서는 ‘무’란 이름 대신 아예 ‘바이위춘’이란 이름을 쓸 정도다.
 
  당근 교배종 시장도 점령했다. ‘자오춘(朝春)’이란 이름의 종자는 기존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종자를 3년 만에 따돌리고, 현재 70%에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베이징연구소, 단일면적으론 중국 最大 규모
 
중국 교배종 종자 시장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세농종묘의 대표 종자들.
  중국 채소종자 시장 규모는 한국의 2배인 약 2억 달러에 달한다. 13억 인구 중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국토면적은 남한의 97배다. 최근 중국의 농업분야 투자가 가속화되면서, 종자의 시장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회사는 지난해 신사옥 건축을 완료했다. 베이징(北京) 외곽의 다싱(大興)구 생물의약기지에 대지 1만7820㎡에 총 건축면적 4125㎡ 규모로 사옥을 완공해 본격적인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현재 진행 중인 3200㎡ 규모의 물류창고 공사가 완료되면, 중국 채소종자 시장 진출의 주요 거점이 될 전망이다.
 
  연구 활동도 함께 진행됐다. 단일 면적으론 중국 최대인 15만㎡ 부지에 120개의 비닐하우스와 연구소 건물이 들어서 중국 북방·중부권 지역용 종자 개발이 한창이다. 2007년 광둥(廣東) 지역에 세워진 7만3920㎡의 연구소엔 40개의 비닐하우스에서 중국 남방권 종자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130만 달러로 시작한 자본금은 어느새 900만 달러로 늘어났고, 매출도 7000만 위안(한화 약 14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전체 매출 중 100억원이 중국 내수에서 발생한다.
 
  박상견 총경리는 2003년 6월 베이징 부총경리로 발령받았고, 6개월 후 총경리가 됐다. 중국어 한마디 할 줄 몰랐던 그는 밤낮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아무리 늦은 술자리가 있어도 매일 오전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중국어를 배웠고, 3년 동안은 주말에도 항상 사무실에 출근했다.
 
  “지금은 휴일이면 가끔 쉬기도 하지만, 매일 아침 사무실 문을 따는 사람은 여전히 접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했죠.”
 
 세농종묘는 베이징 다싱구 생물의약기지에 총 건축면적 4125㎡ 규모로 신사옥을 완공해 본격적인 중국 시장 공략을 시작했다.
  ― 직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종자는 농민의 한 해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클레임이 걸리면 10배 이상 피해를 보기 때문에 철저한 확인 점검이 생명입니다.”
 
  실제로 종자를 구입한 농민이 수확이 좋지 않아 항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사를 해 보면 종자에서는 전혀 문제가 발견되지 않지만, 농민들은 일단 지방정부에 종자가 잘못됐다고 항의부터 한단다.
 
  “어쩔 수 없이 지방정부에서 조언을 합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면 몇만 위안어치의 농기계나 비료를 사서 도움을 준다든가, 종자를 조금씩 더 주는 방법으로 달랩니다.”
 
  박 총경리는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진 셈”이라며 과거를 이렇게 회상했다.
 
  “2003년 초 사스가 창궐했습니다. 제가 중국으로 발령받기 직전이었는데 그때 직원들이 현지 대리점에 방문조차 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관리는 해야 하니 몰래 다녀오고 그랬습니다.”
 
  현재 중국엔 약 8000개의 종자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종묘기업은 대부분 국영으로 운영되며, 다국적 종묘기업은 10여 개 안팎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자기업이었던 흥농종묘와 서울종묘가 외국계 기업에 인수됨에 따라, 세농종묘는 사실상 유일한 중국 진출 한국 종묘기업이 됐다.
 
 
  가장 큰 敵은 편법과 불법
 
세농종묘 베이징연구소 이인복 소장이 토마토 상품을 살펴보고 있다.
  “어느 분야나 그렇겠지만, 중국 종자 시장은 사실상 전쟁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어요. 세계 각국에서 달려와 경쟁을 하고 있으니까요. 마치 수십 년 전 일본이 한국에서 종자 사업을 한 것과 비슷하죠. 얼마 전까진 일본 종자 기술이 한국보다 10배 앞섰고, 한국 종자 기술이 중국보다 10배 앞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속도라면 중국 종자 기술이 한국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 한국은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지금 외국에서 수입되는 농산물의 관세가 250~450% 정도 해요. 그렇게 걷은 세금으로 농민들을 해외로 진출시켜야 합니다. 갈 곳은 얼마든지 많아요. 지리적으로 가까운 몽골, 중국, 러시아 등은 외국인이 땅을 임차할 수 있습니다. 경쟁력 있는 우수한 종자를 가져다가 농사를 지어 한국에 보내거나 수출하면 되죠. 무조건 시위한다고 지원만 할 것이 아니라 외국으로 진출하려는 농민들을 지원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박 총경리는 종자산업은 단순히 종자만 팔고 끝나는 게 아니라 농산품 시세 파악부터 판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접목해야 하는 3차원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판촉과 기술지도 등 서비스를 거쳐 판매가 이뤄지고, 수확 후엔 농산물을 유통하고 품질관리를 하는 등 종합 서비스가 이뤄져야 한다.
 
  “종자의 생명은 보안이에요. 기술 유출이 가장 큰 적입니다. 그만큼 해외에 나와서 연구를 하려면 철저하게 관리하고 감독해야 합니다.”
 
  박 총경리가 중국 사업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원칙’이었다.
 
  “사업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일부 중국인들이 불법을 유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큰 건수가 걸리면 신고한다고 협박을 하기 시작하죠. 만약 진짜로 신고를 하게 되면 회사 자산보다 많은 벌금이 나와요. 그러면 어떡하겠습니까. 회사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죠.”
 
  채무관계도 정확하게 이뤄져야 한다. 편법적인 거래를 하다가 돈을 못 받고 나간 기업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처음 중소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면 서로 세금계산서를 발급하지 않고 거래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물건은 받았는데 돈을 안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호소할 곳도 없고, 너무 답답해지죠. 1원 한 푼 쓰더라도 세금계산서를 쓰는 게 제 원칙입니다.”
 
  박 총경리가 부임한 후 28명이던 직원 수가 98명으로 늘어났다. 인재가 있어야 회사가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부임을 하자마자 그가 찾은 곳은 유명 농업대학들이었다. 세농종묘 최초로 공채 제도를 도입해 조선족과 한족 직원을 뽑았고, 사원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연수교육을 시행하는 등 적극적인 인재육성 정책을 펼쳤다.
 
  “매년 10명씩 공채를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키워놓으면 결국 삼성, CJ, 현대와 같은 대기업으로 떠나가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다시 뽑아서 가르쳐야죠. 중국 농업 분야에서 최고로 키워주겠다고 하고 가급적 남으라 합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죠.”
 
 
  눈높이 낮추고 현지화해야
 
박상견 총경리가 항온항습 종자 창고를 둘러보고 있다. 이 창고는 250t의 종자를 보관하고 있다.
  박상견 총경리는 2006년 소비자 신뢰 농산품 브랜드상을 받았고, 2007년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중국 농업경제인 10대 인물에 선정됐다. 농업부와 농업대학, 농촌잡지사에서 중국의 정책목표인 신농촌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2년에 한 번씩 중국 농업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을 뽑아 시상하는 프로그램이다.
 
  장학재단을 통한 인재 양성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1년에 2000만원을 장학금으로 조성해 농업대학과 중고등학교 학생 40명에게 제공한다. 박 총경리는 “이 정도 장학금은 대기업 입장에선 푼돈일지 몰라도, 세농과 같은 규모의 기업에선 이런 사업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한국의 농민단체와 농업 전공 학생들의 방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성적이 우수한 농업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을 선발해 2차에 걸쳐 회사를 방문했다. 박 총경리는 그날 방문한 학생들에게 “한국 농업이 어렵고, 농업고를 다니는 것은 더 어렵지만, 한국에서만 싸울 것이 아니라 눈을 더 크게 뜨고 해외로 나가라”며 격려했다.
 
  박 총경리는 “중국에서 사업하려는 최고경영자라면 업무 능력뿐 아니라 현지인들이 배울 수 있는 도덕적 존경심까지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보다 진심으로 일하는 직원이 필요합니다. 중국은 특히 리더가 모범을 보여야 해요. 조금만 빗나가면 바로 떠나가 버리는 곳이 중국입니다.”
 
  박 총경리의 휴대전화엔 약 500개의 전화번호가 입력돼 있다. 그중 400개가 중국인이다.
 
  “많은 사람이 ‘관시(關係)’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깊은 신뢰가 먼저 형성돼야 해요. 중국인들, 같이 술 먹을 땐 ‘하오 펑유(好朋友·좋은 친구)’라며 좋아하지만, 나중에 뭐 가지고 가서 부탁하면 바로 선을 그어버립니다. 그만큼 진실한 관계가 요구되는 곳이죠.”
 
  박 총경리는 한국인이 먼저 중국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수준인 나라에 2만 달러 기준으로 덤벼들어선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눈높이를 중국인 수준에 맞춰야 합니다. 얼마 전 베이징 대학의 한 중국인 교수가 이렇게 중국인을 분석했습니다. ‘창의성과 책임감이 부족하고, 게으르다’고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네들의 눈높이에 맞는 현지화된 전략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 박상견 총경리가 전하는 중국 성공 비결
 
  ㆍ철저히 준비하라. 13억 시장은 아무에게나 움직이지 않는다.
 
  ㆍ원칙을 가지고 正道(정도) 경영을 하라.
 
  ㆍ한국식으로 판단하지 마라. 눈높이를 낮추고 현지화하라.
 
  ㆍ‘관시’는 술 몇 잔 함께 먹는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다.
 
  ㆍ중국인들은 감성적이다. 그들의 마음을 건드려라.
 
朴顯淳 인터바스 대표    제품이 아니라 ‘한국의 디자인’을 판다     

중국의 욕실용품시장 선두주자
2003년 중국 진출, 직영점 3곳과 베이징, 난징, 칭다오 등 10여 곳에 전시장 개설.
   

 金南成 月刊朝鮮 기자 (sulsul@chosun.com

박현순 인터바스 대표.

 흰색 일색이었던 중국 화장실에 꽃을 입히고 있는 한국 기업이 있다.
 
  중국 상하이 푸둥신구 ‘홈마트’ 진슈(錦秀)점. 중국 업체인 백연그룹이 운영하는 이 대형마트는 주택용품 전문 상가다. 상하이에만 16개 체인이 있는 대형 마트 1층 한편에는 각종 욕실용품을 파는 점포들이 몰려 있었다. 일본, 독일, 미국, 중국 브랜드들이 양변기, 세면기, 욕실타일, 거울, 욕실 액세서리를 진열해 놓고 중국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하얀 광채를 번쩍이는 제품들 사이에서 마치 꽃가게를 연상시키는 점포가 눈에 띈다. 홈마트를 찾은 중국 고객들도 신기한지 연방 발걸음을 이 점포로 옮겼다. 가까이서 보면 꽃가게가 아니라 한국 욕실 브랜드인 ‘인터바스’다.
 
  다른 브랜드 제품들과 달리 인터바스 욕실제품들은 각종 꽃과 식물 문양이 새겨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꽃집인 것처럼 보였다.
 
  朴顯淳(박현순·50) 동원세라믹 대표는 “욕실용품은 흰색인 게 당연하다는 중국 시장에서 이제 흰색은 촌스럽고 단순하다는 생각이 일고 있다”며 “저희 인터바스가 지난 6년간 중국에 진출해서 변화시킨 결과”라고 말했다. ‘인터바스’는 동원세라믹의 욕실용품 브랜드 이름이다.
 
 
  절수형 양변기 국내 최초 생산
 
화려한 디자인으로 중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인터바스 제품.
  박현순 대표는 욕실 브랜드 ‘인터바스’(interbath)를 2003년 중국에 진출시켰다. 국내 욕실용품 브랜드로서는 최초다. 지난 1994년부터 국내에서 위생도기(양변기, 세면기)를 생산해 온 박 대표는 우리나라 위생도기 분야의 전문가다.
 
  지난 1986년 타일 제품을 생산하는 동원세라믹을 설립한 박 대표는 1980년대 말에 태국에 양변기 공장을 설립했다. 저렴한 태국 노동력을 이용해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 형태로 국내에 양변기를 팔았다. 그러던 중 당시 국내 양변기 제조 업체들이 절수형 양변기를 제조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자신이 개발에 나섰다.
 
