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아픔의 역사를 희망으로 :충남공주"

醉月 2012. 6. 2. 12:45

충남 공주의 공산성은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쫓겨온 곳이기도 하고, 나당연합군에 패퇴한 의자왕이 항복 직전에 사비성을 탈출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공주에 당도한다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짙푸른 그늘을 드리운 성곽을 따라 역사의 자취를 딛으며 공산성의 성곽을 한 바퀴 도는 것은 필수다.

씻을 수 없는 치욕. 그때 백제는 망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고구려의 기습으로 성은 함락됐고 백제 개로왕은 적장이 세 번 뱉은 침을 얼굴에 맞고 아차산성 아래서 비참하게 목이 베이고 맙니다. 순식간에 왕과 도읍을 잃은 백제 사람들이 떠밀려 내려와 자리를 잡았던 곳.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고 당도했던 땅이 바로 이곳 충남 공주입니다.

공주에서의 치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180여 년 뒤 백제는 이곳 공주에서 패망의 시간을 맞습니다. 나당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패퇴를 거듭하던 멸망의 순간. 의자왕은 마지막 순간에 아들과 함께 이곳 공주로 몸을 피합니다. 결국 항복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의 전승축하연에서 이들에게 술잔을 올리는 더할 수 없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이후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려 때 거란족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나주로 피신하면서 이곳 공주에서 6일을 머뭅니다. 조선 인조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와 6일을 머뭅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조선왕조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던 때. 명성황후가 공주의 계룡산 자락 절집 뒤편 산신각에서 구국과 국태민안을 서원하는 기도를 올린 게 그 길고 긴 치욕과 패배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공주가 겪어 온 시간은 치욕과 패배입니다. 그러나 패배와 치욕의 시간이 있었다면 뒷날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절치부심, 혹은 간절한 기원이나 위무의 시간이 있었을 것임은 자명합니다. 공주에서는 그 시간들을 만날 수 있답니다. 금강의 유장한 물줄기를 끼고 있는 공산성에서, 무령왕릉에서, 수촌리 유적에서, 정지산 유적에서 그것들을 봅니다. 그 유적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 수천 점의 진품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공주박물관에서 1600여 년 전 백제가 치욕을 딛고 이룬 것들을 봅니다.

이맘때 공주는 백제를 뺀다 해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계룡산 자락의 절집들은 온통 짙푸른 숲으로 가득합니다. 신록이 녹음으로 바뀌어 가는 봄의 한복판에 신원사며 동학사, 갑사, 그리고 마곡사에는 지금 저마다 간절한 기원이 연등으로 매달려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절집에는 기원과 기도가 가득합니다. 사실 기도라는 것도 이긴 자의 것보다 진 자의 것이 더 절실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소망이 밝히는 연등의 불빛이 저리도 환하겠지요. 백제가 공주 땅에 남겨 둔 것들처럼 말입니다.

신록이 녹음으로 번져 가는 이즈음 충남 공주의 마곡사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매단 환한 연등까지 합세해 한 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취를 빚어낸다. 숲의 초록으로 물든 개울을 건너 절집 뒤편의 고즈넉한 소나무 숲길을 걸어 보면 ‘춘(春)마곡’이란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박물관에서 1500년 전 왕비의 사랑니를 보다

충남 공주를 갔다면 열 일을 제쳐 두고 가장 먼저 공주국립박물관부터 찾을 일이다. 거기에서 적장이 세 번 뱉은 침을 얼굴에 맞고 아차산성 아래서 참수당했던 개로왕의 치욕을 딛고서 마치 기적처럼 살아난 백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주로 도읍을 옮길 무렵 백제의 형편을 보자. 그때 백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한때 평양성과 중국 본토까지 점령했던 영광은 ‘흘러간 추억’이었다. 쇠락한 백제는 기습공격을 해온 고구려에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다. 순식간에 수도를 빼앗기고 왕이 치욕적인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쫓겨가 당도한 곳이 바로 공주였다.

