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조선 침(鍼)의 자존심 허임 400년 만에 부활한 보사법, 알레르기비염·이명에 특효 |
조선시대, 무소불위의 임금에게 요즘 말로 마구 ‘개기는’ 의사가 있었다. 천출인 침의(鍼醫) 허임(許任·1570~1647 추정)이 바로 그다. 아버지는 악공인 허억복이고 어머니는 노비 출신의 천민. 하지만 그의 7대조는 세종대왕 때 문신으로 명망이 높았던 허조(許租·1369~1439)다. 그의 후손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돼 집안 전체가 천민으로 전락했다. ‘조선실록’은 그의 기행을 이렇게 전한다. “침의인 허임이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데 위에서 전교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오만하게 집에 있으면서 명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임금의 명을 무시한 죄를 징계해 국문하도록 명하소서.”(광해군 2년) 이뿐 아니다. 광해군 6년에는 사간원이 나서 직접 그의 징계를 탄원한다. “어제 임금께서 ‘내일 침의들은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정2품 고위관리)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한 죄는 엄하게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잡아다 국문을 해 그 완악함을 바로잡으라고 명하소서.” 사간원의 요청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오히려 치료를 잘하는 의사라며 그에게 가자, 즉 포상금을 내리기도 했다. 허준도 꼬리를 내린 침의 대가 일반인은 조선시대의 명의라면 허준(許浚·1539~1615)을 떠올리지만, 이 불세출의 신의(神醫)도 침에서는 허임 앞에 꼬리를 내린다. 선조 37년 허준과 선조 사이에 오간 대화를 보면 이는 금세 사실로 증명된다. 임금이 허준에게 침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허준은 ‘동의보감’의 질병마다 침구치료 혈자리를 표시해놓은 침구학의 대가. 나이를 보더라도 허준의 나이 58세 때 허임의 나이는 34세에 불과했고 허준은 어의였지만 허임은 일개 침의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선조의 질문에 대한 어의 허준의 대답은 대단한 칭송이 아닐 수 없다. 허임이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국제적으로 소개된 침구학의 세계적 명저로 통한다. 젊은 시절 조선에 유학 왔던 일본 오사카 출신의 의사인 산센준안은 조선의 의사들이 침구를 중시하는 점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특히 대부분의 의사가 하나같이 허임의 침구방을 배워 이용하는 것에 놀라워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그는 “유독 조선을 침에서 최고라고 하는데, 평소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다는 말은 정말 꾸며낸 말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다. 급기야 그는 일본으로 돌아갈 때 ‘침구경험방’을 가지고 가 1725년 일본판으로 간행하기에 이른다. 청나라 말기의 명의 요윤종은 ‘침구집성’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후일 그 책이 ‘침구경험방’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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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인 임진왜란 초기에 궁중에 들어와 광해군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이나 임금의 총애를 받은 그의 침구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기록에 따르면 허임은 침을 놓는 기법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선조 37년의 실록을 보면 ‘(임금이) 편두통을 앓았을 때 허준은 병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자리를 잡고 허임은 침을 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대목은 그가 침기술의 대가였음을 방증한다. 침구학은 경혈을 연구 정리하는 경혈고증학파, 침을 찌르고 자락해 피를 뽑는 자락방혈파, 침을 놓는 기법을 중시하는 수법파 등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허임이 바로 이 수법파에 속한다. 이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이 바로 보사법. 그의 보사법은 비법으로 인정돼 허임 보사법으로 따로 분류될 정도다. 그는 자신의 저서 ‘침구경험방’의 서문에 자신의 침법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혔는데, 여기엔 상당한 자긍심이 녹아 있다. “불민한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의학에 몸담은 뒤로…환자를 치료하는데 진료의 요점과 질병의 변화 과정, 보사법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허임 보사법의 원리 1748년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간 의사 조숭수는 조선침구의 특징을 묻는 일본 의원 가와무라 코에게 침구보사를 이같이 설명한다. “침을 잘 놓는 자는 보사의 방법에 능통하다. 조선에는 허임이 가장 침을 잘 놓았고 김중백이 이를 이어받았다.”(상한의문답) 허임 보사법의 수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만약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 다시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환자에게 숨을 들이마시게 한다. 이를 보법이라 하는데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이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에서 유래했다. 사법은 이와 반대로 풍선에서 공기를 빼는 것처럼 자침한다. 특히 그는 이때 “오른손으로 침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오른손이 침을 놓으면 왼손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뜻.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혈(穴)의 특성부터 이해해야 한다. 혈은 피부로 덮인 일종의 구멍으로,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혈의 구멍을 열려면 피부를 문질러서 내면의 기가 활발히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때 피부 안에 블랙홀처럼 구멍이 생기면서 기의 흐름이 더욱 활발해지는데, 허임은 바로 그때 자침을 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왼손으로는 침 놓을 자리를 열심히 문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침도 앞에서 설명했듯 세 번을 나누어서 2푼, 2푼, 1푼으로 찌르는데, 이는 상중하의 뜻으로 천지인(天地人)을 뜻한다. 혈자리에 침을 놓는 것은 기를 의사의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 기본 목표. 이때 기는 하늘과 땅이 마주쳐서 생기는 기후의 변화를 의미한다. 태양으로 대표되는 하늘의 변화를 시간으로 규정하고 사방팔방의 공간인 땅의 변화를 합해 계량화한 것이 바로 혈자리가 된다. 바람, 더위, 추위, 습기 등 기후변화처럼 혈자리는 하늘과 땅의 만남을 통해 몸을 데우고 식히며 팽팽하게 만들거나 수축하는 변화의 중심축이 된다. “침법은 손으로 익혀라” 그의 침법은 이렇듯 단순하지만 본질을 읽어내고 임상이라는 실전에 적용한 비법이었다. 필자도 임상에서 이 침법을 응용해봤는데 알레르기 비염과 이명에 특히 좋은 치료 효과를 보였다. 알레르기 비염은 신체가 외부물질에 대해 예민해져 꽃가루나 온도변화를 적(敵)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생긴다. 따라서 콧물로 씻어내고 재채기로 밀어내고 가려움으로 긁어내려 한다. 외부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이 예민함의 원인이기 때문에 이때는 풍선에 바람 빼듯 허임의 사법을 실시하면 좋은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 이명도 귀 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의 흥분을 진정하는 치료를 통해 좋은 효과가 있음을 실증했다. 관념적인 학문보다는 실질을 중시한 의사답게 그의 저서 서문은 기술의 습득을 유난히 강조한다. “침구기법을 마음만으로 얻으려 하지 말고 손으로 익혀라(得之於心 應之於手). 비법은 주어도 교묘한 재주는 줄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절세의 침법이 그의 사후 한동안 맥이 끊겨 사라졌던 것일까. 그것은 유학과 오행사상 등 관념과 교조주의 철학에 사로잡힌 조선의 지배구조가 일세를 풍미한 그의 치료법마저 삼켜버린 때문이다. 문헌을 끌어 모아 짜깁기하는 데만 급급했던 조선 후기의 침구법 서적과 달리 그가 남긴 ‘침구경험방’은 간결한 내용에 실용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끝내 그는 시대의 이단아로 눈을 감았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을 울린 조선침구학의 자존심은 정작 자신의 조국 조선에선 바람처럼 잊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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