  “당시 그린라운드 여파로 에너지, 환경문제가 큰 이슈였어요. 국내에서도 節水(절수), 節電(절전) 운동이 일고 있었죠.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등에서는 절수형 기능 제품이 대세였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절수형 양변기를 못 만들더군요. 그래서 우리 회사가 국내 최초로 절수형 양변기를 생산했습니다.”
 
  기존 양변기가 한 번에 물 13리터를 사용하던 것에 비해, 그가 만든 절수형 양변기는 한 번에 6리터로 대소변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공로로 환경마크협회로부터 국내 업체 최초로 그린마크를 얻었다.
 
  이후 양변기 사업은 순풍의 돛 단 형세였다. 창업 8년 만에 강서구 화곡동에 5층 사옥을 지었다. 화곡동은 그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다.
 
  “제가 대학을 중퇴하면서 타일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어 화곡동 부모님 집 옆의 신문 보급소 골방에서 전화기를 놓고 사업을 했어요. 그 신문보급소 땅을 사서 그 자리에 사옥을 지었습니다. 부모님이 돈이 없어 대학도 중퇴하고 사업하는 아들 걱정에 밤잠을 못 주무셨어요. 사옥을 짓고 나니 불효를 조금이나마 던 것 같아 너무 기뻤습니다.”
 
 
  욕실에 디자인을 입혀라
 
화려한 디자인으로 중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인터바스 제품.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양변기 사업은 한계가 보였다. 그는 욕실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이때 인터바스 브랜드를 만들었다.
 
  “1990년 후반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화장실이 단순히 생리작용을 처리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공간이라는 개념이 퍼졌습니다. 저는 당시 몇몇 분들과 함께 ‘아름다운 화장실 만들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화장실은 문화가 있는 곳입니다. 문화는 디자인과 공간의 효율성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인터바스 브랜드를 만들고, 욕실제품 하나하나를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만들었어요. 제 콘셉트가 ‘보여주고 싶은 화장실’이에요.”
 
  인터바스 제품은 양변기, 세면기, 거울, 타일, 액세서리, 커튼지까지 수공업으로 생산하고 있다. 인터바스 제품이 출시되면서 우리나라 욕실문화도 바뀌기 시작했다. 욕실에 각종 스티커를 붙여서 멋을 내던 주부들이 인터바스 제품으로 욕실을 변화시켰다. 인터바스는 2000년 초까지 전국에 70여 개의 매장을 열었다. 주요 욕실 박람회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중국 진출도 박람회에서 결정됐다.
 
  “2002년 상하이에서 세계 최대 욕실 박람회가 열렸어요. 저희가 참가를 했는데, 세계 바이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일본, 미국에서도 평가가 좋았지만, 중국 바이어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어요. 욕실용품 디자인이 마치 명품 여성복 같은 것에 놀란 거죠. 수많은 중국 바이어가 우리 제품을 산다고 계약했습니다. 나중에는 워낙 물량이 많아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어요.”
 
 
  가장 잘하는 걸 더 잘하면 중국서 성공
 
  박현순 대표는 지난 2003년 중국 상하이에 인터바스 상하이를 설립하고 공장을 지었다. 상하이에 직영점 3곳을 운영하고, 베이징(北京), 난징(南京), 칭다오(靑島) 등 10여 곳에 인터바스 전시장을 만들었다. 직영점뿐만 아니라, 다른 욕실제품을 하는 가게들에도 인터바스 제품을 공급한다. 매출이 늘면서 상하이 공장으로 부족해, 2006년에는 광둥성(廣東省)에 공장을 하나 더 지었다. 그는 향후 5년 내에 중국 20여 개 도시에 약 150개의 인터바스 전문매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현재 중국 욕실제품 시장에 인터바스를 모방한 제품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모방하라고 놔둡니다. 기존의 흰색 일변도 제품에서 저희가 주도하는 디자인 제품이 대세가 되면 차이가 더 커지거든요. 그리고 중국 회사들이 아무리 따라 해도 우리 인터바스 디자인팀의 노하우를 따라잡을 수 있는 실력이 안돼요. 우리는 매일 수십 가지의 디자인을 만들고 다듬고 있어요.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화곡동 본사에서 디자인 회의를 직접 주재합니다.”
 
  ―중국에서 이제 걸음마 단계인데 성공을 확신하십니까.
 
  “중국에 진출한 지 6년 됐는데요. 중국에서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은 하나의 차이가 있더군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더 잘하려고 노력한 기업은 성공하고, 그걸 안 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린 기업은 실패했어요.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을 가장 열심히 하니까 성공의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柳基善 AIT소프트 사장    “대기업 위주 마케팅으로 중국 소프트웨어 시장 파고들어”     

 홈페이지 제작으로 출발, 인사관리 물류관리 프로그램 개발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중국의 속도(中速)’에 맞춰야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유기선 AIT소프트 사장.

 2001년 2월 어느 날, 베이징(北京) 도심의 한 벤치에 앉은 柳基善(유기선) 사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빈털터리 신세에 몇 없던 직원마저 떠나버렸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아내와 자녀까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힘으로 중국에서 IT산업으로 성공하겠다던 그의 꿈은 창업 6개월 만에 찬 겨울바람에 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흩어져 가고 있었다.
 
  유 사장은 ‘행운의 날’이라 불리는 2000년 8월 8일, ERP(全社的 자원관리) 시스템 개발을 목표로 직원 7명과 함께 회사를 창업했다. 자본금은 15만 달러(당시 한화 약 1억6000만원). 한 전자기업과 자동차기업의 ERP 구축을 계약해 비전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기술적 문제로 시스템 구축에 실패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이 됐다. 두 번의 실패는 곧바로 계약 취소로 이어졌다. 6개월 동안 일이 단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본금은 어느새 증발했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그는 매일 술로 밤을 지새웠다. ‘차이나 드림’은커녕 만신창이 신세가 된 그는 결심했다.
 
  ‘중국에서 시작했으면 중국에서 끝을 본다. 한국엔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시작하자. 쉬운 것부터 도전하자.’
 
  2009년 7월 현재, 그의 회사 ‘AIT소프트’는 직원 100명에 R&D(연구개발) 자회사까지 둔 强小(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2001년 年(연) 3억원(한화)에 불과하던 매출액은 60억원 규모로 불어났고, 삼성, 현대, LG, SK, 포스코, 롯데, 두산, 대한항공 등 국내 대기업 중국 현지 법인들이 AIT소프트에서 개발한 인사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무조건 대기업하고만 거래”
 
  “김 기자, 지금 보니 사용하는 노트북이 ‘레노버’네요. 그 회사 기술지원 부문 인터넷 홈페이지를 저희가 제작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던 중, 유기선 사장이 필자의 노트북 상표를 보고 꺼낸 말이다. 레노버(롄샹·聯想)는 중국 최대의 PC 기업으로, 2006년 미국 IBM의 PC사업부를 인수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모았다. 유 사장이 내놓은 회사 소개 파일엔 한국 대기업은 물론 레노버, 하이얼 등 중국 대표기업과 소니, HP, IBM, 오라클, 지멘스 등 세계 유명 IT 기업들의 로고가 보였다. 모두 AIT와 파트너십 또는 고객관계를 유지하는 회사들이다.
 
  유기선 사장은 AIT의 성공 요인을 묻는 말에 ‘대기업 고객 확보를 통한 브랜드 가치 성장’을 꼽았다.
 
  “무조건 대기업하고만 일을 했습니다. 중소기업은 연락이 와도 계약을 안 했어요. 중소기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유 사장은 소프트웨어 시장의 경우 대부분 비전문가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품질과 서비스는 물론 브랜드 파워까지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사관리 시스템을 구매하는 대기업 인사담당자가 프로그램의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따져서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품을 설명할 때 ‘삼성, LG, 현대에서 사용한다’고 말하면 일단 신뢰가 갈 수밖에 없어요.”
 
  ― 처음부터 대기업과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전 직장 선배와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죠. 첫 프로젝트는 제 첫 직장인 LG와 시작했습니다.”
 
  유 사장은 1964년 김천 출생으로, 고려대 통계학과를 졸업한 후 1990년 LG생활건강에 입사했다. 화장품 영업을 담당했던 그는 1996년 LG그룹에서 개최하는 ‘스킬올림픽’에 출전했다. 전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그룹 내 200여 개 영업팀이 경쟁한 이 대회는 유 사장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중국 항저우(杭州)에 파견돼 1년 동안 TF팀을 이끈 그는 ‘국소우위 전략을 통한 중국 시장 선점 및 활성화’란 주제로 도전해 대상을 수상했고, 수상 직후인 1997년 1월 1일 베이징 영업책임자로 발령을 받았다.
 
  그가 맡은 역할은 각 지방을 다니면서 대리점을 개설하는 업무였다. 칭다오(靑島)에서 하얼빈(哈爾濱)에 이르는 북부 지역을 담당했다. 유 사장의 말이다.
 
  “원래 ‘상 받으면 망한다’고 그러잖아요. 처음엔 좋았는데, 1999년부터 일이 잘 안 풀렸습니다. 반품은 자꾸 들어오고, 매출 목표도 줄었죠. 영업도 잘 안됐습니다.”
 
 
  창업 6개월 만에 모든 것 잃어
 
유기선 사장이 회사 창문에 걸린 ‘2010년까지 상장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결국 본사에서 문책성 발령이 내려졌다. 서울로 복귀하라는 것. 유 사장은 중국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지금 서울 가서 뭐 하겠나’라는 생각에 복귀 대신 사표를 냈다.
 
  “사표 쓸 때가 2000년 6월이었습니다. 그만두고 나서 배수의 진을 쳤죠. 창업 준비를 위해 중국에 있던 아내와 아들을 모두 한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가장 큰 실수였어요. 힘들수록 가족은 더 가까이 둬야 하는데 말입니다.”
 
  LG를 그만둔 지 두 달 후, 가족까지 귀국시키고 창업을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ERP 프로그램을 들여와 중소기업에 재판매하는 영업을 했는데, 무엇보다 유 사장 본인부터 IT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다.
 
  “화장품이나 IT제품이나 영업의 본질은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습니다. 화장품은 실물이 있으니 고객에게 뭔가 보여주면서 설명이라도 할 수 있죠. 그런데 ERP 시스템은 실물이 없으니 보여주기가 애매한 겁니다.”
 
  결국 회사는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나마 몇 개 추진하던 프로젝트도 기술력 부족으로 중지됐고, 잔금을 못 받아 회사 운영 자체가 어려웠다. 6개월 동안 자본금을 모두 잃고, 직원 7명 중 6명이 회사를 떠났다.
 
  “밑바닥까지 가니까 잃을 게 없더군요. 다시 각오를 다졌습니다. 가족 없인 더 어렵겠단 생각이 들어 한국으로 돌아간 가족들을 다시 베이징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어려운 ERP 영업은 접고, 쉬운 것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바로 홈페이지 구축이었죠.”
 
  첫 프로젝트는 재생 스티로폼으로 액자를 만드는 소규모 회사의 홈페이지 구축이었다. 학교 선배인 회사 대표가 “놀면 뭐하냐, 홈페이지나 하나 제작하라”며 준 일이었다. 비용은 인민폐 5000위안, 당시 환율로 한화 60만원 정도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슬슬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회사 브랜드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를 따 오는 것이었다.
 
  “예전 직장인 LG에 다시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출장 나온 선배와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선배가 만신창이가 된 제 모습을 보곤 ‘너 밥은 먹고사냐’면서 도움을 줬습니다.”
 
 
  홈페이지 제작사업 성공
 
유기선 사장(왼쪽)의 AIT는 지난 7월 7일 중국 3대 국영 소프트웨어 인프라 기업인 랑차오와 인사관리시스템 E-매니저 3.0에 대한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유 사장이 옛 직장 선배로부터 얻어낸 프로젝트는 ‘LG화학 홈페이지 中文(중문)화 작업’이었다. 그의 ‘대기업 전략’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LG화학 홈페이지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중국 곳곳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LG전자, LG산전, LG일용화학을 거쳐 LG그룹사 중문 웹사이트 유지·보수건까지 수주했습니다. 이렇게 LG그룹사 일을 도맡아 하자 포스코, 대한항공과 같은 다른 대기업들의 프로젝트도 들어오기 시작했죠. 지금 중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의 중문 홈페이지 중 AIT의 손을 안 거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LG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긴 했지만, 결국 다 잃으니 LG밖에 없더군요.”
 
