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아리랑’을 위하여
1937년 7월 중국혁명의 수도 연안(延安)이 지루한 장마를 겪고 있을 때, 님 웨일스는 미국의 젊은 여류작가는 장명(張明)이라는 조선인 혁명가를 만난다. 수없이 일어나는 손의 경련을 참아가며 25명의 중국인 혁명가를 인터뷰하여 그들의 자서전을 썼던 님 웨일스는 연안에서 자기말고는 유일하게 노신(魯迅)도서관에 소장된 영어 책을 집중적으로 빌려가는 이 미지의 인물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만난 장명에게서 님은 독특한 매력을 느꼈고, 장마로 길이 끊어진 김에 조선이라는 서구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33세의 혁명가와 두달간 20여 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 결과가 바로 김산(金山)과 님 웨일스의 공저로 1941년에 간행된 <아리랑>(Song of Ariran)이다.
△ 옥에 갇힌 27살 때의 김산(왼쪽)과 30대의 님 웨일스. 그들은 20여 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를 <아리랑>에 담았다.
무엇이 님 웨일스를 매료시켰나
김산이라는 이름은 이 책을 간행하기 위해 김산과 님 웨일스가 상의하여 부친 이름으로 금강산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최근에 그가 일본 경찰에게 취조받을 때의 사진이 발굴되었는데, 그 사진에는 본명이 장지학(張志鶴)으로 되어 있다. Song of Ariran의 간행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 모두에서 잊힌 혁명가가 된 김산의 생애는 1984년 이 책이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동녘출판사에 의해 번역출간되면서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된다. 대학원생 시절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받은 감동과 흥분이야 지금도 생생하고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감정, 당혹감이 필자를 사로잡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시기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박노해가 실존인물이었는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인 것처럼 사학도들은 장지락이 과연 실존인물이냐를 의심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가 걸어온 길을 몰랐던 것이다.
김산이 님 웨일스의 펜을 빌려 우리를 인도하는 세계는 정말 미지의 세계였다. 1984년 당시 사학도들은 김산이 님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난 이듬해에 일제간첩으로 몰려 중국공산당에 의해 부당하게 처형당한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 김성숙(金星淑)이었는지도 몰랐다. 김산과 갈등을 빚은 한모가 한위건(韓偉建)이었는지도 몰랐고, 조선과는 수만리 떨어진 광동(廣東)에서 일어난 봉기에 조선혁명운동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청년 수백명이 참가하여 이슬처럼 사라진 사실도 알지 못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일본으로, 만주로, 상해로, 북경으로, 광동으로, 연안으로 중국대륙을 좁다 하고 혁명투쟁의 현장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분단국가의 남쪽에서 낳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님 웨일스가 절묘하게 표현한 것처럼 당시의 동아시아는 한 세대 동안에 역사가 천년이나 흘러가는 곳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김산이라는 33살의 청년은 자기가 자신의 젊음을 어디선가 잃어버린 젊은이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어디선지도 모르게 청춘을 잃어버린 청년, 내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청년이 이미 내로라하는 중국혁명가 25명의 삶을 인터뷰한 님 웨일스를 매료시킨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김산의 폭넓은 체험, 특히 중국혁명에 투신하였으면서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국외자로서의 위치에서 얻은 성찰과 고통이었다.
칠백릿길을 걸어 신흥무관학교로
△ 김산이 다니던 북경의 혐화의과대학(왼쪽)과 연안 교외 나가평의 토굴집. 연안 시절 김산도 이런 토굴집에 살았을 것인다.(한홍구)
생물학에서 개체 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지만, 김산의 짧은 삶은 바로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성숙과정이기도 했다. 어느 곳에 가던 사람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불행한 조국에서 1905년에 태어난 김산은 이 시대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3ㆍ1운동의 좌절 속에서 정치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국제정의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곧이곧대로 믿다가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결과에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맛보고, 또 외국인 선교사들이 서툰 우리말로 “한국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국에 벌을 내리고 계신 것”이라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에 분개하여 기독교를 버리게 된다.
