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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죽염 만들어낸 한의사 주경섭

醉月 2008. 9. 14. 11:09
“진시황제가 찾던 불로장생의 묘약, 유황정 기운이 배어 있죠”
김서령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 사진·정경택 기자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모든 자연에는 저만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어떤 기운을 받느냐에 따라 철이 금이 되기도, 금이 철이 되기도 한다. “후아-” 크게 심호흡을 해보자. 대기 중에 흩어져 있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이자. 몸 안에서 나의 기운과 그들의 기운이 결합하는 것을 느꼈는가. ‘신약(神藥)’ 주창자 인산 선생의 제자, 주경섭 도해한의원장을 만났다.

죽염은 대나무통 속에 천일염을 넣고 아홉 번을 구워 만든다. 먼저 우리 남해안 지방에서 3년 넘게 자란 왕대나무의 마디를 잘라 만든 대나무통 속에 서해산 천일염을 단단하게 다져 넣는다. 그리고 거름기나 농약 기운이 미치지 않은 깊은 산속에서 파온 붉은 황토를 모래나 자갈 따위를 걸러내고 물로 걸쭉하게 이겨 이걸로 대통의 입구를 막는다. 소금을 채워넣은 대통들을 쇠로 만든 가마 속에 차곡차곡 쌓은 뒤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펴 굽는다. 충분히 구워지면 대통은 재가 되고 소금은 녹으면서 굳어 하얀 기둥으로 변한다. 대나무 기름인 죽력(竹瀝)이 이때 소금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이 소금기둥을 가루로 만들어 다시 새 대통 속에 다져 넣고 처음 했던 방법대로 다시 굽는다.

이렇게 여덟 번을 굽는데, 한 번 구울 때마다 소금이 흰빛에서 잿빛으로 짙어진다. 마지막 아홉 번째 구울 때는 1400℃ 이상의 온도로 가열한다. 그렇게 하면 대통 속의 소금은 완전히 녹아 마치 용암처럼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소금이 굳으면 돌덩어리나 얼음덩어리처럼 되는데 이걸 고운 분말이나 모래알 모양의 입자로 분쇄한 것이 죽염이다.

죽염을 만들 때는 반드시 서해안 천일염을 사용해야 한다. 서해안 옹진반도나 연평도 땅 밑에 신비한 광석이 있어 이 광물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바닷물 속의 약성을 다량 함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기과학(氣科學)의 발달에 힘입어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땅속에 거대한 기(氣) 덩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를 뒷받침한다.

쑥뜸을 뜰 때 반드시 강화도산(産) 사자발 쑥이나 싸주아리 쑥을 써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남해안이나 지리산 부근에서 자란 대나무를 쓰는 것도 거기서 자란 대나무에 중요한 약리작용을 하는 유황 성분이 가장 많이 함유돼 있기 때문이다.

소금을 센 불에 아홉 번을 굽는 것은 소금이 구워지면서 공간에 분포하는 백금 성분을 합성하는 까닭이다. 공기 중에는 불을 따라 들어가는 백금 성분이 존재하는데, 아홉 번을 반복해서 굽는 동안 다량의 백금 성분이 소금 속으로 들어간다. 이 백금은 서양의학에서도 항암제로 개발되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강철로 만든 가마에 굽는 것은 구울 때 철의 기운(鐵精)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홉 번째 구울 때 화력을 극도로 높이는 것이 좋은 죽염을 만드는 관건이된다. 수천 도의 고열로 눈 깜박할 사이에 용해시켜야 소금 속 불순물이 완벽하게 제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속에 함유된 수정(水精)의 힘과 불 속에 함유된 화기(火氣)가 백금 성분과 함께 소금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 즉 불에 굽는 과정에서 죽염은 오행의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기운을 고루 가진 물질로 변한다.

 

신약(神藥)의 대가 인산 김일훈

죽염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자죽염 얘기를 새로 들었다. 대통 속에서 아홉 번 제대로 구운 죽염은 구울 때 온도를 초고온으로 높이면 보라색 자수정 빛을 띤다는 것이다. 죽염을 처음 만든 인산 선생이 생전에 그 방법을 찾았으나 만들지 못하다가 그 제자가 자죽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였다. 수소문해서 그를 찾았다. 서울 태릉 근처 도해한의원의 주경섭(朱慶燮·38) 원장. 달려가서 그를 만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인산의 제자가 됐다. 주경섭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스승 인산 김일훈 선생이 누구인지 대강 살펴보자.

