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광주유세 때 노태우 경호하다 돌맞아 죽을 뻔”
● 대구 학원가 제패한 신화적인 학생주먹 ● 유도 잘한 전경환, 씨름선수 엄삼탁도 혼쭐 ● 시라소니 제자한테 배운 실전 격투기로 당대 주먹들 제압 ● 박치기, 무릎, 팔꿈치, 낭심차기, 눈속임…실전에선 가릴 게 없다 ● “조양은의 사보이호텔사건은 과장, 뒷날 내가 신상사 찾아가 사과” ● 10·26 직후 김종필 요청 받고 지역 조직들 연결 시도 ● 안기부 실세 엄삼탁 요청으로 대구에서 단체 결성 ● “노재우도, 김복동도, 엄삼탁도 박철언한테는 안 되더라” ● 안동교도소의 전설-한 번에 앉았다 일어서기 700회, 팔굽혀펴기 270회 ● 절친한 고교 선배 최시중 방통위원장, 높아지고 나서는 안 만나 |
2007년 11월 서울 남산의 하얏트호텔. 머리가 짧은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줄지어 늘어섰다. 곳곳에서 “형님 오셨습니까” 하는 인사말이 들렸다. 이윽고 “큰형님이 도착하셨다”는 외침과 함께 호텔 앞에 검은색 대형 세단이 도착했다. 한복을 입은 백발의 사내가 차에서 내리자 길 양옆에 도열한 청년들이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인사했다. 주먹계에서 ‘큰형님’으로 통하는 조창조씨였다. 이날 조씨의 칠순잔치에 참석한 하객은 어림잡아 2000명. 대구가 낳은 걸출한 주먹인 조창조씨는 ‘싸움의 달인’ ‘실전(實戰)의 황제’로 불린다. ‘싸움 천재’ 시라소니(이성순) 이후 맨손싸움의 1인자로 ‘맞짱’에서 져본 적이 없다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칼과 조직 없이 오로지 맨손으로 최고봉에 오른 그의 이력은 주먹세계에서 이색적인 전범(典範)이다. 조씨를 인터뷰하는 데는 꽤 공을 들여야 했다. 그가 “내세울 만한 얘기가 없는 부끄러운 인생”이라며 한사코 거절했기 때문이다. 처음 제안을 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의 이야기 보따리를 끄를 수 있었다. 백발에 안경을 낀 그는 중후한 노신사의 이미지를 풍겼다.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구였다. 가슴과 팔 근육의 단단함이 옷 밖으로 내비쳤고 배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싸움으로 단련된 탓인지 큼지막한 손등이 울퉁불퉁 거칠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가 처음이라고 했다. 1990년대 중반 안동교도소 수감 시절 모 잡지에 그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주로 그의 주변사람들의 전언을 바탕으로 한 이 기사에는 옥중 인터뷰, 즉 기자가 그를 면회해 주고받았다는 얘기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인터뷰 사실을 부인했다. “기억에 없지만, 그 기자가 내 동생들과 함께 (나를) 면회하면서 인사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인터뷰를 한 사실이 없어요. 면회 때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없었고. 내가 했으면 했다 하지 부인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 시간 동안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영화보다 그의 얘기가 더 흥미롭고 실전적이었지만.
“우리는 주먹계 전시용품” 현재 한국 주먹계의 최고 원로는 신상현씨와 정종원씨다. 신씨는 1950년대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에 맞섰던 명동파 이화룡 계열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신상사파의 보스였다. 이정재의 직계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정씨는 지금도 주먹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적어도 족보를 존중하는 주먹들은 두 사람을 최고 어른으로 인정한다. 조씨는 주먹계의 세대교체에 대한 언급으로 말문을 열었다. “신상현, 정종원 형 두 분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어른이에요. 그 밑으로 우리 또래가 있지요. 우리 밑에는 이강환 등이 있고. 내 또래 주먹으로 조일환, 최창식, 구달웅, 대전 목포내기(김기영) 등이 있습니다. 최창식은 건달생활 안 한 지 오래됐지만. 우리 또래 밑으로는 다들 모임을 만들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바로 아래 또래가 주먹계 실세입니다. 사실 우린 그림자입니다. 전시용품으로 볼 수 있죠. 동생들이 ‘형님, 와주십시오’ 하면 가서 자리를 빛내주는 정도죠. 동생들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도 없어요. 요즘 아우들 영악합니다. 형들을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야 고맙죠. 예우받는 대가로 아우들의 경조사에 참석합니다. 아우들한테는 그 자리에 어떤 형들이 왔다갔는지가 중요하고 우리는 또 그걸로 품위를 유지하는 거죠.” 하얏트호텔 칠순잔치는 그가 주먹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새삼 확인해준 사건이었다. 당시 한 주간지가 그의 고희연 행사를 보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전부터 나는 주먹들 행사에서 돈을 받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몇 년 전 타워호텔에서 딸을 치울 때도 2000명이 더 몰려왔습니다. 그때 내가 다짐한 게 칠순 때는 돈을 받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지인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화환과 봉투를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축의금이 부담스러워 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돈 받는 접수대를 아예 폐쇄했어요. (행사) 비용은 대구의 친구들이 대줬습니다.” 대구는 조씨의 실질적 고향이자 정신적 터전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조씨는 광복 직후 8세 때 월남(越南)했다. 서울 종로의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강원 묵호, 부산을 거쳐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외삼촌 사업이었다. 당시 그의 외삼촌은 경북 달성군에 있는 광산에서 기계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씨는 대구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월남과 전쟁통에 늦게 진학한 조씨는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세 살 많았다. 중학생 때 고등학생과 놀았다. 이명박 정부 실세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그의 대륜고 3년 선배다. 그런데 최 위원장도 동급생보다 나이가 많았다. 학창 시절 그는 최 위원장을 형으로 부르며 가깝게 지냈다. 그의 주먹신화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가방에 권투 글러브를 넣고 다니며 방과 후 적당한 상대를 불러내 판을 벌이곤 했다. 