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도깨비 대장 비형랑

醉月 2009. 8. 1. 15:12

도깨비 대장 비형랑
출처 : http://jungmin.hanyang.ac.kr/ 

귀신과 도깨비는 옛 이야기 속의 단골 손님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실린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조의 귀신 이야기는 조금 색다르다. 왕이 등장하고, 귀신과 인간과의 사랑 이야기에 더하여 복잡한 신라 왕계의 문제가 한데 얽혀 있다. 신라 사람들의 귀신이나 도깨비에 대한 생각은 어땠을까? 인간계와 귀신계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이 이야기의 행간에 역사는 또 어떻게 끼어들고 있는가? 이제 이글에서 알아볼 참이다.

진지왕과 도화녀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25대 왕이다. 『삼국유사』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제 25대 사륜왕(舍輪王)은 시호가 진지대왕이니,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년(576)에 즉위했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정치가 어지럽고 황음(荒淫)에 빠져 나라 사람이 이를 폐위시켰다.

그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태자 동륜(銅輪)이 일찍 죽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4년만인 579년에 정치 혼란과 황음을 이유로 폐위되었고, 그해 7월 17일에 세상을 떴다. 『삼국사기』가 정리한 그의 치세는 원년에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등용하면서 시작되었다. 2년 봄에는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을 단행하여 야심찬 시작을 알렸다. 그 해 10월에 침범해온 백제군을 물리쳐 무려 3천 7백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아 적의 침범에 대비했다. 3년 가을에는 백제의 알야산성(閼也山城)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4년 봄 2월에 백제는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신라의 산산성과 마지현성,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했다.
선왕인 진흥왕의 국경 개척이 끊임없는 반격으로 되돌아오던 상황에서 이같이 허를 찌르는 백제의 반격은 신라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을 법하다. 하지만 정사인 『삼국사기』는 진지왕이 그저 죽었다고만 적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서 말한 국정 문란과 황음의 폐위 사유는 어찌된 것일까?
『삼국유사』는 왕의 황음에 대한 예증이라도 들겠다는 듯이 위 기록에 이어 폐위 이전 도화녀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장황하게 기술했다. 글을 보자.

