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의 참선’ 뜻 품은 선운산의 선운사 서정주·김용택이 노래한 ‘늦은 동백꽃’ 으로 물들어 도솔천 건너 차밭 싱그러움 가득… 산책하기 좋아 마을과 뚝 떨어져 있어 ‘거리두기’ 에 딱 만돌마을 앞엔 끝없는 갯벌… 나홀로 해안 통째 차지 해질녘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깔은 ‘예술’ 도솔암 지나 천마봉 오르면 분지같은 지형 한눈에 날아오를듯한 기이한 암봉이 바로 ‘참선 ’의 자리 아닐까 전북 고창의 선운산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갑니다. 선운산으로 드는 들머리에 절정의 벚꽃이 분분히 날리지만, 벚꽃이 더 나은 곳들은 얼마든지 꼽을 수 있고, 지금은 꽃구경을 마음 편히 말할 수 없는 때니 그건 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합니다. 선운산은 초가을 붉은 꽃무릇이 가득 필 때부터 늦가을 단풍 시즌까지가 절정입니다. 가을에 선운산 일대는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선운사의 동백꽃이 좋긴 하지만, 봄날의 정취가 더 좋은 곳이 하도 많아서 선운산의 봄은 늘 뒷전입니다. 벚꽃이 지고, 동백까지 꽃을 떨구기 시작하면 산은 텅 비다시피 합니다. 게다가 선운산은 도시나 마을과는 뚝 떨어져 있어 ‘사회적 거리’를 더 널찍하게 둘 수 있습니다. 어디 선운산뿐인가요. 고창에서는 바다가 훨씬 더 한갓집니다. 고창의 해변이나 포구의 지명은 낯섭니다. 이름난 해수욕장을 하나도 떠올릴 수 없다는 건, 그만큼 그곳의 발길이 뜸하다는 증거겠지요. 그러니 지금 그곳으로 간다면 갯벌이 펼쳐지는 해안을 통째로 제 것인 양 차지하고서 선명한 노을의 바다도 볼 수 있습니다. 띄엄띄엄한 풍경에다 나를 놓아둘 수 있는, 그곳으로 갑니다. # 구름 속으로 들어가 참선하다 선운산에 선운사가 있다. 선운(禪雲)은 ‘구름 속의 참선’이란 뜻이다. 산이 먼저일까, 절이 먼저일까. 답은 절이 먼저다. 절이 들어서기 전 본래 산 이름은 도솔산(兜率山)이었다가 백제 때 선운사가 지어지고 나서 절 이름을 따 선운산이 됐다. 산의 옛 이름인 도솔은 불교에서 미륵이 산다는 하늘나라를 이르는 말인 도솔천(兜率天)에서 왔다. 도솔의 이름은 선운사 산문의 현판과 선운사 앞을 흘러내리는 물길, 그리고 선운산 깊은 곳의 암자에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평일이어서 그랬을까. 벚꽃은 피었지만, 사람이 거의 없다. 생태공원에서 산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느긋하게 걷는다. 이 길에는 천막과 파라솔로 얼기설기 만든 노점이 늘어서 있다. 서로 좀 다른 것들을 팔았으면 좋겠는데, 다들 군밤이며 말린 고구마, 번데기, 복분자술 등 똑같은 것들을 가져다가 옹색하게 늘어놓고 판다. 그러니 군것질거리 하나 사는 데도 옆 노점의 눈치가 적잖이 보인다. 인적도 드물고, 감염병이 무서워서 그런 걸까. 노점은 절반 정도만 문을 열었지만, 그나마도 손님이 없다. 작고 초라한 노점에도 상호가 있다. 그중 눈에 띈 상호가 ‘석상 사는 윤철이 엄마’였는데 ‘윤철이 엄마’는 오늘, 일을 나오지 않았다.
# 늦게 피는 꽃을 귀히 여기다 선운사는 서사나 산문이 아니라 한 편의 ‘시(詩)’다. 선운사가 품고 있는 서정적 운율의 8할 이상은 유독 늦게 피어나는 동백꽃이 빚어낸다. 선운사의 서정은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로 시작하는 미당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에도 있고, 실연당한 뒤에 이곳의 동백꽃 아래서 펑펑 운 사연을 담은 김용택 시인의 시 ‘선운산 동백꽃’에도 있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선운사 동백꽃을 노래한 가수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도 있다. 선운사의 동백꽃은 늦다. 남녘의 동백은 12월에 피는데, 선운사 동백은 매화가 피고 난 후 벚꽃이 필 때쯤 핀다. 늘 사람들의 관심은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꽃은 한 계절이 가고 다음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척후병이다. 그러니 계절의 기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꽃이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계절이 다 무르익은 뒤 늦게 피는 꽃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선운사의 동백꽃은 다르다. 