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망 직전 父子암투 120시간’
”김정일 “통일, 통일 하는 놈들은 다 노망난 것들이야!”
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
● 1994년 7월3일, 김정일 측근의 대동강초대소 비밀회합 ● 7월 초, 김일성 묘향산행 수행명단서 주치의·의료설비 삭제 ● 7월6일 묘향산, 김일성의 분노 “언제부터 쌀 배급이 중단됐나” ● 7월8일 새벽2시, 구급헬기 추락…김정일이 지닌 권총의 의미는? ● 7월8일 낮, 김일성 묘향산 집무실 압수한 김정일 측근들 ● 김일성 호위담당 1호총국 고급군관, 김정일 저격 시도 ● 권력 위의 권력, 김정일의 여자 ‘옥이 비서’ ● 김달현, 김정일·연형묵과의 노선투쟁서 패배하고 자살 |
하나의 절대권력이 막을 내리기까지는 수많은 징후와 징조가 있게 마련이다. 또한 막을 내리고 나서도 가볍지 않은 잔향을 남기게 마련이다. 1994년 여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북한의 세습체계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 없이 작동하는 것 같았지만, 평양 권력핵심부는 급격한 권력투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음은 더는 비밀이 아니다. 말년의 김일성 주석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분주히 준비하던 가운데 김정일 당시 당조직비서와 마찰을 빚었고, 급기야 7월8일 새벽 묘향산초대소에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신의 죽음’을 앞에 둔 북한 주민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무렵, 평양의 핵심 권력층에서는 후계체제를 굳건히 하려는 김정일 비서와 이에 반기를 든 1호 호위총국 등 김일성 충성파,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을 품은 김 주석의 딸 김경희 등이 갈등을 빚는다. ‘신동아’는 김일성 사망 직전인 7월 초부터 7월8일까지의 상황, 사망 직후 평양 권력핵심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상히 기록한 문서를 입수했다. 수기를 작성해 보내온 인물은 수년 전 북한을 벗어나 해외에 머물고 있는 전 평양 핵심 관료다. 1994년 무렵 김일성 주석의 경호를 담당한 1호 호위총국에서 업무를 맡아 최고위층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던 그는, 이때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 인사들과 관계기관의 자료, 정부 당국자 등 다양한 경로로 파악해본 결과 그가 설명한 자신의 경력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에 우호적 이 탈북 관료는 수기에서 당시 인민군 차수 리을설 원수 등 김 주석 생전의 핵심측근과 그를 호위하던 1호 총국 관계자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김 주석이 사망하기 직전 그와 김정일 비서 사이에 빚어진 갈등의 실체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내외 정보 당국에 보고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북한 내에서도 떠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김정일의 김일성 살해설’(‘신동아’ 2005년 1월호 136쪽 ‘평양발 괴문서, ‘김정일 김일성을 죽이다’ 기사 참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의구심을 가질 만한 여지는 있다’며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김 주석 사망 직후 그를 호위하던 1호 총국의 고급군관이 김정일 비서 저격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 북한을 벗어난 상당수 인사의 시각은 김정일 위원장에 비해 김일성 주석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편이다. 이 수기 또한 전체적으로 그러한 맥락으로 읽힌다. 상대적으로 경제개방·개혁이나 통일문제에 진취적인 아버지와 폐쇄적인 사회주의 유지를 주장한 아들 사이의 이념차이가 갈등의 뿌리였다는 분석이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체제의 생존을 위해 고민하던 김 주석은 이미 아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일정부분 회복하고자 남북정상회담 등 통일문제를 계기로 삼으려 했고, 김정일 비서는 이에 극력 반발해 갈등이 극대화됐다는 것이다. ‘신동아’는 갈등의 실체와 권력투쟁의 세부사항을 꼼꼼히 기록한 수기의 전문을 게재한다. 독자에게 생소한 북한식 표현은 일부 수정했으나, 글의 흐름이나 구성, 문장 내용 등은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살렸다.
◇ 1994년 7월7일 묘향산초대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1994년 7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세계 언론계는 이에 대해 의혹과 여러 가지 설을 제기하며 김정일을 주시했다. 마치 그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기나 한 것처럼 김정일은 장례 100일제를 발표하고 직책후계를 3년간 사양함으로써 최대의 효성(孝性)을 시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김정일은 아들로 볼 때는 효자이며 정치인으로 볼 때는 수령에게 누구보다 충실한 혁명동지이고 전사라고 극구 찬양받기도 했다. 그의 피 색깔이 정말 이렇듯 진하고 뜨거웠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노동당 총비서는 영원히 김일성”이라고 선언한 김정일의 말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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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을 인간으로 생각지 않았다. 수십년 동안 북한 노동당 선전부로부터 김일성 신격화 교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김일성을 정말로 ‘영원한 신’인 줄로 착각했던 그들은 김일성의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그도 한 생만 살게끔 태어난 인간임을 알았다. 그때 세계는 전 주민이 ‘아버지!’ 하고 김일성을 애절하게 찾으며 우는 7월의 북한을 보고 놀라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운 7월에 평양의 최고 고위층은 대성통곡을 할 수 없었다. 김정일의 눈치를 살피며 슬픈 표정을 유지했을 따름이었다. 별 네 개짜리 인민군 차수이자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였고 그의 호위를 책임지는 호위총국장이던 리을설은 영결식장에서 침통한 얼굴로 김일성의 시신만 바라볼 뿐 눈을 들어 김정일을 마주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불편해선지 그는 김정일과 함께 서 있어야 할 그 옆 자리를 피해 구석진 곳에서 혼자 한숨짓기도 했다. 이 시기 북한 주민들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김일성 백일제 기간에 술을 먹거나 사우나를 했다는 이유로, 혹은 비장한 추도가 외에 다른 노래를 감상했다는 이유로 직위에서 해임되거나 출당되어 반혁명분자라는 누명을 쓰고 산골로 추방당했다. 이렇게 온 나라에 슬픔만이 강요되고 국가안전보위부나 사회안전부, 사법검찰이 사상검토 차원에서 매 개인의 정서상황을 매시 매분마다 예리하게 감시하며 체크하던 그때에, 호위총국장 리을설은 차수라는 계급에 걸맞지 않게 주위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밤낮으로 혼자 술을 마셨다. 김일성의 호위사업을 평생토록 맡아오며 차수, 후에는 원수로까지 출세일로를 걸어온 그 늙은이의 충성심이 고작 술 한잔이었을까. 그는 기필코 자살도 선택했을 전형적인 충신이었으며 또 그래야만 김정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모종의 압력 속에 통제받는 몸이 되어 있던 까닭에 쉬이 죽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더욱 타는 속을 술로 식혀야 했을 것이다. 반면 다른 고위층 인사들과 달리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들은 주위 사람들이 격분할 만큼 막무가내였다. 카메라나 사람들 앞에서 마지못해 손수건을 눈가에 몇 번 가져갈 뿐, 일단 휴게실에 들어와 앉으면 마치 김일성의 죽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새롭게 시작될 김정일 정권의 번영에 대해서만 공상적으로 한담을 나누었다. 북한의 체제를 생각할 때, 더욱이 김일성의 시신이 놓여 있던 상황임을 생각할 때 너무도 태연하다 못해 무엄한 언행이었다. 