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에는 전주에서 출발해 완주와 익산, 김제의 경계를 넘나들어 제자리로 돌아오는 무려 240㎞의 ‘아름다운 순례길’이 있습니다. 믿음에 기꺼이 바쳐진 순교의 자취와 종교가 주는 위안을 찾아가는, 세속의 틈 사이로 난 길고 가느다란 길입니다. 그 길을 낸 이들은 ‘순례길을 관통하는 정신은 이해와 나눔, 그리고 화합’이라 말하지만, 좀처럼 거기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길을 낸 이들에게는 그럴지 모르겠으되, 길고 긴 순례에 나선 이들에게 그 길은 어쩌면 결핍과 갈구, 그리고 고통과 눈물에 더 가까울 듯합니다. 모름지기 길의 주인이 ‘길을 낸 이’가 아니라 ‘길을 걷는 이’라면 그 길은 고통과 소망의 길입니다. 사실 아름다운 순례길에는 빼어난 경관이나 아름다운 자연은 없습니다. 별다른 풍경이 없는,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을 그 길을 걷게 해주는 힘은 ‘결핍’인 듯합니다. 잘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간절한 소망, 혹은 얻고 싶은 위안으로 순례자들은 그 길을 걷습니다. 그런 걸음이 바로 이 길을 도보여행길이 아닌 진정한 ‘순례길’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평생을 시골 교회의 종지기로 살다 하늘로 돌아간 동화작가 권정생. 순례길을 걷다가 그가 생각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쓴 책 ‘우리들의 하나님’에서 추억한 1960년대 교회 모습이 이랬습니다. “농촌교회의 새벽기도는 소박하고 이름다웠다.…차가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조용히 기도했던 기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새벽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그 길 위에서는 아직도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은 교회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마룻장이 있고, 오래된 소망으로 둥글게 닳은 사찰의 돌계단이 있으며, 자신을 베는 도끼에조차 향기를 묻힌다는 순교자의 유적이 있습니다. 이런 향기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 순례길은 위안이었습니다. 이 길은 여행의 방편으로, 혹은 걷기의 즐거움만으로도 오를 수 있는 길입니다만, 모쪼록 이 길은 아껴두었다가 걸으시길…. 언젠가 좌표를 잃고 안개 속을 헤매다가 좌절과 슬픔의 지뢰를 밟거나, 누군가의 위로와 손길이 간절하게 필요할 때 이 길을 기억하시길…. 그때 모쪼록 이 길의 주인이 돼서 걸어보시길….
# 아름답지 않아서 더 감동적인 길 전북 일대에는 유독 종교 성지들이 즐비하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천주교 성지부터 오랜 기도로 닳은 마루를 가진 교회, 늙어가는 절집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왜 하필 이곳일까. 종교 성지들은 왜 여기에 몰려 있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한 진단은 정반대다. 한쪽에서는 풍요로운 들판과 넉넉한 모성(母性)을 닮은 모악산의 비범한 기운의 그늘로 종교가 찾아들어왔을 것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누대를 거친 정치권력의 착취와 수탈이 지역민들의 불안감으로, 반항으로, 다시 종교혼으로 분출됐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게 어느 쪽인지 가려내는 게 여행자의 몫은 아닐 테지만, 전북 땅에서 종교의 ‘가장 낮은 데서 빛나는 자취’ 앞에 설 때마다 비슷한 물음은 꼬리를 문다. 전북에는 이런 종교적인 자취를 잇는 길이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출발해 완주, 익산과 김제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 천주교 성지와 성당, 오래 묵은 사찰, 기도가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는 교회를 잇는 총연장 240㎞의 ‘아름다운 순례길’이다. 하나의 종교에 바쳐진 순례길이야 드물지 않지만, 이렇듯 다양한 종교를 모두 아우르며 잇는 순례길은 여기가 거의 유일하다. 다양한 종교를 모두 다 아우르는 길이 상징하는 건 종교 간의 화합과 교류, 그리고 이해의 확장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종교를 두루 아우른다는 건 곧 교리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뜻. 그러므로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도,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에게도 그 길이 열려 있음을 뜻한다. 종교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관계없다. 이 길에서만큼은 순례의 조건이 종교의 유무와는 상관없다. 그저 일상에서 깊은 내상을 입었거나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이라면 그 길을 걸을 자격은 그것만으로 도 충분하다. 상처가 깊을수록, 그리고 위로가 절실할수록 그 길을 더 ‘잘’ 걸을 수 있겠다. ‘아름다운 순례길’은 사실 제주의 올레길처럼 수려한 자연풍경을 갖지 못했다. 눈부신 절경이나 화려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래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순례의 길에서는 다른 길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종류가 다른 아름다움’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 아름다움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해가 막 질 무렵 순례길을 따라 전북 익산의 성당포구 부근을 지날 때였다. 