싸움이 그렇게 좋았을까. “(웃음) 6·25 직후라 사회가 혼란하고 불안했습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권투를 워낙 좋아하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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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륜중·고의 전설적 ‘가다’ 그가 다닌 대륜중학교는 사립치고는 ‘공부 좀 하는’ 학교였다. 입학경쟁률이 7대 1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싸움꾼인 그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전교생 중에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 잘하는 학생은, 일본말로 ‘어깨’를 뜻하는 ‘가다’로 불렸다. 학교마다 ‘가다’가 있었다. 대륜중·고의 최고 ‘가다’였던 조씨는 어느 학교의 ‘가다’가 누구다, 혹은 누가 세다 하는 얘기가 들리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다. 학교로 쳐들어가 상대를 불러내 운동장이든 뒷동산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움판을 벌였다. 패싸움은 없었고 전부 1대 1 맞짱이었다.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의 이름난 ‘가다’들이 모두 그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당시 대구는 유도와 씨름을 잘하기로 소문난 도시였다. 전국대회 우승자가 많이 나왔다. 운동을 잘해 조씨와 친하게 지냈던 몇몇 동급생은 뒷날 저명인사가 됐다. 유도에 능했던 전경환씨는 형이 대통령이 된 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으로 권력의 중심에 섰다. 씨름을 잘했던 엄삼탁씨는 6공 때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냈다. 역시 씨름선수였던 김학룡씨는 뒷날 민속씨름 초대심판위원장과 일양약품 씨름단 감독으로 활약했다. “엄삼탁, 전경환과 친하게 지냈는데, 둘 다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매 좀 맞았죠. 체격만 컸지 싸움할 줄은 몰랐거든요. 운동을 아무리 잘해도 싸움으로는 나한테 안 되죠.” “싸움에서 진 적은 없느냐”고 묻자 조씨는 허허 웃으며 “운이 좋았던 것 같다”라고 겸손해했다. “애들 말이, 내가 진 적이 없다니까. 내가 싸움할 때마다 따라다닌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대구 통학권 내인 왜관과 김천, 경주 출신 학생들까지 잡았지요. 당시 칼을 쓰는 애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그 친구들은 따로 놀았어요. 나약한 애들이죠. 그들에게 나 같은 사람은 열외였죠.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조씨는 운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육상을 했고, 중·고등학생 때는 권투와 씨름, 유도를 배웠다. 도장에도 다녔지만 혼자 집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고1 때는 태권도를 연마했다. 형의 친구인 이준구씨한테서였다. 뒷날 미국 태권도 황제로 불리게 된 이씨는 당시 태권도 초단이었는데 조씨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 조씨는 이씨에게 발차기를 배우는 대신 복싱 기술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조씨는 체격이 큰 편이었다. 그때의 키가 지금의 키(176㎝)다. 반에서 셋째였다. 체중은 72㎏. 한국 남자 평균 체중이 42㎏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무용담을 궁금해 하자 조씨는 “나한테 맞은 친구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친구가 많은데…” 하며 웃기만 하다 거듭된 요청에 가장 힘들었다는 싸움 일화를 들려줬다. 영남고에 유도왕이 있었다. 전국대회 우승자였던 그는 80㎏이 넘는 거구였다. 양교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둘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맞붙었다. 처음엔 조씨가 계속 당했다. 상대의 유도 기술에 대여섯 차례 나뒹굴었다. 주먹을 쓸 겨를이 없었다. 구경하던 친구들이 “창조, 오늘 죽는 날이구나” 하고 웅성거렸다. 때는 8월, 여름방학 때였다. 섭씨 38℃가 넘는 무더운 날씨가 변수였다. 조씨가 넘어졌다가 일어나 덤비기를 계속하자 상대가 그만 지쳐버렸다. 10분쯤 지났을까, 상대가 “졌다”라고 항복을 선언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듬해엔 그해 유도 전국대회 우승자인 개성고 학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조씨의 기습적인 펀치 한 방에 상대가 기절해버린 것이다.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는 “창조 왼 주먹에 맞으면 턱이 부서진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운동선수마다 약점이 있어요. 나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약점을 다 간파하고 그것을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한마디로 꾀를 부린 거죠. 권투 한 친구들과도 많이 붙었는데,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권투하는 놈은 유도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 기술로 무너뜨렸지요. 실전에서 가장 덕 본 건 씨름입니다.”
실전에서 가장 덕 본 건 씨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구부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씨름은 몸 중심을 잡는 데 최고입니다. 유도는 상체를 세우지만 씨름은 구부리잖아요. 중심이 딱 잡히고 자세가 안정됩니다. 빠르게만 하면 씨름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고교 시절 대구 일대를 평정한 그는 유도 특기생으로 홍익대에 입학했다가 그가 속했던 법정학부가 폐지되자 중퇴했다. 서울역 근처 염천시장에서 외삼촌뻘 되는 친척이 국일상회라는 가게를 운영했다. 조씨는 학교에 다니면서 그의 가게 일을 거들었다. “공부도 하면서 운동도 하고 가게 일까지 돕자니 너무 힘들었다”는 게 조씨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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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로 내려간 조씨는 2년 후 다시 상경해 염천시장에 터전을 잡았다. 권투선수 출신인 정기복씨를 만나면서 그의 싸움 실력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조씨와 마찬가지로 월남민인 정씨는 다양한 실전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별명은 빠지기였다. 조씨는 빠지기 형과 2년을 같이 지내면서 ‘싸움이 이렇게 묘한 거구나’ 하고 느꼈다.
