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강인욱_초원에서 한반도까지_02

醉月 2011. 1. 30. 11:16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1> 초원의 천마, 신라에 내려앉다

- 알타이 파지릭문화 적석목곽분에 뿔로 머리 장식한 말 미라 출토…제사·의식 등 곳곳에 쓰인 듯
- 고조선 최상위 무덤 추정되는 中 요령성 유적서도 뿔 장식 출토…천마도 전래 과정 증거일 수도

콘서트에서 대형가수가 나오기 전 오프닝 밴드가 먼저 나와 관객의 흥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런데 이 오프닝 밴드가 더 큰 인기를 얻는 경우가 가끔 있다. 천마총 발굴도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초 경주를 관광지로 개발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한다는 목적으로 신라의 대형고분인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해 전시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사와 발굴의 경력이 일천했던 한국 고고학계는 축적된 경험 없이 대형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옆의 조그만 고분부터 발굴했다. 1973년 말까지 8개월에 걸쳐 발굴된 155호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고분에서 신라 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천마도가 발견되었다. 천마도는 75×56×0.6㎝의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려진 말 그림이다. 말은 입에서 허연 입김을 내뿜고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을 헤쳐 나가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천마가 그려진 유물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障泥)다. 말다래는 달리는 말의 발굽에 채인 진흙이 기마인의 다리에 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 달리는 말의 옆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용도도 겸했다. 이 천마도 덕에 155호분은 천마총이라 개명되었고 이후 발굴된 황남대총보다도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또한 경주 고분의 여러 유물과 함께 신라의 북방 초원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꼽히게 됐다.

■천마도, 기린인가 말인가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신라의 천마도.
얼마 전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흥미로운 유물이 전시되었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의 적외선 투시도가 공개된 것이다. 천마도의 재질이 빛에 민감하고 잘 부스러지는 자작나무 껍질인지라 전시를 하지 않고 특수한 방법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1997년 이후 12년 만에 전시한 것이다. 이 전시회에 맞추어 보존처리 과정에서 적외선 카메라로 찍어두었던 사진을 공개하였다. 그 결과 실제 유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말 이마 위의 뿔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몇 년간 지속되었던 천마도의 진실논쟁이 다시 벌어졌다.

즉, 천마도는 말이 아니라 기린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기린은 현재의 동물인 기린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고대 중국신화에서 기린은 말이나 사슴과 같은 몸집에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묘사되어 있다. 적외선투시도로 천마의 머리 위에 뿔이 있는 것이 분명히 확인되었다는 점이 기린설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몸통이며 모든 형태가 말에 가까워서 이 동물을 기린이라고 단정지을 근거는 많지 않다. 천마도가 출토된 상황을 봐도 그렇다. 신라 고분에서 천마도 이외에 고대 중국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는 유물이나 그림이 나온 적도 없다. 또 관련유물은 고분에 묻힌 신라 임금의 저승길을 함께 할 말의 마구다. 사자(死者)가 타고 저승길을 날아갈 말의 옆구리에 그려진 그림이니 기린보다는 천마를 그렸다고 보는 게 합당할 듯 하다.

■뿔달린 말, 초원을 거쳐서 고조선으로

 
  의식에 참가하고 있는 파지릭 전사와 말. 머리의 뿔 장식이 눈길을 끈다.
말의 머리를 뿔처럼 장식하는 풍습은 초원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초원민족의 수많은 무덤에 같이 묻힌 말들은 대부분 머리에 뿔 장식을 했으며, 제사나 의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말에도 뿔 같은 장식을 했다. 기원전 7~3세기 알타이에서 번성한 파지릭문화의 적석목곽분에서는 다양한 말의 장식과 함께 말의 미라가 발견된 적이 있다. 모든 말은 예외없이 머리에 뿔 같은 장식을 하고 있었다. 천마총의 뿔도 자세히 보면 V자형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파지릭문화의 뿔도 V자형으로 되어서 마치 사슴을 닮기도 했다.

파지릭문화의 화려한 장식은 무덤에 묻기 위해서나 퍼레이드와 같은 특수 의식에서만 장식했을 것 같다. 실제 사냥이나 전투에서는 이렇게 화려한 장식은 오히려 장애가 되었을 테니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천 개의 알타이와 초원지역의 암각화에서 실제 전투나 기마상에서 말의 머리에 커다란 뿔 같은 것을 표시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전투나 사냥 장면에서 조금 작은 뿔 같은 것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장식이 아예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뿔장식은 고조선의 최상위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요령성 심양 정가와자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1975년에 발굴된 정가와자 6512호 무덤의 마구장식을 복원한 그림을 보면 머리에 나팔 같은 청동기를 달고 그 위로 술 같은 것을 달았다. 정가와자에서 발견된 나팔처럼 생긴 청동기는 한국의 금강유역 세형동검문화(기원전 4~1세기)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마구가 같이 발견되지 않아서 실제 말의 장식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천마도의 또 다른 비밀

 
  알타이 파지릭고분에서 나온 말의 미라와 말 머리의 뿔 장식.
천마도에서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왼쪽 앞발이 90도로 접혀있다는 것이다. 말 그림이 부지기수로 많은 초원에서도 이렇게 한쪽 발을 접은 예는 별로 없다. 하지만 서기 1~5세기에 남부 시베리아에 대형 목곽분을 만들었던 타쉬트익문화에서는 이런 형태의 말 그림을 주로 썼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예니세이강 유역의 테프세이 고분에서 발견된 자작나무 껍질의 수렵도를 보자. 여기에서 말의 머리에는 뿔같은 것이 있고 한쪽 발은 접혀있다. 그렇다고 타쉬트익문화가 신라 천마총의 기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거리적으로 너무 멀고 또 말을 그리는 형태만으로 직접적인 관련을 찾을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쪽 발이 접히는 사슴은 파지릭문화에도 등장하지만, 맹수에 사냥당하며 한쪽 발을 굽히는 장면이라 천마도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한쪽 발이 접히는 말그림은 흉노의 늦은 단계에 등장한다. 타쉬트익문화 역시 흉노의 강력한 영향으로 대형고분과 마구를 썼던 문화다. 흉노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끝의 타쉬트익문화와 신라고분에서 자작나무에 그려진 비슷한 말그림이 표현된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중국 고대 사서인 '송서(宋書)'에는 '요동(遼東)지방의 말에 뿔이 났다'는 구절이 나온다. 아마도 천마사상에 입각해서 말의 머리를 장식하던 풍습이 남아있다는 증거로 보인다. 만주의 선비문화에서는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유물들이 심심치않게 출토되고 있지만 말그림 같은 것은 아직 없다. 하지만 향후 만주의 유목문화에서도 천마도의 계통을 찾을 실마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천마, 고인을 하늘로 인도하다
기원전 3500년께 사람의 역사에 말이 들어온 이래 빠른 속도로 사람을 실어날랐고 무시무시한 무기로 쓰이기도 했다. 말은 다양한 문화에서 천마, 유니콘, 페가수스, 그리핀 등 다양한 신화적인 존재로 재창조되었다. 천마도가 기린인지 말인지 하는 논쟁은 어쩌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저승으로 가는 신라 임금의 말장식에 새겨진 환상적인 동물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 최고위층의 복잡한 정신문화가 녹아있는 이 그림을 2000년 가까이 지난 우리가 어떤 동물이라고 정확히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천마도는 북방에서만 자라는 자작나무의 껍질에 그려졌으며, 다양하게 표현되는 천마사상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기린을 성군이 나올 때에 등장하는 동물이라고 믿었다. 또 '기린아'라는 말에서 보듯이 재능이 특출하거나 용맹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신라고분에 숨겨진 여러 북방 초원문화를 가장 극명하고 특출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천마도는 한반도와 초원을 이어주는 '기린아'임이 분명하다.

또 한가지 천마도의 논쟁에서 잊지 말아야할 점이 있다. 바로 35년 전의 열악한 환경에서 부스러지기 쉬운 자작나무의 그림을 세심하게 발굴하고 보존한 고고학자가 없었다면 이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공기와 닿으면 순식간에 먼지처럼 부스러지는 자작나무을 원형대로 발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시베리아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직접 발굴하며 실감했다. 화려한 유물 뒤에는 항상 고고학자들의 노고가 숨어 있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2> 고구려의 꼬치구이, 중국 입맛을 사로잡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불고기가 꼽힌다. 달구어진 석쇠에 즉석에서 구워 먹는 불고기는 우리 현대문학에 자주 등장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에 병이 걸려 누운 아내를 두고 돈 벌러간 인력거꾼이 일을 마치고 선술집에 들렀을 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석쇠에서 빠지짓 빠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 구이며, 제육이며, 간이며, 콩팥이며…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안주에 김첨지는 견딜 수 없었다'. 누워있는 아내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국 선술집에 주저앉고 마는 김첨지의 마음은 고깃집의 유혹에 퇴근길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요즘 샐러리맨 마음이기도 하다. 서울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차의 종착역인 마포에서 내려 영등포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며 한 점 불고기에 대포 한잔 들이켜는 것이 서민들 낙이었다. 바비큐처럼 숯불 위에 고기를 구워 먹는 풍습은 자고로 초원민족의 전매특허인데, 어찌해서 불고기가 농경민족인 우리의 대표 음식이 되었을까? 불고기에 얽힌 우리 속의 초원문화를 살펴보자.

■초원의 패스트푸드

 
  고구려 시대 무덤인 안악3호분의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의 부엌과 고기를 걸어놓은 창고.
고기를 직접 불에 구워 먹는 불고기는 중앙아시아와 초원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풍습이다. 별도의 솥이나 그릇이 필요 없이 그냥 그날 잡은 고기를 장작불 위에 걸어놓고 배고프면 칼로 쓱 베어서 곧장 구워먹는 식이다. 아마도 가장 간단하며 널리 퍼져있는 요리법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꼬치구이인 샤슬릭은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풍갈 때 김밥을 싸가듯 놀러 갈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다.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서 식초에 절였다가 쇠꼬챙이에 줄줄이 끼워 양파를 곁들여 먹는다. 샤슬릭은 이동 중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 고속도로 휴게소나 기차역 근처에는 언제나 샤슬릭 노점상이 즐비하다.

