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25

醉月 2014. 4. 5. 11:05

군자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들과 살아야 한다

자로문진

 

▲ 구영, ‘자로문진’ 인물고사도책, 비단에 색, 41.1×33.8cm, 대북 고궁박물원
공자의 유랑길은 숱한 위험과 허다한 비난으로 점철됐다. 공자가 자신을 알아 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의 궁궐 문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공자 일행이 엽(葉) 땅을 떠나 채(蔡)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하를 건널 수 있는 나루터가 어디인지를 몰라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쟁기질하며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만났다. 공자는 제자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했다.

“저기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신가?”(장저)

“공구(孔丘·孔子)입니다.”(자로)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오?”(장저)

“그렇습니다.”(자로)

“그는 나루터를 알고 있을 것이오.”(장저)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묻자 걸익이 되물었다.

“그대는 누구시오?”(걸익)

“중유(仲由)입니다.”(자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란 말이오?”(걸익)

“그렇습니다.”(자로)

“도도하게 흐르는 물결처럼 천하는 모두 이렇게 흘러가는 법인데, 누가 그것을 바꾸겠소? 그대 또한 사람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찌 세상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는 것만 같겠소?”(걸익)

그러면서 밭 가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자로는 돌아와 금방 있었던 일을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는 실망스러운 듯 탄식하며 말했다.

“새나 짐승들과 함께 무리를 이룰 수는 없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산단 말인가? 천하에 도(道)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꿔놓기 위해 안달하지 않을 것이다.”

논어 ‘미자’ 편에 나오는 얘기다. 같은 내용이 사기 ‘공자세가’에도 보인다. 노나라 애공 4년(기원전 491년) 때의 일이었다. 이 장면은 ‘자로문진(子路問津·자로가 나루터를 묻다)’란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워낙 인기 있는 일화라서 ‘공자성적도’와 상관없이 여러 차례 독립된 화목(畵目)으로 제작됐다. 오늘은 명대(明代)의 구영(仇英·16세기 초엽)이 그린 ‘인물고사도책(人物故事圖冊)’에 담긴 그림을 살펴보겠다. 이 작품은 ‘양귀비’ ‘왕소군’ ‘비파행’ 등을 묘사한 10폭의 그림 속에 들어 있다.

구영은 화려한 채색으로 꼼꼼하게 인물을 묘사한 ‘공필채색화(工筆彩色畵)’의 대가답게 ‘자로문진’에서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림은 정확히 대각선으로 나뉜다. 공자 일행이 속한 오른쪽은 가파른 산과 울창한 나무로 뒤덮여 있다.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 있음을 상징한다. 그 중심에 공자가 탄 수레가 서 있다. 반면 걸익이 서 있는 왼쪽은 잘 정리된 밭과 잔잔한 황하가 펼쳐져 있다. 세상 어떤 시끄러움도 미치지 않는 평화로운 은둔지임을 상징한다. 그 끝에 걸익이 곡괭이에 의지해 서 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자로에게 세상을 떠나 자신처럼 살 것을 설파한다. 아직 나루터가 어디인지를 알지 못한 자로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다. 장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공자가 속해 있는 세상을 나무와 바위와 잡풀까지 꼼꼼하게 그린 반면 은자가 속한 세상은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장저와 걸익은 모두 도가(道家) 계열에 속하는 은자(隱者)들이다. 은자는 세속을 벗어나 숨어사는 사람으로 은둔자(隱遁者), 은인(隱人)이라 불린다. 비슷한 용어로 일민(逸民·산림에 숨어 살면서 관리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과 일사(逸士·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사는 선비)가 있다. 자로와 두 은자의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 도가와 유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공자는 은자를 존경했지만 삶의 방식은 달랐다. 은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피해 세상 밖에서 살았다. 덕분에 혼탁한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고고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자는 정반대였다. 공자는 세상이 아무리 구역질 나는 탁류 속에 뒤범벅되었다 해도 결코 그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새나 짐승 같은 무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 속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희로애락을 함께하겠다는 투명한 의지가 담겨 있다.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비난 대신 그의 삶 속에 걸어들어가 함께 살아내기는 쉽지 않다. 공자는 비난 대신 더불어 사는 것을 선택한 실천가다. 이것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은자가 아닌 공자를 선택한 이유다.