인산 김일훈 선생은 1909년생으로, 타고난 예지력으로 만물의 약리작용을 꿰뚫은 사람이라 알려졌다. 네 살 무렵 한글을 떼고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됐음을 간파했으며 옥편을 다 외고 한문본 삼국지, 당시(唐詩), 두시(杜詩), 강희자전을 차례로 독파하는, 믿기 어려운 총명함을 보였다 한다. 일곱 살 때 비가 갠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작용을 활연대오(豁然大悟)한 선생은 공간 색소 중의 약분자 합성방법을 모색했고, 이때부터 병명도 모른 채 숨져가는 이웃 환자들을 구료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동해산 마른명태 다섯 마리를 고아 먹여 낫게 한 것이나 폐암 환자를 수백 마리의 땅벌에 쏘이게 하여 치료한 사례 등은 천문지리의 원리를 꿰뚫은 선생의 직관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선생은 아홉 살 때 한반도에 전래된 소금 제조법을 보완, 소금을 대통 속에 다져 넣고 송진 관솔 등을 이용해 강한 화력으로 아홉 번을 구워야 제대로 법제된 소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견해를 조부께 피력하기도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왜 소금을 구워서 사용해야 하는지, 왜 대통이나 송진 등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왔을 따름이다.

열여섯 살 때는 의주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청년들을 제압한 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선생은 항일운동의 영웅 변창호 선생이 이끌던 모화산 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묘향산 등지를 떠돌면서 병자를 구료한다. 오지(奧地)를 전전하던 이 시절의 선생은 탄광 광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진폐증을 탕약과 쑥뜸요법을 병행해 완치했으며, 죽염제조 실험을 거듭한다.

스물여섯 살 때 일경에 체포돼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모진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복역 1년6개월째 형무소를 탈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선생 자신이 창안한 인산쑥뜸법, 곧 영구법(靈灸法)으로 병을 치료해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때 함께 고문받았던 동지들 중 쑥뜸을 뜨지 않았던 이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대부분 생명을 잃는다. 묘향산에 들어간 선생은 당대의 걸출한 선지식이던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하고, 1945년 광복을 맞아 당시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에서 하산해 서울로 온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양·한방 종합병원과 동서의과대학 설립을 제안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1950년에는 당시 내무장관이던 백성욱 박사를 통해 대통령에게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대책수립을 건의했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권이 미국만을 추종하는 사대주의로 기우는 한편 개인독재로 치닫고, 세상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희망을 버리고 세속을 떠나 다시 입산한다.

1950년부터 선생은 충남 공주 마곡사 부근, 계룡산 감나무골, 계룡산 용화사 부근, 전북 남원과 운봉마을 등지에서 머물다 1957년 경남 함양으로 건너온다. 함양읍내에 잠깐 기거하다 삼봉산 살구쟁이마을(杏亭洞)에 인산초당을 짓고 함지박을 깎으며 생계를 이어간다. 숨어 살아도 명성은 드러나 서울과 각처에서 선생의 신약과 철학을 배우러 몰려왔고, 어느 곳이든 선생이 머물던 곳에는 기적 같은 구료의 신화가 계속된다.

함양으로 낙향하기 직전 1980년에 선생 최초의 저술인 ‘우주와 신약’을 펴냈고, 이듬해엔 우주와 신약을 한글화한 ‘구세신방’을 출간했으며, 함양읍 운림초당에 거처하던 1986년 불멸의 대저술인 ‘신약’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고는 곧바로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공개강연회를 열어 83세 때인 1990년까지 도합 스물두 차례의 강연회를 통해 공해독(公害毒) 시대의 건강법을 제시한다. 그러다 84세 때인 1992년, 가족과 제자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해두고 세상을 떠난다.

주경섭 원장이 인산 선생을 찾아간 것은 ‘신약’이 발간된 1986년 즈음이다. 책을 보고 선생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1968년생인 주 원장은 당시 18세에 불과했다. 어려서부터 관심사가 특별한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UFO에 빠져 지냈다. 조지 애덤스의 ‘UFO 동승기’ 같은 책을 접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빨려들었다.

 

UFO, 단전호흡… 心에 취한 소년

초등학교 6학년 즈음에 이미 소설 ‘단(丹)’의 주인공인 봉우 권태훈 옹의 만수한의원에 드나들며 단전호흡을 배웠다. 일곱 살 위의 작은형과 늘 함께였다. 중1때는 ‘옴’을 염하면 그 진동으로 물의 파장이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세검정 근처 안동민 선생의 집에 다녔다.