또 중국에서도 뀀구이(串)점은 인기 중 인기다. 어느 도시를 가도 시장통에는 매캐한 연기를 풍기며 사람을 유혹하는 꼬치구이점들이 성업이다. 중국 음식 특유의 향신료가 가미된 것이 조금 거슬리지만, 그래도 두툼한 고기 한 축에 한국돈 200~300원 꼴로 매우 싸다. 중국에 조사를 다니면, 아무래도 전공이 고고학이니 대도시보다는 허름한 시골로만 다니게 된다. 그래도 저녁에 허름한 시장통에서 맥주 한 잔과 꼬치구이 한입 하는 맛은 참 각별하다. 거기에다 값까지 놀라울 정도로 싸니 자리를 파할 때에는 서로 자기가 내겠다는 '흐뭇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러시아건 중국이건 초원민족의 음식인 꼬치구이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아마도 빠르게 먹을 수 있다는 간편함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꼬치구이가 현대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불고기가 중국을 위태롭게?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에서 나온 고구려 시대 철제 부뚜막. 혹시 휴대용으로 지니고 다니면서 고기를 굽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의 불고기에 대한 최초 기록은 서기 3세기 께의 중국 역사책인 '진서'다. 이 책에는 진무제(晉武帝·265~274) 때 고구려의 밥상(맥반)과 꼬치구이(맥적)를 귀족들까지도 좋아하니 곧 중국이 망할 것이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맥적에서 '맥(貊)'은 고구려를 뜻하고 '적(炙)'은 불(火)위의 고기(夕=肉)를 의미하니, 맥적은 곧 꼬치구이다. 실제로 서진(西晉)은 그 경고대로 316년에 남흉노에게 망하니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아니라 경국지육(傾國之肉)이 된 셈이다.

맥적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고구려인들은 만주지방이 원산지인 콩을 이용해서 된장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다. 반농반목을 했던 고구려이니 장류와 여러 가지 채소가 발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맥적은 여러 가지 채소와 함께 독특한 장류를 섞어서 잰 고기였을 것으로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맥적의 실물자료는 거의 없지만,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의 부엌그림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벽화는 부뚜막에 솥이 걸려있는 주방과 그 옆의 창고에 갈고리에 꿴 고기를 주렁주렁 걸어놓은 장면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시베리아에 발굴 가서 그 용도를 짐작하게 되었다. 발굴 중에 가끔씩 근처 농민이 기르던 염소나 사슴을 잡아오면 보드카 2~3병을 주고 바꾸었다. 이 고기를 장작불 위에 걸어놓으면 자연스럽게 훈제가 되고, 출출할 때면 한 점씩 떼어서 소금 약간 뿌려서 구워먹곤 했다. 특히 1997년에 에벤키족 조사를 나갔을 때에 먹었던 순록의 뒷다리 꼬치구이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안악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의 외양간.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에서 조사된 고구려 고분 중에 궁녀(宮女)의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에서 특이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바로 길이 67.2㎝인 철제 부뚜막이다. 흙으로 구운 보통의 부뚜막보다 작지만 철로 단단하게 만들어 실제로 쓰는 데 부족함이 없다. 굳이 부엌의 부뚜막을 무덤에 가져갈 리는 없으니 특수한 용도였을 것이다. 혹시 맥적 같은 꼬치구이를 야외에서 구웠던 일종의 이동식 불판은 아니었을까. 굴뚝은 옆으로 빠지게 되어있으니, 고기라도 굽는다면 연기를 옆으로 빼기 용이했을 것이다. 더 상상력을 보탠다면, 무덤 주인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 여행갈 때 야외에서 고기를 굽는 것을 전담하던 궁녀는 아니었을까?

맥적의 전통은 계속 이어져 지금의 산적과 너비아니(불고기)로 계승되었다. 고려시대 때에 지나친 불교정책으로 고기요리의 명맥이 끊길 뻔한 적도 있었다. 송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고기를 제대로 도축할 줄을 몰라서 요리한 고기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냄새가 났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왕실과 귀족의 얘기였을 것이며, 민중들은 꾸준히 불고기의 전통을 계승했을 것이다. 몽골군인들이 100여 년간 주둔하면서 소를 잡아먹자 황해도 지역 주민들도 그 습관을 따라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몽골의 침입도 불고기문화에 일정한 활력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계로 전파된 '초원+농경'의 맛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대표적인 꼬치구이 요리인 샤슬릭.
중국에서 유행했던 불고기는 중국 북방의 흉노 돌궐 선비 같은 초원민족이 즐긴 '원조' 꼬치구이가 아니라 고구려의 맥적이었다. 아마도 반농반목이었던 고구려 특유의 음식기술로 초원지역의 고기를 농경민족의 입맛에 맞게 바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기만 구워먹는다면 아무래도 느끼하고 금방 질릴 것이다. 하지만 맥적은 요즘 산적처럼 마늘이나 다양한 야채를 곁들이고 여러 양념을 해서 누구나 먹기 좋은 음식으로 바꾸었다. 맥적은 후에 너비아니처럼 넓적하게 고기를 잘라서 다양한 양념을 재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다양한 양념이 잘 배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 같다. 다른 유목민족을 제치고 고구려의 맥적이 중국에서 인기를 얻은 이유는 특유의 양념과 다양한 구이 기술에 있었으니, 이게 바로 고대의 한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의 불고기는 다시 일본으로 전파되어 '야키니쿠'가 되었다. 야키니쿠는 불고기를 뜻하는 일본어로 일제시대와 일본 패전 직후 힘들게 살던 재일교포가 개발한 요리다. 심지어 일본사람은 먹지 않는 곱창이며 내장을 구웠으니 연기가 독하고 냄새가 심해 천한 음식이라고 깔보았다. 하지만 일본 야키니쿠도 서진 때의 맥적처럼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탈바꿈했다.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의 입맛을 사로잡은 불고기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불고기가 세계적으로 호평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초원과 농경민족의 요리법을 한데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즉, 고기를 좋아하는 서양사람이건, 채식을 주로 하는 동양이든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단백질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아시아 사회는 고기를 잡고 요리하는 것을 천대했다.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천민들로 전락했다. 그러한 천대 속에서도 우리 음식문화 속에서 불고기는 끊어지지 않았고, 국제화된 한국의 음식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불고기의 열풍 뒤에는 2000여 년 전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초원과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재창조한 고구려의 힘이 숨어있다.

바닷가인 부산의 근처에도 언양, 봉계, 철마 등 고기가 유명한 곳이 많다. 비교적 산이 잘 발달한 경남의 지형 덕에 질 좋은 고기가 많이 난다. 필자도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광안리의 불고기골목으로 데려간다. 바닷가에서 즐기는 고기는 남다르다. 오장육부를 자극하는 냄새와 함께 타오르는 불고기 한 점에서 초원과 면면히 이어지는 우리의 음식문화를 생각해본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3> 고구려, 초원을 탐하다

타임지가 지난 1000년간의 최고 영웅으로 뽑은 칭기즈칸은 우리에게는 고려시대의 침략자라는 이미지도 강했다. 심지어 1980년대를 풍미했던 디스코 그룹 징기스칸의 노래 '징기스칸'은 제5공화국 시절에 금지곡이었다. 하지만 지금 몽골은 동아시아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되고 있다. 외모에서 풍기는 유사성뿐 아니라 대국적인 기질이며 성정이 우리에게 참으로 가깝게 느껴진다.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유목국가인 몽골에서 느껴지는 친연감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역사상 최초 한-몽 동맹관계의 구체적 증거는 서기 5~6세기 고구려와 몽골에 웅거한 초원제국 유연 사이의 우호관계다. 두 나라는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중국 세력을 견제했다. 두 나라의 동맹관계는 서기 475년 몽골과 고구려 사이에서 거주했던 부족인 지두우를 공격해 분할하는 작전으로 구체화됐다.

■고구려, '원조'(元祖) 한-몽 동맹관계를 열다

 
  고구려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한 제국답게 중국뿐 아니라 초원과 연해주의 여러 부족들과 겨루며 서북쪽으로 고막해, 지두우, 거란 등의 초원민족과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흑룡강성 서북쪽의 호룬뻘평원에서 시작해 자바이칼, 동몽골에 이르는 춥고 황량한 초원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족이었다. 이 지역은 좋은 말이 나기로 유명했지만, 농사가 불가능했던 탓에 지속적으로 주변 국가와 교역하여 곡물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두우와 거란이 고른 교역 파트너는 당시 고구려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북위였다. 북위는 흉노에서 갈려나온 선비족의 일파인 탁발선비가 세운 나라였지만 빠르게 중국화하여 중원으로 진출했다. 북위는 서기 4~5세기에 중국 북방에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지두우는 북위와 변경에서 국경시장인 교시(交市)를 열어서 서로의 이익을 얻고 있었다.

'지두우 분할 작전'은 고구려 장수왕 때 시작됐다.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기름진 남쪽의 땅을 차지하느라 바빴을 고구려가 굳이 황량하고 추운 반 사막지대의 땅을 탐할 이유가 있었을까. 강력한 기마부대를 유지했던 고구려로서는 지두우가 기르던 우수한 말이 탐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고구려에 적대적인 북위세력이 지두우와 친해진다면 고구려가 몽골 초원으로 나아가는 루트가 막히는 결과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 초원에서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은 유연제국은 흉노의 뒤를 이어 5~6세기에 몽골에서 크게 발흥한 유목 제국이었다. 유연과 고구려는 공동의 적인 북위에 대항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고구려는 유연에게 양질의 철제 개마(鎧馬·갑옷을 입혀 무장시킨 말 또는 그러한 용도의 갑옷) 무기를 제공했고, 유연은 고구려에게 양질의 말을 제공했다. 또한 유연은 광활한 초원지역을 점했던 탓에 고구려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류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러니 두 나라 사이에 있던 지두우가 북위에 부의한다는 것은 고구려로서는 초원의 길이 끊기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단독으로 지두우를 정벌하기에는 국내외 정세가 여의치 않았을 테니 유연과 합동작전을 모색한 것이다.

