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강인욱_초원에서 한반도까지_01

醉月 2011. 1. 24. 08:40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 부산, 초원을 만나다
한민족의 흔적 찾아 멀지만 낯익은 북방 초원을 누비다

부경대 강인욱(사학과) 교수가 집필하는 새 기획 시리즈 '초원에서 한반도까지'를 22일부터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고고학자인 강 교수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북방 초원지대를 답사·발굴하며 이 지역 문명과 역사를 깊이 연구해왔다. 강 교수는 새 시리즈에서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초원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면서 북방 초원문명과 한반도 옛문화의 관계를 탐색할 것이다.

지난 3월 4일부터 부산박물관에서는 '몽골, 초원에 핀 고대문화'라는 제목으로 뜻 깊은 전시회가 두 달 반 동안 열렸다. 여기에서는 몽골 초원에서 문화를 꽃 피웠던 유목민족의 화려한 청동기들이 전시되었다. 개막식 직전에 필자와 몽골에서 온 척 바타르 씨의 기조강연도 있었다. 평일 오후였음에도 참석자는 의외로 많았다. 강연이 끝난 후 이어진 열띤 질문공세로 사회자는 개막식 시간을 맞추느라 진땀을 뺐다.


■ 부산, '바닷길의 도시'만은 아니다

    초원지대에 사는 알타이 사람. 전형적인 알타이 남자의 모습이다.

 

부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양도시이며 바다로 나아가는 관문이 아닌가. 몽골 측 초청강연자는 나에게 부산 사람들이 몽골초원에 관심이 많다며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부산이 초원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부산은 바닷길의 중심지이자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출발지점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화두는 국제화이다. 이미 바닷길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부산에 대륙과의 교류는 결코 낯설지 않을 것이다.

바다가 없는 부산을 상상할 수 있을까. 교류의 장벽이 완연히 사라지고 교류의 범위는 엄청나게 넓어지고 있는 21세기, 한국은 이제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이다. 우리나라 제2도시 부산도 단순히 '한반도-바다'를 잇는 교류 거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유라시아대륙-한반도-바다'의 연결을 생각하며 그 범위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장래 시베리아 철도가 이어지고 남북의 길이 트인다면 부산은 바다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부산이 초원을 만나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유라시아와 한반도의 연결고리는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물론 현실적인 경제, 정치, 사회적인 상황도 고려돼야 하겠지만 진정한 초원의 삶은 그들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땅 한 귀퉁이에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사는 농경민들과 달리 초원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그들의 역사를 모르면 그 진면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러시아에서 유학한 6년 동안 해마다 시베리아의 초원과 타이가 지역에서 발굴을 하며 북방의 초원문화를 연구했다. 직접 겪어본 시베리아의 초원과 타이가는 사진이나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초원의 삶은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만 했고, 소비에트 붕괴 이후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은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정체성을 잃고 조금씩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인적도 드문 계곡마다 초원 군데군데에서 수천 년 전의 거대한 고분과 바윗그림들을 보노라면 도대체 이 황량한 초원에서 고도의 문명을 꽃 피운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계사의 잃어버린 반쪽, 초원

    유라시아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본 모습. 이렇게 보면 부산은 유라시아대륙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사실 초원의 지배자들은 세계의 역사를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3500년은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세계 4대문명이 꽃을 피운 때이며, 한반도에서도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때이다. 세계사적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초원에서 꽃피웠다. 바로 목축이다. 초원의 사람들은 기원전 3500년경 목축이라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청동기를 만드는 법을 아시아에 전파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500년경에는 전차를 만들어 주변지역을 정복하기도 했다. 초원을 따라서 하루에도 수십 ㎞를 이동했던 그들은 지역감정이나 혈연에 얽매이기 보다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목초지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스키타이문화가 기원전 8~3세기에 출현한 이래 아시아의 초원지역은 흉노-투르크(돌궐)-키르기즈-몽골 등으로 이어지며 세상의 중심에서 역사를 움직여왔다. 서양이 르네상스와 신대륙 발견으로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기 전에는 초원의 지배자는 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산업혁명과 현대화를 거치면서 초원의 사람들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따라 뒷전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초원을 지배하는 자들은 결코 무지막지한 폭군이나 살인마가 아니었다. 험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거대한 사회를 이루었던 실용적이며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자연에 의지하며 목축을 했던 탓에 좀 더 자연 순응적이었고, 민감한 환경의 변화에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자신들의 글자로 자신의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초원의 민족과 적대적이었던 정착민의 역사에 기록된 그들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는 여전히 우리의 선입견에 남아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빠른 정보의 소통과 실용 위주의 생활문화에 기반한 유목민의 문화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바로 노마디즘이라는 코드가 그것이다. 지역 간의 거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신기술을 동시적으로 받아들이며 각 나라의 문화는 거대한 용광로로 녹아들어가는 형국이다. 마치 과거의 초원민족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역사로의 전환에 유목민의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한반도에 말을 걸어오는 푸른 대지

  한국과 만주의 고대문화에 영향을 준 북방지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 중국이며, 두 번째는 동해를 둘러싼 연해주지역과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시베리아에 광활히 펼쳐져 있는 초원지역의 문화이다. 필자는 지난해 3월부터 올해 4월까지 '강인욱의 북방역사기행'을 국제신문에 연재했다. 여기에서는 연해주와 한국을 잇는 환동해지역의 여러 역사이야기를 다루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북방 초원지역으로 넓힐 차례이다.

북방초원지대라고 하면,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민족의 기원을 떠올린다. 그 이유는 한반도 고대문화 곳곳에 북방지역 계통의 유물과 유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남부도 예외는 아니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나 가야 고분의 여러 북방계 문물이 그 좋은 예다. 또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한 북방 초원지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알타이어족, 북방기원설 등 우리에게 어려운 지명들이 낯익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초원의 역사는 우리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다. 하지만, 필자의 글이 한민족이 북방 초원지역 어딘가에서 왔다고 속 시원히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 것이다. 북방지역의 고고학을 20여 년 가까이 연구한 필자이지만 어느 한 곳에서 한민족이 왔다는 증거는 확실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방지역과의 교류는 시기별로 다양한 곳과 그리고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야에 보이는 동복을 비롯한 북방계 문화요소며 신라의 금관과 적석목곽분 등 우리 고대문화에서는 수천 ㎞의 거리를 무색케 할 만큼 북방 초원문화 요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을 한데 뭉뚱그려서 '한민족은 머나먼 초원에서 왔다'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맺고 싶지는 않다. 하나 하나 유물과 유적을 들어서 그 관계를 보겠다. 단순한 한국인의 기원찾기가 아니라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서 펼쳐지는 초원과 한국의 이야기들을 풀어보겠다.

이번 연재는 크게 2부로 나누었다. 먼저 1부에서는 고고학에 보이는 초원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할 것이며, 2부는 초원지역과 한국의 고대문화에 보이는 여러 유사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고대의 초원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태고적 신기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한민족 형성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줄 것이며, 또 급속도로 국제화가 되고 있는 남한 사회에 반면교사도 될 것이다. 좋든 싫든 한국은 빠른 속도로 다민족화가 되고 있고 다문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팽배하다. 타문화에 개방적이며 차별없이 주변민족을 받아들였던 초원국가의 모습에서 우리의 답을 얻을지 모른다. 몽골제국이 세계의 반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되 그들을 거대한 몽골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구현할 수 있었던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북아 교류의 중심지인 21세기 부산이 배울 점이기도 하다. 부산이여, 초원을 만나자.


◆ 강인욱 교수 약력 =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동북지방, 유라시아 초원지대, 연해주의 청동기~철기시대와 한국의 고대문화에 대한 50여 편의 논문, 8권의 저서·역저가 있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 구석기인들,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동아시아로 오다

 
  우스키-칸 지역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 유적.
자기 민족의 역사가 오래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구석기시대의 연대를 마구 올려서 주변 나라보다 자기네 역사가 더 뛰어났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흔하다. 바로 2001년 일본의 구석기 위조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 민족들을 위한 좋은 유머가 있다. 어느 나라 역사시간에 선생님은 열변을 토했다. "세계의 가장 오래된 언어는 우리나라 말이고, 아담과 이브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지요. 우리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우리 민족이 인류의 기원입니다!!" 이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선생님, TV를 보니깐 인류의 기원은 유인원이라는 데요?" 선생님의 대답. "아,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어보세요. 세상에서 원숭이와 제일 닮은 민족이 바로 우리랍니다."

누가 더 일찍 발생했는가를 경쟁하는 것이 곧 애국심을 높이는 길은 아니다. 인류가 이 험난한 세계에 적응하고 전 세계로 퍼지는 과정은 어느 한 민족, 국가의 자랑이라기보다 인류 모두의 자산일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 유라시아로 위대한 첫 발을 디디다

 
  데니소바 동굴에서 출토된 석기들.
유라시아 초원루트는 몇 십만년 전 인류가 세상으로 퍼지는 길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속으로 진화한 후에 약 170여 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전 세계로 퍼졌다. 인간이 전 세계로 퍼지는 순간이니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이때 전 세계로 퍼져나간 사람들은 호모 에렉투스라고 불리는 다소 구부정하게 걷던 사람들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왜 아프리카를 떠났는지 지금도 설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지능이 발달해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바로 호모 에렉투스가 세계로 퍼지면서 아시아로 건너오던 그 길이기도 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돌을 이용해서 도구를 만들고 불을 사용하면서 아시아 전체로 퍼져나갔다. 동아시아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적인 유적은 저우커우디엔(周口店) 유적이다. 프랑스의 신부 테리야 드 샤르댕과 수많은 구석기시대를 연구하던 사람들은 이 유적을 거쳐갔으니, 동아시아 구석기의 '성지'인 셈이다.


