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왕전 열전
인명살상 담보로 한 명장의 탄생에 하늘이 진노하니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그들이 떠나온 자리엔 죽음과 파괴의 참상이 남아있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진나라의 두 장군 백기와 왕전의 삶을 통해 폭력의 허무와 그 처절한 악순환을 이야기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이우정
인간은 지구에서 진화한 존재가 아니라, 미친 별에서 온 ‘다른 생명체’가 아닐까, 자신들이 살았던 별을 핵전쟁으로 날려버린 뒤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날아온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전쟁 때문에 그렇다. 파괴와 죽음의 전쟁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생존방식으로 유지되어온 것은 아이러니다. 지구에 사는 어떤 생명체가 무기를 만들고, 생존과 별개의 이유로 살상하는가? 과학자들이 은유적으로 식물이나 동물의 세계를 전쟁에 비유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자연계의 움직임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전쟁은 계속 이어져왔다. 인간은 전쟁이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과 같은 존재다. 전쟁은 그 자체로 지적인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전쟁은 죽음을 탄생시켰다. 인생이 삶과 죽음이라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그 시간에 전쟁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국가 간 전쟁은 ‘위대한’ 장군을 탄생시킨다. 소나무, 민들레, 토끼, 호랑이, 고래와 구별되는 인간이라는 참으로 특이한 존재, 전쟁하는 인간 중에 군인이 존재한다. 그중 우두머리를 장군이라 부르고 어깨에 별을 달아준다. 전쟁이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군인이다. 파괴만을 위해 도발하는 군주나 장군은 없을 것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전쟁 인간’이 다시 태어날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살인범인 이들 역시 자국의 평화를 위해 거대한 전쟁을 일으켰다. 김일성의 남침도 조국통일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전쟁터에서의 승리는 잠시 평화를 가져올지 모르나, 그 악순환은 영원히 계속된다. 전쟁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간지옥’이다. 강자와 약자의 공격과 방어는 어느 순간 처지가 바뀐다. 전쟁에 대한 문장 중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반전(反戰)에 대한 낭만적인 해석이다.
한쪽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이 어디선가 그 틈을 이용해 신무기로 무장한 폭력을 준비하는 세력이 있다. 한동안 평화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우리나라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전쟁에 대한 공포가 먹구름처럼 전국을 감돌고 있다. 전쟁은 ‘당신이 어떤 상상을 하든 그 이상’이라는 광고 문구에 걸맞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폭력, 비참, 우울, 죽음, 모멸, 파괴 등이 그 이상으로 눈앞에서 작렬한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는 전쟁이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의 폭력성은 인간성이 얼마나 깊이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한 공포 그 자체다.
전설적인 장군의 잔인한 기록
사마천은 전쟁에 의한, 폭력에 의한 정치를 반대했다. 그의 눈에 역사적인 전투와 위대한 장군의 탄생은 수많은 죽음을 담보로 했다. 광활한 대륙 중국의 역사 또한 전쟁으로 점철됐다. 주로 영토 전쟁이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수많은 왕과 제후, 장군과 군사들이 피를 흘렸다. 고대 요순시절이 지나자마자 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로부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이르기까지 영토 싸움에 수많은 인명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역사 이전 시대, 즉 신화시대에도 황제와 치우로 상징되는 전쟁 신화가 있었다. 사마천 역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포로가 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했으니 전쟁 피해자이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진나라의 두 장군을 통해 폭력의 허무함과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응보의 이치를 강조한다.
‘사기열전’에는 백기와 왕전 두 장군이 등장한다. 진나라의 백기와 왕전은 말 그대로 전설적인 장군들이다. 내 생각에 역대 중국 최고의 장수로 꼽히는 항우는 제왕을 꿈꾸다 좌절한 비운의 야심가다. 반면 백기와 왕전은 오로지 군주에게 충성하는 군인의 삶을 살았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이들의 공이 컸다.