이에 앞서, 사량부(沙梁部)의 서녀(庶女)가 자색이 몹시 아름다워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으로 불렀다. 왕이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관계하려 했다.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지킬 바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아비가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으로도 끝내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죽인다면 어찌 하겠느냐?” 여자가 말했다. “차라리 저자에서 죽임을 당할망정 원컨대 그를 따르지 않겠습니다.” 왕이 장난으로 말했다. “지아비가 없다면 되겠느냐?” 여자가 말했다. “됩니다.” 왕이 놓아 보내 주었다.
이해에 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2년 뒤 그 남편도 죽었다. 열흘 쯤 되었을 때, 홀연 밤중에 왕이 평소의 모습대로 여자의 방에 와서 말했다. “네가 예전에 승낙한 적이 있다.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자가 가볍게 승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였다. 부모가 말했다. “군왕의 명이니 어찌 피하겠느냐?” 그리고는 그 딸을 방에 들여보냈다. 왕이 7일간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뒤에 홀연히 종적이 없어졌다. 여자가 인하여 임신하더니, 달이 차서 장차 낳으려 하자 천지가 진동하였다. 낳아 사내 아이 하나를 얻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도화녀는 남편이 있는 여자였는데도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왕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들였다. 황음이란 비난을 받아 마땅한 처사다. 하지만 진지왕은 여자의 도리를 말하며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를 폭압으로 누르지 않고 순순히 돌려 보내주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백제 개로왕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전개다. 개로왕은 도미의 처가 말을 듣지 않자 그 남편 도미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그 처를 겁탈하려 했다.
하지만 개로왕이 끝내 도미 처를 품에 넣지 못한 것과 달리, 진지왕은 죽어서도 혼백으로 찾아와 그녀와 동침하고, 마침내 아들 비형을 얻는다. 왕의 바람기는 죽어서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죽어 귀신이 되어서까지도 이승의 여인을 잊지 못해 거처로 찾아드는 진지왕의 모습은 자못 진지하다. 도화녀의 처신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부모를 등장시킨 것은 두 사람의 결합이 집안의 공인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확실히 진지왕의 폐위와 진평왕의 즉위에는 무언가 감춰진 곡절이 있다.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는 폐위의 속내가 가늠되지 않는다. 『삼국유사』는 정치 혼란과 왕의 황음(荒淫)을 폐위 이유로 들었지만, 이도 석연치는 않다. 미묘한 노선 차이와 드러나지 않은 권력 투쟁이 있었고, 왕의 폐위는 그 결과였을 터. 도화녀의 예화는 왕의 황음에 대한 간접적 예시야 되겠지만, 이 에피소드를 다루는 『삼국유사』의 태도는 결코 비난의 어조가 아니다. 하기야 진지왕과 도화녀의 삽화는 주인공인 비형랑을 등장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일 뿐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살피고 넘어갈 것이 있다. 불교를 전격적으로 수용한 23대 법흥왕과 그를 이어 영토 확장과 율령 정비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24대 진흥왕대에서, 진평왕의 치세로 이어지는 시기 신라 왕실의 불교 신앙 문제가 그것이다.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 왕실에서 불교를 단번에 국교(國敎)의 지위로 올려놓는 계기를 마련한다. 법흥왕의 재위 기간은 27년이었다. 왕은 즉위 18년(531)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에 임명하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그에게 맡겼다. 상대등이란 벼슬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만년에 왕은 아예 왕위를 버리고 법공(法空)이란 법명을 짓고 출가하기까지 했다. 그는 조성 중에 있던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렀다. 왕비인 박씨 보도부인(保刀夫人)도 왕을 따라 비구니가 되어 묘법(妙法)이란 법명으로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법흥왕의 아우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삼맥종(彡麥宗)이 보위를 이어 24대 진흥왕이 된다. 진흥왕은 37년간 보위에 있었다. 즉위 당시 그는 17세였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었다. 즉위 5년(544)에 마침내 흥륜사가 완공되고, 남녀가 출가하여 승려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용했다. 35년(374) 봄 3월에는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조성되었다. 왕은 이 장육존상이 고대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하려다 끝내 실패하고 배에 실어 보낸 철과 황금으로 주조했다는 설을 퍼뜨려, 이를 계기로 신라의 불국토설을 확산시켰다. 10년(549)에는 각덕(覺德)을 통해 양나라에서 부처의 사리가 왔다. 37년(576)에는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나라로 가서 불법을 묻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과 함께 돌아와 『능가승만경(楞伽勝鬘經)』과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진흥왕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법운(法雲)이라 자호하며 그 몸을 마쳤다. 왕비 또한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왕비의 법명은 묘주(妙住)였다. 그녀의 출가 시기가 진흥왕 33년(572)이었던 것으로 보아, 진흥왕이 머리를 깎은 것도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진흥왕은 아들의 이름을 독특하게 지었다. 큰 아들은 동륜(銅輪), 둘째는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 셋째는 국륜(國輪)이었다. 이는 하늘로부터 보륜(寶輪)을 얻어 세계를 통치한다는 이상적 제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전륜성왕은 칼과 무력이 아닌 정의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절대적 군주다. 여기에는 철륜(鐵輪)․동륜(銅輪)․은륜(銀輪)․금륜(金輪) 등 4왕이 있다. 저마다 설이 다르지만, 인간의 수명이 2만세가 되면 철륜왕이 출현하여 왕이 되고, 4만세에는 동륜왕이 출현하며, 6만세 때는 은륜왕이, 그리고 8만세가 되면 금륜왕이 나타나 천하에 군림한다고 했다. 둘째인 사륜(舍輪)은 금륜(金輪)이라고도 했다고 했으니, 진흥왕은 자식의 이름을 전륜성왕의 이름을 따서, 이들이 차례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상적 군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던 셈이다.


법흥왕은 불법을 일으켰고, 진흥왕은 흥륜사(興輪寺)의 대역사를 마무리 지어 법륜(法輪), 즉 불법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돌렸다. 신라는 불교가 공인된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두 왕과 왕비가 잇달아 머리를 깎고 출가를 결행했을 만큼 순식간에 불교 기반을 확고히 강화했다. 이들은 거처를 각각 흥륜사와 영흥사로 구분하여 따로 지냈을만큼 독실한 수도 생활을 했다.
하지만 진흥왕 27년(566)에 태자로 책봉되었던 동륜은 왕에 앞서 세상을 떴다. 둘째인 사륜이 보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진지왕(眞智王)이다. 그런데 진지왕은 앞선 왕들과 달랐다. 아예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으며 왕비까지 비구니가 되게 했던 선왕들과는 반대로 진지왕은 여색을 거침없이 밝히고, 행동에 절제가 없었다. 백제와의 전쟁 등으로 정치적 혼란마저 가중되자 국인(國人)으로 대변되는 화백회의는 진지왕의 폐위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진지왕의 폐위는 그의 반불교적 처신과 무관치 않을 듯싶다.
어쨌거나 왕은 재위 4년만에 폐위되었고, 폐위된 그해에 바로 세상을 떴다. 진흥왕(534-576)이 사망시 불과 40대 중반의 나이였던 것으로 보아, 진지왕은 사망 당시 아직 20대였을 것이다.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이가 26대 진평왕(眞平王)이다. 그는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이었다. 왕은 즉위 이후 무려 54년간이나 보위를 지켰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었고, 왕비는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 마야부인(摩耶夫人)이었다. 동생의 이름은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또한 절묘하다. 백정은 달리 정반왕(淨飯王)으로 불리는 중인도 가비라국의 임금으로, 다름 아닌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왕비는 사자협왕(獅子頰王)의 아들인 구리성주(拘利城主) 선각왕(善覺王)의 누이 마야부인이었다. 결국 진평왕과 왕비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부모 이름과 같게 되는 셈이다. 그뿐이 아니다. 동생 백반 또한 사자협왕의 둘째 아들로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이었다.