하기야 김정일 본인부터 김일성 사후 3일 만에 얼굴을 웃음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대외적으로 김정일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슬픔을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다며 “원래 우리 조상전래의 제(祭)는 3일제지만 그 3일이 너무도 짧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령님은 죽어서 간 고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현재형임으로 그런 의미에서 3년제를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자기는 3일 만에 공개석상에서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날은 김정일이 평양시 장례연도 행사에 쓸 김일성의 대형 영정이 완성됐다는 보고를 받고 수행성원들과 함께 현장으로 간 날이었다. 초상화의 김일성은 한껏 웃는 모습이었다. 이십리 바다를 가로막고 완공된 서해갑문을 바라보며 통쾌해하던, 그야말로 일생 가운데 가장 기뻐하던 순간을 담은 모습이었다. 장례영정으로 그렇게 환히 웃는 모습을 택한 것은 이를 통해 ‘김일성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말을 실감나게 부각시킬 수 있다는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이 초상화를 앞에 두고 “수령님은 웃을 때도 참 미남”이라면서 호탕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또한 미술가의 수완에 계속해서 경탄하고 오래오래 심취해 있었다. 마치 김일성이 죽은 지 3일밖에 안 됐다는 사실을 감감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김일성의 영생을 만들어가는 김정일의 혁명적 의리와 도덕을 강조하는 북한 당내 문헌 영화에서 이 장면이 구체적으로 공개되자, 당시 통곡과 눈물만을 물고 살던 당 내외 인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시기 김정일은 “자신과 똑같은 위대한 수령, 위대한 후계자를 두고 가기 때문에 수령님께서는 가시면서도 만족하게 웃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선전자료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렇듯 김일성의 죽음을 마주한 김정일의 마음은 결코 무한한 허탈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깨끗이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주치의 수행 제외, 고의인가 퓬痔寬? 1994년 7월9일 낮 12시, 북한은 중대방송을 통해 김일성이 사망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수령님께서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다가 겹쌓이는 과로로 인해 7월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어 사망하셨다”는 것이었다. 북한에는 김일성과 그 친인척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보약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세계 그 어느 지역에 가서라도 억만금을 주고 가져오는 전문부서와, 그 귀물들로 약재를 만들어낸다는 만년장수연구소, 그리고 몇 사람만의 치료를 전담하기에는 너무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봉화진료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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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고의 의료진으로 구성된 봉화진료소의 치료과 과장들은 모두 조선적십자종합병원 분병원 원장들이 겸직하고 있다. 적십자종합병원에서 주민을 상대로 약효 및 생체실험을 하고 그 임상경험과 파악한 약 효능을 토대로 특권층에 대한 치료를 최대한 실용화하자는 것이다. 인민의 건강증진을 위한 종합적인 치료기지라고 북한이 자랑하는 조선적십자병원은 이렇듯 김일성과 그 친인척들의 건강과 치료를 위한 일종의 종합 실험장이었다. 이런 나라에서 불치도 아닌 심근경색으로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는 것이다. 우선 묘향산 출발준비 사업에서부터 그 의문점이 노출된다.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만남을 앞두고 매우 흥분해 있었다. 해마다 7월이면 삼지연으로 가서 무더위를 피하고 오는 그였지만, 그해만은 김정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묘향산초대소를 택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며칠 숙식하게 될 묘향산 특각을 살펴보는 한편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경제일꾼협의회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나라에 연유도 모자라고 간부들이 시간도 없겠는데 평양과 거리가 가까운 묘향산을 놔두고 양강도에까지 멀리 불러낼 것이 뭐 있는가” 하며 떠난 것이었다. 먼 거리가 아니어선지 다른 행차 때보다 따라가는 사람도 적었고 호위장비도 간편했다. 그가 출발하기 며칠 전 호위안이며 동행성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직접 점검한 사람은 김정일이었다. 김일성이 평시에 협심증 증세가 있었고 더욱이 나이가 여든을 넘어 언제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기 위해 심장담당 주치의가 동행하는 것이 호위원칙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그 주치의를 묘향산행 명단에서 삭제했다. 그동안 수령님을 모셔오느라 한번도 휴가를 제대로 못 가보았겠는데, 수령님께서 통일성업을 눈앞에 두고 마음도 육체도 아주 양호한 지금에나 주치의가 안심하고 옆 자리를 비워도 된다는 이유였다. 친위대원들을 상대로 김일성의 경호와 관련해선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고 신조 삼아 설교하던 김정일이었다. 그래서 호위사령부 청사에 들어가면 정면의 대형 대리석판에 ‘수령님의 호위사업에는 천만번 중 단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됩니다’라는 김정일의 친필이 사령부의 생명처럼 쪼아 박혀 있다. 병실과 구내 곳곳에도 빨갛게 글을 써서 걸어놓았다. 전 대원이 신념화, 생활화하라는 의미였다. 그런 김정일이 이렇듯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다. 또한 의심스러운 것은, 김일성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혈압이나 맥박, 체온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그 어떤 큰 수술도 진행할 수 있어서 일명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부르던 독일산 최첨단 의료설비들도 수행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김일성의 부관은 의문을 제기했으나 김정일의 지시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행위가 될 것만 같아 두번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정상회담 준비에 들뜬 김일성 7월3일 묘향산에 도착한 김일성은 행장을 풀기 바쁘게 김영삼 대통령의 숙소로 정해진 초대소를 찾았다. 냉장고의 크기며 방의 조명문제, 가구 색깔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둘러본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보기나 한 듯 들뜬 마음으로 자기 서재로 돌아가 무엇인가 부지런히 글을 썼다. 훗날 자기가 답방으로 서울에 도착했을 때 환영파티에서 직접 낭독할 연설 원고였다. 원고는 30분짜리 분량이었는데 내용의 기본요지를 간단히 설명한다면 이런 것이었다. 반세기 만에 만난 서울 시민에게 하는 인사말로 시작하여, 북한의 정치적 안정과 사회주의의 우월성, 라진-선봉지구에 대한 소개, 그 황금의 삼각주를 한국에 열어주겠다는 약속, 또한 한국은 돈이 많지만 북한은 그 대신 주먹이 강하다는 비유법으로 남과 북의 긍정성을 평가하고 나서 앞으로 이 두 개가 합쳐진다면 우리 한반도는 세계 선진국으로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은 이렇게 통일연설문을 제 손으로 직접 작성해보며 그날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어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는지 김정일에게 전화로 장시간 읽어주기까지 하였다. 그때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수령님! 서울 시민에게 그냥 ‘김일성이 왔습니다’ 그러지만 말고, ‘백두산의 호랑이 김일성이 왔습니다’라고 큰소리를 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 부추김에 김일성은 어린애처럼 마냥 좋아했다.