공자가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묻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해 조선 중기의 문신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은 ‘간이집(簡易集)’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세상에는 원래 나루터로 가는 길을 몰라서 나루터를 묻는 자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잃지 않으려 함이다.’ 나루터는 공자가 지향한 이상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다. 공자가 나루터를 모를 리 만무하다. 알면서도 굳이 제자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한 것은 은자에게 다시 한 번 삶의 철학에 대해 대화를 나눠 보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은자들은 공자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두 은자가 나루터를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공자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난세에 은거하지 않고 도를 행하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는 공자가 마뜩잖았던 것이다.

공자가 은자를 만난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논어 ‘미자’ 편에는 두 편이 더 실려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를 따르다가 뒤처졌는데 우연히 한 노인과 마주쳤다. 그는 김매는 도구를 지팡이에 걸어 메고 있었다. 자로가 물었다. “어르신, 우리 선생님을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곡도 가려내지 못하거늘,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

세 번째는 초(楚)나라의 미치광이 접여(接輿)와 만날 때의 이야기다. 접여는 정치가 혼란스럽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산 은자였다. 그런 접여가 공자가 있는 곳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노래 불렀다. “봉황아. 봉황아,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했느냐. 지난날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따라갈 수 있구나.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지금 정치인들은 모두 위험할 따름이다.”

이 노래를 들은 공자는 수레에서 내려 그와 대화하려 했으나, 접여가 공자를 급하게 피해 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는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덕이 쇠했다고 한탄한 접여가 말을 잇는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룩하지만, 천하에 올바른 도가 없으면 성인은 몸을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손에 담을 줄 모르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은 모른다.”

그러면서 ‘땅에 금 긋고 그 속에서 허둥대는 따위 짓은’ 위험하니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그만두라고 충고한다.

공자가 유랑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은자들을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공자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음은 확실하다. 논어 ‘헌문’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자로가 석문이란 곳에 묵게 되었는데 새벽에 성문지기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자로가 ‘공자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성문지기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아, 그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 말이오?”

이런 비난과 손가락질을 견디면서도 공자는 결코 ‘나루터’를 건너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자가 빈손으로 14년 유랑을 버틴 비결

호시관준

▲ 작자미상, ‘호시관준’,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0.2×51㎝, 국립중앙박물관
공자의 유랑생활도 어언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를 등용하겠다는 왕은 없었다. 14년 동안이나 유랑했다. 혼자 몸도 아니었다. 여러 명의 제자가 공자를 따랐다. 그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재워 줄 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유랑은 가능하지 못했다. 공자가 다닌 곳은 위(衛), 진(陳), 조(曹), 송(宋), 정(鄭), 채(蔡) 6개국이었다. 공자는 산동성에 있는 노나라에서 출발해 서쪽과 북쪽으로는 황하를 건너지 못했고 남쪽으로는 장강에 이르지 못했다. 그다지 넓은 지역은 아니었으니 한 번 갔던 곳을 또 방문할 때도 많았다.

일정하게 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떼거리로 다니는데 그들을 받아 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들은 육체노동을 해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앉았다 하면 예(禮)가 어떠니 인(仁)이 어떠니 하면서 토론을 벌이기 일쑤였다.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면 악취를 풍긴다는 속담처럼 쓸모없는 손님을 거듭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운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공자 일행은 14년 동안 누군가의 손님이 되어 그렇게 살았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공자가 진(陳)나라에 머물렀을 때였다.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일 년이 넘게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매 한 마리가 진나라의 조정에 날아와 죽었다. 새매의 몸에는 싸리나무로 대를 만들고 돌을 깎아 촉을 만든 화살이 꽂혀 있었는데 길이가 한 자 여덟 치나 됐다. 아무리 살펴봐도 진나라나 주변국에서 쓰는 화살은 아니었다. 진나라 민공(湣公)이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죽은 새매를 보내면서 이 일에 대해 물었다. 새매에 꽂힌 화살을 유심히 살펴보던 공자가 대답했다. “이것은 숙신(肅愼·옛날 중국 북방에 살던 퉁구스족)이 쓰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사방의 오랑캐로부터 조공을 받을 때 숙신에게서 이 화살을 받아 호공에게 주면서 진나라에 봉했습니다. 옛 문헌을 찾아보면 이런 사실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민공이 사람을 시켜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했더니 과연 진나라의 왕실 창고에도 이것과 똑같은 화살이 있었다.