“빠지기 형의 싸움 스타일이 지금의 종합격투기와 비슷해요. 이마까지 쓰니, 종합격투기보다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죠. 그 형한테 머리와 무릎, 팔꿈치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대가 숙이고 들어올 때는 무릎으로 올려 치는 기술이 좋죠. 태권도는 발차기는 좋지만 실전에선 별로예요. 싸움은 태권도가 아니거든요. 붙잡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스피드죠. 빠르지 못하면 싸움을 잘할 수 없습니다. 빠지기 형은 그런 기술을 시라소니 형님한테 배웠다고 하더군요.” 싸움기술 면에서 시라소니 계보인 셈이다. 조씨가 시라소니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건 아니다. 정기복씨와 시라소니 계열인 김홍빈씨를 통해 알고는 지냈지만, 20년 가까운 나이 차 때문에 같이 어울릴 처지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반 서울 주먹계는 큰 조직들의 와해 또는 약화로 일시적인 공백기를 맞았다. ‘깡패 소탕’을 내세운 군사정권의 강한 압박 탓이었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주먹들이 거의 다 퇴장했다. ‘조선 제일의 주먹’ 김두한은 정계에 입문하면서 주먹계에서 입지가 좁아졌고, 자유당 정권을 등에 업고 최강자로 군림하던 동대문사단은 두목 이정재가 5·16 직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분열됐다. 동대문파에 맞섰던 명동파도 보스 이화룡이 군사정권의 조사를 받고 나서 일선에서 물러난 후 주춤거렸다. 명동파와 가까우면서도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싸움의 귀재’ 시라소니는 이정재의 사형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서대문 일대를 장악했던 최창수도 군사정권의 서슬에 뒷전으로 물러섰다. 염천시장에 자리 잡은 조창조씨가 주먹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조씨는 상인협회 경비과장으로 시장 내 이권 싸움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가락시장의 모체라 할 만한 염천시장에는 농수산물이 풍부해 전국 각지의 건달이 몰렸다. 특히 쓰리꾼이라 불리던 소매치기와 거지가 설쳐댔다. 싸움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조씨는 하루에 보통 2~3회 싸웠다.
아현동 5형제와의 대결 1대 1 싸움의 낭만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염천시장에서 조씨는 숱한 싸움을 치렀다. 국가대표 레슬링선수였던 김찬O씨와의 대결이 대표적인 사례. 김씨는 6척 장신에 80㎏이 넘는 거구였다. 시장 상인들이 호각세를 점치던 이 싸움에서 조씨는 무릎 올려치기로 상대를 가볍게 눕혀버렸다. 그밖에도 ‘거지왕’ 김춘삼의 바로 밑 동생인 ‘덩치’, 또 다른 레슬링 선수 출신인 김모씨, 기계체조 선수 출신의 유명한 소매치기와 그의 보스 등이 조씨에게 무릎을 꿇었다. 인근 만리동과 서울역, 회현동 건달들도 그에게 도전했으나 누구도 그를 꺾지 못했다. “서울사람들은 맨손싸움을 잘 못하더라고요. 방망이나 망치 등 무기를 드는 버릇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시장에서는 보는 눈이 많고 같이 생존해야 하니 (나하고) 싸울 때 무기를 못 들었지요. 지금의 종합격투기 기술을 써먹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머리로 받고 무릎으로 올려치고 눈 찌르고…. 그때도 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중림동에서 신촌로터리까지 매일 뛰었습니다. 지구력이 없으면 이길 수 없거든요.” 조씨의 싸움은 그야말로 실전적인 것이었다. 정구O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108㎏의 거구인 그는 웬만한 사람은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와 시비가 붙었다. 그가 조씨의 귀싸대기를 올리자 화가 난 조씨가 그의 부자지를 걷어차버렸다. 그걸로 승부는 끝났다. 대(大)자로 뻗어버린 그가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대문 일대 건달 중에 아현동 5형제가 유명했다. 역도선수 출신인 맏형 김기용씨는 힘이 천하장사였다. 막내동생이 조씨와 같은 또래였는데, 둘은 평소 친하게 지냈다. 아현동 5형제의 영역은 굴레방다리였다. 영화배우 이대근씨의 부친인 이삼돌씨가 이들과 가까웠다. 조씨에 따르면 이삼돌씨는 당시 4대문 밖에서 가장 세다는 평을 듣던 유명한 건달이었다. 어느 날 조씨는 아현동 5형제와 맞붙었는데, 그것이 그의 주먹행로를 바꾸었다. “무슨 일로 큰형한테 내가 실수를 했어요. 사실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가 매를 맞는 자리였지요. 그냥 맞았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간 겁니다. 5형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막내동생이 나한테 ‘너,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 후 내가 위아래도 없이 아현동 5형제에게 대들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여러 조직에서 나를 죽이려고 난리가 났죠. 김찬O와의 대결도 그래서 이뤄진 겁니다. 나를 혼내주려 왔다 거꾸로 당한 거죠. 또 남대문시장에 유명한 권투선수가 있었어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사람이었어요. 해병대 출신이고. 그 사람이 소문을 듣고 나를 혼내러 찾아왔어요. 한마디로 버릇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내가 ‘이러다가는 끝도 없겠다. 그만하자’는 생각에 대구로 내려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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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러 간 사이에 조양은이 기습 이후 다시 상경한 조씨는 무교동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교동에서 호남주먹들의 후견인 노릇을 하던 오종철씨가 조씨를 형님으로 모시며 뒤를 돌봐줬다. 오씨를 비롯한 호남주먹들은 조씨가 염천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1970년대 초반 서울 주먹계에서 가장 센 조직은 신상사파였다. “당시는 명동이 중심이었어요. 그때는 아직 호남세라는 게 없었습니다. 명동을 장악한 신상사는 이화룡의 직계였습니다. 서울에서 조직이라 할 만한 건 신상사파밖에 없었어요. 동대문도 서대문도 다 허물어진 상태였거든요. 신상사 이전 주먹들은 5·16을 기점으로 다 물러났습니다. 무교동에 오종철과 내가 있었고, 충무로 모 호텔을 근거지로 정종원 선배가 일정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인 간 싸움이 있었을 뿐 조직 간 충돌은 없었습니다. 조직끼리 싸운 건 사보이호텔 사건 이후입니다. 그때부터 호남주먹들이 본격적으로 서울로 올라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조직 간 전쟁이 벌어졌지요.” 널리 알려졌다시피 사보이호텔사건은 조양은씨를 주축으로 한 신진 호남세력이 사보이호텔에 있던 신상사파를 기습한 사건이다. 1975년 1월2일 발생한 이 사건은 주먹사에서 신상사파 몰락과 호남파 득세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조창조씨 얘기에 따르면 신상사파의 몰락이라는 표현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신상사파의 아성에 금이 갔다’라는 정도의 표현이 어울릴 듯싶다. 사보이호텔사건의 시발점은 전남 해남(혹은 목포) 출신인 이경O이라는 호남주먹이 신상사파의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시비가 붙어 몰매를 맞은 일이었다. 그를 패는 데 앞장선 사람은 조씨와 같은 또래인 구달웅씨와 정경식씨였다. 정씨는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의 친구였다. 오종철씨의 친구인 이경O씨는 조씨를 형님으로 받들고 있었다. 당시 무교동에는 뒷날 김대중 정부 시절 주먹계 실세로 통한 정학모씨가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이씨는 정씨가 아끼는 후배이기도 했다.
