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대한민국 사내들의 5가지 키워드
큰 가슴, 마라톤, 폭탄주, 안마시술소, 독수리 5형제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음식이 맛없는 식당’이다. 어떻게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돈 받고 팔 생각을 했을까, 도대체 주인은 이 음식을 먹어보기는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식당들이 있다. 이런 식당에 다녀온 날이면 하루가 정말 우울하다. 때론 분노까지 치민다. 내 하루의 행복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이다. 맛없는 식당은 죄악이다. 그러나 식당 주인은 그것을 모른다. 오히려 반대다. 자기 식당의 음식이 정말 맛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장사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식당은 그러다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음식이 맛없는 식당 주인의 딜레마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맛있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삶의 재미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즐겁고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의 구체적 조건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이 경쟁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단순히 상품생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일궈나가야 하는 구체적 삶의 조건들도 행복과 재미라고 하는 가치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좋은 것이 뭔지 도대체 아는 바가 없는데 어찌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김혜수를 좋아하시나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배우 김혜수를 싫어했다. 왠지 불필요하게 도도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타짜’를 본 이후, 나는 김혜수에 대한 내 편견을 단번에 다 버렸다. 이제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할 수 있다. 살펴보니, 배 나오고 탈모로 고민하는 내 주위의 중년 남자들은 대부분 김혜수를 좋아한다. 그들도 그 영화를 본 후부터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다 그녀의 엄청난 가슴 때문이다. 김혜수는 ‘타짜’에서 단 몇 초간 자신의 가슴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장면에서 철없는 중년들은 한결같이 정신이 혼미해진다. 김혜수의 과감한 연기 이후 가슴 큰 여배우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드러낸다. 영화제 시상식이나 시사회가 있는 날의 뉴스에는 어김없이 그녀들의 가슴을 볼 수 있다. 이들이 가슴을 드러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가슴을 훔쳐보는 철없는 이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왜 남자들은 큰 가슴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미국식 포르노그래피에 길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미국식 포르노그래피는 큰 가슴 외에도 정말 많은 것을 보여준다. 채찍, 가죽장화….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그중에서 유독 큰 가슴에만 집착한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심층심리학적 욕구가 숨겨져 있다. 사는 게 재미없는 한국 남자들의 첫 번째 현상, 즉 ‘큰 가슴으로의 퇴행’이다. 그것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살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게다가 세상은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무기력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온통 뒤바뀌어 황당했던 경험이 반복되면 오히려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의사소통의 문제다. 진정한 의사소통 행위는 정서공유가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서로 정서를 공유하는 과정이 박탈된 논리적 의사소통 행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로 인한 불안 때문에 한국 남자들은 큰 가슴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큰 가슴에 머리를 깊이 처박고 울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 가장 완벽한 소통을 경험하는 곳은 어머니의 가슴에서다. 어머니의 젖을 빨 때, 아기는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또 다른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의사소통행위는 시작된다. 이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 한다.
생각해보라.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가슴’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이해하는 ‘가슴’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똑같다고 도대체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서로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근거 없어 보이는 ‘상호주관성’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바로 어머니의 가슴에서부터다. 어머니와 피부를 맞대고 정서를 교환하는 행위로부터 인간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과 내가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신념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시작된다. 소통이 어려워질수록 인간은 불안해진다. 이 불안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지극히 원초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완벽했던 정서의 소통 경험에 대한 기억이 큰 가슴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나면, 어머니 이외의 사람들과 또 다른 정서공유의 소통 경험을 하게 된다. 놀이다. 놀이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경험했던 의사소통의 원형적 경험이 확대되는 과정이다. 이를 사회화라고 한다. 놀이에 참여하는 이들은 동일한 성질의 정서적 경험을 하게 된다. 재미다. 놀이에서 경험되는 ‘재미’라고 하는 심리적 경험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경험했던 상호주관성이 확대된 형태다. 결국 나와 같은 철없는 중년들이 김혜수의 가슴에 열광하는 것은 소통부재의 불안과 재미없는 삶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퇴행적 현상이다.
왜 죽어라 뛰는가
소통부재의 불안에 시달리며 재미라고는 전혀 없는 삶에 지친 한국의 중년들에게 최근 나타난 이상현상이 있다. 마라톤이다. 몇 년 전부터 마라톤 대회가 열리면 사람들로 미어진다. 대부분 40, 50대 중년들이다. 대개 건강을 위해 뛴다고 한다. 그러나 왜 하필 마라톤인가. 군대에서 10km 구보를 해본 남자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42.195km를 안 쉬고 달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죽어라 하고 달린다.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면 절대 적자 나는 법이 없다고 한다. 전국에서 고통을 사서 겪겠다는 사내들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라톤 완주 횟수는 1년에 10~20회에 육박한다. 그러나 이봉주 선수와 같은 전문 마라토너의 1년간 완주 횟수는 3~5회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 번의 마라톤 완주는 엄청난 체력 소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땅의 중년들은 죽어라 하고 뛴다.
