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땅에서 봄이 그려보이는 풍경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것을 들라면 망설임없이 ‘안개’와 ‘신록’을 꼽겠습니다. 봄날의 이른 아침, 남도의 들판과 산자락을 이불처럼 덮는 봄 안개는 아찔한 ‘몽환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여기다가 저마다 채도가 다른 연둣빛 이파리를 달고 반짝이는 신록의 숲이 보여주는 아름다움도 그 못지않습니다. 딱 지금입니다. 전남 함평을 찾아가면 그 둘을 다 볼 수 있습니다. 불갑산의 능선에 서면 이른 새벽 봄 안개가 첩첩이 이어진 구릉사이를 파도처럼 넘실거리다 함평 들판으로 흘러가는 모습과 만납니다. 막 떠오른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안개가 마을과 들판 위로 번져가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언제든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을 주민들은 요즘 같은 봄날이라면 적어도 8할의 확률로 이런 풍경 앞에 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갑산의 서쪽 산허리를 감아도는 임도에서는 활엽수들이 만들어내는 신록의 바다를 만났습니다.이즈음의 신록이야 어디든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부드럽게 굽이치는 U자형의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불갑산의 신록은 그 질감이며 채도가 으뜸이었습니다. 임도 끝에 차를 세워두고 터덜터덜 그 길을 걷는 두 시간쯤의 시간 내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면 그때의 감동이 혹 짐작이 되실는지요. 함평에서는 신록의 수목들이 제 그림자를 고요한 수면 위에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내고 있는 물가를 달리기도 했고, 한 해 단 한 번만 여린 찻잎을 따낸다는 소박한 다원을 찾아 막 덖어낸 찻잎으로 달인 차를 앞에 놓기도 했습니다. 함평항에서는 그 흔한 어선 한 척없이 그저 삽 한 자루 들고 낙지잡이 따위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의 등 뒤로 붉은 해가 온 하늘을 벌겋게 달구며 떨어지는 낙조의 풍경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함평으로 떠난 봄날의 여정. 때마침 함평은 ‘나비축제’로 북적였지만, 이런 황홀한 봄날의 풍경 앞에서는 나비 따위는 잊어도 괜찮았습니다. # 봄 안개에 휘감긴 함평들판이 보여주는 몽환의 풍경 요즘같은 봄날의 이른 새벽에 전남 함평의 불갑산 연실봉 능선에 오르면 말 그대로 ‘몽환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봄이면 함평의 너른 들판은 새벽마다 온통 안개로 휘감긴다. 낮은 안개가 깔린 함평의 너른 들판 뒤로는 첩첩이 이어진 산자락의 그림자가 수묵화처럼 번지면서 정취를 보탠다. 새벽에 연실봉을 오르다 만난 산 아래 마을 주민은 “봄이면 열흘 중 여드레쯤은 이렇게 산 아래쪽에 안개가 넘실거린다”고 했으니, 그의 말대로라면 운이 아주 없다면 모를까, 새벽에 불갑산에 오른다면 웬만해서는 안개로 가득한 함평들판의 몽환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셈이다. 봄 안개는 산 아래 함평들판에 고여 출렁거리다가 햇살이 막 퍼지기 시작하면 이내 황금빛으로 물든다. 안개는 동네 어귀의 미루나무를 감고, 농가의 슬레이트 지붕을 덮고,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둑을 지나서 이제 막 이삭이 팬 보리밭의 이랑 사이로 흘러간다. 아침 햇살이 비껴드는 저 아래 마을에서는 이제 막 잠을 털어낸 순한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며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으리라. 누구든 봄날의 아침에 이 자리에 서서 함평들판을 굽어보게 된다면 ‘사람 사는 마을’이 빚어내는 봄날의 풍경이 이렇듯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전남 함평과 영광의 경계에 솟은 불갑산은 함평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그래봐야 해발 516m에 불과하다. 해발 1000m를 훌쩍 넘는 이름난 산과 비교한다면 그 크기며 위세가 어림도 없다. 그러나 높이란 상대적인 것. 불갑산은 더 낮은 산들을 거느리며 함평의 들판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아래 너른 들을 다 내려다보고 있다. 불갑산의 연실봉 능선은 일망무제의 시야를 선사하지만, 높이가 주는 위압은 없다. 능선 끝의 주봉인 연실봉에서도 그렇다. 까마득한 높이는 때로 그 아래 세상을 평면의 2차원으로 만들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딱 이 정도 높이의 시선에서는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이는 봄날의 들판과 마을은 선명한 ‘입체’다. 함평들판의 푸근함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 딱 저공 비행쯤의 높이와 거리에서 함평들판을 바라보는 최고의 자리가 불갑산의 능선에 있다.