선운사 동백은 이른 꽃이 아니라 ‘늦은 꽃’이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다. 늦게 당도함을 귀히 여기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 한 편의 시…선운사 해마다 선운사 동백은 4월 중순쯤이나 돼야 만개한다. 동백꽃은 못 보고 막걸리 집에서 육자배기 가락만 듣고 왔다는 미당 서정주처럼,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갔다가 헛걸음하는 이들이 적잖다. 그런데 올해는 다른 봄꽃들이 이른 것처럼, 선운사 동백의 개화도 이르다. 지난달 중순을 넘기면서 하나둘 꽃을 피우더니 지금 대웅보전 뒤편의 동백숲은 온통 붉은 동백꽃으로 그득하다. 수백 년 묵은 굵은 동백나무로 그득한 어두운 숲에는 모가지째 떨어진 동백들로 낭자하다. 동백꽃이 흐드러졌는데도 선운사의 동백숲은 늘 아쉽다. 숲 안쪽으로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어서 그렇다. 그저 눈으로만 봐야 한다. 붉은 꽃 후드득 질 때 짧게나마 숲속을 좀 걸어보고 싶은데 말이다. 선운사 산문에 못 미처 생태공원에는 선운산가 비(禪雲山歌 碑), 그러니까 ‘선운산 노래비’가 있다. 공원에는 시인 서정주가 고향인 고창을 노래한 시 중에서 가장 절창이라고 평가되는 시 ‘선운사 동구’를 시인의 육필로 새긴 시비가 있지만, 워낙 알려진 시라 뭐 별로 새삼스러울 게 없다. 대신 오랜 내력과 기구한 사연, 그리고 무엇보다 덜 알려져 있다는 것 때문에 선운산가 비석에 눈길이 간다. ‘선운산가’는 백제가요인데 고려사 악지에 제목과 유래만 전해질 뿐, 실제 노래와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선운산에 올라 부역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고 섰던 아내의 애절한 마음을 담았다는 기록만 있다. 훗날 그걸 미당 서정주가 시로 썼고, 비석에다 그 시를 적었다. 전하지 않는 1500년 전 백제의 노래를 미당의 글로 읽는다. 나라 위한 싸움에 나간 지아비/돌아올 때 지내도 돌아오지 안으매/그님 그린 지어미 이 산에 올라/그 가슴 서린 시름 동백꽃같이 피어/노래하여 구름에 맞닿고 있었나니/그대 누구신지 너무나 은근하여/성도 이름도 알려지진 안 했지만/넋이여 먼 백제 그때 그러시던 그대로/영원히 여기 숨어 그 노래 불러/이 겨레 맑은 사랑에 늘 보태옵소서. # 원교와 추사의 글씨 이즈음 선운사에서는 동백을 꼭 봐야 하는 게 순서다. 다음으로 유심히 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이 선운사의 현관문 격인 사천왕문의 현판이다. 힘차면서 담박한 필치로 쓴 ‘사천왕문’이란 빛바랜 현판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손꼽히는 원교 이광사의 솜씨다. 원교의 글솜씨는 같은 시기의 인물인 추사 김정희와 자주 비견되는데, 마침 추사의 글씨도 선운사에 있다. 절집 곁의 숲으로 둘러싸인 부도밭. 앞줄의 부도 중앙에 선운사에서 불법을 닦았던 고승 백파 선사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거기에 적힌 푸른 날이 선 듯한 글씨가 바로 추사 김정희 솜씨다. 추사가 죽기 1년 전에 정성껏 마음을 담아 쓴 비석의 글씨는, 추사 만년 글씨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앞면 글씨는 해서체로, 뒷면의 작고 빽빽한 글씨는 행서체로 썼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붓이 지나간 속도와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해서 저절로 비석을 어루만지게 된다. 사실 이 비석은 실제보다 조금 작게 만든 복제품이다. 본래의 부도비는 지난 2006년에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봄날 선운사에서 가장 청량한 곳은 도솔천 건너편의 차밭이다. 평지의 차밭이어서 보성의 다원과 같은 깊이감이 느껴지는 공간은 없지만, 차나무가 길고 단정한 이랑을 이뤄 싱그러움을 느끼며 산책하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이른 봄날 새벽이라면 필시 도솔천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차밭을 휘감는다. 차나무에는 이제 연두색 새잎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저리도 연한 찻잎은 곧 덖여 불법을 닦는 스님의 찻잔 속에 향기로 담기리라. 그렇게 찻잔에 그득 담겨서 정진의 기도가 되리라.
# ‘구름 속 참선’의 자리 선운산 등산코스는 다양하다. 취향껏 구간을 자르고 붙여 잇는다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정도다. 