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의 문화사-관점을 바꾸면 인생이 즐겁다
“왜 내 밑에는 나 같은 놈 하나 없나”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entebrust@naver.com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독일유학 시절에는 축구를 참 즐겨 봤다. 당시 차범근 감독이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었다. 요즘 박지성 선수가 각광받고 있지만 솔직히 당시의 차범근 선수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지금도 ‘차붐’ 하면 독일인들은 엄지를 치켜든다. 그리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슈넬(schnell)!” 빠르다는 이야기다. 진짜 빨랐다. 게다가 체격도 독일 선수에 비해 훨씬 커 보였다. 그가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은 마치 거인이 뛰는 것 같았다. 사이드라인에서 공을 몰고 달리면 쫓아오는 선수가 없었다. 다들 슬라이딩태클로 그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차범근 선수는 빨랐다.
그런데 너무 빨랐다. 그래서 몇 번이나 문제가 되는 경우를 봤다. 끝까지 너무 빨리 달려 그냥 골라인 아웃까지 해버리는 것이다. 좀 허무했다. 그러나 사이드라인을 지나 골라인을 지나도록 빠르게 달리는 차범근 선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유학생과 교민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아들인 차두리 선수도 자주 그런다.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분데스리가가 단지 차범근 선수 때문에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차범근 선수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분데스리가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축구를 보여주는 방식이 달랐다. 동일한 상황을 다양한 각도의 카메라로 찍어 보여줬기 때문이다.
남자가 축구를 좋아하는 건 그 안에 권력이 있기 때문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단 골인이 되면, 전체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 높은 곳에서 찍은 장면으로 골 넣는 상황의 선수들 움직임을 자세하게 다시 보여준다. 그러면 전체 선수들의 움직임과 골 넣은 선수의 움직임이 비교되면서 내가 마치 신이 되어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고는 다시 골대 뒤에서 골키퍼의 움직임과 골대를 향해 돌진하는 선수의 움직임을 비춰준다.
골이 골대 안으로 들어오면 그물이 출렁거린다. 내 마음도 출렁거린다. 마치 내가 골을 놓친 골키퍼가 된 느낌이다. 그러고는 골을 넣은 선수가 기뻐하는 모습을 바퀴 달린 카메라로 쫓아가며 비춰준다. 어시스트한 선수와 함께 뒹구는 모습을 바로 위에서 비춰주기도 한다. 선수들은 이에 대비해 다양한 골 세리머니를 개발해 보여준다. 감독과 동료선수들이 기뻐하는 장면도 놓치지 않는다. 중간중간 관중의 반응도 빠지지 않는다. 골을 놓치면 아쉬워하고, 골을 넣으면 흥분하는 모습에 시청자는 실제 운동장에 있는 기분이 든다.
축구를 보는 남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패다. 그리고 누가 골을 넣는지도 관심사다. 그것만으로도 남자들은 충분히 흥분한다. 실제 남자들의 관심은 온통 권력관계에만 집중돼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명함을 주고받는 행위도 서로 권력을 확인하는 행위다. 명함에 적힌 사회적 지위를 살피며 상호 권력관계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슈퍼 주인도 사장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사장이 하도 많다 보니 이젠 회장 명함이 없으면 제대로 대우받기 힘들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권력관계가 확인되면 그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구체적 행동원칙이 성립된다. 표정, 몸짓, 말투로 서로의 권력 서열에 따른 의례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랫사람이 이 원칙을 어길 경우, 이후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복이 뒤따르게 돼 있다.
명함으로 권력 서열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 땅의 사내들은 잠시 당황스러워 한다. 권력관계가 없으면 관계도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열은 정해지게 돼 있다. 대학학번, 고등학교 기수, 심지어는 군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며 얻게 되는 다양한 번호는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여자에 비해 남자가 훨씬 더 많은 각종 ‘서열 변인’을 가진다. 이도 저도 아니면 마지막에는 서로의 고향을 확인해가며 순서를 매기려고 한다. 남자에게 대부분의 중요한 관계는 권력관계다.
