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여울의 古傳여걸_02

醉月 2013. 2. 19. 01:30

자신의 자궁 믿고 더 큰 세상으로 돌진
가믄장아기

 

 

아이들에게 ‘최고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과연 최상의 교육방법일까. 교육환경 문제는 늘 논란거리이지만, 지금처럼 육아 부담이 극도의 스트레스가 된 사회에서는 더 첨예한 이슈가 된다. 사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부모나, 대안학교를 고민하며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부모나 공통된 합의점이 있다. 바로 ‘아이가 행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행복 기준이 문제다. 끊임없이 기쁨만 제공하는 교육이 좋은 것일까. 제주 신화 ‘가믄장아기’는 아이들에게 ‘좋은 것, 예쁜 것, 대단한 것’만 제공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방법은 아님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윗마을 사내 거지 강이영성과 아랫마을 여자 거지 홍은소천은 사랑에 빠졌고, 이후 얻어먹기를 그만두고 품팔이에 나서며 살림을 합친다. 첫딸이 태어나자 거지 생활을 접고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이 부부에게 동네 사람들이 감동해 육아를 돕기 시작한다. 정성을 다해 ‘은그릇’에 죽을 쑤어다 먹여 키웠다 해서 첫딸 이름은 ‘은장아기’다. 둘째 딸이 태어나자 이번에도 동네 사람들이 돕긴 했지만, 처음만큼 성의를 보이진 않는다. 이번엔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줬다고 해서 둘째 딸 이름은 ‘놋장아기’다. 이윽고 셋째 딸이 태어나자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해져 ‘나무바가지’에 밥을 담아줘 키웠는데, 이 셋째 딸 이름이 ‘가믄장아기’다. 그런데 가믄장아기가 태어난 후 신기하게도 거지 부부에게 전답이 생기고 마소가 우글대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풍경을 달고 살았다. 이후 부부는 품팔이하던 시절의 고생 따윈 생각지 않는 오만한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거지 부부의 셋째 딸

어느 날 부부는 딸들을 차례대로 불러 시험했다.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입고 행우발신(行爲發身)하느냐?” 첫딸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늘님도 덕이외다. 지애(地下)님도 덕이외다. 아바님도 덕이외다. 어머님도 덕이외다.” 첫딸의 대답에 흡족해진 부부는 둘째 딸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대답을 듣는다.

 

그들은 ‘너희가 잘 먹고 잘 사는 덕은 바로 부모 덕’이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어 셋째 딸 가믄장아기를 부른다. 그러자 그녀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술술 흘러나온다. “내 배또롱(배꼽) 아래 선그믓(배꼽에서부터 음부 쪽으로 내리그어진 선) 덕으로 먹고 입고 행우발신합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이유는 내 자궁 덕분이라는 것. 그러니 내 행복은 내가 만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부모 덕을 칭송할 줄 알았던 부부는 노발대발하며 셋째 딸을 쫓아내버린다. 가믄장아기는 검은 암소 한 마리와 옷 보따리만 챙겨 집을 나온다.

 

그날 이후 뒤늦게 후회한 부모는 가믄장아기를 걱정하다 결국 눈이 멀고,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린 채 다시 거지가 된다. 가믄장아기는 정처 없이 떠돌다 아들 셋을 키우는 노부부 집에 묵는다. 3형제가 마를 캐서 그것으로 연명하는 집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가믄장아기와 검은 암소를 본 순간 영 반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객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며 투덜댔다. 그런데 셋째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하, 이거 우리 집에 난데없이 검은 암소여, 사람이여 모두 들어와 어느 하늘에서 돕는 일이나 아닌가?” 셋째는 낯선 사람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법을 아는 남자였다. 어느새 가믄장아기는 세 사람의 됨됨이를 저울질하며 그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다. 첫째와 둘째 아들은 마를 캐내 가장 맛있는 부분은 자기네가 홀랑 먹고, 꼬리 부분만 끊어 부모에게 넘겨준다.

 

셋째 아들은 마를 삶아 가장 맛있는 부분을 부모에게 드리면서도 이보다 더 잘해드리지 못해 미안해하기까지 한다. “설운 어머님, 아바님. 우리 낳아서 키우려고 한 것이 얼매나 공이 들고, 이제 살면 몇 해나 더 사시겠습니까?” 가믄장아기는 ‘쓸 만한 사람은 작은 마퉁이(마를 캐서 살아가는 사람)밖에 없구나’ 생각하고, 그를 신랑감으로 점찍는다.

 

가믄장아기는 손님이면서도 마치 주인인 양 집안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늘 마죽만 먹던 이 집안에서 자신이 직접 지은 쌀밥으로 한상 차려 세 남자의 ‘먹는 모습’을 보기로 한 것이다. 첫째와 둘째 아들은 “조상대에도 아니 먹었던 이런 벌레 밥 아니 먹겠다”며 가믄장아기의 정성 가득한 상차림을 거부한다. 셋째 아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쌀밥을 푹푹 떠서 맛있게 떠먹음으로써 가믄장아기를 기쁘게 한다.

