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26

醉月 2014. 4. 11. 21:37

14년 만에 컴백한 ‘한물간 정치인’ 공자의 선택은

‘방추지덕’


▲ 작자미상, ‘방추지덕’, 1904년, 목판채색, 27.6×37.8㎝, 한국학중앙연구원
드디어 귀국했다. 68세의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다. 그가 노나라 땅을 다시 밟게 된 데는 제자들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 공자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노나라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염구(冉求), 자로(子路), 자공(子貢)은 노나라에서 핵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공서화(公西華)는 외교사절로 외교적인 일을 맡았고, 자유(子游)는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었다. 자하(子夏)는 거부(莒父)의 읍재가 되었고, 유약(有若)은 노나라가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공을 세워 애공(哀公)과 국정을 논했다. 나중에 공자의 손제자가 된 양부(陽膚)는 치안을 담당하는 판관이 되었다. 그야말로 공자 제자들의 전성시대였다.

공자의 제자가 자신이 맡은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방추지덕(放鲰知德¡¤어린 물고기를 놓아주는 것을 보고 덕망을 알다)’이다. 공자가 귀국하기 전 위(衛)나라에 갔을 때였다. 공자는 단보(單父)지역의 재상으로 간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공자는 제자 무마기(巫馬期)를 시켜 단보지역의 민심을 살펴보도록 했다. 무마기는 몰래 옷을 벗어 버리고 대신 다 해어진 갖옷을 입고 단보 경내에 들어섰다. 마침 밤이 되어 고기를 잡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부는 잡은 물고기 중에 작은 것은 도로 놓아주고 큰 것만을 가려내고 있었다. 궁금해진 무마기가 이유를 묻자 어부가 대답했다.

“우리 마을의 수령께서 어린 물고기는 다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잡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마기가 돌아와서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복자천이 덕으로써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지극함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이 어두운 밤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바로 곁에서 엄한 형벌이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일찍이 복자천이 다스림의 요체에 대해 물었을 때, 내가 이 일에 성실한 사람은 또한 저 일에 있어서도 본받을 수 있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 방법을 시행하고 있었구나.”

그림 오른쪽 병풍 앞에 앉은 사람이 공자다. 공자 곁에는 두 명의 제자가 서 있다. 공자나 제자 모두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다. 이 자세는 유가(儒家)의 전형처럼 알려진 공손한 자세다. 그들이 지금 야외에 있는데 병풍이 설치된 것도 이치에 맞지 않거니와 탁자 위에 죽간 대신 책이 놓인 것도 고증이 틀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화가가 살던 시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그리다 보니 발생한 오류다. 그림을 읽는 사람은 이런 사소한 흠집에 걸려 넘어지는 대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으면 된다. 그림 왼쪽에는 두 사람이 물가에 서서 대화를 나눈다. 무마기와 어부다. 유가인 무마기 역시 두 손을 모은 채 어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우리 마을의 수령께서는’으로 시작된 어부의 말을 들었을 때 무마기도 같은 ‘패밀리’로서 마치 자신의 선행을 칭찬받은 듯 뿌듯했으리라.

‘방추지덕’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배운 대로 잘 실천하고 있는 제자를 본 공자의 흡족함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이다. 예전에 우리 부모님이 ‘안 먹고 안 쓰고’ 교육에 투자해 성공한 자식을 바라볼 때의 흐뭇함과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공자성적도’에는 공자가 제자들의 활약상을 보고 만족감을 느낀 장면이 여러 곳에 담겨 있다. 자로가 재상이 되어 포(浦)지역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그의 정치에 대해 칭찬하는 ‘과포찬정(過蒲贊政)’, 자공이 신양(信陽)의 재상이 되어 길을 떠날 때 당부하는 ‘자공사행(子貢辭行)’, 자고(子羔)가 위나라의 사사(士師)라는 관리로 있을 때 어질게 법 집행한 것을 칭찬한 ‘자고인서(子羔仁恕)’, 자유가 무성 땅에서 재상이 되었을 때 군자의 도에 대해 대화를 나눈 ‘무성현가(武城絃歌)’ 등등 공자의 제자들의 활약상은 끝이 없다.

