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서산 마애삼존불

醉月 2012. 6. 14. 06:42

해가 비껴들 무렵의 서산마애삼존불. 빛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천진하고 온화한 미소를 도저히 사진으로 담아낼 도리가 없으니 가서 봐야 알겠다.

차갑고 단단한 바위 속에서 어찌 이리 순하고 맑은 미소를 꺼낼 수 있었을까요. 저렇듯 천진난만한 미소를 말입니다.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불에 햇살이 비껴들자 그윽하게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차가운 바위의 석불에 차츰 번져 가는 미소를 마주하게 된다면 누군들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산마애삼존불은 익히 알려진 명소입니다. 그러니 서산 일대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안타깝게도 이런 미소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 갑니다. 오래전에 세워진 보호각이 종일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때 이곳을 찾았거나, 보호각이 철거된 뒤에라도 삼존불에 해가 비껴들어 미소가 피어나는 짧은 시간을 놓쳤다면 ‘무슨 그런 호들갑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서산의 마애삼존불은 해가 비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오전의 햇살이 비껴드는 두 시간 남짓 마애삼존불을 단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 매혹적인 미소에 그만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한 줄기 빛이 어찌 이리도 사물을 달리 보이게 할 수 있는지요. 빛 하나로 바위 속 삼존불의 미소가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서산에서 이름났으되 진면목을 못 보고 돌아가는 곳이 마애삼존불이라면, 빼어난 풍광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은 팔봉산입니다. 높이래야 고작 361m의 자그마한 산이지만, 가로림만의 바다 쪽에 솟아 장쾌한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8개의 봉우리로 솟은 팔봉산은 봉우리를 하나하나 딛고 다 올라도 두 시간 남짓이면 넉넉합니다.

해미읍성, 개심사, 간월암, 부석사…. 서산의 명소를 다 꼽자면 손가락이 모자랍니다. 하지만 이 모두를 다 봤대도 햇살 비껴들 무렵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면 언제고 서산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서산의 곳곳을 둘러보면서도 차디찬 돌이 보여 주는 부드러운 미소가 내내 가슴에 찍힌 채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팔봉산 2봉으로 오르는 중턱쯤에서 굽어본 1봉의 모습. 암릉으로 이뤄진 1봉 너머로 가로림만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산 아래 양길리 주차장에서 불과 20 ~ 30분만 오르면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빛으로 빚어내는 미소… 서산마애삼존불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불 앞에서 깜짝 놀랐다. 사실 그곳을 처음 찾은 것은 아니었다. 기와지붕을 올린 보호각이 있을 때도 몇 번 찾아갔고, 그걸 헐어 버린 뒤에도 한두 번쯤 더 찾았다. 보호각의 그늘 아래 처음 만났던 삼존불은 어쩐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듯했다. ‘백제불상의 최고의 미소’를 보겠다는 기대는 무너졌다. 안내판에 설명된 ‘최고의 미소’라는 글귀가 어림없다 싶었다.