잘못하면 생명까지 위협받는 이 고단한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건강을 위해 달리는 이도 많다. 내가 궁금한 것은 ‘느닷없는’ 마라톤 열풍이다.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셀 수 없이 많은데, 왜 하필 그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마라톤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세상과 더는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존재확인 방식은 자학이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와 소통을 통해선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통해 느끼고 싶은 것이다.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한 이들의 인터뷰에서 한결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뛰었다는 것이다. 아, 그러나 나 자신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자신과 소통하는 행위를 철학에서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라 한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듯 자신과 마주 보며 스스로 이야기하는 행위가 자기반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자신과 마주하며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신과 싸워 이기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내 진정한 존재가 회복될 수는 없다. 소통행위의 부재로 야기된 불안은 소통의 회복으로만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고통스럽게 달린다. 이것이 사는 게 도무지 재미없는 이 땅의 사내들에게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 즉 ‘자학적 존재 확인’이다.
세 번째 현상은 ‘폭탄주’다. 이건 정말 심각하다. 마라톤은 그 자체로 해결책은 될 수 없으나, 그래도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마라톤에 비해 폭탄주는 아주 악질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해결책이 나온다. 하지만 폭탄주는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아주 심각한 퇴행적 현상이다.
왜 죽어라 마시는가
내가 오랜 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폭탄주였다. 저녁마다 모여 폭탄주를 돌리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집에서 친구 아버지가 아끼는 양주를 몰래 마시고 양주병에 보리차를 채워 넣던 기억은, 나름 놀아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까운 양주를 사람들은 밤마다 정말 보리차 마시듯 마셔버린다. 무엇보다도 그 아까운 술을 그런 식으로 마셔‘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왜 폭탄주를 마시느냐고 물었다. 빨리 취한다고 했다. 나는 또 물었다.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느냐. 친구들은 맨정신으로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며 이야기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 취하려고 폭탄주를 돌린다고 했다. 폭탄주가 몇 잔 돌아가고 눈이 흐릿해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맘을 터놓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런! 취한 후에 이야기하는 것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주정 부린다’고 한다.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을 정신병리학에서는 자폐증이라고 한다. 폭탄주 문화는 집단 자폐증상이다. 자폐증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아동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자폐현상은 나타난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음에도 그 사람의 구체적 신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 내면의 세계가 타인과 공유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경우도 약한 정도의 자폐증상이라 할 수 있다.
자폐증의 원인은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타인과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을 폭넓게 자폐증이라고 정의한다. 심각한 자폐환자든, 정상적 사회생활이 가능한 자폐환자든 모든 종류의 자폐환자들이 공유하는 증상이 있다. 상대의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이 드러날까 두려운 까닭이다. 마찬가지다. 폭탄주를 마시고 눈앞이 흐릿해져야만 타인과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 땅의 사내들 또한 심각한 자폐증을 앓고 있다.
술을 마시지 말란 이야기가 아니다. 제대로 마시란 이야기다. 술이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세계관을 공유하거나,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서를 공유하려고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정서를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두려워 빨리 취하려고 마시는 술자리가 어찌 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일반 샐러리맨들만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수들도 모이면 폭탄주를 마신다. 관공서 공무원들도 마신다. 정치인들도 밤마다 폭탄주다. 소통 부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민이 밤마다 폭탄주라는 집단 자폐증에 걸려 휘청거린다.
만질수록 커진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변화 중에 눈에 띄는 현상이 있다. 스포츠마사지, 각종 스파시설로부터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피부를 자극하는 서비스산업이 엄청난 호황이다. 동네마다 다 있는 운동장만한 찜질방도 크게는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나는 이를 ‘피부자극결핍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의사소통 장애로 야기되어 나타나는 네 번째 현상이다.
만지는 행위는 상호작용의 가장 기본적 형태다. 우리가 남의 몸을 손으로 만질 때 우리의 손은 상대방의 몸에 의해 ‘만져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껴안는다. 만지고, 또 만져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무도 나를 만져주지 않는다.