■미스터리의 초원제국 유연

 
  고구려와 대치했던 북위의 전사를 새긴 조각상. 중국 요령성박물관 소장.
초원지역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유연제국은 영원한 미스테리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유연은 4~6세기에 몽골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초원을 통일한 거대한 제국이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유연을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 초원을 200년 넘게 지배한 제국의 고고학적 유물이 없다는 것이 가능할까? 몽골초원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 바필드는 유연을 '실패한 유목국가'라고도 했다. 고고학적 유물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기록에 나오는 유연은 가공할 만한 거대 제국이었다. 아마 유연의 수도나 성터가 아직도 몽골 사막 어딘가에 숨겨져 있거나, 유연의 뒤를 이은 돌궐제국의 유적과 섞여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거나 유연은 고구려의 영원한 동맹국이기도 했다. 고구려와 초원지역을 기록한 모든 사서들은 공통적으로 둘의 강력한 파트너십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는 유연에게 대량의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다. 그러므로 만약 앞으로 구체적인 유연의 유적이 몽골에서 발견된다면 고구려와 관련이 매우 깊은 유물들도 반드시 출토될 것이다. 나에게 몽골 조사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유연의 유적을 꼭 조사해보고 싶다.

광개토대왕 시절에 중국을 장악한 북위의 팽창은 고구려에게도 위기였다. 특히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있던 북연이 멸망하면서 두 나라 간의 관계는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북위의 북방에서 초원제국을 이루고 있던 유연도 북위와 군사적 갈등이 심각했다. 이 상황에서 이루어진 지두우 분할작전에 대한 기록은 매우 짧아서 '위서-거란전'에 달랑 1줄만 나와 있다. "고구려는 몰래 유연과 공모하여 지두우를 나누려고 했다. 거란은 그 침략을 두려워하여…1만여 명을 이끌고 백랑수로 갔다." 이 말만 보면 애매하다. 지두우를 분할하려고 계획했다는 내용만 있지, 성공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바로 그 다음 문장은 엉뚱하게 그 옆에 있었던 거란이 몽골 동부에서 몇 백 킬로미터를 남하해서 대릉하(백랑수)지역으로 도망갔다는 기록이다.

 

 

 

 

 

 

 

 

 

 

 

 

 


■지두우 분할작전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요나라 고분벽화에 그려진 거란인.
아마도 지두우 분할작전은 지두우뿐 아니라 거란을 비롯한 모든 친북위세력들을 위협할 만한 원정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란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해서 머나먼 대릉하 유역까지 도망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두우 작전의 기록이 '거란전'에 실리게 된 것도 자연히 이해가 된다. 실제로 '남제서'(南齊書)에는 서기 480년 고구려가 다시 유연과 연합해서 거란을 공격했다고 되어 있다.

지두우 작전은 결국 북위가 고구려와 화친을 맺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북위는 당시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고구려의 순위를 제(齊)나라 다음인 두 번째로 했고, 491년에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효문제가 직접 상복을 입고 추모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역사상 최초의 한-몽 합동작전은 북위의 기세를 꺾고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지두우를 실제로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을까. 이 부분은 역사 기록이 적으니 고고학이 나서서 해결해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두우가 있었던 호룬뻘평원과 동몽골은 중국과 몽골 고고학에서 가장 조사가 덜 된 지역이다. 게다가 고구려가 노린 것은 지두우의 세력 약화이지 영토 점령은 아니었으니 고고학적인 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가 군사작전을 취하면서 성지 같은 것을 만들었다면 고구려 계통의 무기와 마구들도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중국의 팽창주의는 주변의 모든 국가로부터 우려감을 불러일으킨다. 주변 지역의 역사를 자국사로 바꾸는 것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작금의 중국은 주변지역을 압박하고 있다. 최근 한국이 몽골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은 고구려가 유연과 밀접한 동맹관계를 맺고 거대한 북위에 맞섰던 시절과 많이 유사하다. 서로 너무나 상반된 국가체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 몽골이 서로의 장점을 취한다면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의 첨단 기술과 몽골의 광활한 자연자원을 결합시키는 '한-몽 연방제'라는 다소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고구려의 지두우 분할작전은 이미 1500년 전 초원과 한민족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 여파 때문에 고구려와 한국과의 관련성에만 관심이 많다. 하지만 고구려가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초원지역과 다양한 교류'라는 뒷받침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두우 분할작전에는 척박한 환경과 첨예한 국제관계에서 고구려가 진정한 승자로 우뚝 서게 한 지혜가 숨겨져 있다.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지금의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4> 고구려의 등자, 세계사를 바꾸다

- 3세기 후반 고구려…모용선비 침략받고 무기 개량시켜
- 말타는 사람 발걸이 철제 '등자' 등장
- 고구려와 밀접했던 유연제국의 유민들 철제무기로 무장, 유럽 떨게 해
- 서양 철갑기병 문화…고구려 영향 받은 시베리아 초원 기원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 삼실총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개마무사. 개마무사란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힌 기병을 가리킨다.
1945년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의 호우총에서는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과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와 서양의 중세시대를 전공하는 고고학자들의 주의를 끈 유물은 볼품없는(?) 등자 1벌이었다. 광개토왕의 이름이 나왔으니 호우총은 5세기 초엽 고분이고, 고구려벽화에서는 적어도 4세기 대에 이미 중갑병과 등자가 보이기 시작하니 등자가 나온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서양에서 철로 만든 등자와 중갑병은 7세기 이후에나 등장하니 조그만 변방의 나라에서 발견된 등자는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연 등자는 한국에서 기원한 것인가? 조그만 등자 하나에는 세계사의 획기적인 변화가 숨겨져 있다.

등자란 말을 타는 사람의 발을 거는 일종의 발걸이다. 초원의 기마민들은 어릴 때부터 말타는 훈련을 받아서 등자 없이도 말을 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노약자나 어린 아이들이 말을 탈 때는 낙마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씩 발걸이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서기 1~2세기께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긴 창으로 적의 대오를 깨뜨리는 중갑병이 출현하게 되었다.

엔간한 화살로 뚫을 수 없는 갑옷을 입은 기마부대는 아마 지금의 탱크 같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장기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무거운 철갑을 쓰고 장검이나 창을 휘두른다면 말 위에서 중심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중갑병이 낙마라도 한다면 묵직한 갑옷으로 제대로 싸우기도 어려울 테니 그냥 적에게 목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몸 중심을 단단히 지지하는 등자는 중갑병의 위력을 보증해주는 필수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등자의 기원, 고구려인가 중국인가

 
  아바르족의 허리띠 장식.
1950년대에 중국 호남성의 금분령이라는 무덤에서는 악사를 태운 말에 발걸이가 그려진 토용(토제인형)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서기 302년께의 것으로 확실한 연대가 알려진 최초의 등자가 된 셈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근거로 등자의 기원을 중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발걸이와 등자는 다르다. 발걸이는 페르시아, 스키타이, 인도 등 세계 곳곳에서 더 빠른 시기의 유적에서 다수 보인다. 세계사를 움직인 발명품은 중갑병이 썼던 철제 등자이기 때문에 발걸이만을 가지고 중원기원설을 주장할 수는 없다.

최근에 요령성의 모용선비에서 다량의 철갑과 등자가 출토돼 새롭게 등자의 기원지로 주목받고 있다. 모용선비는 서기 3~5세기 북중국을 장악한 세력으로 흉노의 발달된 철기문화를 더 발전시켜 새로운 동아시아 강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철제등자를 개량하고 발달시킨 배경에는 바로 모용선비와의 전쟁이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북쪽에 살던 모용선비가 고구려 근처로 내려와 고구려는 곤경에 처했다. 서기 293년과 296년에 모용선비의 우두머리 모용외는 고구려 서쪽 변경을 침략하고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일방적으로 고구려를 수세로 몰아갔다. 그러자 봉상왕은 당시 고구려 서쪽 경계인 신성(지금의 요령성 무순시)의 성주로 고노자(高奴子)라는 장수를 파견했다.

고노자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후 모용선비는 더 이상 고구려를 괴롭히지 못했으며 반대로 고구려가 4세기 초반에 주변의 낙랑군, 대방군 등을 멸망시키는 강력한 군사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역에 최초의 금속등자와 개마가 발굴되는 시기가 대체로 3세기 후반께니 이때와 부합한다. 아마도 모용선비의 침략에 놀란 고구려가 등자와 중갑병 중심의 무기로 재편했고, 이 과정에서 금속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게다가 반농반목민이었던 고구려인에게 등자는 초원의 기마민들과 대적하는 데 필요한 도구였으며, 산악지대가 많은 고구려 지형에도 적합했을 것이다. 고구려가 발달시킨 등자는 이후 한반도의 신라와 가야로도 파급되었고, 시베리아 초원으로도 빠르게 파급되어 갔다.

■무시무시한 아바르족은 누구인가

 
  알타이에서 발견된 고구려식 등자.
1968년 남부 시베리아의 투바에 위치한 울룩-호룸 유적에서 아주 흥미로운 유물이 출토됐다. 중세시대의 고분에서 기존에 발굴된 투르크시대 등자와는 다른 등자가 발굴된 것이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고구려벽화와 무덤에서 발견된 등자와 같은 계통임이 밝혀졌다. 고구려 등자가 시베리아 초원으로 유입된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이후 이 등자는 '고구려식 등자'로 명명되었고, 현재까지 시베리아 초원지역에서 20점 정도가 발견됐다.