전국시대 진나라 장군 백기는 ‘공손기’라고도 불린다. 진나라 소왕 때 ‘대량조’라는 큰 벼슬까지 한 전쟁영웅이다. 사마천은 그의 군사적 업적을 이렇게 기록한다.
“백기는 병사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진나라 소왕을 섬겼다. 소왕 13년, 백기는 좌서장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 신성을 공격했다. (중략) 그 이듬해 백기는 좌경에 올라 한나라와 위나라를 이궐에서 공격해 24만명의 목을 베고, 적의 장수 공손희를 사로잡았으며,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백기는 국위로 승진돼 황하를 건너 한나라 안읍에서 간하에 이르는 땅을 함락시켰다. 이듬해 백기는 대량조에 올랐고, 위나라를 쳐서 크고 작은 성 61개를 차지했다. 그 이듬해 초나라를 공격해 언과 등 다섯 성을 차지했다. 그 뒤 초나라를 공격해 영을 점령하고 이릉을 불살랐으며, 마침내 동쪽으로 경릉에 이르렀다.”
백기는 불패의 군대를 이끌고 전국시대, 한나라 초나라 위나라 등 이웃 나라를 휩쓸었다. 이웃 나라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소왕 13년에 출정한 그의 전쟁 이력은 30년 넘게 이어진다.
“소왕 34년,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해 화양을 함락시키고, 적장 망묘를 달아나게 했으며, 삼진의 장군들을 사로잡고 적병 13만명의 목을 베었다. 초나라 장군 가언과 싸워 그의 군사 2만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소왕 43년에 백기는 한나라 형성을 쳐 다섯 성을 점령하고, 5만명의 목을 베었다.”
백기가 적군의 ‘목을 베었다’는 대목엔 24만, 13만 등의 목숨이 숫자로 기록돼있다. 심지어 2만명을 강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한다. 이러한 폭력성은 진나라 영토 확장에 이은 시황제 천하통일의 디딤돌이다. 전쟁에서 한 살인은 전쟁영웅의 명성과 후광에 가리어진다. 살인을 살인이라 하지 않는다.
전쟁 승리, 하늘엔 죄
중국대륙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 세력 다툼을 할 당시 전쟁은 잔혹했다. 살상당한 군인의 육체는 숫자로 셀 수 있을망정, 그 영혼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생각한다면 그토록 많은 인명을 살상한 장군의 이름이 아름답기만 할까? 나는 그 이름에서 피비린내를 맡는다.
춘추시대에 공자가 군주의 인(仁)과 덕(德)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 한 모든 노력이 이러한 폭력 앞에서 좌절된다. 군주의 뜻과 장군의 칼이 만나면 선비의 인과 덕은 무너져 내린다.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군은 군주에게 자신의 권력을 노리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뛰어난 군주는 뛰어난 장수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한다. 사나운 사냥개로 부려먹다 적당한 때가 되면 내치는 일은 고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하다. 적군을 사납게 물어버리는 사냥개가 언젠가 자신을 물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결코 나눠 갖고 싶지 않은 권력의 속성이 제왕으로 하여금 장수를 토사구팽하도록 만든다.
우리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두고도 여러 이론이 있다. 선조가 자신을 정치적 적으로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추측이 있는가 하면, 전사한 것처럼 위장하고 여생을 숨어 살았다는 얘기도 나돈다. 이런 추측들은 ‘사기열전’에 나오는 백기의 최후가 그 시발점이 됐다고 봐도 된다. 백기 이후 뛰어난 장군들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백기의 뛰어난 전술이 돋보인 전투가 있다. 소왕 26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때, 한나라의 상당이라는 곳에 사는 백성들이 진나라의 군사를 두려워하여 조나라로 피신한다. 조나라는 진나라를 치고 상당의 백성들을 보호해주었다. 조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지만, 조나라의 염파 장군이 누벽을 쌓고 대적한다.