■호모 사피엔스, 유라시아를 거쳐 한국으로

 
  와이어에 의지해 알타이의 구석기를 조사하고 있는 여성 고고학자.
호모 에렉투스는 서양에서 네안데르탈인으로도 불리는 호모 사피엔스로 변했다. 1940년대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뫼비우스('뫼비우스의 띠'로 유명한 수학자와는 동명이인) 교수는 동아시아의 경우 발달된 주먹도끼는 만들 줄 모르고 거칠고 원시적인 찍개만 만들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서구나 아프리카에서는 점진적으로 인류의 진화가 이루어진 반면 아시아는 원시적인 석기를 쓰던 사람이 큰 변화 없이 최근의 몽골로이드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인종차별에 문화차별주의라고 구설수에 오를 법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주장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뫼비우스의 주장을 깨는 자료는 한국에서 나왔다. 1978년에 인디애나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왔던 보웬이라는 사람이 경기도 연천 전곡리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주먹도끼를 발견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도 그 소식이 알려졌다. 그가 발견했던 주먹도끼는 40년이 다 되어가는 뫼비우스의 이론을 뒤집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이후 연천 전곡리는 동아시아 구석기 연구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도 세계 고고학 지도에서 전곡리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한반도까지 흘러왔을까? 현재까지는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초원 루트는 수십만 년 전 구석기로도 올라가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이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현생인류)의 경우도 몽골과 알타이지역에서 가장 이른 후기 구석기의 좀돌날이 발견된 바 있다. 즉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등 새로운 인류가 등장할 때 마다 몽골과 알타이지역을 거쳐 아시아 곳곳으로 파급된 셈이다.


■아시아인류의 발원지인 알타이와 몽골

몽골과 알타이지역은 그러다보니 세계 구석기의 주요 연구지 중 하나가 됐다. 몽골과 알타이에서 시작된 후기 구석기의 몽골로이드는 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으니 몽골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알타이 하면 유목문화만 떠오르겠지만 이 지역은 아시아 구석기 연구의 메카이기도 하다.

알타이의 구석기 유적은 데니소바 동굴이 인상적이다. 이 동굴은 알타이공화국에 위치하는데, 노보시비르스크의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30년 넘게 발굴 중이다. 근처에 근사한 휴양지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 발굴비용에도 도움이 되니 일석이조다. 이 동굴에서는 2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이빨이 나와서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인골화석으로 꼽힌다. 한여름에도 춥기만 한 동굴 안에서 어스름한 전등불을 켜고 발굴 작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발굴하고 파낸 흙은 다시 근처의 강까지 실어날라서 체질한다. 조그마한 증거라도 건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나도 알타이를 조사할 때는 데니소바 동굴을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석기 전공자가 "같이 석기 주으러 갈까?"라며 필자를 부추겼다. 석기를 줍다니? 구석기를 발굴하려면 홍적세라고 하는 단단한 진흙층을 깨야지 나오는 게 정상이다. 고고학 중에서도 가장 중노동으로 꼽히는 작업이다. 그런데 석기를 줍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해서 따라가 봤다.

알타이공화국에서 몽골로 가까워지면서 코그-아쉬가치 지역에 도달하자 반 사막지역이 나타났다. 러시아 군용트럭으로 초원을 가로질러 유적에 도착하자 사방에 석기가 널려 있었다. 심지어 커다란 바위에 몇 만 년 전 사람들이 돌을 떼어낸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지금 막 원시인들이 다녀간 듯했다. 그 놀라움도 잠시, 석기를 수집하면서 돌들이 배낭에 쌓여갈 때 드디어 이 답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하나 둘씩 석기를 배낭에 넣다보니 곧 묵직해져 걷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그 연구원은 '여기 하나 더, 저기도…'하면서 돌을 건네니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결국 난 반기를 들었다. "좀 버리고 가지, 여기서 10만 년 이상 놓여 있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 아닌가."


■구석기인들의 엇갈린 운명

빙하기가 막바지에 이르는 2만~1만 년 전, 구석기인들의 운명은 엇갈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얼어붙은 베링해로 건너가서 아메리카 원주민이 되었다. 일부는 온난해진 환경을 피하고 추운 지역을 찾아서 북쪽으로 이동해서 현재 북극에 사는 사람들의 선조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난해진 환경에 적응하여 나무열매, 사냥, 어로 등으로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유라시아 초원지대에도 현재와 같은 초원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초원지역 사람들은 빙하기가 끝나자 곧바로 목축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기시대 초원지역의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수렵과 채집으로 생을 이어나갔다. 그러다보니 유적은 별로 없지만, 가끔씩 발견되는 무덤의 인골은 전형적인 북방계 몽골리안이다. 빙하기를 견디며 살던 구석기인의 후예인 것이다.

신석기시대가 끝날 무렵인 기원전 3500년께 일단의 새로운 사람들이 서쪽에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빙하기부터 이 지역에서 살았던 몽골로이드와는 다른 유럽인 계통이었고, 돌을 쪼개고 불에 녹여 새로운 도구인 청동기를 만들어냈다. 새로 온 사람들은 자연의 짐승을 사냥하지 않고 짐승 떼를 키우며 목초지를 따라 이동했다. 드디어 목축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초원은 온대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 말, 인간의 동반자가 되다

- 구석기 시대 벽화에 그려진 말…2만~3만년 전부터 먹을거리로 이용
- 기원전 3000년경 재갈 등장하고 안장·금속제 등자 발명되면서 가공할 전쟁터 무기 둔갑
- 목축 활발했던 중앙아시아 초원서 말젖 찌꺼기·말뼈 구덩이 등 사육 흔적 곳곳에서 발견

 
  알타이의 칼구타 암각화에 새겨진 말. 오른쪽 사진은 말의 복원 그림.
말이 없는 초원을 상상할 수 있을까? 말은 초원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 속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러시아 대중문화 속에서 말의 이미지하면 떠오르는 건 V. 비소츠키(1938~1980)의 '야생마'라는 노래다. 한국에서는 30대라면 중고등학교 때 단체관람으로 한번씩은 봤음직한, 미국으로 망명한 소비에트의 발레리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백야'(White Night)의 삽입곡으로 유명하다. 원제는 '제멋대로 가는 말'이다. 말떼에서 벗어나서 험한 곳으로 혼자 위험하게 달려가는 말은 자신의 운명을,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은 비소츠키 본인을 뜻한다. "제 멋대로 가는 말이여, 제발 조금만 천천히, 내가 노래를 마칠 때까지만 살 수 있을 때까지…"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비소츠키는 삶의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르다 심장발작으로 짧은 생을 불꽃처럼 태우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러시아 사람은 비소츠키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아직 비소츠키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노래는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노래이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도 시베리아의 대평원지대였다. 그 무엇이 이 노래만큼 말 위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말은 초원에 사는 사람들에게 운명이고 삶이었다. 채찍을 때려도 결국은 말은 자신의 길을 갈 뿐이기 때문에….


■말, 구석기인들을 먹여살리다

 
  시베리아 최초의 유목민 문화인 아파나시에보 문화의 고분.
말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의 먹잇감이었다. 지금은 말고기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린다. 말고기라고 하면 제주도나 일본 구마모토에서 먹는 말고기회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나이가 좀 있는 독자라면 30여 년 전에 한국에서 쇠고기파동이 일어났을 때 말고기를 대신 팔아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 기억나실지 모르겠다. 심지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공격할 때 식량이 떨어져서 말고기를 베어먹으며 연명했다는 이야기도 자주 회자된다. 이렇듯 지금은 말고기라면 못 먹을 것 또는 소수의 미식가만을 위한 음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인류는 적어도 2만~3만 년 전부터 말을 잡아먹었다.

스페인의 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굴 유적인 알타미라에서도 화려한 말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말그림은 스페인뿐 아니라 알타이에서도 발견되었다. 알타미라 동굴이 화려한 채색화라면 알타이의 칼구타 유적의 그림은 돌을 쪼아서 만든 암각화다. 칼구타의 말그림은 얼핏 보면 윤곽선만 간략하게 그려서 표현한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접혀진 뒷발이라든가 몸통 부분이 역동적이다. 아마 말의 습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 그린 듯하다. 게다가 배는 약간 볼록하게 되어서 마치 임신한 것처럼 보인다. 초원지역답게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말 그림이 발견된 것이다.


■말고기에서 운송수단으로

 
  데레예프카 유적에서 출토된 재갈멈치. 재갈멈치는 재갈이 말의 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주는 도구다.
기원전 3500년경에는 시베리아의 초원 전역으로 목축민이 확대되었다. 목축민은 지속적으로 이동을 하던 사람들이다보니 주변의 정착민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새로운 기술이 순식간에 수천 ㎞나 떨어진 지역으로 전파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키우던 가축은 양 염소 말 등이었으며, 조금 더 북쪽의 툰드라지역에서는 순록을 키웠다. 목축이 도입되면서 말은 인간에게 친숙한 동물로 되었고, 그때부터 인류의 역사에서 말은 역사를 움직이는 인류의 동반자가 되었다. 단순한 말고기에서 운송수단으로서 말이 등장한 것이다. 말이 인간의 역사에서 운송수단으로 역할을 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의 마구가 발명된 것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첫째 기원전 3000년경 재갈이 발명되어 말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음으로 안장이 발명되어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기 3~4세기경 고구려와 선비족에 의해 금속제 등자가 발명되어서 본격적인 무장을 한 기사가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말과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말이 단백질의 공급원에서 탈 것으로 변하는 과정일 것이다. 말을 타고 다닌다는 기발한 발상을 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초원에서 말을 목축하던 중앙아시아초원의 사람들이었다.


■재갈, 말을 다스리다
야생의 말을 달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사람이 원하는 방향대로 가게 하려면 말의 입에 재갈을 채워야한다. 보통 두 번째 어금니를 빼거나 갈아서 그 사이에 재갈을 끼운다. 기승자가 재갈을 당기면 엄청난 압력이 말의 이빨에 가해지니 말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말이 단백질 공급원에서 타는 용도로 바뀌는 과정을 밝히려면 바로 재갈의 존재가 증명되어야 한다.

