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지른 수직 벼랑 끝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자리로 세상에서 물러나 앉았음을 보여주는 전남 담양 추월산의 암자 보리암. 보리암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날려 보낸 ‘나무로 만든 매’가 날아와 앉은 자리에다 지은 암자라고 전해진다.
추월산 중턱 수직 절벽의 작은 절집 ‘보리암’
가는 길 곳곳 사람들 희망 담긴 돌무더기
속세에서 멀리 물러나 수도하기 딱 좋은 자리
암자 지나 상봉 오르면 담양호수·산성산 한눈에
돌로 쌓은 6.7㎞ 山城에 둘러싸인 ‘산성산’
성곽의 유려한 곡선·단청으로 단장한 성문이 경관 압도
잠시 닫아둔 광주호 ‘생태원’ 수채화같은 풍경 황홀
이태석 신부 잠든 ‘천주교공원묘원’에선 위로얻어
전남 담양으로 갑니다. 죽녹원의 대숲도 들르지 않고, 메타세쿼이아 길에도 가지 않습니다. 관방제림의 국숫집도 건너뜁니다. 이번 주에도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정입니다. 담양에서 명소의 인기에 밀려서, 혹은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아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아니었더라도, 붐비는 곳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었다고 해도 지금 얘기하는 곳들은 마음속으로 늘 권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곳까지 가는 것을 방해했던 건, 기왕에 이름난 관광지였기 때문입니다. 명소는, 때로 더 나은 많은 것을 가립니다. 담양에서도 물론 그렇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불편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여행에서는 말입니다.
# 가을의 산을 봄에 오르다
▲ 금성산성 아래 절집 연동사의 노천법당 지장보살. 지장보살의 얼굴이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풍모다. |
담양의 추월산, ‘가을 추(秋)’에 ‘달 월(月)’ 자를 이름으로 쓴다. 가을도 아닌 봄에, 보름달도 아닌 때에 추월산에 오른다. 추월산은 가을 단풍으로 이름난 산. 가을에 참 좋아서, 가을이 아닌 때의 추월산은 찾는 이가 적다. 어떤 계절에 더 좋다는 이유로, 다른 계절에는 폄하되곤 하는 곳이 어디 추월산 하나뿐일까. 단풍 없는 내장산도, 매화 없는 섬진강도 충분히 아름답다.
추월산에 오르지만,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추월산이 아니다. 추월산까지 오르는 길의 딱 절반쯤 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작은 암자 보리암이다. 보리암은 추월산 아래 담양호국민관광지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서 고개를 들어보자. 보리암은 기괴한 바위로 이뤄진 추월산 상봉 아래 직벽에 걸려 있다. 이런 모습은 그나마 오전 나절에만 볼 수 있다. 해가 기우는 오후라면 암자는 눈부신 역광의 그늘에 가려지고 만다.
전남 여수에는 향일암이 있고, 전남 구례에는 사성암이 있다. 경남 남해 금산에도 같은 이름을 쓰는 보리암이 있다. 하나같이 아슬아슬한 벼랑에 제비집처럼 지어놓은 절집들이다. 하지만 여기 추월산의 보리암만큼 긴장감 넘치는 공간에다 지어낸 암자가 또 있을까. 긴장감으로 치자면 여기 담양의 보리암만 한 곳이 없다. 아찔한 수직의 절벽에다 어쩌자고 이렇게 위태롭게 암자를 지었을까. 종교가 꿈꾸는 게 위안과 평안이라고 보면, 이렇듯 배반적인 장소가 또 있을까 싶다.