조나라의 염파는 진나라의 거센 공세를 지연전으로 이끄는 전술을 펼친다. 이때 훗날 백기의 정치적 라이벌이 되는 진나라 재상 응후가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이간책을 쓴다. 진나라의 간계에 넘어간 조나라 조정은 염파 대신에 성격이 급한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한다. 진나라는 다시 백기를 대장군으로, 왕홀을 부장으로 하는 군대를 편성해 조나라를 공격한다. 조나라의 조괄은 성급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가 백기에게 대패한다. 이때의 정황은 끔찍하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9월이 되자, 조나라 군대가 식량을 보급받지 못한 지 46일이나 됐다. 내부에서는 서로 죽여 살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나라 군대는 탈출하려고 네 개 부대를 만들어 진나라의 보루를 네댓 번 공격했지만,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장군 조괄은 직접 정예군을 이끌고 맨 앞에 나가 싸웠으나 진나라 군대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마침내 조괄의 군사가 패배하니 병졸 40만명이 무안군(백기)에게 항복했다. 무안군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진나라가 상당을 점령한 일이 있었는데,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로 귀속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 병사들은 마음을 잘 바꾸기 때문에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뒤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백기는 사람들을 (항복한 병사들을 잠시) 속여 모조리 산 채로 땅속에 묻어 죽이고, 남겨진 어린아이 240명만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머리를 베인 자와 포로가 된 자는 이때를 전후로 45만명이나 됐다. 조나라 사람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다.”
세 치 혀가 화근
40만 인명을 생매장한 이 끔찍한 전투의 후일담을 적으면서 사마천은, 백기가 하늘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백기의 출세가도를 질투하는 재상 응후가 불화살처럼 날아가는 백기의 군대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는 왕에게 진나라 군사는 잦은 전쟁으로 지쳤으니 화친을 맺어 군사를 잠시 쉬게 하라고 간언했다. 왕이 응후의 말을 받아들임에 따라 백기는 칼을 잠시 손에서 놓는다. 재상 응후와는 이 일로 사이가 벌어진다. 그 벌어진 틈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스민다.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 한단을 공격했다. 이때 병든 백기는 전쟁에 나갈 수 없었다. 진나라 왕릉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장수 다섯을 잃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사이 백기가 병에서 회복하자 왕은 왕릉 대신에 백기를 장군으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백기는 여러 불리한 정황을 들어 한단을 공격하지 말 것을 청한다.
백기는 군대의 진퇴, 즉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명장이었다. 하지만 정복욕에 눈이 먼 왕은 백기에게 계속 출전 명령을 내렸다. 백기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 말하고, 일부러 병이 든 척하면서 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결국 백기의 예상대로 진나라는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이때 백기가 말실수를 한다. 세 치 혀에서 나온 한 마디의 말에 진나라 영웅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다. “왕이 내 말을 듣지 않은 결과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왕이 이 말을 듣고 진노한 것은 당연하다. 이 말은 최고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백기는 전쟁 영웅일지 모르나, 정치인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은 알고 있었지만, 인생을 잘 살아가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워낙 뛰어난 장수인지라, 왕은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백기를 다시 한 번 전쟁에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백기는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명을 받들지 않았다. 왕은 더 참지 못하고 백기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병졸로 만들어버렸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4성장군을이등병으로 강등한 것이다.
조나라의 공세에 진나라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이때 백기의 라이벌이던 재상 응후와 다른 신하들이 나라가 위급한 데도 장수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백기를 탄핵했다. 왕은 곧 사자에게 칼을 쥐어주고 백기에게 보냈다. 왕이 내린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기 전 백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군사 수십만명을 속여 모두 산 채로 땅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장수의 삶을 마감했다. 백기의 죽음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백기는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것은 삶의 전쟁터에서 죽는 길이다. 설령 백기가 수백만명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왕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상을 받았을 것이다.
