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가 매혹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곳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앞서가는 계절이 다르고 산과 바다도, 숲과 나무도 다릅니다. 심지어 흙의 색깔까지도 육지와는 다릅니다. ‘다르다’는 건 곧 낯설다는 뜻. 낯설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여행을 떠나온 이들에겐 판타지가 됩니다. 제주에서 만난 ‘다른 풍경’ 중 하나를 한라산 중산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름의 부드러운 구릉과 드넓은 초지의 목장이 펼쳐지는 중산간에는 아직 제주를 찾는 여행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매력으로 가득합니다. 중산간에서 마주하는 건 바로 ‘평화의 풍경’입니다. 크고 작은 중산간의 오름을 넘어 황금빛으로 물드는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놓아기르는 소떼와 목책 안에서 무리 지어 달리는 말을 만나기도 하고, 가는 발목으로 생고무처럼 뛰는 노루 떼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른 새벽의 부드러운 능선의 오름에 올라서 굽어보는 중산간의 유려한 선들은 또 어떻고요.‘거의 완벽한 평화의 시간’이 제주의 중산간, 그곳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 평화의 시간을 만나다…한라산 중산간 늘 그랬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화려한 풍경은, 더 화려한 풍경 앞에서 쉽게 지워지고 말았다. 그 풍경이 현란하면 현란할수록 쉬 잊어졌다. 더 나은 풍경을 찾아 헤매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었을까. 그러나 아주 가끔, 오래 잊히지 않는 장면을 만날 때도 있다. 풍경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선명한 느낌으로 찍히는 순간이 바로 그때다. 이런 순간의 느낌은 이를테면 고요함, 고즈넉함, 평화로움 혹은 비장함, 외로움 같은 이미지로 마음에 담긴다. 눈앞의 경관이 해석되면서 얻어지는 이런 느낌은 훨씬 선명해서 유효기간이 더 길었다. 한라산의 무릎 혹은 허벅지 높이쯤 될까. 내려오는 한라산의 능선과 올라오는 들판이 만나는 자리. 그래서 산도, 들도 아닌 곳을 제주에서는 ‘중산간’이라고 부른다. 중산간에서 마주하는 풍경을 가까운 것부터 먼 것까지 순서대로 그려 넣어 본다면 이렇다. 삭아가는 지난가을의 억새, 생채기처럼 드러난 붉고 검은 흙, 그 너머의 초록 들판, 경계를 구획하고 있는 삼나무의 도열. 휙휙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이런 풍경의 뒤쪽으로는 분필로 그은 것 같은 오름의 곡선이 지나간다. 눈앞의 풍경이 마음으로 드나드는 여유는, 돌이켜보건대 이렇게 무딘 경관 앞에 섰을 때 만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주목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풍경에 온 신경을 빼앗겨버리는 통에 마음이 들고 날 자리가 없다. 풍경이 너무나 순해서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시선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이란 형태일 수도 있고, 색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새소리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다. 간혹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깨달음처럼 와서 선명하게 찍히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한라산 중산간의 무딘 풍경 앞에 섰을 때 도장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찍히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그건 ‘평화로움’이 아닐까. # 제동목장에서 마주친 평화의 풍경 한라산 중산간의 아름다움은 사실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사철 푸른 삼나무와 부드러운 오름의 구릉이 그려내는 유려한 선이야 늘 볼 수 있는 것. 여기다가 봄과 여름에는 드넓은 초지가, 가을과 겨울에는 반짝이는 억새가 중산간을 치장한다. 구태여 계절을 가려 찾아가지 않아도 서로 다른 경관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느 때 권해도 좋을, 한라산 둘레의 너른 중산간 지역 중에서 굳이 이 봄날을 택해 찾아가볼 만한 곳을 콕 집는다. 한라산의 능선이 흘러내린 동쪽 자락의 표선읍 가시리 일대다. 굳이 가시리 일대를 추천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지금 가시리의 중산간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양옆으로 벚꽃과 어우러진 유채꽃 융단이 8.5㎞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여정의 출발지점은 가시리 사거리. 여기서부터 큰사슴이오름을 비껴서 교래리 쪽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녹산로’다. 곳곳에 빼어난 길을 여럿 가지고 있는 제주에서도 봄이면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히는 길이다. 이 길을 장식하는 건 유채꽃이다. 녹산로의 왕복 2차로 도로 양옆으로 유채꽃이 차로 하나쯤의 너비를 가득 메워 피어났다. 제주의 해변에 유채꽃은 흔하지만, 중산간의 부드러운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유채꽃의 느낌은 또 다르다. 앞으로 1주일쯤 더 기다려야 하지만, 유채꽃 뒤편에 도열한 벚나무까지 분홍빛 꽃이 팝콘 튀듯 피어나면 그 화려함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녹산로가 지나는 길옆에는 정석비행장이 있다. 대한항공이 조종사들의 교육을 위해 1998년 활주로를 놓은 비행장이다. 