시베리아에 고구려식 등자를 수입한 사람들은 유연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유연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고구려의 발달된 철기 기술이 유연으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 등자가 등장하는 5세기 중반 이미 모용선비는 세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또한 유연의 뒤를 이은 투르크는 서기 551년 처음 고구려와 전쟁을 한 이래 지속적인 갈등관계였다. 돌궐은 유연제국 시대에 철기를 만드는 일을 했으니, 그러는 와중에 고구려계통의 등자도 같이 수입했을 것이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고구려식 등자는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행진이나 제사 때에만 쓰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라는 선진국가에서 수입한 등자라는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바르족 전사의 개념도.
유럽의 중세시대 무사라면 은빛 갑옷을 입고 긴 창으로 결투를 벌이는 기사가 떠오른다. 중세를 누빈 철갑기사는 8세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 갑옷을 쓴 기사의 필수품은 바로 등자였다. 서양에 등자와 개마를 처음 도입한 사람들은 아바르족이다. 그렇다면 아바르족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바르족은 유럽의 동쪽 끝 초원에서 왔다고 하니, 시베리아초원에 그 실마리가 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다스리던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린 5세기께 알타이에는 늑대를 조상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초원을 다스리던 유연제국에 복속되어 철기 무기를 만들었다. 이 민족의 이름은 한문으로 돌궐(突厥)이라 쓰는 투르크다. 지금은 우리에게 둘도 없는 우방국인 터키의 조상이지만, 당시에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관계였다. 투르크는 유연에 반기를 들고 독립했으며, 552년 결국 유연을 무너뜨렸다. 투르크에 망한 유연의 잔존 일파는 초원 서쪽으로 도망가며 동아시아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6세기께 현재의 불가리아와 도나우 평원지대에 강력한 철제무기와 마구를 갖춘 무시무시한 집단이 출현했다. 이들은 서로마제국의 변경을 괴롭히며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바로 아바르라고 불렸던 투르크 계통 민족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아바르족이 투르크에 패주한 유연의 일파라고 본다.

■고구려 문화도 초원으로 전파됐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서도 이 점은 뒷받침된다. 루마니아에서 발견된 아바르족의 초기 무덤자료를 보면 상당수 전사가 몽골로이드였는데, 점차로 백인화한다고 한다. 또 아바르족의 허리띠, 등자, 안장, 무덤 등은 알타이의 중세문화와 아주 유사하다. 실제로 볼가강 유역의 졸로타료프카 유적에서는 고구려식 등자와 함께 시베리아 계통의 장검, 창, 허리띠 등이 대량 출토된 바 있다. 즉, 서양에 등자와 발달된 개마문화는 고구려 개마문화에 영향을 받은 시베리아 초원에서 온 것이다. 결국 고구려 개마문화가 유라시아 초원지대라는 장대한 고속도로를 타고 서양으로 전파됐고 서양 중세시대를 여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초원을 따라 유입된 동아시아 문화가 서양사를 바꾼 예는 흉노와 훈족, 칭기즈칸의 몽골, 마자르 족 등이 유명하지만 이제 그 관심을 유연과 아바르로 확대시킨다면 고구려와 유연의 역사가 세계사의 한 축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5> 중앙아시아로 건너간 고구려사신들

- 서기 7~9세기까지 실크로드 교역지 사마르칸드는 중앙아시아 소그드왕국 수도
- 1965년 발굴 벽화서 머리 깃 꽂고 관 쓴 고구려 사신 추정 인물 두 명 발견
- 최근 학계에서는 연개소문 특사 가능성도 제기
- 고구려 이후 발해도 교류 증거들 나와
- 우리 선조들의 중앙亞 진출 루트 생생하게 증명

 
  아프라시압 궁궐 유적 벽화의 개념도. 오른쪽 끝 머리에 깃을 꽂고 있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선명하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동서 문명의 십자로-우즈베키스탄의 고대 문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올해 11월 16일 시작해 2010년 9월 26일까지 열린다. 지난 주에 이 특별전을 보고온 필자의 느낌은 참 각별했다. 왜냐하면 러시아 유학시절에 중앙아시아의 유물을 보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가고 싶었지만 이미 독립이 되어서 새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해 결국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기 힘들었던 중앙아시아의 문화유산이 우리나라에서 전시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문화적 포용력이 넓어졌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이 전시회에는 한국 고대사의 쟁점 중 하나였던 한 벽화의 모사도가 전시되고 있었다. 바로 아프라시압의 궁전벽화다. 1965년에 처음 발견된 이 벽화에는 고구려의 사신이 묘사된 것으로 유명하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우리에게는 동떨어진 공산주의 국가 이미지가 강했다. 냉전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0년대 우즈베키스탄의 발굴자료는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어 한국의 고대사학계를 흥분시켰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도시인 사마르칸드는 서기 7세기에서 9세기까지 실크로드의 교역으로 유명한 소그드국(소그디아나)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서는 200여 년 전부터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교외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지역은 당시 소그디아나의 중심지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아프라시압이란 사마르칸드 북쪽을 관통하는 시아브강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인데, 1965년에 건설공사를 하다 우연히 소그디아나 왕인 와흐르만(중국어로는 불호만·拂呼縵 이라 썼다)의 궁전이 발굴되었다.

■깃을 꽂은 사진, 신라인가 고구려인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교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궐 유적에서 발견된 벽화. 머리에 깃을 꽂고 있는 오른쪽 끝의 두 사람이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 벽화는 서기 7세기 중후반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사마르칸드는 실크로드의 교역국가 소그드왕국 수도였다.
사마르칸드라는 역사도시에서 궁전이 발견되는 정도는 어찌 보면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아프라시압의 궁궐벽화에는 당시 왕을 방문한 수르한다리야의 귀족 챠가니안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만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8세기 초엽 아라비아인들의 침입으로 정작 왕의 모습은 파괴되었지만, 이 연회를 기록한 명문과 함께 당시 사신들의 생생한 모습이 남아있어 서기 7~8세기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된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L.I. 알바움은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을 하나씩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중 동쪽 벽화의 가장 오른쪽 모서리에 있는 두 명의 인물들에 주목했다. 젊은 청년같이 생긴 이 두 명은 머리에 깃을 꽂은 관을 쓰고 윗도리는 좌임(왼쪽으로 옷을 묶음), 그리고 고리로 된 긴 칼을 차고 있었다. 알바움이 알고 있는 한 중앙아시아에서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자료를 뒤지던 중 평양에서 1958년에 출판된 '고구려벽화고분연구'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관에 깃을 꽂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벽화가 발견된지 10여 년 후 출판된 정식보고서인 '아프라시압의 벽화'에서 알바움은 고구려의 여러 자료를 비교분석하여 이 사신들은 고구려에서 왔다고 결론지었다.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는 이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알려지면서 고대사학계는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었지만, 여기에 또 다른 논쟁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이 궁전벽화는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지 통일신라인지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소그디아나는 8세기 초에 아라비아인의 침략을 받았다. 또 벽화에 새겨진 여러 복장이나 역사기록을 참고할 때에 벽화의 제작 연대는 7세기 중후반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연도가 668년이니 이 사신의 주인공이 통일신라시대의 신라사람인지 아니면 고구려사람인지 애매할 수 밖에 없다. 신라인이라는 근거는 아프라시압 벽화의 그림이 신라에서도 보이며, 전형적인 고구려의 복장과는 다소 다르다는 데 근거한다.

사실 정확한 명문자료가 나와있지 않은 상황이니 결론은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통일을 한 후에 당나라의 간섭을 뿌리치기 위해 국가적인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 이전에도 중앙아시아와 교류했었던 증거는 없다. 그러니 통일을 이루는 혼란기에 굳이 이역만리에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은 별로 없고, 고구려 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 최근 학계에서는 고구려 사신들이 연개소문의 특사로 군사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파견되었다고 본다.

■벽화 속에는 중국옷을 입은 여인들도

 
  소그드왕국의 인물상(왼쪽 그림)과 발해에서 출토된 인물상(오른쪽 실물). 형태가 유사해 두 지역의 교류 흔적을 보여준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본다면 그러한 설명이 매우 합당하다. 마치 대한제국 시절에 헤이그로 파견된 고종의 밀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혹시 소그디아나의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화려한 잔치의 끝자리에 의젓하게 서있는 두 사신의 모습이 약간은 슬퍼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와흐르만의 잔치에 초대된 고구려 사신들은 맨 끝줄에 서있다. 아마 땅끝에서 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는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고구려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있을 때 사신을 파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소그디아나는 고구려에게 도움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소그디아나는 당나라와도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학계에서는 고구려인의 벽화에만 주목하지만, 아프라시압 벽화의 다른 부분에는 중국옷을 입은 여인들이 배를 타고 노니는 장면이 있다.

중국계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온 왕의 후궁들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당시 비슷한 옷은 중국 이외에도 고구려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 있었다. 그런데 와흐르만왕은 고구려뿐 아니라 중국과도 친선관계를 맺고 있어서 중국의 벼슬을 받아 강거도독을 자처했다. 소그드인들은 타고난 장사꾼으로 실크로드를 경제적으로 장악한 사람들이었다. 장사꾼답게 고구려뿐 아니라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는 능수능란함이 이 벽화에도 잘 나와있다. 고구려 사신이 어렵사리 도착한 소그디아나의 아프라시압 궁전에서 중국인 후궁들과 사신을 보고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와흐르만 통치 이후 소그디아나는 아라비아인들에게 정복되어 종교를 이슬람으로 바꾸었다. 이후 압바스 왕조가 이 지역을 정복하고 당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당시 당나라의 장군이 된 고구려의 유이민(流移民)인 고선지는 소그디아나를 정복한 아라비아군과 맞서 탈라스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아라비아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당시 중국군 포로 중에는 종이기술자가 있었다. 이 전쟁은 서양에 종이가 전파가 된 계기가 된 중요한 전쟁이었다.

