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남 보성군 오봉산 일대

醉月 2013. 8. 29. 01:30

왼쪽에 거대하게 치솟은 바위가 오봉산의 칼바위다. 30m 높이의 칼바위 주위로 입체적인 암봉들이 호위하듯 치솟아 있는데, 암봉들이 형태를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분방해 이쪽과 저쪽에서 보는 경관이 전혀 다르다. 이쪽에서는 시퍼렇게 날 선 칼처럼 보이는 바위도 저쪽에서는 부드러운 곡선의 지느러미처럼 보인다.


모름지기 경관의 아름다움에는 ‘균형’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연에서도 대체로 ‘정렬’과 ‘흐름’이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만큼은 얘기가 다릅니다. 비명처럼 제멋대로 치솟은 비대칭의 거대한 바위군(群). 그 아래로 너럭바위가 뒹구는 움푹 꺼진 어두운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습니다. 어떤 바위는 시퍼런 창 끝처럼 날카롭고, 다른 건 또 둥글고 부드럽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입이 벌어지는데, 이런 풍경이 또 변화무쌍하기까지 합니다. 몇 발짝만 옆으로 움직이면 야수의 이빨 같은 시퍼런 날이 순식간에 무딘 모루처럼 바뀌고, 부드러운 바위가 돌연 각을 세우고 지느러미처럼 펼쳐집니다. 앞으로 다가선대도, 뒤로 물러난대도 경관의 전모를 도대체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규칙도, 균형도 없는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은 입체적인 풍경이 어찌나 독창적이던지 비슷한 풍경을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이곳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의 칼바위입니다. 득량만의 바다를 끼고 있는 오봉산은 높이가 고작 220m에 불과하니 내륙에 있었다면 숫제 야산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봉산 구분능선의 칼바위 앞에 서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바위 일대의 힘찬 바위군은 예측 불가의 기기묘묘한 경관을 보여줍니다. 빼어난 경관을 흔히 ‘선경(仙景)’이라 부르지요. ‘신선이 나올 듯한 경치’라는 얘긴데, 칼바위에는 그런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칼바위의 풍경이 환기하는 건 수염 허연 신선이 아니라 거친 이빨의 난폭한 짐승에 더 가깝습니다. 오봉산의 칼바위가 인상적인 건 풍경 때문만이 아닙니다. 남루한 바닷가 마을 주민들의 고된 노동의 자취가 거기 있습니다. 널찍하게 깨지는 오봉산의 바위는 예부터 ‘최고의 구들돌’이었답니다. 일제강점기에 여기서 캐낸 구들돌은 기차에 실려 전국으로 팔려 갔습니다. 주민들은 쇠꼬챙이 하나만 들고 산에 올라 구들돌을 뜯어내서는 소달구지에 싣고 득량역까지 실어 냈다는군요. 어려웠던 시절의 그 고된 노동을 추억하는 노인의 음성은 떨렸습니다.

전남 보성은 조형적인 구릉의 ‘차밭’으로 이름났습니다. 봄이면 철쭉이 만개하는 일림산이며 제암산도 제법 명소로 알려졌지요. 보성에는 그러나 못지않은 명소가 곳곳에 있습니다. 억울하게도 워낙 압도적인 차밭의 명성에 죄다 가려져 있지만 말입니다. 보성에서 남쪽 바다를 끼고 있는 득량만 일대의 명소를 둘러본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칼바위와 용추폭포의 비경과 청량한 대숲과 돌담의 푸른 이끼 속에 들어앉은 강골마을…. 여기다가 한더위가 물러가면서 아낙네들이 이제 막 뻘배를 밀고 갯벌로 나가는 풍경까지 득량만 일대를 두루 돌아봤습니다.


보성의 득량만방조제 쪽에서 본 예당평야의 너른 들. 논에는 이제 막 이삭이 패기 시작한 벼들이 출렁거리고 그 뒤로 방장산에 구름이 걸렸다. 보성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해발 500m 이상 되는 산이 무려 16개나 있다.




