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4일부터 부산박물관에서는 '몽골, 초원에 핀 고대문화'라는 제목으로 뜻 깊은 전시회가 두 달 반 동안 열렸다. 여기에서는 몽골 초원에서 문화를 꽃 피웠던 유목민족의 화려한 청동기들이 전시되었다. 개막식 직전에 필자와 몽골에서 온 척 바타르 씨의 기조강연도 있었다. 평일 오후였음에도 참석자는 의외로 많았다. 강연이 끝난 후 이어진 열띤 질문공세로 사회자는 개막식 시간을 맞추느라 진땀을 뺐다.
■ 부산, '바닷길의 도시'만은 아니다
바다가 없는 부산을 상상할 수 있을까. 교류의 장벽이 완연히 사라지고 교류의 범위는 엄청나게 넓어지고 있는 21세기, 한국은 이제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이다. 우리나라 제2도시 부산도 단순히 '한반도-바다'를 잇는 교류 거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유라시아대륙-한반도-바다'의 연결을 생각하며 그 범위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장래 시베리아 철도가 이어지고 남북의 길이 트인다면 부산은 바다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부산이 초원을 만나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유라시아와 한반도의 연결고리는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물론 현실적인 경제, 정치, 사회적인 상황도 고려돼야 하겠지만 진정한 초원의 삶은 그들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땅 한 귀퉁이에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사는 농경민들과 달리 초원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그들의 역사를 모르면 그 진면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러시아에서 유학한 6년 동안 해마다 시베리아의 초원과 타이가 지역에서 발굴을 하며 북방의 초원문화를 연구했다. 직접 겪어본 시베리아의 초원과 타이가는 사진이나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초원의 삶은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만 했고, 소비에트 붕괴 이후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은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정체성을 잃고 조금씩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인적도 드문 계곡마다 초원 군데군데에서 수천 년 전의 거대한 고분과 바윗그림들을 보노라면 도대체 이 황량한 초원에서 고도의 문명을 꽃 피운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계사의 잃어버린 반쪽, 초원
사실 초원의 지배자들은 세계의 역사를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3500년은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세계 4대문명이 꽃을 피운 때이며, 한반도에서도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때이다. 세계사적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초원에서 꽃피웠다. 바로 목축이다. 초원의 사람들은 기원전 3500년경 목축이라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청동기를 만드는 법을 아시아에 전파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500년경에는 전차를 만들어 주변지역을 정복하기도 했다. 초원을 따라서 하루에도 수십 ㎞를 이동했던 그들은 지역감정이나 혈연에 얽매이기 보다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목초지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스키타이문화가 기원전 8~3세기에 출현한 이래 아시아의 초원지역은 흉노-투르크(돌궐)-키르기즈-몽골 등으로 이어지며 세상의 중심에서 역사를 움직여왔다. 서양이 르네상스와 신대륙 발견으로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기 전에는 초원의 지배자는 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산업혁명과 현대화를 거치면서 초원의 사람들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따라 뒷전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초원을 지배하는 자들은 결코 무지막지한 폭군이나 살인마가 아니었다. 험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거대한 사회를 이루었던 실용적이며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자연에 의지하며 목축을 했던 탓에 좀 더 자연 순응적이었고, 민감한 환경의 변화에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자신들의 글자로 자신의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초원의 민족과 적대적이었던 정착민의 역사에 기록된 그들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는 여전히 우리의 선입견에 남아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빠른 정보의 소통과 실용 위주의 생활문화에 기반한 유목민의 문화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바로 노마디즘이라는 코드가 그것이다. 지역 간의 거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신기술을 동시적으로 받아들이며 각 나라의 문화는 거대한 용광로로 녹아들어가는 형국이다. 마치 과거의 초원민족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역사로의 전환에 유목민의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한반도에 말을 걸어오는 푸른 대지
북방초원지대라고 하면,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민족의 기원을 떠올린다. 그 이유는 한반도 고대문화 곳곳에 북방지역 계통의 유물과 유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남부도 예외는 아니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나 가야 고분의 여러 북방계 문물이 그 좋은 예다. 또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한 북방 초원지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알타이어족, 북방기원설 등 우리에게 어려운 지명들이 낯익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초원의 역사는 우리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다. 하지만, 필자의 글이 한민족이 북방 초원지역 어딘가에서 왔다고 속 시원히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 것이다. 북방지역의 고고학을 20여 년 가까이 연구한 필자이지만 어느 한 곳에서 한민족이 왔다는 증거는 확실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방지역과의 교류는 시기별로 다양한 곳과 그리고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야에 보이는 동복을 비롯한 북방계 문화요소며 신라의 금관과 적석목곽분 등 우리 고대문화에서는 수천 ㎞의 거리를 무색케 할 만큼 북방 초원문화 요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을 한데 뭉뚱그려서 '한민족은 머나먼 초원에서 왔다'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맺고 싶지는 않다. 하나 하나 유물과 유적을 들어서 그 관계를 보겠다. 단순한 한국인의 기원찾기가 아니라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서 펼쳐지는 초원과 한국의 이야기들을 풀어보겠다.
이번 연재는 크게 2부로 나누었다. 먼저 1부에서는 고고학에 보이는 초원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할 것이며, 2부는 초원지역과 한국의 고대문화에 보이는 여러 유사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고대의 초원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태고적 신기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한민족 형성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줄 것이며, 또 급속도로 국제화가 되고 있는 남한 사회에 반면교사도 될 것이다. 좋든 싫든 한국은 빠른 속도로 다민족화가 되고 있고 다문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팽배하다. 타문화에 개방적이며 차별없이 주변민족을 받아들였던 초원국가의 모습에서 우리의 답을 얻을지 모른다. 몽골제국이 세계의 반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되 그들을 거대한 몽골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구현할 수 있었던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북아 교류의 중심지인 21세기 부산이 배울 점이기도 하다. 부산이여, 초원을 만나자.
◆ 강인욱 교수 약력 =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동북지방, 유라시아 초원지대, 연해주의 청동기~철기시대와 한국의 고대문화에 대한 50여 편의 논문, 8권의 저서·역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