“하루 두 시간씩 물동이를 앞에 두고 들여다보면서 옴을 염하고 그랬지요. 배낭 메고 삼각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지금도 어딜 가면 주 원장은 양복차림에도 배낭을 메고 다닌다. 학교공부는 관심 밖이었고 정신세계에만 팔려 지냈다. 그러다 중학 졸업 후 고교과정을 뛰어넘고 대입검정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진학은 포기하고 형을 따라 아예 강원도 깊은 산골짝에 들어가 박힌다. 호흡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철암 근처 7가촌이라는 곳이었어요. 6·25전쟁 때도 전쟁이 난 줄 몰랐다는 심심산골 오지였지요. 거기서 둘이 한 달 생활비 만원으로 살았어요. 전기는 물론 없었고요. 제일 걱정이 양초였는데, 아까워서 잠깐 켜뒀다가 금방 끄고 관솔을 구해다 쓰곤 했거든요. 어느 날 굿당 하는 아주머니가 양초를 잔뜩 가져다주고 갔어요.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어디어디에 가면 공부하는 형제가 있는데 그 애들에게 초를 주라’는 계시가 내렸다나요.”

   

영원한 스승인 인산 김일훈 선생과 함께.

처음엔 주민들이 간첩이라고 신고를 해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으나, 나중엔 약초 캐러 올라가는 주민들이 김치나 감자를 두고 가기도 해 살 만해졌다.

“아침에 오미자 따러 올라가다 보면 두 형제가 바위에 앉아 있는데 저녁에 내려올 때 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신기했나 봐요. 한번은 사냥해서 잡은 고라니 한 마리를 통째로 가져다준 사람도 있었어요.”

2년쯤 그렇게 살던 중 ‘불교신문’ 기자가 형제의 소문을 듣고 취재차 찾아온다. 취재를 거절하자 여러 번 거듭 찾아왔는데, 형제의 사는 모습을 본 기자 김윤세는 경남 함양에 가면 인산이라는 신약계의 거인이 있으니 한번 찾아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분이 정신계에서도 최고 경지를 이뤘으니 만나보라고 했지요. 윤세 형은 인산 선생의 둘째아드님이었는데 자기 아버지라는 말은 일절 안하더라고요.”

함양에 갔더니 전국에서 모여든 환자가 마당에 빼곡했다.

“한구석에 끼어 기다렸더니 선생님이 ‘너희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하세요. 강원도에서 마음공부한다고 했더니 저녁이나 먹고 가라고 하시데요. 저녁 먹고 하룻밤 자고 큰절을 하고 물러나려고 했더니 ‘너희들 여기 있어라!’ 하시는 거예요. 두말없이 ‘예!’ 하고 그때부터 거기 머물렀지요.”

 

밭일 2년, “이제 질문해라”

다음날부터 완전 머털도사 같은 삶이 시작됐다. 리어카로 산을 개간하는 일이 형제에게 주어졌다. 함양군 죽림리엔 인산의학의 핵심 중 하나인 사리간장을 만드는 서목태콩을 경작하는 농장만 2만평이었으니 일은 날마다 산더미 같았다. 저녁이 되면 형제가 서로 몸을 고루고루 밟아줘야 근육이 풀릴 만큼 중노동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힘들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전국에서 숱한 한의사가 신약을 배우기 위해 함양으로 몰려들었다.

“그 사람들 보면서 우리 둘이 늘 저 사람은 5일짜리, 저 사람은 일주일짜리 하고 카운트해요. 틀림없었어요. 선생의 원칙이 엄정해서 오래 머물지를 못하는 거지요.”

꼬박 2년을 일만 했다. ‘오늘 여기서 저기까지 나무를 베라’ 하면 그냥 베는 게 아니라 베어서 장작으로 가지런히 패놓는 것까지를 의미했다. 그런 맹훈련에는 까닭이 있다고 여겨 군말 없이 시키는 일을 다 했다. 한번은 고스톱을 하다가 인산 선생에게 발각됐다. 당장 내려가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잡기에 맛을 들이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밥을 두 끼쯤 굶고 사죄했더니 다음날 저녁 때 “경섭아 밥 먹어라” 하고 불러주셨다.