관광객들은 주변 풍경에 반해서 벼랑 끝의 암자를 찾아다니지만, 애초에 아찔한 절벽 끝에다 어렵게 암자를 지었던 건, 사람을 불러들이거나 풍경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절집이나 암자가 정자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벼랑 끝에 암자를 두었던 건 모름지기 자신을 가두는 ‘구도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위태로운 벼랑에서의 수도. 화두를 붙잡은 고승들은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수도에 목숨을 걸었으리라. 그들은 빗장을 걸고, 동굴로 은거하고 벼랑 끝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니 이런 위태로운 곳들은 본디 대중과 교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수도자의 용맹정진 공간이다. 수도자의 비장함을 생각한다면 암자까지 가는 점점 가팔라지는 길에 다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가빠지는 것쯤이야 당연히 감수할 일이다. 그래 봐야 보리암까지 1시간이니까. 거친 너덜길과 계단이 교대로 등장하는 등산로 주변에는 작은 돌무더기가 곳곳에 있다. 번듯한 사찰도 아니고 작고 누추한 암자 가는 길을 이렇듯 작은 돌로 탑을 쌓듯 기원을 쌓아둔 건, 아마도 긴장감 넘치는 자리에 앉은 암자의 비범함에 바치는 자연스러운 기도이리라. 오가는 이들이 쌓은 돌무더기 위에 조심스레 작은 돌 하나를 얹고 기도를 보탠다. 말 그대로 ‘환란의 시기’인 이즈음에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 접근 불가의 위태로운 자리
예사롭지 않은 보리암 자리는 고려말 보조국사 지눌이 처음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발견한 게 아니라, 그가 날려 보낸 ‘나무로 만든 매’가 찾았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타락한 고려불교 개혁에 앞장섰던 지눌이 지리산의 상무주암에서 머물다가 나무로 매 세 마리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려 보냈단다. 한 마리는 전남 장성의 백양사, 한 마리는 전남 순천 송광사 터에 앉았고, 나머지 한 마리가 여기 보리암 터로 날아왔다. 지눌은 매가 앉은 자리마다 절을 세웠다. 보리암은 거찰인 송광사나 백양사의 규모나 위세에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작고 허름한 암자에 불과하지만, 수도와 정진을 위해서는 이 정도로도 부족함이 없다.
속세에 등을 돌리고 깎아지른 산속의 범상찮은 자리에 들어선 절집이어서 그런지, 보리암에는 전설처럼 전하는 이야기도 많다. 먼저 절에 있는, 지름 1m가 넘는 가마솥 얘기부터. 나무 덱이나 철계단 등으로 정비되기 이전에 보리암은 가히 접근 불가의 요새나 다름없었을 터. 암자 법당 앞의 녹슨 솥은 전북 순창 출신의 한 기생이 암자에 보시로 내놓은 것인데, 길이 험해 절 아래까지는 천신만고 끝에 가져왔으나 절벽 위에 있는 암자까지는 올릴 방도가 없어 밤을 새웠단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부처님의 법력으로 솥이 절에 옮겨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파계승이 암자 근처에서 닭을 잡아먹자 부정을 타서 보리암에 솟는 샘물이 끊기는 바람에 암자의 스님이 석 달 동안 아랫동네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암자가 거친 산세의 벼랑 끝으로 숨은 건, 속세에서 되도록 멀리 물러나기 위함이었으리라. 평시에는 그 계산이 맞아 들었겠지만, 수상한 시절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오히려 깊고 외진 땅이라 더 많은 곡절과 비극이 지나갔다. 보리암의 벼랑에서는 여럿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역모의 굴레를 쓰고 스물여덟 나이에 억울하게 매 맞아 죽은 의병장 김덕령.
그의 부인 흥양 이씨는 정유재란 와중에 왜군에게 쫓기다가 여기 암자에서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암자 입구에는 흥양 이씨의 순절을 기리는 비석과 작은 비석 두 기가 더 있다. 김덕령과 함께했던 의병의 부인 두 명과 그리고 김덕령의 매부, 사돈도 여기서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학 농민군은 여기 추월산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했다. 이곳에서 왜군의 기습과 의병장의 죽음이 있었다. 성난 갈기처럼 바위로 일어선 능선과 깎아지른 암벽의 지형, 기이한 접근 불가의 지세가 오히려 오랫동안 싸움과 죽음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암자를 지나 조금만 더 오르면 추월산 정상에 닿기 전에 넘어가야 하는 봉우리가 하나 있다. 보리암 바로 뒤쪽에 솟은 봉우리라 ‘보리암 정상’이라고 부르고 안내지도에도 그렇게 쓰여 있는데, 봉우리의 이름은 따로 있다. ‘상봉’이다. 상봉에 올라보면 ‘열 십(十)’ 자 모양의 담양호수와 푸른 물 건너편의 산성산(금성산)을 마주 볼 수 있다. 상봉에서 다시 1.3㎞를 더 오르면 추월산 정상이지만, 등산이 아니라 여행이라면 여기까지다.