# 차밭을 지우고 보성으로 가다

전남 보성. 구릉을 따라 이어진 조형적인 차밭으로 이름난 여행지다. 보성의 차밭은 관광객들에게 그저 풍경으로만 소비된다. 도시마다 카페들이 우후죽순 번성하는 이른바 ‘커피의 시대’에 차의 그윽한 맛과 향은 진작 잊어지고 말았다. 차의 향과 맛이 다 지워진 차밭은 그저 구릉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잇는 초록 이랑의 아름다움으로만 남아 있다. 보성의 차밭은 이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기념사진만 찍는 여행지가 됐다. 차밭의 경관에 감탄한 이들은 있어도, 차 맛에 감탄하는 사람은 없다. 경관에만 마음을 뺏길 뿐, 아무도 차 맛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다원들이 차 생산보다는 1인당 3000원의 입장료를 받아 챙기는 데 더 열심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보성을 찾는 여행자들은 거개가 ‘차밭’을 목적지로 삼는다. 남도의 보성 땅에 어디 차밭만 있을까만, 차밭의 명성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다른 것들을 죄다 가리고 만다. 그러니 보성을 제대로 보겠다면 차밭을 버려야 한다. 아무래도 아쉽다면 보성읍에서 율포 쪽으로 넘어가는 봇재 정상쯤의 전망대에 차를 대고 차밭을 보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 이쪽의 봇재다원 차밭은 다른 다원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경관을 보여주지만 입장료를 거두는 손은 없다.

보성에서 차밭을 지워 버린 뒤에 으뜸으로 손꼽을 명소가 바로 오봉산이다. 오봉산(五峯山). 그게 다섯 봉우리를 가진 산임은 묻지 않아도 알 일. 처음에는 심드렁했다. 흔하디 흔한 이름도 그렇거니와 해발 220m라는 싱겁기 짝이 없는 높이도 시시했다. 먼 발치에서 바라본 산의 형세도 정상 부위의 노출 암봉이 좀 눈에 띌 뿐 그닥 특별한 게 없다. 다만 득량만을 바짝 끼고 솟아 있어 거기 오르면 너른 간척지와 바다, 그리고 그 건너 고흥 땅을 바라볼 수 있으려니 했다.

그러나 산에 가까워질수록 범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해평저수지의 푸른 물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어느 결에 고개를 들어보니 우람한 석벽이 주위를 포위했다. 깊고 선 굵은 협곡과 산 어깨쯤에 늘어선 노출 암반들은 강원도의 깊고 깊은 산중을 닮았다. 남해안의 바닷가에 이런 풍경이 있다니…. 길섶의 풀은 슬금슬금 아스팔트로 올라붙어 덩굴을 뻗으며 경계를 지우고 있다. 그 아스팔트 끝에 오봉산의 비경 중의 비경인 칼바위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칼바위,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그 길 끝에 진짜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 있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솜씨로 자연이 돌을 벼려 세운 비범함으로 가득한 칼이 거기 있었다.



# 가늠할 수 없는 고된 노동의 기억

사실 애초에 오봉산을 찾아간 건 거기 깃든 고된 노동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오봉산에는 널돌들이 흔해 오래전부터 구들을 치는 이른바 ‘방(房)돌’을 거기서 가져다 집을 앉혔다고 했다. 웬만한 아궁이의 불길에도 ‘튀지 않는다’는 오봉산 방돌은 예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인근 주민들은 집을 새로 지을 때면 오봉산 널돌을 깨서 지게로 져 날랐다. 돌을 캐다가 그저 제 집의 구들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전라선이 놓이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열차는 득량까지 들어왔다. 득량역에서 주로 내간 화물은 돌덩이들이었다. 오봉산 구들돌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이며 부산 등지에서 주문이 쇄도했고, 그 물량을 대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오봉산을 오르내리며 채석에 나섰다. 말이 채석이지 돌을 캐내는 건 고되고 끔찍한 노동이었다.

오봉산 아래 용호마을의 도상호(74) 씨의 증언. “징하게 배고픈 세상이었지. 부락에서 먹고살 만한 한두 집이 있으면 거기서 품을 팔아 연명했어. 어쩌다 일을 얻어서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남자는 쌀 한 되, 여자는 쌀 반 되를 받으면 다행이었지. 그런 판에 매일 할 수 있는 돌 캐는 일이 아무리 고된들 마다했겠어.” 방돌은 노출된 바위에서 뜯어내는 게 아니라 땅속에 묻힌 걸 쪼개서 캤다. 드러난 바위를 구들돌로 쓰면 불을 맞아 곧 터져 버렸지만 흙에 깊이 묻힌 건 불을 견뎠기 때문이다.

땅을 파고 정으로 바위를 결대로 쪼개 뜯어내는 것도 고된 노역이었지만, 그 돌을 산 아래까지 나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파른 산길을 ‘갈 지(之)자’로 뉘어서 거의 팔분능선까지 소달구지를 끌고 올라가 사방 6자(약 1.8m)짜리 구들돌 두 개를 싣고 내려왔는데, 가파른 비탈을 내려올 때면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고 했다. 달구지는 수시로 구르고 엎어졌고 소도 사람도 다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거기에 생계를 의탁한 이들은 막걸리 한 사발로 배를 채우고는 힘에 부친 노동을 온몸으로 견뎠다. 오봉산에 간다는 것은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는 그 고단하고 위태로웠던 자취를 따라 오르는 일이다. 비탈진 산길은 한세대 이전 가난했던 가장들이 고된 노동을 생계와 맞바꾼 길이었다.