  도메인 주소도 그의 전략에 큰 도움이 됐다. 대기업의 경우 ‘○○○.com.cn’과 같은 중국 도메인을 미리 확보해 도메인을 무료로 제공하는 조건으로 홈페이지 프로젝트를 따내는 방식이었다.
 
  2002년, 홈페이지 제작 및 운영을 통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유 사장은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첫 과제는 ‘i-DRP’란 이름의 물류관리 시스템이었다. 판매와 주문, 재고, 마케팅 비용 등 물류관리 전반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판매 원가를 감소시켜 주는 프로그램이다.
 
  “솔직히 기술력도 없고, 경험도 없었습니다. 거의 첫 수주업체인 LG생활건강 본사에서 나온 프로젝트 매니저(PM)에게 배우다시피 하면서 만들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개발한 i-DRP는 AIT와 유기선 사장에게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물류관리 시스템 개발에 성공한 AIT는 ‘E-매니저 PR’이란 인사관리 시스템에 도전했다.
 
  중국에 진출한 대기업들이 한국에서 쓰던 인사관리 시스템을 그대로 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개발해낸 이 시스템은 중국인 직원이 대부분인 재중 한국기업의 인사, 급여, 근태, 평가, 교육 등 현지에 꼭 맞는 서비스로 큰 호응을 얻었다. 현재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70% 이상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대기업 시장 개척에 나서
 
  AIT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은 E-매니저 시스템도 철저하게 대기업 중심 전략을 펼치고 있다. 유 사장은 “배가 고파도 끝까지 중소기업 고객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 대기업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면서 “‘E-매니저를 쓰는 기업은 곧 세계적인 기업’이란 이미지를 심기 위해 브랜드 관리에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AIT는 사실상 한국 대기업들이 키워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기업들에게 돈 받고, 교육을 받아 가며 제품을 만들었으니까요. 아무 것도 없었던 저희가 야단맞고 배우면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직원들이 중소기업 프로젝트도 하자고 했지만 끝내 거절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하라’고 말입니다.”
 
  존폐 위기를 기적적으로 넘긴 후에도 어려움은 여전했다. 첫 난관은 E-매니저 2.0을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지주회사를 기준으로 개발한 신버전 제품이 막상 공장에 배급된 후 적용이 잘 되지 않은 것이다.
 
  “지주회사는 전체 직원은 몇 명 안되는데 인사 담당자만 6~7명 있습니다. 그 환경에 맞게 2.0 버전을 개발했죠. 그런데 공장은 300~400명 직원에 인사 담당은 고작 한두 명입니다. 너무 높은 버전으로 개발돼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죠.”
 
  개발 도중 돌발변수가 많아 프로젝트 마무리가 지연되는 경우가 잦았다. 수금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자금 사정이 크게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스(SARS)까지 찾아왔다. 지방에 파견됐던 직원들이 사업장을 두고 회사로 돌아와야 했다.
 
  “한 3개월 동안 직원 봉급을 못 줬습니다. 회사는 커져서 인건비는 늘어나는데 악재가 겹치니까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했죠. 돈이 들어오면 1차로 신입사원, 2차로 과장 이하, 3차로 부장급…, 이런 식으로 해결해 나갔죠.”
 
  수차례 위기를 이겨낸 유 사장은 중국 대기업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실상 독점이나 다름없는 한국 기업의 인사관리 시스템 시장에선 더 이상 성장의 기회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중국 3대 SI(소프트웨어 인프라) 업체 중 하나인 랑차오(浪潮)와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랑차오의 대형 ERP가 중국 각 기업에 보내질 때, AIT의 E-매니저가 함께 제공되는 내용이었다. 중국 기업들이 외국의 시스템을 잘 사용하지 않는 현실에서, 랑차오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한 중국 우회진출 전략을 추진한 셈이다.
 
 
  “중국의 속도(中速)에 맞춰라”
 
AIT소프트 직원들. 왼쪽부터 유미란 과장, 류샤 관리부장, 왕위안 디자인부장, 최영순 사원.
  유 사장은 성격이 급하고 말도 거친 편이다. 직원들에게 지시를 한 후, 시간 안에 일을 못 끝내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잠시도 전화기를 놓지 못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인터뷰가 몇 번이고 중단됐을 정도다.
 
  유 사장은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성격은 급해도 절대 조급해 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한국인 성격이 급한 편이잖아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최근 중국에 진출한 후배분들을 보면 빨리 결과를 내려고 하는데, 쉽게 되지 않습니다. 세부적인 일을 할 땐 급하게 진행하더라도, 장기적 비전은 조금 여유를 두고 기다릴 필요가 있어요. 저라고 고속성장 안 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중국은 일단 ‘高速(고속)’이 아니라 ‘中速(중속)’입니다. ‘중국의 속도’에 맞출 필요가 있어요. 중국에선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자가 결국 성공합니다.”
 
  유 사장은 한국 기업의 월등한 기술력도 때론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했다. 중국 시장에 맞지 않는 너무 앞선 기술을 가져왔다 실패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시장의 눈높이와 시점에 맞는 제품을 공급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T는 계열사를 포함한 120명 직원 중 한국인은 유기선 사장이 유일하다. 조선족 직원도 10% 정도다.
 
  AIT 사무실엔 오전 8시30분 출근 시각이 되면 음악이 들려온다. 점심시간 퇴근 때도 마찬가지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야근이 빈번한 업계지만, 유 사장은 가급적이면 6시 정시 퇴근을 강조한다. 주말도 충분히 쉬라고 한단다. 개발자들이 기술력만 키우고 일만 열심히 하는 것보단 문화생활을 하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이유다.
 
  “고객과 만났을 때 회사 기술 이야기 30분 하는 것보다 시사나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교양을 키워야 해요. 얼마 전 全(전) 직원에게 책을 사서 몇 차례 돌린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책을 선물할 계획이에요. 기술은 계속 빠른 속도로 진보하게 마련이고 그에 맞는 새로운 인력들이 계속 키워집니다.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교양과 지식을 갖춰야 해요. 죽어라고 일만 해선 남는 게 없습니다. 매일 밤새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직원을 가족같이 대한다
 
  유 사장은 직원들에게 “개발업무는 5년 이상 하지 마라”고 강조한다. “업무 프로세스만 전문화하면 개발은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다”며 “개발에만 전념하기보단 컨설팅 전문가가 돼라”고 교육한다.
 
  AIT는 젊다. 유기선 사장을 제외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직원이 37세다. 대부분 20~30대로 활기가 넘친다. 왕위안(王沅) 디자인부장은 “AIT에서 일하는 동안 ‘도전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중국인들보단 한국인들이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을 느낍니다. 회사 경영 방식도 일관성이 있고, 목표에 대한 추진력도 강합니다. 다만 중국 문화를 잘 몰라 고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국 시장과 문화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한 후 도전한다면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류샤(劉霞) 관리부장은 AIT의 성공 요인을 ‘유기선 사장의 추진력’이라고 분석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고,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의식을 전 직원과 함께 공유했다고 한다. 조선족인 兪美蘭(유미란) 과장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진짜 가족같이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해서 직원을 뽑을 때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광고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회사들이 많아요. 입에 발린 이야기만 하고, 못 지킬 약속을 하는 경영인들이 많습니다. 중국은 한 번 신용을 잃으면 끝입니다. 믿음 없인 직원들이 따르지 않아요. 하지만 유기선 사장은 저희를 끝까지 믿고 맡깁니다. 중국인 직원들에겐 그만큼 큰 힘이 됩니다.”
 


  ▣ 유기선 사장이 제안하는 중국 성공 비결
 
  ㆍ‘중국의 속도’에 맞춰라. 중국은 기다리는 사람이 성공한다.
 
  ㆍ중국인 직원을 전방위 전문가로 키워라.
 
  ㆍ‘관시’와 돈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원칙으로 해결하라.
 
  ㆍ목표를 확실히 잡고 한 우물을 파라.
 
  ㆍ가족과 떨어지지 마라. 힘들 때 의지할 곳은 가족뿐이다.
 

辛子相 북경 愛江山 사장   

“세계의 상류층이 韓食 즐겨야 ‘韓食의 세계화’가능”  

金南成 月刊朝鮮 기자 (sulsul@chosun.com

 신자상 애강산 대표.

 흔히 손님 많은 음식점에 가면 한마디씩 한다. ‘음식점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네.’베이징에 있는 한국음식점 ‘愛江山(애강산)’은 1·2호점 합쳐 올해 예상 매출액이 160억원이다. 지난 2006년 3월 문을 연 1호점은 주중 약 600여 명, 주말 약 800명의 손님이 몰린다. 이를 돈으로 계산하면 주중에는 하루 매출 2500만원, 주말에는 3000만원이 넘는다. 올해 5월부터 시작한 2호점은 두 달 만에 손익 분기점을 넘었다. 현재 주중 800만원, 주말에는 매출 1000만원을 올린다.
 
  재중국 한인회 송교승 사무총장에 따르면, 베이징을 찾는 한국 기업인, 정치인, 고위 공무원들이 중국인을 접대하기 위해 가장 선호하는 곳이 애강산이라고 한다. 鄭夢準(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 내내 전 세계 축구협회 관계자들과 올림픽 위원회 관계자들을 이곳으로 초대해 식사를 했다고 한다.
 
  한국인들만 애강산을 찾아서는 이 정도 매출을 올리기 힘들다. 辛子相(신자상·59) 사장의 설명에 의하면 전체 손님 가운데 한국 고객의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하고 70%는 중국 고객이며, 나머지 약 20%는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라고 한다.
 
  송교승 사무총장은 “중국 전역에서 한국 음식점으로 이 정도 매출을 올리는 곳은 ‘애강산’밖에 없다”며 “한국 음식점을 중국에서 기업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첫 사례”라고 했다.
 
 
  정자가 있는 한국 시골 풍경
 
애강산 2호점.
  애강산 1호점이 자리 잡은 곳은 베이징 자오양구(朝陽區) 장타이시로(將台西路) 쓰더(四得)공원 한편이다. 이곳은 베이징의 중심이라는 자오양구에서도 교통의 요지 가운데 하나다. 근처에 한국 대사관이 있어 한국인 유동인구가 많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4인조 악단이 국악을 연주하며 손님을 맞았다. 1·2층 합쳐 약 2400㎡(약 800평)인 1호점에는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음식점 내부는 우리나라 시골 풍경을 고급스럽게 옮겨 놓은 듯했다. 음식점 바닥에는 개울이 흐르고, 개울 안에는 고운 자갈이 깔려 있었다. 개울 위에 걸쳐 있는 여러 개의 방은 과거 양반들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던 정자를 떠올리게 했다.
 
  신 사장을 따라 음식점 내부 곳곳을 구경하는데, 종업원들이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종업원들은 잠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현재 애강산 1호점에는 주방 포함 종업원이 약 180명, 2호점에는 120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국 사람 6명과 조선족 3명을 제외하면 모두 한족이다.
 
  ― 종업원들이 친절하네요.
 
  “음식점은 직원 관리가 가장 어렵고 중요합니다. 중국에 있는 음식점들 가 보시면 알겠지만, 직원들이 아직 서비스 마인드가 없어요. 애강산은 단지 뭔가를 먹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저희는 중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음식과 문화, 전통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때문에 직원들이 고객들에게 제대로 서비스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매일 서비스 교육, 언어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어느 종업원이 못한다고 야단을 치는 대신 잘한 종업원을 뽑아서 시상을 하고 상금을 줬습니다.”
 
  ― 종업원들 대우도 좋겠네요.
 
  “베이징에 있는 고급 음식점 가운데 가장 임금이 높습니다. 다른 곳의 두 배 정도 됩니다. 저희는 종업원을 뽑을 때, 인턴으로 뽑아서 잘하는 사람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합니다. 다른 곳보다 대우가 좋으니 정식 직원이 되기 위해 시키지 않아도 잘하게 됩니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방 아래로 개울이 흘렀다. 일행이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서자, 중국인 종업원이 “신발 닦아 드릴까요”라고 우리말로 물어봤다. 신 사장을 쳐다보니 “공짜니까 닦으세요”라며 웃었다.
 
애강산 2호점 내부 모습. 한국 시골 모습을 현대식으로 재현했다.
 