소요시간에 따라서 나눈다면 크게 4개 코스로 나눌 수 있다. 왕복 3시간짜리 가벼운 등산부터 투구바위와 사자암, 배맨바위 등 일대 산군의 능선을 모두 밟고 돌아오는 장장 10시간쯤 걸리는 코스도 있다. 거리나 난도가 중간쯤 되는 왕복 5시간짜리 코스도, 8시간이 걸리는 코스도 있다. 선운사를 다녀가는 길이라면 이 중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거기서 낙조대와 천마봉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3시간 코스를 추천한다. 거리는 가장 짧지만 이 코스를 택하면 선운산이 보여주는 둔중한 기암의 조망을 한껏 누릴 수 있다. 등산은 하지 않겠다 해도 선운사까지 간 길이라면 부드러운 숲길을 걸어 도솔암까지는 다녀오길 권한다. 선운산 가장 깊은 곳에 들인 암자가 바로 도솔암이고, 도솔암 뒤쪽의 험준한 바위틈에 법당 내원궁이 있다. 내원궁이 딛고 있는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어쩐지 험상궂은 얼굴을 한 미륵불인데, 명치 부근의 사각형의 복장(伏藏)에 세상을 구원할 비결이 들어 있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마애불의 배에서 비결을 처음 꺼낸 이는 전라감사로 부임했던 이서구. 1787년 이서구는 복장 속에서 꺼낸 책 첫 장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억지로 열다’라는 글을 보곤 혼비백산해 책을 도로 복장 안에 넣고 봉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뒤인 1892년 8월, 동학 접주 손화중이 동학교도 300여 명과 함께 비기를 꺼냈다는 소문이 돌면서 무장, 고창, 영광, 고부, 정읍 등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의 수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실제로 이들이 비기를 꺼냈는지, 또 꺼냈다면 거기에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도솔암의 마애불은 미륵과 동학이 얽혀 거대한 불길로 타오르는 데 불쏘시개 역할을 한 셈이었다. 도솔암에서는 천마봉까지 올라 보기를 권한다. 천마봉이 어디인지는 도솔암에 가면 저절로 알 수 있다. 말의 형상을 닮진 않았지만 하늘로 힘차게 치솟아 곧 날아오를 것만 같은 도솔암 앞의 기이한 암봉이 바로 천마봉이다. 가파른 철계단을 30분 남짓 오르면 천마봉 정상이다. 거기서 도솔암·선운사가 들어앉은 분지와 같은 지형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구름 속의 참선’이란 뜻의 선운은 아마도 여기 천마봉에서의 참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 고창에는 바다가 있다 고창에는 바다가 있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얘기. 하지만 고창에 대해 선운사, 그리고 장어나 복분자 외에 떠올리는 게 없는 이에게는 낯선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고창의 바다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운 모래가 깔린 활처럼 휘어진 해안의 해수욕장도 없고, 활기 넘치는 항구도 없어서 그렇다. 대신 장엄하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는 거대한 갯벌, 그리고 끝이 가물거리는 자로 그은 듯한 긴 해변이 있다. 고창의 갯벌과 해안은, 이즈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요해서 그 앞에 서서 흐트러진 생각을 꺼내어 헹구거나, 꼬인 마음을 한 가닥 한 가닥 풀어내기에 좋다. 그러기에 맞춤인 곳이 심원면 만돌마을의 갯벌이다. 썰물 때에 만돌마을 앞에 펼쳐지는 갯벌은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 크기에 압도될 정도다. 갯벌로 길게 이어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딛고 서면 갈매기들이 앉아 있는 갯벌의 한복판까지 걸어나갈 수 있다. 마침 해 질 무렵과 썰물이 겹쳐질 때라면 시시각각 갯벌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저물녘 빛을 마치 예술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다. 만돌마을에는 계명산이 있다. ‘닭 계(鷄)’ 자에 ‘울 명(鳴)’ 자를 쓴다. 만돌마을에서 닭이 울면 중국에서 들린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허풍도 그런 허풍이 없다. 