당시 무교동 조직의 서열은 조창조-정학모-오종철-은석-조양은 순이었다. 좌장은 오종철씨였고, 조양은씨가 행동대장 격이었다. 조창조씨는 “당시 양은이를 따르던 아우가 8명이었는데, 그 세력이 막강했다”고 회고했다. “사건이 난 후 나는 이쪽과 저쪽(신상사파) 서로 10명씩 내세워 1대 1로 승부를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학모도 내 의견에 찬성했죠. 그런데 동생들이 ‘그런 건 옛날 방식’이라며 반대했어요. 결국 학모와 내가 목욕하러 간 사이 오종철과 조양은이 일을 저질렀던 겁니다. 실제 행동은 양은이가 했죠.” 조양은씨와 동생들은 명동 식구들이 신년하례차 모여 있는 사보이호텔 커피숍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몽둥이와 주먹을 휘둘렀다. 신상사의 처남 김수O씨가 중상을 입는 등 신상사파 조직원 몇 명이 다쳤다. 하지만 정작 신상사는 현장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화장실에 가 있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검사가 “공소시효 넘기라”고 조언 사보이호텔사건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지적에 대해 조씨는 “엄청난 과장이 있었다”라고 시인했다. “사실 달걀로 바위치기였어요. 부끄러운 얘기지요. 사보이호텔사건으로 신상사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습니다. 신상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건이 나자 서울사람들의 응집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평상시 숨어 있던 신상사파의 방대한 세력이 드러났습니다. 힘으로도 돈으로도 백으로도 우리가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양은이가 20대였습니다. 뭘 알겠습니까. 다만 총명하긴 했죠. 그 총명함이 그를 불행한 길로 이끌었지만. 태촌이는 양은이보다 나중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선배들한테 잘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이나 치부를 드러내기를 꺼린다. 더구나 ‘업무’ 특성상 자신의 실력이나 위상을 과시하는 데 익숙한 주먹들로서는 몹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씨는 감추지 않았다. “동생들한테는 창피한 얘기지만, 사보이호텔사건이 나고 몇 년 지난 후 신상사 형님한테 항복하러 갔습니다. 주변에선 맞아죽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어요. 사보이호텔에서 신상사를 만나 ‘죽을죄를 졌다’고 사죄했습니다. 그런데 신상사 형님은 ‘잘 찾아왔다. 없던 일로 하자’며 통 큰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 은석과 양은이도 데리고 가서 사과시켰습니다.” 조씨를 비롯한 무교동 식구들은 사보이호텔사건 이후 수사기관에 쫓기는 몸이 됐다. 가장 먼저 체포된 정학모씨는 7개월간 형을 살다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사건이 난 지 3년쯤 지나 조씨는 서울지검 윤모 검사실을 찾았다. 윤 검사는 그와 동향인 평양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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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검사였습니다. 사람을 통해 만나자고 해서 찾아갔어요. 사건기록에는 내가 총 지휘한 걸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사가 사건 내용을 잘 알고 있더라고요. 나보고 ‘(적당히 피해 다니며) 공소시효를 넘기라’고 조언하더군요. 공소시효가 7년이었는데, 절반쯤 남았을 때였습니다. 윤 검사는 오종철과 조양은을 자수시키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수시켰는데, 둘 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어요.” 조씨는 지난날을 회고하며 “부끄러운 일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자식들은 아비의 ‘부끄러운 과거’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3남 1녀를 뒀다. 아들들은 기골이 장대해 다들 키가 180㎝가 넘는다. ‘아버지의 길’을 걷는 자식은 없다고 한다. “막내가 스물네 살인데, ‘깍두기’를 몹시 싫어해요. 내가 아들에게 늘 거짓말을 했죠. 사업가라고. 그런데 그놈은 알고 있었지요. 칠순 때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요. 아들에게 말했어요.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했지만,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평생 누구한테 사기 치거나 돈 뺏은 적 없고 손 벌린 적 없다고. 요즘은 나하고 친구처럼 지내요. 내가 대구에 내려가면 경주에 있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외식도 즐깁니다.”