어린 김산은 3ㆍ1운동의 충격이 가라앉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닐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본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거기서 그는 좋은 일본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지만, 어린 김산이 보기에 동경은 단지 지적 중심지로서는 2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사상의 원천인 모스크바에 가서 학교를 다닐 결심을 했다. 그렇다고 이 무렵 김산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아직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으며, 단지 새로운 문명, 새로운 희망의 진원지인 소련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김산은 작은형이 맡겨둔 생활비를 몽땅 훔쳐 중국 안동(安東)으로 건너가 소련으로 가기 위해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이 러시아 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관계로 하얼빈에 갈 수 없게 되자, 김산은 방향을 바꾸어 만주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있던 신흥무관학교로 찾아갔다.
이회영(李會榮) 등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군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입학연령을 18살로 삼고 있었다. 아무도 열다섯 어린 나이의 김산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김산은 마적이 우글거리는 험한 길을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며 옥편 하나 들고 걸어온 이야기며, 밤마다 돈을 땅속에 파묻었다가 새벽이면 다시 파내어 아침도 먹지 않고 길을 떠나 칠백릿길을 한달여 동안 혼자 걸어온 사연을 엉엉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학교 당국은 예외적인 조치로 김산에게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시험에서 김산은 국사와 신체검사에서 떨어졌지만, 학교는 3개월 코스의 속성반에 입학하도록 배려했다.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
△ 김산이 피신했던 해륙풍 소비에트를 이끈 팽배(왼쪽). 김산과 갈등을 빚었던 한위건. 김산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한위건 역시 뛰어난 혁명가였다.
학교를 마치고 어느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던 김산은 좀더 넓은 곳에 가서 배우며 혁명활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고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김산은 소년시절의 영웅이던 이동휘를 비롯해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로 꼽은 안창호, 그리고 이광수 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정작 김산을 매료한 것은 테러행동이었다.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진 민족주의자였던 김산은 상해에서 의열단을 만나 무정부주의에 빠져든다. 아직 나이가 어리던 김산은 의열단의 정식 단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의 촉망받는 제자가 되어 그들만의 작은 서클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혁명선배이자 친구가 되는 김약산(金若山=金元鳳)과 오성륜(吳成崙)을 만나게 된다. 김산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의 테러리스트들 대부분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에 심취한 톨스토이주의자들로서 김산은 이 모순을 “시대는 때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는 가장 열렬한 영웅을 만들어낸다”는 말로 정리했다.
김산이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921년 그가 북경으로 옮긴 뒤의 일이었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찬탄을 금치 못했고, 동지들 사이에 만연한 자유로운 정신을 좋아했지만, 그들의 활동이 실패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든 것은 비단 김산만이 아니었다. 1920년대 초반 중국과 한국의 열렬한 무정부주의자들 중 상당수가 1922년에서 24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된 것이다. 김산을 마르크수주의로 이끌어준 사람은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이었다. 다른 사람의 감화와 신사상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열일곱 사춘기의 나이에 자신보다 열살 위의 김충창을 만난 김산에게 김충창은 단지 선배일 뿐 아니라 가장 친한 벗이요 동지가 되었다.
1925년 김산은 김충창을 따라 북경을 떠나 광동으로 갔다. 쑨원(孫文)의 정부가 세워진 광동은 중국혁명의 중심지가 되었고, 다양한 배경이 있는 한국청년 수백명이 자진하여 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광동으로 왔다. 북경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던 김산은 광동에 와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한국혁명청년연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의열단의 영수 김약산,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폭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뒤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오성륜도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광동으로 와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작의 열띤 분위기 속에서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 시작된 북벌전쟁은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의 상해쿠데타로 인해 좌초되고, 중국에는 험악한 반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해 12월10일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의 지도 아래 중국공산당원들은 공동에서 봉기를 일으켜 시가지를 장악했다. 이 봉기에는 앞으로 몇시간 안에 자신들 중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어떻게 하면 적을 때려부술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던 한국청년 200여명이 가담했다. 그리고 사흘 뒤 반혁명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너무 열정적인 조선청년들, 앞으로 전진하는 법만 알지 후퇴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모르는 조선청년 대부분은 희생되었다. 6천여명의 중국민중들과 함께….
