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의 꽃구경은 영 재미가 없습니다. 동시다발. 연일 따스한 날씨에 봄꽃들이 두서없이 한꺼번에 피어난 까닭입니다. 꽃의 개화 순서도 다 무너졌고, 지역의 순서도 가리지 않습니다. 올해의 봄꽃 구경은 이제나 저제나 화신(花信)의 북상을 기다리던 기대도, 투전판에서 뒷장의 화투패를 서서히 밀어 올릴 때의 두근거림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일제히 피었다는 건 지는 일도 한순간이라는 뜻. 그래서 올봄의 꽃놀이는 많이 서둘러야겠습니다. 평소보다 잰걸음으로 경주를 다녀왔지만, 경주의 목련 만개 소식을 채 알리기도 전에 서울 여의도 벚꽃의 꽃망울이 한꺼번에 터져버렸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화 속도에 맞춰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주 사람들만 숨겨두고 찾아가는 경주 안강의 벚꽃 명소와 벚꽃이 늦게 당도하는 곳들을 두루 들러보느라 어찌나 숨이 가쁘던지요. 그곳에서 이르게 만난 꽃소식을 여기 전합니다. # 벚꽃보다 화려하다…경주의 목련 목련에 대한 생각 하나. 사실 봄꽃 중에서 목련은 뒷전이다. 가장 먼저 봄의 기미를 알리는 역할로는 매화에 뒤지고, 가지마다 다닥다닥 피어 숨 막힐듯 향을 뿜는 벚꽃에는 화려함으로 밀린다. 화사함으로는 개나리에, 강렬하기로는 진달래나 철쭉에 어림도 없다. 그저 따스한 봄볕 아래 이따금 드문드문 집 마당쯤에 서서 후덕한 인상으로 소담스러운 봄의 기운을 알려줄 뿐이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틀림없이 당신은 경주의 목련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벚꽃보다 더 화려한 경주의 목련이 얼마나 화사하게 꽃송이를 터뜨리는지는 불국사에 가보면 알 수 있다. 불국사로 드는 산문 주위는 지금 분홍빛 벚꽃과 버드나무 신록으로 온통 파스텔의 색감이 번져가고 있다. 향기 짙은 봄꽃과 신록이 아찔하다. 그러나 불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봄꽃은 대웅전 뒤편 무설전의 회랑을 지나 당도하는 관음전에 숨겨져 있다. 불국사의 관음전은 대웅전보다 더 깊고 높은 자리에 있다. 해마다 봄이면 관음전 주변으로 목련의 꽃 사태가 난다. 거대한 목련들이 군락을 이뤄 꽃을 피우는데, 어른 손바닥보다 큰 탐스러운 꽃들이 가지마다 피어난다. 관음전 담장에 기대 서서 절집을 내려다보면 첩첩이 겹쳐진 불국사의 법당 처마를 배경으로 나무마다 가지가 휘어질듯 피어난 큼지막한 목련이 하늘을 다 가리고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목련이 이처럼 무리 지어 한꺼번에 피어나는 모습은 일찍이 다른 데서는 보지 못한 풍경이다. 순백의 흰꽃이 무더기로 피어서 마치 절집을 맑은 정신으로 장엄(莊嚴)하고 있는 듯하다. 경주 오릉에 피어나는 목련의 화려함도 그에 못지않다. 경주의 오릉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알영왕비 그리고 신라왕 셋의 능이 모여 있는 곳. 목련은 오릉의 담장과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숭덕전과 후손들이 기거하는 그 곁의 살림집 주변에 피어난다. 건물 둘레에 심은 목련은 이제 활짝 꽃을 피워서 숭덕전을 아예 꽃구름 속에 가뒀다.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는 꽃잎들은 아직 상하지 않아 바닥을 온통 희게 물들이고 있다. 목련이 아름답기로는 또 한 곳, 첨성대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 목련은 특히 야간 조명이 켜질 때 가장 아름답다.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떠오르는 첨성대 주위로 순백의 꽃잎이 환하게 빛나는 모습이라니…. 봄밤의 정취 중 으뜸이 ‘밤 벚꽃놀이’라지만, 첨성대 주변의 풍경만 놓고 본다면 ‘밤 목련놀이’도 그에 못지않을 듯하다. 마침 밝은 보름달이 피어나 순백의 꽃잎과 어우러지는 봄밤이라면 더 좋겠다. # 딱 한 그루 목련이 만드는 봄의 풍경
경주에는 목련이 터널을 이룬 길도 있다. 경주 남산 자락의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곳곳에 명소와 신라의 유적이 즐비한 경주에서 관광객의 발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이지만, 다른 계절에는 몰라도 봄에는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오래 머물며 볼 건 좀 모자라는 듯하지만,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의 신록과 작은 개울을 끼고 가득 피어나는 목련, 살구꽃, 벚꽃들로 마음이 다 환해지는 곳이다. 이즈음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연구원 초입의 오솔길에 피어난 ‘산목련 터널’이다. 