금성산성 외성의 문인 보국문. 성곽이 그려내는 조형적인 미감이 인상적이다. 담양의 금성산에 오르면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과 산 아래의 경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
# 성(城)이 주인공인 산에 오르다
담양호를 앞에 놓고 추월산과 마주 보고 있는 산이 산성산이다. 산 이름이 ‘산성(山城)’인 건, 연대봉, 시루봉, 철마봉 등 산봉을 잇는 금성산성이 이 산의 능선을 구렁이처럼 기어가기 때문이다. 돌로 쌓은 산성의 유려한 곡선, 그리고 단청으로 단장한 성문이 그려내는 미감은 다른 모든 경관을 압도한다. 산성산의 주인공은, 돌로 지은 산성이라는 얘기다. 험준한 산세와 어우러진 성곽의 곡선과 성문의 자태가 어찌나 근사한지 방비의 목적이 아니라 미감으로 그 자리를 택한 것 같은 느낌이다.
성은 자고로 방어에 가장 적절한 자리의 능선에다 쌓는 법. 방어하기 좋은 자리란 곧 적의 동태를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말한다. 성곽 앞에 서면 시야가 탁 트이는 건 이 때문이다. 산 아래서 산성까지는 2㎞ 남짓. 느긋하게 걸어도 1시간 안쪽이다. 거칠고 가파른 구간이 없어서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부드러운 길이다.
전체 거리가 6.7㎞에 달하는 성 한 바퀴를 다 걷는다면, 산 아래서 성곽까지 오르고 내리는 시간까지 합쳐서 5시간쯤 걸린다. 이것보다는 산성산으로 올라서 산성을 가로질러 능선이 이어 붙은 순창의 강천산으로 내려서는 코스가 더 인기다. 강천산에서 이쪽 산성산으로 넘어오기도 한다. 이렇게 코스를 잡으면 4시간 남짓이다.
산성을 다 걷거나 강천산으로 건너가는 코스는 본격적인 등산이다. 여기서는 1시간 남짓 순한 길을 걸어서 산성의 외성인 보국문, 그리고 바로 위의 내성인 충용문까지만 다녀오는 길을 권한다. 산성산의 주인공이 산성이라면, 이 정도만으로도 산성산이 가진 매력을 맛볼 수 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은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산의 지세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돌로 지은 성이 산의 뼈대를 선으로 드러낸다는 얘기다. 특히 내성의 입구인 충용문에서 외성의 성문 보국문을 내려다보면, 능선을 짚고 좁고 길게 밀고 나간 성곽과 성문이 그려내는 풍경이 웅장하다. 첩첩이 겹쳐진 능선과 산성 너머의 담양호까지 시야에 담긴다.
충용문 안에는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 팻말이 세워져 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결성한 연합의병지휘부. 이들은 1908년 일제 군경의 습격에 3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조직은 와해됐다. 금성산성은 또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한 녹두장군 전봉준이 수백 명을 다시 모아 재기를 꿈꿨던 곳이었다. 믿었던 동지의 밀고로 전봉준이 붙잡혀간 뒤에도 금성산성에 은거했던 동학군은 혈전을 벌였지만 무참히 패배했다. 6·25전쟁 때는 빨치산들이 자리를 잡았다. 애초에 여기다 성을 쌓았던 것도, 위기 때마다 의병과 혁명군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던 것도, 여기가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었다.
담양과 광주의 경계에 있는 광주호 호수생태원의 화사한 신록. 호반의 습지를 다듬어놓고 산책로와 덱을 설치해 두었는데, 봄이면 물드는 신록이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곳이다.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로 출입이 통제된 상황이라 아쉽게도 이런 광경은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다. |
# 갈 수 없어 더 황홀한 광주호 신록
담양이라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대나무, 그리고 메타세쿼이아 길이다. 여기다 관방제림의 국숫집도 빼놓을 수 없다. 대나무숲 우거진 죽녹원 대숲의 청량함과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의 이국적인 운치는 담양의 아이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담양을 여행할 때 빠뜨릴 수 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의 여행이라면 여행지 목록에서 이곳들을 덜어내자.