▼ 자식들에게 아버지 피가 흐르지 않나요? “옆길로 안 빠져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나도 6·25를 안 겪었으면 이런 길로 안 갔을 겁니다. 월남해 대구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힘들게 살다 보니… 어찌 보면 시대가 나를 그쪽으로 유도한 셈이죠.” 그는 자신의 주먹인생에 대해 “운이 좋은 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현재 농협에 사료를 납품하고 있는데, 부업 삼아 경비 용역도 한다고 했다. “동생들과 같이 하지는 않습니다. 대륜고 동창 중에 잘된 분이 많아요. 그들이 나를 도와줍니다. 대륜고 출신들이 딸딸 뭉칩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저보다 한참 위인데, 지금도 저를 보면 ‘어이, 조군, 이리 와 봐. 너 지금도 싸움 많이 하나’ 물어요. 최시중 선배와도 친하게 지냈고. 국정원에도 동창이 많아요. 대륜고 후배가 50명이나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나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 정말 고마운 친구가 몇 명 있어요. 그중 일본에서 죽은 친구가 많이 도와줬습니다. 재벌 2세도 몇 있고. 살아오면서 내가 먼저 손 벌린 적은 없어요. 피해 준 적도 없고. (대결을 통해) 나한테 맞은 사람은 많지만.” 그는 “참 (기사로) 쓸 것 없는 인생”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직 생존자가 많아요. 나한테 매 맞았다 하면 당사자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내 주변에도 많이 있는데….” 한때 그는 권투 프로모션을 운영했다. 후배들 사업을 도와준 것이라고 한다. “정말 어려운 후배가 찾아와 부탁하면 거절한 적이 없어요. 늘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으로 도왔습니다. 등록금이 없는 친구들 도와준 적도 있고요. 그래서 어려운 친구들이 나를 많이 찾아왔지요. (학창시절) 전경환, 엄삼탁도 저한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건달의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건달 한다고 누구한테 자랑한 적이 없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건달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난 부끄럽기만 합니다. 일본 야쿠자처럼 직업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나라는 무조건 조직폭력으로 몰아붙입니다. 범죄행위를 하면 잡아가야죠.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실적 올리려고 막 때려잡잖아요. 일본엔 국가관이 투철한 건달이 많아요. 우익단체들 중에 많죠. 그런 점에서 우리 주먹계에 조일환 같은 친구가 있는 게 고마워요. 그 친구가 국가관 하나는 투철합니다. 나는 현실주의자고. 솔직히 예전엔 우습게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조씨는 ‘맨손주먹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라는 평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는다”라며 “나이 들고 하니 전국에서 인정해주는 것일 뿐”이라고 낮춰 말했다. 그의 싸움실력에 대해서는 제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뛰어올라 발차기를 한다는 둥, 왼 주먹 한 방에 쓰러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둥 전설 같은 얘기가 많다.
태극권 통해 거리 조절법 배워 “전성기 때 실력이 어느 정도였느냐”는 질문에 ‘싸움의 기술’에 대한 그의 강의가 시작됐다. “발을 잘 쓰긴 했어요. 싸울 때 상대 눈을 속입니다. ‘어이, 위 봐’ 하면 상대가 위를 쳐다볼 것 아니에요? 상대의 눈길이 아래로 내려올 땐 벌써 내 발이 상대 얼굴을 때리는 거야. 오래 할 것 뭐 있노, 빨리 끝내야지. 어떤 유도선수하고 붙을 때도 속임수를 썼어요. ‘치사하게 뒤에 사람 달고 왔냐’ 하면 상대가 ‘뭐?’ 하고 뒤를 돌아볼 것 아니에요? 그 순간 앞으로 쑥 들어가면서 한 방에 눕혀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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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나오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인간은 쉬지 않고 5분을 못 싸웁니다. 5분 이상 싸울 수 있다면 극한의 세계로 들어간 거지. 1대 1이 아니라 서너 명과 상대할 경우엔 속으로 시간 계산을 합니다. 2분은 때리고 3분은 도망치는 걸로. 가장 센 놈부터 칩니다. 그놈의 옆에 있는 놈한테 ‘이 새끼, 참 나쁜 놈이네’ 하면서 다가서는 척하다가 그놈을 치는 거죠. 넋 놓고 있다가 맞는 겁니다.” 조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작을 취했다. “몸 따라 주먹을 돌리기 때문에 거리를 단축하면서 잔재주를 부릴 수 있죠.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화려하죠. 세 놈을 개 패듯이 패니. 싸우다가 300~400m를 달릴 수 있겠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뛰어요. 그래야 망신당하지 않죠. 여러 명과 싸울 땐 그럴 수밖에 없어요. 1대 1은 그럴 필요 없지만. 아무리 잘 싸운다 해도 다섯, 여섯한테 어떻게 이깁니까.” 그에 대한 신비감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속임수를 쓰는 것도 실망스럽거니와 싸우면서 달아날 궁리까지 하다니…. ‘전설적 주먹’의 명성에 걸맞지 않아 보였다. 스스로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그가 옳은 듯도 싶다. 비록 정정당당하진 않을지 몰라도 현명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한마디로 실전적이다. 게다가 솔직하지 않은가. 그의 실전 강의를 계속 들어보자. “상대가 몸집이 크면 나의 움직임을 줄여야 합니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상대를 자꾸 움직이게 해 지치게 해야 합니다. 좀 지나면 상대 입술이 파래집니다. 거기서 2분만 더 흔들면 주저앉아버리죠. 나는 어릴 때부터 뛰는 걸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습니다. 권투도 뛰는 게 뒷받침돼야 합니다. 폐활량이 좋아야 해요. 힘만 믿고 덤비는 건 구시대 싸움이고 나처럼 싸우는 건 현대전입니다. 내가 이길 수밖에 없죠. ‘창조한테는 왼 주먹만 안 맞으면 된다’고 겁먹고 덤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왼 주먹이 더 셉니까, 오른 주먹이 더 세지. 왼 주먹 피하다 오른 주먹에 당한 사람이 많았어요. 그것도 눈속임이죠. 비장의 무기를 가리는 것이니. 내가 또 이마를 잘 썼어요. 권투하는 친구들도 이거 한 방이면 다 날아가요. 요즘 이종격투기 대회에서는 이마도 못 쓰고 부자지도 못 차고 눈도 못 찌르잖아요. 만약 그런 게 허용되면 내가 지금 젊은 선수들한테도 이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잘한다기보다는 약은 거죠. 여우처럼. 시합과 싸움은 다릅니다.” -실전에서 화려한 동작은 금물이지요? “그게 가장 나쁜 겁니다. 큰 동작은 화려하죠. 하지만 싸움엔 전혀 필요치 않아요.” 조씨에 따르면 싸움에선 단순하고 빠른 동작이 좋다. 그리고 상대의 동작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염천시장에서 경비과장을 할 때 알게 된 서태현이라는 사람은 그에게 실전싸움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 전남 순천에서 오이를 싣고 올라와 염천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이었다. “그 양반이 내 싸움을 보고 놀랐어요. 싸움을 참 쉽고 재미있게 하거든요. 쓱쓱 들어가 어깨로 퉁 쳐 엎어뜨리고 다리 걸어 자빠뜨리고…. 자기가 하는 무술과는 영 다른데 참 잘하거든요. 그 양반이 ‘참 재미있게 싸운다’며 말을 걸어왔고 이후 친해졌습니다.”