그러나 그 전화를 받고 난 뒤의 김정일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서기에게 연형묵, 리용철, 김용순을 비롯한 자신의 최측근들을 당장 데려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날 밤 김정일은 대동강초대소에서 이들과 비밀모임을 가졌다. 대동강초대소는 1980년대 말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선사한다면서 수천만달러를 들여 지은 집이다. 그 호화스러움이 얼마나 극치에 이르렀으면 김일성도 그 집을 돌아보고 나서 너무도 어이가 없어 “이런 걸 하나만 더 만들면 우리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조직비서가 나에게 낯내기 해서 뭘 얻자는 거야. 당장 폭파해버려!” 하면서 노기등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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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신격화 가운데 하나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한치도 어김없이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법으로, 신의 명령으로 각색하기 위해 북한 정부는 수십년 동안 인민에게 그 어떤 불가능도 ‘수령님의 교시’로 강제로 집행케 해 왔던 것이다. 때문에 폭파하라고 말하면 말 그대로 폭파해야 했지만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거짓말을 했다. 너무도 많은 돈이 들어가서 폭파하기엔 아까우니 대신 외국 수반급 초대소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김일성도 수천만달러를 잿가루로 날려 보내기엔 아까웠던지 “다시는 그 따위 짓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오금을 박은 후 허락했다. 그러나 대동강초대소는 그때부터 파티라든가 각종 비밀모임이 이루어지는 김정일 전용 초대소로 이용됐다. 김일성에게서 전화를 받고 통일연설문 내용을 구절구절 듣고 난 그날 밤, 김정일은 최측근들을 대동강초대소로 불러들여 이런 질문부터 들이댔다. “통일이 중요한가, 사회주의가 중요한가. 누가 한번 대답해봐.” 김정일이 조용히 묻자 그즈음의 통일분위기를 강조하는 의미인 것으로 안 누군가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장군님, 수령님대(代)에 우리는 기어이 통일을 이룩하고야 말 것입니다.” 순간 김정일은 와인잔을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내다 쏴 죽이라!” 그러자 정황을 파악한 연형묵이 대뜸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장군님, 우린 통일보다 사회주의가 더 소중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김정일은 속에 맺힌 이야기를 쏟아내듯 역설했다. “맞단 말이야, 우린 사회주의를 지켜야 돼! 지금 통일하자는 놈들은 사회주의를 포기하자는 놈들이야. 동독이 먹힌 것처럼 우리도 당장 흡수되고 말아. 그러면 당신들이 이 자리에 살아나 있을 것 같아서 그 따위 소릴 해! 통일, 통일 하는 놈들은 다 노망한 놈들이야!” 그 노망이란 누굴 두고 한 소리였을까. 통일보다 사회주의가 더 소중하다는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 김정일은 한밤중에 최측근들을 불러냈을까. 그때부터 간부들은 통일이란 소리를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으며, 더욱이 김일성 사후에는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 통일을 주제로 문학을 일절 창작하지 말 데 대한 당중앙 선전부 내적지시가 떨어졌다. 또한 국부(國父) 사망 기회를 노려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이 북침도발할 가능성이 있다며 전국에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준전시 상태를 선포함으로써 온 나라를 통일 분위기에서 대결 분위기로 급변시켰다.