삼존불 보호 관리를 맡은 안내인이 나무 막대기 끝에 백열전구를 달아 애써 그 미소를 보여 주려 했지만,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몇 해 뒤 보호각이 해체됐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삼존불을 찾았을 때도 그다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해가 드는 시간을 맞추지 못해 오후 늦게 당도한 터라 보호각 안에 있을 때보단 나았지만, 그래도 ‘백제의 미소’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마애삼존불에 햇볕이 비껴든다는 오전 시간에 맞춰 삼존불을 찾았다. 그 앞에서 해가 들길 기다렸다. 오전 9시30분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에 햇살이 밀고 들어왔다. 이윽고 볕이 삼존불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자 불상의 양감이 도드라지면서 눈두덩이와 뺨이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입매에 볕이 드리워지면서 볕을 받는 부분과 그림자가 지는 부분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그때였다. 삼존불의 미소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돌덩이로 느껴졌던 석불에서 생명력이 느껴졌다. 해가 비치는 각도와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표정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니 미소의 느낌이 달랐다. 빛의 시간뿐 아니라 보는 위치에 따라 변화하는 표정에서는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마애석불은 6세기 초부터 7세기 초에 새겨졌으니 1500여 살의 나이를 먹었다. 불상은 1959년에 발견됐다. 돋을새김된 불상이 풍화 작용으로 훼손될까 염려해 1965년에 보호각이 설치됐다. 보호각이 세워지면서 햇볕이 들지 않자 1500년을 이어 온 ‘백제의 미소’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막대기 끝에 백열전구를 달아 그 불빛으로 미소를 찾아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보호각으로 비와 바람을 가려 오랫동안 보존하겠다는 취지야 십분 이해가 가지만, 그 대가로 미소를 잃고 만 것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호각이 통풍을 막으면서 내부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1500년의 세월에도 끄떡없던 것이 불과 몇 십년 만에 곰팡이가 필 지경이 됐다. 보호를 위해서는 보호각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2006년 벽면을 뜯어냈다. 하지만 보호각의 지붕이 남아 여전히 마애불의 미소를 볼 수 없었다. 결국 2008년에 전각 지붕도 철거하고서야 마애삼존불이 비로소 미소를 되찾은 것이다. 보호각에 가두어진 지 43년 만의 일이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가야산 용현계곡의 깊은 벼랑에 서 있다. 왜 이런 외딴곳에 석불을 새겨 놓은 것일까. 그건 이쪽이 백제의 교역 통로였기 때문이다. 고구려에 밀려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공주나 부여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려면 가야산을 넘어야 했다. 그 길목의 바위벼랑에 삼존불을 새겨 놓은 것은 교역을 위해 오가는 백제인들이 안녕과 평화를 빌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천진하면서도 그윽한 미소 앞에서 1500년 전 긴 여정을 떠난 백제인들을 떠올린다.

# 팔봉산 여덟 봉우리에 올라 바다를 굽어보는 맛

서산 해미읍성은 천주교도들의 피가 흐른 박해의 공간이었다. 해미순교성지에는 당시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진둠벙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았다면 인근의 보원사지와 개심사를 놓칠 수는 없겠다. 보원사지에는 고려 초에 세워진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부도 등이 남아 있다. 보원사 옛 절터 자리는 한창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주변이 영 어수선하다. 하지만 온통 파헤쳐지고 비닐로 덮인 발굴지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을 보면 ‘거참 잘생겼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단정한 자태도 그렇고 지붕돌의 체감 비례도 더할 나위 없다.

개심사는 벚꽃 피는 이른 봄을 놓쳐서 그런지, 이즈음에는 좀 기대에 못 미친다. 게다가 마당 한쪽에서 불사를 하느라 정취도 예전만 영 못하다. 다만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심검당의 소박하되 멋스러운 느낌만은 그대로다.

서산에서 마애삼존불 외에 찾아가 볼 만한 곳으로는 단연 팔봉산을 꼽을 수 있겠다. 팔봉이라면 여덟 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산이라 본격 등산을 생각하기 쉽겠지만, 팔봉산이 펼쳐 보이는 조망의 빼어남은 1봉부터 3봉까지이니 등산이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봉우리를 다 딛을 것까지는 없겠다. 팔봉을 순서대로 모두 다 오른대도 2시간 남짓. 1봉부터 3봉까지를 다녀온다면 1시간쯤이면 족하다. 그러니 등산이라 이름 할 것 없이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

팔봉산은 해발 고도 361m의 작은 산이지만, 봉우리마다 암봉으로 치솟았다. 하나하나 거기 딛고 올라서 보는 풍광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양길리 쪽 주차장에서 주 능선까지는 울창한 송림숲이다. 솔향 은은한 그 길을 15분만 오르면 말안장 모양의 능선에 닿는다. 그렇게 닿은 능선은 1봉과 2봉의 사이쯤이다. 여기서 1봉을 올랐다가 내려와서 다시 2봉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팔봉산의 웅장함을 보려면 감투봉이라 불리는 1봉을 굽어보는 2봉 정상의 자리가 명당이고, 저 아래 펼쳐진 가로림만의 바다를 보겠다면 3봉 정상의 자리가 으뜸이다. 능선에서 2봉 쪽으로 오르다가 우럭바위쯤에서 뒤를 돌아보면 누구든 깜짝 놀라게 된다. 잠깐 동안의 걸음에 바다와 해안마을의 풍경이 와락 달려들기 때문이다. 체감으로 보자면 실제 높이의 두세 배쯤은 오른 듯하다.