  중국 상류층이 主 고객
 
  신 사장이 건넨 메뉴판에는 한국 음식이 총출동돼 있었다. 등심, 갈비, 삼겹살 등 육류부터 갈치, 조기, 고등어, 도루묵, 구이 등 생선류는 물론 각종 전요리, 탕요리, 김치 종류만 10가지였다. 음식들은 나물 한 종류까지 모두 컬러 사진으로 돼 있어, 한국요리에 익숙지 않은 중국인들이 고르기 쉬어 보였다. 신 사장은 애강산에서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요리 몇 가지를 골랐다.
 
  ‘꽃등심, 양념갈비, 갈치구이, 모둠전, 총각김치, 갓김치, 각종 나물 요리….’
 
  음식 가격이 꽤 비쌌다. 꽃등심(일본 고베産 와규)은 250g이 680위안(약 13만6000원), 생갈비 300g 138위안(약 2만7000원), 갈치구이 두 마리 65위안(1만3000원), 고추전과 해물파전이 각각 78위안(1만5000원), 88위안(약 1만7000원) 등이었다. 모든 음식에는 부가세 15%가 붙는다.   
  ― 가격을 보니 중국에서 잘사는 사람들만 오겠군요.
 
  “저녁에 술 안 마시고 각종 요리를 시키면 대개 1인당 8만~9만원 나옵니다. 술을 조금 마실 경우 한국 강남 고급 일식집 가격이 됩니다. 대개 한국 손님보다 중국 손님의 1인당 단가가 1.5배 이상 높아요. 저희 음식점 뒤에 주차장이 있는데, 중국 고객분들 차 가운데 최하가 아우디입니다.”
 
  ― 음식점이 공원 안에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중국에서는 전체 공원 용지의 4%를 임차할 수 있습니다. 공원을 관리하는 회사는 여기서 나오는 임차료로 공원을 관리하는 거죠. 현재 베이징 전체에 공원이 200여 개 있어요. 애강산 1호점이 있는 사득공원처럼 외부 사업자에게 임대를 해준 곳보다 아직 임대를 안 해준 곳이 많아요. 그런 측면에서 중국 대도시는 고급 음식점 하기에 금상첨화입니다.”
 
  ― 공원에서 부지를 임대해 주지 않았다면 애강산을 열지 못했겠군요.
 
  “2005년에 중국에 놀러 왔다가 공원에 음식점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애강산을 오픈했습니다. 한국은 자기 땅이 없으면 고급음식점을 크게 할 수 없어요. 임대료도 너무 비쌀뿐더러, 큰 땅이 나오질 않고, 지주들이 매년 임대료를 올리는 통에 장사를 못해요. 그런데 중국은 주차장도 공원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어 매우 편해요. 수백 대를 주차해도 자리가 남을 정도입니다.”
 
  신 사장은 공원관리를 맡고 있는 국영회사와 20년 임대계약을 맺었다. 임대료는 평당 우리 돈으로 2만원. 애강산 1호점의 바닥면적이 800평이니, 약 1600만원이다. 임대료는 5년마다 5%씩 올려 주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문화를 중국 主流에 제대로 알리고 싶어”
 
  신 사장은 젊은 시절부터 음식업계에 뛰어들었다. 36세이던 지난 1986년 그는 ‘또순이 순대’라는 브랜드로 전국에 수십 개 체인점을 열었다. 이후 춘천 토속 음식이었던 닭갈비를 전국화한 ‘춘천집’, 1990년대 초중반 대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락카페 ‘고구려’도 그가 만든 브랜드였다.
 
  현재는 한국에서 조선갈비집(분당 율동공원과 의정부 장암동)과 대중 샤부샤부 요리집인 ‘정성본 샤부칼국수’를 운영하고 있다. 정성본 샤부칼국수는 한국에 약 70여 개 체인점과 직영점 3개가 있다. 신 사장은 “음식업을 시작한 후 성공하지 못한 적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고급요리, 대중요리, 서민요리 등 모든 부문에서 성공을 해봤습니다. 이제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하던 참에 중국에 왔어요. 중국 음식을 먹다가 질려서 한국음식점에 갔더니, 이건 더 못 먹겠더군요. 완전히 수준 이하였어요. 처음에는 고급 음식점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는 베이징에서 가장 고급이라는 한국음식점을 찾아갔죠. 그러나 현실은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음식 수준과 종업원 수준이 과거 15년 전 중국에 진출할 때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른 한국 음식점들이 이 집을 모델로 장사를 하고 있으니, 한국 음식은 엉망이라는 편견이 중국에 퍼진 거죠.”
 
  ―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겁니까.
 
  “네. 맛도 맛이지만, 중국의 주류사회에 한국문화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어요. 한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 음식에 담겨 있고, 그 나라 음식을 파는 음식점에서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해외에 가보세요. 한식집들은 말 그대로 食堂(식당)일 뿐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저는 애강산에 들어오면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들이라도, 한국 문화와 전통에 대해 경외심을 갖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신 사장은 지난 2006년 애강산 1호점을 만들 때, 공사비로 1800만 위안을 쏟아부었다. 당시 환율로 약 25억원, 현재 환율로 36억원이다. 건축자재와 인테리어 용품 대부분을 한국에서 공수해 왔다고 한다. 신 사장은 “운 좋게 제 마음을 알아주는 한국 디자이너를 만나서, 그 양반이 하고 싶은 대로 설계와 인테리어를 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중국은 실체가 있으면 인정해 준다”
 
  1호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2호점으로 향했다. 2호점은 베이징의 중심인 海淀區(하이뎬구) 正福寺(정복사) 부근에 있다. 2호점도 1호점과 마찬가지로 공원 한편에 있다. 2호점은 연면적이 약 3300㎡(1000평)로 1호점보다 더욱 웅장하고 고급스러웠다.
 
  실내에만 개울이 있던 1호점과 달리, 2호점은 바깥부터 큰 개울이 흘렀다. 나지막한 돌다리를 건너 입구에 들어서면, 고향 마을에 들어선 것처럼 아늑했다. 1, 2층이 트여 있어 한눈에 볼 수 있고, 어느 좌석에서도 개울을 볼 수 있다. 1층 곳곳에는 정자식 방이 있고 2층에 있는 방도 한쪽이 트여 있어 1층에서 흐르는 개울이 내려다보인다.
 
  ― 1호점보다 투자를 많이 했겠네요.
 
  “1.5배 정도 더 들었어요.”
 
  ― 2호점도 공원에 있는데, 공원땅을 임차하는 데 어렵지 않았나요.
 
  “2호점이 있는 공원 관리국 주임이 1호점을 잘 알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임차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호점 옆에 있는 땅(약 1500㎡·500평)까지 임차해줄 테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어요. 그것도 공짜로 20년간 임대받았습니다.”
 
  ― 과도한 호의 아닙니까.
 
  “중국 사람들은 실체가 있으면 요청을 안 해도 자신들이 먼저 해줍니다. 공원관리국 주임이 저희가 애강산 2호점을 만들 때, ‘1호점의 90% 정도 되겠지’ 했답니다. 그런데 1호점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규모도 커졌습니다.”
 
  신 사장은 고심 끝에 무료로 받은 500평의 땅 위에 야외 웨딩시설을 만들었다. 잔디를 깔고 비가 올 때 접을 수 있는 간이 지붕시설을 갖췄다. 2호점 외부에 별도로 피로연장으로 사용하는 대형 식당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아직 예식장이라는 개념이 없는 탓에, 애강산 2호점의 야외 웨딩시설은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우리 식당 고객들을 대상으로 웨딩 영업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외부에서 너무 호응이 좋은 겁니다. 특히 2호점 공원관리국에서 2호점 옆에 땅이 약 7000평 있는데, 거기에 뭘 해도 좋으니 2호점이나 웨딩시설만큼만 지으라고 하더군요.”
 
  신 사장은 공권관리국에서 받은 땅에 제대로 된 예식장을 짓기 위해 현재 준비 중이다. 그에 따르면, 아직 중국은 예식장이라는 개념이 없고 결혼 관련 서비스가 미비하다고 한다.
 
 
  중국인들, 청국장과 젓갈 좋아해
 
개울이 흐르는 애산강 2호점 모습.
  2호점은 문을 연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1호점보다 한산한 모습이었다.
 
  ― 드라마 ‘대장금’ 등 韓流(한류)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한국 음식의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식의 인기가 식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국뿐만 아니라,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첫째 고급화해야 합니다. 지금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이 불고기, 비빔밥, 기껏해야 떡볶이 정도예요. 이 정도 음식은 누가 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고, 어지간한 사람은 다 먹을 수 있어요. 이런 음식을 취급하는 음식점이 많아지면 한식의 질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 상류층이 한식을 값싸고 그만저만한 음식으로 취급합니다. 어느 사회든 그 나라 상류층이 먹지 않는 음식은 세계화될 수 없어요.”
 
  ― 일본의 초밥이나 우동, 중국의 마파두부 등이 고급 요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일본요리나 중국요리가 각 나라에서 대중화됐죠. 하지만 30년 전에 일본요리가 미국에서 대중요리였습니까? 일본이 경제력이 커지면서 미국 맨해튼, 워싱턴 등지에서 기업가, 정치인들이 서투른 젓가락질을 했기에 고급 요리가 된 거죠. 리딩그룹에서 먹던 고급 요리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고급 참치뱃살 초밥이 캘리포니아 롤이 되고, 수타 우동이 컵용기에 담긴 인스턴트 우동이 됐습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요리, 이탈리아 요리가 처음부터 대중에게 사랑 받았나요? 1960~70년대 李秉喆(이병철) 회장 같은 최상류층이 먹던 이탈리아 요리가 수십 년 흐르면서, 수 많은 파스타집으로 변한 겁니다.”
 
  신 사장은 “모든 음식은 톱 다운(위에서 아래로) 방식으로 퍼지는 것”이라며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한식의 고급화가 절대적”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 한식이 현지화되지 않아 대중화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요리가 ‘조선밥’이라고 부르는 간단한 한정식이에요. 잡곡밥에 청국장, 무조림, 된장찌개, 각종 젓갈과 나물, 김치 등이 세트로 나오는 겁니다. 중국분들이 요리를 다 드시고 반드시 조선밥을 드세요. 전혀 현지화하지 않은, 우리 본래의 식사 메뉴입니다. 한식은 까다롭기 유명한 우리 민족의 입맛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입니다. 이런 음식을 왜 다른 나라 사람들 입맛에 맞춰 바꿉니까. 다른 나라 상류층 입맛이 우리 한식에 길들여지도록 하고, 점차 대중화되면서 현지화하는 게 定石(정석)이라고 봅니다.”
 
  ― 애강산 지점을 계속 열 생각입니까.
 
  “이 정도 규모의 음식점은 저 혼자 경영할 수 없습니다. 자본과 인력이 부족해요. 한식은 문화 자체가 한 상 제대로 차리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형화할 수밖에 없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의 호텔 체인점처럼 하는 겁니다. 즉 대기업이 자본을 대고, 애강산 경영진이 위탁경영 방식으로 경영을 하는 겁니다. 이익은 물론 자본을 많이 댄 쪽에서 가져가고 위탁 경영진은 수수료를 받는 거죠. 힐튼이나 쉐라톤 호텔 체인점 방식이에요. 이 방법이 우리 한식 세계화를 위해서 좋고, 우리 요식업계에도 돌파구가 될 겁니다.”
 

     

李政周 코휘드 사장
방앗간에서 출발, 年 매출 1000억원의 사료기업으로 성장
“우리는 위기를 먹고사는 기업. 사스, 멜라민, 곡물 파동 때마다 서너 배씩 성장”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이정주 코휘드 사장.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에서 선양(瀋陽)으로 가는 고속도로 인근엔 ‘행복촌’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벽돌집과 거친 비포장길, ‘낙후’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 ‘깡촌’에 승합차 한 대가 들어섰다.
 
  먼지 자욱한 곳을 뛰노는 아이들과 카드게임을 하는 남자들의 시선이 금세 집중된다. 빨강과 녹색 무늬의 로고를 단 차는 이들의 관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10여 분을 더 달려 한 양돈장에 도착했다.
 
  ‘紅宇(홍우)’란 간판이 보이는 입구에 金吉東(김길동) 박사와 왕리궈(王利國) 연구원이 차에서 내리자, 쉬싱쿤(徐興坤) 농장장이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각종 건강검사 및 진단장비를 갖춘 김 박사팀은 곧바로 양돈장에 들어가 돼지들의 혈액을 채취하고 백신을 주사하는 등 獸醫(수의) 서비스를 시작했다. 쉬 농장장이 우리 안쪽의 한 새끼 돼지를 지목하자, 이들은 곧바로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바이러스 백신을 주사한다.
 