진평왕과 왕비, 그리고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석가모니의 부모와 삼촌의 그것과 같다. 앞서 진흥왕이 아들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의 이름으로 지은 것과 동일한 발상에 기초한다. 다만 진평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모 이름을 따서 지음으로써, 다음 대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임금이 출현해서 신라를 온전한 불국토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강력한 염원을 피력했다.
하지만 왕의 이 소망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들 없이 뒤에 선덕여왕이 되는 딸 덕만(德曼)을 낳았다. 보위는 다시 진덕여왕이 되는 조카 승만(勝曼)으로 이어졌다. 승만(勝蔓) 또한 불경 속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인도 사위국 바사익왕의 딸로 아유타국의 왕 우칭(友稱)의 부인이다. 그녀는 법흥왕 때 안홍법사가 들여왔던 『승만경(勝曼經)』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다. 『승만경』은 승만 부인이 석가모니께 자기의 사상을 여쭙자, 석가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평왕의 후비인 손씨의 이름도 승만(僧滿) 부인인 것.을 헤아린다면, 진평왕은 고대 인도의 석가모니 집안의 족보를 왕실에 그대로 옮겨 놓으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신라 왕실이 석가모니 집안을 재현하는 불국토임을 입증하려 했다. 이른바 석종의식(釋宗意識)으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의식의 강화는 진지왕을 폐위시킨 후 동요하는 민심을 불법의 힘으로 진정시켜 흔들리는 왕권을 확고히 세우려는 의지로 읽힌다.
진평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진흥왕의 장육존상 조성의 예를 본떠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상황(上皇)의 뜻을 받들어 옥대(玉帶)를 하사했다는 신화를 유포시켰다. 또 궁궐 내에 있던 제석궁(帝釋宮)의 섬돌을 발로 밟아 부서뜨림으로써 자신의 권위에 대한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내려 했다.


한편 진지왕과 진평왕의 차이는 계통의 차이로도 설명된다. 진흥왕과 진지왕은 왕비를 모두 박씨에게서 취했다. 이른바 진골계통이다. 하지만 태자 동륜은 아내를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맞아들임으로써 성골계통의 왕계를 출범시켰다. 성골계통의 편협한 순수 혈통주의가 바로 석가모니 집안의 재현으로 대변되는 석종의식(釋宗意識)의 강화로 이어졌고, 다음 시기 성골 내부의 승계 원칙에 따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체제의 출범으로까지 연결되었다.

도깨비 무리를 부리는 비형랑
이제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안고, 다시 주인공인 비형랑의 이야기로 돌아오기로 한다. 이어지는 『삼국유사』 「도화녀 비형랑」조의 기사를 계속해서 읽어본다.

진평대왕이 그가 남다르다는 말을 듣고,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벼슬을 내려 집사(執事)로 뽑았다. 매일 밤 도망가서 먼데서 놀았으므로,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이를 지키게 했다. 매번 날아서 월성을 넘어 서쪽으로 경성 서편에 있는 황천(荒川)의 언덕 위로 가서 귀중(鬼衆)들을 이끌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속에 엎드려서 엿보니, 귀중들은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서야 각자 흩어져갔고, 낭 또한 돌아왔다.
군사들이 이 일을 아뢰자, 왕이 비형을 불러 말했다. “네가 귀신을 이끌고 논다는데, 사실이냐?” 낭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의 무리를 부려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황천 동쪽의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만들도록 해라.” 비형이 명을 받고 그 무리를 부려서 돌을 다듬어 하루 밤만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이름을 귀교(鬼橋)라 한다.

이 이야기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비형랑은 귀신이 인간과 관계해서 낳은 아이였다. 그는 사람이면서 귀신이고, 귀신이면서 사람이었던 모순적 존재다. 촌수로만 따지면 진평왕과 비형랑은 4촌간이었다. 왕이 비형랑의 존재를 바로 알았던 것을 보면 비형랑의 출생과 관련된 풍문은 당시 꽤 널리 유포되었음이 분명하다. 진평왕은 그의 비범성을 들어, 아예 왕실로 데려와서 길렀다. 그와 관련된 불온한 풍문을 이렇게 해서 서둘러 잠재우려 한 것이다. 나이 15세 때는 비형랑을 집사(執事)로 삼았다. 진지왕이 세상을 뜬 후 2년 뒤에 도화녀에게 나타났고, 여기에 임신 기간을 합친다면, 이때는 진평왕 18년 또는 19년에 해당한다. 집사는 왕의 가신적(家臣的) 성격을 띤 근시직(近侍職)이다.