■중앙亞-고구려 교류, 발해로 이어져

고구려의 중앙아시아 루트는 고구려 멸망과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에서도 소그드인과 교류한 증거가 보이기 때문이다. 연해주 노브고르데예프카 성지에서는 소그드의 은화가 발견되었고, 네스토리우스파(기독교의 한 분파)가 전래한 것으로 보이는 석제 십자가도 출토되었다. 고구려에서 아프라시압까지 오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 테니, 아마 사신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고구려는 이미 망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고구려는 당시 발달된 개마기술을 갖고 있었으니, 소그디아나에서 장군으로 활동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새로 건국된 발해와의 교역루트를 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우즈베키스탄은 한국과의 공동조사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사신들의 그후 운명을 밝혀줄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최근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오는 여성들이 급증하면서 이들은 한국 다문화코드의 한 상징으로도 떠오르고 있다. 그에 따라 단일민족의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적응하는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아프라시압의 벽화에서 보듯이 중앙아시아는 단순한 결혼교류 이전에 수천년을 이어온 문화교류의 핵심지였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6> 기마민족, 패전국 일본인 달래주다

 
  일본 나라현 4조 고분에서 나온 말모양 토기.
한국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웃집의 토토로'나 '반딧불의 묘'같은 만화는 패전 이후의 일본인을 2차 대전의 피해자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비판도 많이 받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원폭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의 피해를 받은 '불쌍한' 나라임을 강조한다.

반면에 당시 식민지였던 주변 나라에 대해서는 별다른 사과가 없다. 얼마 전 뉴스에서 태평양전쟁에 끌려간 한국인 근로자들에게 후생연금의 탈퇴 명목으로 단 99엔만을 지급한다고 해서 온 국민이 허탈해했다. 이런 이중적인 일본의 모습은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일본의 이런 이중성이 고대사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만세일계'를 외치며 125대의 천황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왔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마민족이 일본으로 내려와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러하다.

 

 

 


■일본에 '기마민족설'이 등장한 배경

 
  일본 오타니(大谷) 고분에서 출토된 5세기 후반의 마구.
1945~1952년 일본은 GHQ(General Headquarters)라고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배를 받는다. '대일본'이 아시아를 제패하고 태평양으로 나아가 미국을 침략하다 순식간에 식민지가 된 상황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일본민족의 기마민족설이 등장한다. 패전의 상처가 깊게 남아있던 1948년 도쿄 오차노미즈의 한 찻집에서 일본의 고고학·역사학·민속학자들이 일본민족의 기원에 관한 대담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위대한' 일본민족은 일본열도에서 계속 살던 사람이 아니라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에 의해서 성립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주인공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로 도쿄대를 졸업하고 몽골과 중국을 조사한 고고학자였다. 그의 설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분시대(서기 4~5세기)에 만주 쑹화강 유역에서 살던 부여계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이 기마민족들은 발달된 기마술과 철제 무기로, 당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일본열도를 지배하고 강력한 야마토국가를 세웠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일본 후쿠오카의 다케하라(竹原) 고분에 그려진 그림. 말을 배에 싣고 있는 모습이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소위 '만세일계'를 강조하면서 '일본은 2600년간 순수한 혈통을 유지한 천황이 다스렸다'던 군국주의 시절의 선전에 반기를 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설에 따르면 천황은 4~5세기께 북방 초원의 민족이 내려와서 원래 있었던 천황을 몰아낸 셈이 된다. 20세기 초반에 일본은 한국과 만주는 워낙 미개하기 때문에 먼저 문명국가가 된 일본이 이들 지역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식민지화했다. 그런데 일본민족의 기원이 바로 식민지의 미개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기마민족설이 나오기 6년 전인 1942년에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이 허구라는 연구를 발표한 일본 고대사 연구의 대가인 스다 고이치(津田左右吉)가 징역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극우파들의 암살협박이 있었을 법도 한데, 반대로 일본 사회에서 기마민족설에 대한 지지는 엄청났다. 도대체 기마민족이 뭐기에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 받아들여졌던 표면적인 이유는 GHQ 덕분이다. 강력한 미군에 패한 일본의 천황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과 동격으로 되었고, 천황의 자리는 점령군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이 대신하게 되었다. 또 패전 전에 일본의 지식인과 사회를 강력히 통제하던 일본군부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니 천황의 단일 혈통을 부정한다고 감옥에 끌려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본 사람들이 기마민족설에 환호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정복'과 '교류'는 그 흔적이 다르다

 
  6세기 일본 무사를 표현한 하니와 토기.
기마민족설이 사회적으로 널리 인기를 끈 진짜 이유는 천황제의 부정이 아니라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일종의 향수이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기마민족이 아시아를 제패하고 일본으로 내려왔다는 주장은 사실상 패망 직전 주변을 침략하던 '강한 일본'에 대한 향수이자 데자뷰(기시감·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였다. 또 만주 등지는 패망 전 일본이 정복했던 곳으로 '강한 일본'의 잃어버린 옛 영토이기도 했다. 즉, 원래 일본의 기원은 미국에 패전한 무기력한 일본열도에 있지 않고 북방을 호령하던 초원민족이라고 믿음으로써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하려 한 것이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식민지시절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기마민족설은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에가미의 견해처럼 강력한 기마민족이 남한을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면 남한에서 성립한 가야나 신라가 강력한 기마민족국가로 바뀌어서 일본으로 진출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하지만 에가미는 남한은 그냥 기마민족이 지나쳐가는 '정거장'이었으며, 강력한 국가를 세운 것은 일본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일본에서 기마민족이 세운 강력한 국가가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것으로 보아서 식민사관을 합리화시켰을 뿐이다.

기마민족설은 다소 변형되어서 한국 사회에서도 널리 퍼져있다. 대표적인 예가 '가야의 부여계 기마민족설'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강력한 철제무기와 북방계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데 근거해 부여계의 기마민족이 남하해 기존의 가야 지배세력을 대체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요지다. 또,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황금유물들을 근거로 초원민족이 내려왔다고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필자 역시 초원지역의 강력한 영향으로 신라와 가야의 고대문화가 발전했다고 본다. 수많은 고고학적 자료는 결코 초원지역과의 관련성이 우연이 아닌 것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초원계의 유물이 보인다고 곧바로 대량의 기마민족이 내려왔다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다. 문화적 교류와 전쟁에 의한 정복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상 고고학적으로 볼 때 대량의 기마민족이 내려와서 정권을 바꾸었다는 증거는 없다. 특정한 기마민족이 기존의 사회를 정복하고 왕권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초원과 교류로 역량 커진 점에 주목해야
만약 소수의 기마민족이 한반도와 일본을 바꾸었다면 무덤에서 출토되는 인골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인 생활문화에 커다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증거나 전쟁의 흔적은 없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초원의 발달된 기술을 유입하면서 가야와 신라는 비약적으로 국력을 신장시켰다. 가야와 신라의 수많은 북방계 문화 요소는 단순히 누군가의 침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다양한 문화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던 사회 자체의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북방기원설이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필자에게도 많은 사람이 우리 민족의 기원이 알타이인지 바이칼인지를 묻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대답은 똑같다.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지만 일방적으로 초원에서 한반도로 대량의 인구가 유입된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타이 또는 바이칼 지역을 기원지로 지목한 이유는 어떻게 보면 주변 국가의 침략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였을지 모른다. 마치 쇠락한 양반집 사람이 "알고보면 우리 조상은…" 하면서 위로하는 것과 비슷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 그리고 해방 이후 강력한 서구의 문명이 밀려들어오면서 상대적으로 초라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고대사에서 위안을 찾았는지 모른다.

이제 초원은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막연한 한민족의 기원지라는 상상 속의 땅이 아니라 실제로 교류하는 우리의 이웃이 되고 있다. 가야와 신라가 북방문화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때는 바로 그 국력이 비약적으로 신장하던 때였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도 발전하는 우리 경제와 함께 문화적 역량도 초원으로, 또 아시아로 나아가길 바란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7> 반구대 암각화, 초원과 한반도를 잇다

 
  반구대 암각화 전경을 보여주는 도면.

- 1자형 배와 사람, 춤을 추는 사람들, 활쏘는 사냥꾼, 점박이 표범 등
- 초원과 반구대 공간적 거리 무색케
- 양 지역 제작 시기 BC 10~6, 8~5세기로 시간적으로도 유사
- 청동기시대 울산…많은 사람 모여 살아 북쪽 유민들이 암각화의 주인공일 가능성도

1970년 12월 25일 울산시 울주·언양군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은 주민들로부터 천전리라는 마을 근처의 어느 암벽에도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지만 혹시 삼국시대 마애불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마애불은 아니었지만 한국 최초의 암각화 유적인 천전리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인 1971년 12월 25일 다시 조사팀을 꾸려서 감격의 천전리 암각화를 찾았다가 뜻밖의 정보를 입수했다. 천전리 암각화를 제보한 주민들이 근처 강가의 바위 위에도 호랑이들 그림이 있는데, 보통은 물에 잠겨있다는 것이었다.

■성탄절의 기적

 
  사람 모양. 칼박타쉬 유적 사람 그림이 무릎을 접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조사팀은 엄동설한에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가며 바위들을 조사하다 물 밖으로 빠끔히 자태를 비춘 암각화의 일부를 발견했다. 한국 선사시대 예술을 대표하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순간이다. 40여 년 전 두 번에 걸친 성탄절의 기적적인 발견으로 한국의 선사시대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암각화는 초원을 대표하는 선사시대 예술이다. 알타이초원, 중앙아시아, 내몽고 등 대부분의 초원에는 바위들에 빽빽히 사슴, 전사 등 다양한 그림을 새긴 암각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암각화는 만주와 한반도로 내려오면 거짓말같이 사라지게 된다. 반구대 이외에도 한국도 고인돌에 바윗그림이 1~2점씩 발견된 적도 있지만, 초원지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그런 점에서 울산을 대표하는 반구대 암각화는 전세계 암각화 연구자들에게는 참으로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유적이다. 초원지역과 수 천 ㎞ 떨어져 있는 바닷가 울산에서 이런 대형의 암각화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구대의 암각화는 단순히 초원지역의 암각화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고래로 유명한데, 반구대 암각화에는 생동감 있게 다양한 고래가 묘사되었다. 들짐승을 사냥하면서 고래도 잡았던 장면이 묘사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암각화인 반구대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짐승.
반구대의 고래는 이미 여러 방송매체도 다큐멘터리 등으로 여러 차례 제작했으며, 지금도 울산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반구대 암각화의 왼쪽 윗부분에 있는 조각배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가 많이 그려져 있으니 고래 잡는 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배 주변에는 고래가 아니라 육상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런 배는 알타이의 칼박타쉬나 카자흐스탄, 하카시 등에서도 보이는데 배와 사람이 1자형으로 표현되어 마치 태양의 환한 빛과 닮았다.