  한 시간 후, 전체 500마리 규모의 양돈장 점검을 마친 김 박사가 농장장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다며 체크리스트에 서명을 했다. 검사 내내 걱정스러워하던 쉬 농장장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졌다. 중국에서 유일한 현장 수의 서비스팀인 코베트(COVET)의 검증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의 농장은 2년 전부터 서비스를 받기 시작해 약 20%의 생산량 증가를 기록했다.
 
  코베트는 한국인 李政周(이정주) 사장이 세운 사료기업 ‘코휘드(科菲特·Cofeed)’에서 운영하는 수의팀이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회원 농장을 방문해 가축의 건강을 수시로 점검한다. MPT 건강점검 장비를 통해 에너지대사, 간기능 등을 검사하고, 세균성 질병과 전염병에 대한 진단을 시행한다.
 
  이 모든 서비스의 대가는 무료다. 코휘드의 사료를 사용하는 농장은 언제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차별화 서비스를 통해 시골의 허름한 방앗간을 임차해 시작했던 회사는 6년 만에 年(연) 매출 450억원 규모로 고속 성장했다.
 
 
  방앗간에서 시작한 사료회사
 
코베트팀이 젖소의 건강을 체크하고 있다.
  2003년 2월은 이정주 사장에게 잔혹한 시기였다. 큰 꿈을 품고 시작한 영국계 식품회사의 중국 법인장 자리를 뺐겼기 때문이다. 4년 반 동안 적자 상태에 있던 회사에 부임한 직후부터 1000명에 이르는 직원을 해고하고 공장 3개를 문 닫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회사의 경영상황은 정상화됐지만, 중국 측 파트너들과 사이가 벌어졌다는 이유로 그는 2년 만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좌절감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희망이 없었어요. 중국에서 다시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맨손으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죠.”
 
  평생 사료업에 종사했던 그가 다시 선택한 돌파구는 역시 사료였다. 전 직장에서 함께 그만둔 부하직원 두 명이 이 사장과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세 명은 며칠 동안 밤을 새워 가며 사업구상을 했고, 회사의 기본 구조와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던 이 사장은 소유하고 있던 아파트를 팔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금은 인민폐 100만 위안, 당시 환율로 약 1억3000만원이었다.
 
코휘드 코베트(COVET)팀이 양돈장을 방문해 새끼돼지의 혈액을 채취하고 있다.
  창춘 외곽지역의 작은 방앗간을 빌려 공장을 차렸다. ‘규모는 작을지언정 품질은 최고가 되자’는 마음으로 고급 사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첫 달 생산해낸 양돈 사료는 60t, 12명의 직원을 먹여살리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창업과 동시에 위기가 찾아왔다. 사스(SARS·급성호흡기증후군)가 중국 전역에 확산돼 직원들의 이동이 통제됐다. 타 지역 방문이 금지돼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정주 사장과 직원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이동은 주로 감시가 적은 밤에 시행됐다. 차량은 마을 입구에서 모두 막기 때문에, 걸어서 미리 연락해 놓은 장소로 이동해 농민들을 모아 놓고 설명회를 가졌다. 이 사장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두세 달 동안 특수작전을 방불케 하는 영업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모두가 죽는다는 각오로 돌아다녔습니다.”
 
 
  위기 때마다 두 배씩 성장
 
코베트팀의 왕옌팡 연구원이 채취한 혈액으로 실험을 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이 통한 것일까. 한국 기업이 생산한 고급 사료라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생산량과 매출액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수개월이 지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는가 싶더니, 이번엔 경쟁사들의 악선전과 유언비어가 발목을 잡았다.
 
  “‘이제 할 만하다’고 생각할 무렵, 경쟁 업체에서 ‘무늬만 한국 기업’이라며 ‘공장에 직접 가 보라’고 대리점 주인들을 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몇몇 대리점에서 직접 찾아왔어요. 상품은 그럴듯했는데, 공장이 너무 초라했죠. 한 번 방문했던 사람들은 며칠 후 어김없이 연락이 끊겼습니다.”
 
  四面楚歌(사면초가)의 이정주 사장은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대리점이 아니라 최종소비자(엔드유저·end user)를 공략하는 것. 사료의 최종 고객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당시 직접 서비스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없었던 중국 농민들은 이정주 사장의 고객관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당시 직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가축이 고객이다. 가축과 대화하라’고. 대리점 영업이 불가능하니 거꾸로 했어요. 농가를 일일이 방문해 직접마케팅을 펼쳤습니다. (저희의 정성을) 가축이 알고, 또 농민이 아니까, 대리점은 저절로 따라오더라고요. 소비자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물건 안 가져다줄 업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사는 매년 두 배에 가까운 성장을 했지만, 위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정주 사장은 코휘드를 ‘위기를 먹고 사는 기업’이라고 표현했다.
 
  “창업하니 사스가 왔고, 조금 자리를 잡을 만하니 세 차례 곡물파동이 닥쳤습니다. 결정적으로 작년엔 멜라민 파동까지 오더군요.”
 
  ―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어떻게 하긴요. 위기 때마다 두 배로 성장했죠.”
 
  자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매출액과 판매량 통계를 보면 코휘드는 곡물파동이 있었던 2004, 2005, 2008년 2~4배에 이르는 고속성장을 했다. 중국인들이 가축을 파는 시기인 春節(춘절·매년 2월)을 제외하고는 월평균 판매량이 끊임없이 증가했다.
 
  “비결은 품질입니다. 처음부터 위기로 시작했기 때문에 품질관리를 철저하게 했죠. 중국 사료업계 중 최초로 미국 품질사료협회(AAFCO)에 가입했고, HACCP(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을 통과했습니다.”
 
 
  멜라민 파동이 성장의 전기
 
2003년 창업 당시의 방앗간 공장.
  2008년 9월 멜라민 파동이 터졌다. 중국산 분유를 비롯한 각종 유제품에서 멜라민이 검출됐다는 보도가 나온 첫날, 이정주 사장은 밤 11시에 야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미 HACCP 실험실에서 멜라민을 비롯한 중금속, 조섬유, 조지방 등을 검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곧바로 지린성 정부로부터 안전성을 인정받았다. 중국 유제품 관련 기업 중 최초였다. 다른 업체들은 최소 3주일이 걸려서야 기준을 만족할 수 있었다.
 
  곧바로 농가들을 일일이 방문했다. 목장에서 직접 멜라민 수치를 분석하고, ‘코휘드 사료를 먹였는데 멜라민이 검출되면 전액 보상한다’는 내용의 보증서를 나눠줬다. 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대책을 갖춘 덕에 소 사료 생산이 월 5500t에서 한 달 만에 7500t으로 급증했다.
 
  곳곳에서 사료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멜라민이 검출돼 곤욕을 치른 중국 최대 유제품 업체 멍뉴(蒙牛)유업과 곧바로 사료공급 계약을 맺었다. 2009년 3월엔 멍뉴유업의 파트너 중 제1위 기업으로 선정됐고, 이리(伊利)와 이핀(伊品) 등 중국 대형 유업과 합작을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8323만 위안(한화 약 100억원)이던 매출은 2008년 2억2319만 위안(한화 약 450억원)까지 치솟았다. 코휘드는 이 여파를 계속 이어나가 2009년 상반기에 이미 2008년 매출액을 돌파했고, 연말까지 매출 약 5억 위안(한화 약 1000억원)을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위기 때마다 사업장도 계속 확장됐다. 2005년 11월, 창춘 공업단지에 제1공장을 세웠고, 2008년 양돈·수산사료 전문 공장을 건설했다. 현재 공사 중인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치치하얼(齊齊哈爾)시 제3공장은 올해 11월 말 완공될 예정이다. 또 동북3성의 풍부한 사료곡물을 한국의 해외자원 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해외곡물 공급기지’를 건설해 국내 지역 축협과 협력 운영하고 있다.
 
  사료에서 출발한 사업은 어느새 식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인 피-팜(P-Farm) 육가공 공장이 완공되면 고급 브랜드 축산물을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할 예정이다.
 
  공장이 증설될수록 서비스도 확대됐다. 코베트 수의서비스센터를 중심으로 임신진단서비스, 농가기술대학, 양돈대학(100명 참여), 낙농대학(200명 참여), 飼養(사양)전시대회, 韓中(한중) 축산 워크숍 개최, 산학협력 등 다각적인 시스템이 도입됐다.
 
 
  고급 브랜드로 승부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술 세미나를 1년 동안 1000회 실시했고, 연간 1000여 명의 고객이 30회에 걸쳐 회사를 방문했다. 초창기 12명에 불과했던 직원은 6년 만에 220명으로 늘어났다.
 
  이정주 사장의 욕심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2013년까지 하얼빈(哈爾濱)과 선양(瀋陽)에 생산공장을 증설하는 한편, 허베이성(河北省) 탕산(唐山)에 판매기지를 세워 동북3성은 물론 네이멍구(內蒙古) 지역까지 판매망을 넓혀 나갈 계획이다.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연간 사료 판매량은 30만t, 연 매출액은 한화 30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정주 사장은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관시(關係·관계)’보다는 ‘고객관리’가 우선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올해 1월 9일, 400여 개 대리점주들을 모아 사업전진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최고급 호텔의 연회장을 빌려 화려하게 파티를 열고, 우수한 성적을 낸 대리점은 크게 시상을 했습니다. 인센티브를 극대화한다고 연 행사인데, 아마 대리점주들 입장에선 평생 처음 겪어 본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더 큰 계획을 선언했죠. ‘2009년 목표를 달성할 경우, 전세기를 빌려 하이난섬(海南島)으로 단체여행을 떠난다’고 했어요.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아마 2010년 1월에 함께 떠날 것으로 확신합니다.”
 
  중국의 연간 사료 소요량은 약 1억5000만t이다. 사육되는 돼지가 5억5000만 마리에 이르며, 肉鷄(육계)는 35억 마리, 젖소는 1400만 마리다. 사료공장이 약 2만 개 있지만, 대부분 서비스보다는 단순 판매라는 예전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사장의 설명이다.
 
  “핵심은 차별화된 전략으로 현지에서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현지 경쟁 업체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첨단 서비스와 최고급 품질을 제공하는 데 회사의 모든 여력을 재투자하는 것이죠.”
 
  이 사장은 특히 중국 지역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한국인 기업가들에 대해 “조금만 시선을 돌려 더 큰 시장을 보라”며 이렇게 조언했다.
 
  “보통 중국이라 하면 13억명의 거대한 시장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업 구상을 하죠. 자동차, 가전제품, 휴대전화, 금융, 엔터테인먼트 등등….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중국 인구 중 9억명은 농민입니다. 이 넓은 블루오션을 두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실패해 낙담하는 한인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정주 사장이 제안하는 중국 성공 비결
 
  ㆍ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이다. 인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마라.
 
  ㆍ13억 시장만 보고 들어오면 망한다. 충분한 기간을 갖고 준비하라.
 
  ㆍ시간이 필요하다. 조급해지면 惡手(악수)를 둔다.
 
  ㆍ위기 때 가장 크게 성장할 수 있다. 미리 준비한 자에게 위기란 곧 기회다.
 
 

金鍾七 천진온천호텔 사장   

호텔 투숙률 83% 중국 속의 ‘작은 한국’ 만들어  

김종칠 천진온천호텔 사장.

 

 일본에 가면 초밥이 있고 한국에는 불고기가 있듯이, 중국 톈진(天津)에 가면 천진장청온천빈관(이하 천진온천호텔)이 있다. 톈진에서는 그만큼 유명한 존재다. 지난 1997년 개장한 천진온천호텔(객실 330석)은 작은 한국이다. 호텔 직원 전원이 한국어를 구사하고 호텔 내에는 한식당, 라듐온천이 나오는 한국식 사우나, 한국식 일식당, 한국식 중식당, 한국식 미용실, 한국식 당구장, 한국식 노래방, 한국 여행사 등등이 있다. 심지어 호텔 2층에는 한인교회인 엘림교회가 있다. 톈진 내에 있는 교회 중 규모가 가장 커서 주일 모임 때는 1000여 명의 신자가 몰린다.
 