조씨는 서씨의 요청으로 그의 고향인 순천에 갔다가 한 수 배우고 왔다. 서씨는 순천에서 태극권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한의사였다. 조씨와 서씨의 스승은 서씨의 도장에서 일합을 겨뤘다. 조씨는 이날 그의 몸에 손 한 번 대지 못했다. “틈이 없는 거예요. 내가 전진하면 그만큼 물러서고. 몸이 무척 가볍더라고요. 내가 들어가면 다리를 탁 차내면서 거리를 주지 않아요. 뱅 뱅 뱅 한 5분 돌았나. 땀은 비 오듯 나는데 때릴 데가 없는 겁니다. 잡히지도 않고.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서태현씨한테 “이게 뭐냐”고 물으니 “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열이 난 조씨는 이번엔 서씨와 붙었다. 결과는 똑같았다. 조씨는 태극권을 통해 거리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서씨가 조씨에게 가르쳐준 귀한 기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마와 무릎이 동시에 들어가는 공격법이다. 조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범을 했다. “둘 중 하나는 맞게 돼 있다”면서.
“주먹은 정치인과 어울리면 안 돼” 정치권과 주먹의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로 비유한다. 조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의 사조직인 태림회에서 활동했다. 정치권과의 관계를 캐묻자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맺힌 게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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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건달들이 정치판에는 안 끼려고 해요. 정치인한테 이용만 당하거든요. 이정재도 그래서 사형당한 거고. 내가 8년간 옥살이한 것도 그렇죠. 주먹쟁이는 정치꾼과 어울리면 안 돼요. 어울릴수록 손해예요.” 주먹이 정치에 참여한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은 1987년 결성된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이다. 호남주먹의 대부인 이승완씨가 주도한 이 단체의 창립회원은 2000명에 달했다. 일본의 우익단체를 본보기 삼아 전국 각 지역에 지부를 설립했고 산하에 학생 3000명이 가입한 호국학생연합회를 뒀다. 검찰에 따르면 호청련은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고 재야단체 사무실에 난입해 기물을 파손했다. 또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이 발생하자 야당인 평민당을 성토하는 등 우파적 성향을 과시했다. 조씨는 자신이 호청련 결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승완이 나보고 회장을 맡아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대신 동생들을 보내줬지요.” 그 무렵 안기부 고위간부이던 엄삼탁씨가 전국의 여러 폭력조직을 묶어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조씨를 비롯해 많은 주먹이 이에 호응했다. “엄삼탁이 부탁해 나도 대구에서 뭘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강환은 화랑동지회 결성하고. 신상사도 만들었죠.” ▼ 나중에 다 깨졌지요? “나중에 ‘범죄와의 전쟁’ 선포해 다 잡아넣은 것 아닙니까.” ▼ 엄삼탁씨가 주먹들을 이용했다가 다 잡아넣은 것이라면서요? “대표적인 사례죠. 정치인들과는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에 가보면 오야붕(우두머리)들은 (안전을) 보장받고 있어요. 본인이 범죄행위만 하지 않으면 잡혀가지 않습니다. 부하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별개 문제입니다. 오야붕은 어느 정도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범죄도 없는데, (수사기관이) 실적 올리려고 조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아넣는 건 문제입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조직을 범죄단체로 보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야쿠자를 폭력단이라고는 해도 범죄단체라고는 안 해요. 그들은 엄연히 직업이 있어요. 그리고 법을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건달들 죽이려고 술집도 못하게 합니다. 범죄단체조직죄라는 게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는 법입니다. 건달은 돈도 벌지 말라는 거죠. 그러면 뭐 먹고살라는 말입니까. 일본은 건달법이 있어요. 노름, 건설, 노조, 유흥업소… 정상인이 안 하는 일을 건달이 합니다. 야쿠자의 직업으로 인정해요. 우리는 무조건 못하게 하잖아요.” 그간 정권 차원에서 폭력조직에 철퇴를 가한 것은 세 번이다. 첫째는 5·16 직후의 국토건설단, 둘째는 1980년대 초의 삼청교육대, 셋째는 1990년에 선포된 ‘범죄와의 전쟁’이다. 조씨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운이 좋아” 국토건설단과 삼청교육대를 피할 수 있었다. 누군가 일이 터지기 전에 찾아와 빨리 피하라고 귀띔해줬다는 것.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의 포화는 비켜가지 못했다. 1991년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된 것.