“할아버님(‘선생님’ 대신 그렇게 불렀다)이 조금이라도 거짓된 모습을 보였으면 우리 형제는 내려와버렸을 거예요. 한치의 흠도 없으셨죠. 하루는 죽염창고에 엎드려 있는데 마침 아드님과 선생님이 같이 들어오세요. 일어서기도 뭣해서 가만있었더니 아드님이 ‘아버지, 이제는 남들 그만 가르치고 우리 아들들한테만 비법을 일러주셔야지요’하는 소리가 들려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아드님 어깻죽지를 내려치면서 ‘이놈아 나는 너희들만의 아비가 아니다’ 소리를 지르세요. 그런 분이셨어요. ‘선생님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한다. 하루 시를 천편 지으라면 천편 짓고 밭을 백마지기 매라면 백마지기 매겠다’고 그날 결심했어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연할 때였다. 그즈음 인산 선생은 전국 강연을 다녔고 주 원장은 늘 곁에 따라다녔다.

“뷔페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할아버님이 ‘경섭아’ 하고 부르시더니 ‘이리와 내 곁에 앉아라’ 하세요. 앉았더니 손을 잡으면서 ‘다들 떠났는데 이놈들만 버텼어’ 하세요. 그러고는 ‘이제는 질문해라. 궁금한 걸 물어봐라’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보랏빛 金, 자죽염

그후 죽염공장을 차리고 민속신약연구회를 만들고 하는 과정에서 그는 선생 곁을 지키며 인산의학의 정수를 배운다.

   

“말씀 하나하나가 가슴에 벅차올라요. 메모를 해봤지만 모자라서 나중엔 녹음기로 할아버님 말씀을 녹취했어요. 그게 테이프로 120개 분량이에요. 혼자만 독점하는 것은 의미 없다 싶어 홈페이지를 만들어 선생의 음성자료를 거기 모두 올려놨지요. ‘도해(道海)’는 선생이 제게 지어준 호입니다. ‘도해(www. dohae. com)’에 들어가 회원가입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뒀어요. 의술을 독점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정신을 받들기 위해서죠.”

스승과 함께 눈만 뜨면 죽염을 구웠다. 드럼통에 천일염 채운 대나무를 쌓고 장작불을 때는 원시적 방법이었다. 좋은 대와 소나무와 진흙과 소금을 구하러 전국을 누비는 선생을 따라다녔다.

“대는 산청이나 담양 것이 최고고 황토는 충청도 것이 좋고 소금은 반드시 강화도나 연평도 것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스승은 5000℃ 고열로 뽑아낸 죽염이 진짜라고 했지만 열을 5000℃까지 높일 방법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때로 소금을 아홉 번 구워내면 회색 덩어리 한가운데에 신비한 보랏빛을 띠는 부분이 나타났다. “자수정 같네요.” 선생에게 보이면 “이놈아, 그게 바로 황금이다” 하셨다. 그러나 자죽염은 극히 일부일 뿐, 제대로 만드는 법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모신 지 7년 만에 선생이 돌아가셨다. 그를 처음 인산에게 소개한 윤세씨가 인산죽염을 맡았고 주주들이 생기면서 회사 외형이 자꾸 커졌다. 주경섭은 어떻게든 자죽염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곡절 끝에 주경섭은 인산가(家)에서 독립해 나온다. 그리고 혼자 자죽염 연구에 골몰한다. ‘관건은 불 때는 용광로의 온도다!’ ‘선생 말씀대로 온도를 5000℃로 높이기만 하면 최상의 죽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궁리를 거듭하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러시아의 밀가루 공장이 폭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밀가루 분말이 자욱한 데서 누가 담뱃불을 붙였더니 불이 났다는 겁니다. 바로 이거다 싶데요. 물질은 아주 잘게 쪼개기만 하면 그게 뭐든 발화제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송진을 가루내서 뿌려보자 싶었어요. 장작불에 송진을 잘게 부숴서 뿌려보니 온도가 갑자기 확 올라가요. 그때까지는 기껏 1000℃밖에 올리지 못했거든요. 800℃정도 불에 여덟 번 굽지만 마지막 9번째는 2000℃까지 올리는 게 가능해졌어요. 불 때는 게 화구식이라면 송진을 뿌리는 폭발식을 도입한 겁니다. 그랬더니 자죽염이 나와요. 아홉 번째 굽는 것은 모조리 자죽염이 되더라고요!”