  주변도 온통 한국판이다. 호텔 인근에 한라산, 꼴통네 감자탕, 고려삼계탕 등 한국 식당과 한국 상점들이 즐비하다. 천진온천호텔이 있는 허시구(河西區) 일대는 톈진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톈진에 거주하는 인구는 상주인구 4만여 명, 유학생과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5만명 내외라는 게 이곳 한인들의 추산이다. 톈진 교민들은 천진온천호텔 金鍾七(김종칠·69) 사장을 5만여 톈진 한인사회의 터줏대감으로 꼽는다. 1990년대 초반 변변한 한국호텔이 없을 때, 천진온천호텔은 이곳 주재원들과 사업가들, 현지 교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들은 말 설고, 물 선 중국 땅에서 일하느라 긴장된 마음과 몸을 이 호텔에서 풀었다.
 
 
  호텔 투숙률 83%
 
  “어제(토요일) 톈진 시내 주요 호텔 투숙률이 48%였는데, 우리는 83%였소. 톈진에 오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 호텔을 이만큼 좋아해요. 그런데 김 기자는 왜 다른 호텔에서 불편하게 자는 거요?”
 
  지난 6월 28일 천진온천호텔에서 만난 김종칠 사장이 필자의 숙소가 다른 중국 호텔이라는 얘길 듣자 마자 한 얘기다. 이날 베이징(北京)-톈진 일대의 수은주는 39℃ 내외. 머리에서부터 땀을 줄줄 흘리는 필자에게 김 사장은 “일단 1층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부터 하자”고 권했다.
 
  1층 로비에서는 중국어를 들어볼 수 없었다. 눈에 익은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의 여자들부터, 호텔 로비를 가로지르며 뛰어 다니는 아이들까지 모두 한국인이었다. 호텔 내 안내판도 중국어보다 한국어 표시가 눈에 더 잘 띄었다.
 
  호텔 1층에 있는 온천에서는 지하 150m에서 라듐과 유황성분이 가득한 온천수를 하루 200여t씩 끌어 올린다. 온천뿐만 아니라 호텔 객실에서 사용하는 온수도 이 온천수를 사용한다. 온천 내부는 크지 않았지만, 남녀 공용인 작은 찜질방, 휴게실, 안마실이 갖춰져 있었다.
 
  욕탕으로 들어가자 TV에서 한국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욕탕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오는 통에, 서울 어느 사우나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온천탕에 몸을 담가 보니 물이 미끈미끈했다. 김 사장은 “온천수가 워낙 부드러워서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했다.
 
 
  용인민속촌의 아버지
 
천진온천호텔 입구에 서 있는 김종칠 사장.
  김종칠 사장은 한국외대 영어과 4학년 때인 1964년 11월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의 前身)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훗날 ‘관광대사’로 불린 김종칠 사장의 관광 인생 45년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직업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관광공사에서 처음 맡은 일이 전화당번이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그 짓을 하려니 한숨이 나오더군요. 6개월을 꾹 참고 외국인들을 상대로 전화통역을 했습니다. 당시 관광공사 사장이 吳在璟(오재경·90·후에 공보처 장관)씨였는데, 불평 없이 일하는 저를 눈여겨본 모양이에요. 1년 반이 지나자 사장 비서실로 보내 주더군요. 이후 관광공사에서 승승장구했어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거든요. 그러다 좋은 기회가 왔어요.”
 
  김 사장은 1972년 梁潤世(양윤세·78·후에 동력자원부 장관) 청와대 경제 제3비서관의 관광정책 담당으로 일하게 됐다. 그는 청와대에서 일할 때, 일본 청소년들의 한국 수학여행 유치를 처음으로 기획, 실시했다.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 김종칠 사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용인민속촌’이었다.
 
  “당시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었어요. 새마을 사업의 상징이 새마을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초가집도 없애고~’예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초가집도 우리 전통가옥 형태인데 이렇게 모조리 없애면 전통가옥이 통째로 사라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초가집 전통을 살리자’는 구상이 확대된 것이 용인민속촌입니다. 문헌과 기록이 없는 조선 이전까지는 몰라도 조선조 500년의 우리 전통과 문화를 보존해서 후세에 알리자는 복안이었죠.”
 
  ― 정부에서 반대를 하지 않던가요.
 
  “당연히 탐탁지 않게 여겼죠. 그래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결재할 기안을 철저히 준비했어요. 기안의 서두에 결론부터 적었어요.”
 
  당시 그가 용인민속촌 기안에 썼던 첫 문장은 이렇다.
 
  “용인민속촌은 전통민속자원을 보존, 전승 계발하고 박물관적 현장학습적 교육시설로 활용하는 한편 관광자원화하겠다.”
 
  그가 올린 기안은 대통령 결재를 무사히 통과했고, 용인민속촌은 지난 40여 년간 우리 전통을 엿보는 통로가 되고 있다.
 
 
  세계 신문에 서울 일기예보 게재
 
  김 사장은 “1974년 관광공사로 복귀했는데, 관광공사 LA 지사장으로 일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1979년부터 관광공사 LA 지사장을 맡았어요. 1982년 6월 어느 날인가 를 보는데, 갑자기 한국 날씨가 궁금한 거예요. 날씨란에 전 세계 52개 도시의 날씨가 나와 있는데, 서울 날씨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주회사의 회장인 챈들러 씨에게 간곡하게 편지를 썼어요. 그랬더니 ‘날씨 정보서비스는 AP통신에서 제공받는데, AP에 알리겠다’는 편지가 왔어요. 며칠 후 날씨란 편집자가 연락을 해 왔더군요. ‘당신의 노력으로 뿐만 아니라, AP통신과 계약한 세계 모든 신문에 서울 일기예보가 나오게 됐다’고 했어요. 정말 감격했습니다.”
 
  미국 서부의 관문인 LA 공항에 한국어 안내문 서비스가 시작된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다. 1982년 당시 LA 공항에는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어, 스페인어 안내문이 있는데 한국어 안내문이 없었다. 그는 당시 공항 국장이었던 크립튼 무어 씨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김 사장은 무어 국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LA 공항에 승객이나 화물 취급 순위로 KAL이 JAL, 유나이티드 항공 다음입니다. 그만큼 한국이 LA 공항에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는 건데, 한국어 안내문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김종칠 사장과 저녁식사를 한 얼마 후, LA 공항 전체에 한국어 안내문이 걸렸다고 한다.
 
 
  “중국 내 嫌韓論 미미한 상태”
 
  김 사장과 목욕을 끝낸 후, 일행은 2층 일식당에서 한·중·일식으로 저식사를 했다. 2층 식당에서는 한식, 일식, 중식을 모두 먹을 수 있다. 동행한 정생균 톈진 금사력그룹 총경리는 “일식과 중식이 모두 한국식이어서,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관광객들과 주재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김 사장과 대화를 나눴다.
 
  ― 최근 중국 내에서 ‘嫌韓論(혐한론)’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1997년에 중국에 왔을 당시, 중국인들은 한국을 매우 높게 평가했어요. 시간이 조금 흐르니까,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묘하게 변했어요. 한국 사람들이 잘산다고 거들먹거린 게 발단이었어요. 그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일부 중국 인터넷 매체들이 한국을 비하하기 시작하자, 네티즌들이 혐한론을 들먹이더군요. 전체 중국인들이 한국을 폄하한 것은 아니지만, 큰일 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CCTV 1’과 중국 3대 신문 가운데 人民日報(인민일보), 光明日報(광명일보) 등에 편지를 보냈어요.”
 
  김종칠 사장이 중국의 주요 언론사에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중국과 한국은 지난 2000년 동안 문화, 경제적으로 교류를 해 왔다. 한국이 일제시대 항일투쟁을 했을 때, 중국은 우리에게 애국지사들이 자주독립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무대를 제공했다. 1992년 정식 수교한 이래, 두 나라는 서로 제3의 무역 대상국이 됐다. 앞으로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야지 지금처럼 중국 언론과 인민들이 한국을 경시하고 폄하해서는 안된다. 한국은 중국의 문화와 중국인들의 힘을 존중하고 믿으니, 한국과 중국은 서로 거울 삼아 함께 발전하자.”
 
  ― 반응이 어땠습니까.
 
  “중국 CCTV와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에서 저를 인터뷰하기 위해 호텔에 왔습니다. 인민일보 부주필은 인민일보에 ‘월드컵 이후 사색’이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제 편지를 소개하며, 중국 일부 언론과 인민들이 한국을 폄하해서 中韓(중한)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면 안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를 인터뷰한 언론은 중국 정부의 국영방송이고 기관지입니다. 이들이 저를 인터뷰한 건 중국 정부가 중국의 일부 매체와 인민들에게 ‘쓸데없이 한국을 자극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겁니다.”
 
  ―그 이후에 중국 내 혐한론이 사그라졌나요.
 
  “일부 군소 인터넷 매체에서 혐한론이 나오기는 하지만 미미합니다. 중국에서는 CCTV 1과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에서 공개적으로 한국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중국 내 혐한론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제가 만난 중국 주요 언론사 간부들의 얘기입니다. 이들은 ‘동북공정도 중국 3대 신문과 CCTV에서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해요.
 
  “지난 2년여 간 한국과 중국은 경제교류에만 바빠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중국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더욱 성공하려면, 중국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중국인들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된 정보를 듣고 지레짐작으로 중국을 무시하거나 중국인들의 눈치를 봐서는 안됩니다.”
 

宣鍾泰 청도 남산호텔 사장   

한국식 호텔문화로 중국인들 사로잡아      

2007년 11월 오픈 이래 평균 객실 점유율 65%
4성급 호텔이지만 내부시설 5성급 능가한다는 평
   

金容三 편집장/부장 (dragon03@chosun.com

선종태 청도 남산호텔 사장
 칭다오(靑島) 국제공항에서 시내 쪽으로 15분 정도 달리면 최근 한국인들이 투자한 공장들이 속속 입주하고 있는 센양구(城陽區) 위황링(玉皇)공업구가 나타난다. 이 공업구의 한복판 대로변에 아담하게 서 있는 건물이 남산호텔(사장 宣鍾泰 )이다.
 
  칭다오에 한국인이 투자하여 설립한 최초의 호텔인 남산호텔은 4성급 호텔로서 총 건평 8739㎡의 5층 건물에 객실은 총 71개(딜럭스 스위트룸 16, 딜럭스 더블룸 46, 스위트룸 9). 1층에는 고급 한식당과 일식당, 커피숍이 있고, 2층에는 400석 규모의 행사장과 세미나룸이 마련되어 있다.
 
  로비에 들어서면 ‘보토치노’라는 이탈리아 자연 대리석을 사용하여 시공을 한 덕에 중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宣鍾泰(선종태) 남산호텔 사장은 “호텔 내부 장식을 할 때 63빌딩의 인테리어를 담당한 분을 초빙하여 한국의 정서가 물씬 풍기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다.
 
  “호텔룸의 가구는 모두 품격 높은 원목가구를 들여놓았고 벽지와 벽지를 바르는 풀, 커튼, 실내장식품들도 모두 한국에서 최고급품들만 엄선해다가 썼습니다. 또 전 객실을 온돌 난방시스템으로 시공하여 최대한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에 칭다오에서 최고로 치는 5성급 샹그릴라 호텔보다 객실 수준이 더 낫다는 평을 듣고 있어요. 고풍스러운 미와 모던한 감각 그리고 한국정서, 이것이 저희 호텔의 콘셉트입니다.”
 
  선종태 사장은 “덕분에 칭다오를 찾는 한국의 VIP들이 저희 호텔을 자주 찾으신다”고 말했다. 특히 영화배우 정준호, 코미디언 서세원씨 등 연예인 단골 손님도 많다고 한다. 선 사장은 “비록 한국식 디자인과 한국 정서를 감안해 지었지만 우리의 주 타깃은 중국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인 투숙객 점차 늘어
 
  투숙객의 유형을 보면 오픈 초기에는 100%가 한국인이었으나 한국식 호텔문화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중국인 투숙객이 늘기 시작, 현재는 한국인 60%, 중국인 40% 정도라고 한다. 선 사장은 “조만간 중국인 투숙객이 더 많아져 2~3년 내에는 중국인 투숙객이 70~80%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금까지 선종태 사장이 이 호텔 건립에 투자한 총 투자비는 약 100억원. 2007년 11월 21일 개관 이래 평균 객실 점유율은 65~70% 선이었는데, 최근의 세계적인 경기침체 여파로 올해 들어선 50%를 밑돌고 있다고 한다. 陳容瑞(진용서) 총경리는 “최근에 예약이 되어 있던 큰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올 1~3월은 바닥을 쳤고, 4~5월부터 회복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5월부턴 예년 수준의 객실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객실 점유율이 50%만 넘으면 운영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이 호텔의 창업자 선종태 사장은 서울 신촌에서 서비스업으로 사업 기반을 닦은 후 다른 영역에 도전할 만한 것이 없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2년 2월 22일로 기억합니다. 칭다오에서 가방공장을 운영하는 형님의 부탁으로 처음 중국땅을 밟았습니다. 공항 근무자들이 인민복을 입고 뻣뻣한 자세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중국은 아직도 공산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러나 막상 칭다오 시내로 들어오자 이 도시가 마치 하와이 같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항구도시로서 일찍부터 해외 문물을 받아들인 데다가 과거 독일의 조계지가 설치되어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탓이다.
 