패전과 왕의 죽음으로 시작된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왕의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이어 즉위한 삼근왕도 허수아비 노릇을 하다가 고작 열다섯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동성왕 역시 쿠데타로 죽임을 당했다. 백제는 치욕과 혼란 속에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대로 백제가 무너지고 말았다면 공주는 아마도 음울한 비극의 땅으로 기억됐을 터다. ‘애잔함’과는 거리가 먼 피비린내 나는 암투 따위로나 기억될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살아났다. 그것도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절망의 나락에서 백제를 일으켜 세운 이가 바로 무령왕이다. 그는 허물어져 가는 백제를 추슬러 아들 성왕이 부여로 천도해 중흥을 이루는 기틀을 마련했다. 공주에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그 무령왕 때의 것들이다.

1971년 여름, 고분 배수로 공사 중 현장 인부의 삽날 끝에 벽돌이 부딪치면서 시작된 무령왕릉 발굴. 단 하루 만에 끝내 버린 최악의 발굴이었지만, 왕릉에서 유물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발굴된 유물들이 지금 공주박물관에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전시품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관장식. 금을 두드려 얇은 불꽃 모양으로 만든 뒤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무령왕의 관장식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저편에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화려하다. ‘백제 미술의 진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관장식 앞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귀걸이나 목걸이의 정교한 세공 솜씨도 탄성을 자아내지만, 발길을 딱 붙잡는 또 하나의 유물이 있으니 바로 왕비의 사랑니다. 무령왕이 사망한 2년쯤 뒤에 세상을 뜬 왕비의 사랑니는 무려 1500년의 시간 저편에 살았던 왕비의 것이다. 그 앞에서는 역사책의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인물들이 비로소 숨을 쉬는 인간으로 받아들여진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공주에서는 여행의 첫머리와 여정 말미에 공주박물관을 들러 보길 권한다. 처음 봤던 때와 여정을 마친 뒤의 유물은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이리라.

# 빈 시간과 공간에 맞춰 나가는 흥미진진한 퍼즐

공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의 화려한 관장식.

내친김에 백제의 시간을 더 따라가 보겠다면 두 군데를 더 꼽을 수 있다. 하나가 공주읍 북쪽의 의당면 수촌리 고분군이고 다른 한 곳이 공주읍내의 정지산 유적이다. 사실 이 두 곳에는 ‘볼거리’가 없다. 멋진 풍광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아예 ‘봐야 할 대상’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수촌리 고분군은 너른 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봉긋하게 솟은 예닐곱 개의 무덤이 고작이다. 정지산 유적을 찾아간대도 흙을 북돋아 세운 자리에 어떠어떠한 건물이 있었을 것이란 안내현판이 전부다. 찾는 이들이 별로 없으니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다. 그러니 모처럼의 나들이 길에 나선 이들에게 무작정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두 곳에서는 여전히 수수께끼 속에 갇혀 있는 고대국가의 시간을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잠겨 있다. 수촌리에서 발견된 고분군은 백제의 급작스러운 공주로의 수도이전을 설명해줄 열쇠를 쥐고 있다. 고분에서는 금동관과 장신구, 칼, 중국에서 수입한 자기들이 발굴됐다. 무덤의 주인은 지역을 호령하던 호족이었다. 이 정도의 호화로운 무덤을 조성할 정도라면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백제가 공주로 내려간 것은 이런 호족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겠다. 그 연결고리가 수촌리 고분군에서 시작된다. 시간이 지워 버린 퍼즐이 하나 둘씩 꺼내져 맞춰져 가는 모습, 그런 모습을 수촌리 고분군에서 엿볼 수 있다.