얼마나 기뻤던지 울음바다를 이룰 만한 감격이었다. 고열에는 용광로 자체가 녹아버리니까 고열을 견디는 노(爐)를 만들기 위해 숱한 주물공장을 뒤지며 용접도 직접 배웠고, 노의 설계를 수백번 바꿔서 실험을 거듭했다. 그렇게 찾아낸 결과였다. 그게 1993년. 그러나 자죽염을 생산한 것이 동업자들에겐 되레 질시의 빌미가 됐다. 공공연히 자죽염이 가짜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이 먹는 죽염에 어떻게 물감을 탈 수 있냐는 전화가 한밤중에 걸려와요. 다짜고짜 욕도 하고요. 어떤 아주머니는 전화해서 너희 죽염을 먹었더니 입가에 벌건 게 묻는데 이게 뭐냐고 따져요.”

하도 말이 많으니 1994년 KBS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죽염을 다뤘다. 아홉 번 구워야 죽염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3~4번 구워 죽염이라고 팔던 회사들이 그 바람에 문을 닫았다.

“방송 이후 300여 개에 달하던 죽염회사 중 250개 넘게 문을 닫았어요. 오히려 잘된 거지요. 지금은 열댓 군데만 남았는데 이젠 가짜를 만드는 죽염공장은 내가 알기론 없어요. 자죽염은 아니라도 다 정성껏 아홉 번 구운 죽염을 만들고 있지요.”

그러나 자죽염이 최종단계가 아니란 걸 그는 안다. 요즘 자죽염 한가운데 약간씩 황금색을 띠는 게 나오고 있다. 5000℃로 불 온도를 높일 수 있다면 어느 날엔가 황금색 호박덩어리 같은 죽염이 나올는지도 모른다.

도해한의원에서 주 원장이 실험 중인 비커를 봤다. 소금물에 담근 못은 발갛게 녹이 스는데 죽염에 담근 못은 전혀 녹이 나지 않았다. 외려 있던 녹이 떨어졌다. 그걸 주경섭은 죽염의 환원력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산화력이 크다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는 말이고 반대로 환원력이 크다는 건 인체에 이롭다고 해석할 수 있거든요. ORP(산화환전전위차, 산화력과 환원력을 나타내는 지수)농도를 재면 재래식 된장은 -200mV 정도로 나오고 우리 죽염은 -590mV로 나와요. 진시황제가 찾던 불로장생의 묘약은 유황으로 만든 금단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금단은 실제로 만들 수 없죠. 자죽염은 금단 성분인 유황정 기운이 합성돼 젊음을 유지해줘요. 노화를 촉진하는 유해산소를 환원하는 힘이 있어요”

   

‘감로정’이 깃들인 땅, 한반도

자죽염은 5000℃ 고열의 용광로에서 탄생한다.

도해죽염공장이 있는 괴산에 함께 가서 죽염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다. 아홉 번째 구워져 나오는 자죽염 원석은 실제 자수정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영롱했다. 강철의 금, 대나무의 목, 천일염의 수, 황토의 토, 소나무 장작의 화가 결합해 소금도 나무도 흙도 돌도 아닌 전혀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진 것은 확실했다. 그게 인산 선생 말씀대로 만병통치의 신약인 게 맞다면?

환경오염이 심각한 요즘 죽염 건강법을 생활의 지혜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죽염을 먹거나 이용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죽염은 인체의 거의 모든 질병을 예방, 치료할 뿐 아니라 보음(補陰), 보양(補陽) 효과 및 갖가지 공해독을 풀어 주는 힘이 뛰어나므로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찻숟갈 3분의 1 분량을 침으로 녹여 오래 입 안에 물고 있다가 천천히 삼키는 것이다. 침에는 강한 살균·해독력이 있는데, 죽염과 합치면 그 효과가 극대되어 몸 안에 쌓인 갖가지 공해독, 화공약독을 풀어주고 체력을 강화해준다고 한다. 밥 지을 때 조금씩 넣을 수도 있고 각종 차에 타서 마실 수도 있는데 약 먹듯 물로 꿀꺽 삼켜서는 효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단다.

“할아버님은 ‘이놈아, 죽염이 만병통치긴 하지만 ‘다스릴 통(統)’자가 아니라 ‘통할 통(通)’자를 써야 하느니라’고 하셨어요. 만병을 다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만병에 두루 통한다는 뜻이겠지요. 죽염을 눈에 넣으면 경주석 안경을 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도 하셨어요. 경주석은 땅속 150m에서 나온, 호박이 될 돌로 만들어 눈을 시원하게 해주거든요. 침에 녹여 잠자기 전에 눈에 두어 방울 넣으면 평생 눈 밝게 살 수 있지요.”