금실 좋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먼저 죽으면 할머니는 평균 4년 정도 더 산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먼저 죽으면 할아버지는 6개월 이내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스킨십’의 차이 때문이라고 일본 심리학자 야마구치 하지메는 주장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없어도 스킨십의 대상이 있다. 손자들을 만지고, 며느리를 만진다. 그뿐만 아니라 바느질, 요리 등을 통해 끊임없이 피부를 자극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할머니가 사라지면 도무지 만질 대상이 없다. 결국 깊은 소외감에 시달리다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포유류는 피부접촉을 통한 정서적 안정을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돼 있다. 스킨십이 박탈된 상태에서 자란 원숭이는 면역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불안증세를 보이다 일찍 죽는다. 새끼 쥐를 둘로 나누어 한 집단에는 물을 묻힌 붓으로 피부를 계속 자극하고 다른 집단에겐 그저 먹을 것만 줬다. 물 묻힌 붓은 어미 쥐가 혀로 핥아주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보였다. 먹을 것만 제공받은 쥐는 불과 몇 주를 못 버티고 죽은 반면, 붓으로 계속 자극해준 쥐는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간호사들이 지속적으로 터치를 해주는 중환자실 환자의 생존율이 그렇지 않은 중환자실 환자의 생존율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뇌생리학자인 와일드 펜필드는 뇌가 담당하는 신체부위의 차이를 그림으로 그린 적이 있다(오른쪽 그림 참조). 신체부위를 담당하는 뇌의 부위는 각각 다르고, 그것의 크기 또한 다르다. 이에 따라 각각의 신체부위를 맡고 있는 뇌의 비율을 역으로 계산해 신체의 크기를 묘사한 것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우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주 만져주길 원하는 성기는 의외로 작다. 우리의 뇌는 그 부분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자꾸 그 부위만 만져달라고 한다. 헛발질이다.
뇌가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부위는 손과 입술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끊임없이 만지고 싶은 것이다. 키스도 그래서 하는 것이다. 뇌를 보다 많이 사용해 느끼고 싶은 까닭이다. 더 많이 느끼고 싶은 젊은 연인들은 혀도 아주 자주, 다양하게(!) 사용한다. 그림을 보면 왜 혀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입술만큼이나 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지고 만져지는 스킨십을 통한 의사소통 과정이 박탈당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왜곡이 나타났다고 영국의 사회학자 기든스는 주장한다.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상호관계성이 성기에만 집중되어 나타나는 왜곡된 남근중심주의적 포르노물의 범람이 그 예다. 한국의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는 이러한 이론적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단순한 변태 성매매가 아니다. 건강한 일상의 재미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정서적 교류가 박탈된 한국 남자들의 의사소통장애가 범람하는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의 진짜 원인인 것이다. 이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의 각종 변태영업은 성매매금지법 따위로는 절대 해결할 수도, 해결될 수도 없는 일이다.
사회적으로 건전하다고 여겨지는 스포츠마사지, 스파, 안마와 같은 서비스 시설 또한 이러한 근원적인 소통부재의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난 자본주의적 해결책이다. 21세기에 나타난 대부분의 웰빙산업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정말 블루오션이 아닐 수 없다. 만지고 만져질수록 자신과 상대방의 존재는 커진다. 상호작용적 존재감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해결책은 엄한 특수부위만 자꾸 커지게 한다. 어쨌든 만질수록 커진다. 어느 부위든.
‘지구는 우리가 지킨다’
한국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술 한잔 마시면 지구를 지킨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내의 모든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될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운다. 주가를 비롯한 경제 문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그 어느 전문가보다 확실한 진단과 대안을 내놓는다. 어디 국내 문제뿐인가. 독도 문제나 이라크 파병과 같은 외교 문제, 심지어는 미국 대통령선거나 지구온난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구방위대가 되어 온갖 우주의 침략자와 싸우는 데 그렇게 용감할 수가 없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확인돼야 할 재미와 놀이를 통한 정서공유, 의사소통을 통한 존재확인의 과정이 생략된 이들에게는 오직 지구를 지키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를 나는 다섯 번째 현상, 즉 ‘독수리5형제 증후군’이라 정의한다.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5형제. 그런데 문제는 이 용감한 지구방위대가 정작 자신의 행복을 챙기라고 하면 하염없이 비겁해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일주일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말에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갑자기 맛있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우아한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 스테이크와 레드와인을 시켜 혼자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혼자서! 그런데 어렵다. 허름한 순대국밥집에 혼자 들어가 배를 채우는 일은 할 수 있어도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혼자 즐기는 일은 대부분 힘들어한다. 왜 그럴까. 남이 나를 사회부적응자로 볼까 두려운 까닭이다.
