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임실의 섬진강변

전북 임실의 덕치초등학교는 봄볕 아래 눈부시게 피어난 벚꽃터널을 교문으로 삼고 있다. 아이들은 하루하루 초록이 짙어가는 신록의 섬진강변 길을 걸어서 이 꽃터널로 등하교를 한다. 강변의 학교 풍경은 지금도 넘치도록 찬란하지만, 봄날의 풍경은 아이들이 평생을 가지고 갈 유년의 기억 속에 더 눈부신 추억으로 오래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섬진강 상류의 물길을 끼고 있는 전북 임실의 덕치초등학교는 지금 만발한 벚꽃으로 교문을 삼고 있습니다. 회문산 아래 화사한 벚꽃을 담장 삼고 있는 이 학교는, 알려져 있다시피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모교이자, 그가 36년 동안 재직했던 학교입니다. 혹시 슬며시 질투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으로 6년, 교사로 36년. 여린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변의 느리고 더디게 사는 사람들 속에서 시인은 이처럼 화려한 봄 풍경을 모두 마흔 두 번이나 보았을 테니까요. 그가 덕치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처음 봤다는 살구나무 한 그루는 생을 다해 베어졌고, 아이들에게 정직과 진실을 가르치던 시인도 이제 늙어 그 학교에서 물러났습니다. 그가 거의 평생을 다닌 덕치초등학교를 추억하면서 쓴 산문의 마지막 줄이 이렇습니다. “섬진강에 꽃이 피었고, 강물에 꽃그늘이 드리워지고 꽃잎이 강물에 흩날린다. 사람들아! 그 강물 위의 꽃잎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인 줄 알거라.” 마침 시인이 이 글을 썼을 때도 지금처럼 화사한 봄날의 한복판이었던 모양입니다. 봄날의 섬진강이라면 아마 다들 첫 봄꽃인 매화와 산수유의 화신(花信)이 당도하는 섬진강 하류의 전남 구례와 광양, 그리고 경남 하동을 떠올립니다. 지류의 물을 받아서 몸집을 불린 섬진강 하류 쪽은 온통 흐드러지는 꽃으로 봄 내내 소란스럽습니다. 섬진강 하류에서 봄꽃은 시작되지만, 매화 꽃잎이 분분히 날려 강물에 떠내려가고 난 뒤에 섬진강의 아름다움은 단연코 섬진강의 상류 쪽에 오래 머뭅니다. 섬진강 상류는 만발한 꽃으로 화려하지도, 몰려든 행락객들로 떠들썩하지도 않습니다. 봄기운을 빨아들인 강변의 신록을 끼고 흘러 내려온 강물이 그저 고요하게 흐를 뿐입니다. 그 물길을 따라서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강변의 작은 마을들이 가득찬 평화로 출렁거립니다. 그 강변길에서 논둑에 나와 삽을 씻거나 농기구를 정리하면서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순한 이들과 나누는 가벼운 목례만으로도 가슴은 따스해집니다. 이런 풍경을 찾아 전북 임실의 섬진강변을 따라가 봤습니다. 자전거도로를 만든다며 강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아스팔트 도로를 놓아버려 영 예전의 맛을 잃어버린 길도 있었지만, 강을 거슬러 실타래처럼 갈래갈래 펼쳐진 물길을 되짚으면 아직 포클레인 삽날에 다치지 않은 우리 강의 본래 모습쯤은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섬진강을 이루는 임실의 오수천 방죽길도, 부드러운 천담마을길도, 옥정호의 호반길도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목적지가 따로 없으니 바쁠 것도 없습니다. 섬진강 자락을 따라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벚꽃은 이제 섬진강 상류에도 절정을 넘겼으니 이제 곧 시인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이라고 말한 벚꽃잎이 섬진강의 맑은 물길을 떠내려갈 것입니다. 섬진강의 지류인 오수천의 물길에서 만난 신록의 풍경. 일찌감치 보드라운 새잎을 낸 버드나무와 아직 새순이 돋지 않은 겨울나무가 나란히 서서 이른 아침 비스듬히 드는 봄볕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다. # 섬진강 상류, 연둣빛 신록으로 물들다. 섬진강 상류의 물길은 지금 온통 연두색 신록으로 반짝이고 있다. 봄꽃이 이르더니, 신록은 더 과속이다. 