 

이제 가믄장아기는 더 놀라운 도전을 시도한다. 혼자 자는 것이 못내 섭섭하던 그녀는 “나하고 누울 아들이나 하나 보내십사”라고 노부부에게 부탁한 것이다. 노부부는 당연히 첫째 아들부터 등 떼밀었지만 첫째와 둘째 아들은 그것을 거부했고, 셋째 아들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가믄장아기와 “꽃을 본 나비처럼” 열정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가믄장아기가 그를 목욕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혀 갓과 망건을 씌워 놓으니 절세미남이 따로 없다.

 

 

현대인보다 더 창조적

이튿날 아침 몰라보게 말쑥해진 셋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첫째와 둘째는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두 사람은 암소 한 마리를 밑천 삼아 열심히 농사지어 큰 부자가 됐고, 살림이 좋아지면서 부모 생각이 간절해지자 ‘거지 대잔치’를 벌인다. 자기를 버린 부모가 맹인 거지가 됐음을 가믄장아기는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는 딸이 연 잔치에서 딸과 상봉하고 눈물로 죄를 뉘우치며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서양 동화가 대부분 금지옥엽으로 키운 공주의 배필을 찾으려고 ‘임금님’이 나서 각종 어려운 시험을 치르는 것과 달리, 가믄장아기는 스스로 시험 기준을 마련하고 남편감을 적극적으로 골랐을 뿐 아니라, 노부부의 아들 가운데 한 명과 자고 싶다는 의사까지 분명히 표현한다. 고전소설을 읽다 보면 현대 여성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옛 여성 모습에 감동받곤 한다. 가믄장아기는 그녀 말대로 ‘자신의 자궁’으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자궁’은 수많은 상징을 내포한다. 그것은 육체적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여성이 창조할 수 있는 모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가믄장아기는 암소 한 마리와 함께 정처 없이 길을 떠나 결국 자기 힘으로 반려자를 골라냈고, 마침내 자신을 버린 부모마저 품는다. 현대 사회의 부모는 ‘자식이 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교육목표로 삼는다. 그러는 동안 아이 스스로 고뇌하고 진통하는 능력은 점점 퇴화돼간다. 위험 부담을 줄여주는 것만이 최고 환경은 아니다. 자기 힘을 일찍 깨닫고 더 큰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가믄장아기의 적극성은 고통 앞에서도 부모 뒤에 숨지 않는 그녀만의 용기에서 우러나왔다. 고뇌하고 진통하는 능력은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니다. 더 많이 아파할 줄 아는 사람, 아픔에서 매번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만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미래조차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는 최고 인재가 아닐까.

 

버림받았던 딸이 아버지 목숨 살렸구나
바리공주
살다 보면 ‘아, 정말 이것만은 하기 싫다’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운명 거부권이 있다면 딱 한 번만이라도 그 거부권을 행사하고 싶은 순간,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커다란 걸림돌을 만난 순간 우리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그런데 아름다운 이야기 속 주인공은 우리처럼 ‘도피 유혹’을 느끼면서도 “네,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용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영웅의 여정이 시작되는 ‘부름’의 시간이다.

 

바리공주는 오구대왕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다. 또 딸이라니. 왕자 탄생을 기대했던 오구대왕의 노여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전생에 죄가 많아 상제께서 일곱 딸을 점지했으니 천지신명도 야속하고 강산풍백도 무정하다. 종묘사직은 뉘게 맡기고, 만조백관 누구를 의지하며, 삼천리강산 뉘게다 전자하랴. 그 애기 갖다 버려라.”

 

그리하여 바리공주는 바리공덕 할멈 내외의 양녀로 자라지만 언제나 친부모를 그리워한다. 결국 열다섯 살이 된 바리공주는 친부모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때마침 오구대왕은 불치병에 걸렸고, 자신이 내다버린 바리공주만이 생명수를 구해올 수 있다는 예언에 따라 뻔뻔하게도 그녀를 다시 찾는다.

 

그저 ‘아들 생산’만 비느라 바리공주의 걸음마도, 옹알이도, 글자 깨치는 모습도 보지 않았던 오구대왕은 바리공주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린다. “역정김에 너를 버렸구나. 홧김에 너를 버렸구나.” “무얼 먹고 이만큼 장성하고 무엇 입고 이만큼 자랐느냐?” 자신이 죽게 되자 그제야 딸을 찾는 아비의 비정함 앞에서 딸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사람은 추워도 어렵삽고 더워도 어렵삽고 배고픈 설움도 어렵삽고 헐벗은 설움도 어렵삽지만 저는 부모님 그리는 정이 제일 섧더이다.” 춥고, 덥고, 배고프고, 헐벗은 고통보다 ‘부모님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는 바리공주.