김일성, 쌀 배급중단 사실 몰랐다 김정일이 자기 측근들과 사회주의 우선론을 다짐하던 그날로부터 3일 후인 7월6일, 김일성은 묘향산에서 경제일군들과 협의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기록영화에는 1994년 1월1일부터 7월7일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의 대외활동과 국내 현지지도 사업이 수록돼 있다. 이 기록영화에서 보여주듯 김일성은 묘향산에서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의 협상결과를 이야기하며 한반도에 통일 분위기가 유리하게 조성된 만큼 김영삼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우리 혁명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그 준비정형을 자기가 직접 점검하겠다며 간부들을 하나하나 불러 세웠다. 먼저 철도상을 일으켜 세워 김영삼 대통령이 비행기가 아니라 육로로 오게 해야 하는 만큼 언제까지 레루(레일)를 연결할 수 있는지 물었다. 철도상이 우물쭈물하자 김일성은 담배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배짱 있던 철도상이 왜 그래? 왜, 김영삼이가 마음에 안 들어?” 장내에 가벼운 웃음이 퍼지자 철도상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수령님! 수령님이 지정해주신 그날까지는 레루를 놓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조선에 이 김일성의 지시대로 안 되는 일도 있는가!” “저… 그 뜻이 아니고, 날짜를 맞추자면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지금 현재 실정을 볼 때….”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나라에 사람이 없다니. 자재나 설비가 모자란다면 이해가 되지만 인력이 모자란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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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언성이 높아지자 철도상은 더는 숨길 수 없었는지 말을 이었다. “수령님, 사실 요즘에 주민들은 국가로부터 배급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양 시민들은 그래도 한 달에 보름 분이나마 배급을 타고 있지만 지방은 쌀 없는 집이 한두 집이 아닙니다. 자재나 설비는 자력갱생의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도 있고 노동자들의 당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먹지를 못하니….” 이때 김일성은 주먹으로 책상을 꽝 내리쳤다. “뭐야? 언제부터야! 쌀 못 주는 게 언제부터냐고!” 그 상황에서 더 놀란 사람들은 협의회 참가자들이었다. 국가주석이, 인민의 어버이로 불리는 김일성이 이미 3개월 전부터 국가가 인민에게 배급을 중단한 사실을 모르다니. 사람들은 그 순간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허위보고와 과장된 기만자료로 김일성의 눈과 귀를 막아온 김정일을 생각했다. 김일성은 그렇게 얻어진 고요와 안정 속에서 권력계승문제도 순조롭게 생각했던 것이다. 전혀 뜻밖의 실태에 경악한 백발의 김일성은, 그동안 경직되어온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이미 전부터 가슴에 옹이진 그 수치감을 다시금 느끼는 게 아파서인지 더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기록영화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를 보면 표정이 굳어 있는 김일성에게 경제담당 여성 부총리인 윤기복이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그것은 철도상에게서 인민들에 대한 식량배급이 중단됐다는 말을 듣고 침통해하는 김일성의 심사를 풀어주기 위해 윤기복이가 4·15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이때 여성 부총리는 “수령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7월 말까지는 두메산골 학생들에게도 선물교복을 공급할 수 있다고 청하지도 않은 사업보고를 했다. 이 교복은 원래 김일성 탄생일인 4월15일에 즈음하여 온 나라 학생들에게 공급하게 돼 있는 것이지만 외화부족으로 6월까지도 실행이 안 돼 김일성이 자꾸 재촉하던 참이었다.
마지막 대화 “그래그래. 윤기복이 그 말에 내 기분도 좀 풀리는 것 같구먼. 피곤해서 그러는데 좀 쉬었다 하자.” 김일성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간 즉시 한밤중에 김정일을 찾았다. 평소처럼 다함 없는 존경의 태도로 전화를 받는 김정일에게 김일성은 밀쳐내는 것 같은 힘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민들에게 쌀을 주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야!” 김정일이 무언가 답을 하자 김일성은 “이러고 저러고 할 것 없이 쌀을 주지 못하는 게 사실인가” 하고 같은 말로 다그쳐 물었다. 그 다음 한동안 김정일의 변명을 듣다가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와락 고함을 질렀다. “내가 인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 것이 언젠데 이제 와선 쌀도 못 준다는 거야. 그리고 그걸 나한테 왜 숨겨? 그런 식으로 일하겠으면 최고사령관이고 조직비서고 싹 그만두라!” 화가 난 김일성은 팽개치듯 전화를 내려놓았다. 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의 이 통화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됐다. 훗날 김정일은 이 대화내용을 누설했다는 죄로 호위사령부 1호 호위총국(호위사령부에는 두 개의 총국이 있었는데 1호는 김일성 호위총국이고 2호는 김정일 호위총국이다. 당시 두 총국 사이에는 이상하게도 미묘한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 고급군관 몇 명을 적선(한국의 안기부와 내통한 혐의)에 몰아 총살했다.
김일성은 다음날인 7월7일 오전 다시 시작한 협의회에서 철도상에게 “김정일 조직비서가 군량미라도 내놓겠다고 했으니 반드시 철도공사를 약속 날짜에 끝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른 기타 문제도 해당 상들에게 짤막짤막하게 의견을 피력한 다음 산란해진 마음을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는지 책임부관에게 담배를 달라고 하였다. 7월말 전당·전민에게 보낸 당 중앙 선전부 강연과 강연제강 자료를 보면, 김일성의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은 이미 필연적이었다는 듯 “수령님께서 간부들과 통일문제를 논의하시다가 그동안 너무도 피로하신 탓인지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부관에게 담배를 요구하시었다”고 서술돼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가슴을 두드린 것은 그때가 아니다. 여기서 휴회하고 오후에 계속하자고 말한 뒤 김일성은 습관대로 오침(午寢)에 들었다. 그동안 협의회 참가자 성원 모두는 김정일의 불호령을 받고 버스로 평양에 급송됐다. 김정일은 묘향산에서 방금 도착한 그들이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심한 질책을 퍼부었다. 특히 철도상에게 욕과 저주가 쏟아졌다. 그러면서 김정일은 “군량미는 내가 눈뜨고 살아있는 한 통일전쟁을 하기 전까지는 단 한 알도 꺼낼 수 없다”고 오금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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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줄도 모르고 다시 협의회를 시작하자고 나름대로 서두르던 김일성은 평양의 김정일에게 간부들이 모두 불려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듣자 분기어린 눈으로 한참 허공을 노려보았다. 이어 부관에게 담배를 가져오게 하고는 방으로 돌아가 비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답답하다고 하면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쳤던 것이다. 당창건기념관의 악연
김정일의 전횡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권력 반경이 커지면서 김정일의 횡포는 더더욱 노골화됐고 그 때문에 말년의 김일성은 면전에서 김정일을 질책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화를 낼 때마다 버릇처럼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너는 그래서 어렸을 때 네 동생도 죽인 거야!”라는 말이었다. 평양시 중구역 해방산 밑에 가보면 유일하게 유럽식 고풍으로 지어진 당창건기념관이 있다. 평양시에서 가장 멋쟁이 건물로 손꼽히는 이 집은 원래 박정식이라는 자산가가 쓰던 사택이었는데, (해방 직후)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자 공산당청사가 허술해서 되겠냐며 선뜻 내놓은 것이었다. 북한 노동당이 그 건물에서 창건됐다는 이유로 훗날 당창건기념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으며, 오늘에는 그 건물에서부터 시작해 방대한 면적의 중앙당지역이 형성됐다. 박정식은 북한의 초대 재정상을 지냈고 1948년 귀순형식으로 한국에 침투해 국회의원까지 하며 대남공작활동을 하던 중 6·25전쟁 발발 전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사형됐다. 당 총비서로서 당창건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법한 일이지만, 김일성은 박정식을 추억하면 슬프다는 이유로 생전에 단 한번밖에 가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 건물 마당의 한구석에 있는 작은 연못에 어이없게도 둘째아들이 빠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동생의 손을 잡고 연못으로 나간 것이 바로 일곱 살 나이의 김정일이었다.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던 김정일은 동생이 물에 빠지자 허우적거리는 걸 보면서도 어른들이 알면 욕할 것 같아 몰래 숨어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고 한다. 연못이 얼마 깊지 않아 걸어 들어가면 건져내올 수도 있었지만, 바닥의 이끼가 미끄러워 바로 서지도 못하고 자꾸만 넘어지며 헤덤비는 동생을 보고 어린 김정일은 겁에 질렸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노여운 일이 있을 때마다 “너는 그래서 어렸을 때 네 동생도 죽인 거야” 하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바로 서 있기만 해도 죽지 않을 얕은 물에 아들이 숨졌다는 사실 자체가 어이없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그때 그 정황을 어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달아난 김정일이 어떤 불쾌한 연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모욕적이고 무서운 욕은 없었는지 김정일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랐다.
