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선시(禪詩)감상_07

醉月 2011. 1. 26. 08:56

悟道頌(오도송)

一擊忘所知             일격에 아는 바를 잊어버리니
更不可修治             다시 닦고 다스릴 게 없다
動容揚古路             움직임에 옛 자취를 드러내고
不墮悄然機             다시는 모양에 떨어지지 않는다
處處無蹤跡             처처에 무슨 자취가 있으랴
聲色外威儀             소리와 빛깔 밖에 참 모습이더라
諸方達道者             제방의 깨친 이들은
咸言上上機             모두 이 경계를 최고의 근기라 말한다

去年貧未是貧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今年貧始是貧         올해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네
去年無卓錐之地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今年錐也無             올해는 그 송곳조차 없어졌네

我有一機                나에게 한 기틀이 있으니
瞬目是伊                눈깜박할 사이라도 모든 모습을 보이지만
若人不會                만약 그대가 알지 못한다면
別喚沙彌                따로이 시자를 불러 주리라

향엄지한 선사(香嚴智閑 禪師, ?~898)
중국 당나라 때 靑州 사람. 계산溪山에게 출가. "책이나 글로 배운 것 말고 태어나기 전의 소식을 일러 보라"는 위산山의 물음에 막혀 고심하다가 책을 모조리 불질러 버리고 울면서 위산을 하직, 정처없이 떠돌이 길에 올랐다. 南陽 忠國師 유적지에 가서 쉬던 어느 날 채전밭을 매다가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아, 후세 사람은 이것을 '香嚴擊竹'이라 하였다. 평소 衲子를 제접함에는 그 말이 간략하고 곧았다. 게송 200여 수를 남겼다.

 

寒山寺(한산사)

 

千回石徑白雲紂
岩樹蒼蒼挽色濃
知有蓮坊藏翠壁
好風吹落一聲鍾


천번이나 돌길을 이리저리 돌아가니 흰 구름이 막혀있고
바위틈 나무는 푸릇푸릇한데 노을빛이 무르익었네
절이 푸른 절벽에 감춰져 있는건 알지만
좋은 바람 일어 종소리를 뚝 떨어뜨리네

이인로(1152 ~ 1220)
고려시대의 학자. 자 미수(眉). 호 쌍명재(雙明齋). 초명 득옥(得玉).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난을 피한 후 다시 환속하였다. l180년(명종 10)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석학(碩學) 오세재(吳世才)ㆍ임춘(林椿)ㆍ조통(趙通)ㆍ황보 항(皇甫抗)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 등과 결의, 함께 어울려 시주(詩酒)를 즐겼다. 이들을 강좌7현(江左七賢)이라고 한다.
신종 때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고종 초에 비서감(秘書監)ㆍ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 ·예서(隸書)가 특출하였다.
저서에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다.

 

고기잡이 늙은이가

 

漁翁夜傍西巖宿
曉汲淸湘燃楚竹
烟消日出無人見
乃一聲山水綠


고기잡이 늙은이가 밤마다 서쪽 바위곁에서 자고
새벽으론 맑은 물을 길어다가 싸릿대에 불지펴 차를 마신다
안개가 사라지고 해가 돋아도 사람이란 냄새는 찾아볼 수 없고
“애내애내”한 소리에 산과 물은 더욱 푸르러진다.

유종원(773~819)
唐당나라. 자는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ㆍ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는데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다.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ㆍ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禪箴(선잠)

 

循規守矩無繩自縛
縱橫無碍外道魔軍
存心澄寂
照邪禪
恣意忘緣墮落深坑
惺惺不昧帶鎖擔枷
思善思惡天堂地獄
佛見法見二鐵圍山
念起卽覺弄精魂漢
兀然習定鬼家活計
進則迷理退則乖宗
不進不退有氣死人
且道如何履踐
努力今生須了却
莫敎永劫受餘殃


규율을 따르고 곡척을 지키는 것은 노끈없이 스스로를 묶는 꼴이요
종횡으로 무애함은 외도마구니라
마음을 맑고 고요한데 두기만 하는 것은 묵묵히 비추기만 하는 삿된 선이요
뜻을 방자히 하여 인연을 잊어버림은 깊은 구덩이에 떨어짐이라
성성불매에만 치우치는 공부는 자물쇠를 두르고 칼을 얹는 격이요
선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함은 그대로 천당과 지옥이요
이것이 부처님세계요 법을 깨쳤다는 생각은 두가지 철위산에 둘러싸임이라
생각을 일으켜 곧 깨닫는다는 것은 묘정의 혼을 희롱하는 놈과 같고
오똑하게 앉아 정을 익히기만 하는 것은 귀신굴의 살림살이라
나아가면 곧 이치에 미혹하고 물러나면 곧 종지에 어긋나니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면 약간의 기운이 있는 죽은 자일 뿐이니
말해보라...어떻게 수행을 실천해가리오
노력해서 금생에 모름지기 요달해 밝힐지어니
함부로 가르쳐서 영원히 남은 재앙을 받게 하지 말라
-일변도의 공부를 지적, 경계함

무문혜개선사(無門慧開禪師, 1183~1260)
중국 남송(南宋)의 임제종(臨濟宗) 스님
속성 허(許). 자 자원(子元). 천룡사(天龍寺)의 광화상(曠和尙)에게 배우고, 1246년 칙령(勅令)에 따라 항저우[杭州]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를 세웠다. 저서 《무문관(無門關)》이 유명하다.