정지산 유적은 한복판에 있다. 도로를 개설하려다가 이 산의 어깨쯤에서 토기와 독특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됐다. 제사를 지내던 유적지였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에는 무령왕이 죽은 지 2년 뒤에 안장됐고, 무령왕비가 사망한 지 3년 뒤에 합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사망 후 안장되기까지 2~3년의 빈 시간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지산의 유적 발굴이 그 질문에 해답을 줬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2년여 동안 이곳에 안치하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란 게 고고학자들의 추론이다. 정지산에서는 유적 자체보다 이런 유적을 통해 역사의 질문을 풀어가는 고고학자들의 추론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수촌리와 정지산 유적들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고고학이 복원해 간 이야기들을 마음으로 느끼며 따라가는 여정이다.

# 공산성을 딛고 올라 몸집을 불린 금강을 굽어보다

공주의 박물관 밖에서 만나는 유적은 무령왕릉과 함께 공산성이 꼽힌다. 공주(웅진)시대의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무령왕릉을 아무런 관심 없이 눈으로만 보겠다면 싱겁기 짝이 없다. 이쯤에서 상상력이 필요하다. 고대사의 암흑 속에 갇혀 있다가 1500여 년 만에 깨어난 백제시대의 유물, 그리고 그 유물을 발견한 학자들의 흥분을 상상해 본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공주 한복판의 공산성도 공주 역사의 아이콘 중 하나다. 산성에는 백제부터 출발한 역사가 조선에 이르기까지 첩첩이 겹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성이 앉은 자리가 적의 공세를 막아내기에 최적의 입지다. 개로왕이 치욕적인 죽임을 당했다는 트라우마를 가진 백제인들은 공주로 옮겨온 이후 한쪽 사면은 금강을 끼고, 다른 쪽 사면은 깎아지른 벼랑으로 막아선 지금의 산성 자리에 단단한 방벽을 세울 생각부터 했을 게 틀림없겠다.

대부분 공주를 찾은 이들은 공산성을 찾고,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정문 격인 금서루 일대만 돌아보고 간다. 하지만 아름드리 거목들이 사이로 난 성곽을 따라 2.6㎞ 남짓한 성을 한 바퀴 도는 산책이야말로 공주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진남루와 공북루, 동문지와 서문지를 다리 쉼하면서 다 돌아본대도 1시간쯤이면 넉넉하다. 마침 성곽 주변에 아름드리 나무의 이파리들은 신록에서 녹음으로 짙어져 가고 있다.

공산성의 석성 구간에서는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름난 관광지의 옛 성들은 대부분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거나, 위험하다는 등의 이유로 석성 안쪽으로 길을 내놓고 성곽에 오르지 못하게 하지만, 공산성은 탁 트인 시야를 즐기며 성곽을 디딜 수 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을 오르내리면서 걷는 맛은 숲길이나 마을길을 걷는 느낌과는 또 다르다.

# 공주에서 만나는 맑은 절집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있지 않다고 해도 이름난 사찰을 두루 거느리고 있는 공주에서는 절집을 안 들를 수 없는 일이다. 공주 쪽 계룡산에는 동학사와 갑사가 있고, 태화산 아래는 마곡사도 있지만, 이 중 단 한 곳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신원사를 들 수 있다.

신원사는 계룡산 자락에 있지만, 그닥 알려진 절집은 아니다. 규모도 그렇거니와 이름나기로도 동학사와 갑사, 마곡사 같은 절집의 명성에다 대면 어림도 없다. 대신 신원사는 더없이 고즈넉하다. 절집 아래에는 버스 종점과 허름한 점방이 있고, 절집 아랫마을 사하촌도 수십 년 전 모습 그대로다. 절집은 두세 아름이 넘는 둥치의 거목 벚나무들이 당당하게 서 있다. 널찍널찍 분방하게 들어선 건물들과 함께 아름드리 배롱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시간과 함께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조경돼 있다.

