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조용헌의 영지 순례_계룡산 등운암

醉月 2020. 4. 24. 17:26

[조용헌의 영지 순례]

도사들의 ‘영발 충전소’ 계룡산 등운암에 쇠파이프가?

 

▲ 한민족의 정신적 성지인 연천봉 암각에 조선의 운명을 예언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기(神氣)! 이것이 문제로다. 21세기는 네오 샤머니즘의 세상이다. 신기가 있어야 성공한다. 그동안 내가 만나본 여러 분야의 장문인급들은 거의 대부분 신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살다 보면 이거냐, 저거냐 하는 갈림길에서 헤맬 때가 많다. 이때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온건하게 표현하면 직감이 발달한 사람들이라고 할까.
   
   특히나 기업의 CEO들은 신기가 요구된다. 거래하러 온 상대자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할 것인가, 이거 혹시 ‘사’ 자 아닌가, 이 사람이 과연 비전이 있는 사람인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이 판단이 스펙만 가지고 내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신기 여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CEO들은 아예 접신(接神)이 되어야 한다. 어떤 신? 돈의 신과 접신이 되어야 사업을 헤쳐나갈 수 있다. 자나 깨나 꿈에서도 돈 벌 연구를 해야 하고, 24시간 사업을 생각하는 사람이 기업의 오너들이다. 이 정도 되면 돈의 신과 접신된 상태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싶다. 자본주의는 그 ‘주의(主義)’ 자체가 돈의 신과 접신되기를 강력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접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계룡산의 등운암(騰雲庵)은 강력한 지기(地氣)가 뻗치는 곳으로 정평이 난 장소이다. 전국에서 기가 떨어진 샤먼들이 기를 보충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다. 배터리가 방전된 도사들도 여기에 오면 충전이 되고, 불교의 여러 고승 대덕들도 이곳에서 좋은 기운을 받아 깨달음과 가피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천지자연의 기운을 누가 받아 쓰느냐가 문제이다. 쓰는 사람의 그릇과 기질, 목적에 따라 각기 달리 발현된다. 간장종지가 받아 쓰면 간장종지가 되고, 드럼통이 받아 쓰면 드럼통이 된다. 등운암은 조계종의 암자이지만,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영험한 기도터로 소문이 나 있었던 장소로 추측된다. 한반도의 수만 년 역사에서 놓고 보면 불교도 또한 굴러온 돌이다. 불교 이전부터 이 땅의 민초들이 기도를 하고, 접신을 하던 장소였던 것이다. 그 영험한 장소에 불교가 들어와서 절과 암자를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영험한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단지 거기에 들어온 종교에 따라 간판만 바꿔 다는 셈이다. 요즘도 보면 절이나 암자가 폐사된 곳에 기독교 기도원이나 수도원이 들어서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샤머니즘도 그렇지만 모든 종교는 영발이 그 생명이다. 영발 없는 종교는 앙꼬 없는 찐빵이다. 우리는 그동안 영발을 무당의 전유물로 폄하하고 천대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영발처럼 귀중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영발 앞에 가방끈은 무력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가방끈 길다고 뽐내 봐야 제대로 된 영발을 만나면 바로 꼬랑지 내리는 게 현명하다.
   
   
   애리조나 세도나보다 센 곳
   
   등운암은 해발 720m쯤에 자리 잡고 있다. 계룡산에서 제일 높은 지점에 있는 암자이다. 계룡산 남쪽에 있는 신원사에서 2시간 정도 산길을 올라가면 당도한다. 올라가는 길도 약간은 가파르다. 계룡산은 동쪽에 동학사(東鶴寺), 서쪽에 갑사(甲寺), 남쪽에 신원사(新元寺)가 있다. 북쪽은 절이 없고 도가의 수련자들이 주로 있었다. 소설 ‘단(丹)’의 주인공이었던 우학도인 봉우(鳳宇) 권태훈(權泰勳·1900~1994) 옹이 있던 곳이 북쪽인 상신리 쪽이었다. 계룡산은 남쪽으로 바위 맥이 흘러왔고, 그 바위 맥의 정상에 연천봉(連天峰·738m)이 있다. 그 이름도 범상치 않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뜻이다. 이 연천봉 바로 밑에 등운암이 자리 잡았다.
   