그러나 양질의 천일염이 점점 사라져 언제까지 좋은 죽염을 생산할 수 있을지가 주 원장에겐 큰 걱정거리다.

“강화 석모도 염전에서 제일 좋은 소금이 나오는데, 세상에 그걸 골프장으로 만든답니다. 우리는 석모도 염전 것만 쓰는데 큰일났어요. 따로 염전을 하나 사둬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요즘은 중국에서 소금을 실어와 우리 바닷물에 섞어서 국산 소금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바다 오염이 심해 이제 소금을 그냥 먹어선 안 돼요. 꼭 죽염이 아니더라도 소금을 열에 가해 중금속을 휘발시킨 다음에 먹어야 합니다. 중국 소금으로는 자죽염을 만들 수가 없고 만들어도 약성이 떨어져 못써요. 할아버님은 우리 한반도 땅이 감로정(甘露精) 기운이 맺힌 땅이라 이 땅에서 나는 것이라야 신약이라고 하셨어요.”

실제 주 원장은 전통의학에 관심 있는 황종국 판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 내로라하는 마약 제조책이 6명 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한국에서 마약을 만들면 약 기운이 6시간을 가는데 다른 곳에서 제조하면 2시간밖에 안 가니 희한한 일이라고.

“할아버님이 말하신 동송근 이야기가 그걸 설명할지도 모르지요. ‘이놈아. 왜 동쪽으로 뻗어나간 소나무 뿌리를 약으로 쓰는지 아느냐’고 물으세요. ‘모릅니다’ 하면 ‘우리 땅 위 허공에 맺혀 있던 감로정 기운이 아침마다 이슬에 맺혀 동쪽나뭇가지에 먼저 떨어지고 나무뿌리는 수백년 동안 그 이슬을 받아 마신다. 그러니 동송근에 감로정 기운이 뭉쳐 있는 것이니라’고 하셨지요.”

인산의학은 복구의학이고 환원의학이다. 자력승전(磁力昇電), 거악생신(去惡生新)을 건강을 지키는 으뜸으로 친다. 즉 몸 안에 들어오는 독소 때문에 병이 나고, 그걸 제대로 빼내야 건강하다는 원칙이다. 독소를 빼내는 데는 따로 약을 쓰지 않고 음식으로 유도한다. 동해안 마른 명태도 훌륭한 해독제인데 해수 온도가 올라가고 눈도 덜 내리면서 마른 명태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독은 늘어나는데 약은 줄어든다니 안타깝다.

인산의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대기 중에 퍼져 있는 약분자들을 호흡을 통해 흡수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약을 먹고 몸이 흡수한다는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약을 먹는 물리적, 생리적 과정으로 인해 대기 중에 있는 동일 파장의 약 분자들을 호흡을 통해 끌어들이기 쉽도록 만든다는 이론이다. 약은 그 약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기 중에 녹아 있는 그 약과 똑같은 성분을 빨아들이기 쉽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대기 중 약분자를 합성하는 약

인산이 말하는 신약이란 바로 이런 대기 중 약분자들을 합성한 것을 일컫는다. 이를 위해 개, 돼지, 닭, 오리 등 동물의 생명현상과 호흡현상을 이용하기도 하며 한국의 토종 약재를 면밀히 분석해 최상의 약효를 올릴 수 있는 법제 방법을 고안해냈다. 300여 가지의 까다로운 법제를 주경섭 원장은 착실히 익혔고, 도해한의원에서 그것을 실천 중이다. 법제와 달이는 법을 익히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도해한의원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다. 가마솥에 달여 철성이 우러나 제대로 된 한약이 된다는 것이다. 약재를 한꺼번에 다 넣고 달이는 것도 인산의학에선 엄금이다.

“그게 죽이지 무슨 약입니까. 먼저 다슬기, 유황오리, 별갑 같은 딱딱한 것을 넣고 달이다 다음에 각종 식물 껍질로 된 건칠피류를 넣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하고초, 금은화 같은 잎 말린 것을 넣고 산수유, 오미자, 구기자 같은 건 맨 나중에 넣어야 해요. 사실 오미자는 찬물에 우리는 게 약성이 더 낫죠. 소나무 장작불에 달여야 하는 게 따로 있고, 음화라고 숯불을 살살 부쳐가며 달일 게 따로 있어요. 같은 약재라도 초흑(검게 볶음)이냐, 미초(살짝 볶음)냐에 따라 약성이 달라지고 달이는 방법도 다르지요.”

