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한 해의 마지막이다. 누구나 안다. 아쉬운 마지막의 뒷면이 새로운 시작임을. 그런데도 들뜨지 않는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 먹을수록 ‘마지막이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보다, ‘시작은 언제나 끝이 있다’는 이야기가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세밑에 떠나는 여행의 주제를 종교로 잡은 것도, 여행 목적지를 가을걷이 끝난 전북 김제 땅으로 잡은 것도, 나이 들어서 또 한 해를 보내는 이들을 위한 은유이자 위로다. 이렇게 한 해가 간다. 한 해의 지친 걸음 뒤로 긴 그림자가 여기까지 따라왔다. # 거대한 미륵의 발치 아래 서다
미륵이 도래하기까지 주어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은 묵언과 고요 그리고 수행을 벽돌처럼 쌓으라는 의미였을 테지만, 혼돈의 시대에 질곡과 비탄의 시대를 건너가는 민초에게 이토록 오랜 기다림은 곧 절망이지 않았을까. 미륵이 오기로 정해져 있으되 당대에는 절대로 오지 않음을 약속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난세 때마다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났던 건,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백성들이 따랐던 건 미륵이 약속을 어기고 더 이르게 오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으리라. 미륵전에는 11m 높이의 미륵불이 있다.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은 두 번 불탔고, 세 번 지어졌다. 첫 번째는 진표율사가 776년 신라 혜공왕 때 미륵전을 지으며 세웠던 미륵불이었다. 이 불상은 정유재란 때 불탔고 조선 인조 때 두 번째 미륵불이 세워졌다. 다시 세워진 미륵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3월 신도들이 불전에 던진 동전을 주우러 들어간 동자승의 부주의로 불이 나서 다 타버리고 말았다. 희한한 건 당시 가운데 서 있던 미륵불은 전소돼 앞으로 쓰러졌는데도 좌우에 서 있던 보살상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세워진 것이 지금 서 있는 미륵불이다. # 미륵, 반역과 변혁을 꿈꾸는가
금산사의 미륵불 입찰심사는 종교적인 미감뿐만 아니라, 사찰 내 전통세력과 근대 또는 외부세력과의 위세를 겨루는 심판장이었다. 이 대결에서 이른바 ‘신식’ 조각가가 이김으로써 불교계에는 신진세력의 대두를, 미술계에는 사실적 미감의 승리를 알렸다. 그건 어쩌면 미륵의 숙명이 이룬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미륵은 늘 백성의 곤궁한 삶과 미래의 불안이라는 현실 속에서 반역과 변혁이란 꿈의 상징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륵전에 들어서면 거대한 미륵불의 압도적인 기운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만다. 미륵전 문을 열고 들어서면 미륵의 무릎 아래밖에 안 보인다. 제단 앞으로 다가서서 고개를 천장으로 꺾어야 비로소 어마어마한 크기의 미륵을 볼 수 있다. 불상의 높이가 11m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체감하기로는 그 두 배의 크기쯤 된다. 당당한 자세와 부드러운 선, 몸체에서 느껴지는 율동감…. 불상의 모든 요소가 지향하는 건 종교적 경외감이다. 금산사의 미륵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그 앞에서 기원으로 손을 모으더라도, 더 겸허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래서다. # 금산사의 여백과 귀신사의 적막
금산사 마당에 서면 절집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모악산 정상이 올려다보인다. 해발 800m에도 못 미치는 산이지만 모악산은 제 발치 아래에 다양한 종교를 품고 있다. 금산사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불교 얘기부터. 모악산 서쪽에 금산사가 있다면, 북서쪽 자락 전주로 넘어가는 길에 귀신사(歸信寺)가 있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름의 뜻은 ‘귀신(鬼神)’이 아니라 ‘믿음(信)으로 돌아온다(歸)’라는 뜻이란다. 귀신사는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에도 등장하는데, 작가는 소설 속에서 귀신사를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돌아오는 자리’로 해독했다. 금산사의 말사인 귀신사는 자그마하고 소박한 절집이다. 일주문도, 금강문도 없이 그저 대웅전 법당에다 종무소 겸 요사채와 명부전 정도가 들여놓았다. 귀신사의 가장 아름다운 경관은, 단언컨대 절집 뒤쪽의 삼층석탑으로 오르는 언덕에 있다. 유연하게 굽은 계단을 오르면 느티나무 몇 그루가 활개를 치고 있는 언덕이 나오는데, 그곳에 고려 때 세운 삼층석탑과 돌로 깎아 만든 사자상이 있다. 고즈넉해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혼자만의 기도를 하기에 딱 적당한 곳이다. 귀신사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홀어미 다리’다. 귀신사를 가려면 자그마한 다리로 물길을 건너는데 이 물길의 하류 길 끝의 청도원 마을에 ‘홀어미 다리’가 있다. 다리에 얽힌 이야기인즉 이렇다. 남편과 시부모를 잃고 혼자 몸으로 남매를 키워 출가시킨 청상과부가 있었다. 과부는 개울 건너 사내와 정분이 나 밤마다 만나 서로 정을 나누기 이르렀다. 개울 건너에 살던 남자를 만나러 홀어미는 매번 옷을 적시며 물을 건너야 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어머니가 물을 편하게 건너도록 몰래 돌다리를 놔줬다는 얘기다. 귀신사 가는 길의 ‘홀어미 다리’는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수년 전에 홍수로 끊기고 말았다. 돌다리는 한쪽이 물살이 밀려 물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눕고 말았다. 흩어진 돌다리가 필요한 사람도, 다시 놓아줄 사람도 없다.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끊긴 다리는 이제 잊힐 일만 남았다. # 마부를 섬긴 지주 이야기…금산교회 금산사 아래 용화마을에 오래된 교회가 있다. 