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열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 아름답다 할 수 있나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멀고 먼 옛날이야기라지만, 굶어 죽더라도 소신을 포기하지 않고 불에 타 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사기열전’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백이와 숙제는 익명성으로 감추고 돈으로 덮어버린 현대인의 부끄러움을 반성하게 한다.
‘사기열전’의 인물은 먼 고대 사람이다. ‘사기열전’의 첫 인물 백이와 그의 막냇동생 숙제는 공자보다 더 먼 시절 사람이다. 생활방식이며 음식문화, 정치적인 견해 모두 지금과 달랐다. 백이와 숙제의 고사가 역사적 사실인지조차 의문스럽다고 한다. 만리장성 밖 요서 지방에서 고죽(孤竹) 기후(箕侯) 등의 문자가 새겨진 동으로 만든 그릇이 출토돼 화제가 된 적이 있지만, 그것이 백이의 실재를 증명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시대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치관도 변화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세포처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가치관도 있다. ‘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은 무엇을 쓰고자 했을까? 사마천은 역사가이기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과거를 쓴다. 백이와 숙제는 정치적인 치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재적인 학자나 예술가도 아니었다. 작은 나라 고죽국의 왕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다.
사마천은 ‘시경에 실려 있지 않은 시’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채미가’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다’면서 나라 밖으로 달아나버렸고,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백이와 숙제는 서백장(문왕)이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장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의 아들 무왕은 선왕의 시호를 문왕이라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가 은나라 주왕을 치려 했다. 백이와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다니. 이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무왕 곁에 있던 신하들이 무기로 자신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태공이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이에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니,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주종으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虞), 하(夏)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아아! 이제는 죽음뿐/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세상에 대한 원망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에 대해 사마천은 그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지었다는 시를 인용함으로써 공자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백이와 숙제가 인(仁)을 이룬 사람들로서 세상에 원망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 공자의 말에 반문한 것이다. 이런 시를 지었는데 원망이 없었다고요?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공자 덕분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백이와 숙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다. 제자 자공이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공동체의 통합을 추구(仁)해서 공동체의 통합(仁)을 얻었는데 무엇 때문에 원망을 했겠는가?” 최근에 출간된 신정근의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에 나오는 번역문이다. 다른 책에선 같은 문장을 ‘인이란 구하는 대로 얻어지는 것인데 또한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라고 번역했다. 인을 인간의 자유로 해석한 것이다.
일본의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사회적 환경의 문제이지만 그 이상으로 개인이 지닌 신념의 문제다. 자유가 주어졌기에 자유롭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반드시 유한하기 때문이다. 자유 중에서도 말하는 자유가 가장 우선한다. 현재 공산권 여러 나라에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문제가 되는데, 말하는 자유가 없다는 것은 가장 큰 결함이다. 이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공산권에서는 말하는 자유 대신에 빈곤으로부터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속임수다. 감옥에서도 밥은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또한 그것은 주어진 자유다. 비록 언론의 탄압이 심한 정치체제 아래서도 개인이 진정으로 자기의 자유를 지킬 마음이 있다면 거기에는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제정치 체제라든지 황제정치라고 불리는 중국 역대의 중압을 견디며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사례는 많지만 그 최초의 사례로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제나라의 경공은 4000필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죽던 날 인민들은 그이가 칭찬할 만한 귀감인지 아닌지 몰랐다. 이와 달리 백이와 그의 동생 숙제는 수양산 자락에서 굶어 죽었다. 인민들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두 사람을 칭송해 마지않는다. 그들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어 사람들은 그들의 절개를 높이 산다. 모두들 부끄럽게 살기 때문에 백이와 숙제 같은 인물이 부각된다.”