 

남성 중심 통치관에 균열 일으켜

바리공주는 태어나 처음 보는 아버지 앞에서 자기 마음을 고백한다. “금지옥엽같이 길러낸 여섯 성님들 못 가는 길을 어디라고 가오리까마는, 기른 은공은 없어도 열 달 들었던 공을 생각하고 배 아파 낳아주신 은공을 생각해서라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오리다.” 아버지 약을 구하려면 서천 서역국으로 떠나야 하는 머나먼 길. 귀하게 자란 여섯 언니가 못 가는 길을 자신이 가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기른 은공’은 없지만 ‘어머니의 낳아준 은공’을 기억하겠다는 것이다. 바리공주의 이런 결심은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여섯 언니는 물론,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도 ‘놀라움’을 안겼다.

 

오구대왕의 병은 국가 위기상황이기도, 가부장제 질서의 위기상황이기도 하다. 바리공주는 ‘아들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던 남성 중심의 가족관과 통치관에 균열을 일으킨 존재였던 것이다. 여전히 아들이 없던 오구대왕을 바리공주가 살려낸다면, 그 왕국의 절반은 바리공주 것이 될 수도 있다. 바리공주는 아버지 병을 고치려고 길을 떠나지만, 그 길은 점점 더 바리공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큰 길로 확장된다.

 

바리공주는 마치 남편 에로스가 떠나버리자 시어머니인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그녀가 내린 갖가지 시험을 통과하려고 험난한 여행길을 떠나는 프시케처럼,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수많은 미션을 통과한다. 그는 남성적 지략이나 완력, 정치적 권모술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아버지 생명을 구하겠다는 진심만으로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낸다. 홍두깨를 갈아 바늘을 만들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바리공주가 병든 아버지의 아픔을 생각하며 통곡하니, 그녀의 눈물방울이 홍두깨를 점점 가늘게 만들어 바늘이 되는 식이다.

 

신화에는 으레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려는 영웅에게 조력자가 나타나는데, 바리공주에게도 드디어 은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다가 죽더라도 가겠다”는 바리공주의 진심에 감동한 마고할미는 “네 효성 지극하니 갈 길을 인도해주마”고 말하며 낭화(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꽃) 세 송이를 준다. 바리공주는 이 낭화를 던져 인간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황천강을 건넌다.

 

이승과 저승 갈림길인 황천강에 이르렀을 때 바리공주는 원래 미션보다 훨씬 큰 운명의 힘을 만난다. 바로 가엾게 죽은 영혼들이다. 자식 없이 죽은 영혼, 출산하다 죽은 영혼, 황천 가는 길에서조차 외롭고 슬픈 영혼…. 바리공주는 낭화를 흔들어 불을 밝히고 떠도는 영혼들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한다. “불쌍허구 가련허다. 인생이 세상에 태어났다 무슨 죄가 많아 저다지 고통을 받으시나?” 바리공주는 자신 앞에 놓인 기막힌 운명의 덫마저도 잊어버린다. ‘제 살길’만 찾는 게 아니라 가엾고 불쌍한 영혼, 죄 많은 영혼이 가야 하는 외롭고 힘겨운 저승길을 인도하는 구실까지 자임한 것이다.

 

‘국가 중심’ 마다하고 저승신 자처

마침내 바리공주가 황천강을 건너 서천 서역국에 도착하자 문지기인 무장승(동수자)은 바리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해 “아들 3형제를 낳아줄 것”을 요구한다. 무장승은 전생에 죄를 지어 하늘에서 추방당한 후 저승 문을 지키는 홀아비 신세가 됐다. 바리공주는 그런 무장승의 외로운 처지를 딱하게 여겨 그의 소원을 모두 들어준 뒤 결국 원하는 생명수를 찾게 됐다.

 

바리공주는 생명수를 들고 불라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오구대왕을 살린 후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아버지는 바리공주에게 뭔가 큰 상을 내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리공주는 궁으로 들어오라는 제안마저 거절한 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돈도 싫고, 명예도 싫었던 바리공주는 “임무를 다했으니 당신 딸로, 이 나라 공주로 인정해달라”는 상투적인 제안이 아닌, 저승신이자 무조신이 되고 싶다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렇듯 바리공주는 ‘국가 중심’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한 채 국가 바깥의 길, 이승 바깥의 험난한 길에 서기를 자처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마침내 아버지 자리에 오르는 전형적인 남성 영웅의 길이 아닌, 아버지가 미처 돌보지 못한 곳, 국가가 쓰레기처럼 버린 죽은 영혼들의 저승길을 지키는 저승신이 되길 자처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보다 훨씬 큰 운명의 길을 찾았고, 마침내 아버지 길도 어머니 길도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아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걸림돌 앞에 선 영웅의 운명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바리공주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듯하던 고난 앞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숨겨진 더 큰 힘을 찾아내는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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