 

 

 

 

 

 



■알타이의 암각화와 유사성

 
  대표적 알타이 암각화인 칼박타쉬 유적.
러시아의 암각화 전문가인 V. 쿠바레프 씨는 이를 태양과 관련된 천문학적 기호이며 아주 예전에(기원전 4000~3000년)에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화가 시베리아로 들어온 것이라고 보았다. 또 그러한 그림은 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동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북쪽으로는 베링해의 추코트카까지 보인다. 이제 반구대에서 발견되었으니, 그 남쪽 경계는 울산이 된 셈이다.

또 반구대에는 '춤을 추는 사람'이라 불리는,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얼굴쪽으로 올린 사람이 표현되어 있다. 두 발을 굽히는 인물상은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의 스키타이시대(기원전 8~3세기) 암각화에서 공통적으로 새겨진다. 그뿐인가. 몸통에 점이 박힌 표범, 뿔이 달린 사슴, 화살로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등 많은 그림들은 그냥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는 공통점이 많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초원지역에서 사람들이 왔다고만 결론내릴 수는 없다. 고래나 호랑이, 곰, 족제비, 토끼 등 반구대에서만 보이는 요소도 많다. 또 바로 옆에 있는 천전리 암각화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기하학적 그림만 보인다는 점도 미스터리이다.

 

 

 

 

 

 

 

 

 

 

 



 
  표범.
반구대를 비롯하여 암각화를 연구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정확한 연대를 알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보통 암각화는 돌을 파내는 기법과 도구(예컨대 돌을 썼는지 금속도구를 썼는지 등)로 대략적인 연대를 가늠한다. 즉, 단단한 쇠로 날카롭게 파낸 것은 중세시대 이후이고 선사시대의 것은 돌로 쪼아낸 것이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암각화에 표현된 동물이나 사람이 지는 무기 등을 실제 고고학 발굴을 실시해서 출토한 유물과 비교한다. 알타이의 경우 무사의 암각화에 새겨진 동검이나 도끼를 실제로 고분에서 발굴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도 여전히 암각화의 실제 연대를 아는 게 쉽지 않은데, 주된 이유는 대부분의 암각화는 여러 시기에 걸쳐서 쪼아 판 곳에 다시 덧붙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요즘 사람의 낙서판으로도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누가 언제 새겼을까

 
  맹수.
반구대의 경우는 신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 것이라고 학자 간에 의견이 다르다. 또 실제로 암각화를 만든 기법을 보면 반구대 암각화 역시 몇 번에 걸쳐서 만들어진 흔적이 있다. 최소한 초원지역과의 관련성이 있는 그림들은 대체로 초원에서는 기원전 10~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반도로 보면 청동기시대에 해당해서 논농사를 하고 비파형동검을 만든 고인돌사회가 널리 확산되는 시기 즈음이다.

이 시기 울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청동기시대 울산은 과장 조금 보태면 6·25때 임시수도 부산처럼 복잡하게 사람들이 살았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울산 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집자리만 3000여 곳에 육박한다. 지금도 울산지역은 발굴만 했다하면 거의 빠짐없이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되는 상황이어서 남한의 다른 어느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게 그 밀도가 높다. 울산지역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소위 '울산식 주거지'의 연대는 기원전 8~5세기대로 대체로 초원지역과 관련성이 있는 암각화의 연대에 대체로 부합한다.

그렇다면 반구대의 암각화는 당시 상대적으로 살기 좋았던 울산지역으로 밀려들었던 사람들 중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 일부가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 더 상상한다면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그 지역으로 몰려오던 고래잡이도 같이 하면서 살던 게 아니었을까. 물론, 현재로서는 막연한 상상이다. 보통 암각화는 당시 주민들이 의례를 지내던 성소였기 때문에 주변에는 당시의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반구대는 물속에 잠겨 있으니 주변조사는 아직 요원하다. 향후 주변지역을 정밀 발굴조사한다면 많은 의문이 풀릴지도 모른다. 반구대의 조사도 중요하지만, 초원지역과 반구대 사이의 공간적 차이를 메꾸는 또 다른 유적의 발견도 기대해봄직하다. 실제로 사냥을 주업으로 하던 주민들이 북쪽에서 이동했다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왔을 것이다. 동해안을 따라서 또 다른 암각화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반구대가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9월 필자는 국내의 학회에 러시아 고고학자 한 분을 초청한 적이 있다. 이 분은 학회가 부산에서 있으니 꼭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울산에서 그렇게 생동감 있는 대형 암각화가 있다니 한번 꼭 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모셔가지 않았다. 자칭타칭 문화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강물 속에 잠겨서 망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여준단 말인가.

지방자치단체들은 물 부족을 이유로 물의 수위를 낮출 수 없으니 이전복원을 하자는 등 임시방편만을 제시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반구대 암각화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암각화 문화의 중요한 유산이다. 또 초원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선사시대 문화교류의 증거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1980년에 큰 길을 낸다고 독립문을 70m 옆으로 옮긴 일은 지금도 비판받고 있다. 하물며 근대 건축물도 아닌 바위 위에 새겨진 그림을 떼어서 복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발상인가. 두바이에 100층 넘는 빌딩을 짓고 바다도 메우는 토목기술을 자랑하는 21세기 한국에서 소모적인 논쟁으로 시간만 보내며 수수방관하는 동안 반구대는 물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정녕 또 다른 '성탄절의 기적'을 기대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8> 초원과 파라다이스

- 인공호수와 개울·광활한 초원 정원 쿠빌라이 칸의 여름궁전 '상도'…동방견문록 기록
- 서양문학 등장 후 천국의 대명사로
- 중국 정부 발굴조사…원제국 中역사 편입

사람은 이상향을 꿈꾼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쉬 서사시의 딜문동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 등 이상향은 힘든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중세 이후 서양 사람들은 황량한 초원 벌판에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몽골이 만든 성지를 낙원으로 묘사했다. 그들이 꿈꾸었던 초원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실제로 초원에 낙원은 있었을까?


■동방견문록 속의 낙원

 
  원나라의 여름수도였던 상도의 지금 모습. 상도는 서구에서 '제너두'라 일컬어졌으며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다.
서기 13세기에 아랍을 거쳐서 몽골제국에 가서 살았던 마르코 폴로가 구술한 '동방견문록'은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수십 번은 들었음직한 고전이다. 이 책에 수록된 수많은 신기한 기록은 지난 수백 년간 서양인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는 쿠빌라이 칸 시절 몽골제국이 다스린 여러 지역의 풍습과 지리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실제로 마르코 폴로가 본 것을 기록한 것인지 논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책은 중세 서양사람들이 동양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 중 특히 서양인의 관심을 끈 대목은 쿠빌라이 칸의 여름궁전인 상도(上都·서양에서는 '제너두'라고 더 많이 알려짐)에 대한 구절이다. 몽골제국 제3대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은 평소에는 현재의 북경인 대도(大都)에서 정사를 보고, 여름에는 상도로 옮겨 국정을 보았다. 황제 일행은 춘분에 상도로 출발해서 추분이 될 때에 머물다가 다시 대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수년간 지구 곳곳을 돌아다닌 마르코 폴로가 보기에도 상도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건설한 지상낙원이었다.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상도 주변에는 인공호수와 개울을 만들었으며 수백 마리 동물과 해동청을 풀어놓아 왕이 사냥하는 정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내성 안의 궁전은 벽에 금칠을 해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또 건물 벽은 대나무로 지어서 여름 궁전에서 떠날 때는 건물을 해체·정리했다고 한다. 왕이 살던 궁전에는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막과 부속 시설들이 있었을 것이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칸의 초상.
황량한 초원 위에 세워진 상도는 곧 서양에서 지상낙원 또는 천국의 대명사로 널리 쓰였고, 지금도 이상향의 상징으로 통한다. 상도가 서양 문학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8세기 말~19세기 초 활동한 영국의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코울리지의 시 '쿠블라(쿠빌라이) 칸-꿈 속의 모습'부터이다. 이 시는 '제너두'(상도)에 그는 위엄있는 환락의 궁전을 세웠으며'로 시작해서 '그는 천국의 우유와 꿀을 마셨다'는 구절로 끝맺는다. 이 작품은 미완성이라고 하는데, 사실 코울리지가 아편에 취해서 본 여러 가지 환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또 코울리지가 환상 속에서 본 상도의 모습은 18~19세기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청나라의 정원 모습에 가까우며 실제 사냥터로 만들어놓은 원나라 상도와는 거리가 있다. 어쨌든 '제너두'는 1980년대의 디스코음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일 정도로 서양문화에서 환상적인 낙원의 상징이 되었다.

 

 

 

 

 


■중화주의, 초원의 낙원 발굴에 나서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뮤지컬 '제너두'의 포스터.
실제로 상도는 북경에서 북쪽으로 270㎞ 지점인 내몽골 자치구 시린골 맹(몽골어로 시린골 아이막) 쩡란치(正藍期·몽골어로 훌룬 호트)에 있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기 직전인 1256년에 건설되어 원나라 말기인 1358년 홍건군(紅巾軍)에 의해 불타기까지 100여 년간 몽골제국 칸의 여름궁전으로 쓰였다. 이 성은 크게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는데 외성은 둘레가 2.2㎞이며 실제 왕이 거주한 내성은 둘레가 1.4㎞에 달한다. 성이 완성된 후 쿠빌라이 칸은 성 바깥으로는 넓은 정원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꽃과 동물들을 풀어놓았다고 한다.

