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계룡산 신원사

醉月 2011. 1. 22. 09:37

계룡산 신원사

계룡산신과 함께 꽃비를 맞다

꽃비가 내립니다. 원컨대 이 도량에 강림하시어 공양을 받으소서.

향기로운 꽃을 뿌리며 청하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위하여 부르는 노래인지를 알면 조금 의아할 것입니다. 스님들의 장례의식인 다비식(茶毘式)을 할 때 산신제를 지내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비록 절집에 버젓이 산신각이 있다 하나,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그것도 스님의 다비식에 산신을 청하여 공양을 올린다 하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흔히 사찰의 산신각을, 외래 종교인 불교와 토속 신앙의 습합 내지는 수용으로 보는 통설에 비추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 꽃비 내리는 신원사. 한국 최고의 산식각인 중악단이 있는 절로 계룡산의 면모를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을 달리합니다. 평생을 산에서 산 스님이 이제 이생과 인연이 다하여 영원히 산으로 가기에 앞서 산의 주인인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산의 정령(精靈) 또는 산 자체를 신성시하는 태도를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나는 참 ‘아름다운 믿음[美信]’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한국인이 만들어낸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로 산신각을 드는 일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한국인과 산신의 관계는 뿌리가 깊습니다. 멀게는 단군신화에도 연원이 닿아 있는데, 단군은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린 후 산신이 되었다 합니다. 신라 시대에는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태백산, 중앙의 팔공산을 오악으로 기렸습니다. 조선 태종~세종 대에는 삼각산(중), 송악산(서), 지리산(남), 지리산(남)을 4악이라 했습니다.

세종 대의 집현전 학자인 양성지는 명산대천에 대한 국가의 제사 대상을 개편할 것을 주장하며 5악과 8명산을 제시했습니다. 삼각산(중), 금강산(동), 구월산(서), 지리산(남), 백두산(북)을 5악으로, 목멱산, 감악산, 관악산, 계룡산, 치악산, 의관령, 축령산, 오대산을 8명산으로 든 일이 그것입니다. 도읍의 위치에 따라 대상의 변화가 있긴 해도 산악숭배 의식은 변함없이 이어져온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고유한 산악신앙이 산속에 깃든 절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불교 입문서에서는, 산신은 불교와 관계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에 의해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고, 하근기(下根機)의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산신각이 세워졌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불교 서적들의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의식의 민속화 등 사회학적 해석을 덧붙이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들 설명의 행간에는 몰래 낳은 자식 대하듯 하는 방어적 태도와, 불교의 오지랖이 대단히 넓어서 빚어진 일인 듯한 호교적(護敎的) 태도가 감지됩니다. 나는 이런 태도가 못마땅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현재 전 지구적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 위기 극복을 위한 대중적 생태의식의 고양을 위해서도 산신은 더 기림을 받아야 합니다. 인디언의 자연 친화적 삶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열광하면서도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던 산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민속신앙의 대상쯤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당당하지 못합니다. 

▲ 만행을 나선 스님의 뒷모습이 미련 두지 않고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닮았다.
둘째, 불교 교리적으로도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산신은 신중신앙의 시원인 화엄경의 화엄신중 39위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엄경 십주품의 제8동진주(童眞住)가 바로 산신이 머무는 곳입니다. 어린이의 천진한 마음이 머무는 곳이니, 산신이 자리할 곳으로 이보다 적당할 데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봉 스님이 쓴 <불교의식각론>참조).

산신 얘기가 좀 장황했습니다. 한국 최고의 산신각이 있는 신원사에 와서 단순히 건물의 규모나 특징, 위상 따위만 얘기하는 것은 성마른 것 같아서입니다.

계룡산은 아주 넓고 높은 산이 아닙니다. 최고봉인 천황봉(845.1m)은 천 미터에도 못 미치고 넓이는 62㎢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지리산에 이어 196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상 일대의 암릉들이 빼어난 계곡을 빚어놓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찍이 신라 때부터 오악의 하나였을 뿐 아니라, 산의 동남쪽 신도안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도읍으로 삼으려 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도참서에 ‘정(鄭)씨가 800년 도읍할 땅’이라 했고,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산이 수려하고 물이 맑은 곳으로 삼각산, 오관산, 구월산과 함께 계룡산을 들었습니다.