“너무 여자가 많아!” 김일성은 아래 사람들 앞에서 김정일에게 이런 추궁을 한 적도 있다. “내, 가만 보니 조직비서한테 여자가 너무 많아!” 김정일의 여성편력을 쓰자면 아마 책 하나로는 모자랄 것이다. 김정일에게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인 측면이 바로 여성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다. 권력만족을 최대한 만끽해본 김정일은, 더는 초월할 수 없는 자신의 발광을 그 어떤 여성에게 구속당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해소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심리적인 반충이라고 할까.
아니나다를까 한때 김정일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반말을 하는 여성이 한 명 있었다. 김영숙도 아니고 홍일천도 아니다. 성혜림도 아니고 고영희도 아니다. 권력 위의 권력이 있던 그 여자는 김옥이었다. 아직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여성의 이름은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의 책에서 ‘옥이 비서’라는 말로 얼핏 스친 적이 있다. 왕재산 경음악단 출신으로서 김정일보다 21년 아래인 김옥은 김정일에게 걸핏하면 마구 반말을 퍼붓고 거리낌없이 신경질도 부렸다. 그러나 김정일은 마치 그런 모습을 즐기고 감상하듯 웃으며 감수했다. 김정일에게 험담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 그러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김옥에게 당중앙 정치국 위원들이며 비서, 부장들도 김정일을 숭배하듯 최고의 경어를 썼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일성은 “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며 주요 당 간부들 앞에서 조직비서의 생활이 정돈돼 있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때 김정일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표현하자 김일성은 주위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너무 여자가 많아!” 하고 꼭 찍어서 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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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일성은 혁명원로들과의 면담자리에서 자기의 늙음을 한탄하며 권력이양을 너무 서둘렀다는 후회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평일이 앞으로 큰일 할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놈인데 참 미안하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이고 참회하듯 말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김일성 주변의 고위직책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 물러난 한 원로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김일성이 통일문제를 서두른 이유는, 모든 권력이 일방적으로 김정일에게 집중되어 허울로 전락한 주석직과 총비서직의 힘을 통일이라는 숭화된 분위기를 이용해 어느 정도 되찾으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과 관련한 문제들은 본인이 직접 틀어쥐고 가속화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급사(急死)로 끝났다는 설명이다.
7월7일의 의문점 다시 1994년 7월7일의 이야기다. 김일성은 협의회 참가자들마저 김정일에게 빼앗기고 빈방에 홀로 남아 있었다. 푸른 섬광이 번뜩이고 우레가 쾅쾅거렸다. 무언가 써보려고 펜을 쥐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전전긍긍하던 김일성은 부관에게 담배를 가져오라고 했다. 부관이 “오늘 너무 많이 피우셨다”고 하자 김일성은 버럭 신경질을 냈다. 그때 초대소에는 김정일 사람 몇 명이 있었다. 협의회 참가자들을 평양으로 실어가기 위한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가지 않고 그냥 남아 있었다. 그들이 있다는 걸 알자 김일성은 자신의 말이 그들을 통해 김정일에게 전달될 것이라 생각한 듯 서재로 불러들여 한바탕 목소리를 높였다. 실은 김정일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한 셈이었다. 부관은 그렇게 주석한테 호된 욕을 듣고 응접실로 돌아온 그들의 분위기를 감안해 조심스럽게 접대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김일성이 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자정이 넘도록 김일성의 서재에 불이 켜져 있어 잠깐 다녀오겠다고 갔다온 부관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자리에는 심장전문 주치의도 없었으므로 효과적인 치료도 불가능했다. 전화로 황급히 김정일에게 사실을 알리자 김정일은 곧 헬기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어도 헬기는 도착하지 않았다. 날아오던 헬기가 날씨조건 때문에 추락한 것이다. 결국 7월8일 새벽2시 김일성은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묘향산초대소 자기 서재에서 숨지고 말았다. 83세의 김일성이 급병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불행은 쌍으로 온다고 하지 않는가. 살지 못할 운명이었다면 정말로 날씨조건으로 헬기가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의심할 수 있는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김일성과 마지막 시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바로 김정일 충성파였다는 데서 의심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다”고 말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오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김일성을 접견하자면 사전통보가 있어야 하고 또 접견이유를 밝히고 그에 대한 김일성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김정일의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그 모든 원칙을 초월했다. 둘째로 그들은 와서 김일성에게 욕밖에 먹은 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자간이라 해도 특별한 용건도 없이 아랫사람들을 내왕시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김일성의 시신이 평양으로 이송된 후 그의 방을 장악하고 문건들을 정리, 압수해 갔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것은 김일성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 김정일의 행동이다. 첫 번째 헬기가 묘향산으로 막 떠오르려는 순간 김정일은 자기도 그 헬기에 오르겠다고 막무가내로 야단을 피웠다. 경호원들이 앞을 막아 나서자 김정일은 마지막엔 그들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며 길을 내라고 호령하기도 했다. 가겠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며 거의 몸싸움을 하다시피 했는데, 그때 경호원들은 김정일의 허리춤에 박혀 있는 굳센 물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권총이었다.