철없는 사내들이 마지막으로 권력 서열을 확인하는 장소는 술집이다. 들이켜는 폭탄주의 양에 따라 또 다른 서열이 정해진다. 권력이 아무리 높아도 이 폭탄주 잔에 따른 서열이 떨어지면 수컷의 서열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와 마시는 폭탄주 잔의 양이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들이 축구에
권력 서열로 모든 사회적 관계가 결정되는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의 사회적 관계는 사뭇 다르다. 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서적 관계다.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마음이 통하는지가 여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 함께 깔깔거리며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 수 있는 관계가 가능한지가 권력의 유무보다 더 중요하다. 관계적 사고에 앞서는 여자들의 특성은 심리학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남녀의 세계관 차이는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남자는 길거리에서 웬만해선 남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는다. 운전하다가 차를 세워 길을 물어보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다. 남자에게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권력관계에서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찾아내려고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러한 남자의 행동을 이해 못한다. 단순히 길 물어보는 것이 뭐 그렇게 목숨 걸 일이냐는 거다.
이런 남자들이 열광하는 축구에 여자들이 무관심한 이유는 당연하다. 아이들처럼 공 하나 가지고 수십명이 몰려다니고, 고작 그물망에 차 넣는 놀이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때는 여자들도 즐겼다. 오직 승부를 겨루는 남자들의 권력놀이처럼 보였던 축구에 정서가 존재함을 여자들이 봤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아쉬움과 환호와 같은 갖가지 정서를 집단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축구는 TV연속극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남자들의 놀이가 이처럼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동반한 경우는 없었다.
온 국민이 2002월드컵에 환호한 건 카메라 렌즈(관점)가 증가한 덕분
2002년 월드컵이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유럽식 카메라 편집방법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군대와 축구를 그토록 열광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축구를 보여주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전에 남자들이 좋아하던 축구는 단지 누가 골을 넣고, 어느 팀이 이기는지만 중요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은 달랐다. 공의 움직임에 따라 기뻐하고, 아쉬워하고, 열광하는 선수들과 관중의 모습이 그 커다란 전광판에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축구에도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TV연속극에만 있을 것 같은 그 섬세한 감정과 정서 표현이 축구에도 존재함을 2002년 월드컵에서 여자들은 비로소 경험한 것이다.
축구를 보는 공간적 관점의 변화, 즉 다양한 각도에 있는 카메라 렌즈는 축구의 내용 자체를 변화시킨다. 선수들의 움직임은 축구를 바라보는 카메라적 관점에 적응하게 된다. 그들도 끊임없이 전광판에 비치는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장 전체를 바라보는 광각렌즈적 관점에 따라 운동장 전체를 움직이며 경기하게 된다. 속도 또한 카메라적 관점의 변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길게 혼자 몰고 가는 맥없는 드리블은 기피하게 된다. 대신 빠른 패스로 연결되는 속도감 있는 동작을 연출한다. 때로는 클로즈업된 렌즈에 맞춰주는 섬세하고 현란한 동작을 보이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다. 선수들의 얼굴 자체도 변한다. 그 큰 전광판에 땀구멍까지 나타나는 클로즈업과 슬로비디오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의 축구선수 얼굴과 오늘날 축구선수의 얼굴을 비교해보라. 요즘 박지성 선수 얼굴 예뻐지는 것을 보라. 이 모든 변화의 원인은 간단하다. 축구를 보여주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축구가 헤매는 이유 는 간단하다. 축구를 보여주는 방식이 월드컵 이전 방식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축구중계에 동원되는 카메라의 숫자가 형편없이 줄었다. 그러니 혼자 한참을 몰고 가는 동네 조기축구식 플레이가 나오는 것이다. 빨리 움직여봐야 자신의 얼굴은커녕, 등에 붙어 있는 번호조차 보기 힘든 까닭이다. 축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단순해지면 축구의 내용도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한국축구의 발전방안은 아주 단순해진다. K리그 축구중계를 분데스리가 수준으로 올리면 된다. 다양한 관점에서 축구를 바라보면 축구의 내용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진짜인지 아닌지 한번 해봐라. 난 내 생각이 옳다고 자신한다.