젊고 유능한 제자들의 활약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 정치가 공자는 BC 484년 겨울, ‘화려한’ 귀국길에 올랐다. 노나라의 실권자 계강자(季康子)의 초청에 응하는 형식이었다. 스승의 귀국을 위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자는 자공과 염구였다. 자공은 뛰어난 언변과 논리적인 화술로 시끄러운 국제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의 탁월한 외교력으로 자칫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오나라와의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됐다. 예법을 강조한 외교술 덕분이었다. 먼 훗날의 얘기지만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른 제자들이 모두 3년 만에 여묘살이를 끝냈으나 자공은 다시 3년을 더하여 6년간이나 공자의 무덤을 지킬 정도로 스승에 대한 마음이 극진했다. 그는 외교뿐만 아니라 예법에서도 전문가로 평판을 얻었다. 자공은 공자의 가르침을 자신의 일에 적용해서 성공한 제자였다.

자공과 더불어 공자의 귀국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제자는 염구였다. 그는 공자가 귀국하기에 앞서 계강자의 가신이 되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귀국하기 몇 달 전에 염구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해 온 것이다. 당시 노나라의 군주 애공은 거의 힘이 없었고 실질적 권한은 세 가문(계손씨, 맹손씨, 숙손씨)이 쥐고 있었다. 세 가문의 뿌리는 같은 조상이었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거의 원수처럼 지냈다. 계손씨의 권력이 워낙 비대해지다 보니 소외감을 느낀 맹손씨와 숙손씨의 심기가 불편했던 까닭이다. 세 가문은 사사건건 부딪치고 반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했으니 만약 세 가문이 합심하지 않으면 노나라가 패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때 염구가 나서 세 가문을 설득하고 번지(樊遲)를 부관으로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번지도 공자의 제자였다. 염구의 노력 덕분에 세 가문은 합심해서 제나라를 물리쳤다. 노나라는 물론 세 가문도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제 노나라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염구는 계강자에게 스승 공자를 모셔 오자고 제안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계강자가 염구에게 물었다. “그대는 군대의 일에 대해 배운 적 있는가? 아니면 타고난 재능인가?” 염구가 대답했다. “공자에게서 배웠습니다.” 계강자가 말했다.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염구가 대답했다. “그를 등용하면 나라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방식을 백성들에게 시행하거나 귀신에게 고하건 간에 유감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저와 같은 길을 걷게 한다면 비록 천 개 마을을 상으로 내려준다 해도 자기 몫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강자가 말했다. “내가 그를 초청하려고 하는데,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공자는 ‘국가의 원로’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러나 고국에서의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노나라의 사정도, 그를 모셔 온 제자들의 사고방식도 더 이상 공자의 훈계 한마디로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한물간’ 정치인이었고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기에는 너무 머리가 커져 있었다. 새로운 시련이었다

 

등 돌린 제자들 본 공자의 마지막 선택

 

‘부대전부’


▲ 작자미상, ‘부대전부’ ‘공자성적도보’, 중국 곡부문물출판사
공자가 노(魯)나라에 귀국한 기원전 484년의 일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향해 격앙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무리(제자)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를 성토해도 좋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공자가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한 사람은 누구일까. 공자가 귀국하는 데는 제자들의 힘이 컸다. 그중에서 염유(冉有)는 노나라의 실력자 계손씨(季孫氏)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공자의 귀국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염유가 공자를 찾아왔다. 계손씨가 토지세를 거둬들이는 문제로 공자의 의견을 듣고자 보냈다고 했다. 공자는 계손씨를 대신해 의견을 묻는 염유에게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 대답을 했다.

계씨가 염유를 세 번째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선생은 국가의 원로로서 나라의 대사를 선생의 의견에 따라 행하고자 하거늘 어째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래도 공자는 여전히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후 사적인 자리에서 염유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마땅히 예에 따라 많이 주고 적게 거둬들여야 한다. 만약 끝이 없는 탐욕을 좇는다면, 토지세를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로 나를 찾아와 물어볼 것이 무엇이냐?”

이때만 해도 공자는 염유가 마지못해 계손씨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계손씨의 정책이 시행됐다. 공자는 염유가 자신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염유는 계손씨가 주공보다 부유한데도 그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그의 부를 더욱 늘려 주고자 했다. 공자가 분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북을 울려 염유를 성토하라고 한 데는 이와 같은 실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부대전부(不對田賦·토지세에 대한 자문에 답변하지 않다)’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른쪽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계손씨일 것이다. 그의 앞에서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은 염유다. 왼쪽에 서 있는 세 사람은 공자 일행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염유의 행동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서로 관련 없는 사람들처럼 서 있는 두 무리의 인물들을 보면, 지향점이 전혀 다르다. 맨 뒤에 서 있는 소나무가 같은 공간에 있으나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비록 자신의 귀국을 위해 힘쓴 제자였지만 공자는 잘못된 행동을 보고 묵과할 수는 없었다. 염유는 염유대로 스승의 반응이 서운했을 것이다. 자연히 스승과 제자 사이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염유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럴수록 공자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어느날 염유가 조정에서 나와 늦게서야 공자에게 문안을 드렸다. 공자가 염유에게 무슨 일로 늦었느냐고 물었다. 염유가 조정에 일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씨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조정에 일이 있었다면 비록 내가 등용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도 그것을 들었을 것이다.”