인산 선생이 식품을 이용해 개발한 약재는 죽염만이 아니다. 오핵단과 유황오리와 서목태 간장과 홍화씨와 밭마늘과 무엿 등이 더 있다. 오리는 뇌수 안에 특유한 해독기능이 있어 청산가리나 양잿물을 먹어도 죽지 않는 동물이다. 그 점에 착안해 오리를 기를 때 삭힌 보리밥에 유황을 섞어 6개월 이상 사료로 먹인다. 유황뿐 아니라 마늘, 금은화, 포곡령, 유근피 같은 약재를 섞어 먹여 길러놓으면 암치료와 해독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영약이 된다고 한다.

 

氣가 자연상합하면 질병 달아나

서목태 간장은 몸 안에 사리가 만들어질 만큼 이롭다고 해서 사리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건 죽염, 서목태, 유황오리, 밭마늘, 유근피, 금은화 등을 원료로 담근 간장이다.

“서목태(鼠目太, 쥐눈이콩)란 콩의 신비는 아직까지 비밀에 싸여 있어요. 보통 콩은 오행성(五行星) 가운데서 금성(金星)인 태백성(太白星)의 기운을 받아 화생(化生)하지만 서목태는 태백성 외에 수성(水星)인 진성(辰星)의 정을 받아서 색깔이 새카맣고, 목성(木星)인 세성(歲星)의 기운을 받아서 싹이 틀 때 보면 유난히 파랗거든요. 오행성정(五行星精)을 골고루 받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토종 서목태는 색이 새카맣고 영채가 나요.

한반도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감로수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서목태는 감로정의 기운까지 흡수해 콩 부피의 10만분의 1쯤은 감로수로 이뤄져 있다고 할아버님이 말씀하셨죠. 콩과식물은 태백성의 금기가 왕성해 공기 중의 질소를 뿌리에서 직접 합성하므로 질소 비료를 따로 주지 않아도 되는데, 특히 서목태는 근류 박테리아의 활동력이 극강하므로 공간색소와 수중진류로 이뤄진 분자를 흡수하는 능력이 다른 식물보다 월등히 커요. 태양광선의 힘에서 이뤄진 색소와 지중화구(地中火口)에서 올라오는 전류의 힘으로 생긴 분자(分子)는 지구 생물을 화생(化生)시키는 원천이기 때문에 서목태는 생명력을 강화하는 데 으뜸가는 식품이 된다는 겁니다.”

어렵다. 그러나 귀 기울여 들어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 것도 없다. 인산의학에서 질병은 인간 정신이 망상과 번뇌로써 병의 토양을 만들고, 거기다 호흡에서 오는 공해와 음식물에서 섭취되는 화공약독, 피부의 화학섬유 접촉에서 침해받는 정전기(靜電氣)의 전자파(電磁波), 털구멍으로 흡수되는 공해독으로 만들어진다고 본다. 죽염이나 사리간장을 먹으면 피가 맑아져서 전신의 기는 자연상합(自然相合)하고 천지 정기가 통하니 질병이 발붙일 곳을 잃게 된다는 해석이다. 주 원장이 녹음한 인산 선생의 육성을 잠깐 듣자.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3대 신약이 있어요. 첫째가 죽염(竹鹽)이고 둘째가 홍화씨(紅花仁)라는 건데 옛날 학설로는 설명이 없고 내가 경험을 토대로 찾은 거예요. 셋째가 우리나라 전역에 나는 산삼이요. 만병을 고치는 데 가장 신비한 것은 죽염이 첫째고 또 장수하는 데는 홍화씨가 첫째고. 그러면 죽염은 만병을 고치는 데 첫째고 장수에는 둘째 가고, 홍화씨는 만병을 고치는 데는 죽염보담 둘째 가고 장수엔 첫째 가거든. 산삼은 장수에 셋째 가면서 건강에는 첫째 간다고! 그러면 그게 왜 3대 신약이냐. 거기는 기준이 확실히 정해져 있어요. 우리나라엔 다른 데는 없는 감로수라는 게 있거든. 그 이야길 다 하려면 한이 없으니 안 되고 감로수라는 건 한 잔을 먹으면 무병장수하고 불로장생하는 신비의 물이에요. 그 물을 찾기 힘들달 뿐이지 없는 건 아니에요. 죽염 안에는 감로정 기운이 1만1000분지 1이 들어 있어요. 죽염이 만병통치한다고 하면, 혹 웃긴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모르면 호랭이도 강아지만 못할 수 있는 거요. 죽염에 뭐이 들어 있느냐? 땅에서 저녁에만 솟아나는 감로정이 있는데 그 감로정의 물이 흘러서 우리나라 바다 연안에 모이거든. 그 물을 퍼다가 소금을 만들잖아. 그거이 염전에서 이뤄지는 거지. 소금을 만들면 그 소금 속에 모든 독극물, 모든 불순물, 금속물이 다 있어요. 그 속에 감로수라는 게 유독히 있거든. 그게 얼마냐? 1만1000분지 1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홍화씨의 감로수 기운은 얼마냐? 1만2000분지 1이 있다. 산삼의 감로수 기운이 얼마냐? 1만3000분지 1이다.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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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원장은 죽염뿐 아니라 서목태 간장도 만든다.