김정일의 두려움, 그리고 저격 김정일이 무더운 여름철에도 방탄조끼를 입고 다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김일성이 급병으로 생사를 오고 가는 이때에 권총을 휴대할 생각을 한 것일까. 혹시 김일성이 협심증 발작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암살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했던가. 그래서 적진을 향해 단신으로 무장을 하고 뛰어들려고 한 것인가. 어쨌든 갔으면 추락해 즉사했을 그 헬기에 김정일은 오르지 않았다. 김정일이 고영희를 조선의 어머니로 우상화할 데 대해 당과 군에 지시를 하는 좌석에서 말했듯, 그날 고영희가 그를 말리지 않았으면 김정일도 조선도 더는 없을 뻔했던 것이다. 김정일은 당중앙 선전선동부 부장 정하철, 중앙당 군사부 제1부부장 리용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국장 조명록, 인민군 대장인 현철해, 박재경 등 주요 간부들 앞에서 2002년 2월15일 자기 아내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 선전을 할 데 대해 지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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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사람은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우리 집사람처럼 나를 아끼고 위해주는 혁명동지는 없습니다. 나는 수령님 3년상을 치르는 전기간 몸에 권총을 휴대하고 살았는데, 그 총은 우리 집사람이 혹시 나쁜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면서 나에게 아침저녁으로 쥐어준 것입니다.” 8년 세월이 지나 아내의 칭찬을 하느라 고르던 말 중 튀어나온 김정일의 이 고백에는 죽은 김일성마저 두려워하는 그의 심리가 엿보이는 듯하다. 김일성의 죽음과 동시에 김정일이 그 누군가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기나 한 듯 방어적인 심리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1994년 7월8일 김정일은 김일성의 죽음이 확인된 그 순간 호위사령부 2호 호위총국에 비밀지시를 주었다. 1호 호위총국을 철저히 감시하고 전투동원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된 의혹을 만천하에 깨밝히고 그 주범을 처단하려는 듯, 김일성의 경호를 담당했던 1호 호위총국 내 고급군관 한 사람이 김정일을 향해 사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격전 과정에 김정일 경호원이 즉사하고 주변의 간부 하나도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1호 총국을 해산했으며 한평생 군복을 입고 호위사업에서 늙어온 호위사령부 선전부장, 정치부부장, 조직부장, 간부부장 등 많은 1호 총국 출신 장령급 및 좌급 간부들을 안기부 연루자로 몰아 청산했다. 그러고도 그 뿌리를 다 뽑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정치적으로 우수한 수십만의 인원과 현대적인 무기들로 완전 무장한 호위사령부라는 최고의 친위부대를 외면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에 10처라는 신설 경호부서를 내오게 하여 거기에 자기 목숨을 맡겼다. 오늘날에는 그 10처가 보위사령부에서 떨어져 나와 국방위원장 직속 행사총국으로 승격되어 북한 최고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국방위원장이기 때문에 군이 응당 호위사업도 해야 한다는 군 수뇌부의 설명에 대부분 사람들은 그럴 법도 하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 이면을 생각해보면 김정일이 김일성 충성파 인물들을 이상하게도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친핏줄인 여동생 김경희와 만나는 일마저 극력 피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김경희는 자꾸만 김정일을 찾아다니며 장시간 대화할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어쩌다 힘들게 만나면 언성을 높여 서로 다투는 바람에 몇 분 안 돼 곧 대화가 중단되곤 했다. 그때마다 김정일의 방을 뛰쳐나오는 김경희의 얼굴은 항상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러지 않아도 변덕이 심한 이 여인의 사고는 나날이 정상능력을 잃은 듯싶었다. 김경희에게는 북한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김성호라는 남자 정부가 있었다. 나이 마흔이 되도록 김경희의 시중을 드느라 장가도 가지 않은 대단한 미남자다.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전체 심사위원으로부터 놀라운 실력, 천재의 실력이라고 인정받은 후,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바이올린 교수로 일하다가 김경희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가 딸을 가르치는 과정에 김경희와 연인관계로까지 발전한 사람이다. 훗날 김성호는 중앙당 조직부 제1부부장직을 맡게 된 장성택에 의해 귀신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는데, 언젠가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경희가 술만 먹으면 ‘장성택이 그 놈이나 오빠나 다 똑같은 놈들이야,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들이야!’ 하고 몹시 분격해 하는데, 혹시 김정일이가 김일성을 어떻게 한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는 많지만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산이 높은 줄 꼭 물어봐야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김정일은 권력이냐 혈육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서슴없이 권력을 끌어안을 사람이다. 피가 식을 만큼 식어 종당에는 친 혈육애마저 거부하는 냉혈의 김정일이기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늘까지 희한한 독재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신찬호 사건’의 전모 하루는 김경희가 간부들과 함께 있는 김정일을 찾아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러댄 적이 있다. “오빠! 이모가 있다는 소릴 왜 나에게 안 했어요?” 김정일은 주위 사람들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동생의 언행에 화가 난 듯 마주 소리쳤다. “이모는 무슨 이모!” 김일성을 잃고 난 후 김경희는 김정일이 무슨 말을 하든 무작정 부정부터 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니,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귀로 직접 들어봐야겠어요.” “장성택이가 직접 가서 확인해봤다지 않아!” “그 장성택이 말은 하지도 말아요. 내 눈엔 그가 사기꾼으로밖에 안 보여요. 그리고 나한테는 지금 가짜 이모라도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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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심해지자 간부들은 자리를 피해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간부들 사이에는 ‘신찬호 사건’이란 이야기가 쉬쉬하며 옮겨졌다. 신찬호는 중앙당 신소처리부 부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전국의 신소 문건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종합하고 심각성의 선후를 따져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부서의 책임자로, 누구보다 당성이 투철하고 고지식한 학자형이었다. 그런 사람을 김정일은 김일성 측근의 한 사람으로 보고 사소한 문제를 트집잡아 ‘혁명화’를 보냈다. 북한의 당 간부들치고 혁명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드물다. 혁명화란 일을 잘하거나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단련을 통해 그 사람의 사상을 검토하고 수양시키는 일종의 경력준비 같은 것이다. 또 이따금 그렇게 조직의 힘으로 인간을 뿌리째 흔들어놓아야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 항상 소심하게 생각하고 애당초 권력야심 따위는 가질 수 없게 된다는 믿음 때문에, 김정일은 혁명화를 하지 않은 간부라면 덜된 자로 인식하고 애당초 자기 곁에 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혁명화에도 부류가 있다. 본인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한 발전적인 혁명화가 있고, 사람 하나를 버리는 셈치고 온갖 고통과 불행을 강요함으로써 그것을 지켜보는 남들이 간접적으로 자극받게 만드는 무자비한 혁명화가 있다. 신찬호의 경우는 두 번째에 해당했다. 그가 신소처리부장직에서 해임되어 혁명화를 내려간 곳은 18호 관리소였다. 18호 관리소란 인민보안성(당시는 사회안전성)이 운영하는 수용소인데, 장성택이 중앙당 조직부 제1부부장 사업을 맡으며 제일 먼저 해놓은 일이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리에 방대한 면적의 전기철조망 구역을 만든 것이다. 사회안전성의 권위를 극대화한다는 의미에서 국가안전보위부 정치범수용소 수준의 종신수용소를 만들 필요성을 주장하여 김정일로부터 비준을 받아냈던 것이다.