고문 끝에 석방… 그러나 의심을 받다
△ 1927년 12월 일어난 중국 공산당원들의 봉기에는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가담해 대부분 희생됐다. 이 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한홍구)
다행히 목숨을 구한 김산은 한인 동지 15명과 함께 인근에서 농민운동의 대왕이라고 하던 팽배(彭湃)의 해륙풍(海陸豊) 소비에트로 피신했다. 광동에서 해풍까지는 요즈음에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어 차로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지만 김산 일행은 그 길을 적들의 추격을 피해가며 25일가량을 걸어야 했다. 해륙풍 소비에트의 농민들은 반혁명의 공세를 잘 막아내었으나, 1928년 5월 마침내 적의 공세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 무렵에는 김산 등 살아남은 조선청년들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너희 가족에게 뭐라고 전해줄까를 서로 물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남기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노예의 땅에서 죽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의 빛나는 혁명투쟁과 같이 그렇게 자유로운 한국땅이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런 편지까지 썼지만 김산은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채 수천명의 희생자를 뒤로 하고 홍콩을 거쳐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로 온 김산은 극적으로 광동에서 헤어진 김충창·오성륜 등과 재회하고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지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상해에서 김산은 그와 악연으로 맺어진 또 다른 뛰어난 혁명가 한위건을 만난다. 한위건은 3ㆍ1운동 당시 시위를 이끈 학생대표의 한 사람으로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도부로 있다가 1928년 봄 당이 일본경찰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때 구사일생 탈출해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김산은 스스로가 용서를 모르는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할 만큼 혁명적 순결성을 고집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들의 사소한 탈선도 용납하지 않고 비판해서 로베스피에르란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김산은 한위건을 일제의 첩자로 보지는 않았지만, 한위건이 조직을 얼마나 허약하게 꾸렸기에 단 한번의 검거로 천여명이 무더기로 검거되게끔 한 실수와 오류를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김산은 광동콤뮌에서 그토록 많은 훌륭한 동지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새까만 저주처럼 짓눌려 있었다. 어디 가서 이 사람들 - 한국혁명의 정수이며 당 전체의 중핵이던 사람들 - 을 보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혼자 있으면 이들 희생된 사람들의 망령이 자신을 괴롭히던 때였다. 그런 처지에 있던 김산은 한위건을 곱게 보지 않아 그의 중국공산당 입당을 반대했다.
김산이 북경으로 옮겨 북경시당의 조직부 일을 보고 있을 때 한위건도 북경으로 옮겨와 북경시당에 입당을 신청했다. 그러나 김산은 여전히 한위건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의 입당을 처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30년 11월 김산은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산은 곧 일본경찰로 이첩되었지만, 고문을 견뎌내며 혐의를 부인한 끝에 석방되어 1931년 6월 북경으로 돌아왔다. 동지들은 적에게 체포되었다가 무사히 돌아온 김산을 겉으로는 친절하게 맞아주었지만, 실제로는 그와 접촉하기를 꺼려했다. 어떻게 그리 쉽사리 감옥문을 나설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당시의 분위기에서 당연한 의심이었다. 특히 이런 의심을 제기하는 데에서 김산이 투옥되어 있는 중에 당에 들어온 한위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는 혁명적 순결성을 고집하며 다른 사람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던 김산에게 돌아온 부메랑과도 같은 의심이었다.