당연히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합리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증명되지 않는 얘기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생이지지(生而知之)셨어요.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건 이제 우리들이 할 몫이지요.”

스승에게 배운 한의학 이론을 다지고 싶어 주 원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체의학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한번은 명지대에서 우종욱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 죽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죽염을 직접 만들고 있으며 인산 선생 밑에서 죽염 공부를 했다고 말했더니 “아, 그때 할아버지 곁에 있던 쪼그만 아이가 자네였나” 하면서 반겼다.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유학을 주선했다. 우 교수의 주선으로 주 원장은 캐나다의 센트럴 칼리지란 곳에서 3년 동안 중의학을 공부해 그 대학이 주는 박사학위를 얻었다

“거기선 공부를 했다기보다 되레 환자들을 만나느라 바빴어요. 인턴 때 환자를 한 200명 정도 봤을걸요. 할아버지 아래서도 한 2만명쯤 환자를 만났고…거기 병원은 진료 후 닥터에 대한 평가를 하는데 나를 만난 환자 200명 중 140명 이상이 ‘다시 만나고 싶은 의사’라고 말했대요. 캐나다에 머물러달라는 부탁을 뿌리치고 자죽염을 다시 만들려고 3년 전에 돌아왔어요. 한국 와서 도해한의원을 개업하고 죽염뿐 아니라 서목태 간장과 홍화씨 죽염 같은 신약을 만들고 있죠.”

지난해엔 자죽염 제조로 중소기업진흥청에 벤처기업으로 등록해 융자도 얻어냈다.

“장사꾼, 사기꾼, 도둑놈이 되지 말라는 게 할아버지의 훈계셨어요. 니가 먹고 사는 밥은 죽어가는 사람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을 명심하라고도 하셨어요. 분별심을 버리라고도 하셨고. 똥과 꿀은 결국 같은 거다. 세상에 오고감이란 없는 거다. 오는 것같이 보이고 가는 것같이 보일 뿐이다. 이놈아, 세상에 병신과 불구가 따로 있는 줄 아느냐. 늙고 병들면 그게 바로 불구고 병신이다. 그러니 죽염을 만들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게 치료해주는 것이 니가 할 일이다. 이런 말씀이 이토록 생생하니 할아버님이 제가 죽염과 신약을 제대로 잘 만드는지 아닌지 늘 지켜보고 계신다고 믿어요.”

金瑞鈴
●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 경북대 국문과 졸업
●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 저서 ‘김서령의 가’

주경섭 원장에게 들은 얘기들은 몹시 재미있었다. 서울서 괴산을 오고 가는 차안에서 그는 활력에 가득 차서 쉼 없이 얘기했다. 그걸 다 전할 수 없음이 아쉽다. 특별히 기른 닭과 개와 염소와 돼지와 오리의 간을 꺼내 만든다는 오핵단 얘기, 특별한 날에 잡으면 기름이 굳지 않는다는 납저유와 연월일시에 돼지 네 개가 겹치는 12년 만에 한 번 오는 날 잡는다는 사해유 얘기, 볶은 밭마늘과 무엿에 관한 얘기들도 흥미진진했고, “석가의 정신력을 100이라고 친다면 보통사람은 40이고 공자는 60, 장자는 70, 노자는 90인데 북한 김일성은 한 70쯤 되는 것 같다고 할아버님이 말하시더라” 같은 얘기도 내 구미를 확 잡아당겼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인(奇人)이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기인이 가셨으니 그 제자라도 만날 수밖에. 주경섭 원장이 만든 자죽염을 입에 넣고 안에 담긴 감로수 기운을 느껴본다. 서목태 간장의 맛을 본다.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우리 사는 세상은 참 신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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