중국에서 온 ‘지도자’의 이모 신찬호가 18호에 들어가니 거기엔 상습 살인범들도 있었지만, 10년 전 헤어진 낯익은 중앙당 직원들도 있었고 이름있는 작가, 학자들, 영화배우를 비롯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인물은 김정일의 이모 김영숙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김일성의 전처이며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조선의 3대 장군으로 신격화하고 있다. 책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김정숙에 대해 물어보면 누구나 똑같은 대답을 한다. “조선의 어머니 김정숙 동지는 함경남도 신파군에서 1917년 12월24일 가난한 빈농의 맏딸로 태어나시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김기성 동지도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셨다가 일제 놈들에 의해 장렬하게 희생되시었습니다.” 신찬호도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18호 관리소라는 처참한 곳에 김정숙의 여동생이 갇혀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어 그는 자기가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는 것 역시 혁명역사교과서에 써 있는 한 페이지 문장처럼 ‘민생단’(일본경찰이 1930년대 중엽 반일조직을 색출하기 위해 조선인 사이에 심어놓은 비밀조직. 그 규모나 내용은 보잘것없었지만 이념투쟁의 붉은기 수호를 외치던 당시 조선 공산주의세력 내에서는 그 ‘민생단 의심병’ 때문에 서로 반목질시하고 죽이는 참사가 빚어져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작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갖게 됐다. 그리하여 그는 김정일에게 친이모와의 극적상봉을 마련해줌으로써 그 공로가 인정되어 지옥 같은 18호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어설픈 희망에 목숨을 기대게 되었다.
신찬호는 먼저 계호 한 명을 포섭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에는 수령의 권위를 백방으로 옹호보위하는 길에서는 그 어떤 주저나 타협도 있어선 안 된다는 문구가 있다. 신찬호는 중앙당에서 사람과의 사업을 오래 한 경험을 살려 그 10대 원칙의 자자구구를 다시금 상기시키며, ‘대내의 나쁜 놈들이 수령님 처제를 매장시키려 하는 만큼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고 단순한 계호원을 추동질하였다고 한다. 하여 계호원의 방조하에 밖으로부터 휴대형 녹음기를 들여온 다음 김영숙에게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겪은 고생에 대해 녹음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아무나 김정일에게 신소한다고 해서 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한 해 100개의 신소가 제기됐다면 한두 건이나 가능할 정도다. 그것도 일반 사람들의 하소연은 문장이나 내용이 잡스러운 것이 태반이라는 이유로 거의 일축되고,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안목에 들어있던 사람들의 글이 선발돼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신소도 권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북한에서 보통사람도 아닌 종신수용소 수인의 글이 김정일에게 올라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중앙당 신소처리부장을 지낸 신찬호에게는 늘 하던 일이라 김정일에게까지 올려보낼 수 있는 지하통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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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계호원에게 휴가를 받게 한 다음 테이프를 쥐어주었다고 한다. 평양에 가서 처음에는 누구에게 갖다주고, 그 사람이 또 다음 누구에게 전달하고, 이런 식으로 차례차례 선을 잇게 했다. 과연 김정일은 어느 날 그 테이프를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녹음기 속의 여인은 몇 년 동안 짐승처럼 갇혀 살아온 설움을 마디마디 쏟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운명의 녹음기 그러나 그 애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정일은 장성택을 불러 테이프를 던져주며 “왜 아직 이 문제를 결속하지 않고 질질 끌고 있는가” 소리를 질렀다. 테이프에 관계된 자들은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을 테니 한 놈도 절대로 살려두지 말라고 지시하고 나서는,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올 경우 18호 관리소를 폭파해버리겠다고 으르릉거렸다는 것이다. ‘일찍이 생모를 잃고 아버지 김일성마저 사망한 김정일에게 이모와의 뜻밖의 상봉이 얼마나 감격적인 위안이 될까’ 하는 일념으로 테이프 보고에 공헌한 김정일의 충신 아홉 명이 그날 밤중으로 승합차에 짐짝처럼 실려 18호 관리소로 끌려갔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독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 김영숙, 신찬호, 계호원과 함께 말뚝에 묶인 채 사형당했다고 한다. 왜 김정일은 자기의 이모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죽이라고 명령했을까. 그 동안 북한은 김정숙 가정의 투쟁경력을 과장하고 혁명가 혈통의 순수성을 주장하기 위해 죽은 남동생 김기성 이외에는 형제가 없다고 선전해왔다. 그런데 중국에서 귀국한 김영숙의 말은 전혀 그 선전과 달랐다는 것이다. 자기가 김정숙의 동생이 맞다고 확인해주기 위해 하는 말들이 너무도 엄청난 증언이었던 바, 김정숙은 이미 어릴 때 한번 시집을 갔으며, 자기는 마음 무던한 지주집의 첩으로 들어갔었다는 등등 김정일 신격화에 형편없이 방해가 되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김정일은 그 입을 틀어막기 위해 김영숙을 종신형 수용소에 가두었고 한동안 그 문제를 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찬호로 인해 다시 상기하게 되니 몹시 화가 났던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사는 배다른 형제도 마음놓지 못하고 항시 경계하고 증오하는 판인데, 평생 만나본 적도 없는 이모 죽이는 것이 무슨 대수였겠는가. 비슷한 사례는 그 전에도 있었다. 정무원 부총리를 지낸 김달현은 김일성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친인척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나라에 김달현이만큼 유능한 경제일꾼은 없어. 그는 경제뿐 아니라 외교술도 능하고 수학에도 비상해. 그런 인재가 우리 김씨 가문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후련한 자랑거리란 말이야.” 그래서인지 김일성은 무슨 걸리는 문제가 있으면 김달현을 금수산의사당에 불러 토론하곤 했다. 말이 토론이지 김달현의 의견을 전적으로 정책에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동구권이 무너지던 시기 김일성은 사회주의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외국에 출장 나간 김달현을 급히 불러들였다.