  형님을 대신하여 가방공장을 관리하면서 그는 칭다오 지역 정부 관원들과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었고, 형님으로부터 “칭다오에는 한국 사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호텔이나 모텔이 없어 불편을 겪고 있는데 네가 호텔을 하나 지어 운영해 보면 어떠냐” 하는 제안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고 한다.
 
 
  중국 시장 만만하게 봤다가 큰 낭패 당해
 
청도 남산호텔 모습. 한국식 온돌 난방 시스템, 이탈리아제 대리석 시공, 각종 실내장식을 고급 한국식으로 꾸며 5성호텔보다 객실 분위기가 더 좋은 4성호텔이란 평을 듣고 있다.
  그는 시장조사와 주변 환경조사를 하면서 중국이 만만하게 보였다고 한다. 제도도 어수룩하고 돈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잘만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002년 9월, 선종태 사장은 정식으로 중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는 중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60만 달러와 전 가족이 이삿짐을 싸들고 칭다오로 건너왔고, 칭다오시 정부에 정식으로 사업자 등록까지 냈다.
 
  그는 센양구의 한 지역을 점 찍고, 2002년 9월 센양구 인민정부의 허가를 받아 투지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는 “일단 투자만 하면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해결해 주겠다”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던 중국인들은 막상 토지를 구입하고 나자 태도가 돌변했다.
 
  칭다오에 외국인이 호텔을 짓는다는 소식에 대해 주변에서 호텔을 경영하던 중국인들이 노골적으로 견제를 했고, 중국 정부도 외국인이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종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기 때문.
 
  2003년 8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정부 관원이 “중국 중앙정부에서 토지법을 개정하여 모든 투자는 무조건 경매를 통해 낙찰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산둥성 토지청의 판매지표가 있어야 한다”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쓰러져 수차례 병원에 실려가 중환자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는 “죽어도 중국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이곳저곳 사람들을 만나 해결방법을 찾아낸 덕에 2005년 9월, 정식 경매 절차를 거쳐 현재의 토지를 낙찰받았다.
 
  힘겹게 산 하나를 넘자 또다시 거대한 산이 나타났다. 공사시공 비준 절차가 한국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기 때문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공사시공 비준 절차를 거쳐 8개월 만인 2006년 9월 착공과 동시에 국유토지사용권을 취득했다. 그해 연말 토목공사 준공과 동시에 호텔에 대한 건물소유 권리증도 받아 모든 법적, 제도적, 절차적 문제가 해결됐다. 선 사장의 설명.
 
  “토지와 건물 소유 권리증을 받아내기까지 4년여 기간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주변 知人(지인)들은 ‘호텔 들어서기 전에 사람 죽겠다. 그만 포기하라’고 말렸지만 저는 ‘죽으면 죽었지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이 땅에 반드시 호텔을 짓는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중국 내륙으로 호텔 체인망 진출 구상
 
  그는 건물의 설계 과정에서 한국의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 그리고 최고 기술을 가진 匠人(장인) 20여 명을 초빙하여 내부 설비공사를 했다. 드디어 2007년 11월 21일 駐(주) 칭다오한국영사관의 김선흥 총영사와 센양구의 유표명 부서기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갖고 영업을 개시했다.
 
  선종태 사장의 꿈은 남산호텔 건립이 시작이다. 그동안 7년여 중국땅에서 생고생을 해 가며 얻은 사업 노하우에 대해 그는 “사막 한복판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남산호텔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 내륙 쪽으로 호텔 체인을 내는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연안지역은 거대한 글로벌 호텔 체인이 이미 선점해서 파고들어갈 여지가 없지만 내륙 쪽의 지방 도시들은 아직 시장성이 충분합니다. 규모를 적게 하되 시설은 남산호텔 규모로 알차게 지으면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선 사장이 주목하는 분야는 웨딩업이다. 중국에는 결혼식을 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 현재 남산호텔의 2층 행사장은 토·일요일에는 예식 예약이 밀려 있다고 한다. 선 사장은 소형 호텔과 웨딩업을 결합한 형태로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여 체인망을 구성한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진출을 꿈꾸는 한국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저는 중국에 오자마자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통역 없이 현지인들과 부딪쳤습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이처럼 엄청난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불가능한 일에 내 모든 것을 바쳐 도전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처음 중국에 진출할 때 중국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다는 각오로 가족을 다 데리고 왔습니다. 일종의 배수진을 친 셈이죠. 저는 중국 진출을 검토하는 한국인 여러분도 저와 같은 비장한 각오로 도전한다면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고 봅니다.” 계속
 
[최신 중국정보] 중국 내륙시장 진출 성공요인 분석 및 시사점   
 1. 철저한 현지 밀착형 판매전략을 구사하라
  내륙지방으로 들어갈수록 소비시장으로 끌어내기가 어려움. 따라서 유망 소비자층을 발굴하고, 내륙지방의 민족성과 생활습관, 소비성향 등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현지 인재를 활용, 현지시장의 장래성을 예측하면서 대응해야 함.
 
  2. 내륙시장 진입 초기에는 단일 사업분야(아이템)에 전체 역량을 집중하라
  신시장 개척 초기에는 많은 비용과 시간 등이 소요되므로 사업역량의 ‘선택과 집중’이 성공의 관건임. GE(제너럴일렉트릭)는 사업초기 상·하수처리 필터 분야에 역량을 집중, 차후 의료·금융 분야로 사업 다각화해서 성공함.
 
  3. 주력 내륙지역에 ‘지역본부’를 설립, 현지 소비자의 상품 니즈를 파악, 低價(저가)의 보급형으로 R&D 하라
  내륙 농촌지역으로 소비수요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저가의 성능이 우수한 보급형 제품 개발이 필수적.
 
  4. 고객층을 세분화하고 멀티 브랜드, 멀티 판매채널을 구축하라
  소비성향이 상이하므로 폭넓은 소비계층을 흡수할 수 있는 다양한 브랜드, 판매채널이 필요함.
 
  5. 사업초기에는 로컬 물류업체를 활용하여 비용을 절감하라
  서부의 경우 상품가격의 70%가 물류비에 달할 정도임. 사업 초기단계에는 저렴한 로컬 물류업체를 활용함으로써 과도한 인프라 투자부담을 덜고, 점차 물량이 확대되면 물류센터를 단계적으로 설치.
 
  6. 소비자의 로열티를 끌어낼 고급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라
  내륙지역으로 들어갈수록 과시욕과 허례허식이 높고, 계층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고급품, 브랜드, 상류층 타깃 마케팅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음. 일부 고객을 위한 판촉행사에 초대되거나 또는 회원카드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상류층에 속한다는 우월감을 갖게 되어 해당 상품과 브랜드에 대한 로열티가 높아짐.
 
  7. 현지 정부와 소비자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확산시켜라
 
  <자료제공: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계속
 

崔鎭南 청도 햇미소식품유한공사 董事長       

 1995년 중국 진출, 태양초 종자 들여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재배하여 고추장 제조
조선족, 중국 진출 한국인에 이어 중국인들이 고추장, 된장의 소비자로 등장
   

金容三 편집장/부장 (dragon03@chosun.com
장춘시 햇미소 부총경리. 그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출신으로 햇미소의 중국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칭다오 외곽지역인 저우저우구(膠州區)에는 햇미소(蜜笑)라는 회사의 생산공장과 본사가 위치하고 있다. 공장에 들어서자 ‘정직한 맛이 미소를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이 보였다.
 
  이 회사는 특이하게 중국 내에서 고추장과 된장, 고춧가루, 조미료를 만들어 중국 전역은 물론 한국과 미국, 일본, 유럽, 중동 이집트 등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고추장과 고춧가루는 ‘맵고을’이란 브랜드로, 된장은 ‘미소슬’이란 브랜드로 중국의 수퍼마켓과 식품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1995년 중국에 진출한 이 회사는 초기에는 중국 내에서 제품을 생산해 중국 내의 조선족 및 중국에 진출한 한국 식당, 그리고 현지 주재하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해 왔다. 그런데 2000년부터 한국 드라마를 통한 韓流(한류) 붐이 일면서 중국인들이 한식에 접하게 됐고, 이들이 고추장, 된장을 찾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중국 내수시장에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회사를 방문했을 때 최진남 동사장은 해외 출장 중이어서 중국인 張春蓍(장춘시) 부총경리가 회사 상황을 설명했다. 장춘시 부총경리의 말에 의하면 이 회사의 직원은 260여 명이고 현재 고추장과 된장을 매달 300t씩, 그리고 고춧가루를 연간 4500t 정도 생산한다고 한다. 전체 매출 중 해외 수출이 65%, 중국 내수판매가 35% 정도를 차지하며, 중국 내에서 판매되는 내수 매출은 연간 2000만 위안(약 37억원) 정도.
 
 
  드라마 ‘대장금’ 여파로 고추장, 된장 찾기 시작
 
칭다오 곳곳에는 한국 음식점들이 성업 중이다. 이런 한국 음식점들이 햇미소 제품의 주 소비처라고 한다.
  장 부총리는 “전에는 중국 내 한국 교민 위주로 수요가 자연 창출됐는데, 한국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되면서 중국인 사이에 한식을 자신의 집에서 만들어 먹기 위해 구입하면서 고추장, 된장 붐이 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고추장과 된장으로 어떤 요리를 어떻게 해먹어야 할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최근에는 요리방법을 알리는 데 마케팅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고 한다. 장 부총리의 말이다.
 
  “저는 중국인이지만 한국 음식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특히 불고기, 삼겹살, 꼬리곰탕, 삼계탕을 즐겨 먹는데, 특히 탕 종류는 개운하고 담백해 중국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아요. 그런데 중국과 한국 음식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집에서 요리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못해 먹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는 “한국 음식에 어느 정도 중독된 상태지만 아직도 깻잎은 강한 향 때문에 꺼려진다”고 했다. 장 부총리는 “이번 미국發(발) 금융위기로 중국 내수 매출이 주춤거리고 있는데, 경제가 회복되면 본격적인 내수 붐이 일 것”이라면서 “우리도 내수시장 마케팅을 위해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좀 덜 짜고 덜 매운 제품을 개발해 전력투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현재 고추장, 된장을 제조경력 30년이 넘는 한국인 기술인력을 초빙하여 만들고 있다. 장 부총리는 “발효음식인 고추장과 된장은 발효 시간을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 맛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국의 匠人(장인)들에게 장 담그는 비법을 전수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일 어려운 것이 발효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라고 했다.
 
  제조 과정에 필요한 원료는 중국에서 조달하는데, 고추장의 경우 태양초 종자를 한국에서 수입해다가 중국 내에서 농사를 지어 납품을 받는다고 한다. 장 부총리의 설명.
 
  “태양초 종자를 수입한 후 이를 재배하기 위해 중국 전역을 돌면서 한국과 일조량, 토질 등이 거의 비슷한 지역을 물색했습니다. 이 와중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한 지역에서 이런 땅을 발견했어요. 태양초가 잘 자라려면 일조량이 길어야 하는데, 이 지역은 일조량이 가장 길 때는 하루 16시간이나 되고 토질도 한국과 비슷해 우리 회사가 그 지역의 땅을 소유한 국영농업회사에 종자와 재배기술을 전수하고 그 회사로부터 태양초를 구매해서 쓰고 있습니다. 또 된장 제조용 콩은 중국 동북지역의 콩 산지에서 재배한 것을 납품받아 사용합니다.”
 