신원사 경내 한쪽에는 솟을대문을 두고 있는 한옥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 계룡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중악단이다. 조선시대에 묘향산과 계룡산, 지리산에다 각각 상악단과 중악단, 하악단을 두고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 명성황후가 이곳을 방문해 기원을 올리기도 했다.

중악단에서 계룡산 연천봉 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짚어 오르면 소림원과 긍룡암, 보광암 등을 지나 산내암자 고왕암에 이른다. 고왕암은 의자왕의 아들 융이 나당연합군에 쫓기다가 붙잡혔다는 곳에 세워진 암자. 암자의 자그마한 전각인 ‘백왕전’에는 백제 31대 왕의 이름과 의자왕의 아들 융, 풍의 이름과 함께 융이 타고 다니던 말인 충마(忠馬), 그리고 백제유민을 모신 위패가 있다. 나당연합군에 쫓기던 융이 고왕암 위 쪽 낭떠러지까지 와서 붙잡히는 보곤 말이 스스로 낭떠러지에 몸을 던졌다고 해서 ‘충마’란 이름을 위패에 새겼다.

계룡산 자락의 갑사 정취도 좋다. 갑사는 계곡의 단풍잎이 붉게 물드는 가을의 정취를 으뜸으로 친다지만, 봄날 초록으로 물드는 산문 부근의 오리(五里) 숲길도 좋고, 갑사계곡의 물소리와 푸르름도 빼어나다. 계곡 위 바위에는 이곳저곳에 석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은천(銀川)’이란 각자가 뚜렷하다.

갑사를 말사로 거느린 마곡사도 빼놓을 수 없겠다. 물길을 끼고 있는 짙푸른 계곡의 숲길을 걸어 들어가 만나는 마곡사는 이즈음의 정취가 가장 빼어나 ‘춘(春)마곡’이란 말이 꼭 들어맞는다. 사천왕문과 돌다리 부근에 연등을 화려하게 매달아 놓았는데 형형색색의 연등이 절집 풍경과 이리도 잘 어울릴 수 없다. 마곡사에서는 또 대웅전 뒤편 고즈넉한 솔숲길을,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함께 걷는 맛을 빼놓을 수 없겠다.



공주 가는 길 = 공주에서는 공산성을 기점으로 움직이는 게 편하다. 경부고속도로 천안분기점에서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당진~상주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공주나들목으로 나온다. 이어 공주IC교차로에서 계룡산, 공주 방면으로 우회전해 정안천을 따라가다 생명과학고 교차로에서 좌회전, 전막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이다. 공산성과 무령왕릉, 공주박물관은 도보여행을 겸해 돌아볼 수 있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여럿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공주박물관 인근의 공주한옥마을(041-840-2763)이 위치나 시설 면에서 최고의 숙소다. 단체숙박동 6동에 37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8명 기준 객실 숙박료는 8만 원 안팎으로 저렴한 편. 3~4인이 이용할 수 있는 소형 한옥과 초가집도 짓고 있다.

단지 내에 식당과 편의점 등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다.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공주에는 의외로 먹거리들이 많다. 연유를 알 수 없지만 칼국수로도 유명하고, 공주국밥도 제법 이름이 났다.

칼국수는 육수에 끓여 먹는 방식으로 내놓는데 초당칼국수(041-856-4331) 등이 유명하다. 공주국밥은 새이학가든(041-854-2030)이 알려진 맛집이다. 짬뽕 메뉴만 갖추고 있는 동해원(041-852-3624)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 돼지고기와 오징어, 배추 등을 썰어 넣어 진하게 끓여낸 국물 맛이 뛰어나다.

가정집을 개조한 가게는 허름하지만 손님들이 넘쳐나 식사 때가 아니더라도 기다려야 하는 게 보통. 이런 식당들은 대부분 불친절하기 마련이지만, 의외로 종업원들이 친절하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한옥마을에 숙박한다면 한정식을 내는 금강관(041-857-6700)을 들르는 것은 필수. 깔끔한 맛의 한정식을 내온다.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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