여기 말의 사육과 재갈 사용의 기원을 밝혀주는 중요한 유적이 있다. 바로 데레예프카와 보타이 유적이다. 유라시아 초원의 서쪽 드네프르 강 근처의 유적인 데레예프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이른 재갈의 증거가 나온 바 있다. 여기에서는 말을 방목했을 때 썼던 울타리 흔적과 함께 수백 마리의 말뼈가 한데 묻힌 일종의 제사 유적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말 중에서 아래쪽 어금니가 좌우 각각 한 개씩 인공적으로 빠져 있는 것도 발견되었으니, 목축하던 말 중에서 일부에 재갈을 채워서 탔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데레예프카 유적은 이전에 소비에트 시절에 조사된 것이어서 그 연대가 애매했다.

또 다른 증거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에 분포한 기원전 3500년경의 동석기시대 보타이문화의 유적에서 나왔다. 이 문화에서는 말을 대량으로 목축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같이 발견된 토기에서는 말젖의 찌꺼기도 나왔다고 한다. 야생으로 달리는 말을 힘들게 잡아서 말 뒷발에 차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젖을 짤리는 만무할 것이다. 게다가 말뼈 구덩이에서 발견된 말의 배설물을 조사한 결과 장기간 가두어 길렀다는 증거까지 나왔으니 본격적인 말 사육의 증거가 나온 것이다. 보타이는 현재 미국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데, 얼마 전 그 발굴 성과가 최고의 과학잡지인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됐을 정도니 그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말, 그 치명적인 유혹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의 사람은 다양한 동물을 목축하는 중에 말의 특성에 주목했을 것이다. 비록 지구력은 약하고 거칠어서 다루기는 쉽지 않지만 어떤 동물보다 빠르게 달리는 말은 재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생명인 당시 유목민들에게 유용했을 것이다. 특히나, 빠르게 달리는 말떼를 목축하기 위해서 당시 목동은 말떼 중 한 마리를 탈 것으로 이용했을지 모른다. 재갈이 있다고 해도 자유자재로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의 등뼈는 울퉁불퉁하고 튀어나와서 자칫하면 승마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야생마를 길들인다는 것은 때로는 자신의 목숨과 바꿀 만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더 좋은 목초지로 이동하고자 하는 유목민들에게 말은 치명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다. 말을 길들이는 자는 곧 초원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말이 인간의 동반자로 되는 순간은 바로 인간이 초원을 지배하는 첫 번째 과정이기도 했었다.

말에게 재갈을 채워 길들인 후에 말의 기능은 단순한 운송이 아닌 인간이 서로 죽이는 전쟁 무기로 등장한다. 바로 전차가 나온 것이다. 말 위에 타는 기승용이 아닌 2~3마리의 말을 끌고 뒤에 수레를 붙여서 다녔던 것이다. 말에게 처음으로 재갈을 물린 것은 기원전 30세기, 전차가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5세기였다. 전차가 등장하면서 인간과 말의 역사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인간 사이의 전쟁에 말과 말이 끄는 전차는 가공할 무기로 둔갑한 것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4> 전차, 유라시아의 역사를 바꾸다

- 기원전 17~12세기 메소포타미아서 거대한 왕국 건설했던 히타이트족
- 전차를 강력한 전쟁무기로 개량…인근 소국 잇따라 복속시켜 병합
- 기원전 14세기 '키쿨리문서'에는 건초·마굿간·말조련법 등 기록도
- 3000여 년 전 세계사 뒤흔든 전차 원천기술 개발한 안드로노보문화인…시베리아 초원지대서 살았던 민족


전차(chariot)라고 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영화 '벤허'의 전차경기 장면을, 젊은 사람들이라면 '글래디에이터'의 전차를 떠올릴 것이다. 말이 탈 것에서 무기로 바뀌면서 서양 고대문명에서 전차는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차의 기원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시베리아의 초원이었다.


■전차의 기원은 시베리아 초원

 
  히타이트인을 공격하는 람세스 2세. 룩소르신전의 탑문에 새겨져 있다.
말이 끄는 수레를 무시무시한 무기인 전차로 바꾼 사람들은 기원전 20세기 경 서부 시베리아와 우랄산맥에서 살았던 안드로노보문화인이다. 토볼강 근처의 신타샤 유적에서는 청동무기와 함께 두 마리의 말과 전차가 함께 묻힌 세계 최초의 전차가 발견되었다. 안드로노보문화 사람들은 기원전 20~13세기에 시베리아 초원에 살았던 인도-이란인 계통으로 아리안족의 선조이다. 2차 대전 중 히틀러는 순수한 아리안족의 보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수많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살상하였는데, 정작 그가 생각하던 그 위대한 '아리안'족은 엉뚱하게 시베리아에 있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수많은 피해를 내고 결국 전쟁에서 패하는 원인이 됐던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안드로노보문화의 서쪽 경계에 해당한다. 히틀러가 존경하던 아리안족 '조상님'의 음덕이 엉뚱하게 발현된 셈이다.

안드로노보문화의 전차는 기원전 18세기 경에 근동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기원전 13세기 경에는 근동의 역사를 뒤흔드는 사건을 주도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처음 전쟁으로 맞서는 그 중심에 전차가 놓였던 것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숙명의 한판, 카데쉬전투

 
  이집트 벽화에 묘사된 히타이트의 전차. 가운데 병사가 방패를 들고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를 읽은 독자라면 람세스가 메소포타미아의 신흥강국인 히타이트와 결전을 벌였던 카데쉬전투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전투는 나일강 안에서만 살던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과 최초로 힘 대결을 한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집트는 알아도 히타이트는 무슨 나라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 반 루운의 '고대 문명의 새벽'을 읽은 적이 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대해 간결하고 쉽게 쓰인 이 책에서 어린 나를 사로잡은 구절은 3~4줄에 불과한 히타이트족에 대한 내용이었다. 히타이트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난폭해서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었다'라는 구절뿐이었다. '바빌론제국을 무너뜨릴 정도의 나라인데 그냥 난폭했었다니, 그들은 재미로 한 국가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이었나?' 하는 의문이 일어났었다. 이후 이런 저런 책을 보아도 히타이트라고 하면 세계 최초로 철을 만든 민족이라는 것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세계 고고학의 메카라고 해도 좋을 근동지역에서 기원전 17~12세기 사이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거대한 국가를 이루었던 히타이트는 마지막 남은 미스테리였으나, 1980년대 이후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사(현재의 터키에 위치)가 발굴되면서 그들의 모습이 알려졌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도 히타이트와의 전쟁에서 패자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초의 전차전,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다

 
  최초의 전차무사가 묻힌 신타샤고분 30호에서 출토된 각종 무기들.
대부분의 전쟁에서 싸우는 양측은 모두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고 선전하니 양측의 선전문구만 모아놓으면 모두 승리자인 셈이다. 기원전 1274년 5월에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카데쉬전투도 양측의 각각 자기가 이겼다고 기록했으니 종합하면 둘 다 이긴 전투였다. 당시 무와탈리왕이 이끈 히타이트는 3500대의 전차와 3만7000명의 보병(이집트의 기록이니 과장이 많을 것이다)으로 람세스가 이끄는 이집트의 2만여 명의 전차와 보병에 맞섰다.

실제 전투에서는 히타이트 군대는 고작 1000대 정도의 전차만으로 이집트 군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람세스도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집트로 돌아온 후 카데쉬전투는 람세스의 승리로 바뀌어졌다. 람세스는 카데쉬에서 후퇴한 후에 이집트 각지에 승리를 기념하는 기록과 함께 전쟁에서 죽인 적들의 이름을 곳곳에 새겨넣었는데, 그 명단 중에는 무와탈리 왕의 동생 두 명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무와탈리의 동생은 전쟁에 참여한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최초의 전차를 만든 안드로노보문화권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 기하학적 무늬로 그들의 세계관을 나타냈다.
반면에 히타이트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인 보가즈코이유적에서 발견된 설형문자에 따르면, 패배한 람세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도망갔다고 한다. 누구 말을 믿을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히타이트도 카데쉬를 전쟁 이후 복속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무승부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만만하던 이집트 군사를 무너뜨린 히타이트 의 힘은 바로 전차에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전차에는 두 사람이 타서 한 명은 말을 몰고 또 한 명은 방어도 하면서 화살을 쏘아야 했다. 이에 비해 히타이트의 전차는 세 명이 탔다. 세 번째 병사가 방어를 전담했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공격을 퍼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전차는 더 많은 무게를 견디어야 했기 때문에 속도가 느려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히타이트는 전차를 경량화시키고 바퀴를 개량함으로 그 단점을 극복했다. 비록 이집트는 카데쉬에서 후퇴했지만 이 전쟁 이후 강력한 전차를 개발하여 강력한 이집트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근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전차 받아들인 히타이트, 메소포타미아 평정하다

 
  세계 최초 평화조약인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협정을 기록한 설형문자 유적.
전차가 승부를 결정한 카데쉬전투 이후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기원전 1259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이집트-히타이트의 평화조약은 지금 뉴욕 유엔본부 1층에 그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평화를 바라는 유엔의 이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데쉬전투는 결국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되었으니 양쪽 다 이긴 전쟁으로 봐도 되겠다.

