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아들 또 그 아들이 예서 살았더라
» 터키 하란의 옛 신전터 앞 마을. 달걀 모양의 원뿔 지붕을 한 흙집으로 벽면은 동물의 배설물로 바르고 지붕엔 빛이 들어오도록 구멍을 뚫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함을 유지하게 한 사막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
국경을 30㎞ 앞둔 아인 아이사의 카스르(궁전) 카페에서 잠시 쉰 뒤 국경도시 탈 압야드에 도착했다. 3㎞쯤 더 가니 국경초소가 보인다. 출국수속은 순조로웠고, 터키 입국수속도 무난했다. 통과수속에 1시간10분밖에 안 걸렸다. 터키 초소 너머에서는 터키 답사를 안내할 규벤 듀젠리가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었다.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을 낀 땅 유대·기독·이슬람교
모두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라고 소명받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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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16일 정오, 터키 땅에 들어서자마자 발길은 범상찮은 곳에 닿았다. 아브라함의 자취와 넋이 깃든 땅, 하란이다. 본래 ‘아람나하라임’(‘두 강 사이 아람사람들의 땅’이란 뜻)이라고 불린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서쪽에 유프라테스강이, 동쪽에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다. 줄곧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를 잇는 무역통로 구실을 해 왔다. 기원전 2500년께 고대 도시가 건설된 이래 여러 왕조들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숱한 유적을 남겨놓았다. ‘달의 신’을 모신 히타이트 시대의 신전과 세계 최초의 로마 시대 대학 터, 천문대와 수리시설 흔적이 여기서 발견되었다. 교통 요지라서 여러 큰 전쟁도 벌어졌다. 서기 원년을 전후해 이곳을 지배하던 페르시아의 파르티아조와 사산조가 로마의 거듭되는 내침을 격퇴한 격전장이 이곳이며, 1259년 칭기즈칸 손자 홀레구의 3차 몽골군 서정 때는 무참히 짓밟히기도 했다.
살을 사르는 듯한 뙤약볕 속에 셀주크 시대 상인무리(대상)들의 사라이(숙소)로 쓰인 신전을 찾았다. 방 100여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태반이 무너져버려 뼈대만 남았다. 사막을 주름잡는 대상들은 대체로 ‘사라이’라고 부르는 숙소를 짓는 것이 관례지만, 이 신전처럼 기존 건물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사라이 사이의 거리는 하루 주파 거리에 맞먹는 약 30㎞다. 일단 한 사라이에 도착하면 사흘은 공짜로 묵으며, 나흘째부터 숙식비를 치른다. 사라이는 비단 대상들의 숙박소일 뿐 아니라, 각지에서 싣고 온 물품의 교역소이기도 하다.
하란은 아브라함의 행적과 관련해 유서 깊은 고장이다. 〈구약성서〉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아들과 자부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이스라엘)으로 가던 도중 들렀는데, 데라는 여기서 이백다섯살까지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창세기’ 11: 31~32) 때는 기원전 2000년께. 아브라함은 이곳에 15년 동안 머문다. 그는 아들 이삭의 아내를 고르기 위해 종을 보내 나흘의 손녀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는다. 리브가의 아들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삼고자 14년이나 이곳에서 데릴사위 노릇을 한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소명을 재차 받들고 나이 일흔다섯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다.(‘창세기’ 12:1~4) 성벽 서쪽에 ‘야곱 우물’ 자리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리브가를 만나고, 야곱이 라헬을 만나 사랑을 속삭이던 장소라고 전한다. 이처럼 하란은 아브라함 일가 4대의 정신적 고향이다.
하란 땅에서 특이하게 눈에 띄는 것은 달걀 모양의 원추형 지붕을 한 흙집이다.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로 높이 4~나 되게 지은 이 흙집 겉면은 동물 배설물로 바르고, 지붕엔 빛이 들어오도록 구멍을 몇 개씩 뚫었다. 흙집이 몇 채씩 다닥다닥 붙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원뿔꼴 지붕은 천장에 공간을 많이 확보함으로써 여름에는 태양열을 분산시키고, 겨울에는 온기를 저장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사막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다.
40분 거리엔 ‘예언자의 도시’ 우르파
하란에서 답사를 마칠 때는 정오를 넘겼으나, 내친김에 북쪽으로 40분쯤 달려가 또 하나의 성지 산르 우르파를 찾았다. 우르파주의 주도로서 인구 40만을 헤아리는 이 고도는 기원전 2000~3000년부터 알려졌다. 아브라함과 욥, 에리아 등 예언자들이 살던 곳이라서 ‘예언자의 도시’란 별칭도 갖고 있다. ‘산르’는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명예칭호다. 그래서 보통 ‘우르파’라고만 부른다. ‘우르파’는 아람어 ‘우르하이’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오스만 제국 시대 여기 살던 한 명문가의 이름이라고 한다.