한낮의 폭염이 사그라질 즈음에 바람이 잘 드는 들판 한가운데 논둑에 나와 앉은 두 할머니. ‘고생한 이야기를 다 쓰자면 책 열 권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고된 노동으로 길러낸 예닐곱의 자식들을 다 대처로 떠나보낸 이옥순(86), 노화선(79) 할머니가 사탕 한 봉지를 가운데 놓고 함께 저물어가는 너른 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걷다 몇 번이고 뒤돌아서 저물어가는 들판에서 두 노인의 굽은 등을 바라보다가 그만 콧날이 시큰해졌다. 사실 순례의 길 위에서 봐야 할 것은 ‘밖’이 아닌 ‘안’이다. 행여 ‘밖’의 화려한 풍경에 눈이 팔리다보면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눈이 흐려질지도 모를 일. 그렇게 무심한 풍경 속을 터벅터벅 걷다보면 길에 스며 있는 소박한 감동을 만나게 된다. 차량의 질주로는 만날 수 없는, 걸음의 속도로만 비로소 대면할 수 있는 이런 감동은 순례길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아름다운 순례길’은 모두 9개 코스. 짧은 코스가 14㎞ 남짓이고, 긴 건 27.5㎞에 이른다. 짧게는 4시간, 길게는 8시간이 걸린다. 9개의 전체 코스를 다 이으면 240㎞나 된다. 서울에서 전주까지의 거리보다 더 길다. 간혹 순례를 작정한 이들이 1주일여 동안 이 긴 길을 완주하기도 하지만, 여러 종교의 자취를 두루 짚는 이 길은 그렇게 걷지 않아도 된다. 구태여 코스를 구분하고 거기에 번호를 매겨놓은 것은 오로지 접근의 편의나 구분을 위한 것일 뿐이다. 순례길은 맥락이 없다. 그건 약점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들고나는 게 자유롭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디서든 홀연히 시작할 수도 있고, 어딘가에선 문득 끝날 수도 있다. 제 나름의 형편대로 마음이 가는 지점을 택해서 시작하고 원하는 만큼 걷다가 마치면 그뿐이다. 순례길의 긴 구간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추천 코스로 몇 곳을 골라낸다는 것도 좀 막막하다. 그래서 순례길이 지나가는 곳 중에서 가장 향기로운 이야기가 스민 곳들만 추려 이야기하기로 하자. 어떤 길을 걷게 되건 여기는 꼭 들렀으면 하는 곳들이다. 걷는 게 아무래도 자신 없거나 지루하다면 이런 목적지만 골라서 차로 이어본대도 상관없다. 먼저 순례길 1코스의 출발지이자 9코스의 종착지인 전주의 풍남문. 이 문 밖에서 우리 땅에서 최초의 천주교의 순교가 있었다. 그게 200여 년 전의 일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던 윤지충. 그가 사촌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 가르침대로 제사음식도, 신주도 없이 치렀다. 당시의 유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혹독한 문초가 이어졌지만 그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형벌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으로도 다스릴 수 없었던 조정은 결국 그를 풍남문 밖에서 참수했다. 그게 천주교 최초의 순교로 시작된 신해박해였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뒤 풍남문 부근에 순교자들을 기리는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별 뜻 없이 한옥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전동성당은 이국적인 풍경쯤으로 소비되지만, 순례길에서 만나는 전동성당은 ‘자신을 치는 도끼에 기꺼이 향기를 묻히는’ 믿음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 대하소설이 줄줄 풀려나오는 곳 두 번째로 꼽을 곳은 익산의 나바위성당과 두동교회. 순례길 4코스가 이 두 곳을 지난다. 나바위성당은 먼저 고딕식 종탑과 한옥 건물이 어우러진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붙잡는다. 정면에서 보면 붉은 벽돌로 종탑을 지어올린 서양식 교회다. 그러나 측면으로 보는 자리를 바꾸면 건물은 금세 달라진다. 한옥의 단정한 기와와 눈썹처마가 어우러져 있고, 처마 아래로는 전통사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회랑이 이어진다.뒤쪽에서 보면 완연한 팔작지붕 한옥의 모습이다. 성당 안의 창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한지의 수묵 그림을 대서 그윽한 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이국적인 것들과 우리 것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경건함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나바위성당은 외양에 먼저 눈길이 가지만, 사실 더 강렬하게 빛나는 것은 성당이 그 자리에 들어선 의미다. 나바위성당이 들어선 곳은 첫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귀국길에 올라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사제가 우리 땅에 찍은 첫 발자국, 그 위에 나바위성당은 세워졌다. 나바위성당이 있는 망성면과 잇닿은 성당면 두동리에는 1929년에 세워진 두동교회가 있다. 한옥의 ㄱ자형 교회인데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으로 구분하고 중앙에는 휘장을 쳐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적 관습이 낳은 건축이다. 두동교회에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가 깃들어 있다. 