모악산 너머의 전주 이씨 집안 재실을 해체해 1908년에 지은 금산교회다. 교회는 ㄱ자형의 한옥이다. ㄱ자형의 건축은, 한쪽 획은 남자 석, 다른 한쪽 획은 여자 석으로 구분하고 중앙에는 휘장을 쳐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설계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적 관습이 낳은 교회 건축이다. 100년도 더 된 교회지만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 상하지 않고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한데, 그중에서도 고린도전서를 옮겨 쓴 천장의 상량문의 글씨는 마치 어제 쓴 것인 양 선명하다. 금산교회에는 김제 땅의 거부였던 지주 조덕삼과 그가 거느린 머슴이자 마부 이자익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국인 선교사의 전도로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지주와 머슴은 신실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나란히 장로에 입후보했다. 그런데 사재를 털어 금산교회를 지은 거부 조덕삼은 떨어지고, 한낱 마부인 데다 그것도 열다섯 살이나 어린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됐다. 머슴이 장로가 된 것을, 지주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조카뻘인 마부에게 설교를 듣거나 마부를 도와 교회의 허드렛일을 할 수 있었을까. 조덕삼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훗날 이자익을 평양으로 유학 보내 목사교육을 받도록 했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금산교회로 초빙해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다. 교회는 지금도 반들반들 잘 관리되고 있다. 평화로움으로 가득한 소박한 교회 안에서, 교회 마당의 목조 종탑 앞에서,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신앙 앞에서 겸허했던 지주와 머슴의 동화와 같은 일화를 생각한다. 목사가 된 머슴보다, 그 목사를 섬긴 지주의 신앙을 생각한다. 금산교회에서 머지않은 금산면 화율리에는 가톨릭 천주교회 수류성당이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완주의 배재본당이 박해를 피해 모악산 반대쪽 깊은 산중으로 옮겨오면서 세워진 이 성당은, 작은 시골 성당이지만 이래 봬도 그동안 20명이 넘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다. 이전의 성당은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불탔고, 지금의 파스텔톤 단아한 성당건물은 1959년 신도들이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로 벽돌을 찍어내 다시 지은 것이다. 작은 시골 마을에 꼭꼭 숨어 있던 수류성당은, 지난 2003년 신부님과 스님이 지도하는 시골 마을 어린이축구팀 이야기를 그린 가족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촬영지가 되면서 외부로 알려졌다. 주변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조경공사가 한창인데, 이렇게 다듬지 않아도 수류성당은,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곳이다.
# 세상을 구원할 신명과 도술
당시는 사회개혁을 기치로 내건 동학의 실패에 좌절했던 이들 사이에 한창 신종교 운동이 불붙고 있었던 때였다. 그 중심에는 강일순이 기치를 든 증산교가 있었다. 동학의 꿈이 처절한 실패로 막을 내리자 변혁을 꿈꾸던 이들은 ‘개혁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신명(神明)에 의한 도술(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믿게 됐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신명을 받아야 하고, 유불선의 교리나 풍수, 음양, 의술 등을 연구하며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동학이 진압되고 좌절한 백성들 사이에서 민족종교가 생겨나게 된 배경이 여기 있다. 동곡약방은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이 신도의 집에다 차린 약국이다. 증산교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모든 질병을 다 낫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주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의술에 도통했다던 강증산은, 자신의 운명은 알지 못했던지 약방을 연 이듬해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가 세상을 뜨고 증산교는 가지를 치며 수십 개의 종파로 분리됐다. 한때 100개가 넘는 증산교 교파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증산교 교파 중 적잖은 숫자가 아직 모악산 아래 동곡약방 인근에 있다. 모악교, 순천도, 태을도,…. ‘증산교 본부’란 안내판이 있어 찾아가 보니 증산교의 본부가 아니라 교단 명칭 자체가 ‘증산교본부’란다. 종교에 몸을 담는다면야 다른 문제겠지만, 그저 둘러보는 정도야 저어할 일은 아니다. 사실 이들 종교가 내세우는 계율은 간명하고, 한편으로는 순박하다. 증산교 본부의 계율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마음 속이지 마라, 척짓지 마라,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남 잘되게 하라, 한술 밥의 은혜라도 반드시 갚으라. 믿음과는 전혀 관계없이, 지키고 산다면 모두 다 공덕으로 쌓일 덕목들이다. ■ 믿음·기원, 그리고 미륵의 꿈 김제 금산사 미륵불은 모악산 아래로 후천개벽을 꿈꾸는 이들을 불러모았다. 좌절하고 상처받은 그들이 데리고 온 고통과 질곡, 믿음과 기원도 그곳에 모였다. 절집의 종소리와 교회의 마루, 성전의 대들보에 그런 이야기들이 새겨져 있다. ■ 이곳도 잠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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