“노태우 때문에 죽을 뻔했다” 조씨는 1987년 대선 때 동생들과 함께 노태우 후보를 경호했다. 광주 유세 때는 시민들이 던진 돌까지 맞았다. 이에 대해 묻자 그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얘긴 하지 맙시다. 노태우 때문에 죽을 뻔했지요. 정치인은 믿지 말아야 해요.” ▼ 뜻한 바가 있으니 관여했을 것 아닙니까. “전두환이 물러가고 노태우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노태우가 안 됐다면 군부에서 가만히 안 있었을 겁니다. 그걸 막자는 뜻에서 여러 사람과 힘을 합쳤지요.” 1991년 그는 경북 김천관광호텔 살인사건에 휘말려 구속됐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90년 이 호텔 오락실의 상무가 칼에 찔려 죽었다. 범인이 잡혔는데, 조씨의 동생들 중 한 명인 S씨 밑에 있던 사람이었다. 검찰은 조씨가 S씨에게 지시해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조씨를 수배했다. 숨어 지내던 조씨가 검거된 것은 1991년 12월. 법원은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그는 대법원까지 올라가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씨에 따르면 이 사건엔 직접증거가 없다. S씨는 사건이 터지자 미국으로 달아났다. 범인은 조씨와 모르는 사이였다. 다만 증인이 한 사람 있었다. 증인은 “조씨가 S씨에게 그런 지시를 하는 걸 옆에서 들었다”고 증언했다.
월계수회 사무국장 뺨 때려 조씨는 구속 당시 친분 있는 정치인들이 자신을 도와주려 했으나 당대의 실세 박철언씨에게 가로막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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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팔레스호텔에서 (박철언씨가 이끌던) 월계수회 사무국장의 귀싸대기를 때린 적이 있거든. 레미콘조합 애들이 월계수회에 돈을 갖다 바친 것과 관련된 일이었어요. 그게 문제가 된 겁니다” ▼ 그건 그렇다 쳐도, 뭔가 증거가 있으니 구속했을 것 아닙니까. “내가 누구 죽이라고 시키겠습니까. 증거라고는 내가 지시했다는 걸 옆에서 들었다는 증언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게 물증입니까. 그래서 내가 3심까지 무죄를 주장한 겁니다.” -증인이 조 회장께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나요? “지금 와서 나한테 매일같이 죽을죄를 졌다고 빌고 있습니다. 당시 자칫하면 자기가 10년(형) 살게 될 판이었거든. 나를 물고 들어감으로써 자기 형이 가벼워진 겁니다. 검찰에서 꼬드긴 거야. 내 변호사들이 난리를 쳤어요. 이게 무슨 법이냐고. 요즘 같으면 무조건 무죄입니다.” ▼ 노재우씨(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생, 태림회 결성 주도)가 안 도와줬습니까? “박철언한테는 꼼짝 못하더라고. 김복동 형도 놀라서 도망가고. 내가 김복동씨와 친했거든요. 그런데 황태자한테는 안 되더라고. 내가 억울하게 옥살이한 건 다들 알아요. (혼내주라고) 시킨 놈은 미국으로 도망갔지, 그놈 말 듣고 죽인 놈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놈이지. 미국으로 달아난 동생이 17년간 내 밑에 있었다는 것, 옆에서 (내가 지시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다는 것. 증거라고는 그게 다예요.” ▼ 엄삼탁씨는 안 도와줬나요? “엄삼탁도 애를 많이 썼는데, 박철언한테는 꼼짝 못하더라고. 박철언이 틀어버리니까 누구도….” 이에 대해 박철언씨는 측근을 통해 조창조씨 구속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월계수회 사무국장이 조씨에게 뺨 맞았다는 것도 처음 듣는 얘기라고 의아해했다. 조씨에 대해서는 “대구의 워낙 유명한 깡패라 이름은 알고 있었다”라고 했다. 박씨의 측근은 “맞은 사람이 주변에 뭐라 했다면 때린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즉, 맞은 사람이 월계수회 사무국장이니 조씨로서는 박씨에게 밉보였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추측이다. 조씨는 “정치권을 접촉한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는 정치쟁이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 최시중씨와는 어떤 관계죠? “그 양반은 정치꾼이 아니죠.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던 시절에 가까웠지, (그 양반이) 높아지고 나서는 얼굴도 한 번 안 봤습니다. 내가 안 찾아갑니다.” ▼ 김종필씨가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였어요. 친한 동창 J가 김종필과 아는 사이였습니다. J와 나 박사라고 정치하는 친구, 셋이서 요정에서 김종필씨를 만났습니다. 공화당 총재로 출마한다면서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강릉에서부터 작업을 하려 했습니다. 각 지역의 조직을 연결해서 김씨를 지원한다는 계획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후 김씨가 구속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돼버렸습니다.”