일방적 의사소통(관점)으로 자존감은 훼손된다.
살다 보면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더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상처가 깊은 일이라도 원인과 이유가 분명하면 잠을 잘 잔다. 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이유가 분명치 않으면 밤새 잠 못 자고 고민한다. 원인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을 합리적 인과관계로 해석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자가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심하게 재미없는 영화를 보게 했다. 한 그룹에게는 밖에 나가서 ‘이 영화가 너무 재미있다’고 10명에게 이야기하고 오면 100달러씩 주겠다고 했다. 다른 그룹에게는 밖에 나가서 10명에게 ‘이 영화가 너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면 1달러씩 주겠다고 했다. 영화를 본 후, 사람들은 모두 밖에 나가서 10명에게 “너무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고 말하고 돌아왔다. 약속한 대로 100달러와 1달러를 받았다. 심리학자가 이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영화가 정말 그렇게 재미없던가요?” 그러자 두 그룹 중 한 그룹에서 “영화가 정말로 재미있었다”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어느 그룹일까?
1달러를 받은 그룹이었다. 100달러를 받은 사람들은 “아니, 사람 죽이는 거짓말도 아닌데, 무슨 100달러씩이나 주나? 10명 아니라 100명도 하겠다. 언제든지 다시 불러만 주세요”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1달러 받은 사람은 “내가 고작 1달러 받으려고 거짓말했단 말인가?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에게나, 이건 말도 안 돼” 하며 열 받아 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영화를 재미있다고 생각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상태를 무척 괴로워한다. 특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더더욱 힘들어한다. 고작 1달러를 받으려고 영화가 재미있다고 거짓말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아, 차라리 영화가 재미있다고 믿어버렸다.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인식체계를 바꿔버린다.
배가 고플 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 욕구가 채워지면 사람들은 자기 존중감, 그러니까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려는 마음이 생긴다. 이 자존감은 항상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확인된다. 내 자존심은 타인에게 비친 객관화된 나의 모습을 통해 유지된다. 이 같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자존감을 유지하는 방식을 가리켜 헤겔은 ‘인정투쟁’이라 불렀다. 미드의 사회심리학에서는 주격 나(I)와 목적격 나(Me)의 역학관계로 설명하기도 한다.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자신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훈계와 계몽의 대상이 되면 이 자존감은 여지없이 망가진다. 이에 대한 불만은 아주 묘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심할 경우 세상을 뒤집어버리기도 한다. 재미없는 영화를 재미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처럼.
자존감은 인간만의 존재확인 방식이다. 권력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돈으로는 더더욱 아니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삼성사태’가 일어났을까? 자존감은 자신이 진지한 의사소통의 상대로 여겨질 때만 지켜진다. 일방적 의사소통은 자존감을 망가뜨리고, 다양한 방식의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게 돼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이 뒤집히기도 한다. 그래서 의사소통의 문제가 중요하다.
‘순서 바꾸기’를 하지 않은 노무현
21세기 리더십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에서 나온다. 그래서 모두들 소통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소통’하자고 외친다고 소통이 될 리 없다. 우선 소통의 기본 원칙부터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기초적 상호작용 형태인 의사소통은 두 가지 원칙에 의해 유지된다. ‘순서 바꾸기(turn-taking)’와 ‘관점 바꾸기(perspective taking)’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 중 하나라도 망가지면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일단 ‘순서 바꾸기’다. 내가 이야기하면 상대편에게 순서를 넘겨줘야 한다. 내 턴(turn)이 있으면 상대방 턴(turn)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방적인 대화는 없다. 교수 혼자 하는 강의도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청중에게 반응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줄수록 좋은 강의다. 정서적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말을 아무리 청산유수로 할지라도 이 정서적 순서 바꾸기가 망가지면 곧바로 지루해진다.