백기의 이러한 모습은 훗날 토사구팽이라는 한자성어를 만들어낸 한신의 죽음과도 연결된다. 한신은 항우와 유방, 두 왕을 섬겼지만, 유방이 자신을 인정하자 항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해져 권력을 잡았으나, 결국 유방에 의해 처단된다. 이러한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유방의 참모 장량은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으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속세를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물만 먹고 살다 갔다는 전설로 남았다. 한나라의 뛰어난 영웅이었던 두 사람이 살아간 방법은 사뭇 달랐다.
적군보다 더 무서운 왕
선배 장군인 백기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왕전의 경우 왕에 대한 처신이 달랐다. 진나라 시황제라는 무시무시한 권력자 밑에서 그는 백기와 같은 공을 세우고도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그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것도 진나라 소왕보다 수십배는 강력한 권력자인 시황제 밑에서 말이다. 왕전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쓴다.
“왕전은 빈양 동향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병법을 좋아해 진나라 시황제를 섬겼다. 시황제 11년에 왕전은 장군이 되어 조나라 연여를 무찌르고 성 아홉 개를 함락시켰다. 18년, 왕전은 장군이 되어 1년 남짓 싸움 끝에 조나라를 깨뜨려 조나라 왕을 항복시키고,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해 진나라의 군으로 만들어버렸다. 그해 연나라가 형가를 보내 진나라 왕을 찔러 죽이려 했다. 진나라 왕은 왕전에게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연나라 왕 희는 요동으로 달아났고, 왕전은 연나라 수도 계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제국을 세우는 데 왕전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새로운 제국이 건설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왕은 자신을 도와준 가까운 인물들을 정리하는 속성이 있다. 왕전이 늙은 장수라면 당시 떠오르는 신예 장수 이신이 있었다. 진시황은 두 장군에게 초나라를 공략하는 데 군사가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이신은 20만명, 왕전은 60만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왕은 ‘경제적인’ 전망을 내놓은 이신을 발탁했다. 이신은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떠나고, 왕전은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병을 핑계로 숨어 살았다. 왕전의 예견대로 이신은 대패했다. 다급해진 진나라 시황제는 버선발로 왕전에게 뛰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있다. 왕전은 백기와 달리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아는 장군이었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결국 이신이 진나라 군대의 명예를 떨어뜨렸소. 들리는 말로는 지금 형나라 병사가 날마다 서쪽으로 쳐들어온다고 하니, 장군이 병이 들었다고 하나 어찌 나를 저버릴 수 있겠소?”
“노신은 병들고 지쳐 정신마저 어둡습니다. 왕께서는 다른 어진 장군을 택하십시오.”
“그만두시오. 장군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왕께서 어쩔 수 없이 저를 꼭 쓰셔야 한다면 군사 60만명이 필요합니다.”
“장군의 계책에 따르겠소.”
결국 왕전은 병사 60만명을 이끄는 장수가 됐다. 시황제는 몸소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은 가는 도중에 훌륭한 논밭과 택지, 정원과 연못을 내려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러자 시황제가 말했다. “장군은 빨리 떠나시오. 어찌 가난 따위를 걱정하시오?” 이에 왕전이 대답했다. “왕의 장군이 되어 공이 있었어도 끝내 후(侯)로 봉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관심이 저에게 쏠려 있을 때 정원과 연못을 부탁드려 자손들의 재산을 만들어두려는 것뿐입니다.” 시황제는 크게 웃고 말았다.
시황제가 크게 웃었다는 것은 뛰어난 장군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는 얘기다. 왕전은 시황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포악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믿고 대군을 맡겼다. 이때 권력에 아무런 뜻이 없다는 걸 각인시키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왕전에겐 이런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적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 바로 왕이었다. 왕전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권력에 눈이 머는 것을 경계하고 삶을 바라보는 눈을 물고기처럼 뜨고 있었다.