큼지막한 꽃을 치렁치렁 달고 수형이 넓게 펼쳐지는 일반 목련과는 달리 산목련은 꽃이 잘고 띄엄띄엄하며 나무는 수직으로 높게 자란다. 그다지 긴 길은 아니지만 가지마다 꽃을 피워낸 산목련이 만들어낸 소실점의 터널로 들어가는 기분이 색다르다. 산목련 터널 앞에서 뒤로 돌면 이번에는 살구꽃 터널이다. 얼핏 벚꽃처럼 보이는 연분홍 살구꽃 아래서는 꽃향기를 담뿍 느낄 수 있다. 이쯤에서 솔직히 털어놓자. 경주의 목련은 이번 주말이면 늦다. 주중에 서두른다면 겨우 만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절정은 넘긴 뒤다. 꽃 소식이 빨리 당도한 만큼 지는 속도로 빠른 까닭이다. 봄꽃이 며칠 사이에 이렇듯 전국에서 폭죽처럼 터질 줄 누가 알았을까.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경주에서 벚꽃은 ‘아직’이었다. 개화율이 30%나 됐을까. 경주 벚꽃의 절정과 북상 속도를 가늠해 보았지만, 허망하게도 딱 이틀 만에 서울 여의도의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경주의 목련은 후드득 지고 있다는 소식. 올해 놓쳤다면 경주의 목련꽃 정취는 내년을 기약할 밖에…. 아무튼 남녘으로부터 전해지는 화신의 가슴 두근거림이 없으니 올해의 봄꽃 구경은 영 재미없다. # 자전거로, 또 도보로 즐기는 벚꽃들
경주에 이처럼 벚꽃이 화려하게 피는 건 1971년 경주관광개발 계획을 확정하면서 경주 일원의 도로마다 가로수로 벚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10년생 안팎의 벚나무를 심었으니 그때 심어진 벚나무들이 수령 50년의 아름드리로 자라났다. 경주 개발이 끝난 1979년 뒤로도 벚나무는 계속 심어져 경주 주요도로와 사적지의 벚나무만 3만5000여 그루에 달한다. 경주 전역의 벚나무까지 다 합치면 그 숫자는 30만 그루로 늘어난다. 봄이면 도시 전체가 벚꽃에 파묻히는 진해의 35만 그루에 육박하는 숫자다. 경주의 벚꽃은 아직 늦지 않았다. 올해 경주 벚꽃은 서울 여의도와 거의 동시에 피고 있다. 차이가 난다 해도 고작 하루 이틀이다. 그러니 이번 주 중반을 넘겨서 주말까지, 좀 더 여유 있게 잡으면 내주 초까지가 경주의 가장 화려한 벚꽃을 만나는 절정의 시간이다. 경주 한복판의 대릉원과 첨성대, 월성 일대는 따로 일러주지 않더라도, 경주에 갔다면 누구나 들르는 곳. 이곳에도 벚꽃이 흐드러진다. 봄볕 따스한 낮이면 낮대로, 화려한 벚꽃과 조명이 어우러진 밤이면 밤대로 벚꽃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살짝 귀띔 한마디. 월성동 주민센터에서 분황사까지 이어지는 천군로를 달리는 즐거움을 빼놓지 말기를…. 이 구간은 차로 달려서는 재미없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봄볕 아래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며 달리기에 제격인 곳이다. 경주에서 벚꽃 좋기로야 호수의 물빛과 화려한 꽃이 어우러지는 보문호 일대가 으뜸. 하지만 벚꽃 필 무렵의 주말이나 휴일이면 일대는 아예 주차장이 되고 만다. 한꺼번에 몰려든 행락객들도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고 늦은 밤까지도 벚꽃 반 사람 반이다. 이보다 좀 덜 붐비는 곳이 김유신장군묘 인근의 송화산 아래 흥무공원이다. 흥무공원으로 이어지는 서천변의 벚나무 가로수길도 좋지만, 김유신장군묘 주차장에서 흥무로 쪽으로 내려오는 짧은 일방통행 도로도 놓치면 아쉽다. 여기서는 일제히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여윈 벚나무들을 만날 수 있는데 차를 두고 비처럼 쏟아지는 벚꽃잎 아래로 걸을 수 있다. # 꼭꼭 숨겨둔 벚꽃의 명소…풍산 봄이면 한꺼번에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이는 경주에서 떠들썩한 행락이 아닌 ‘호젓한 벚꽃놀이’가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 가능하다. 경주에는 경주시내의 벚꽃 풍경을 관광객들에게 다 내주고 주민들만 몰래 찾아가는 벚꽃명소가 있다. 경주시내에서 차로 20분 남짓 걸리는 안강읍의 방위산업체 풍산 공장. ‘꽃놀이에 웬 공장이냐’고 반문하겠지만, 경주 일대의 화사한 벚꽃 곁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명소 중의 명소’라고 치켜세우는 곳이니 믿어보자. 풍산은 방위산업체라 평소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지만 지난 2002년부터 일대의 벚꽃이 흐드러지는 4월 첫 주에 한해 공장 문을 열고 벚꽃행락객들을 맞아들인다. 올해도 2일부터 13일까지 공장 문을 개방한다. 기대 반 의심 반으로 풍산 공장을 찾아가는 길. 공장으로 들어서는 4차로 진입도로부터 1978년부터 심어 가꿨다는 벚꽃의 화려한 위용에 입이 딱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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