강둑은 벌써 새잎을 낸 풀들로 벨벳처럼 윤이 나는 초록이다. 물이 한껏 오른 강변의 버드나무 가지에도 연두색 순한 이파리가 새로 돋았다. 초록이 저리 환할 수가 없다. 섬진강 상류에는 화선지 위에 둠뿍 찍은 수채화 물감처럼 초록이 번져 나가고 있다. 붓을 들어 찍은 자리마다 초록의 채도가 다르다. 봄날의 강물이 가장 맑아 보이는 것도, 물소리가 이맘때 더 청아하게 들리는 것도 다 초록 덕분인 듯하다. 봄날의 섬진강변을 따라간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할 첫 목적지는 전북 임실의 ‘천담교’다. 임실의 강진면사무소에서 순창의 동계면사무소로 이어지는 717번 지방도. 그 딱 중간쯤에 섬진강을 건너는 자그마한 다리 천담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길은 T자다. 왼쪽으로 꺾어지면 섬진강변의 천담마을과 구담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진뫼마을을 지나서 덕치초등학교까지 이어진다. 두 길을 놓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망설일 건 없다. 그냥 두 길을 다 걸으면 된다. 부드러운 흐름의 강을 따라가는 길이니 오르내림은 없다. 이 길이나 저 길이나 다 순하다. 필요한 건 시간일 텐데, 애초에 봄날의 섬진강을 걷겠다고 나선 길이라면 느긋하게 여유를 두자. 봄날의 구경을 흔히 ‘완상(玩賞)’이라고 한다. ‘희롱할 완(玩)’자. 한마디로 ‘논다’는 얘기다. 봄볕에 놀자는 데 바쁠 일이 뭐 있을까. 임실의 천담교에서 물길을 따라 진뫼마을로 이어지는 섬진강변의 풍경. 맑은 강의 푸른 물빛이 지난 가을의 억새와 새로 돋은 버드나무의 신록과 어우러진다. # 아름다운 시절…구담마을 가는 길 선택은 필요없지만, 길을 밟는 순서는 있다. 먼저 막다른 길부터. 천담마을과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강의 물길에 닿아 끊긴다. 이쪽 길의 정취는 일찌감치 알려졌다. 1998년 이 길 끝의 구담마을과 천담마을에서 찍은 영화 한 편이 꼭꼭 숨어 있던 이 길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렸다.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이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영화는 좌우익의 대립과 가난으로 가장 혹독했던 시절을 가로지른다. 실제로도 구담마을 일대는 회문산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과 토벌대의 비극의 생채기가 깊이 파였던 지역이다. 이런 영화에 ‘아름다운 시절’이란 제목을 붙인 건 마땅히 역설로 풀이할 것이지만, 스크린 속에 펼쳐진 구담마을 일대의 풍경만큼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눈부셨다. 영화가 개봉되고 화면 속의 강변마을이 알려지면서 외지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구담마을에 한때 관광객들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곧 영화는 잊어졌고, 외지인의 발길도 뜸해졌다. 그러나 영화가 잊어진 지금에도 구담마을 끝 당산나무 언덕의 정취는 여전하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강 풍경은 섬진강 전체를 통틀어 본다 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특히 요즘 같은 봄날의 풍경이 그렇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그 물을 건너는 징검다리, 강둑에 무성한 지난가을의 억새와 새로 돋은 초록의 풀, 신록으로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 이 자리에서는 딱히 무엇을 봐야 하는 게 아니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니 사진으로 담기에도 요령부득이고, ‘거기 가면 어떤 경치가 좋으냐’는 질문에도 딱히 답할 수 없다. 직접 가서 봐야 그 아름다움을 안다는 뜻이다. 천담교에서 구담마을까지는 편도 3㎞ 남짓. 길이 순해서 간 길을 그대로 되짚어 나온다 해도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다. # 꽃으로 교문을 삼다…덕치초등학교 ▲ 임실 오수면의 의견상. 