홍건군에 의해 불태워진 이래 상도는 폐허가 되었고 화려한 궁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대로 가을이 되면 천막을 걷었기 때문에 실제로 남아있는 것은 얼마 없었을 것이다. 또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기 어려운 초원지역이었으니 몽골제국의 멸망과 함께 급격히 퇴락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상도는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발굴조사와 관광자원화 정책에 따라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중국은 최근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에 따라 칭기즈칸이 세운 광대한 원제국을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상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상도를 발굴하고 있다. 특히 작년에는 상도의 주요 건물인,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정사를 보았던 '목청각'이 발굴되었다. 이 건물의 전체 면적은 600㎡에 달하지만, 이미 홍건군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린지라 겨우 건물의 주초석만 발견되었다.

한편 호수로 이어지는 배수시설도 확인되어 주변에 초목이 우거지고 동물들이 뛰어놀던 그야말로 사막 위의 낙원이었다는 기록이 실제였음이 밝혀졌다. 실제 기록에도 상도에는 약 10만 명이 살았고 사통팔달의 역참이 정비되어 있다고 하는데, 주변지역을 조사한 결과 모두 8개의 길이 뻗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국이 발해 유적을 정비해서 유네스코에 단독으로 등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몽골제국의 유적도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것은 탐탁치 않다. 하지만 발굴이 지속되면 상도의 진면목이 밝혀질 것이다.


■서양인 뇌리에 '동양의 환상' 주입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또다른 천국 알라무트 요새. '산위의 노인'이 암살단을 운영했던 장소로 기록돼 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상도에 가기 위해선 수십 일 사막을 통과해야 했을 것이다. 고생 끝에 초원 속에서 호수와 정원이 있는 거대한 궁전을 보았다면 낙원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원 속의 낙원은 유목민족의 문화는 아니다. 끊임없이 이동했던 유목민들에게 이러한 낙원은 필요없었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보다 약간 빠른 시기인 1240~1250년대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갔던 카르피니나 루브룩의 기행문에 몽골의 수도는 거친 유목민의 모습으로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상도가 그렇게 화려했던 이유는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면서 몽골제국이 초원의 국가에서 세계적인 제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적인 제국에 걸맞게 정착문명의 다양한 요소를 결합해 세계 제국으로 나아가는 몽골의 상징적인 기념물이었다. 상도에 대한 서구에서의 환상은 19세기 이후 막 알려지기 시작한 동양의 이미지가 투영된 결과였다. 또 동양 어딘가에 낙원이 있다는 믿음은 결국 르네상스 이후 동양 여러 지역을 경쟁적으로 식민지화한 원동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콜롬버스를 비롯한 대부분 서양탐험가들은 황금이 지천에 널린 낙원을 찾아 전 세계를 누볐고, 그 와중에 원주민들은 끝없이 희생되었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낙원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그들이 낙원이라고 믿었던 곳에는 폐허뿐인 유적과 소멸되어 가는 소수민족만이 남아 있다.
마르코 폴로의 책에는 또 다른 지상천국이 나온다. '산위의 노인'(실제로는 시아파에 속하는 '알라 웃 딘 무함마드')은 산 위에 아리따운 아가씨와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갖춰놓고 중세판 '주지육림'을 만들었다. 이 노인은 테러리스트가 될 만한 청년을 납치해서 며칠간 자기가 만든 낙원에서 열락을 누리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세상으로 돌려다 놓으면서 신의 명령(테러)을 수행하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쳤다. 가짜 천국을 믿은 암살단원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산위의 노인은 이 청년들이 천국에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하기 위해 대마계통의 마약을 썼다고 한다. 현대 영어에서 암살자를 뜻하는 '어쌔신(Assasin)'과 대마초 계통의 마약인 '하쉬쉬'가 바로 이 암살단에서 기인한 말이다.

산위의 노인이 마약을 먹여서 가짜 천국을 만들었으며, 코울리지도 아편에 의지해 쿠빌라의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초원국가가 세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거칠고 황량한 초원에 살면서 갖추게 된 강인함 덕일 뿐, 초원이 살기 좋은 낙원은 결코 아니었다. 막연한 환상과 기대로 초원을 치장하는 것은 초원민족을 야만의 이방인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노마디즘과 초원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기대는 곤란하다.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낙원'을 꿈꾸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9>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알타이에서 왔는가?

 
  파지릭문화의 쉬베고분. 적석목곽분이다.
인간의 삶에서 무덤은 참 특별하다. 태어남이 소중한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소중한 사람을 다른 세계로 보내는 것인지라 유난히 금기(taboo)도 많고 관습도 까다롭다. 그래서 무덤은 고고학에서 고대 주민의 풍습과 이동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다.

신라를 대표하는 경주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일제시대 발굴된 이래 거의 100여 년 가깝게 우리나라 고고학과 고대사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왜냐하면 적석목곽분은 서기 4세기께 갑자기 등장해서 200여 년간 존속하다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며,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고구려 백제 가야의 고분과는 달리, 적석목곽분은 경주 일대에서만 발견된다. 당시 신라의 영역은 현재의 경상북도 및 경남 일대였지만 이 무덤은 경주 사람들만 썼던 셈이다. 적석목곽분을 처음 발굴한 일본학자들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에서 돌무지를 따오고 평양의 낙랑 지역 중국계 무덤이 결합된 것이라고 보았다. 모든 우리나라 고대문화를 중국에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고분군이 조사되면서 신라고분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설이 등장했다. 알타이의 파지릭고분은 신라의 적석목곽분을 빼다 박은 듯 비슷하기 때문이다. 무덤 주변에 돌돌림(호석·護石)을 돌리고 무덤 위에 두텁게 돌을 쌓았으며,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방을 만든 파지릭고분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신라의 고분과 흡사하다. 물론 자세히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유라시아를 통틀어도 이렇게 비슷한 고분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두 지역 다 황금을 좋아했으며 신라인들도 초원계 유물을 아주 선호했다. 과연 서기 4세기 경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적석목곽분, 그리고 알타이

 
  파지릭고분에서 출토된 양탄자에 그려진 그림.
신라의 무덤은 땅을 파고 지하에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과 각종 부장품을 넣는다. 그 위에는 돌을 쌓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흙으로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다. 알타이 파지릭문화에서는 땅을 파고 그 안에 무덤방을 만든다. 그 위에 돌을 쌓는 것도 같지만, 더 이상 흙을 덮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 눈에 보아도 두 지역의 무덤은 많이 유사하다.

그렇지만 알타이 파지릭문화는 기원전 7~2세기대까지이며,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서기 4세기이다. 적어도 500년의 공백, 그리고 수 천 킬로미터의 지리적 거리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두 지역의 유사성이 바로 논쟁의 중심이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신라의 적석목곽분이 북방에서 왔다는 주장과 자생적으로 기원했다는 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북방기원설의 문제는 알타이지역과 신라 사이의 엄청난 시간적, 공간적인 공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자생설도 갑자기 등장한 적석목곽분을 설명할 수 없다. 지금까지 수 천기의 무덤들이 경주와 주변지역에서 발굴되었지만, 적석목곽분의 자생적인 기원을 밝혀줄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적석목곽분 안에는 수많은 초원과 중앙아시아 계통의 유물들이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신라 적석목곽분의 기원을 두 가지 요소를 모두 놓고 생각해보자. 먼저 초원지역을 보면, 유라시아 초원에는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1세기때까지 세계사의 중심에 섰던 초원유목국가 흉노가 있다. 알타이의 적석목곽분을 만들었던 파지릭문화도 흉노에 의해서 망했다. 흉노라는 제국은 거대한 문화의 용광로로 유라시아 전 지역에 초원계 문화를 퍼뜨렸으며, 또 정착농경민의 문화요소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흉노의 지배계층은 현재 몽골공화국에서 파지릭문화와 중국 한나라의 무덤을 모방한 대형고분을 건설했다. 노인울라 유적이 그 좋은 예다.

■고총고분의 시대

 
  파지릭고분에서 나온 중국제 거울. 파지릭문화가 중국 등 동쪽 문명권과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흉노의 풍습은 주변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예로 남부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근처의 타쉬트익문화(기원전 1세기~서기 5세기)의 고분이 있다. 타쉬트익문화의 무덤은 무덤방을 나무로 만들고 거대한 봉분을 세운 것이다. 신라의 무덤은 지하로 땅을 파고 무덤을 만들었지만, 타쉬트익문화는 옆으로 무덤길을 낸 '횡혈식'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외에도 흉노의 영향을 받아 황금과 대형 고분을 만드는 풍습은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흉노가 서기 1세기말 중국에 의해 망하면서 그 일파들은 동으로 서로 흩어지면서 주변지역으로 확산됐다. 서기 4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야기한 훈족의 대이동이 그 좋은 예다. 전 유라시아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라의 적석목곽분도 이러한 초원문화의 광범위한 파급과 맞물려 해석할 수 있다. 즉, 파지릭문화의 적석목곽분이 흉노에 유입되었고, 흉노에 의해 재창조된 거대한 고분을 만드는 풍습이 주변지역으로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흉노와 경주 고분 사이의 중국 북부가 미싱 링크(missing link·잃어버린 고리)로 남아 있다. 아직 3~4세기대 북부 중국 및 몽골지역에서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된 바가 없다. 향후 자료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파지릭고분에서 나온 유물로 무덤을 복원한 모형.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인은 왜 초원의 풍습을 도입했을까. 신라와 달리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초원계 유물이 거의 없다. 유독 신라인들이 초원계의 황금유물과 무덤을 좋아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는 북방에서 대량의 기마민족이 내려와 신라의 지배자를 교체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대량의 이주민이 내려온 증거는 전혀 없다. 현재로서는 대량의 주민 교체보다는 신라인의 자체적 역량에서 그 원인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서기 3세기부터 동아시아 각국은 고대국가를 형성하며 경쟁적으로 거대한 고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경주의 신라인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거대한 고분은 일명 '고총고분(古塚古墳)'이라고도 한다. 지배계층은 거대한 고분 축성을 통해 지배력을 확고히 다지고 기층민들은 이런 국가사업에 동원됨으로써 강한 소속감을 가지게 된다. 고대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주변의 고구려 백제 그리고 가야와는 달리 독자적인 고유의 고분을 만들고자 했던 신라인은 당시 강력한 유목국가의 무덤을 도입해 그들만의 고분문화를 재창조한 것은 아닐까. 서기 4~5세기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간주했고, 실제로 고구려 군인이 신라를 도와주었다. 표면적으로는 속국이어도 신라는 자신들만의 고분문화를 강조하기 위해서 고구려가 아닌 초원지역의 고분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아닐까.