계룡산의 빼어난 계곡들은 명찰을 셋이나 품고 있습니다. 북서쪽으로 갑사, 북동쪽으로 동학사, 남서쪽으로 신원사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신원사가 가장 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 한국 최고의 산신각인 중악단(보물 제1293호)이 있습니다. 본디 1394년에 태조 이성계가 산신제단으로 건립했으나 효종 2년(1651)에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 민비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악단은 대웅전 영역으로부터 떨어진 동쪽에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독립 공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솟을대문과 중문을 통과하면서 중악단이 극적으로 강조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솟을대문과 중문은 양반 가옥, 중악단의 구조는 절집, 중악단 지붕 내림마루의 잡상은 궁궐 양식을 옮겨 놓고 있는 점도 특이합니다.

왕실의 흔적은 중악단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의 기단과 주춧돌이 자연석이지만 중악단의 기단은 잘 다듬은 장대석이고 추춧돌 또한 그렇습니다. 자연석과 기와 조각을 섞어서 쌓은 꽃담, 출입구와 계단을 셋으로 나누어 신분에 따른 통행 방식을 정해 놓은 것도 작은 궁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 종무소 앞 툇마루에서 본 신원사 대웅전 앞마당.

대문과 중문 양 옆에는 각각 방이 딸려 있는데, 대문채의 방은 툇마루와 부엌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 방에서 정명 스님과 다담을 나누는데, 스님의 말씀인즉 명성황후가 기도할 때 머물던 방이라고 합니다. 순간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악단을 재건한 명성황후의 의도가 진심으로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에 있었을까? 아니면 개인적 권력욕의 발로였을까?

속내까지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중악단 편액의 글씨를 쓴 사람이 순종 3년(1909) 일진회의 한일합병 주장에 맞서 그 부당성을 성토한 이중하(1846-1917)인 것으로 보아,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신의 가피를 구했던 것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오늘날 국토 개발의 경우에도 정치 권력자나 정책 입안자들이 산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한다면 개발론자와 생태론자의 다툼이 상당히 누그러질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신원사에서 중악단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크다 해도 본말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중악단 때문에 생겨난 절이 아니라, 절이 거기에 있어서 비로소 중악단이 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지 스님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중악단의 설치 때문에 대웅전의 위치까지 밀려났다고 하지만, 신원사는 나름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곡을 건너자마자 이마에 걸리는 천왕문이 만들어내는 프레임으로 보이는 은행나무와 벚꽃,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대웅전이 몇 발짝만 다가가도 속진을 멀리한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은 듯한 느낌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진입로 옆의 푸성귀 밭도 한가로움을 더해 줍니다. 아직 파종하지 않은 밭 한 귀퉁이의 취나물과 시금치가 잘 가꾼 화초보다 더 꽃 같습니다. 인간이 이룬 공간도 빼어난 자연을 배경으로 하면 이렇듯 달라 보입니다.
▲ 중악단 내부. 본디 여자 산신을 모셨으나 언제부턴가 남자 산신으로 바뀌었다 한다.

마침 만개한 벚꽃이 흩날리는 대웅전 옆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는 순간, 왜 이곳에 중악단이 마련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풀렸습니다. 주봉인 천왕봉에서부터 쌀개봉, 관음봉으로 이어진 정상 일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갑사나 동학사에서는 볼 수 없는 풍광입니다. 닭의 벼슬을 머리에 인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이라 하여 계룡(鷄龍)이라는 이름을 얻은 계룡산의 본래면목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눈을 돌려 절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을이 지척입니다. 산과 들판이 만나는 어름에 신원사가 자리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접근의 편이성과 계룡산의 풍광이 어우러진 입지 때문에 이성계도 이곳에 산신제단을 마련하라는 무학 스님의 말을 따랐을 것입니다.

신원사는 백제의 고찰입니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한 열반종의 개조 보덕 스님이 의자왕 11년(651)에 신원사(神院寺)로 초창했고, 충열왕 24년(1298)에 부암 스님이 중창한 이후 조선조에 들어 무학 스님이 태조 3년(1392)에 면모를 다시 했습니다. 현존 건물은 조선 말기인 고종 13년(1876)에 보련 스님이 다시 세운 것인데,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만허 스님이 중수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신원사(新元寺)로 바꾸었습니다. 국가의 신기원을 기리는 뜻에서였습니다. 

산신이 오늘날 우리 삶속에 살아 숨쉬는 신으로 거듭나기를 소원하면서 산문을 나섭니다. 꽃비가 내립니다. 산신도 이 꽃비를 맞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