“그중에 자신의 포부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일 게다! ” 공자는 ‘논어’에서 모두 4번에 걸쳐 백이와 숙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을 추구해서 인을 얻었다’고 한 대목이다. 공자가 인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군자요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인을 공동체의 통합으로 번역하건, 자유로 번역하건 간에 공자는 백이와 숙제가 아무런 원망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과연 그런 것이냐?’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하늘을 원망하는 시 채미가를 발굴해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묻는다. ‘이 노래로 미루어볼 때 백이와 숙제가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독자 중 한 사람인 나는 대답한다. ‘원망했군요.’ 이것이 범부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소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을 떠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도, 호랑이를 타고 산중을 돌아다니는 산신이 되어 세상을 떠난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만물이 조화롭게 움직이던 전설 속의 신농(神農)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 땅의 사람으로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버렸지만, 그것은 더 좋은 세상이 없음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다. 즉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고, 부끄러움보다는 굶어 죽기를 택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중요한 덕목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부끄러움이 있기에 옷을 입고, 예의를 갖추고, 때로 거짓말도 하고, 정직하기도 하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더불어 사마천은 한탄한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했지만, 백이와 숙제같이 착한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이 하늘의 이치란 말인가? 불의에 대해 불의하고, 공명정대하게 사는 사람들이 왜 형을 당하고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사마천의 한탄이 바로 자기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 자신 선비로서 절개 있게 행동했건만(사마천은 이릉의 사건에서 소신에 따라 천자에게 직언했다. ‘신동아’ 2월호 참고)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받았다. 사마천은 동병상련 이심전심으로 백이와 숙제를 바라본다. 열전의 맨 앞자리에 이들을 소개한 것은 앞으로 열전을 기술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인간 유형을 보여줄 테니 독자 스스로 방향을 잘 살피고 가라, 소신을 굽히지 말라.’
인간에겐 이름이 전부
그는 공자의 70 제자 중 학문을 제일 좋아했다는 안연 이야기를 한다. 안연은 가난에 지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는 동안에도 거지나 다름없이 생활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이치에 맞게 착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반면에 춘추시대 말기의 도척은 천하의 도둑놈에다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심지어 사람의 간을 회쳐 먹었다는 인간 말종인데 천수를 누리고 침상에서 죽었다고 한다. 도척에게 어떤 덕행이 있고 안연에게 어떤 과오가 있었던 말인가? 도대체 세상은 어찌 생겨 먹은 것인가,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기열전’을 이렇게 읽었다.
“도대체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서일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불멸을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육체에 무게를 둔다면 그것은 생물적 인간이다. 가진 물건에 무게를 둔다면 그것은 세속적 인간이다. 이것들은 그 사람이 죽으면 모두 소멸하고 만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인간은 역사적 인간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인간이 거기에 있다. 이 불멸의 인간을 사후까지 살려두는 것은 바로 그 이름에 의해서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름은 몸에 붙인 명찰이 아니다. 바로 인간 그 자체다. 적어도 인간 그 자체와 분리할 수 없고 이름과 본질을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육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 인간에게는 이름이 전부다. 사람은 그 이름에 의해 불멸할 수 있다. 사마천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불멸을 굳게 믿었다.”
덧붙여 예나 지금이나 온갖 탈법에 불법을 일삼는 이들이 일평생 호강하고, 군자의 도를 지키는 사람은 재앙을 만나는 일이 수없이 많다고 한탄한다. 이런 사실은 역사가인 사마천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래서 절규하듯 말했다. ‘만약에 이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생각해보니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잠시 ‘쪽’ 팔리더라도 길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하다. 선비의 절개는 이제 ‘사기열전’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백이와 숙제는 그러한 시대에 늘 푸른 소나무인 것이다. 공자는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다.
부끄러움 없는 시대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소나무 같은 인물은 공자나 그 밖의 위인 중에서나 찾아야 할 것 같다. 실제 삶에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변신의 귀재가 정권이 바뀜에 따라 완전히 변신하는 데 대해 우리는 뭐라 욕하지도 않는다. 삶이 구차하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안쓰럽게 생각하고 더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생활고에 시달려 변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백이와 숙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욕하기 힘들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기에, 그들의 처지를 알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개운치 않다.
철새 정치인이나 노출증에 걸린 연예인 등 이른바 공인의 행태는 그 나라의 도덕성을 보여주기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되고, 돈에 꼬리표 달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부정부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산다는 건, 부서진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사마천이 말하는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것이 ‘소 귀에 경 읽기’요 ‘벽에다 대고 말하기’라는 것을 잘 안다.
신라 마의태자는 신라 왕조 1000년이 무너지자 베옷을 입고 여생을 보냈다. 그때의 심경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신라의 왕관을 비롯해 화려한 의상을 벗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세속적인 영화를 누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즉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처신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비로소 하늘을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는 부귀영화 대신에 자존감을 지켰다. 마의태자는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금강산 비로봉 아래에 그의 무덤이 있다. 바로 옆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가 돌로 변했다는 용마석도 있다.