불 속에 갇힌 주인을 구하고 저는 죽고 말았다는 ‘의로운 개’를 기리는 상이다. 다시 천담교로 되돌아가서 이번에는 T자 갈림에서 우회전해 가는 길이다. 진뫼마을로 이어지는 이쪽 길은 비밀처럼 숨어 있는 강변길이었다. 숲이 우거진 강변에는 말뚝에 묶인 염소가 풀을 뜯고 있었고, 물가에 선 백로가 한 발로 서서 유유히 사냥을 하던 그런 고요한 강변이었다. 그러던 것이 몇 해 전 강변의 나무를 죄다 베어내곤 자전거도로를 놔버렸다. 사실 따로 자전거도로를 낸 것도 아니다. 본래 차량이 드물게 오가던 길 위에다 아스팔트를 붓고, 자전거 차로를 그려 놓고는 ‘자전거도로’로 간주하는 모양이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 길은 지금도 차와 자전거가 함께 다니니, 굳이 자전거도로라 따로 내지 않고 예전처럼 차와 자전거가 함께 다녀도 그만이었다. 강변에는 자전거도로를 단장한다고 표지판과 김용택 시인의 시비(詩碑)를 어지럽게 세워 뒀다. 이래 놓고는 이 길에다 ‘오감물길… 시인의 강’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 아무래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건 ‘과연 시인이 이런 길을 원했을까’이다. 차선 반듯한 자전거도로보다는 본래의 비밀스러운 강변 숲길이 더 시인의 이름에 맞춤하지 않았을까. 한 무리의 자전거가 승합차 두 대를 뒤에 따라 붙이고 마치 경주라도 하듯 쏜살같이 강변길을 달려갔다. 자전거도로도 좋지만, 이런 길이야말로 도보를 위한 호젓한 숲길로 남겨 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길은 몇 개의 시비와 김용택 시인의 생가를 지나고 환경단체로부터 ‘풀꽃상’을 받은 정자나무도 지나 강변에 딱 붙어 이어진다. 이윽고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가면 덕치초등학교가 있다. 섬진강을 발치에 두고 야트막한 언덕 위 학교의 건물은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강을 따라가다가 왼편으로 키 큰 벚나무들이 늘어서 터트린 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곳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덕치초등학교다. 교정에 심어진 나무들이 모두 아름드리 벚나무들인데, 이게 한꺼번에 꽃을 피우니 온통 벚꽃으로 교문과 담을 삼은 형상이다. 아, 학교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마침 곧 체육시간이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나와 있는데 전교생이라야 서른 명이 좀 넘는 정도다. 벚꽃 그늘 아래서 아이들은 그네를 타거나 시소를 오르내리고 있다.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교정에 굴러다녔다. 아이들은 낯선 외지인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 교정 한쪽에서 꽃을 올려다보자 아이들 몇이 달려와 묻는다. “꽃이 좋지요.” 고개를 끄덕이니, 아이들은 마치 벚꽃을 제가 피우기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다. # 오수천을 따라가며 만나는 더 고요한 풍경 임실에는 더 호젓하고 고즈넉한 강변 풍경도 있다. 섬진강 지류인 오수천의 물길 주변은 때묻지 않은 천변의 풍경을 보여준다. 신록이 물들어 가는 물가를 끼고 자그마한 마을들이 고요한 곳이다. 이 길에서 만나는 마을이라 해야 옹기종기 모여 앉은 흙담벽의 작은 집 몇 채, 그리고 작은 예배당 하나, 누추한 점방 하나쯤이 고작이다. 마을 풍경은 정물처럼 고즈넉하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오수천은 오수면을 끼고 흘러내린다. 오수면은 이른바 ‘의견(義犬)’으로 이름난 곳. 의견이란 이름 그대로 ‘의로운 개’를 말한다. 이 개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말 국자감 학유였던 최자가 지은 책 ‘보한집’에 나온다. 지사면 영천리에 살던 김개인이 술에 취해 잠이 든 사이에 들에 불이 나 위험에 처했는데, 그를 따르던 개가 몸에 개울물을 적셔 불을 끄다 지쳐 죽었다. 잠에서 깬 김개인은 개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개를 묻고 지팡이를 꽂아 뒀는데 거기서 싹이 나와 큰 나무로 자랐다. 