죽녹원은 요즘 같은 상황에도 주말이면 관람객이 적잖다. 감염병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은, 길을 막고 외지인들에게만 입장료를 거두는 산적 같은 상혼 때문에 어느 때고 그다지 내키지 않는 곳이다. 가격에 비해 부실하기 짝이 없는 관방제림에 늘어선 국숫집도 예전 같지 않아 실망스럽다. 이렇게 이름난 여행지를 일정에서 빼버리고 나면, 길 곳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관성처럼 찾아가는 유명 관광지를 지우고 나면 뜻밖의 여행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담양은 광주와 경계를 이룬다. 그 경계에 1976년 영산강 유역 개발사업을 벌이며 고서천을 댐으로 막아 지은 광주호가 있다. 광주호 유역의 3분 2는 담양 땅이고 나머지 3분 1은 광주 땅이다. 광주호 주변에는 담양과 광주를 넘나들며 둘러볼 수 있는 가사문학의 유적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취가정, 독수정 등이 있다. 광주호에는 광주호 호수생태원이 있다. 광주에 속하지만 담양에서 말 그대로 ‘한 발만 디디면’ 광주 땅이다.
생태원은 호수의 습지에다 나무 덱과 산책로를 놓고 다듬은 곳인데 봄이면 버드나무의 신록이 어우러지면서 그야말로 ‘꿈결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아쉬운 건 코로나19로 생태원 입장이 금지되고 있는 것. 실내시설이 아닌 야외인 데다 자연 속의 공간이어서 이 정도면 열어두어도 좋을 듯한데…. 멀찌감치 보이는 수변의 버드나무들이 봄기운을 흠뻑 빨아올려 연두색으로 물이 올랐다. 초록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수채화 같은 풍경. 올봄의 생태원 풍경이 여느 해보다 몇 배나 더 황홀하게 느껴지는 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어서 그런 것일까.
담양에서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아니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몰랐던 곳이 있다. 담양 천주교공원묘원. 남아프리카 수단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죽는 날까지 봉사한 이태석 신부의 묘가 여기 담양에 있다.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의 그 이태석 신부 말이다. 공원묘원의 수도자 묘역에는 광주대교구에 진출해 있는 수도회 중 남녀 살레시오 수도회, 사랑의 시튼 수녀회,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 등의 회원을 위한 구역이 있는데 이태석 신부가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이라 여기에 모셔졌다.
담양 천주교공원묘역의 고 이태석 신부 묘. 누군가 묘 앞 상석에다 작은 돌을 십자가 형태로 올려두었다. |
마흔여덟의 나이에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투병 끝에 세상을 뜬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 말은 ‘모든 것이 다 좋다’였다. 마침 올해가 이 신부의 10주기다. 묘 앞의 대리석 판석 위에 누군가 작은 돌을 십자가 형상으로 놓아두었다. 담양읍에서 멀기도 하고, 가는 길이 외길에 가까워서 오다가다 들를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이태석 신부 묘를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건 아마도 ‘가장 예수와 닮은 삶을 살고 간’ 신부 앞에서 위로를 얻고 싶은 이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가 말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와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물러나 앉을 때 세상이 더 잘 보이기도 한다. 인적 드문 산에 올라 멀리 보면 산 밑에서 그리도 복잡했던 세상사가 단순해 보인다. 그래서 너그러워질 수 있다. 인파로 북적거리는 관광지에서 잠시 등을 돌리고 위태롭게 물러앉은 벼랑 끝에 앉은 여행에서 코앞의 이익이나 위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멀리 보는 법을 배운다.
■ 금성산성 이야기
금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조선 태종 때 고쳐 쌓았다. 금성산성을 쌓는 과정에서 ‘오사랄(오살할) 놈’이란 욕이 나왔다고 전한다. 부역에 동원돼 성을 쌓던 백성들이 겨울엔 추워서 얼어 죽고, 여름엔 더워서 지쳐 죽어 ‘오살(五殺)’이란 말이 나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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