 

이고가 낭주자사로 있을 때

李杲이고가 郎州刺師낭주자사로 있을때 藥山惟儼약산유엄선사를 친견하고,

見面不如聞名
“직접보니 소문듣기보단 별로네”
라고 말하자 유엄선사의 다음 말을 듣고 깨우침을 받아 이 게송을 지음.

何得貴耳踐目
“어찌 귀만 귀하게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겨 그런 소리를 하는가!”

鍊得身形似鶴形  수행하신 그 모습은 학의 형상과 같고
千株松下兩函經  천그루 소나무 아래 경전 두어권 놓아두었네
我來問道無餘說  내가 와서 도를 물으니 다른 말 없이
雲在靑天水在甁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에 있다 하시네

다시 이고가 묻는다.

如何是戒定慧 닛고
“어떤 것이 계정혜 입니까”

貧道這裏無此閑家具
“소승은 이 속에 그대 같은 한가한 살림살이가 없소”

마지막 한마디 더 해주십시오.

古古山頂坐
深深海底行

“앉을 때는 산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앉고
행할 때는 바다속 깊이 밑바닥에서 행하라”

이에 이고가 다시 게송을 짓기를 

選得幽居野情  깊숙이 머물 곳을 선별해 얻었으니 들에서 늙은 당신(약산유엄) 뜻에 맞으리
終年無送亦無迎  평생토록 사람이 와도 맞이하고 전송하는 법이 없고
有時直上孤峯頂  어느때는 고봉정위에서
月下披雲笑一聲  달 아래 구름을 헤치고 한번 크게 웃는다 


 

이고(李, ?~844)
唐당나라 재상. 사상적으로는 스승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것과는 달리,

그는 불교사상을 채택하여 심성(心性)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였다.
저서 《복성서(復性書)》는 한유의 《원성(原性)》과 더불어 인간의 본성을 논한 것으로 송대(宋代)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밖에 《이문공집(李文公集)》 18권이 있다.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고

 

喜我不喜
君悲我不悲
鴈思飛塞北
燕憶舊巢歸
秋月春花無限意
箇中只許自家知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고
그대는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네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고
제비는 옛집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도다
가을달과 봄꽃의 무한한 뜻은
그 속에서 다만 스스로 알 뿐이로다.

冶父道川야보도천 : 생몰 연대 미상.
남송대(南宋代) 스님. 속성은 적(狄)씨. 곤산(崑山)출신. 금강반야경송(金剛般若經頌)을 지음

 

嘆末法(탄말법)

 

麻衣曾不下山扃
慚愧如今道未成
柏樹工夫誰得力
蓮花世界但聞名
狂歌每向愁中發
淸淚多因醉後零
坐罷蒲團還失笑
莫將吾輩算天氓


베옷으로 일찍이 산문을 벗어나지 않았건만
지금껏 이룬 도 없음이 부끄럽구나
<뜰 앞에 잣나무> 공부는 누가 득력했다 하는가
연화세계 갔다는 이 이름만 들었을 뿐이네
미친 노래는 매양 슬픔 가운데를 향해 피어나고
맑은 눈물은 많이 취한 뒤에 흘린다
앉아서 좌복이나 떨고 있으니 도리어 실소만 나오니
우리를 보고 하늘의 백성이라 셈하지 말라

연파혜장선사(蓮坡惠藏禪師, 1772∼1811)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자는 무진(無盡). 색금현에서 출생.
어려서 대둔사에서 출가하고 월송 재관(月松 再觀)에게 구족계를 받다. 주역과 논어를 즐겨 읽고, 춘계 천묵(春溪 天默)에게 내외 경전을 배우고, 다시 연담 유일(蓮潭 有一)과 운담 정일(雲潭 鼎馹)에게 내전(內典)을 연구함. 27세에 정암 즉원(晶巖 卽圓)의 법을 받고, 30세에 두륜산 대흥사의 강석(講席)을 맡다. 특히 내전에서는 능엄경과 기신론을 좋아하고 변려문(儷麗文)을 잘하다.

