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정한 원시림의 깊고 짙은 숲길을 걷는다 배낭 끝에 지렁이통 담은 비닐봉지 하나 달랑달랑 달고 숲길을 걷는다. 강원 영월의 고지기재를 막 넘어섰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필봉(48) 씨. 전화기 저 끝에서 초면의 그가 말했다. “지렁이 한 통만 사가지고 오세요. 여기 오면 먹을 것도 없는데 밤에 산메기나 잡아서 매운탕이나 해먹지요, 머.” 애초에 지난해 가을쯤 찾아가려던 길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렸다. 마침 송이를 캐는 철, 그는 산중에 들었다가 자칫 송이도둑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집으로 이어지는 긴 숲길이 산림휴식년제 구간이라 그게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단풍이 참말로 멋지게 들었다’며 아쉬워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 년쯤을 기다리다 그의 집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오지 중의 오지. 그는 ‘혹 산중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며 ‘절대로 계곡을 건너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두 뼘이 채 못되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야말로 청정의 숲길. 길 옆으로 바닥이 훤히 비치는 맑디맑은 계곡이 따라온다. 산중에서 홀아비새와 소쩍새가 교대로 울었다. 계곡으로 내려서 돌길을 딛기도 하고, 켜켜이 쌓인 낙엽들로 폭신한 숲길을 딛기도 했다. 베틀바위와 기도바위, 거북바위를 지나고 딸각소와 최장군소를 지나서 돌고개와 살짝고개를 넘어가는 길에서 연방 탄성이 터져나왔다. 길섶에는 늦은 봄의 야생화들이 흐드러졌다. 노란 애기똥풀은 지천이고 노랑괴불주머니도 이제야 피었다. 분홍색 꽃을 종처럼 매단 금낭화도 간간이 마중을 나왔다. 코끝에는 달큰한 흰 찔레꽃 향기가 스쳤다. 바닥에 모가지째 우수수 떨어진 작고 흰 꽃잎. 문득 고개를 드니 쪽동백나무도 가지 가득히 이른 꽃을 피워냈다. 이렇게 초록의 빛깔과 물소리, 새소리의 한가운데로 난 길을 걷는다. 이런 길을 꼬박 1시간30분쯤은 걸어 들어가야 그의 집이 있다. ‘늡다리’라고 했다. 강원 영월과 경북 봉화, 충북 단양을 가르는 삼도(三道)의 경계에 우뚝 서있는 어래산과 선달산의 북쪽 자락. 소백과 태백 사이로 흐르는 계곡 곁에 늡다리가 있다. 40여 년 전쯤 화전민이 골짜기마다 터를 잡고 살던 때 널빤지로 만든 ‘널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칠용동, 응애골, 무쇠점터, 늦은목이, 사기점터 등 근동의 화전민들이 이 다리를 건너서 춘양과 단양, 영월의 오일장을 보러다녔다. 영월군 김삿갓면 내리 409번지. 번듯한 주소가 있긴 하지만, 주소만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조차 없는 오지 중의 오지. 그곳에 김 씨의 집이 있다. 휴대전화는 불통인 데다 전기조차 안 들어오는 곳. 그는 자신의 집을 ‘꿈꾸는 유배지’라고 했다. 그 집에서 그는 올해로 16년째 유배의 삶을 살고 있다. 자발적으로…. # 생각은 명징해지고 마음은 순해지는 곳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치어 살다보면 가끔은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누구의 방해도 없는 깊은 오지로 들어가 다친 마음을 내려놓고 싶을 때. 문득 아귀다툼처럼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다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아니면 이리저리로 흩어지는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 찾아가야 할 곳이 바로 늡다리다. 자연이 원시의 모습 그대로 거기 있는 그곳에 가면 생각은 명징해지고 마음은 순해진다. 거기서 시간을 채근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시간30분의 거리만으로 사람 사는 마을과의 소통은 다 끊어지고 만다. 노상 만지작거리던 휴대전화는 길의 초입에서 먹통이 된 지 오래다. 늡다리를 찾아간다면 그의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거기에 가는 목적의 절반쯤을 이룰지도 모르겠다. 오감이 열리는 청정한 숲길에 올라 발이 미는 대로 걷다보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길이 깊은 산중으로 드는 길이긴 하지만, 헉헉거리며 제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비탈길이 아니라 딱 물길의 높이를 따라 오르는 순하디 순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 위에서 숨을 고르며 자신이 왜 이런 깊은 곳을 찾아들고 있는지, 무엇을 얻어가고 싶은지를 되새김하게 되리라. 아니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 끼어들 여지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초록의 산이 만든 협곡 속을 저 혼자 걸어 들어가다보면 구차한 말 따위나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 ‘무념무상’의 시간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늡다리가 끼고 있는 주위의 산과 숲이 자그마치 900만 평에 달한다. 그 가늠할 수 없는 넓은 숲 속에 딱 한 채, 그의 집이 있으니 거느린 정원이 900만 평인 셈이다. 집은 소박한 황토집이다. 애초에 갈대로 이었다가 슬레이트로 바꿔올린 지붕은 삭아서 이리저리 덧댔고, 벽채는 나무로 얼개를 잡고 황토를 이겨 발랐다.