이야기는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00섬지기 부자였던 지주 박재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고심하던 그는 ‘교회를 다니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에 아내의 교회 출입을 허락한다. 그러다 진짜 아이를 갖게 되자 그는 창고를 신도들에게 기꺼이 예배장소로 내줬다. 하지만 아이는 다섯 살 되던 해에 그만 죽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집의 어른까지 세상을 떴다. 어른의 상여가 나가는 출상일에 기독교 신자인 소작농들이 ‘상여를 메지 못하겠다’고 물러섰다. 격분한 박재신은 예배장소로 쓰이던 창고의 문을 닫고 신도들을 쫓아냈다. 가진 것 없는 소작농의 형편이라 새 교회를 짓는 것도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안면도에서 소나무 목재를 가득 실은 뗏목이 폭풍에 표류하다 금강으로 떠내려와 좌초했다. 며칠 뒤 뗏목 임자가 찾아왔지만 다시 가져갈 방도가 막막해지자 헐값에 나무를 팔았고, 신도들은 그 나무를 사서 두동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 가난한 신도들이 교회를 잃고 낙담하던 때, 선물처럼 떠내려온 뗏목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나바위성당과 두동교회는 경건한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성당의 삐걱대는 나무의자와 또 교회의 낡은 마룻바닥에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이들의 눈물과 기도가 바쳐졌을까. 반질반질 손때 묻은 문고리와 제단을 어루만지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했을 믿음과 기원에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 절집 마당서 화엄과 미륵의 화합을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서 수류를 잇는 7코스에서는 금산사와 금산교회, 그리고 수류성당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먼저 금산사. 일대의 71개 말사를 통괄하는 조계종의 교구 본사인 금산사는 통일 신라 때 창건돼 미륵신앙의 성지로 추앙받아온 절이다. 절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삼층목탑 형식의 화려한 미륵전이다. 미륵은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7000만 년 이후에 홀연히 출현해 세 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 가늠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 그러나 아득히 먼 시간이라도 미륵 출현의 날은 잡혀 있으니 도래의 희망은 꺼뜨릴 수 없는 법. 그 오랜 시간 뒤 미륵이 도래하는 미래세상은 고통이 없는 낙원의 땅임은 물론이다. 금산사의 미륵전과 거기 세워진 11.8m의 거대한 장육불에는 현실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닿고자 했던 이상세계의 꿈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미륵전은 가림막을 두른 채 단청보수 작업 중이다. 작업이 시작된 지 벌써 1년이 다 돼 가는데도 기약이 없다. 금산사에서 유심히 봐야 할 것은 화합과 융화다. 아름다운 순례길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 종교의 벽을 넘나드는 화해와 공존이지만, 절집 금산사의 경내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br> 금산사 산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건물이 너른 마당을 앞에 둔 대적광전이다. 3층짜리 미륵전은 마당 오른쪽에 있다. 수평으로 웅장한 게 대적광전이라면 미륵전은 수직으로 화려하다. 본래 대적광전은 화엄사상을 앞세운 화엄종의 건물. 반면 미륵전은 미륵신앙인 법상종의 건물이다. 하나의 절집 마당에 두 개 종파의 건물이 들어선 드문 경우다. 서로 다른 종파의 건물 사이에 세워져 긴장을 허무는 것이 방등계단이다.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방등계단이 갈등과 긴장을 자연스레 허물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금산사 인근에는 금산교회가 있다. 두동교회와 마찬가지로 ㄱ자형의 한옥교회다. 1908년 지어진 이 교회에는 지역의 부호였던 조덕삼과 그의 충실한 머슴이자 마부였던 이자익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인과 머슴은 선교사의 전도로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신실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 둘은 함께 장로에 입후보했는데, 놀랍게도 교회설립자이자 일대의 거부였던 조덕삼 대신 한낱 마부이자 열다섯 살 아래였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조덕삼은 머슴이 장로가 된 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자익에게 설교를 들었고 교회 일을 도왔다. 조덕삼은 후일 이자익을 평양으로 유학 보내 목사가 되게 했고 금산교회로 초빙해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다.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신앙 앞에서 겸허했던 거부와 머슴의 일화가 마치 동화처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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