가끔 TV에 출연해 보면 내가 하는 이야기는 매번 비슷하지만, 어떤 때는 아주 훌륭하고 유머 있는 교수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말 형편없이 지루한 교수가 되기도 한다. 사회자 때문이다. 사회자가 누구냐에 따라 내가 하는 이야기의 내용이 질적으로 달라진다. 뛰어난 사회자는 내가 가장 폼 나는 순간에, 그리고 가장 유머러스한 순간에 질문을 던진다. 언제가 사회자인 자신의 턴(turn)이고, 언제가 초대손님의 턴(turn)인지를 정확히 안다. 이런 사회자가 진행하는 프로에 나가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젊고 얼굴만 예쁜 사회자를 만나는 날은 최악이다. 내가 가장 헤매는 순간, 정말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순간에만 꼭 내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 우울하다.
개인 간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와 대화를 하다가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 들 때의 대부분은 이 순서 바꾸기가 망가졌을 때다. 상대방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나는 듣고만 있어야 할 때, 기분이 상한다. 상대방에게 도무지 이야기할 순서를 주지 않는 이런 종류의 실수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상대방을 계몽과 설득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나 봉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혹은 페미니스트나 환경단체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들과 대화하고 나면 뭔가 뒤끝이 찝찝한 경우가 있다. 일방적으로 듣고만 왔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들이 타인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과 자기희생의 자부심이 지나쳐 상대방을 인정해야 하는 의사소통의 기본 원칙, 즉 ‘순서 바꾸기’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적인 자부심으로 일하는 사람일수록 정기적인 자기성찰의 기회가 필요하다. 이를 상담심리학에서는 ‘슈퍼비전(supervision)’이라고 부른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젊은 검사들에게 그랬다. 이 한마디로 의사소통의 ‘순서 바꾸기’는 한순간에 망가져버렸다. 이 경고는 상대방에게 순서를 더 이상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옳으니, 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노 대통령의 임기 내내 지속된 실수의 서막이었다.
타인에겐 도무지 턴(turn)을 주지 않는 노무현 정부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대응하던 이해찬 총리의 국회토론 모습, TV토론 프로그램에서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잔인할 정도로 후벼 판 후에야 자기 이야기를 하던 유시민 장관에게서 시종일관 재생산됐다.
이런 모습에 국민은 아주 질려버렸다. 상대방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리더를 따를 사람은 없다. 문제만 생기면 ‘토론하자’던 노 대통령과 보낸 5년간 정작 자신들이 이야기할 순서는 전혀 없었다고 느낀 국민은 마지막 순간에 그야말로 싸늘하게 돌아서고 만다.
이명박 정부는 ‘관점 바꾸기’를 아는가
‘순서 바꾸기’가 노무현 정부의 문제였다면 ‘관점 바꾸기’는 이명박 정부의 문제다. ‘관점 바꾸기(perspective taking)’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는 능력이다. ‘순서 바꾸기’라는 의사소통의 기본 능력이 갖춰지면 이제 ‘관점 바꾸기’라는
심리학자들은 관점 바꾸기의 능력이 몇 살 때부터 생기는지를 실험으로 증명했는데, 대부분 네 살 때 생겼다. 문제는 네 살이 지나면 이 ‘관점 바꾸기’ 능력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하는 일이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과도한 자기확신으로 인해 타인의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해봤어?” 정주영 회장은 토론 말미에 꼭 그랬다고 한다. 한때 우리는 이 리더십에 감동했다. 그 성과 또한 대단했다. 개발시대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다. 지금도 우리는 정주영 회장의 강의영상이 담긴 광고를 보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리더십이 필요한 사회적 맥락은 따로 있다. 밀어붙여야 할 목표가 분명하고,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정보수준이 리더를 따라가지 못할 때에 한해서만 작동하는 리더십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해봤어?”의 리더십이 필요한 사회가 아니다. 지금 한국인의 인지능력은 1970년대의 그 수준이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공유 능력을 가진 사회다.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상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지식정보사회에 자신의 관점만을 고집하며 그 결과를 믿고 기다려달라는 식의 리더십은 당연히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해봤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21세기의 역사 또한 관점 바꾸기가 적용된다. 몇 명의 역사가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다양한 사람의 ‘현재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는 다양한 관점을 가진,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상호작용하는 ‘폴리포니(polyphony)’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과 관점을 공유하는 ‘관점 바꾸기’를 생략하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녀와 제대로 된 대화 한번 없던 한 아버지가 있었다. 우연히 아버지 역할에 관한 책을 읽고 느낀 바가 많았다. 그날 저녁 그는 아들을 식탁으로 불러 이야기한다.