음악회는 혼자 갈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쉽지 않다. 정말 좋은 음악은 혼자 들어야 한다. 혼자 들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혼자 음악회에 앉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컴컴한 영화관에 혼자 앉아 있는 것조차 쑥스러운 사람이 대부분이다. 왜일까. 이 또한 남 눈이 두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가 혼자 와서 음악 듣는 것, 혼자 스테이크 먹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이도 관심 갖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존재하지도 않는 눈길이 두려워 혼자 맛있는 스테이크를 즐기는 일, 음악회에 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술집에 앉아 혼신을 다해 지구를 지킨다. 이게 정상인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독수리5형제 ‘증후군’인 것이다.
사는 게 재미없는 이들은 세상이 뒤집히길 원한다. 2002년 월드컵처럼 온 국민이 나와 빨간 옷 입고 세상이 뒤집히는 축제만 재미있다고 느낀다. 엄청난 재미에 대한 환상이다. 그러나 세상이 자주 뒤집히는가. 월드컵 4강 신화만 해도 그렇다. 우리 생애에 월드컵 4강을 또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가. 솔직해지자. 월드컵 4강은 우리나라에서 경기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아닌가? 외국에서 경기를 치른다면 16강에 들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엄청난 재미만 진짜 재미인 것처럼 착각한다. 세상이 뒤집혀야만 재미있는데 세상이 그리 쉽게 뒤집히질 않으니, 우리의 독수리5형제는 폭탄주를 마시고 자기 위장을 뒤집는다. 세상이 뒤집히질 않으니 자기 스스로 뒤집히는 것이다.
우리의 독수리5형제는 뉴스도 열심히 본다.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오면 8시 뉴스부터 보기 시작한다. 8시 뉴스가 끝나면 바로 9시 뉴스. 9시 뉴스가 끝나면 잠시 기다렸다가 11시 뉴스. 그 사이를 견디기 어려운 이들은 아내와 아이들의 엄청난 저항을 무릅쓰고 24시간 뉴스채널인 YTN으로 잠시 채널을 돌린다. 11시 뉴스가 끝나면 다시 마감 뉴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들 열심히 뉴스를 보는 것일까. 세상이 뒤집히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저 밋밋한 뉴스만 나오면 재미없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는 엄청난 뉴스가 나오길 끊임없이 기다리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참, 여담이지만 아직까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정말 중요한 비밀이 있다. 독수리5형제가 정작 ‘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가. 다섯 명 중 한 명이 여자다. 그러니까 형제가 아니라 남매다. 더 중요한 비밀이 있다. 이 비밀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다섯 명 중 독수리는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정말 엄청난 비밀이다. 맨 앞의 한 녀석만 독수리이고, 나머지는 콘도르, 백조, 제비, 부엉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독수리5형제가 전부 독수리인 줄 알고 있다. 이 녀석들은 사실 ‘조류5남매’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독수리5형제라고 사기치고 다닌다. 이 땅의 사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독수리5형제인 줄 알고 지구를 지키겠다며 큰소리를 치지만, 술 깨면 조류5남매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된다. 슬픈 이야기다.
재미는 사회적 구성요소
남성에게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들을 분석하기 위한 틀이 ‘재미’다. 그런데 아는가. 재미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오늘날 우리가 매일같이 반복하는 ‘재미있니?’라고 하는 문장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상적 용어가 됐다. 물론 재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재미’라고 하는 단어 자체는 최근 몇십년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fun’이라고 하는 단어가 일상적인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활자화한 문헌의 역사적 기준이 되는 성서를 찾아보면 간단히 증명된다. 현재 사용하는 성경 중 가장 오래된 영어번역본인 King James Version(1611)에 ‘fun’ 이란 단어는 아예 없다. ‘fun’은 1978년 출간된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단 한 번 나온다. 그것도 조롱한다는 의미로 나온다. Some, however, made fun of them and said, “They have had too much wine.”(Acts 2:13)
오늘날 브리태니커 사전을 능가하는 만능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fun’을 검색해보면 ‘recreation’으로 넘어가버린다. 아직까지 fun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그토록 많이 사용되며,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겨지는 미국에서조차 ‘fun’에 대한 백과사전적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독일어의 ‘spass’나 일본어의 ‘다노시미(樂しみ)’도 같은 운명이다. 아직 편집 중이거나 설명이 없다고 나온다. 각 언어의 ‘재미’에 해당하는 다른 표현들은 물론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삶의 가장 중요한 차원으로 생각하는 ‘재미’라고 하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생성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를 문화심리학에서는 ‘정서의 사회적 구성’이라 설명한다.