나일강이라는 천혜의 요새 속에서 자신들만의 제국을 이루었던 이집트는 자신들의 영광에 도취되어 히타이트를 얕보았을 때 히타이트는 전차로 이집트를 무너뜨렸다. 카데쉬전투가 있기 600여 년 전에 안드로노보인의 전차가 근동지역에 도입되었지만, 파괴력을 지닌 전쟁무기로 개량한 사람은 히타이트인이었다. 히타이트 언어로 기원전 14세기에 기록된 '키쿨리문서(kikkuli text)'는 당시 히타이트인들이 전차에 쓰는 말을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키웠는지 알 수 있다. 건초, 마굿간에서 실제 주행법에 이르기까지 그 세밀함은 요즘의 웬만한 말조련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안드로노보의 전차, 동아시아로

 히타이트가 망한 후에 그들은 적대국(특히 이집트)들에 의해 악의적이고 야만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수천 년간을 야만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 하지만 히타이트는 수많은 근동의 여러 제국 중에서 사형을 법적으로 금지한 유일한 나라였다. 함무라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법으로 사람에게 형을 가해봤자 국가적으로 보면 실질적인 이득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또 전차의 개량, 철 제련 등 당시 근동의 다양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부와 힘 있는 군대를 양성시켜서 이집트를 굴복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던 히타이트의 모습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베리아 초원을 중심으로 살았던 안드로노보문화의 전차는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로 모두 전파되었다. 남쪽으로는 인더스문명을 파괴시키고 새로운 아리안족의 문화를 일으켰으며, 중국에서는 상나라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황량한 벌판인 줄만 알았던 시베리아 초원지대가 세계 4대 문명을 움직이는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전파시켜서, 약 3000년 전 세계사의 판도를 급속도로 뒤바꾼 원동력이 된 것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5> 전차, 무기에서 교류의 도구로

- 기원전 13세기 상나라 때 무덤서 북방초원의 유목민 썼던 전차 발굴
- 기원전 10세기경 서주시대 무덤서도 전차로 무장한 여전사 유물 발견
- 두 곳 모두 신탁으로 통치했던 당시 시대상 고스란히 반영
- 한반도에는 전차유물 흔치 않지만 고조선시대 여러 가지 유적에 신과의 소통 매개체 흔적 남아


■전차를 몰던 사람의 후손인 석가모니

 
  인도 아아리바테스와 절터에 새겨진 전차의 모습.
모헨조다로 유적으로 유명한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은 기원전 19세기께 갑자기 멸망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환경의 변화, 강물의 변화, 전염병 등 많은 설이 있는데, 그 중 유력한 설은 전차와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적들에 의해 멸망했다는 의견이다. 실제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에서는 갑자기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우물이나 길거리에 떼죽음을 당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전차인들의 무기와 전차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했다.

새로 밀려온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정체는 기원전 16세기에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 '리그베다'를 통해 밝혀졌다. 그들은 시베리아 안드로노보문화에서 기원한 강력한 전차와 무기로 무장한 아리안족으로 이후 인도문명의 주체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샤키의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샤키족은 전차를 몰고 내려온 유목민의 후손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시베리아의 유목민이 석가모니로 이어졌으니 한국문화에 녹아있는 불교문화도 시베리아와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리그베다에 기록된 신 중 강력한 우샤신은 거대한 태양의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여러 지역을 평정했다. 그가 하늘을 날며 주변의 것들을 불태우는 광경을 두고 호사가들은 고대 UFO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 중국판 새마을운동, 잠자는 여전사를 깨우다

 
  몽골 암각화에 새겨진 전차 모습.
1970년대 중국은 산서성의 벽촌인 다차이(大寨)에서 농민들이 자력으로 산을 개간하고 논을 만든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다차이를 배우자'는 표어 아래 중국판 '새마을운동'을 전개했었다. 1976년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殷墟)가 있었던 하남성 후강촌의 농민들도 이 운동의 일환으로 경지를 정리하다가 상나라의 거대한 무덤을 발견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상나라 무정(武丁)왕의 부인 중 하나였던 부호(婦好)였다. 거대한 묘에서는 옥기 755점, 골각기 564점, 청동기 468점 등이 출토되었으며 순장된 인골도 16구나 발견되었으니 그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여기에서는 당시 상나라 사람들이 쓰던 거의 완벽한 전차가 발견되었다. 그 전차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한 결과 전차는 당시 북방 초원지대에 기원전 13~10세기에 '카라숙청동기'(기원전 13~9세기)라 하는 초원지역의 청동무기와 전차를 쓰던 유목민으로부터 전파되었음이 밝혀졌다.

초원지역에서 개발한 강력한 청동무기와 전차로 무장한 이 '오랑캐'들은 중국 북부지역까지 진출해 상나라의 변경을 괴롭혔으니 당시 상나라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상나라의 갑골문에는 그들을 귀방(鬼方)이라고 불렀다. 귀방의 사람들은 상나라를 자주 침략하고, 상나라도 툭하면 군대를 동원해서 귀방을 토벌하려고 했으니, 상나라에게는 '악의 축'이었던 셈이다. 귀방으로 기록된 초원민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상나라 사람들은 초원의 발달된 청동무기와 전차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 고구려의 소서노와 상나라의 부호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전국시대무덤에 부장된 전차.
그런데 부호는 왕의 아내였다. 아리따운 후궁들을 맞이하기에도 바쁠 왕이 전쟁에 전차를 끌고 나가는 여장부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우리는 청동기의 발명, 전차의 사용 등 고대사를 생각할 때 은연 중에 역사의 주체를 남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 세상의 반은 여자였다. 군사를 이끄는 여자 지도자는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상나라의 다음 시기인 서주시대에 현재 베이징 근처에 위치한 연나라와 북방으로 인접한 집단의 무덤인 백부촌 유적이 있다. 기원전 10세기께 만들어진 이 유적의 주인공은 강력한 무기와 전차로 무장한 여자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아우른 여걸 소서노도 실제로 주몽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은 일종의 제사장 겸 무인이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그리스 신화의 여전사인 아마조네스가 결코 서양고전만의 일은 아닌 것이다.

이 여전사들이 실제로 남자를 능가하는 괴력과 무술의 소유자였을까? 상나라의 지배구조를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상나라의 권위자들은 폭력이 아니라 신탁, 즉 신의 힘을 부여받아서 나라를 통치했다. 상나라의 왕은 비서진에 해당하는 정인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내고 점을 치면서 정사를 돌봤다. 부호 역시 신권을 부여받아 상나라 군사들에게 힘을 주고 통솔을 한 제사장 겸 장군이었을 것이다. 즉, 부호의 전차는 강력한 무력과 함께 신의 뜻을 전하는 전령사였던 셈이다.

■ 상나라의 전차, 고조선으로 파급되다

 
  평안북도 주의리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조각.
1963~65년에 북한과 중국은 공동으로 만주의 고조선 및 발해유적을 공동조사했다. 당시 고조선조사팀은 내몽고 동남부지역에 위치한 남산근 유적에서 재밌는 유물을 발견했다. 남산근 101호무덤에서 다량의 마구와 함께 전차를 새긴 골판이 발견되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전차의 옆에서 한 사람이 사슴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다. 이 남산근 유적은 기원전 11~6세기에 존재했던 하가점상층문화에 속하는데, 중원-초원-고조선을 잇는 교차점에서 꽃피운 문화다. 실제 남산근에서는 비파형동검을 비롯해 고조선문화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으니, 한반도와 만주로 전차가 유입되는 중간루트가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고조선의 전차에 대한 증거는 많지 않다.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에서 수레바퀴 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북한 학자는 기원전 8~7세기로 본다. 같이 나온 유물을 알 수 없어서 그 연대가 맞는지, 또 전차인지 수레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본격적인 전차와 수레의 증거는 위만조선과 낙랑 때에 등장한다. 위만조선이라고 해도 기원전 2~3세기를 넘지 않으며, 평양 일대에서만 발견되었으니 참 늦은 편이다.

왜 이렇게 한국은 전차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로는 한국과 만주의 고대집단은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라 샤먼으로 대표되는 종교, 제사적인 힘으로 지배했기 때문이다. 정가와자 무덤에서는 청동거울 4점이나 출토되었고, 다른 여러 가지 증거를 봐도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지배자는 제사를 담당하던 제사장이었다. 즉, 급박한 전투를 통해 새로운 무기로 전차를 받아들일 필요성이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한반도와 만주는 전차를 쓰기 어려운 산악지형이라는 점이다. 전차전은 기본적으로 근동이나 중원 같은 평원지역에서 주로 발달했다. 전차전에 익숙한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다. 근동의 히타이트의 전쟁기록을 보면 적이 산위로 도망가면 추격을 포기하고 산을 둘러싸고 굶어죽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중원 내에서도 양자강 유역의 오월에만 가도 이미 전차는 소용이 없었다. 빠르지만 지형의 제약을 많이 받았던 탓에 전차는 실제로 널리 쓰이지 못했다.

■ 전차, 무기에서 소통의 도구로

전차를 중요한 군사도구로 사용했던 근동이나 이집트와 달리 중국과 고조선은 그 통치의 근간은 제사였기에 전차 역시 신무기의 상징이 아니라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전차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간고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성경 에스겔서 1장에 선지자 에스겔이 본 환상적인 전차의 표현은 바로 인간과 신을 잇는 그 연결고리를 의미한다. 기원전 1000년께를 기점으로 전 세계에서 전차전은 급속히 소멸되었다. 대신에 전차는 신과의 소통, 지역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도구로 거듭난다.

빠른 속도로 대량의 문물을 교환할 수 있는 도구가 널리 보급되며 정보와 문물의 교류에 혁명이 일어난 셈이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전시된 백남준의 작품 '소통(transportation)'은 이전에 전차가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는 비디오와 매스미디어가 담당한다는 뜻인 것 같다. 고대 사람들 사이 소통과 교류의 도구로 도입된 전차는 마치 현대의 인터넷과 같은 혁명적인 발전은 아니었을까? 전차는 또한 전세계를 움직이는 진리를 상징하기도 했다. 인도의 아쇼카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자처했던 '전륜성왕'(Chakravartin)은 바로 거침없이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관장하는 왕을 뜻한다. 현대의 인터넷과 매스미디어라는 수레바퀴도 정의가 거침없이 흐르는 장이 되길 바란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6> 고구려의 무사와 파르티안 사법

-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한 활시위 기법…로마 물리친 파르티안의 전법과 동일
- 흉노에서 기원해 선비로 이어진 철제무기, 기마술 받아들여 거대한 제국 건설
- 유목민족 장점 취해 거대한 제국 중국에 맞서 초원의 실리와 정착민 문명의 조화 이뤄내

고구려 벽화무덤 무용총에는 무사들이 사냥개를 데리고 숲속을 헤치면서 호랑이, 사슴들을 사냥하는 수렵도가 있다. 고구려의 벽화를 대표하는 이 수렵도에는 당시 북방지역과 교류했던 고구려 기마인들의 숨겨진 모습이 숨어 있다. 이 벽화의 가장 위쪽에서 사슴을 겨눈 무사는 질주하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은 채 흐트러짐 없이 뒤를 겨누고 있다. 그는 왜 뒤를 돌아서 활을 쏘았을까.