마의태자가 고려에 항복하는 수모를 절개로 견뎌냈다면,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 역시 조선에 의해 왕조가 바뀐다. 역사는 일정한 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고, 사람들이 사는 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쁜 놈, 좋은 놈 그리고 이상한 놈이라는 분류도 가능하다. 신라 마의태자처럼 고려 두문동 선비들은 백이와 숙제의 마음으로 자존감을 지켰다.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진 두문동 선비들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다. 고려 유신 72명은 개성 남쪽에 있는 부조현에 관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대문에 빗장을 걸고 새로운 왕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한 나라를 열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한데 유신들이 전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말을 듣지 않으니 노여움이 불길같이 타올랐다. ‘이놈들이 타죽기 싫으면 나오겠지’ 하는 마음이지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비들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타 죽을망정 네 밑에서는 일을 못하겠다’는 선비의 절개였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끄러움이 삼류가 되면 시쳇말로 ‘쪽 팔리는 걸 못 참는 중딩’의 행동, 조폭이나 건달의 ‘가오’와도 연결된다.
이때부터 문 걸어 잠그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상황을 일컬어 두문불출이라고 했다. 당시 희생된 선비들을 ‘두문동칠십이현’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름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다. 밝혀진 이들에 한해 추모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등이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죽은 뒤를 생각해야 君子
신라와 고려는 더럽게 망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그야말로 더럽게 망해버렸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선비들의 마음은 갈 길을 잃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백이와 숙제,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장지연 주필의 ‘시일야 방성대곡’과 신채호 선생의 ‘시일야우 방성대곡’으로부터 시작된 나라 잃은 슬픔은 매천 황현을 비롯한 많은 선비가 더러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던지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런 시절에도 친일파들은 희희낙락 부귀영화를 누렸다. 사마천은 이러한 세상에 대해 원망에 찬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늘의 도, 공자의 인 같은 절대 진리가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하는 울부짖음이 있었다.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아편을 먹고 자결한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강위·이건창·김택영 등 학식이 높은 이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해 장원을 했지만,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험관이 둘째로 내려놓았다. 이 일로 그는 조정의 부패를 절감했다. 그는 더러운 세상이라 여기고 회시·전시에는 응시하지 않고 관리가 되려는 뜻을 접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효가 우선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1888년 생원회시(生員會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했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황현은 다시 귀향했다. 조선 말기의 상황은 절개 있는 선비들이 설 자리가 매우 적었다.
황현은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 역사연구, 경세학 공부에 열중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박탈당하자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국권회복운동을 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의 비보를 듣고는 더는 하늘을 올려다볼 면목이 없었다.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고귀한 삶을 접고야 말았다.
어지러운 세상 머리털 희게 겪고/ 몇 번 죽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네./ 이제는 참으로 어쩔 수 없으니/ 찬란한 촛불 하나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 자리 옮겨지니/ 궁궐은 어둠침침하고 시간은 멈춰 섰네./ 조칙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니/ 종이 위에 눈물만 흘러내리네.//
새와 짐승도 울고 온 산천 찡그리니/ 무궁화 화려 강산 기어이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역사를 헤아려 보니/ 글 아는 사람 제 구실하기 참 어렵기만 하네.//
일찍이 나라 위해 작은 공도 세우지 못 했으니/ 내 몸 하나 희생될지언정 애국이라 할 수도 없네./ 겨우 송나라 윤곡처럼 자결할 뿐이니/ 진동처럼 기개를 펴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만 하네.//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인물들 외에 동굴이나 외딴 시골에 숨어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지조 있는 인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선택이다. 어느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친일파가 되고, 독립운동가가 된다. 백이와 숙제의 선택은 죽음의 길로 이어진다.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매천 황현과 더불어 이들의 이름은 우리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불려진다. 공자는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고 했다.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군자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면 군자라 할 수 없다.