김일성·김달현 vs 김정일·연형묵 그런데 탁자에 마주앉은 김달현은 김일성의 ‘대안의 사업체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부터 내놓았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사회주의식 생산체계를 확립한 주체적인 경제체제라고 북한이 수십년 선전해온 김일성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것을 부정하면 김일성도 부정하는, 정치적 문제였다. 때문에 김달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동석한 김정일은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김일성은 오히려 더 들어보자고 제지하며, 김정일에게 이제부터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김일성은 자기 스스로 학식이 부족하다고 인정할 줄 아는 대인이었다. 김달현은 냉전구도가 허물어진 국제적 현실을 인정하고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이 계속 살아 남으려면 역시 경제발전을 선행해야 한다면서 중국의 번영을 강조했다. 중국 이야기가 나오자 김정일은 또 발작을 일으켰다. “중국이 무슨 사회주의인가. 등소평 그 쥐새끼(김정일은 항상 등소평을 가리켜 쥐새끼라고 말했다) 한 마리가 지금 중국이란 큰 땅덩어리를 다 말아먹고 있는데 그걸 본받으란 소린가.” 김일성은 오늘은 그만하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오후 시간에 김달현을 따로 불러 의견을 청취했다. 며칠 후 김일성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들과 인민경제대학 박사들을 만나 ‘대안의 사업체계’가 현실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독식 경제를 연구할 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또한 “박정희가 어떻게 남조선 경제를 일으켜 세웠는지 당신들은 생각 좀 해보았는가”라고 물어보면서 “기회가 마련되면 남조선에 경제 고찰단을 파견하겠다”고 선언해 회의장에 있던 전체 성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국가경제 문제를 놓고 김일성과 김달현은 개혁론을 주장하고, 김정일과 연형묵 총리는 이른바 사회주의 위칙주의를 주장하는 대립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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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정일과 김달현은 단순한 인척관계가 아니었다. 김정일이 어렸을 때 계모가 미워 집을 뛰쳐나오면 항상 김달현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 절친한 사이였다. 김정일은 그 옛정을 다 잊은 듯 그때부터 김달현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하여 김일성 사후 “혁명원칙에는 친척이고 뭐고 없다”며 김달현을 정무원 부총리에서 해임시켜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내려보냈다. 그 죄명은 어마어마하게도 당정책 비방 및 직무 태만이었다. 당정책 비방이라는 죄명의 근거는 이랬다. 식량난과 함께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북한은 전국 각 도, 시, 군, 직장마다 자체기술과 자재로 중소형 발전소를 건설하는 산발적인 방법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김달현은 그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노력과 자재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전문공장에서 기성화된 설비를 만들고 현재 진행 중인 국가적 전력생산대상 건설에 힘을 집중해야 보다 효율적이고 전망적이라고 한마디 했다. 이것이 그만 당의 자력갱생정책을 비방한 것이 되었다. 김정일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김달현이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내려간 다음에는 공장의 생산부실과 일부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문제 삼아 국가 검열단을 내려보냈다. 김달현은 자신의 숙적인 연형묵이 검열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실에서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했다. 김정일은 인척관계의 김달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의 처와 자식들을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평양에서 ‘곁가지’라는 말은 김정일의 방계 친인척을 가리키는 말이다. 온 사회에 김일성주의, 김정일주의를 확립한다면서 김정일은 직계가 아닌 친인척들의 득세와 우상화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무는 곁가지를 잘라줘야 곧게 잘 자란다는 의미에서 김정일이 처음 이들을 ‘곁가지’라고 표현한 다음부터 이들 친인척은 북한 주민들에겐 마주 서서도 안될 사람처럼 인식되었다. 그 곁가지들과 어울리다가 종파로 몰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앙당 간부들은 김정일과 배다른 형제인 김성애의 자녀들과는 눈길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곁가지 제거’의 속뜻은 김성애는 김정일이 당 사업을 시작하던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평양 교외에 있는 13호 별장에 구금되다시피 지내고 있다. 김일성이 김정일보다 더 대견해하고 사랑하던 김평일은 외국대사관 대사로 오래 전에 임명받고 해외추방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삼촌인 김영주는 뇌혈전 후유증으로 지금은 운신을 못하고 있다. 이들의 자식은 절대로 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 조직부 내의 간부사업 원칙에 의해 모두들 성과 기관의 평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소개해준 첫번째 처 김영숙은 주울초대소 소장으로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으며, 두 번째 처 성혜림은 망명 중 사망했다. 김정남의 소꿉시절 친구인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은 한국으로 왔다가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람이 돈에 환장하면 제 아내도 팔고 권력에 미치면 제 어머니도 살해한다고 했다. 권력쟁탈을 위해 위아래 핏줄을 잔인하게 살해한 일은 우리 봉건왕조뿐 아니라 다른 나라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친모를 잃고 계모의 손 아래서 야심과 반항아의 기질만 익히며 자란 김정일은 지나간 그 역사의 비화를 재현한 동영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에서 200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이 굶어죽었다는 사실을 잘 믿지 않는다. 먼 세기도 아니고 노예제나 봉건국가도 아닌 만민평등 이념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한둘도 아닌 수백만이 아사(餓死)했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게 사실이라면 그 정부는 응당 책임을 지고 해산하든가 붕괴돼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북한은 정상 국가가 아니다. 수명이 굶어죽었다면 그것은 그들 운명의 불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수백만이 생죽음을 당한 이 비극은 북한 정부가 말하는 제국주의의 봉쇄 때문도 아니며 자연재해로 인한 국가의 고난 때문도 아니고 엄연히 대학살인 것이다. 그렇게 반인륜적인 대범죄를 감행하고도 오늘까지 인민의 지도자를 자처하며 폭압정치를 계속하는 김정일. 권력쟁탈을 위해 제일로 가까워야 할 혈육부터 먼저 증오하고 박해한 철심장이기에 200만의 죽음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속 혁명을 부르짖으며 오늘까지 세습정치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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