■파르티아, 로마를 무찌르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 '수렵도'. 위쪽에 그려진 전사는 뒤를 향해 화살을 겨누는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고 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향해 화살을 쏘는 법은 파르티안 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아와 로마의 유명한 '카라이전투(battle of Carrhae)'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53년 수레나(Surena)가 이끄는 파르티안 제국의 군대와 크라수스(Crassus)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라이에서 전면전을 펼쳤다. 로마인은 숫적으로 압도인 우세를 점했음에도 1000여 명의 중갑병과 9000여 명의 파르티아 군에게 대패했다.

당시 로마는 방패로 사방을 둘러싸고 천천히 보병을 전진시키며 적의 대오를 깨는 다소 구태의연한 전법이었다. 반면 파르티안은 날렵하게 무장한 궁사들이 마치 야구의 '히트 앤드 런'처럼 공격하고 후퇴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도망치던 파르티아 군사들은 고삐를 놓아둔 채로 갑자기 상반신만 돌려 추격하는 로마군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적이 도망간다고 추격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로마의 군대가 우왕좌왕할 무렵 1000여 기의 파르티아 중갑병이 돌진하여 로마의 군대는 졸지에 오합지졸이 되어 허망하게 패배했다.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군대의 진법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주로 아르메니아 출신의 유목민족들로 구성된 기병들로 군대를 보강했다. 로마군대는 파르티아를 얕보았던 반면에 파르티아 군사는 로마군대에 대항하여 새로운 전법으로 무장했으니 필연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패배가 비겁한 적의 습격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 때문인지 '파르티안 사법(parthian shot)'은 지금도 잘 놀고 헤어지면서 친구에게 뒤통수치는 말을 하고 사라지는 경우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배신당하는 꼴을 대표하는 것이다. 새로운 전술로 자신들이 패한 것을 마치 비겁한 적의 계략 탓으로 돌렸고, 그 때문에 파르티안 사법은 안 좋은 의미로 남게 되었다.

■로마에서 고구려로

 
  서기 4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2세가 사냥하는 장면을 새긴 은제그릇. 말 등에서 뒤로 돌아 활을 쏘고 있다.
용어는 '파르티안' 사법이지만 파르티아인들이 이 활쏘는 법을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 기원전 7~3세기의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이러한 사법이 보이며, 이후 흉노에서도 널리 쓰였다. 즉, 파르티아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초원의 말을 타던 사람들이 쓰던 기법을 파르티아가 도입하여 로마에 써 먹은 것이다.

고구려의 파르티안 사법은 파르티아보다는 흉노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고구려의 발달된 철제무기와 마구는 흉노의 영향을 받은 증거가 여러 군데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중국의 화상전에도 기원전 1세기경부터 파르티안 사법이 보인다. 역시 흉노의 영향이다. 그런데 중국의 파르티안 사법은 신선이 하늘 위에서 환상적으로 표현된 호랑이나 기린에게 화살을 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그런데 파르티안 기법은 몸을 완전히 뒤로 돌리는 사법이다. 즉, 두 손을 완전히 고삐에서 놓은 채로 뒤로 돌아서 시위를 당겨 표적을 조준해야 한다. 힘들게 뒤로 돌아서 활을 겨눈다고 해도 몸의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이러한 사법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다면 달리는 말에서 기사들은 어떻게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할 수 있었을까? 고구려 이후에는 등자가 널리 사용되었지만, 파르티아나 흉노가 발흥할 때에 아직 금속제 등자는 발명되지 않았다. 즉, 등자가 없이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려면 초인적인 노력으로 양 허벅지에 힘을 주어서 말에 몸을 밀착할 때만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어려서부터 기마에 익숙해야 가능하다. 실제로 알타이의 스키타이시대 고분을 발굴해서 그 인골을 검토해보니 대퇴골이 O자형으로 휘어진 흔적이 나왔다. 바로 이러한 꾸준한 노력을 방증한다.

■로마군, 승리 대신 비단을 얻다

 
  스키타이 전사의 파르티아 사법을 그린 그림.
이제 고구려의 벽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날렵하게 차려입은 무사들은 등자에 발을 걸고 있다. 복장으로 볼 때 이들은 전문적인 군사라기보다 귀족 또는 무사로 일종의 의식 또는 경기 중 하나로 사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파르티안 사법'은 적에게 기습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벽화에서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는 무사는 사슴을 향해서 시위를 겨눈다. 초식동물인 사슴이 사냥하는 무사를 뒤에서 공격할 리는 만무하다. 정상적인 사냥에서 힘들게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할 필요는 없으니, 이는 곧 당시 고구려의 무사들이 사냥을 통해서 파르티안 사법을 훈련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이미 등자가 발명되었기 때문에 장기간 허벅지에 힘을 길러서 마상술을 조련하지 않은 사람들도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의 무사들은 파르티안 사법을 연마했고, 그 본보기로 사냥에서 선보인 게 아닐까? 좀더 상상을 한다면 무덤벽화의 주인공이 젊은 시절 무술 경연대회를 하던 장면일지도 모른다.

 



 
  평양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의 파르티안 사법의 기마인이 새겨진 청동관.
카라이 전투에서 로마는 파르티안 사법으로 패배한 대신에 의외의 선물을 얻었다. 바로 비단이다. 당시 로마의 기록에 따르면 파르티아의 궁병들을 쫓던 로마의 군사들은 매복해 있던 파르티안의 중기병과 조우했다. 파르티안의 중기병들은 중갑 위에 붉은 비단을 걸치고 있어서 비단을 처음 보는 로마인들에게는 마치 불의 전사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 전쟁을 통해서 로마에는 비단이 알려졌고, 귀족층 사이에는 비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파르티아는 중국 기록에 안식국으로 기록되었다. 실크로드의 카라반(대상)들이 목숨을 건 여정을 통해 로마에 비단을 전했고 동서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로마는 카라이 전투를 거울삼아 새로운 초원민족의 기마전술로 군대를 양성화하는 대신에 적의 비단에 혹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여인들은 동아시아의 첨단 명품인 비단에 마음이 녹아서 엄청난 돈을 지불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로마가 멸망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고구려, 상무정신으로 무장하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300'은 현대의 마초이즘을 고전세계라는 무대로 풀어낸 것이다. 스파르타의 300명이 잔인하고 무식한(?) 아시아의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는 내용이다. 아시아인을 대표하는 부대는 각종 괴물에 동물들을 이용하여 전쟁을 하는, 규모만 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개인으로 묘사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로마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초원민족의 기마술을 비롯해 아시아의 선진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착용'이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랑캐의 바지를 입고 기마술을 채용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기술 도입으로 조 무령왕은 북방의 이민족과 맞서며 중원을 제패할 수 있었다.

고구려 역시 마찬가지다. 흉노에서 기원하여 선비로 이어진 발달된 철제무기와 기마술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실리를 취하는 국가들의 특징은 명분을 몰라서가 아니라 넓은 시야에서 냉철하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파르티아와 고구려는 각각 유라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 위치한 제국들이었다. 이 두 나라는 초원지역과 이웃한 나라를 건설해서 유목민족의 장점을 취해서 당시 거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와 중국에 대응했다. 바로 초원의 실리와 정착민의 문명을 한데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바로 고구려 귀족들이 꾸준히 말 타는 기술을 익히는 장면인 것이다. 한가롭게 사냥을 하는 듯한 벽화에서 상무정신으로 무장하여 주변과 대적한 고구려 천년의 지혜를 배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7> 가야의 청동솥과 돼지국밥

■돼지국밥과 부산

 
  보야르암각화. 자세히 보면 가운데 놓여있는 구리솥(붉은 점선 동그라미)을 식별할 수 있다.
돼지국밥을 빼고 부산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선회 같은 바다음식이 많은 부산의 대표음식이 돼지국밥이라는 점은 타지 출신인 나에게는 언제나 미스터리였다. 어떤 사람들은 돼지국밥은 원래 밀양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원래 북한 쪽의 음식이 6·25를 기점으로 널리 확산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짭조름한 바닷내음 풍기는 곳에서 구수한 고기국밥을 즐긴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근대 이후 일본문화의 유입창구였고 6·25때에 피난민들이 모이면서 부산은 팔도 음식들의 각축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 중 유독 북쪽에서 내려온 돼지국밥만 대표음식이 되었을까. 아마도 돼지국밥은 진정한 유목민적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야는 철을 중심으로 주변지역과 다양한 교류를 하며 살던 나라였기 때문인지 북방초원의 물건을 좋아했다. 철제무기와 마구는 멀리 흉노에 연원을 두고 당시 요서지방에 자리잡고 고구려와 대적하던 모용선비계통이며 구리솥(동복), 동물장식 등도 많이 발견된다. 특히 한문으로 동복(銅)이라고 하는 구리솥은 북방 초원의 대표적인 유물로 기원전 9세기께부터 서쪽으로는 흑해 연안에서 알타이, 바이칼 등지와 북중국까지 모든 초원지역에서 널리 쓰였다.

■가야인, 초원의 청동솥을 쓰다

 
  알타이 비스크박물관에 소장된 구리솥.
한국에서는 평양의 낙랑과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며, 서기 3세기가 되어 가야가 세력을 팽창하면서 도입되기 시작했다. 경남 가야고분에서는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2점, 양동리에서 1점이 발견되었다. 가야에서 발견된 구리솥의 먼 기원은 기원전후 북방 초원지역의 흉노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흉노 계통의 물건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요서지방의 모용선비, 고구려, 부여, 그리고 북부 중국에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한에서는 신라나 백제에서는 구리솥이 발견된 적이 없다. 단순히 북방지역 유물이라고 쓴 게 아니라 초원계 유물이 구미에 맞은 사람들만 도입한 셈이다. 가야에는 구리솥 말고도 북방초원계 유물이 많이 있으니 요즘 말로 가야사람들과 북방초원계의 유물은 '코드'가 맞았던 셈이다.