고작 해발 29m라 산이라고 하기에 심히 민망하지만, 계명산에 오르면 만돌마을 일대와 너른 갯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철수한 초병들의 초소가 남아 있는 계명산 산정에는 닭 볏처럼 오래된 때죽나무가 서 있다. 때죽나무는 5월 하순에 만개한다. 계명산 아래에는 서해안 바람 공원이 있다. 이곳에 해넘이 광장이 있다. 공원에는 만돌마을 앞바다의 섬 대죽도와 갯벌 너머로 해 지는 광경 등을 볼 수 있는 전망 덱이 있다. 만돌마을 아래 동호해수욕장부터 구시포해수욕장까지의 해변에는 백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백사장의 폭이 좁은 데다 모래도 굵고 거칠어 ‘좋은 해수욕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거야 해수욕을 즐길 때의 얘기. 인적이 드문 해수욕장에는 간혹 백사장을 달리는 차들이 있다. 모래가 단단해서 차 바퀴가 빠지지 않는단다.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바닷가 해안까지 차로 들어가서 차창을 열고 파도를 바라보는 일이 여기서는 가능하다. # 읍성에서 숨은그림찾기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은 처음에는 어지러웠던 시대에 빈발했던 민란 가운데 하나였을 따름이었다. 그게 농민들이 세력을 규합해 일대 결전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된 게 1894년 음력 3월 21일 여기 무장읍성에서 감행된 혁명결의와 전쟁선포였다. 동학혁명의 본격 시작을 알리는 ‘무장기포’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과 4000명 농민의 무장기포로 일개 지방관료가 아니라 무능하고 썩어빠진 조정 그리고 외세로 전선(戰線)이 확대됐다. 무장읍성은 바로 농민전쟁의 출발선이었다. 하필 무장이었던 건 동학의 3대 두령 중 1명인 손화중의 본거지가 무장읍이었기 때문이었다. 읍성의 둥근 옹성 안에는 2층 누각으로 지어진 남문 진무루가 있다. 진무루는 무장읍성이 복원되기 전에는 무장초의 교문이었다. 아마도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문이었으리라. 진무루로 들어가면 봉긋한 언덕 위에 지방 소읍의 규모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위세 당당한 무장객사가 있다. 객사는 한때 읍사무소로 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웅장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읍성 이곳저곳을 찬찬히 보자면 한도 없다. 객사로 오르는 계단에 새긴 유려한 부조도 있고, 기단이 된 절집에서 가져온 듯한 돌에 새겨진 연꽃 화병도 있다. 객사 아래 노거수 숲에 늘어선 수령의 공덕비도 볼만하다. 공덕비 중에는 두 동강이 난 것도 있고, 비석 아래 치성을 드리느라 촛불을 꽂은 자리도 있다. 비석을 받치는 기단의 거북이를 일부러 엉망으로 만들어서 비아냥을 드러낸 것도 있고, 암행어사에게 봉고파직된 현감의 비석도 있다. 보물찾기하듯, 혹은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읍성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 무장면을 근거지로 삼았던 손화중의 행적을 책과 자료로 뒤져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도솔암 마애불의 비기를 손에 넣고, 가장 많은 농민군을 모았다는 그는 백성들에게 ‘살아 있는 미륵’이었던 것일까. 손화중은 사실 농민군 안에서도 온건파에 속했다. 체포돼 심문받는 과정에서 이런 이유로 전봉준에게 힐난을 받기까지 했다. 백성의 기대와 사류에 떠밀려 그는 미륵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손화중을 여행 후의 후일담으로만 만나야 하는 건, 무장읍에 손화중을 기억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말이다. ■ 청보리밭 축제는 내년에 전북 고창의 대표적인 봄축제는 고창 공음면 학원농장에서 열리는 청보리밭 축제다. 올해 17년째인 청보리밭 축제는 4월 18일로 예정됐던 개막이 미뤄지면서 5월로 연기됐으나 결국 취소됐다. 고창군은 농장 주변에 ‘방문자제’를 요청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서울 여의도의 4.8배의 면적에 청보리와 유채꽃이 바다를 이루는 풍경을 아쉽게도 올해는 볼 수 없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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