도시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누추하기 짝이 없지만, 구들돌부터 문설주며 기둥까지 죄다 산 아래에서 일일이 지게로 날라다가 지어야 했으니 그 집에 깃든 정성만큼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김 씨는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단 하나도 제 발로 온 게 없다”고 했다. 흙과 돌을 빼고는 고행과도 같은 힘든 지게질로 하나하나 부려놓은 것들이다. 그렇게 지은 집이 제법 다부지다. 늡다리 유배지의 주인 김 씨는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고 있었다. 영락없이 사진 속에서나 보던 옛 화전민의 모습이다. 그는 마당의 작은 텃밭에 이것저것을 심어 길렀다. 밭은 잘 정돈돼 있지만 열무는 수확을 미뤄 꽃이 피어버렸고, 상추는 웃자랐다. 행여 손님이라도 오면 뽑아 반찬으로 쓸 요량으로 심은 것이라는데, 이 깊은 산중에 찾아드는 이가 없으니 심은 보람도 없다. 집주인 김 씨는 “4월 이후로 사람 만난 게 오늘이 처음”이라며 웃었다. 그렇다고 그가 늡다리의 문을 꼭꼭 닫아건 것은 아니었다. 계곡에서 고기 굽고 술판이나 벌이려는 이들은 추호도 들일 생각이 없지만, 고요하게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돌아가겠다고 오는 이들은 언제라도 대환영이다. 그렇지만 1시간30분을 걸어 들어와야 하는 수고 때문인지, 전기도 휴대전화도 안 되는 불편 때문인지 이곳을 찾는 이들은 드물다. 작년 한 해를 통틀어 김 씨 집을 찾아온 사람은 40명 남짓에 불과했다. # 전기가 없으니 욕심이 사라지다 늡다리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근래에 태양열 발전기를 놓고 전기를 만들어 발광다이오드(LED)등을 달아 최소한의 불은 밝히고 있지만, 두 해 전까지만 해도 파라핀을 녹여서 켜는 호롱불로만 생활했다.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지만 지금도 축전지를 아끼려 밤이면 호롱불을 켠다. 태양열 발전기의 출력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냉장고도 없다. 냉장고가 없다는 건 단지 음식을 저장할 수 없다는 뜻만은 아니다. 김씨는 저장이 불가능하니 욕심이 없어진다고 했다. 늡다리 일대에는 봄이면 나물이며 두릅이 지천이지만, 갓 따낸 두릅도 상온에서 하루 이상을 넘기기 어렵다. 그러니 나물을 캐거나 두릅을 따더라도 꼭 제 먹을 만큼만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열무의 여린 순을 넣고 끓인 된장국과 식은 밥으로 이른 저녁을 나눠 먹고 툇마루에 앉았다. 사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니 건너편 산자락의 소쩍새 울음이 더 커졌다. 숲을 스치고 가는 바람소리도 더 가까워졌다. 계곡물 소리도 저 홀로 깊어졌다. 김 씨가 비닐봉지에 담아 온 지렁이통과 낚싯대를 챙겼다. 손님이 오면 대접할 게 없는 그는 자그마한 낚싯대를 들고 계곡으로 내려가곤 한단다. 낚시로 잡아올리는 건 산메기라고 부르는 15㎝ 안팎의 토종메기. 산메기는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중에만 잡힌다. 불빛 하나 없는 밤중에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지렁이를 바늘에 꿰어 계곡으로 던졌다. 이내 후드득 낚싯대를 흔들며 산메기가 잡혀올라왔다. 넣으면 잡히고, 다시 넣으면 또 잡혔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낚싯대를 던져버렸다. 쉴 새 없이 메기가 잡히니 재미가 없어진 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밤하늘에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가득 별이 떴기 때문이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서 하늘을 보고 누워 쏟아지는 별빛을 오래도록 올려다봤다. # 원시의 숲속에 숨어 있는 칠룡폭포를 보다 이튿날 오전. 전날 밤 뜨끈한 아랫목이 더워 창호문을 열고 잠을 청했더니 새벽의 차갑고 청량한 기운에 잠을 깼다. 깊은 산중이라 오전 8시가 한참 넘어서야 해가 들었다. 김 씨가 채근했다. 보여줄 곳이 있다고 했다. 늡다리에서 물길을 건너 칠룡골 깊이 숨어 있는 칠룡폭포를 보러가는 길. 계곡 이쪽에서 저쪽까지 매어놓은 쇠줄에 도르래를 걸고서 날 듯이 계곡을 건넜다. 거기서부터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온통 이끼와 양치식물들의 군락이다. 전인미답의 원시림이 거기 있었다. 