   등운암이 영험한 이유는 우선 암자의 밑바닥과 주변의 봉우리가 온통 바위로 되어 있고, 앞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등운암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그 터가 영험하려면 주변 봉우리들이 둘러싸줘야 한다. 사람도 자기 혼자만 잘났다고 하면 누가 알아주나. 주변에서 칭찬하고 인정해야 한다. 주변 봉우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암자가 자리 잡고 있어야 배터리를 모을 수 있다. 등운암이 이런 자리이다. 둘러싸고 있는 앞산의 봉우리들을 보자. 정면의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천황봉(845m)이다. 계룡산 최고봉이다. 과거에는 상제봉(上帝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천황봉 꼭대기에 레이더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김이 좀 샜다는 느낌이 든다. 성스러운 봉우리 꼭대기에서 사람들이 밥 먹고 똥 싸고 생활을 하는 주거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니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그 천황봉 오른쪽에 머리봉이 있다. 연산 쪽에서 보면 사람 머리같이 보인다고 해서 머리봉이다. 그리고 머리봉에서 오른쪽으로 쭉 내려가는 산맥 줄기에 국사봉이 있다. 이 국사봉도 한가락 하는 봉우리이다. 국사(國師)가 되고 싶은 야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이 국사봉 언저리에서 많이 놀았다. 국사봉은 후천개벽이 온다는 예언을 주역의 이치로 설명했던 정역파(正易派)가 숭배했던 봉우리이다. 강증산도 그렇고, 일본 열도가 가라앉는다고 예언했던 탄허 스님도 직간접적으로는 이 국사봉의 정역파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관점이다. 국사봉 중간에는 정역파를 이끌었고 1960년대 초반 충남대 총장도 지냈던 이정호 선생이 제자들을 데리고 공부하던 향적산방(香積山房)이 있다.
   
   다시 천황봉으로 가자. 천황봉 왼쪽으로 약간 평평한 바위봉우리가 쌀개봉이다. 천황봉에 레이더 시설이 들어선 뒤로는 오히려 쌀개봉이 더 기운이 강하게 뻗치고 있다는 게 현지 체험자들의 의견이다. 쌀개봉 왼쪽으로 관음봉이 있고, 관음봉 왼쪽으로 뾰쪽한 삼각형의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다. 그러니까 등운암에서 보면 왼쪽의 문필봉부터 시작해서 관음봉, 쌀개봉, 천황봉, 머리봉이 둘러싸고 있다.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마치 볼록렌즈처럼 등운암을 향해서 에너지를 반사해 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등운암이 자리 잡은 바닥의 에너지가 약한 것도 아니다. 해발 720m의 암산이다. 계룡산을 자세히 보면 산 전체가 통바위로 되어 있다. 조각조각 되어 있지 않고 전체가 하나의 통으로 형성된 바위산이 계룡산이다. 통바위 산일수록 기운이 강하다. 계룡산이 1000m가 안 되지만 그 내용물은 통바위 산이라는 점에서 성산인 것이다. 명상가이자 계룡산을 좋아하는 한바다(61) 선생도 언젠가 필자에게 한 말이 있다. “미국에 기운이 강하다고 하는 애리조나의 세도나(Sedona)도 있지만, 사실은 계룡산이 세도나보다 더 기운이 강하고 좋습니다. 단지 산의 주변에 식당과 여관 등 잡다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어서 대단하게 안 보이는 것이죠.” 미국이 땅은 넓지만 그 밀도와 에너지에서 보면 한국의 땅이 결코 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발로 치면 한국의 산들이 세계적인 수준이다.
   
   등운암은 암자 바로 머리 위에 연천봉의 정상이 있다. 암자 뒤로 5분만 올라가면 연천봉 정상의 바위가 나온다. 바로 이 연천봉 정상의 암반이 영발의 산실이다. 수많은 무당과 조선시대의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했던 도사들이 연천봉을 사랑했다. 펄펄 끓는 압력밥솥이었다고나 할까. 실제 연천봉 정상 암반에 있으면 기운이 찡 하고 들어온다. 발끝에서부터 척추뼈를 타고 뒷덜미를 거쳐 머리를 돌아 코까지 내려오는 에너지를 느낀다.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면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아 놓아야 한다. 이 연천봉 암반은 그 콘센트이다. 음력 보름날 전후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무속인들이 연천봉 암반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거나 기도를 드린다. 1m 차이로 자기에게 기운이 들어오나 안 들어오나를 체크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도 벌어진다. 21세기인 지금도 이 등운암과 연천봉이 이렇듯 건재한데,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는 어떠했겠는가. 그때는 교통이 불편해서 일반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었고, 머리 깎은 스님들이나 전문 도사들만 여기에서 배터리를 공급받았을 확률이 높다.
   