원래 구리솥은 기원전 8~3세기 초원지역에 살던 스키타이문화의 민족이 쓰던 도구다. 정착하지 않고 초원을 따라 이동하던 유목민들은 야영지에 솥을 걸어놓고 요리를 했다. 샤브샤브의 기원도 초원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구리솥에 물을 끓여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먹을거리를 한데 넣어서 먹었던 데에서 기원한다. 남부 시베리아의 유명한 암각화인 볼쇼이 보야르 암각화에는 당시 초원민족의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초원에 사슴을 방목하고 그 가운데에는 천막들이 있다. 마을 사이사이에는 구리솥이 있고 그 주변으로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인다. 당시 초원의 사람들이 축제를 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커다란 솥에서 모두가 먹을 음식을 끓이는 장면이다.

■구리솥, 초원 사람들의 잔치에 쓰이다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구리솥.
몽골이나 알타이 초원에 가면 비슷한 광경이 펼쳐진다. 잔치를 하면 들판에 솥을 걸어넣고 양고기를 끓인다. 손님이 오면 얼른 한 덩이 잘라서 건네주면 허리춤에 차던 칼로 쓱쓱 베어먹곤 한다.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가 좋지는 않지만 손님이라고 제일 맛있는 부위를 잘라주는데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느끼한 양고기를 한입 베어 물고 뒷맛은 보드카나 쿠미스(말젖으로 짠 술)로 누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양고기가 싫다고 해도 그 정겨운 분위기에는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도 한 30여 년 전 시골에서 결혼식을 할 때에 마당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하객들이 올 때마다 멸치 우린 국물에 만 장터국수를 내밀던 정겨운 모습이 떠올랐다.

유라시아를 대표하는 그릇인 이 청동솥은 때로는 대마초를 흡입하는 도구로도 쓰였다. 헤로도투스가 기록한 스키타이인의 풍습에 따르면 부족장들이 모이면 천막 안에 모여서 천막을 닫은 다음에 동복에 빨갛게 달군 돌을 넣고 그 위로 대마씨를 뿌린다. 같이 대마연기를 흡입하고 환각상태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말초적인 쾌락을 얻기위한 마약흡입이겠지만 당시에는 각 부족 간의 결속력을 다지는 과정이었다. 같이 기분 좋은 상태가 되어서 서로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결의를 하는 도구였던 셈이다.

유목민족들은 광활한 초원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봄과 가을에 목초지를 이동하면서 한번씩 모였다. 같은 부족이라 할 지라도 1년에 두 번만 서로 볼 뿐이니 오랜 만에 보면 저 부족은 반역의 뜻을 품고 우리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불안감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결속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술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해서 족장들이 모이면 일단 술을 만취될 때까지 마신 다음에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취중진담이 당시에도 통했던 모양인데, 그 다음날 술이 깨서 전날에 한 말이 진심이었는지를 확인해서 맞을 경우 곧바로 부족회의의 결론이 된다.

 

 


 
  고대인 초원인들의 생활상과 잔치 장면을 보여주는 보야르 암각화. 이들의 생활 속에서 구리솥이 쓰였다.
실제로 알타이 파지릭 고분에서는 자갈돌이 들어있는 구리솥이 발견된 적이 있어서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6·25때 내려온 돼지국밥이나 가야의 동복이나 왜 하필이면 부산에서 유행했을까? 동복을 봐도 같은 시기 백제나 신라에서는 유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원지역과 가장 먼 지역인 가야에는 동복을 비롯해서 수많은 북방계 문물이 출토되고 있을까. 필자는 그 답을 경남지역만의 지리적 환경에서 찾고 싶다. 농경문화가 강한 한반도 서남부지역은 자신들이 농사짓는 그 지역에 기반해서 살아야했기 때문에 외부문화가 유입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경남지역은 상대적으로 비옥한 평야지대가 덜 발달했고 강과 바다를 통한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생존기반이었다. 빠르게 물자를 운송하고 급변하는 정세에 빠르게 대응했다. 지역간의 교류에 기반한 가야의 문화는 초원지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초원지역은 넓은 벌판이 무대라면 가야는 각지를 잇는 강과 넓은 바다가 무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왜 부산인가?
초원을 질주하다 천막을 치고 동복을 장작불 위에 걸어서 고기와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넣어서 먹는 음식, 그리고 질박한 듯하지만 빠르고 자신의 입맛대로 먹을 수 있는 돼지국밥에는 유사성이 많아 보인다. 부산에는 골목마다 있는 국밥집이 경상남도만 벗어나면 사라진다. 서울에도 수많은 부산 사람들이 올라와서 살건만 변변한 돼지국밥집 하나 없다. 아마도 돼지국밥은 경상남도의 지리,환경적인 산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돼지국밥을 참 좋아한다. 한때는 세 끼를 다 돼지국밥으로 해결할 때도 있었다. 나에게 이 음식의 매력은 반제품이라는 데에 있다. 뽀얀 돼지국물에 밥을 말아서 나올 뿐이다. 여기에 고추장, 소면, 새우젓, 양파, 마늘, 정구지(왠지 돼지국밥에는 '부추'라고 하면 맛이 없을 것 같다) 등을 입맛에 맞게 넣는다. 미식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재료를 먹는 사람이 골라서 넣는 음식은 없는 듯 하다.

지금도 서울에 다녀오는 출장길에 KTX가 대구를 지나면 어느덧 객차 안은 한산해지고 몸도 조금씩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 무렵 갑자기 탁 트인 낙동강이 창가 너머로 펼쳐지면 마음은 벌써 부산에 다 온 듯하며 머릿속엔 고소한 돼지국밥이 아른거린다. 한국에 항구는 많지만, 부산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바로 유목민과 바다의 심성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에만 발견되는 많은 북방계유물은 대량의 이주민은 아니어도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도 숨 가쁘게 백두대간을 지나 이 낙동강 변에서 잠시 쉬어가며 구리솥에 이런저런 국밥을 해먹으며 내려오지 않았을까?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8> 영생을 꿈꾼 유목민족

- 무사나 고위층 죽으면 곧바로 방부 처리
- 나무 무덤방에서 꽁꽁 언 채 미라로 남아…수천 년 흘러도 온전한 모습 그대로
- 온난화로 '얼음미라' 사라질 판이지만 신라 적석목곽분 닮은 매장 풍습 등 알타이·한국문화 유사 흔적 많아

인간의 영원한 화두는 불로장생이다. 역사의 수많은 장면 속에서 인간들은 죽음을 피해서 영원히 살고자 했다.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며 이런저런 약을 먹다가 약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수은 때문에 생을 빨리 마감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자신이 죽은 후 미라로 형체를 보전하여 거대한 지하궁전인 피라미드 속에서 영원히 살고자 했었다. 죽음 앞에 예외 없고 또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죽음을 피하고자 했다.

자연의 순리라면 죽은 시신은 곧 부패하고 사라져야한다. 시신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미라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영원히 살고자하는 바람은 초원의 유목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7~3세기 알타이 초원의 파지릭문화에서는 인간의 노력과 환경적인 요인이 결합되어서 미라가 발견된다.


■알타이 산속의 파지릭인, 미라를 만들다

 
  러시아 에르미타쥐박물관에 소장된 파지릭 문화의 미라.
중앙아시아에서 영산(靈山)으로 추앙받는 알타이의 고원에 살았던 파지릭문화의 사람들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아주 유사한 고분과 다양한 황금예술품으로 유명하다. 알타이지역이 한국문화와 관련성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파지릭문화와 신라의 관계에 있다. 파지릭의 사람들도 죽음은 피해갈 수 없었고, 또 죽은 자에 대한 독특한 염습도 행해졌다. 이 사람들은 무사나 고위층이 죽으면 곧바로 시신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뺀 후 그 안에 약초를 채우고 피부도 발삼(balsam)처리를 해서 부패를 방지했다. 파지릭문화의 지도자가 죽으면 시신을 실은 마차는 광활한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각 부족을 마지막으로 순회했고, 몇 달간 소요되는 이 과정에서 부패를 막기 위하여 신속하게 미라로 만들었다.

아무리 염습을 잘했다고 해도 보통의 땅에 묻힌다면 미라가 온전하게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해발 3000m를 넘는 알타이 고원의 자연환경이 결합되어 미라가 만들어진다. 알타이는 고위도 지방이니 여름이 되어도 땅 속은 여전히 얼음으로 차 있는 영구동결대라고 하는 북극권에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알타이의 고원지대 모두가 영구동결대는 아니고 응달이 진 계곡이나 산기슭에 곳에 따라 나타난다.

알타이 고원지대에 여름은 2개월도 안 되게 짧다. 땅을 제대로 팔 수 있는 이 짧은 기간에 무덤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무로 짠 무덤방을 만들고 다시 위를 흙으로 덮으면 무덤은 속이 빈 방처럼 된다. 가을이 되어서 눈이나 비가 내리면 이 무덤 안은 물로 꽉 찬다. 겨울에 이 물은 얼음이 되고 이후 수 천년간 계속 영구동결대로 지속되어서 '온전한' 미라를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것이다. 만약 무덤을 만든 후 무덤 방 안에 얼음이 차지 않는다면 시신은 부패되어버리게 된다. 그야말로 자연의 선물이다. 게다가 처음에 무덤을 팔 때에 얼음이 있는 땅을 피해서 팠을 테니, 무덤을 판 후에 얼음이 들어찬 '재수좋은' 경우에만 미라가 생긴다. 요즘말로 복불복이다. 어쩌면 파지릭인들은 처음부터 무덤을 만들면서 후에 얼음이 가득차는 지역을 골라서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시신과 부장품들은 온전히 보존되며 얼음 속에 있는 덕에 도굴도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구의 온난화로 사라지는 미라들

 
  파지릭 미라가 출토된 무덤에서 함께 나온 마차. 미라는 이 마차에 실려 몇 달간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고분에 얼음이 차 있다면 썩기 쉬운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니 고고학자들이 감격에 찰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영구동결대의 발굴은 고고학자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삽이나 꽃삽 대신에 더운 물을 무덤 위의 얼음에 부어서 얼음을 약간 녹인 다음에 다시 물을 퍼내는 고행을 몇 달간 지속해야 한다. 경주에 있는 거대한 신라고분의 무덤을 컵 몇 개로 감질나게 판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게다가 시시각각으로 드러나는 부패하기 쉬운 유기물질들이 상하지 않게 다루어야 하니 엔간한 참을성으로는 어렵다.