미끄러운 계곡의 돌을 밟고 30분쯤 올랐을까. 7, 8m 높이의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폭포 아래 물가에는 족히 1m는 될 법한 구렁이가 벗어놓은 허물이 옷처럼 남아 있었다. 올봄에는 비가 적어 물이 줄었다고 했지만, 폭포의 물줄기는 제법 힘찼다. 초록빛 그늘 아래서 폭포가 떨어져 이룬 맑은 소(沼)의 물을 김 씨가 스테인리스 컵으로 떴다. 산행을 앞두고 ‘물이라도 한 통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달랑 스테인리스 컵 하나만 챙기고는 ‘여기 계곡 물은 그냥 떠먹으면 된다’고 웃었던 터였다. 그가 계곡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물은 달고 시원했다. 양치식물들이 밀림을 이룬 길 곳곳에는 산짐승들의 자취가 있었다. 김 씨는 늡다리에 출몰하는 고라니는 헤아릴 수도 없고 멧돼지도 족히 스무 마리쯤 된다고 했다. 텃밭에 기껏 심어놓은 돼지감자를 산짐승들이 다 파헤쳐 먹는 것은 다반사. 툇마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소백에서 태백으로, 혹은 태백에서 소백으로 건너가는 멧돼지 일가족을 목격하는 것쯤은 흔한 일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계곡에서 수달의 푸른 안광을 만나서 소스라치듯 놀라기도 했고, 담비 일가족과 숲길에서 딱 마주친 적도 있다고 했다. 늡다리. 1980년대쯤에서 문명의 시간이 멈춰버린 곳. 폭포에서 내려와서 여장을 챙겼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니 서둘러야 했다. 여기서 사람 사는 마을까지 또 1시간30분을 걸어내려가야 한다. 발걸음이 못내 아쉬웠다. 알음알음 늡다리를 찾아왔던 이들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김 씨의 집 툇마루 기둥에 걸어놓은 방명록에 그런 아쉬움들이 짙게 남아 있었다. 누구는 ‘꿈을 하루밖에 꾸지 못하고, 유배되지 못한 것을 한하노라’는 글을 남겼고 ‘이곳에서 육체와 정신의 화해를 봤다’고 적어놓은 이도 있었다. 또 다른 이는 이곳 늡다리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깊은 곳, 아픔까지 두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썼고, ‘쉽게 오지 못하지만 오래 머물러야 하는 곳’이라고 정의해놓은 글귀도 눈에 띄었다. 방명록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김씨의 배웅을 받으며 저무는 숲길을 걸어내려갔다. 몸은 멀어지고 있었지만, 곧 돌아오고 싶었다. 늡다리를 단 한 번이라도 찾았던 이들이라면 모두들 그럴 것이었다.
‘꿈꾸는 유배지’ 주인 김필봉 씨 처음 김필봉(48) 씨가 늡다리의 땅을 사들이고 거기에 집을 짓겠다고 했을 때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은 다들 ‘미쳤다’고 했다. 계곡 입구에 구들장을 한 트럭 부려놓고 그걸 지게로 지고 올라가 구들을 놓겠다고 했을 때는 마을 주민들이 진짜 미친놈 대하듯 했다고 했다. 주민들의 생각대로 어쩌면 그는 정말 미쳤는지도 모른다. 구들장이며 기둥이며, 온갖 건축자재를 얹은 지게의 무게로 후들후들 다리를 떨며 끝내 집을 지어냈으니…. 그리고 거기서 그는 올해로 16년째 살고 있다. 그는 왜 찻길도 없고, 전기도 없고, 몇 달씩 사람 구경도 못하는 오지 중의 오지 ‘늡다리’를 거처로 삼은 것일까. 그 질문에 그는 “그저 좋아서 그랬다”며 간명하게 답했다. 그가 늡다리를 택한 것은 ‘길’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늡다리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가 길에 쓰러져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고 했다. 이렇듯 궁벽한 산중에 들어온 이유가 어찌 그것뿐일까 싶어 이리저리 떠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되묻고, 돌려 물어도 그저 그 이유뿐이었다. 그는 전남 여수에서 배를 타고 2시간쯤을 더 가야 하는 작은 섬 소리도가 고향이다. 가난한 낙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는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 길에서 지리산 노고단에 올랐다가 그만 산에 반해 버렸다. 운해에 휩싸인 지리산에서 그는 고향 바다를 보았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는 산악부에 들어가 수많은 산을 오르내렸다. 평생 산을 오르면서 살면 좋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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