   

▲ 레이더 시설이 있는 천황봉 등 기운 센 봉우리들이 등운암을 둘러싸고 있다.


   ‘方百馬角 口或禾生’ 암각의 비밀
   
   이 연천봉이 반체제 도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포인트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암각글자도 세로로 새겨져 있다. 바로 ‘方百馬角 口或禾生(방백마각 구혹화생)’이라는 유명한 각자이다. 도사들이 풍수도참을 이용하여 조선조가 망한다는 자신들의 견해를 새겨 놓은 것이다. 필자는 1980년대 대학 다닐 때부터 이 암각 글자를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어떻게 이런 글자를 새겨 놓았단 말인가! 방백(方百)은 400년으로 해석한다. 마각(馬角)은 보통 82년으로 해석한다. 구혹(口或)은 압축하면 국(國)이다. 화생(禾生)은 압축하면 이(移) 자로 통한다. 조선왕조는 창업한 지 482년이 되면 나라를 옮기게 된다. 즉 조선은 생긴 지 482년 만에 망한다는 의미이다. 조선왕조의 개국이 1392년이니까 482년을 더하면 1874년이 된다. 조선이 1910년에 망했다고 보면 몇십 년 오차가 난다. 참고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1876년에 체결되었다. 강화도조약부터 조선조가 거의 거덜나기 시작했다고 보면 얼추 ‘방백마각 구혹화생’이 들어맞는 거 아닌가 싶다. 이 풍수도참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왜 이런 망조 예언을 연천봉 바위에다가 새겨 놓았는가다. 얼마나 자기 확신이 강했으면 482년이라고 바위에 새겼을까. 그리고 전국 어디에도 조선왕조가 망한다는 예언이 새겨진 바위는 없다. 오로지 계룡산이고 연천봉이다. 그것도 가장 강한 영발이 피어오르는 지점에다가 말이다.
   
   계룡산 연천봉에 이 ‘방백마각’을 새겨 놓았던 인물들은 조선이 망하기를 바랐던 세력들이다. 아마도 반체제의 비밀결사 승려조직이었던 당취(黨聚)들이 아니었을까. 방백마각을 새겨놓고 조선왕조가 빨리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기를 기원하던 장소가 연천봉이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새로운 왕조는 바로 정씨(鄭氏) 왕조였다. 정도령이 출세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그 정도령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풍수도참서이자 예언서는 ‘정감록’이다. 조선조의 안방마님들이 가장 애독했던 베스트셀러는 ‘토정비결’이었고, 사랑방의 남자들이 좋아했던 애독서는 ‘정감록’이었다. ‘정감록’의 핵심은 정도령이었는데 계룡산 연천봉과 등운암은 정도령 신앙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방백마각이 그 증거이다. 또한 신기를 받을 수 있는 콘센트의 기능을 지닌 영지였기 때문에 풍수도참이 강력한 힘을 받을 수 있는 장소였다.
   
   조선 말기에 왕실에서는 계룡산을 특별 감시했다. 민비는 이 등운암을 ‘압정사(壓鄭寺)’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다. ‘정씨를 압박하고 누르는 절’이라는 뜻이다. 민비 당대의 조선 말기에 등운암은 압정사로 불렸다. 그만큼 조선 왕실에서는 계룡산을 경계했고, 이 등운암을 위험한 장소로 인식했다. 조선조를 뒤집고 정도령이 출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 바로 계룡산 등운암이라고 여겼다는 증거이다. 오죽하면 압정사로 암자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겠는가! 영발이 있고, 신기가 강하게 올라오는 영지(靈地)는 결국 정치적인 차원의 문제로까지 옮아갔다. ‘신기에서 정치까지’이다.
   
   엊그제 또 가보았더니 연천봉 정상에 등산객을 위하여 난데없이 합성나무로 만든 데크를 바위 위에 깔아 놓았다. 쇠파이프 난간까지 정상 바위에 박아 버렸다. 수천 년 한민족의 정신적 성지를 쇠파이프를 박아 훼손해 버린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한반도 혈맥을 끊는다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우리가 욕하지만, 연천봉 정상에 박은 쇠파이프는 그때 박은 쇠말뚝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저질이다. 제발 좀 이 쇠말뚝과 데크를 철거해 주었으면 좋겠다. 철거하지 않으면 그 쇠말뚝을 박게 한 책임자는 집안에 저주가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