마을사람들은 그 나무를 ‘개 오(獒)’자와 ‘나무 수(樹)’자를 써서 ‘오수(獒樹)’라 이름했고, 마을 이름도 오수로 바꿨다는 얘기다. 오수의 의견은 우리나라 역사상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애완견이자 충견인 셈이다. 오수면 한복판의 의견을 기리는 ‘의견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 서 있는 의견비는 1955년 다시 만든 것으로, 본래 세워졌던 의견비는 일제강점기에 호안 공사 때 사라졌다가 1939년 현상금 20원을 걸고 찾아내서 1955년 비각 안으로 옮겼다. 비석 옆에는 의견상도 있다. 당시의 기록과 훗날 그려진 그림을 토대로 학자들이 개의 품종을 추정한 결과 ‘티베탄 마스티프종’의 혈통과 가깝다는 결론이 내려져 이를 토대로 의견상을 세웠다. 임실 오수면을 휘감은 오수천의 물길은 ‘만취정’을 지나 순창의 동계면까지 이어져 섬진강의 본류에 합류한다. 만취정에서 동계면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어찌나 한적한지 오가는 차량마저 드물 정도다. 마을길보다는 천변의 방죽 위로 차를 달리면 한적하게 신록을 만끽할 수 있다. 강변의 정취를 즐기며 천변을 들고나다 보면 745번 지방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어찌된 셈인지 이 도로의 벚나무 가로수의 꽃이 한참 늦다. 지난 주말 개화율이 50%가 채 안 됐으니 이번 주말쯤이면 ‘늦은 선물’처럼 도열한 벚나무에 만개한 꽃사태를 만날 수 있으리라. ◆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전주톨게이트를 나와 반월교차로에서 전주시청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조촌교차로에서 다시 우회전한다. 이어 대흥교차로에서 21번 국도에 올라 남원, 순창 방면으로 향한다. 구이교차로까지 가서 27번 국도로 갈아타고 순창 방면으로 간다. 필봉교차로에서 동계 방면 717번 지방도로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섬진강을 건너는 천담교가 보인다. 천담교를 지나면 거기서 천담마을과 구담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강변길과 진뫼마을과 덕치초등학교로 가는 강변길이 갈라진다. 섬진강의 지류인 오수천 천변을 따라가는 길은 마을길이나 방죽길이어서 따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조건 오수천의 물길에 바짝 붙어 있는 길을 따라가면 된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임실은 숙소 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성수면의 성수산자연휴양림(063-642-9456)과 삼계면의 세심자연휴양림(063-644-4611), 강진면의 필봉문화촌(063-643-1902)을 빼고 나면 모텔이나 방 한두 개짜리 민박이 고작이다.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옥정호 주변에는 국사봉모텔(063-643-0440), 리베라(063-222-5023), 리버사이드모텔(063-221-7968) 등이 몰려 있다. 섬진강 상류를 끼고 있는 임실의 대표 메뉴는 단연 민물매운탕이다. 운암면 옥정호 주변에는 매운탕을 내는 음식점들이 열댓 곳 정도 된다. 매운탕은 민물새우를 끓여 기본 육수를 내는데, 너나없이 비슷비슷한 메뉴에 맛도 평준화돼 있는 편이다. 강나루횟집(063-221-6274)은 시래기를 깔고 끓여 내는 메기탕이 대표 메뉴다. 덕치면 섬진강댐 입구의 강산에민물매운탕(063-643-7408)은 독특하게 두릅을 넣은 매운탕을 낸다. 섬진강에서 잡은 다슬기로 끓여 내는 다슬기탕도 ‘임실의 맛’으로 꼽힌다. 강진면 버스터미널 부근의 성심회관(063-643-1328)과 강진면사무소 앞의 성원회관(063-643-1063)이 이름난 곳이다. 이 밖에 주민들이 추천하는 식당이 몇 곳 더 있다. 임실시장 부근의 도봉집(063-643-2980)은 칼칼한 순댓국밥을 내는 집인데 이래봬도 내력이 30년이 넘었다. 다빈옛날짜장(063-642-3331)의 홍합짬뽕도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알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