‘호시관준(楛矢貫準·화살에 맞은 새매가 날아와 죽다)’은 그 내용을 그렸다. 오른쪽 병풍 앞에 앉아 있는 붉은색 복장의 남자는 민공일 것이다. 민공의 뒤에 세워진 사각 병풍은 중요한 인물이 돋보이도록 그려 넣은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번에 본 ‘의봉앙성’에서도 공자 뒤에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신하가 들고 있는 가리개는 다르다. 왕이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의 뒤에만 그려진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공자가 머물고 있는 집의 사성정자가 아니라 민공임을 알 수 있다. 민공 앞에는 화살이 꽂힌 새매가 놓여 있다. 한눈에 봐도 새매보다 큰 화살이다. 그 앞에 서서 새매를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는 사람은 공자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새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림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분리된다. 오른쪽이 민공과 신하들과 병풍 등 복잡하면서도 뭔가 그득한 느낌이 드는 구도라면, 왼쪽은 공자와 두 제자만으로 그려진 단순한 구도다. 배경으로 그려진 언덕의 능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공자가 민공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아무 의미 없이 그려 넣은 능선이 그림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능선의 방향은 민공의 직위가 공자보다 높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호시(楛矢)라는 화살은 광대싸리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1척8촌(54.54㎝)이며, 화살촉은 청석(靑石)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숙신에서 만든 싸리나무에 돌촉을 붙인 화살(楛砮)은 천하에서 보물로 여겼다’라고 적어 놓았다. 그만큼 유명한 화살이다. 옛 문헌에 밝은 공자가 호시를 모를 리 없다. ‘호시관준’에는 공자가 오랜 유랑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이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그 비결이다.

공자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유랑하는 동안 각 나라의 군주나 경공사대부들이 궁금해 한 사항을 ‘참고 문헌’을 곁들여 설명해 줬다. 당시 군주들은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었고 학문을 사랑하기보다는 무력을 선호했다. 공자만큼 유식하고 혜안을 갖춘 학자가 없었다는 뜻이다. 운 좋게 차지한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능력 없는 군주에게 공자는 대단히 중요한 해결사였다. 공자에게 물으면 마치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 즉시 대답했다. 이것이 공자가 기나긴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생선과 손님’처럼 천대받지 않은 이유였다. 밥만 축내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지 않은 방법이다.

양나라 왕은 ‘붉은 새 한 마리가 입에 자줏빛 꽃무늬가 새겨진 황금 죽간을 물고 날아와서 왕의 앞에 내려놓은 의미’를 물었고, 초나라 소왕은 ‘강을 건너다가 강 가운데에 붉은 빛을 띠는 큰 물건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공자에게 물었다. 제나라 왕은 ‘다리가 하나뿐인 새가 조정에 날아와 날개를 퍼덕이며 뛰어다닌’ 연유를 물었고, 오나라 왕은 월나라를 정벌한 후 ‘회계산의 성벽을 허물다가 발견된 유골’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그때마다 막힘 없이 대답했다.

공자의 역할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알려주고 자문해주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때로는 어리석은 위정자들을 꾸짖고 부끄럽게 만드는 목적으로도 이용됐다. 진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후가 능양대(陵陽臺)라는 전각을 짓고자 했는데 시일이 오래 지나도록 공사에 진척이 없었다. 화가 난 제후는 일의 책임을 물어 수십 명의 인부를 죽이고 감독관 세 명을 참수하려 했다. 그때 마침 공자와 함께 공사 중인 능양대를 둘러보게 됐다. 제후는 공자에게 “옛날 주나라 황실에서 영대를 건축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죽였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문왕이 영대를 세울 때는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움직일 수만 있으면 서로 나와서 일을 하고자 하였는데, 어찌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진나라 제후는 심히 부끄러웠다. 그는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감옥에 가둔 관리들을 풀어주고 능양대 공사를 그만두도록 했다. 상대방의 치부를 직접적으로 욕하지 않으면서 부끄럽게 만드는 것, 그것이 공자의 화술(話術)이었다.

그러나 어찌 상담해 주는 일이 유랑한 목적이겠는가.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군주를 만나는 것이 목적인 것을. 애공 6년(BC 489), 공자가 63세 되던 해에 초나라 소왕이 죽었다. 공자가 마지막으로 의지하려고 기대했던 왕이었다. 공자는 더 이상 자신을 알아 줄 군주를 찾아 유랑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나라에서 진나라로 돌아가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고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나 재능이 부족하고, 비록 학문의 성취는 볼 만하지만 바르게 활용할 방법을 모르는구나.” ‘논어’ 공야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는 위나라로 돌아가 5년을 더 보낸 후 노나라로 귀국했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이었다. 애공 11년(BC 484), 공자 나이 68세였다. 공자가 귀국하게 된 배경에는 단지 그의 수구초심(首丘初心)만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관직을 맡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제자들의 노력이 한몫했다. 다음에는 그의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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