한때는 스승의 수레를 끌며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묻던 제자였다. 그런 제자가 더 이상 스승의 가르침대로 따르지 않았다. 공자의 서운함을 모를 리 없는 염유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스승을 비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느날 그가 공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스승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중도에 그만둔다. 지금 너는 안 된다고 스스로 선을 긋고 있다.”

공자의 뜻을 거스르는 제자는 염유뿐만이 아니었다. 자공은 제사에서 양(羊)을 쓰는 제도를 폐지하려다가 공자와 부딪혔고 재아는 삼년상을 일년상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가 어질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았다. 귀국 후 공자가 힘든 이유는 제자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이 들면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이 더 많다. 오래 살면 즐거운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 공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후 몇 년 되지 않아 아끼던 제자 안회가 사망했다. 공자가 71세 때였다.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는 말을 하며 안회의 죽음을 슬퍼했다. 제자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애통해하는 스승을 보고 걱정했다. 공자는 제자들을 향해 “내가 안회를 위해 상심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겠느냐”라고 되물었다. 안회를 향한 그리움이 그와 같았다.

중요한 것은 안회가 죽은 이후 제자들의 반응이다. 안회가 죽자 안로(顔路·안회의 아버지로 공자의 제자)는 공자의 수레를 팔아 곽(槨·덧관)을 마련하자고 했다. 고대의 대관들은 시신을 안치할 때 안쪽의 관(棺)과 바깥쪽 관(槨), 두 가지를 만들어 썼다. 안로는 스승이 자신의 아들 안회를 지극히 아끼는 것을 알고 화려하게 장례를 치를 속셈이었다. 공자는 안회를 몹시 아꼈지만 결코 예를 벗어나는 장례를 허락할 수 없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재주가 있든 없든 저마다 자기 자식은 귀하게 마련이다. 리(鯉·공자의 아들로 공자 나이 49세에 죽음. 일설에는 공자가 70세에 죽었다고도 함)가 죽었을 때 관만 있었고 곽은 없었다. 내가 걸어다니고 그를 위해 곽을 만들어주면 될 터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나도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어서 걸어서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승의 아들도 장사 지낼 때 곽을 쓰지 않았는데 제자도 스승의 예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무람이었다. 더구나 안회의 집은 허례허식을 치를 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안회는 거의 도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통이 비었다’는 공자의 얘기에서 알 수 있듯 매우 가난했다. 가난한 사람이 집안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성대하게 장사 지내는 것을 공자는 반대했다. 제자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가 탄식했다. “안회는 나를 아버지처럼 대했지만, 나는 아들처럼 대하지 못했다.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저 몇몇 제자 탓이다.”

공자는 안회를 아들 리처럼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었는데 몇몇 제자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제자들은 늙은 스승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세태가 많이 변했다.

안회에 죽음에 이어 두 번째 불행이 들이닥쳤다. 공자 나이 72세 때 자로가 사망했다. 자로가 위(衛)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대부 괴외(蒯聵)의 난이 일어났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자로는 죽을 것이다.” 용감하지만 급하고 우직하지만 타협할 줄 모르는 자로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한 소리였다. 우려했던 대로 공자의 예측은 정확했다. 위나라 사신이 와서 자로가 죽었음을 알렸다. 이어지는 말이 기가 막혔다. “자로를 죽여 젓갈을 담갔습니다.” 공자는 처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 제자들에게 “젓갈을 모두 엎어버려라”고 명했다. 젓갈만 봐도 자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홉 살 어린 동생 같은 제자를 잃은 늙은 스승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차마 어찌 이런 것을 먹을 수 있겠느냐?”

아끼는 제자들은 하나둘 곁을 떠나고, 남겨진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거스르는데 노나라 조정에서는 여전히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공자도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가 생애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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