# 연초록의 신록을 즐기는 최고의 길 불갑산에 ‘밖을 보는’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에 들어 ‘안’을 바라보는 맛도 이에 못지않다. 연초록의 신록이 아름다운 게 어디 이곳뿐이랴만, 불갑산은 타원형의 U자형으로 굽은 능선이 이어지기 때문인지 부드러운 산자락에 가득한 활엽수의 신록이 유독 더 아름답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능선에는 활엽수들이 저마다 다른 채도로 반짝이는 새 잎을 달고 온통 초록의 바다를 만들어내고 있다. 순하고 여린 잎들이 그려내는 연초록은 마치 도화지에 번진 수채화 물감의 색감처럼 서정적이다. 이런 불갑산의 신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길이 이 산의 서남쪽 허리쯤에 있다. 함평군 해보면 소재지에서 신광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가다 금계저수지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비포장 임도가 바로 그 길이다. 금계리에서 용천사 입구로 이어지는 이 길이야말로 불갑산의 반짝이는 신록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가히 최고의 길이다. 능선마다 신록으로 물든 활엽수들은 물론이고 진초록의 우람한 삼나무까지 합세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수많은 초록의 조각포를 이어붙인 것같은 숲들이 펼쳐진다. 신록의 숲 아래로는 현호색과 노랑괴불주머니, 제비꽃, 애기똥풀 같은 야생화들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피어났다. 길가에는 꽃이 진 민들레 꽃대의 홀씨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4㎞ 남짓한 이 길을 걷다보면 마치 신록으로 샤워를 하는 듯하다. 몸은 몰론이고 마음까지도 초록으로 물들 것만 같다. 금계리쪽의 임도 부근은 개인사유지로 ‘생태조사를 위해 출입을 제한한다’는 팻말을 붙여놓긴 했지만, 휴양림 개발을 앞두고 무분별한 나물채취 등을 막기 위한 것이라니 그저 걷기 위한 목적이라면 무슨 문제가 될까 싶다. 그래도 출입제한의 문구에 마음이 좀 쓰인다 싶으면, 거꾸로 용천사쪽에서 출발해 금계리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도 방법이 되겠다. 용천사쪽에서 출발하면 임도 길을 얼추 다 걷고 나서야 출입제한 팻말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 천년고찰을 잇는 숲길을 따라 걷다 불갑산의 북쪽에는 전남 영광의 절집 불갑사가 깃들여 있고, 산 남쪽 함평 땅에는 용천사가 앉아있다. 불갑사와 용천사는 백제 때 우리 땅으로 건너와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이른바 ‘천년고찰’이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불법을 들고 법성포에 당도했던 마라난타는 모악산 아래에다 ‘모든 불사(佛寺)의 시원이요 으뜸(甲)이 된다’는 뜻에서 ‘불갑(佛甲)’이란 이름을 붙인 절집을 지었다. 절집의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던지 뒤편의 산은 이름까지 ‘불갑산’이 됐고, 애초의 이름이었던 모악산은 불갑산에 딸린 자그마한 산자락의 이름으로 옮겨 앉게 됐을 정도였다. 마라난타는 이어 불갑산 너머에다 용천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불갑사와 용천사는 불갑산과 모악산을 잇는 능선의 낮은 목을 타고 넘는 고갯길 구수재로 이어져 있다. 순천의 송광사와 선암사를 잇는 ‘굴목이재’처럼 순하디 순한 이 길로 천년 고찰의 두 절집의 스님들이 오고갔을 터다. 1400여년의 시간이 잠긴 이야기들은 지금 자취도 없지만, 고갯길을 넘나들던 두 절집의 스님들이 함께 차를 나누거나 불법을 토론했으리란 것쯤이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잘 정비된 탐방로로 이어져 있지만, 이곳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했던 깊은 산중이었다. 실제로 1908년 불갑산 산중에서 농부가 놓은 덫에 호랑이가 잡히기도 했다. 잡힌 호랑이는 일본인에게 논 50마지기 값인 200원에 팔려 박제로 만들어져 목포의 유달초교에 기증됐다.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불갑산 호랑이는 남한지역에서 잡힌 호랑이의 유일한 박제표본이다. 두 절집을 잇는 고갯길을 넘어가겠다면 용천사에서 출발해서 불갑사에 당도하는 코스를 택하는 편이 낫겠다. 