위 사진은 보성 강골마을의 열화정에 앉아 내다본 모습.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선 정자는 그윽한 정취가 그만이다. 아래 왼쪽 사진은 툭 불거진 눈이 인상적인 득량면 해평리석장승. 오른쪽 사진은 1970년대 풍경을 복원한 득량역 앞의 역전이발관.


# 거암괴석의 무리가 만든 기이한 풍경

등산로 초입부터 칼바위까지는 1㎞가 채 못 된다. 30분쯤이면 족할 거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깨진 구들돌이 널린 산길은 오래전 소달구지가 다니던 갈 지 자의 모습 그대로 뉘어 있었지만 숨이 가쁠 정도로 가파르다. 이 정도 경사라면 어찌어찌 달구지를 끌고 오를 수는 있었겠지만, 돌짐을 싣고 내려오는 건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칼바위까지 오르는 길의 절반쯤 되는 지점에 바위가 포개지며 만들어진 이름 없는 굴이 하나 있다. 딱 한 사람이 앉아 있을 만한 크기의 굴 안쪽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굴 입구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땀이 식으면서 온몸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굴속의 기온이 바깥보다 10도 이상 낮은 듯했다. 요즘처럼 한낮의 땡볕이 쏟아지는 날에는 돌을 캐러 온 이들도 여기쯤에서 땀을 식혔을 것이다.

칼바위는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파른 오름길을 타고 오르다 수직의 바위벽이 난데없이 나타나 앞을 딱 가로막는데, 그게 바로 칼바위를 둘러싼 암봉의 무리다. 거암괴석의 무리를 바짝 다가가서 마주치니 도대체 전체적인 크기며 생김새가 짐작이 안 된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끼고 도니 마치 거대한 바위군에 포위된 형국이다. 정면에서 하늘을 찌를 듯 30m 높이로 솟아오른 바위가 바로 칼바위다. 칼바위를 호위하는 암봉들의 위용도 못지않다. 보는 이를 압도하며 수직으로 일어선 바위에는 잡은 것도, 디딜 자리도 없으니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되돌아나와 바위 왼쪽으로 돌면 일부러 뚫어낸 듯한 바위터널이다. 터널을 통과하면 더 압도적인 광경을 만난다.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칼바위는 이름 그대로 시퍼렇게 날이 서 있고, 그 옆으로 지느러미 형상의 바위가 펼쳐져 있다. 칼바위의 수직벽 안쪽에는 마애불의 흔적이 희미하다. 햇살이 비껴 드는 오전 나절이면 그 형상이 또렷해진다는데 도저히 인간이 새겼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단애에 그려져 있다. 전해 오기로 원효대사라는 이도 있고 부처를 새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능선까지 더 오르면 지나온 칼바위 암봉군이 내려다보이는데, 그 경관이 사뭇 다르다. 지나온 바위와 내려다보는 바위가 똑같은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능선에서는 득량 앞바다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용추폭포 쪽으로 하산하게 되는데, 그 길끝에서 만나는 용추폭포가 또 ‘물건’이다. 협곡의 바위 사이로 여러 갈래의 실폭포가 한 타래로 묶여 쏟아지는데 그 깊고 비밀스러운 느낌이 마치 무협지 속 배경을 방불케 한다.

# 득량에서 만나는 옛 마을과 오래된 풍경

오봉산 아래에는 너른 득량의 들판이 있다. ‘얻을 득(得)’에 ‘식량 량(糧)’, 희한하게 그 이름대로 일제강점기이던 1937년에 제방을 막아 이룬 논이 바다처럼 펼쳐진 곳이다. 방조제 끝의 바다에는 뜨거운 여름을 쉬고 이제 막 갯일을 시작한 아낙네들이 뻘배를 끌고 먼 갯벌까지 들어가 꼬막을 잡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뒤로 돌면 너른 논 뒤편의 마을에 구름이 척척 내걸린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득량만을 찾았다면 강골마을을 들르지 않을 수 없다. 고색창연한 한옥과 푸른 이끼로 어둑한 돌담, 바람에 쏴아 하는 소리를 내는 대숲과 수백 년을 자란 굵은 소나무를 두루 거느리고 있는 마을이다. 방조제가 놓이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다가 넘실거려 ‘강골(江谷)’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광주 이씨들의 집성촌인 강골마을은 400여 년에 걸친 시간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오롯이 남아 있다. 고색창연한 한옥부터 시멘트 기와를 얹은 광복 전후의 집과 1970년대쯤 슬레이트로 지붕을 새로 얹은 집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강골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은 바로 마을 뒤쪽의 어둑한 숲길 끝에서 만나는 정자 열화정이다. 뒤로는 대숲과 동백숲을 배경으로 삼고, 앞으로는 아름드리 팽나무와 동백나무를 끼고 있는 ㄱ자형 연못을 두고 서 있다. 누정의 난간은 누구라도 오를 수 있다. 가장 황홀한 건 거기에서 앉아 듣는 빗소리다. 초록의 기운 사이로 부는 소슬한 가을바람 속에서 정자에 앉으면 저절로 시 한 수가 읊어질 법하다.