■지나친 기원 찾기는 이제 그만

지난 100여 년간 신라 고분의 기원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광활한 초원의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비슷한 유적이나 유물이 있으면 기원지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초원의 적석목곽분은 비단 알타이뿐 아니라 주변의 중국 신장성, 카자흐스탄 등에서도 발견되며 그 시기도 다양하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형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당장은 돌아가는 듯 해도 차근차근히 광활한 초원지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선결되어야 한다.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자. 서기 3~5세기 유라시아 초원은 '대민족의 이동시대'였다.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있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선비와 같은 흉노의 후예가 남쪽으로 내려와 국가를 이루던 시기였다. 신라 적석목곽분과 황금문화를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 초원계 유물이 나왔다고 해서 신라인의 자체적인 역량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무덤과 황금유물을 제외하면 나머지 유물은 신라인의 토착적인 문화가 유지되고 있으며, 대량의 주민들이 신라를 정복한 흔적도 전혀 없다. 즉, 신라인은 북방 초원계 문화를 주체적으로 적극 도입한 것이다. 신라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데에 있을 것이다.

최근 초원지역을 연구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들이 신라의 고분에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라 고분은 초원 문화가 퍼져나간 동쪽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신라와 초원지역의 관계를 푸는 것은 곧 세계사에서 고대 초원과 농경민족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초원의 자료를 억지로 신라 고분에 끌어들이기보다는 신라의 고분을 넓은 유라시아적 관점에서 보려는 거시적 노력이 필요하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0> 만리장성, 초원과 중국을 가르다

- 장성 관광 단골코스 북경 위쪽 '바다링', '위황무 문화' 유적…중국 변경 괴롭혔던 유목민족 흔적 증명
- 만리장성은 한족이 초원민족과 자신들의 경계 구분, 영토 분리의 표시
- 일체다원·동북공정…팽창주의 중화 사관 모순의 역사적 실체

 
  지금의 만리장성. 바다링(팔달령)에서 본 모습이다. 중국의 일체다원 역사인식과 한족 중심 역사관의 허구성의 산 증거다.
베이징(북경)을 여행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코스는 만리장성이다. 특히 북경 위쪽의 바다링(팔달령·八達嶺) 장성은 교통도 좋고 개발이 잘 돼 있어 장성을 관광하는 단골코스다. 바다링에서 구절양장 굽은 길을 따라 장성을 관통하여 연경현으로 들어서면 베이징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앞에는 쥔두샨(軍都山) 산맥이 병풍처럼 거대하게 늘어서 있고, 갑자기 기후도 조금 서늘해지며 산 사이사이에 너른 언덕들이 나타난다. 이 지역은 전체 면적 112㎢의 인공호수인 룽칭샤(용경협·龍慶峽)로 유명하다.

룽칭샤 일대가 개발되면서 약 2500여 년 전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적이 다수 발견됐다. 이들은 고고학적으로는 '위황무(玉皇廟)문화', 역사적으로는 산융(山戎) 또는 동호(東胡)라고 불리던 유목민족이었다(필자는 동호라고 생각하지만, 중국학계에서는 산융이라고 하는 학자가 많은 것 같다). 춘추전국시대에 만리장성 북쪽에서 중국의 변경을 괴롭혔던 유목민족들이 살았음이 고고학과 역사로 증명된 것이다.

룽칭샤 주변의 유목민족 유적 중에는 '위황무' 무덤군이 대표적이다. 이 무덤군은 쥔두샨 산기슭의 너른 대지 위에 만들어진 수백 개 유목민 무덤들로 이뤄졌다. 한 곳에서 대량의 무덤이 수백 년간 만들어졌으니, 이 지역에 유목민들이 꾸준히 살아왔음이 증명됐다. 위황무문화의 주민들은 땅속 2m 깊이에 목관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묻었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허리에 단검을 차고, 여성들은 다양한 장신구를 착용했다. 특히 무덤, 마구, 동물장식은 기원전 7~3세기 유라시아 초원에 퍼져 있던 유목문화를 대표하는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의 것이다.

■초원민족은 장성을 무서워했을까

 
  중국 역사지도책에 그려진 만리장성. 동쪽 끝이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이들을 그리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라 '스키타이문화'라고도 한다. '스키타이문화'라고 하면 마치 흑해연안의 스키타이족이 기원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는 기원지가 시베리아라고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키토-시베리아'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처음 쌓은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 이전에 춘추시대부터 연, 제, 진 등 초원지역과 접경한 중국의 제후국들은 수백 년에 걸쳐서 토성을 쌓았다. 즉, 중국이 막고자 했던 세력은 바로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이라고 불리던 유목민족들이었다. 바다링 장성 북쪽의 위황무문화는 유라시아 전역을 제패했던 유목문화의 동쪽 종착역이었던 셈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은 실제로 명나라 때 만든 것이며, 그 이전에는 흙으로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초원의 유목민족이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연 이 장성들이 초원의 유목민들을 방어할 수 있었을까? 선진시대 대표적 문헌인 '시경'(詩經)에는 중국의 제후국이 장성을 쌓고 그를 찬양하는 시가 종종 보인다. 아니면 남편을 장성으로 보냈다는 맹강녀의 설화처럼 중국 백성들의 원망과 한이 어린 노역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장성 덕택에 유목민들이 넘어오지 못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유목민들은 정착민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살아왔다. 또 유목민은 상황 대처능력이 뛰어났다. 장성이 있다 해도 변방의 장수를 매수해 성문을 열든지, 벽의 한쪽만 무너뜨려도 쉽게 장성은 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만리장성 건축은 지극히 농경민족다운 발상이었다. 농경민은 농사를 짓고 항구적으로 살 터전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땅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래서 장성을 쌓아서라도 자신의 영토를 항구적으로 가지고 싶어했다. 반면 목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 장성은 큰 의미가 없었다. 세계사를 보아도 중국을 제외하고, 로마를 비롯하여 유목민족과 접경한 나라들이 장성을 쌓은 적은 없었다. 즉 만리장성은 정작 유목민들보다는 중국 내부 사람들에게만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관심을 돌리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심시키는 일종의 내부결속용이었다.

■'중국 상징 만리장성'의 역설

 
  갈석궁 유적.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한반도 근처가 아닌 요령성 수중현 갈석산임을 보여준다.
초원의 유목민을 경계하는 만리장성은 20세기 들어서 중국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만리장성이 중국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직접 보고 왔을 때부터였다. 이후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유일하게 보이는 건축물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만리장성은 춘추시대 이래 중원 중심의 한족이 주변의 초원민족과 자신들을 경계 짓기 위해서 세운 것이었다. 장성을 쌓아서라도 유목민족과는 분리된 자신들만의 영토를 구분해 자신들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중국은 2000년 넘게 장성 쌓기를 반복했지만, 중국은 이민족에게 점령되기가 다반사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만리장성은 중국이 얼마나 북방의 초원민족을 무서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또 만리장성은 중국에서 주장하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 중국의 역사인식은 '일체다원'으로 요약된다. 즉, 시작은 다양하지만 한족 중심의 역사에 포괄되며 다양한 역사적 요소들은 고대부터 중국사의 일부분이라 본다. 아무리 중국이 한족 중심·자국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있으니, 바로 만리장성이다. 현재 중국 역사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초원민족은 중국에 동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현재 중국의 주체인 한족이 2000여 년간 지속적으로 만들기를 반복하며 현재 중국을 이분시킨 증거다. 현재 중국의 논리 대로라면 같은 민족 사이에 그 거대한 만리장성을 세운 꼴이니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일인가.

현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 경계지역인 요령성 수중현(綏中縣)의 갈석산(碣石山)이며, 진시황이 세운 장성도 같은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최근 팽창주의적 중화 사관 덕택(?)에 만리장성도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동북공정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장성들을 만리장성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사실 1970년대부터 중국 지도에는 만리장성이 한국 평양근처까지 그려진 경우도 있었다. 이는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니, 그에 맞선 진나라와의 경계도 그 근처일 것이라는 문헌 해석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반도에서 진나라 유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의 진정한 의미는
역설적이게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기존의 정설인 갈석산이 맞다는 증거가 최근 중국의 고고학적 연구로 확인됐다. 갈석산 근처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진시황의 행궁지가 발견된 것이다. 진시황은 자신이 정복한 땅을 순시하는 것을 좋아했고, 순시하던 마차 안에서 생을 마쳤다. 당시 진시황은 진나라의 동쪽 끝인 갈석산도 가려 했을 것이며, 그에 대비해 거대한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실제 발굴에서도 진나라 때의 전형적 대형 건물터와 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이 유적의 보고서 발간이 임박했다고 하는데,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최근 중국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신장되고 있으며, 세계를 주도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역사인식은 한족 중심의 쇼비니즘(국수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하다. 현재 중국 분위기는 확장된 중국 영토와 국력에 따라 또 다른 만리장성을 만드는 꼴이다. 중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미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다른 강대국들의 역사인식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사실 다민족국가인 중국이 자신의 영토 내부를 자국 역사의 범주로 기록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미국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서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다른 다민족국가들은 '영토중심의 역사', 즉 국경 내 역사를 균형있게 서술하는 반면 중국은 '영토중심'이 아니라 '한족중심의 역사'로 본다는 점이다.

한족 중심 역사에서 만리장성의 진정한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만리장성의 진정한 의미는 초원과 농경민족이 만나는 접점이라는 데 있다. 고대 이래로 장성의 관문 근처에는 관시(關市) 또는 호시(互市)라는 장을 열어서 서로 부족한 물건을 바꿨으며, 다양한 문화가 교류되는 중심이 형성됐다. 장성은 다양한 농경·초원문화의 교류가 동아시아 역사의 원동력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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