“저 영감 저러다 쓰러진다” 대구 주먹계에는 큰 조직이 두 개 있다. 바로 동성로파와 향촌동파다. 조씨는 두 조직을 아우를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통한다. “둘 다 내 말을 잘 듣죠. 내가 싸움을 못하게 해요. 여러 번 화해도 시켰습니다. 큰 형님이라고, 내가 전국 행사장 갈 때면 대구 애들이 나를 모시고 가요. 경상북도 건달은 전부 내 후배라고 봐야죠. 그 사람들에게는 내가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대구·경북 주먹의 대부인 조씨는 2004년 부산에 갔다가 낭패를 당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재수 없이 휘말린 사건이었다. 장소는 부산 롯데호텔. 그날 그는 경주의 최모 형이 온다고 해서 롯데호텔로 갔다.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아는 대구 동생들이 다가와 “부산 깡패들한테 말씀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구 동생들이 부산 건달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자신들이 밀리자 조씨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조씨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우리는 의협심이 있잖아요. 부산 애들한테 가서 ‘아이, 씨발놈들아. 싸움하지 말고 잘 협상해서 좋게 헤어져!’라고 야단쳤지요. 부산 애들 중에 내가 아는 놈도 있더라고. 그런데 이놈들이 나중에 문제가 되니까 나를 물고 늘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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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공갈·협박, 폭행죄로 구속 기소됐다. 57일간 구치소 밥을 먹다가 벌금 1000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검사랑 얼마나 싸웠는지. 이놈들이, 그날은 좋게 끝났는데 나중에 다시 싸움이 붙었거든. 그러면서 부산 애들이 나를 고소한 거야. 나도 그때 처음 알았는데, 말만으로도 폭행죄가 성립하더라고요.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야쿠자가 와서 어쨌다나….” 조씨의 싸움실력은 타고난 것만은 아니다. 평소 꾸준히 단련한 덕분이다.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은 그는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체질이다. 환갑 넘어서까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섀도복싱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팔굽혀펴기를 했다. 나이 들어서도 섀도복싱을 한 데 대해 그는 “어디 가서 망신은 안 당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섀도복싱은 62세 이후 접었다. 그러나 칠순이 넘은 지금도 몸 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인터뷰 전날 밤에도 속보로 3시간가량 걸었다고 한다. 그의 철저한 몸 관리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도 화제였다. 하체운동인 앉았다 서기를 한 번에 700회, 엎드려 팔굽혀펴기도 한 번에 270회씩 했다고 한다. 팔 두께가 46㎝, 가슴둘레가 128㎝였다. 웬만한 주먹들은 그의 근육만 보고도 주눅이 들었다. “운동을 안 하면 불안했어요. 앉았다 서기를 몇백 번 하면 괜찮아졌지요. 젊은 사람들이 따라 했습니다. 내가 만 53세에 들어가 61세에 나왔으니…. 안동교도소에서는 놀라죠. 저 영감 저러다 쓰러진다고. 달리기도 젊은 사람들보다 잘했어요. 돌이켜 보면 우습죠. 인생을 철없이 산 겁니다.” 교도소에는 전국 각지의 주먹이 모여 있다. 이래저래 싸움이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큰형님인 조씨는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다.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이 세계의 상징적 인물이니, 나한테는 누구도 못 덤벼들죠. 나이 차이도 있고. 일반인도 큰 어른한테는 예의를 지키잖아요. 우리 세계도 그런 게 있습니다. 나한테 기어오른다는 건 상상도 못하죠. 할 얘기는 아니지만, 교도소가 건달 양성소예요. 그곳에서 애들이 훈련하고 인맥을 쌓게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거기서 왕이에요. 양은이가 그래서 큰 것 아닙니까.”
“창조 형을 모시고 있었다” 조씨는 안동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300여 명의 주먹에게 신비한 존재요, 경외의 대상이었다. 교도관이 그에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를 따르는 주먹들이 가만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종교행사에 참여한다. 조씨는 천주교 신자다. 미사 시간이 되면 수많은 주먹이 그를 가운데 두고 호위하듯이 삥 둘러앉았다. 다른 종교를 믿는 주먹들도 미사에 참석했다.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보기 위해서였다. 젊은 주먹들은 출소해 바깥세계로 돌아가면 “창조 형을 모시고 있었다”고 자랑했다. “전국 40여 개 교도소에 있는 오야붕들이 ‘가장 큰 형님이 안동에 계신다’고 애들한테 교육을 했습니다. 성탄절이나 연말이 되면 카드가 수백장씩 날아왔어요. 그중에는 사회 나와서 가까워진 애도 많아요. 나 때문에 큰 애도 많고. 어떤 애가 괜찮으면 그 오야붕을 불러 말해줍니다. ‘나하고 몇 년 같이 지냈는데, 사내 기질도 있고 쓸 만한 놈이더라. 잘 돌봐줘라.’ 젊은 애들에게는 내가 우상이죠. 같은 세계에서 공존했으니.” 그의 휴대전화기가 수시로 울렸다. 문자메시지도 자주 날아왔다. “우리는 사람 많은 걸로 살잖아”라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매일같이 많은 사람을 만난다. 기자는 그를 호텔 커피숍에서 몇 차례 만나면서 그가 마당발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부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누굴 소개해 달라, 정치인한테 얘기 좀 해달라…. 때론 답답하기도 해요.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후배들이 자꾸 찾아오니…. 한번은 휴대전화를 끊어봤어요. 난리가 났었습니다. 아예 집으로 찾아오더라고.” 평생 특정 조직을 거느린 적이 없으면서도 주먹계의 대부로 인정받은 것은 한국 주먹사에서 특이한 사례다. 수많은 주먹이 몰려든 그의 칠순잔치는 시라소니의 적통인 맨손주먹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고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친구들한테는 내가 1대 1 싸움에서 진 적이 없다는 것이 신화로 각인돼 있습니다. 윗 선배들이 나에 대해 좋게 얘기해준 거지요. 나는 이 세계에서 라이벌이 없어요. 조일환이나 구달웅이나 다툴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다들 나이가 들어 친구로 좋게 지냅니다. 그 친구들이 한 가지 인정하는 게 있어요. 싸움으로는 나한테 안 된다는 것. 그걸로 저는 만족합니다. 그렇게 인정해주니 고맙지요. 나도 그들을 존경하고. 또 바로 밑의 이강환 또래가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들을 좋아하고.” 이제 한 시대를 풍미한 주먹대부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멘트’를 주문하면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조용히 살려고 합니다. 솔직히 젊은 친구들이 이 길로 가는 걸 원치 않아요. 좋은 길이라면 내 자식부터 이쪽으로 가도록 이끌었겠죠. 하지만 좋은 길이 아니잖아요. 나만 해도 떠밀려서 여기까지 온 건데…. 내 인생이 아니지. 이게 뭐 좋은 직업이라고. 칠순 때 후배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건달 아우들아, 가슴으로 안으마. 머리로는 절대 안지 않으마. 그들을 가슴으로 안고 끝내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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