“그들에겐 단점이 있었으니”
뛰어난 장수로서 적을 대적하는 것보다 군주를 모시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다섯 차례나 사람을 보내 재산을 요구했다. 자신은 재산이나 조금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확인시켜준 것이다. 이런 그를 지켜보던 이가 ‘대장군으로 너무 심하게 요청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채신머리없이 무슨 짓이냐는 얘기였을 터. 왕전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 안전하게 하지 않으면 진나라 왕은 가만히 앉아 나를 의심할 것이오.”
왕전은 이신을 대신해 형나라를 공격한다. 왕전의 전략대로 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왕전은 형나라를 정복해 왕 부추를 사로잡았다. 이를 발판으로 남쪽 백월의 군주도 정복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왕분이 이신과 함께 연나라와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진시황에게 자신은 권력에 대해서 아무런 뜻이 없음을 확인시킨 덕분에 왕전은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천수를 다한다. 진시황은 재위 26년에 중국을 통일했다. 이때 왕전과 그의 아들의 공로가 단연 돋보였다. 왕전 부자의 명성은 후세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왕전 역시 3대에 가서는 항우의 손에 사로잡힌다. 왕전 당대에는 죽음을 면했으나, 3대에 가서는 하늘의 벌을 받았다. 평화주의자 사마천은 두 장군을 이렇게 평가한다.
“세속의 말에 ‘자(尺)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寸)에도 긴 데가 있다’는 말이 있다. 백기는 적의 전력을 헤아려 기민하게 대응하고 기이한 계책을 생각해내는 데 끝이 없었으므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응후와의 사이에서 생긴 우환은 없애지 못했다.
왕전은 진나라 장군이 되어 여섯 나라를 평정했다. 당시 왕전은 노련한 장수가 되어 시황제조차 그를 스승으로 받들게 했다. 그러나 진나라를 보필해서 천하의 근본(인의를 베푸는 것)을 튼튼하게 하지는 못하고, 그럭저럭 시황제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있을 곳을 구하다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다. 손자 왕이가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각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점이란 전쟁에서의 살상이다. 전쟁터에서 비록 명성을 날렸지만 그로 인해 불우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긴 안목으로 역사를 보고 평가할 때 얘기다. 지금 당장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 훗날의 안위를 걱정할 수는 없다. 하늘이 무서워 전쟁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쟁은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한국의 장군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위대한 장군을 모시는 마음을 생각하곤 했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은 그때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운 학의진 전법으로 제국주의 시대에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퇴한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 함대 제독은 승리를 축하하는 기자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를 넬슨 제독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그분의 부사관 노릇을 할 만한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계백 온달 장보고 강감찬 남이 원균 임경업 등 시대별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장군들이 줄지어 있다.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책 한 권은 족히 채울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륙과 일본 사이에 있는 지정학적인 특징 때문에 외침이 잦았다.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승전 기록은 민족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즉 일본과의 전쟁에서 절대적인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의 강인함과 지혜로움을 잘 보여준 전쟁이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전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투였다.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수비형 전투였다. 반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전형적인 공격형 전투를 감행했다. 광개토대왕의 기상은 우리 민족의 기상을 호랑이로 이미지화한다. 왕이라기보다 장수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광개토대왕이 활동했던 고구려 지도를 살펴보면 당대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쥔 한민족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북으로 진출해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다시는 이러한 전투를 볼 수 없다. 영토 확장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광개토대왕을 왕전이나 백기와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선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에는 김좌진 장군이 있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은 1930년 북만주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박상실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일제강점기에 호랑이처럼 군사를 움직였던 김좌진 장군은, 허무하게도 이념의 희생양으로 공산주의자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 또한 권력 다툼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독립운동 권력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념의 아수라장 속에서 일제가 아닌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김좌진 장군이 어처구니없게 죽임을 당했다. 이 흉탄이 6·25전쟁의 예고였는지도 모른다.