그나마도 요즘에는 지구의 온난화로 영구동결대에 갇힌 무덤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 알타이지역 발굴을 하면 바로 몇 년 전에 얼음이 다 녹아버린 흔적들이 발견되어서 고고학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지구물리탐사로 영구동결대의 고분을 확인하고 곧 사라져 버릴 고분들부터 시급하게 조사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한 10년 넘게 알타이산맥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알타이 지방정부에서 발굴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얼음 속의 무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미라가 맺어준 인연

 
  1994년 발굴된 파지릭 문화권의 남성전사 미라.
1993년과 1994년에 알타이에서 미라가 발굴되어 세계적인 뉴스가 된 적이 있다. 1993년에 발굴된 미라는 여성이어서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었고, 1995년에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전시되었다. 하지만 얼음공주는 실제로 '공주'가 아니다. 당시 파지릭문화는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었으니, 공주가 나올 리 없다. 게다가 이 여성 미라가 발굴된 고분은 무덤 중에서 중간 정도의 크기였다. 그 주인공은 아마 제사를 관장했던 여사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알타이의 얼음공주는 나에게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만주지역의 비파형동검을 전공하고 있었던 필자는 전시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V.I.몰로딘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몰로딘 교수의 지도로 러시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미라가 전시된 박물관에서 필자를 만난 몰로딘 교수는 필자가 초원지역에 관심이 많다고 하자 북중국을 연구했으니 앞으로 시베리아를 연구한다면 신라고분을 비롯한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거라며 격려했었다. 2500년 전 알타이의 깊은 산속에 묻힌 미라가 한국에 사는 한 젊은 고고학자의 인생을 바꾼 셈이다.


■유교가 선물한 한국의 미라
알타이에서 발견된 미라의 처리는 모스크바의 생체학연구소가 맡았다. 이 연구소는 사회주의권 지도자인 레닌, 모택동, 스탈린, 김일성, 호치민 등을 미라 처리하여 세계 최고 시신보존처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파지릭 미라도 사회주의권 최고 지도자들과 장의사 동창인 셈이니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의 전통은 종교를 부정하는 사회주의권에서 계승되었다. 시신을 생전과 똑같이 보존하려는 욕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은 자에 대한 경외감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종교를 부정한 사회주의권은 더더욱 미라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소련의 '아름다운' 전통 덕분에 파지릭에서 출토된 미라는 지금도 건재하다.

박물관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미라는 왜소하고 초라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당시 미라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은 고위층이었고, 대부분 화려한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하지만 영생을 꿈꾼 죄로 그들은 벌거벗겨져서 어두컴컴한 박물관 한 귀퉁이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도시를 돌면서 청나라 때의 미라들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경우를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의 미라는 충효사상의 발로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유교의 제례에 따르면 무덤의 관은 일정한 두께의 회를 바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유교의 규례를 완벽히 지켜가며 무덤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중기 성리학이 성행하며 실제 규례대로 회곽을 만들었다. 그 결과 회곽 안은 완벽하게 진공상태가 되어서 미라가 되는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덕에 미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회곽묘에서 미라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데, 특히 1586년에 사망한 이응태 씨의 묘에서 발견된 그의 부인이 쓴 편지가 세계적으로 화제였다. 그 이유는 죽은 남편에 대한 절절한 부인의 사랑이 담긴 내용은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미라는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온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초원지역의 얼음 속에 묻힌 미라를 통해 초원에서 일생을 살았던 수천 년의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밝히는 것은 곧 초원지역에 묻힌 미라에 대한 진정한 예우가 될 것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9>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 신라로 오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그리핀 장식.
요즘 금값이 폭등하면서 금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작금의 금에 대한 애호는 달러 가치 하락으로 인한 전세계의 경제위기에서 시작된 것이니 장롱속에 모아두었던 아이들 돌반지와 금가락지 숫자를 세어보면서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다. 예부터 금은 인류가 가장 애호하는 금속임에 틀림없다. 한국사람이 금을 좋아하게 된 역사는 평양에 위치했던 낙랑에서 시작됐으니 그 역사가 2000년으로 비교적 짧은 편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선호하던 귀금속은 옥으로, 신석기시대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황금이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사랑을 받은 때는 신라와 가야시대이다. 오죽했으면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 할 정도였다. 금관 귀걸이 팔찌 등 당시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에는 수많은 황금이 묻혔고, 심지어 청동에 금도금을 한 '비용절감형' 유물도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은 정확했다

 
  파지릭 고분에서 출토된 고깔모자. 나무로 만든 조각에 금을 입힌 독수리 모양의 그리핀 장식인데 주로 말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초원의 민족들도 황금을 좋아했다. 특히 알타이에 살던 파지릭문화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황금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타이'라는 말 자체가 황금을 뜻하는 투르크어 '알틴'에서 나왔으며, 한문으로는 황금의 산을 뜻하는 '金山'(금산)이라고도 썼을 정도다. 실제 알타이에 가보니 만년설이 덮인 산들은 석양이 질 때면 주변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그 아름다움을 형언할 수 없었다. 알타이가 황금의 산이라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알타이는 현재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몽골 4개국에 걸쳐 있는 사얀-알타이 산맥 일대를 말한다. 지금도 알타이족은 목축을 하며 이 4개 나라에 나뉘어 살고 있다.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단어로 인해 알타이를 막연히 우리의 기원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나라와는 수 천 ㎞ 떨어졌기 때문에 알타이가 실제로 한민족의 고향인 증거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기원전 8~3세기 이 지역에 존재했던 파지릭인들의 문화는 황금을 숭상하던 흉노를 거쳐 한반도의 신라로 파급되었다.

신라가 황금의 나라라면 알타이의 파지릭문화는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의 나라다. 그리핀 또는 그리포스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이는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환상의 동물이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동쪽 멀리 괴수인 아리마스페이가 사는 곳보다도 더 먼 곳엔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이 살면서 황금을 훔치는 것을 막는다고 기록했다. 헤로도투스의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중국의 산해경처럼 주변 민족들을 환상의 동물로 표현한 것임이 20세기 이후 알타이지역 파지릭문화의 발굴로 밝혀졌다.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
실제로 파지릭문화의 고분을 발굴하니 독수리 모양을 한 그리핀 장식이 다수 출토되었다. 나무로 만든 조각에 금을 입힌 것인데, 주로 말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또 무덤 내의 시신 머리 위에서도 발견되었다. 유물을 자세히 연구해보니 그리핀은 파지릭인들이 썼던 고깔모자의 끝장식이었다. 고깔모자를 쓰면 모자 끝이 새머리처럼 뾰족하게 나오고 그 위에는 그리핀의 장식이 얹혀진다. 아마 멀리서 본다면 사람 얼굴 대신 거대한 새가 머리에 앉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시 파지릭 사람들은 알타이의 강 주변에서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곳곳에 전사들로 하여금 경비를 서게 하여 감시했을 것이다. 황금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에서 비행기를 타고도 6~7시간은 족히 가야 할 거리의 알타이에 대한 헤로도투스의 묘사가 완벽히 들어맞는 셈이다.

 

 

 

 

■'표트르 대제 컬렉션'의 탄생


 
  신라금관
파지릭문화는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시베리아의 옛 고분에서 황금유물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 고분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른 유물은 그냥 깨부수거나 버리고 오로지 황금만을 찾았는데, 이러는 과정에서 많은 값진 유물들이 녹여져서 그 무게로만 값이 매겨졌다. 무식한 코사크인들은 이 황금을 녹여서 금화를 만들어서 팔았다고 한다.

다행히 표트르 대제가 서구에서 오래 생활한 덕에 이 유물들의 골동품적 가치를 파악하고 명령을 내려서 함부로 없애지 말고 사들여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게 했다. 바로 그 유명한 '표트르 대제 컬렉션'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표트르대제는 황금만 챙기지말고 고분의 위치나 출토 상황도 같이 보고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황금유물이 알타이에서 출토된 것이 밝혀졌다.

20세기 초에 고고학조사대는 황금유물이 출토되던 알타이지역의 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선정한 고분 근처에 '파지릭'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파지릭 고분군이라고 명명되었고, 이후 알타이의 황금문화는 파지릭문화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지릭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영산(靈山)으로 추앙받는 알타이산의 가장 높은 지역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 고분내에서는 페르시아산 양탄자를 비롯해 주변지역에서 헌납해 온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흉노가 썼던 금제장식. 뒷면에 한자로 무게가 적혀 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일본을 '지팡구'라고 하며 지천에 황금이 넘친다고 기록해 서양사람들을 매혹시켰다. 하지만 '황금의 나라'의 원조는 신라였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는 황금으로 넘쳐난다며 부러워한 기록이 있다. 신라의 황금을 만드는 기술은 어디에서 왔을까? 알타이의 파지릭인이 직접 신라로 왔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황금문화는 동아시아로 빠르게 전해졌다. 옛 중국 기록을 살펴보면, 알타이의 파지릭문화는 '월지(月氏)'라고 판단된다(학자에 따라 다소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월지는 한무제가 흉노 정벌을 위해 서역으로 보낸 장건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알 타이의 황금, 신라를 매혹시키다

 
  신라와 알타이 사이에 존재했던 흉노의 금관. 중국 내몽고에서 출토.
당시 장건이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월지에 다다르니 월지는 이미 중앙아시아로 도망쳐서 평온하게 나라를 꾸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실제로 파지릭문화는 기원전 2세기~1세기경 흉노문화가 팽창하자 그 세력을 못 견디고 중앙아시아로 도망간 사람들이 형성한 것이다. 이 와중에 알타이의 황금기술은 흉노와 중앙아시아로도 전파되었다. 그러므로 알타이의 황금기술이 어떻게 신라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신라와 알타이 사이에 위치해 기원전 4세기~서기 1세기에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흉노를 보면 해소된다. 흉노인들도 초원의 황금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여러 장식을 만들었다. 흉노의 황금은 이후 선비, 오환, 그리고 고구려로 전해졌다.