 
  최고 품질의 원재료 사용
 
  장 부총리는 “나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 출신”이라면서 “햇미소에 태양초를 납품하는 신장 농사합작단위의 소개로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햇미소 시장은 아직은 조선족들이 밀집한 동북3성 지역과 한국 기업인들이 많이 진출한 산둥성 지역이 가장 크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베이징 지역이라고 한다. 주 판매처는 수퍼와 상점, 그리고 한국 식당이며, 현재 중국 내에 대리점 10곳이 개설되어 있으며, 별도의 영업조직이 있어 이들이 직접 소비자들을 접촉하여 한식 제조법 등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 중국 내에서의 경쟁 브랜드는 중국산 후후, 그리고 한국에서 수입된 청정원, 해찬들이라고 한다. 장 부총리는 “중국에서 식재료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바람에 중국산 식재료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우리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제조하기 위해 원재료는 모두 신뢰도가 높은 국유농장에서 구매하고 있다”면서 “현재 시장에서는 햇미소가 사용하는 원재료가 제일 비싸고 신뢰성이 높다는 평이 나오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장 부총리는 “일은 재미있는데, 업종이 식품이다 보니 품질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큰 사회문제가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말했다. 그는 “식품회사로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외부 인증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 감독을 받고 있고, 직원 내부교육을 통해 ‘내가 먹는 제품을 내가 생산한다’는 철학을 계속 주입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장 부총리의 말이다.
 
  “현재 우리의 내수 매출액이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중국인들에게 한국 음식이 조금만 더 알려지고, 요리법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산되면 중국 내에서의 고추장, 된장 수요는 폭발하게 될 것”이라면서 “우리는 중국의 가정에서 고추장과 된장으로 조리한 음식이 식탁에 오르는 그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interview] 崔鎭南 董事長
 
  “중국인들을 한국 전통 발효식품 애호가로 만들겠다”
 
  崔鎭南(최진남) 햇미소 동사장은 중국 진출 1세대 중에서도 그 이력이 가장 빠르다. 그는 1980년대 초 홍콩에 진출하여 홍콩의 아파트형 공장에서 고추장과 된장을 제조해 미국 시장으로 수출하다가, 장소 문제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87년 12월 중국으로 진출했다.
 
  “당시 언론에선 대우전자가 푸젠성(福建省)에 냉장고 공장을 지어 운영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질 때였어요. 저는 홍콩에 설립한 홍콩법인을 통해 중국에서 큰 꿈을 시작한 겁니다.”
 
  그의 중국에서의 첫 사업지는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 한동안 잘 나가던 사업이 1995년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직원이 엄청난 금융사고를 터뜨렸기 때문.
 
  “당시 저는 중국 공장에 큰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해외수출이다 뭐다 해서 계속 해외 나들이가 잦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회사에 근무하는 중국인 직원에게 법인 인감과 통장을 맡겨놓았는데, 이 친구가 나 몰래 회사 돈을 빼돌리고, 중국 은행에서 불법대출을 받아서 잠적해 버린 겁니다.”
 
  당시 이 사고로 그는 200만 달러라는 큰 손해를 보고 큰 좌절에 빠졌다. 정이 떨어진 최 동사장은 창춘의 법인을 정리하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마음을 다져 잡고 칭다오(靑島)로 내려와 현재의 장소에 공장을 설립했다. 그가 칭다오 공장에 투자한 자금은 400만 달러.
 
  “처음에는 중국에서 고추장, 된장을 만드는 회사가 우리밖에 없어 손쉽게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야가 돈이 좀 된다는 소문이 나면서 너도나도 뛰어들어 지금은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 됐어요. 특히 중국 기업들이 한국인 기술자와 장을 잘 담그는 匠人(장인)들을 스카우트해다가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요. 겉으로 보면 완전 중국 기업이지만 한국인 장인들이 장을 담그고 있으니, 한국산이나 다름없는 제품이 생산되는 겁니다.”
 
 
  고추종자 품질 개량하기도
 
  최 동사장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품질관리와 위생관리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에서 생산되는 고추장의 맛을 위해 고추 종자 개량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중국에도 고추장 비슷한 음식재료가 있어요. 우리와는 제조법이나 맛이 완전히 다르죠. 처음엔 중국 고추를 사용해 고추장을 담갔더니 빛깔은 그런대로 잘 나오는 데 비해 대단히 맵고 당도도 떨어지는 문제가 발견됐습니다. 그래서 국산 태양초를 비롯해 여러 품종을 가지고 중국 종묘회사와 함께 품종개량을 했어요. 그 결과 우리나라 품종과 맛이 비슷한 너무 맵지 않고 당도가 높은 종자가 개량돼 이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량된 종자를 어디에다 심을 것인지도 고민거리였다고 한다.
 
  “현재 우리 공장에서 사용하는 원재료는 100% 무농약 제품입니다. 식품에 잔류농약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중국의 일반 농가는 대부분 자기 땅에 농사를 짓기 때문에 이력관리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국영 집단농장 시스템으로 농사를 짓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생산된 원료를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납품받아 사용하고 있어요. 이 지역의 집단농장은 무농약으로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이죠.”
 
  햇미소의 지난해 매출액은 약 1500만 달러 정도인데, 이익률은 7~8% 정도라고 한다. 한국의 전통 발효식품인 고추장과 된장, 조미료를 입맛과 음식문화가 다른 중국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 동사장은 “韓流(한류) 붐으로 인해 한국 음식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진 데다가 웰빙 바람으로 야채류가 풍부하고 영양이 가미된 한국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에게 중국 음식을 권하면 아주 좋아하면서 먹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중국 시장에서 韓食(한식)은 자기들이 좋아서 돈을 주고 사 먹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 모두가 한식의 전도사라 생각하고 중국 분들에게 한식을 권하고, 우리는 좀 더 노력하여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각종 조미료와 소스류를 개발하겠습니다.”
 
  최 동사장은 부가가치 상승과 중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현재 고추장을 이용한 칠리 소스 등 다양한 제품을 연구 개발 중이며, 올 10월이면 신제품들이 중국 시장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인들이 한국의 전통 발효식품인 고추장, 된장 애호가가 되는 그날까지 내수시장에 도전해 승부를 보겠다”면서 “중국 내수는 이제 시작 단계”라고 말했다. 계속
 
 

崔榮哲 태성무역 董事長(청도韓人상공회 고문)   

“‘서비스업종 성장정책’의 흐름 잘 타면 큰 기회 잡는다”      

中低價 화장품, 생수판매, 실내 인테리어, 선식, 유제품
가정배달사업 등 성공사례들 속속 나타나
이번 경제위기 끝나면 韓中 경제력 역전될 것
    金容三 편집장/부장 (dragon03@chosun.com

최영철 태성무역 동사장.

 崔榮哲(최영철) 태성무역 동사장은 칭다오 지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의 모임인 청도한인상공회 회장을 지내고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칭다오 지역을 대표하는 한국 기업인이다.
 
  그는 韓中(한중)수교 2년 전인 1990년 삼양식품 중국법인 총경리로 파견을 나왔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청도다산유한회사라는 액세서리 기업을 창업해 운영해 왔다. 현재 이 회사는 딸들에게 물려주고 칭다오 지역으로 진출을 희망하는 한국 기업인들을 위한 조언과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최 고문은 “중국은 남한 면적의 98배, 56개 소수민족이 있고 개혁개방 후 매년 9.9%씩 성장했습니다. 중국 내에 한국 투자기업은 4만~4만7000개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중 산둥성(山東省)에 2만여 개, 칭다오 지역에는 7000~1만여 개의 기업이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요. 한중 간에는 현재 週(주) 820편의 항공편이 개설되어 있고, 연간 500만명의 한국인이 중국을 다녀갔습니다. 현재 중국 내에서 장기 거주하는 한국인은 약 7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청도 한국상회에 정식 등록을 한 회원사는 800여 개로, 대부분이 중소기업입니다. 과거에는 8만여 명이 칭다오 지역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미국發(발) 경기침체 여파로 3만여 명이 한국으로 귀국해 칭다오 지역의 초등학교 학급 수를 줄일 정도입니다.”
 
  최 고문의 설명에 의하면 처음 중국에 진출한 1990년에는 칭다오 지역에 한국인이 10명에 불과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기업들은 초기에는 저렴한 인건비와 토지비를 기반으로 가공·제조를 하여 해외 수출하는 방식의 비즈니스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종업원 월 평균 임금이 1990년에는 120위안 정도면 충분했으나 현재는 1200위안 정도입니다. 게다가 8시간 근무제, 잔업수당, 퇴직금 제도 등 강력한 노동법이 시행되면서 저렴한 인건비에 의존하던 한국 기업들이 한계상황에 처했어요.”
 
 
  외자 유치 위한 각종 우대조치 폐지
 
  최 고문은 “1인당 평균 임금이 200달러가 넘어가면 각종 보조금 등의 영향으로 실질 임금은 1인당 300달러가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버텨내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1990년대만 해도 중국 정부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외자기업들을 유치하느라 각종 특혜나 우대정책이 많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우대정책이 폐지돼 경영여건이 크게 악화됐다는 점이다. 최 고문의 설명.
 
  “초기에는 8년 정도 소득세 면제혜택을 주었고, 기계설비도 면세로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토지나 건물도 임대가 가능했기 때문에 중국 진출 과정에서 부담이 크지 않았어요. 지금은 이런 혜택들이 거의 사라졌고, 외자기업들이 많이 진출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최 고문은 “중국도 심각한 환경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綠猫論(녹묘론)’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과거에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黑猫白猫論(흑묘백묘론)이 대세였지만, 이제는 환경을 중시한다는 차원에서 녹묘론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칭다오 지역의 경우 액세서리 업체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데, 액세서리 제조과정에서 필수적인 도금이 환경오염의 主犯(주범)이라 하여 일절 신규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중국 정부도 이젠 실질적으로 중국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의 진출을 원한다고 한다. 투자금은 500만 달러 이상, 그리고 환경오염 없고, 노동집약산업이 아닌 첨단산업 업종을 가려서 투자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건들이 겹치면서 노동집약적인 업종에서 활동하던 한국 기업들이 수출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한계에 부딪히자 인건비가 중국보다 저렴한 베트남으로 이전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최 고문은 “베트남의 경우 전력, 도로, 용수 등 인프라가 중국보다 미비한 데다가 진출 기업들이 직접 땅을 구입해서 공장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초기 투자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자 한국 기업들은 해외 수출보다는 중국 내수시장으로, 복잡하고 골치 아픈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서비스업종을 잡아라
 
  최 고문은 “현재 중국의 정책이 제조업 위주에서 유통·서비스 업종을 대대적으로 성장시키는 쪽으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트렌드를 잘 파악해서 대처하면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 한국 상인이 한국에서 양념 오징어구이 기계를 가지고 들어와 크게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또 한국의 中低價(중저가) 화장품을 들여다 중국에서 판매하여 성공을 거둔 브랜드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생수판매, 실내 인테리어, 선식, 유제품 가정배달사업 등 한국에서 이미 성공한 방법론을 중국에 접목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례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칭다오 지역에서 경복궁과 흥부 등 한국 레스토랑이 성업 중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인들이 외국 바이어나 중국 사업 파트너들을 한국 식당에 초청하여 식사를 자주 하면서 중국 사회에 韓食(한식)이 널리 알려진 탓이다.
 
  최 고문은 “일부 잘나가는 한국 레스토랑을 제외하면 중소기업이 중국 내수시장을 뚫고 들어가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수출에만 주력할 때는 영어만 할 줄 알면 가능했지만, 중국은 다릅니다. 때문에 내수시장을 뚫고 들어가려면 중국어 의사소통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인 중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중국은 또 국토면적이 워낙 넓어 지역마다 적용하고 시행하는 제도와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어떤 지역에 진출할 경우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조언을 받아 해당 지역의 제도와 방법을 상세히 설명 듣고 해당 지역의 특색에 맞는 기업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 고문은 또 중국인들이 한국 기업인들에게 상식에 어긋나는 요구를 많이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소규모 자본을 투자하여 식당을 개업한 분들은 대부분 건물을 임차하는데, 장사가 잘되면 갑자기 임대료를 몇 배로 올립니다. 칭다오에서 한국식 사우나로 유명한 수정궁 사우나의 경우도 엄청난 시설투자를 해서 오픈을 했는데, 계약기간이 끝나자 ‘나가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낭패를 경험한 사례가 있어요.”
 
  그는 “이번 미국발 경제위기가 끝나면 한중 간의 경제력이 역전되어 있을 것”이라면서 “지난 20여 년은 한국 기업들이 우월적 입장에서 이익을 내면서 투자를 했지만 거대한 공룡처럼 힘이 세진 중국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최 고문은 “그렇지만 중국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의 땅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우리 경제의 희망의 鑛脈(광맥)을 계속 캐내야 한다”면서 “칭다오 지역으로 진출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칭다오 지역의 한인상공회는 투자상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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