코스를 길게 잡는다면 양길리 주차장에서 8봉을 다 오르고 서태사와 오송주차장 쪽으로 내려서면 되지만, 짧은 트레킹을 할 요량이라면 두 개의 봉우리로 돼 있는 이른바 쌍3봉의 사이에 산허리로 난 길로 양길리 주차장까지 되돌아오는 것도 괜찮겠다. 이쪽으로 길을 잡으면 기우제를 지냈던 터와 운암사란 절이 있었다는 터, 그리고 호랑이가 기거했다는 호랑이굴 등의 명소를 다 돌아볼 수 있다. 게다가 양길리 쪽 들머리에서는 오는 23, 24일 감자축제가 열린다. 팔봉산 일대의 감자농가들이 모여 치르는 축제다. 이달 중순쯤에 가면 갓 수확한 하지감자를 포슬포슬하게 쪄 낸 맛까지 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 정순왕후 생가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끼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산의 음암면에는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생가가 있다. 생가는 정순왕후가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우람한 느티나무를 앞에 두고 서 있는 생가는 단정하고 고즈넉하다. 승지와 예조참의를 지냈던 집주인의 청렴함을 알게 된 효종이 손수 집 지을 돈을 내려보내 지었다니 집의 내력이 300년을 훌쩍 넘는다. 왕후의 흔적은 여태 남아 있는 게 없고, 고택을 둘러보는 것이 따분할 듯하지만, 정원이 야생화로 잘 가꿔져 있는 데다 여러 가지 이야기도 깃들어 있어 건너뛰면 아쉬울 듯하다. 게다가 생가 바로 옆에는 사랑채에 차양을 단 독특한 건축 기법이 돋보이는 김기현 가옥도 있다.

정순왕후. 열 다섯에 영조의 계비로 간택돼 17년을 왕비로, 나머지를 왕대비와 대왕대비로 일생을 궁에서 보낸 인물.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와의 갈등, 순조의 수렴청정 등을 다 거치며 당쟁의 한복판에 서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여야만 했다. 세도정치의 문을 열었다는 오명도 있고, 가난한 이를 구휼했다는 치적도 있다. 누구든 공과 과가 함께 있겠지만, 왕후 중에서 그이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정순왕후 생가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손님들을 맞는다. 집에는 왕후의 후손인 초대 민선시장 김기흥(75) 씨가 기거하며 관리하고 있다. 거대한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집이 어찌나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마당은 깔끔하고, 고택의 툇마루는 손길로 반들반들하다. 게다가 화단에는 갖가지 야생화가 피고 또 지고 있다. 툇마루 아래에는 정성껏 심어 기른 분재 화분들이 그득하다.

이 집은 정순왕후 생가로 알려졌지만 왕후의 후손인 독립운동가 김용환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김 전 시장의 부친인 김용환은 성균관 유생 출신으로 고종 때 궁내부 주사 일을 하다가 한일병합이 이뤄지자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쌀 6000가마 값을 마련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으로 숨을 거뒀다.

생가 앞에는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가져온 김용환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유족들이 수소문 끝에 지난 2008년 사후 80여 년 만에 중국 땅에서 찾아낸 비석이다. 당시 함께 찾은 유골은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금이 가고 부서져 대리석으로 테두리를 한 비석에는 태극기의 문양이 선명하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안쪽이면 가닿는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나들목으로 나와 운산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운산면사무소를 지나 647번 지방도로 홍성·덕산·용현휴양림 방면으로 우회전하고 이어 숙용벌삼거리에서 서산마애삼존불 방면으로 좌회전해 648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서산마애삼존불에 햇볕이 비껴드는 때는 계절마다 다르다. 이즈음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전 11시30분 무렵까지 해가 든다. 오전 10시30분쯤에 당도하면 삼존불의 미소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묵을 곳·먹을 것= 서산마애삼존불을 찾는다면 인근의 용현자연휴양림(041-664-1971)을 숙소로 삼는 게 좋겠다. 서산에는 인근의 태안이나 안면도만큼 숙박시설이 많지 않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대산이나 팔봉산 인근에 펜션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시설은 좀 떨어지지만 포구 쪽이나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민박을 찾는 것도 좋다. 민박은 3만~5만 원 선. 본격 피서철이 아니니 낚시꾼들로 붐비는 ‘조금’ 때만 아니라면 예약 없이 찾아가 방을 구할 수 있다. 서산시내에는 웬만한 호텔 수준의 깨끗한 모텔이 즐비하지만, 유흥가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가족 여행 숙소로는 적합하지 않은 편이다.