‘부끄러움을 가르칩시다’
현대사회,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끄러움이 어디에 있을까? 박완서 소설의 제목처럼 부끄러움을 가르쳐야 할 시대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극악한 범죄자들은 형벌로 다스린다지만, 자존심이나 절개 정조를 제쳐두고 그저 ‘돈돈’ 하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이 가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익명성이 부끄러움을 가려준다. 백이와 숙제는 선비의 절개 지조 이전에 인간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사마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부끄러움을 알았기에 묵묵히 글을 적었다. 그것으로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돈보다 귀한 덕목을 알았다. 우리에게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가 있다. 장삼이사의 인간관계도 상대방이 수치스러워하는 그 무엇을 건드리면 관계가 단절되곤 한다. 훌륭한 선비에게 절개와 지조는 그러한 것이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 것인가, 아니면 배부른 돼지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에 이러한 선택을 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장준하와 김준엽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장준하는 온몸으로 박정희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의문사를 당하고, 김준엽은 학교에 남아 은자(隱者)의 길을 간다.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기를 거부하고 동굴이나 산속에서 백이와 숙제의 길을 걸었을 영혼들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정권의 폭압 앞에 세상에 만정이 떨어진 사람도 있다. 문득 박정만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박정만 시인의 인생을 절벽으로 몰고 간 사건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 초창기 이른바 국민의 ‘군기’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5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일이다.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된 박정만은 서빙고동 안가로 끌려가 사흘 밤낮 심한 고문을 당한다.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이었다. 당시 같은 사건으로 끌려간 ‘중앙일보’ 정규웅 선생의 회고를 읽으면서 나는 박정만 시인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읽을 수 있었다.
권력은 서정시인의 감성을 유린하고, 선비와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진 수치심을 모조리 끌어내어 군화로 짓밟아버렸다. 박정만 시인은 소설가 한수산과는 같은 문인으로 서너 번 만난 일 외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나 정권의 횡포로 인해 영혼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고문은 몸을 괴롭히지만 영혼의 고통이 더하다. 결국 시인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를 품었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두문불출하던 그는 남도 여행을 감행했다. 남도로 향하던 중 불현듯 조치원에서 내려 수안보 부근의 세계사라는 절을 찾아가 인근에 텐트를 치고 2개월여를 보내기도 한다. 자연을 통해 개 같은 5월의 기억을 씻어내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삶은 5월 그 날에 멈추어버렸다. 마치 죽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유서와 같은 시를 쓴다.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울지 말아라 벙어리야/ 미친 오월의 돌개바람이/ 자지러지게 자지러지게 네 울음을 울어도/ 말하지 말아라 벙어리야/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저 하늘을 보려 하지 않는구나./ 불 먹은 하루해의 봉분 위에/ 풀잎처럼 쓰러져간 우리네 목숨,/ 벙어리야 벙어리야/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 이제 우리 기꺼이 푸른 제(祭)의 사슬이 되자.// ‘5월의 유서’ 전문
억압하면 더 강해진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에게서 원통한 마음을 보았다. 백이와 숙제가 널리 알려진 것은 공자 덕분이지만, 그들의 인간다운 마음을 읽어낸 것은 사마천이다. 그들의 원통한 마음은 시공을 초월해 한국의 시인에게도 전이된다.
내 가는 길섶에는/
한 송이 복사꽃도 피지 말아라./
눈물겨운 새소리 하나라도/
청송靑松 높은 가지 위에 앉지 말아라.//
바람도 불지 말고/
그저 앉은 채로 살아 있는 돌멩이같이/
그렇게 내 생의 그림자만 보아라./
산도 그냥 우리 말아라.//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
물소리 가득하여 나는 못내 못 참아라./
내 등 뒤에서 내 등을 잡지 말아라.//
정작 한 소리 마음을 내노니/
저편 한 사람 외로운 이도 볼 일이요,/
날 기울면 이편쪽 마음도 줄 일이다./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저 무화(無花)의 꽃상여’ 전문
박정만은 산하에 엎드려 운다.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라는 슬픔의 밑바닥에서 통곡한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저 광활한 우주로 사라져간 시인의 영혼은 진정으로 자유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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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백이열전’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의 도리를 설명했다. 그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체험했기에 더 절실하다. 호랑이는 죽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 인간 영혼의 고귀함과 자유로움은 그것에 저항하는 세상을 업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선과 악의 개념을 넘어선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이고, 하나는 결국 둘이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전쟁으로 평정한 세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을 품고 넘어선다. 거기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품고 가는 것이다.
마의태자, 두문동칠십이현, 매천 황현도 각각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라는 억압이 있었기에 존재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 여인의 정조, 그리고 자유는 결국 그것을 억압하는 힘에 의해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이 절묘하고도 가혹한 세상사가 있어 너와 내가 존재하고 그것이 자유롭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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