우르파는 하란과 더불어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를 잇는 교통 요로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해 왔다. 일찍이 바빌로니아 왕조의 치하에 있다가 기원전 325년 시리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이름을 에데사로 바꿨다. 216년 로마 식민지로 전락할 때까지 300여년 동안 에데사는 독립 왕국의 서울로 있으면서 초기 기독교의 탄생과 성장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곳은 기독교 탄생의 한 문화적 배경이던 시리아어권의 심장으로서, 기독교가 국가 종교로 첫 공인을 얻은 고장이며 동방 기독교의 본거지였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치하에 있다가 639년 이슬람군 진출로 점차 이슬람화하다가 한때 십자군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1637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줄곧 터키 영토에 속해 있으며, 쿠르드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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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년 동안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이곳을 성역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공동조상 아브라함의 자취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님루트는 꿈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들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신생아들을 죄다 죽인다. 그래서 아브라함 어머니는 한 동굴에 숨어서 그를 낳아 키우다가 일곱살 때 아버지에게로 보냈다고 한다. 그 동굴이 바로 오늘날 마스지드 건물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바위 동굴이다. 동굴 앞에서 몇몇 참배객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 탄생설은 신빙성이 별로 없으나 무슬림들이 전승하고 있다. 마스지드를 에워싼 언덕에는 히타이트 시대 쌓은 성채 잔해가 높이 10~1의 돌탑 25기, 특히 기원전 2~3세기에 지은 17m가 넘는 돌탑 둘과 어울러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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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지드 바깥에는 ‘아브라함 못’이라는 연못이 있다. 지금은 나무와 화초가 우거진 공원으로 꾸며진 쉼터로 쓰이고 있다. 물이 콸콸 쏟아지는 연못 속에는 팔뚝 같은 물고기 수천 마리가 노닌다. 모두들 성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전설에, 아브라함이 이곳에 만연된 우상숭배를 비난하자 지배자는 그를 화형에 처한다. 그러자 불은 바로 연못의 물로 변하고, 화형용 장작은 물고기로 바뀌어 결국 아브라함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연못과 물고기는 신성시되어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큰 화를 입는다는 믿음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 별미 ‘케밥’ 2백여종 넘어
성지 두 곳을 단숨에 들렀더니 점심시간이 두 시를 훨씬 넘겼다. 찾아간 곳은 이곳 명물인 우르파 케밥 전문식당이다. 터키 요리는 중국, 프랑스 요리와 더불어 세계 3대 요리로 꼽힌다. 그 중 백미인 것은 꼬챙이에 끼워 굽는 고기, 즉 케밥이다. 숯불 화덕에 돌려가면서 굽는 되네르 케밥이나 사이사이 채소를 끼워 굽는 쉬쉬 케밥 같은 보통 케밥이 있는가 하면, 지방 특색을 살린 여러 케밥도 있다. 그 종류는 무려 200~300종에 이른다. 향신료에 다진 양, 닭고기를 쇠꼬챙이에 꿰어 구운 우르파 케밥은 정말 별미다. 곁들여 양파와 토마토, 고추, 감자튀기, 필리우(버터 볶은 밥)가 나왔다. 터키에서 밥은 일종의 부식이다. 이상하리만큼 터키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다.
하란과 산르 우르파를 성역으로 만든 장본인은 아브라함이다. 그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혈통적 조상으로서 이 3대 유일신교에 친연성을 부여했다. 그럴진대, 이들 종교를 앙숙으로 내모는 작태는 천만부당한 것이 아닌가.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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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파, 179년 세계최초로 기독교 공인한 도시
고도 우르파는 동서 문명교류사에서 ‘에데사’란 옛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명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르파가 동서 문명이 가장 첨예하게 격돌했던 전란의 땅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풍요의 땅 메소포타미아의 서북쪽 현관인 이곳을 차지하려고 일찍이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사산왕조의 동방 제국은 수백년이나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벌였다.
전란의 구름은 십자군 전쟁 때도 여지없이 몰려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함께 떠받드는 선지자 아브라함이 머물던 성지란 점이 역설적으로 두 세력 사이에 한치 양보도 없는 영토 싸움을 부추킨 것이다. 1098년 동지중해변 레반트 지역을 원정한 십자군이 최초로 나라를 세운 곳이 예루살렘 아닌 에데사였고, 이후에도 맘루크 왕조의 무슬림들과 유혈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역사가 그렇듯 전란의 참화는 종종 교류의 물꼬가 된다. 1114년 에데사의 십자군 진지가 무슬림들에게 함락되자 로마로 구원병을 청하러 갔던 현지 사제 위고는 페르시아 동방의 기독교왕 요한이 무슬림 공략을 준비한다는 낭설을 교황청에 흘린다. 솔깃해진 서방 세계는 요한 왕과 동맹을 맺기 위해 실크로드에 눈길을 돌렸고, 그것이 사상 최초로 몽골제국과 유럽 제국 사이 실크로드 직교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사실 종교 교류사를 보면, 에데사는 5세기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교 근거지이자 기독교 동방전도의 시발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179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도시이자, 시리아계 동방 기독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에데사는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더불어 전도의 2대 핵심축이었다.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성모의 신성설을 부정해 이단으로 파문당하자 에데사를 중심으로 교세를 모은 뒤 페르시아로 망명해 기독교의 동방 전도 길을 가장 먼저 개척한다. 당나라 때 중국에서 유행했고, 신라와 고려에도 전파설이 제기된 ‘경교’(네스토리우스교의 중국식 이름)의 융성이 바로 그 동방전도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고대 동방기독교 연구의 핵심 자료인 시리아어 성서들도 대부분 에데사에서 번역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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