 

艶情禪詩(염정선시)_簡翁간옹 : 생몰연대 미상

郞心葉薄妾氷淸
郞說黃金妾不應
假使偶然通一笑
半生誰信守孤燈


낭군님 마음은 잎사귀처럼 얇으니 첩의 마음이 얼음같이 청정하고
낭군이 황금으로 설득하지만 첩은 응하지 않으니
가사 우연히 한 웃음이라도 통했다면
반평생토록 외로운 등불 지키고 있었다고 어느 누가 믿어주리오


 

心印(심인)

- 十玄談 中 -


問君心印作何顔
心印何人敢授傳
歷却坦然無異色
呼爲心印早虛言
須知體自虛空性
將喩紅爐火裡蓮
莫謂無心便是道
無心猶隔一重關


묻노니 <심인>이란 어떤 얼굴을 지었는가
<심인>을 어느 누가 감히 주고 받으랴
역겁토록 확 뚫려 있어 다른색이 없거니
<심인>이라 부른다면 일찍이 헛된 말일 뿐이라
모름지기 체는 스스로 허공성과 같음을 알라
이글거리는 화로 속에 핀 연꽃과 같도다
무심이 곧 도라고 이르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겹 관문에 막혀 있느니…

동안상찰 선사(同安常察 禪師, ?~961)
중국 宋代스님. 청원행사의 6세손. 同安寺에 오래 주석했다. 율시 10수가 실린 <십현담>이 있음.

 

祖意(조의)

- 十玄談 中 -

祖意如空不是空
靈機爭墮有無功
三賢尙未明斯旨
十聖那能達此宗
透網金鱗猶滯水
廻途石馬出沙籠
慇懃爲說西來意
莫問西來及與東


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뜻은 공인 듯 공이 아니거니
신령스런 기틀이 어찌 유ㆍ무의 공에 떨어지리오
삼현도 이 뜻을 밝히지 못했는데
십성이 어찌 이 종자를 통달하리오
그물을 뚫고 나온 금빛 잉어는 오히려 물에 갇히고
길거리에 되돌아온 석마는 모래울을 벗어났다.
은근히 서쪽에서 오신 뜻을 말하고자 하노니
서쪽에서 왔느니 동쪽에서 왔느니 묻지 말라

- 石馬 : 유ㆍ무를 초월한 대도인
- 紗籠 : 최고의 진여 열반 자리

동안상찰 선사(同安常察 禪師, ?~961)
중국 宋代스님. 청원행사의 6세손. 同安寺에 오래 주석했다. 율시 10수가 실린 <십현담>이 있음.

 

눈 내린 들판 길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내린 들판 길 가운데를 갈 때
모름지기 어지러이 가지 말일이다
오늘 내가 간 자취를 따라

 

서산대사 휴정 (1520~1604)
조선 중기의 승려. 1534년 지리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데 공을 세웠다.
그는 선종과 교종으로 분리된 불교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삼교 통합론'을 내세워 유교,불교,도교를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을 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청허당집>, <선교결>, <심법요초>, <운수단>, <설선의> 등이 있다.

 

張九成 悟道頌(장구성 오도송)  

春天夜月一聲蛙
撞破乾坤共一家
正恁魔時誰會得
嶺頭脚痛有玄沙


봄하늘 달밤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건곤을 쳐부수어 한 일가가 되었도다
바로 이러한 때를 뉘라서 알아들을 것인가
고갯마루에서 발이 채였던 현사스님만이 아시리....
뒷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느니

 

장구성
宋代송대 인물. 子는 子韶(자소)요, 호는 無垢居士(무구거사).
예부 侍郞(시랑)으로 있을때 승상인 秦檜(진회)와 맞지 않아 14년간 귀양살이를 하며 經義(경의)를 해석하였다.
젊어서 영은사의 悟明(오명)선사를 뵙고 「뜰 앞의 잣나무」화두를 받았으나 오래도록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胡文定公(호문정공)을 뵙고 마음쓰는 법에 대해 자세히 물으니, 논어맹자에서 仁義(인의)에 대해 말한 부분과 한 곳으로 유추해보면 요점이 있다는 답을 들었다. 그 말을 잊지 않다가 하루 저녁은 변소에 가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仁(인)이 비롯되는 곳이다(惻隱之心仁之端측은지심인지단)’라는 구절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때 홀연히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느낀바 있어 위의 게송을 지었다.

 

자소(子韶)는 격물이요...

子韶格物
妙喜物格
欲知一貫
兩箇五百


자소(장구성)는 격물(物에 나아간다)이요
묘희(대혜스님)는 물격(物이 내게 이른다)이라 하니
한 관을 알고자 할 진댄
오백량이 둘이로다
* 1관은 1,000량

 

장구성이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받들기 위해 경산(徑山)을 지나던 길에 대혜스님을 뵙고, 大學(대학)에 나오는 격물(格物致知격물치지)의 뜻을 물었더니 스님이 말하기를 “공은 격물(格物)만 알았지, 물격(物格)은 모르는군요.”
공은 망연히 있다가 한참 뒤에 말하기를, “거기에도 어떤 방편이 있겠지요”라고 하였다.
대혜스님이 다시 이야기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아십니까. 당나라 사람이 안록산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사람은 앞서 남주지역의 태수였던터라 그 지방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후에 당 현종황제가 그곳에 행차했을때 그 그림을 보고 노하여 신하에게 초상화의 목을 치라고 명하였다. 그 반란자는 그때 먼 섬서성에 있었는데도 갑자기 목이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장구성이 이 말을 듣자 홀연히 꿈에서 깨어난 듯하여 不動軒(부동헌)의 벽에 위에 글을 지어 붙였다.
공은 이로부터 도를 참구하여 법을 깨달아 자유로왔고, 마음이 텅 비고 의혹이 없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