알타이의 사람들은 강에서 모래를 채취해서 얻은 사금으로 황금을 만들어냈다. 요즘은 채산성이 맞지 않아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이 없지만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강 주변에서 사금을 채취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신라의 황금도 대부분 형산강 유역에서 채취한 것이다. 사금을 채취하고 황금을 얻어내는 방법까지 일치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알타이의 황금은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의 코사크인들에 의해 무참히 도굴되고 녹여져 금화로 변해버렸다. 신라의 황금유물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발굴돼 일본인들이 경쟁적으로 한반도의 고분을 도굴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1921년에 발굴된 경주의 금관총은 당시 전 세계의 고고학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였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금관총과 여러 신라 고분에 대한 보고서를 최고 호화판으로 만들어서 당시 식민지 한국을 방문한 서구의 여러 인사들에게 증정했다. 자신들의 식민지사업을 자화자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0> 탈레반도 못 훔친 아프가니스탄 금관, 그리고 신라

아프가니스탄은 실크로드의 중간 경유지이며 불교가 아시아로 전해지는 중간루트이기도 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전세계 많은 학자들은 동서교차로인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그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19세기 이후 영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간섭과 내전까지 겹친 이 나라는 시대의 화약고가 되었고 비극을 잉태했다. 지금은 전쟁과 가난의 상징으로 익숙한 이 나라에서 약 30년 전 신라 금관과 너무나도 유사한 금관이 발견돼 세계 고고학계를 경탄에 빠뜨린 적이 있다. 과연 그 금관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떻게 신라의 금관으로 이어질까?


■황금의 언덕, 틸랴 테페

 
  틸랴 테페의 황금관(위)과 황금관을 펼쳐놓은 모습.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신라 유적과 매우 닮았다.
외지 사람들은 부산역에 내리면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는 집들에 감탄하곤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중앙아시아의 테페와 닮았다.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에는 주변에 나무조차 많지 않아 집이건 무덤이건 모두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올린다. 세월이 지나 흙벽돌집이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수천 년 반복하다보면 테페라고 하는 거대한 언덕이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 트로이 유적, 여리고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근동지역 유적은 테페로 이루어진 것이다. 2000년 전의 금관도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인 틸랴 테페에서 발굴됐다.

1978년 11월 그리스 출신 러시아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는 아프가니스탄의 북쪽 조그마한 언덕인 틸랴 테페를 발굴 중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이 터져 사방이 시끄러웠지만 개의치 않고 발굴에만 집중했다. 점점 날씨가 추워져 발굴을 마무리지을 무렵 성터의 서쪽에서 황금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마을유적 이전에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7개의 무덤 중에 6개가 발굴되었고, 모든 무덤은 황금으로 가득했다. 가운데의 남성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에 여성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6호분에서는 신라의 왕관과 너무나 흡사한 금관이 출토됐다. 추위로 곱은 손가락을 간신히 펴며 유물들을 차근차근히 수습한 노력으로 2000년 전의 찬란한 황금문화는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전쟁의 포화 속에 사라진 금관들

 
  요녕성에서 발굴된 모용선비의 소요 장식. 신라의 금제 장식과 어딘지 비슷하다.
틸랴 테페가 발굴될 즈음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갔고, 소련 붕괴후 1992~1995년의 내전 끝에 탈레반이 통치하게 되었다. 회교 원리주의를 철저히 지킨 탈레반은 배미얀 석굴 등 불교 관련 유적들을 파괴했고, 박물관은 폐쇄시키는 등 20세기 최악의 문화재 파괴 사태를 일으켰다. 거기에 미군의 폭격과 현지인의 절도가 더해져 박물관의 유물은 제대로 된 통계도 없이 심각하게 파손됐다. 가장 값이 나가는 틸랴 테페의 황금유물들도 그 와중에 사라졌다. 황금으로 녹여져 군비로 충당됐다는 설, 폭격으로 사라졌다는 설 등이 횡행했다. 카불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박물관도 공식적으로 이 유물은 분실됐다고 밝혔다.

다행히도 2000년에 틸랴 테페의 유물은 무사하다는 소문이 카불박물관 측에서 흘러나왔다. 이 황금유물을 극비로 은행의 수장고에 숨겨놓고는 분실했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하지만 2001년부터 대대적인 문화재 파괴를 자행한 탈레반은 박물관의 유물상자들을 다 파헤쳐서 유물과 유물카드를 뒤섞어 놓았다. 결국 몇 장의 사진만 남긴 채 틸랴 테페의 유물은 세상에서 소멸되는 듯했다.

그러던 2003년, 카불중앙은행 창고에서 숨겨졌던 몇 개의 유물상자가 개봉됐다. 어떤 유물인지는 아무도 몰랐고, 유물카드조차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프가니스탄 문화청과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25년 전 틸랴 테페와 여러 유적을 조사했던 사리아니디를 불렀다.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고고학자는 개봉된 유물을 한참 보더니 조용히 탄식하며 외쳤다. "이것은 금관이 나온 틸랴 테페 6호분이외다." 배석한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금관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철사는 금관에서 떨어져나간 장식을 다시 잇기 위해서 내가 발굴 당시 직접 만들어서 붙인 것이오. 허허.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이로써 틸랴 테페 6호분의 유물은 세상 속으로 부활했고, 여러 경로를 거쳐서 2009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공개되었다.


■금관의 주인공들은 초원에서 왔다

 
  금관을 쓴 고분의 그림. 초원에서 온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왼쪽). 틸랴 테페 유적에서 나온 청동검. 칼자루 끝에 곰이 새겨져 있다.
틸랴 테페에 금관을 남긴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의 뒤에는 출퇴근길의 지하철처럼 복잡한 중앙아시아의 역사가 얽혀 있다. 틸랴 테페는 서기 1세기 때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에는 박트리아(大夏)국이 있었고,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에 간다라미술과 불교를 전파한 나라로 유명한 귀상(貴霜)이라고도 하는 쿠샨왕조가 있다. 틸랴 테페의 무덤이 만들어질 무렵 초원지대의 흉노에게 쫓겨 나라를 세운 대월지국이 있었다. 당시 초원지대는 흉노와 그 일파들로 소용돌이가 쳤고 많은 초원민족들이 남하했다. 그렇게 남하하는 와중에 곳곳에 초원계의 유물을 남겼다. 중국 윈난성과 쓰촨성에도 석채산문화라는 초원계문화가 남아 있고, 한국에도 당시 초원계 청동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틸랴 테페 6개의 무덤에서 나온 황금은 모두 하나의 공방에서 만든 것이다. 또 그 안에 그리스-박트리아계의 유물도 많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초원지역에서 남하한 초원계의 부족 중 최고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황금을 만드는 장인들은 초원의 취향과 박트리아계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예술품을 창조했던 것 같다. 아마도 황금 왕관은 시베리아 일대에서 널리 유행하던 장식용 금관의 전통인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정작 금관을 쓴 사람은 가운데 무덤의 주인인 남자가 아니라 주변에서 발견된 여성들 무덤의 주인공, 즉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과연 이 여성은 왕비였을까 아니면 사제였을까. 아직 정답은 없다. 틸랴 테페에서는 아직 1개의 무덤은 미발굴인 채로 남아 있으니, 혹시 이 무덤이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신라의 금관과 아프간 금관은 '친척'
틸랴 테페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한국 신라 금관의 조형으로 지목되었다. 한 눈에 봐도 그 형태는 신라금관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무처럼 뻗은 금관대, 영락을 단 모습 등 얼핏보면 신라금관의 하나라고 우겨도 믿을만하다. 하지만 시기와 세부적인 차이도 적지 않다. 틸랴 테페는 서기 1세기때 만들어졌고, 신라는 4세기때다. 과연 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당시 초원의 거대한 제국 흉노에서는 황금제 머리장식이 유행했고,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도 머리에 관을 쓰는 풍습이 있었다. 또 서기 3세기께 요녕성 일대에 살았던 모용선비에게서도 비슷한 황금 머리장식이 발견된다. 모용선비의 머리장식은 중국의 옛 기록에는 소요(逍遙)라고 한다. 머리에 화려한 금관장식을 쓰고 가볍게 걷는다고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서기 1세기께 흉노는 한나라의 추격을 뿌리치며 서쪽 중앙아시아로 널리 퍼져나갔다. 또 그 일파는 동쪽으로도 영향을 미쳐서 모용선비와 낙랑의 황금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아직은 중간 자료가 부족하지만, 신라와 아프가니스탄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해도 바로 흉노에서 발원한 찬란한 초원의 황금문화의 동서 끝인 셈이다.

다시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로 전국이 시끄러워지고 있다. 평화, 재건, 의료사업 등 아무리 많은 명분을 내세워도 우리의 젊은 생명을 전쟁의 현장으로 내보내는 것이니 유쾌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번에는 문화사업 위주로 파병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양한 고대유적의 조사사업과 연계시키는 것은 어떨까. 지금도 제2, 제3의 틸랴 테페 유적은 전쟁과 파괴의 와중에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고고학 및 문화재 보존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이왕 문화사업을 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재를 보존하는 노력도 같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세계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물론이요, 신라와 가야의 수많은 북방계 황금유물의 실마리를 푸는 결정적인 근거를 찾을지도 모른다. 우리 손으로 또 다른 금관을 찾아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문화재에 기여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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