난데없이 나타나는 활주로와 관제탑, 항공기도 이색적이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이 정석비행장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제동목장이었다. 비행장 건설에 앞서 20여 년의 개간 끝에 목장을 조성해 소를 방목하고 있는 곳이다. 제동목장에서 가장 놀란 건 가늠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목장의 크기였다. 삼나무를 심어 구획해놓은 초지 하나의 규모도 ‘넓다’는 말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정도인데, 이런 초지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으니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구제역 발생 우려로 제동목장은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만, 녹산로 주변의 목장길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문제 될 게 없다. 너른 초지에는 자유롭게 방목 중인 소들이 느릿느릿 풀을 뜯고 있다. 중산간의 목장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관통하는 건 ‘평화로움’이다. 특히 황금빛 석양이 비끼는 늦은 오후에 방목장의 소들이 긴 그림자를 끌고 축사로 돌아오는 모습이 불러오는 건 목가적인 평화의 느낌이다. 제동목장에 소들만 사는 건 아니다. 방목을 앞두고 비어 있는 목장의 초지는 온통 한라산에서 내려온 노루들 차지다. 풀숲 여기저기서 노루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예닐곱 마리씩 무리 지어 움직이는 노루 떼도 흔하다. 삼나무 숲 사이를 타박타박 걷다 보면 인기척에 놀란 노루가 일제히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맞추다가 일순 생고무처럼 튀어 숲으로 사라진다. 어쩌다 노루와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의 두근거리는 느낌이라니…. 아무런 경계가 없는 공간에서 야생의 생명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기분은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짐작할 수 없다. # 나라 안의 으뜸 명마들이 뛰던 자리 지금 가시리 일대의 중산간 목장은 소가 주인이지만, 여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말 목장이 있었다. 제주의 역사는 몽골 지배 당시부터 시작된 말 목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가시리에는 조선시대 제주에서도 ‘최고의 말’들만 골라서 놓아먹이던 국영 목장이 있었다. 여기서 자라던 말은 단단한 근육과 기름진 털을 가진, 이른바 ‘갑마(甲馬)’였다. ‘갑을병정…’의 맨 앞줄에 있는 그 ‘갑(甲)’을 쓴다. 가시리 일대에 방목된 갑마만 무려 1만 필이 넘었다. 미끈하고 탄탄한 말들은 거의 야생의 상태로 무리 지어 중산간 평원을 박차고 달리면서 풀을 뜯었을 것이다. 이렇게 길러진 말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놈들은 조정으로 보내졌다. 이른바 ‘조선 최고의 명마’로 꼽히던 말들이었다. 이런 명마는 어떻게 골라냈을까. 그 장면이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탐라순력도’ 중에서 ‘산장구마(山場驅馬)’란 제목의 그림과 글로 찍혀 생생하게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그러니까 1702년 10월 2일의 일이다. 이날 가시리에서는 거대한 이벤트가 펼쳐졌다. 먼저 도지사격인 제주 목사 이형상의 등장. 그는 가시리의 큰사슴이오름 정상에 좌정하고 이날 행사를 진두지휘했다.
둥근 목책 안에 가둬진 말들은 좁은 출구를 따라 한 줄로 내보내졌다. 제주 판관과 현감은 말 한 마리 한 마리의 근육과 자태를 살폈다. 이름 하여 ‘점마(點馬)’였다. 변 사또가 ‘춘향전’에서 어여쁜 기생을 늘어놓고 뽑는 게 ‘점고(點考)’라면, 제주에서 말의 체격과 건강을 점검해 명마를 골라내는 건 ‘점마’라 했다. 기병 한 명이 보병 열을 상대했고 말 한 마리가 노비 셋과 교환됐던 시절이었으니 말 한 마리 값은 지금으로 치면 소형차 한 대 정도 값어치는 했던 모양이다. 말 중의 말이라 할 수 있는 ‘갑마’는 훨씬 더 귀한 것이었겠다. 이날 골라낸 말 중에서 가장 훌륭한 놈은 모르긴 해도 아마 숙종 임금에게 바쳐졌으리라. # 갑마장 길에서 오름의 미감을 만나다 가시리에서 옛 목장의 자취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1만여 필의 말을 기르던 목축의 자취는 희미한 돌 울타리(잣성)의 자취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가시리에는 그 자취를 따라가는 도보코스 ‘갑마장 길’이 있다. 가시리 마을회관에서 설오름과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을 넘어 마을회관으로 되돌아오는 20㎞의 코스가 바로 갑마장 길이다. 오름을 타고 넘어 길을 다 걷자면 7시간 남짓. 거리를 딱 절반으로 줄인 ‘쫄븐(짧은) 갑마장 길’은 3시간쯤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 사실 갑마장 길에는 그다지 볼 게 없다. 누구나 감탄할 만한 경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길이 운치 있는 것도 아니다. 올레길처럼 훌륭한 경관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건 약점이 아니라 어찌 보면 오히려 이 길이 품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그 연유는 이렇다. 갑마장 길에서 눈에 확 띄는 풍경이 없다는 건 ‘봐야 할 것’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길에서는 오히려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다. 오름의 선이 흘러내려 이루는 곡선과 겹겹이 이어진 구릉, 누렇게 삭아가는 억새와 이제 막 초록빛으로 덮여가는 들판…. 거기서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다. 마음이 가는대로 걷는 길이니 꼭 코스를 따를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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