서산에서는 굴밥이 별미다. 뚝배기에 굴과 호두, 대추 등을 함께 넣어 짓는데 간월도 부근 ‘맛동산’(041-669-1910)과 ‘큰마을영양굴밥’(041-662-2706) 등이 알려진 맛집이다. 박속낙지탕도 있는데 왕산포구의 ‘왕산포횟집’(041-662-9607) 등이 유명하다. 게장을 넣어 끓이는 김치인 게국지를 내는 ‘진국집’(041-664-4994)과 짬뽕으로 유명한 해미읍성 부근의 ‘영성각’(041-688-2047) 등도 추천할 만하다. ‘안흥일품꽃게장’(041-681-8601)에서는 달큼하고 짭조름한 꽃게장 정식을 낸다. 포장 판매도 하고 있어 식사 후에 따로 포장해 가는 손님이 많다.


“시원∼한 아이스케키입니다, 얼음과자 아이스케키….”

충남 서산 팔봉산 정상인 3봉 부근에는 ‘아이스케키’를 파는 이가 있다. 김상근(50) 씨. 등산객이 넘쳐 나는 서울 근교의 산에서는 간혹 볼 수 있지만, 이런 산에 웬 아이스케키 장사일까 싶다. 그래도 김 씨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등산객이 적지 않다. 그는 주말이면 매일 아침에 아이스박스를 메고 산에 오른다. 드라이아이스와 아이스케키를 담은 박스의 무게는 70㎏ 남짓. 제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산길을 이걸 지고 오르자면 보통 중노동이 아닐 법한데도 그는 ‘할 만하다’며 땀을 훔쳤다.

“집사람도 충남 홍성의 용봉산 노적봉에서 아이스케키를 팔지요. 주 중에는 아내와 함께 용봉산에서 장사를 하고 주말에는 아내 혼자 용봉산으로, 나는 팔봉산으로 옵니다.”

김씨가 아이스박스를 메고 산에 오른 지 올해로 3년째. 산중에서 아이스케키를 파는 일은 아내 변순옥(여·44) 씨가 먼저 시작했다고 한다. 아내는 김 씨가 직장 생활을 하던 7년 전부터 산에 오르내리며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비 내리는 날만 빼고 하루 두 번씩 빠짐없이 아이스박스를 메고 산에 오른다고 했다. 김 씨는 젊은 시절 강원도 함백에서 탄광 일을 하다가, 유가공업체에서 지게차를 몰기도 하고, 라면공장에서 포장재 인쇄 일 등을 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탄광 일을 하면서 얻은 폐질환으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벌이로 두 자녀를 대학까지 가르치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래서 김 씨 내외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고, 또 일하고 있다.

김 씨 부부의 벌이는 들쑥날쑥. 아이스케키의 가격은 1500원. 이걸 서울에서 800원 남짓에 떼어 오니 하나를 팔면 700원쯤 남는다. 어떤 때는 200개 정도 팔 때도 있지만, 하루 20개 남짓만 팔고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다시 지고 내려가는 날도 허다하다.

장사가 잘되는 날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김 씨 부부가 매일 거르지 않는 일이 있다. 산을 돌며 쓰레기를 줍는 일이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파는 아이스케키를 사 먹은 등산객들이 아무 데나 포장지를 버리자 이를 줍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매일 산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쓰레기를 도맡아 줍고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리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쓰레기 줍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는다.

“등산객들이 내게 산 아이스케키 포장지를 버리는 걸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그걸 줍기 시작했다가 이젠 산 전체를 돌면서 쓰레기를 주워요. 그렇게 하니 기분도 좋고, 산중에서 장사하며 빚진 것 같은 느낌도 털어 버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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