득량만 일대에서는 마을 어귀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툭 불거진 눈의 해평리석장승도 만날 수 있다. 석장승은 본래 오봉산 기슭의 개흥사 입구를 지키던 사찰장승이었다는데 절이 폐찰되면서 마을 주민들이 여기로 옮겨온 것이다. 두 기의 장승에는 당장군과 주장군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데 도교에서 숭배하는 중국의 무장을 일컫는 것으로 액을 쫓는 역할을 한다고 전해진다.

득량만에는 바다를 끼고 있는 공룡알 화석산지도 있다. 공룡알 화석산지는 8500만 년 전의 초식공룡이 낳은 200여 개의 알이 발굴된 자리인데, 거기다 작은 공원을 마련해 공룡알 화석을 전시 해 놓고 있다. 이런 풍경들은 득량만의 바다를 끼고 가는 도로 위에서 다 만날 수 있다.

오봉산의 구들돌을 실어 내갔다는 득량역 앞은 1970년대 시간을 복원한 추억의 공간이 조성돼 있다. 아직도 손님을 받고 있는 옛 이발소부터 오래된 장난감으로 가득한 문구점, 촌티 나는 옛날 다방들이 서툰 손글씨 간판을 달고 늘어서 있다. 역에서는 여행자들에게 자전거도 무료로 대여해 주고 있어 자전거로 강골마을을 들러볼 수도 있고, 득량만방조제의 너른 논을 가르며 달려볼 수도 있다.


▲ 보성 오봉산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로 익산분기점까지 가서 익산∼포항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다시 완주분기점에서 완주∼순천 간 고속도에 오른다. 동순천나들목에서 다시 순천∼영암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벌교나들목으로 나가서 2번 국도 득량 방면으로 간다.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경우, 해평저수지를 입력하고 목적지에서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두고 이어진 도로를 타고 들어간다. 저수지 제방 쪽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도새등 쪽 등산로를 이용하면 오봉산의 능선을 길게 오를 수 있고, 좀 더 가서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쯤의 주차장에서 칼바위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도 있다. 어디서 시작하든 칼바위는 만날 수 있고, 능선을 타고 가다 용추폭포 쪽으로 내려서면 출발지점으로 내려올 수 있다. 칼바위에서 용추폭포까지는 2시간 남짓. 도새등에서는 이보다 1시간쯤 더 잡아야 한다. 오봉산의 전체 능선을 종주하는 8시간 산행 코스도 있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강골마을의 한옥민박이 가장 추천할 만한 숙소. 강골마을에서 아치실댁(061-853-2885)이나 덕음댁(061-853-2885)의 민박이 특히 인기 있다. 전통마을의 인심과 정취를 즐기며 운치 있는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보성읍의 보성관광모텔(061-853-7474)은 한국관광공사 지정 우수숙박시설인 ‘굿스테이’ 가맹점이다. 율포해변의 보성다비치콘도(061-850-1100)도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숙소다.

보성은 녹차를 먹여 키운 돼지인 ‘보성녹돈’이 유명하다. 수도권 일대에도 공급되고 있는데 유명세를 노린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 보성에서는 진짜 녹돈 맛을 볼 수 있다. 근래 새로 단장한 보성 녹차골 오일시장 내의 보성녹돈 보성한우(061-853-3395)는 갓 잡은 진짜 녹돈을 내온다. 시장에는 편백나무로 짠 가구며 침구, 삼베옷, 강골마을 쌀눈엿 등 다양한 특산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잘 정돈된 매장이 있어 특산물 쇼핑을 위해 들러볼 만하다. 군청 앞의 수복식당(063-853-3032)은 4인 기준으로 차려지는 한정식을 비롯해 꼬막정식과 녹차떡갈비, 갈치백반 등을 낸다. 찬바람이 불면 제맛을 내는 꼬막은 지금은 제철이 아니지만 갓 삶아내는 참꼬막의 맛은 훌륭하다. 한길로회관(063-852-3281)은 저렴한 가격에 남도식 백반을 낸다. 죽순을 넣어 끓인 우렁탕을 내는 벌교우렁집(063-857-7613)도 지역 주민들이 손꼽는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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