“아들아, 우리 이제부터 대화하자!”
당황한 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한참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참다못해 한 마디한다.
“너 요즘 몇 등 하냐?”
아직도 갈 길이 먼 이 나라의 소통방식이 제발 이런 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는 게 재미없는 상사와 일하면 불행해진다
순서 바꾸기가 의사소통의 형식적 측면과 관계되어 있다면, 관점 바꾸기는 삶의 재미와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삶의 재미는 관점 바꾸기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보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의 관점을 빌려오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은 본인의 지루한 삶과 관계없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여행을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지역, 그 나라의 문화에 숨겨 있는 또 다른 관점을 찾아내려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 카메라로 사진 찍기에 바쁜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말 그대로 관광일 뿐이다.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드(미국드라마)’나 ‘일드(일본드라마)’를 많이 본다. 특히 시즌1, 시즌2 등으로 이어지는 각종 ‘미드’에 수많은 마니아가 열광한다. ‘한드’ (한국드라마)와 ‘미드’의 차이는 바로 이 관점 전환의 속도 때문이다. 미드는 공간적 관점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 관점 전환의 속도가 화려하기 그지없다. 예를 들어, 지난해부터 수많은 폐인을 만들어낸 ‘프리즌 브레이크’와 같은 미국 드라마에는 매회 예상치 못한 반전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관점 바꾸기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그 속도에 한번 익숙해지면 ‘한드’가 지루해진다.
‘개그콘서트’나 ‘웃찾사’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따라 웃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요즘 개그맨의 황당한 대사를 이해하려면 다양한 맥락의 관점 바꾸기가 가능해야 한다.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웃어야 할 순간을 한참 지난 후에야 웃게 된다. 고춘자 장소팔식 유머는 이야기 속도만 빠를 뿐 스토리텔링은 아주 단선적이다. 관점 바꾸기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삶이 재미없다는 것은 관점 바꾸기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는 게 재미없는 사람에겐 반드시 의사소통의 문제가 생기게 돼 있다.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요즘 내가 피부로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를 모시고 지시를 받으며 일하게 되면, 내 일 처리는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하다. 나는 가장 먼저 지시를 내리는 윗사람의 관점에서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를 쓴다. 그 지시의 맥락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나는 수십 가지 가설을 세우고 시뮬레이션을 반복한다. 그 결과 내가 하는 일 처리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 내게 일을 맡겨본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탁월하다.
내 문제는 전혀 반대편에서 생긴다. 내가 운영하는 연구소의 연구원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돌아오면 제대로 돼 있는 일이 전혀 없다. 나는 환장한다. 연구원들을 불러 이 따위밖에 일을 못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내 방에 들어오면 가빠진 숨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씩씩거리며 나는 생각한다.
“아니, 왜 내 밑에는 나 같은 놈 하나 없단 말인가. 나 같은 놈 하나만 있다면 세상을 바꿀 텐데….”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자주 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보자. 도대체 나 같은 놈이 흔한가?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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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과의 관점 바꾸기는 탁월하면서 아랫사람과의 관점 바꾸기는 형편없는, 이런 종류의 오류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대부분이 범한다. 리더십의 위기란 바로 이런 식이다. 그래서 사는 게 재미없는 리더를 모시는 일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가? 당신의 삶은 재미있는가? 부하 직원들과의 관점 바꾸기는 원활한가? 아니면 매일같이 앉아, “왜 내 밑에는 나 같은 놈 하나 없나”만 중얼거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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