“나는 승리했다”
이 사건은 김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좌절과 궁핍 속에 병까지 얻은 김산은 한위건이 계속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독사이며, 그는 나에게 한 짓을 다른 사람에게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비수를 품고 한위건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비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5분 내에 우리 둘 중 하나가 죽게 될 것이라 한위건을 노려보며 말했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 김산은 칼을 두고 그의 집을 빠져나왔다. 머나먼 중국 땅에서 동족 혁명가끼리의 의심과 불화는 김산의 내면을 갉아먹었다. 더구나 김산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한위건 역시 뛰어난 혁명가였다. 현재 중국공산당의 문헌에서 한위건은 중국혁명에 참가한 숱한 조선인 혁명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며, 그의 빼어난 인품을 증언하는 기록도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의심하며 반목해야 했다는 것은 당시의 혁명이 얼마나 힘든 조건하에서 진행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마음고생을 겪으며 김산은 더 이상 혁명의 견습생도 아니고, 혁명적 낭만주의자도 아닌, 장차 올바른 지도자가 될 자격을 갖춘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동지들에게서 받은 부당한 의심은 그를 지적으로 성년기로 끌어올려 주었다. 김산은 자신의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지만, 자신은 단 하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승리하였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또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이런 귀중한 깨달음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날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여러 나라의 민족과 계급을 지도하는 소련을 어머니처럼 사랑했고, 그 삶과 운명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혁명을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했으며, 어리고 불확실한 어린 아이와도 같은 한국혁명을 사랑하던 국제주의자 김산. 그러나 한국에서, 시베리아에서, 일본에서, 중국에서, 만주에서 혁명가로서 나라를 넷이나 가진 인간이란 나라를 하나도 갖지 못한 인간보다도 훨씬 비참했다. 각국에서 그가 받는 것이라고는 오직 천국행 차표 한장뿐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있는 곳에 온몸을 내던진 김산, 아니, 그들 자신의 님 웨일스를 만나지 못해 김산만큼 파란만장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 수많은 김산들은 과연 어떻게 죽어간 것일까? 간도를 휩쓸고 간 민생단 마녀사냥의 중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캉솅(康生)은 연안으로 돌아와 왜 김산을 일제의 특무로 의심하여 처형한 것일까?
아리랑’의 최후를 아는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그는 과연 어떻게 죽었을까? 그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김산을 인터뷰하여 김산과 함께 <아리랑>의 공동저자가 된 님 웨일스 역시 옌안을 떠난 뒤로 김산의 뒷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 혹자는 김산의 경력으로 볼 때 해방 뒤 북한에 돌아왔다가 연안파들이 숙청될 때 같이 숙청되었을 것이라고도 했고, 또 님 웨일스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병약해진 김산이 어디선가 병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혁명가로서의 김산의 치열한 삶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가 만주로 가서 항일전쟁에 동참하였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공개되지 않는 ‘처형 지시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던 그의 죽음에 대해 신빙성 있는 서술이 나온 것은 뒤늦게 1986년이 되어서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나마 공식 역사서술에 등장한 것은 료녕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조선족항일렬사전> 제2권에 실린 권립(權立) 선생의 글을 통해서였다. “1938년도에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 보안처에서는 김산 동지의 역사를 심사하였다. ‘반역자가 아닐까?’‘일제특무가 아닐까?’‘트로츠키파가 아닐까?’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심사하였지만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었다. 이에 강생(康生 - 캉성)은 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 동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 그는 33살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중국혁명에 바친 탁월한 조선인 혁명가요 국제주의자인 김산이 왜 중국혁명의 성지 옌안에서 반혁명분자, 또는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지지난해 12월 <아리랑>을 영화화하려는 정지영 감독, 시나리오 작업을 맡은 김석만 교수 등과 함께 옌안을 찾았을 때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러 증언을 통해 볼 때 중국공산당의 당안관(米當 案館 - 기록보관소) 깊숙한 곳에는 김산의 처형을 지시한 캉성의 서명이 담긴 지시서를 비롯하여 상당한 자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자료를 김산의 유일한 혈육인 고영광(高英光) 선생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김산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자료가 공개되면 간단히 풀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우리 모두는 지금 몇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이를 힘겹게 짜맞추어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김산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유력한 추론의 하나는 그가 옌안에 오기 직전인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김산이 <아리랑>에 금강산의 붉은 승려로 나오는 김충창, 즉 김규광(金奎光),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직한 이 단체는 공산주의의 깃발을 내걸었지만 중국공산당이나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다.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볼 때 이 단체를 주도한 인물들은 김규광·박건웅처럼 한때 당원이었다가 광둥 봉기 이후에 스스로 당을 떠났거나, 김산처럼 국민당과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쉽게 풀려나 조직에서 배제된 의심스러운 조선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출현을 코민테른이 내건 일국일당 원칙에 위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형식논리상으로 보아도 당보다 하위조직인 동맹이란 형태가 일국일당 원칙에 위배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1935년에 거행된 코민테른 7차대회의 정신이 기본적으로 소수민족이나 망명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결성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주에서는 민생단 사건의 칼바람이 진정되고 재만한인조국광복회라는 조선의 독립과 재만 조선인의 자치를 강령으로 삼는 조직이 결성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옌안에서 웃지 않던 세 사람
한편 김산 등이 이 조직을 결성한 것을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을 중국공산당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중국공산당이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런 감정이 김산의 처형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도 근거가 약하다. 1936년 초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은 만주의 조선인 당원들과 유격대원들이 조선민족혁명당 또는 조선인민혁명군과 같은 독자적인 정치·군사 조직의 결성을 허용한 바 있다. 김산이 처형되기 직전인 1938년 9월에도 중국 본토 국민당 지역의 중국공산당에 있던 조선인 당원들을 중심으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만들어진 사실을 볼 때 이런 조직의 결성 자체가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은 김산이 처형된 뒤의 일이지만,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 조직 내에만 묻혀 있게 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중국의 항일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조선의용군·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북조선독립동맹 등 통일전선 형태의 외곽조직을 결성하는 데 주력했다.