재미와 연관된 심리적 현상은 인간의식이 생겨난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 현상을 정의하는 개념이 문화적으로 구성될 때, 이 현상은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 마치 ‘정(情)’이라는 정서적 차원이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실제 우리가 이야기하는 ‘정’과 비슷한 정서는 어느 문화권이나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개념화하여 ‘정’이라고 이야기하는 우리의 경우는 막연한 심리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다른 문화의 경우와 질적으로 다르다. ‘그 놈의 정 때문에…’라며 자신의 현실을 해석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한국 문화는 다른 문화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도 마찬가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제까지 막연히 존재해온 ‘재미’와 관련된 심리적 차원을 각 문화권은 다양한 용어로 정의하기 시작한다. 재미를 사회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의 사회적 구성을 가능케 한 조건은 주체의 성립이다. 이제까지 신분, 계급, 또는 친족이라는 봉건적 아이덴티티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된 개인’이라는 주체가 근대에 들어서며 개념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 개인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적 억압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주체적 행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 나름의 의미체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이전에 ‘역사서술’이라고 하는 집단적 의미부여의 행위가 개인의 차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세계 심리학계의 패러다임을 이끌었던 제롬 브루너는 이 현상을 ‘내러티브 전환(narrative turn)’이라고 부른다. ‘내러티브’란 자기서술의 행위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과 느낌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야기하기, 즉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는 현상은 삶의 목적을 정당화하는 의미부여의 과정이다. 왜 내가 이런 행동을 하고, 이런 느낌을 가지는지에 대해 조직이나 집단이 대신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엄청난 내러티브 전환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즉 스토리텔링의 내용은 대부분 자신의 행위를 가능케 한 동기, 즉 모티베이션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어 사랑을 생물학적인 종족번식이라는 동물적 충동이 아니라,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랑스러운 목소리 등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내러티브 구성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의미부여가 명확한 개념으로 ‘재미’라고 하는 차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나훈아 괴담의 문화심리학적 구조
가수 나훈아가 자신에 얽힌 괴담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벗어야 믿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가 한번 벗길 은근히 바랐다. 정말 한번 보고 내 것과 비교해보고 싶었다. 그는 전설로만 존재하는 정력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탁자 위에 서서 허리띠만 붙잡고 있다 도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가 벗겠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허연 수염을 기르고, 머리꽁지는 뒤로 묶고 야릇한 미소와 표정을 순간순간 묘하게 바꾸는 나훈아의 표정 뒤로는 모든 수컷이 충분히 동경할 만한 우상의 아우라가 있었다. “벗어야 믿겠습니까?”하는 나훈아의 외침은 어릴 때부터 들어온 나훈아의 남성성에 관한 스토리텔링의 완성이었다.
나훈아 괴담은 이 땅의 중년남녀들이 꿈꾸는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우선 그 스토리에는 김혜수, 김선아와 같은 글래머 스타들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모든 남자가 한번은 안겨보고픈 큰 가슴의 미녀들이다. 사실 나훈아 괴담에서 김혜수, 김선아라는 구체적 개인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큰 가슴의 미녀 탤런트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소통부재의 불안 때문에 나훈아 괴담도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의 나훈아가 이 미녀 글래머들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는 나이를 먹을수록 수컷의 향기를 상실해가는 중년들의 묘한 질투와 대리만족의 이중적 구조를 반영한다. 여기에 철없는 중년들은 자신들의 성인만화적 로망을 덧붙인다. 야쿠자의 등장과 복수다. 이는 어릴 때 숨어 읽던 방학기류의 아주 익숙한 성인만화적 클리셰(cliche, 진부한 표현)다. 그리고 그 결말은 남성성의 절단이다. 아주 완벽한 결론이다.
사실 대중스타는 자신의 스토리텔링에 익숙지 않은 대중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폭력으로 입건된 최민수는 아주 훌륭한 대중스타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안성기는 대중스타로서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 그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착실하고 성실한 배우일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안성기보다 최민수가 훨씬 더 좋다.
나훈아의 경우,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섣부른 신비화 전략을 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대중스타, 특히 나훈아와 같은 부류의 대중스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제공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런데 나훈아는 그 책무를 거부했다. 스타가 스스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으면, 대중은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나훈아 괴담의 경우, 중년들이 앞 다투어 이 스토리구성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청소년들에게서나 나타나던 팬픽(팬들이 쓰는 스타에 관한 소설)이 중년들에게서도 나타난 것이다.
결국 나훈아 괴담은 스토리텔링에 굶주린 이들이 벌인 해프닝이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 행복과 재미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 땅의 중년들이 어설프게 만들어낸 슬픈 이야기였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부재가 개인의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토리텔링 결핍의 문화심리학적 차원은 한국 기업문화에서도 다시 발견된다. 지식경영과 창조경영으로 이어지는 진부한 이야기의 반복이 바로 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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