용천사 대웅전 뒤편 오솔길에서 20분 남짓 비탈길을 올라 능선에 당도하면 이내 불갑사까지 길고 부드러운 길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신록의 숲 속에서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이 길은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다리 쉼을 하고 걷는다 해도 용천사에서 불갑사까지는 1시간20분쯤이면 넉넉하다. # 진초록 신록이 수면 위에 선명하게 찍히다 논농사가 대부분인 함평에는 너른 들에 물을 대는 저수지들이 곳곳에 있다. 신록의 연둣빛이 수면 위로 데칼코마니처럼 찍히는 모습은 봄에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함평의 저수지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품고 있는 곳은 두말할 것없이 대동댐이다. 함평에는 대동저수지와 대동댐이 따로 있어 자칫 헷갈리기 쉽다. 대동저수지도 생태공원이 들어섰을 만큼 운치가 넘치지만, 생태경관 보전지역이자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대동댐의 손대지 않은 풍광에다 대면 어림도 없다. 대동댐은 애초에 목포시 상수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목포시가 새로운 상수원을 개발하면서 대동댐의 물은 함평주민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함평 주민의 80%가 이 물을 먹고 있다. 상수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댐이라 물가는 물론이고 일대 마을까지도 개발이 제한됐다. 게다가 인근 고산봉 일대가 붉은박쥐 서식지로 확인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댐 인근은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철저하게 생태를 보호하고 있다. 저수지가 무어 볼 게 있을까 싶겠지만, 신록이 고요하게 찍히는 물가에 찾아가 보면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대동댐에서는 수달의 자맥질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맑은 물과 신록이 어우러지는 그림엽서 같은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상수원으로 사용되는 물이니 물 맑기야 더 말할 것이 없고, 수변에 조성된 습지에 이제 막 새 잎을 내고 있는 버드나무 군락도 운치가 넘친다. 농업용수로 사용할 물을 담고 있는 대부분의 저수지들이 모내기가 시작되면 일제히 가뒀던 물을 흘려보내 물빠진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대동댐은 봄이 깊어갈수록 정취는 더해진다. 대동면 연암리에서 서호리를 지나서 전남야구장까지 이어지는 수변도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수암공원의 철새전망대가 대동댐의 정취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다. 물 건너 원시림의 숲이 그려내는 연초록의 신록이 맑은 수면에 드리우는 모습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찾은 보람은 충분하다. # 한 해에 한 번 따낸 찻잎으로 끓인 차 한잔 대동댐을 끼고 있는 서호리에서 산자락 아래로 난 외길을 따라가면 200년된 회화나무가 가지를 뒤틀며 서있는 호정마을이 있다. 마치 시간의 태엽을 되돌린 듯 오래 전 시골마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이 마을의 끝과 산자락이 맞붙은 곳에는 다원이 있다. 이름하여 ‘부루다원’이다. 산중의 계곡 사이에 들어선 차밭은 보성이나 하동의 차밭과는 사뭇 다르다. 보성의 차밭이 똑같은 높이와 폭으로 가지를 잘라내 잘 정돈해 놓았다면 이곳의 차나무는 줄을 맞춰 심어져 있긴 하되 가지를 자연스레 내버려두었다. 웃자란 가지를 쳐내기는 해도 ‘보기 좋게’ 만드는 데 방점을 두기보다는, 차나무가 자라기 좋도록 놓아두는 것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른바 기업형 차밭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다원에서는 지금 한창 여린 찻잎을 따고 있다. 다른 지역의 차밭들이 이른바 ‘우전’이란 첫물차를 따낸 뒤에 곧이어 세작이니 중작이니 하는 찻잎을 따내지만, 이곳 부루다원에서는 1년에 단 한 차례만 차를 따낸다. 당장의 돈을 생각한다면 몇번이고 찻잎을 따겠지만, 차나무를 자연 그대로 건강하게 키워내기 위한 배려 때문이다. 부루다원에는 보성이나 하동의 차밭처럼 잘 꾸며놓은 다실이나 다른 편의시설이 전혀 없고, 다원의 주인도 그런 시설을 들일 생각도 전혀 없지만, 새순을 낸 찻잎을 따고 그 찻잎을 정성껏 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원에서는 외부인들에게 차를 팔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차 맛을 아는 이들이 찾아가면 기꺼이 손수 덖은 차를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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