김산이 트로츠키파로 몰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트로츠키파란 이름은 이미 실제로 트로츠키와 연결되거나 그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는 딱지가 아니라 당 입장에서 볼 때 나쁜 놈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있었다. 김산은 <아리랑>에 실리지 않은 인터뷰 내용을 모은 <아리랑2>에서 자신이 트로츠키파 또는 우익, 심지어는 국민당의 하수인으로 매도되었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일은 김산이 옌안에 오기 전 일이지만, 한번 붙은 딱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광둥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산은 트로츠키와 그 추종자들이 광둥 코뮌을 혁명세력을 파괴하는 무모한 짓으로 비난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등 여러 곳에서 트로츠키를 비판하고 있다. 김산의 삶과 죽음을 추적한 선학들 가운데에는 김산의 사상에 트로츠키의 영향이 짙게 배어난다고 하는 분들도 있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런 분들은 그 논거로 김산이 일본에서 혁명이 먼저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인들이 무장을 들고 참여해야 한다고 한 대목을 들고 있는데, 일본에서의 혁명에 대한 기대는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 우리 민족해방운동가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자료의 부정확성 때문에 가끔 논란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코민테른이 중국공산당에 파견한 군사고문으로 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서양인인 오토 브라운(Otto Braun·중국명은 리더: 李德)의 회고록에는 흥미 있는 대목이 나온다. 오토 브라운이 보기에 님 웨일스와 김산을 님에게 연결시킨 아그네스 스메들리(홍군 지도자 주더(朱德)의 전기 <위대한 길>의 저자로 당시 옌안의 루신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였음) 등에게서 마오쩌둥(毛澤東)을 신격화하고 민족통일전선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보이는 등 트로츠키주의적 경향을 뚜렷이 느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제3자들에게 님 웨일스와 스메들리의 생각과 태도가 ‘도착된 트로츠키주의’라고 빈정댔다고 고백했다.
이런 의심 때문인지 공산주의자인 스메들리는 중국공산당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한 채 1937년 9월 옌안을 떠나야 했다. 오토 브라운은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이라는 권위를 갖고 있었으나 장시(江西)소비에트 시절 마오의 유격전쟁 전략과 충돌을 빚어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서 배척을 받고, 또 장정 기간 모스크바와의 연락도 끊어져 옌안에서 매우 불만스런 나날을 보내었다. 님 웨일스 표현에 따르면 혁명의 성지로 활기찼던 옌안에 웃지 않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김산, 오토 브라운과 스메들리였다. 브라운의 회고록과 님의 회상을 연결하면 트로츠키파로 몰려 입당을 거부당한 스메들리나 죽음까지 당한 김산, 그리고 스메들리를 트로츠키파로 몬 브라운 등 세 사람이 옌안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들이었다.