생매장에서 핵폭탄까지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은 5000분의 1이라는 낮은 확률을 무시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 중 하나를 성공시킨 인물로 꼽힌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쓴 ‘맥아더 평전’을 보면 당시 맥아더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장군은 ‘여러분의 이번 작전 실현불가능성에 관한 주장이 계획에 대한 내 믿음을 재확인시켜주었다’는 말로 시작했다. ‘왜냐하면 적의 지휘관 역시 그런 시도를 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이론적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야말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고 그는 말했다. (중략)
상륙작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고 그가 말했다. 그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적을 강력히 그리고 깊숙이 쳐야 합니다. 인천에 장벽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나는 해군에 대해 완벽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나의 해군에 대한 신뢰는 해군의 스스로에 대한 신뢰보다도 더 큽니다’고 그가 말했다.”
인천 상륙작전의 최종결과는 아군 536명 전사, 2550명 부상, 65명 실종이었다. 비교적 작은 희생을 치르고, 인민군 방어병력 총 3만~4만명을 제압한 대단한 승리였다. 맥아더는 이 작전을 군사학이 연구되는 한 오랫동안 기억될 하나의 ‘고전’이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6·25전쟁은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그러나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사이에 이견이 생기고 중공군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만주지역 중공군 기지를 폭격해야 한다는 맥아더의 주장을 워싱턴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맥아더를 해임한다. 맥아더는 1951년 4월19일 양원합동회의 고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란 명언을 남긴다.
중국이 개입하자 맥아더는 핵폭탄을 사용해 전쟁을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 또다시 국제전의 위험을 감수할 리 없었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였다. 맥아더의 위험한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노병 맥아더는 최고 권력자에 의해 군인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의 전쟁관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핵폭탄은 진나라 백기가 40만명의 인명을 생매장 한 것의 수백배에 달하는 살상 위력을 지닌다. 번쩍 하는 한순간에 말이다. 사마천의 관점에서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하늘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일이다.
인간의 무한한 파괴력
사마천은 진나라의 위대한 두 장군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덕과 인으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선비의 관점에서 전쟁은 최후의 선택일 것이다. 그 전쟁을 이끈 장군에 대한 평가는 자국의 처지에서만 선을 분명하게 그을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라도 내 나라를 침략한다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타국의 위대한 장군이 내 나라엔 가장 악랄한 군대일 수 있다. 다람쥐 쳇바퀴이고, 불교의 업보다. 그래서 폭력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이 폭력의 속성은 모리스 블랑쇼의 ‘인간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블랑쇼의 이 문장은 역설적이다. 인간이 파괴될 수 없다는 말은, 폭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 평화에 대한 의지, 신성함과 같은 것이 파괴될 수 없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이 문장은 인간을 파괴하는 폭력에는 한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백기의 40만명 생매장에서부터 6·25전쟁 희생자들, 아우슈비츠의 생지옥 등 날이 갈수록 더 악랄해지는 폭력의 살 떨림을 전하는 문장이다. 과연 그렇다. 고대 진나라의 전쟁이 한 장군의 지휘 아래 칼로 베고 생매장하는 ‘단순한’ 폭력이었다면, 이제는 핵폭탄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폭력으로 수백만명 이상이 단숨에 사라지는 시대인 것이다.
인간의 파괴엔 한계가 없다는 이 무서운 문장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이 급변하는 이상하고 요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아직까지 분단 상황 속에서 허구한 날 전쟁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폭력과 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깊고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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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백기 왕전 열전’을 읽으면서 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다시 생각한다. 낭만적이고 유아적인 생각은 인간이 평화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게 비극적이지만 현실적인 결론이다. 그럼 그 시대에 살아남은 법은 무엇인가? 사마천처럼 하늘을 두려워하고, 어떤 장군이든 대량 살상을 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고대의 문장이 지금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드시 전쟁이 나지 않더라도,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전쟁터 같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백기처럼? 왕전처럼? 아니면 이순신처럼? 맥아더처럼?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 이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사마천의 지혜를 배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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