하인츠 노이만의 저주
한편 영화 <아리랑>의 시나리오를 준비중인 김석만 선생이 최근 미국 유타주 브리검 영 대학을 방문하여 님 웨일스 문서를 조사하고 왔는데, 아주 흥미 있는 자료를 발굴했다. 님 웨일스는 김산이 인터뷰가 조금만 길어져도 몹시 피곤해할 정도로 몸이 약해 병사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것을 알고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추론을 했다고 한다. 이 자료는 백선기 선생이 편집한 <미완의 해방노래>에 들어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산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1937년 9월 예난을 떠난 님 웨일스는 이듬해 남편 에드거 스노(<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와 함께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코민테른의 파견원으로 광둥 코뮌에 참가한 바 있는 하인츠 노이만(Heinz Neumann)을 만났다. 그런데 그는 에드거 스노에게 “네 놈과 네가 쓴 책은 아주 나쁜 거다. 둘 다 없어져야 돼. 내가 박살을 내고야 말겠어”라고 폭언을 퍼붓더니, 님 웨일스에게도 손가락질을 하면서 “네 년도 마찬가지야”라고 험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노이만은 옌안으로 가서 마오쩌둥에게 에드거 스노 부부의 험담을 했는데, 마오가 “난 그분들을 잘 알고 있고, 네 놈 속도 훤하게 다 알아, 그러니 어서 꺼져”라고 하면서 옌안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님 웨일스는 어쩌면 김산이 하인츠 노이만을 만났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김산이 노이만을 만났다면 중국공산당으로 보면 혹시 둘이 모택동에 대항하려는 게 아닌가 하여 김산을 없앴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썼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추리긴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능성이 별로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노이만은 1902년 독일 태생으로 김산보다 불과 3살 위였지만, 독일공산당 정치국원,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ECCI) 위원을 지낸 거물로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도한 광둥 코뮌이 실패로 돌아간 후 중국을 떠나 주로 스페인과 스위스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대개의 자료에는 그가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에 체포되어 숙청된 것으로 나오는데, 혹시 그가 1938년도에 중국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날이 너무 기울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작 이미 트로츠키파 혐의를 받고 있던 김산에게 그 혐의가 더 가중된 것은 아마도 조선인인 그가 님 웨일스와 자주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님의 남편 에드거 스노는 중국공산당이 확실히 받아들였지만, 아직까지 님 웨일스는 독자적인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오토 브라운 등이 트로츠키파로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님은 특별한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김산에게 불멸의 위치를 부여하기 위해 그를 집중적으로 인터뷰하여 불멸의 명저 <아리랑>을 김산과 함께 남겼지만, 그 불행한 시기에 그런 행동은 김산의 육체적 생명을 단축할 수 있는 것었이다.
마오의 정적, 장궈타오의 탈출
님 웨일스는 김산이 처형되었다는 증거가 나온 이후에도 한동안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있던 희망의 땅 옌안에서 처형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 저명한 작가 딩링(丁玲)의 말에 의지하여 김산이 병사한 것으로 믿었다. 아마도 딩링 자신이 1942년 정풍운동(整風運動) 당시에 박해를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딩링의 말은 무게를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완에서 발간된 왕지엔민(王健民)의 권위 있는 <중국공산당사>는 당의 내부자료를 인용하여 1937∼39년까지 3년간 섬감녕변구에서만 일제가 보낸 간첩과 반공특무를 100여명 이상 적발했다고 한다. 이들 체포된 간첩들 대부분이 처형되었음은 물론이다.
딩링이라는 당대 최고의 작가이자 당 선전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정풍운동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캉성이었던 사실은 김산의 죽음과 아울러 공교로운 악연을 보여준다. 그런데 딩링 사건보다도 김산의 죽음을 꼭 빼닮은 것은 정풍운동의 도화선이 된 마오의 유명한 <문예강화>에서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은 왕시웨이(王實味)의 죽음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의 번역가로서 이름을 떨친 왕시웨이는 <들에 핀 백합(野百合花)>이란 글을 통해 혁명의 성지 옌안에 새로운 특권계급이 싹트고 있다는 글을 딩링이 편집책임을 맡고 있던 당기관지 <해방일보>의 문예면에 발표했다. 그 뒤 왕시웨이는 당적을 박탈당하고 트로츠키파로 몰려 체포되어 한참을 구금되어 있다가, 1947년 3월 진서북(晉西北)으로 부대와 함께 이동하던 중에 총살되었다. 마치 김산이 옌안에서 총살된 것이 아니라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이동중에 총살되었던 것처럼.
김산이 트로츠키파로, 일제특무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죽은 것은 그가 님 웨일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1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다. 그 1년간 김산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김산이 님 웨일스를 만나던 1937년 여름과 그가 처형된 1938년 가을 사이에 옌안에서 있었던 최대의 사건은 아마도 1938년 4월 당의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인 장궈타오(張國燾)가 옌안을 탈출하여 국민당 진영에 가담한 일일 것이다. 마오에게는 오랜 정적이던 장궈타오의 탈출이 속으로는 반가운 일이었을지 모르나 중국공산당 전체와 옌안의 대중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1938년 9월에 소집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6계(屆)6차 전원회의에서는 당내에 침투한 반당분자, 트로츠키파, 일제 및 반공특무의 적발 등 서간공작(鋤奸工作)이 당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산이 과거 두 차례나 일제와 국민당에 체포되었다가 쉽게 풀려난 사실, 그 자신이 트로츠키파 혐의를 받는 당적이 회복되지 않은 활동가의 처지에서 님 웨일스 등 트로츠키파로 몰린 사람들과 어울린 사실 등이 새롭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캉성, 민생단 처리과정에도 깊숙이 개입
김산의 처단을 지시한 캉성은 1937년 11월 그가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 부책임자 역할을 마치고 옌안으로 돌아온 이래 문화혁명이 막바지에 이른 1975년 죽을 때까지 근 40여년간 중국의 비밀경찰의 총수로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귀국 뒤 오랜 기간 모스크바에서 같이 일한 왕밍(王明)과 결별하고 마오의 측근이 되었으며, 특히 같은 산둥(山東) 출신의 여배우로 뒤에 마오의 부인이 되어 권세를 휘두른 장칭(江靑)을 마오에게 소개한 인물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참이던 모스크바에 체류했던 사실을 김산을 트로츠키파로 몰아 처형한 사실과 연결시킨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필자로서는 그가 민생단 사건의 처리과정에 깊이 개입한 사실을 더 중요시하고 싶다.
당시 옌안에는 조선인도 거의 없었지만, 일부 중국공산당원들이 한때 조선인과 같이 활동했을 뿐이지 조선문제에 밝은 전문가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스크바 시절 조선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만주의 혁명운동을 지도했으며, 조선인들이 피해자가 된 민생단 사건의 처리에 참여한 그의 경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일약 마오·왕밍 등과 함께 5명에 지나지 않는 서기처의 성원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사회부 부장이 되었다. 민생단 사건의 처리에서 코민테른 중공대표단은 조선인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그들의 독자성을 인정해주는 등 조선인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새로운 방침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극에 달한 조선인들의 불만을 어루만지기 위한 것이었지 대표단이 조선인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대표단의 주요 성원으로 실질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한 양송(楊松=吳平)이 옌안으로 돌아와 발표한 글을 보면 당시 혁명대오 내에 엄청난 간첩이 침투해 있었다며 민생단원들을 처단한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또 왕밍과 캉성은 민생단 사건을 처리하던 시기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의 지도부가 일제의 스파이라고 의심하여 대규모 스파이 사건을 일으켜 만주의 당조직을 일대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런 경력이 있는 인물이 서간공작을 담당하는 사회부 책임자로 나타난 것은 김산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김산의 죽음이 특히 안타까운 것은 그가 오랜 시련과 고통 끝에 이제는 죽음 이외에는 자신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자신감을 님 웨일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단계에서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33살의 청년 김산이 님을 만나 이야기할 때 그의 숱한 동지들은 거의 다 죽어버린 때였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김산은 그런 죽음이 비극이고 때로는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네가 믿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고 말했다. 불행히도 김산에게는 그런 비극이 아닌 죽음이 차례지지 못했다. 중국에 있는 조선혁명가 가운데 죽을 곳을 받아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던 김산은 그 자신이 마지막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어린 소년 서휘와 함께 님에게 아리랑을 불러줄 때 그 모습이 매우 서글펐다고 님은 적고 있다. 내 인생에 행복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던 젊은이 김산. 그는 아리랑 노래가 조선시대에 사형장에서 불리던 것으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님 웨일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 행복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던 젊은이 김산, 그는 머나먼 이국의 사형장에서 과연 이 노래라도 부를 수 있었을까?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출처 :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 http://www.cyworld.com/algophil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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