그런데 왕실에서 자란 소년은 집사가 되고서도 밤마다 궁궐을 벗어나는 모험을 즐겼다. 50명의 용사를 곁에 두어 지키게 한 것으로 보아, 비형랑의 외부 접촉을 왕이 몹시 꺼렸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가는 곳은 월성 서쪽에 있는 황천(荒川) 언덕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귀중(鬼衆)과 어울려 지냈다. 귀신이 된 임금의 혈통인지라, 귀중들도 그에게 복종했다. 이때 귀(鬼)는 그저 여느 귀신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이 두두리라고 불렀던 도깨비다. 허겁지겁 비형랑을 뒤쫓아간 용사들의 전언을 통해 이 일이 왕에게까지 알려졌다. 비형(鼻荊)은 뜻으로 풀면 ‘코에 가시’다. 코가 유난히 뾰족했던 그의 신체적 특징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이것이 도깨비와의 연상 작용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왕은 비형랑과 도깨비 무리를 차단하는 대신, 이들로 하여금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게 했다. 비형은 도깨비의 무리를 부려서 하루 밤만에 큰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바로 귀교(鬼橋)다. 비형랑이 도깨비들과 늘 놀았다는 황천은 경주 시내 탑정동 일대를 흐르는 하천으로 오릉(五陵)의 앞쪽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의 귀교 항목에서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 조 기사를 그대로 옮겨 적은 뒤, 맨 끝에 “이것이 동경 두두리(豆豆里)의 시초다[此東京豆豆里之始]”라는 한 구절을 덧붙였다. 실제 지금도 경주 사람들은 탑정동 일대를 ‘두두리 들’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두두리’는 무슨 뜻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1의 경주부 고적조, 「왕가수(王家藪)」 항목에 이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왕가수는 고을의 남쪽 10리에 있다. 고을 사람들이 목랑(木郞)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목랑은 속칭 두두리라고 하는데, 비형의 이후로 세속에서 두두리를 섬기는 것이 몹시 성하였다.

두두리는 목랑(木郞)의 속칭이니, 당시 경주 사람들이 도깨비를 부르던 토박이 말인 셈이다. 왕가수는 연못이나 늪지였을텐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두두리를 제사 지낸다고 했다. 비형랑 이후로 두두리에 대한 신앙 행위가 꽤 성행했음이 확인된다. 두두리란 표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1의 「영묘사(靈妙寺)」 조항에 한번 더 등장한다.

영묘사는 경주부의 서쪽 5리에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6년(632)에 신라 선덕왕이 창건했다. 건물이 3층으로, 체제가 남달랐다. 신라 때의 건물이 한 두 개가 아닌데 다른 것은 모두 무너졌어도 이것만은 완연히 지난날과 같았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절터는 본래 큰 못이었다. 두두리의 무리가 하루 밤만에 이를 메워 마침내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두두리의 무리[鬼衆]는 비형랑이 이들을 시켜 귀교를 놓음으로써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두두리 무리는 영묘사 건립에 있어서도 큰 못을 하루 밤 사이에 메워서 그 위에 건물을 짓게 하는 이적을 펼쳐 보였다. 이후 사람들은 왕가수 같은 곳에 이들을 제사지내는 공간까지 마련해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반드시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늪이나 연못, 그리고 하천 같은 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들은 다리를 놓거나 건물을 짓는 등 토목 방면에 탁월한 역량을 지닌 존재였다.
두두리의 존재는 『고려사』에도 나온다. 열전 「이의민(李義旼)」조에 관련 내용이 있다.

이의민은 문자를 익히지 않아 오로지 무격만 믿었다. 경주에 목매(木魅)가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의민이 집에 건물을 짓고서 맞아들여 두고는 날마다 제사하며 복을 빌었다. 문득 하루는 건물 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민이 괴이하게 여겨 묻자, 목매가 말했다. “내가 네 집을 지켜 보호한 지가 오래 되었다. 이제 하늘이 장차 재앙을 내리려 하니 내가 의지할 곳이 없구나. 그래서 곡한다.” 얼마 못 서 이의민은 패망하였다. 유사(有司)가 벽 위의 도형(圖形)을 없앨 것을 주청하니 명을 내려 흙을 발라 버리게 했다.

두두을(豆豆乙)은 ‘두둘’로 읽는다. 두두리의 다른 표기일 뿐이다. 목랑(木郞)이니 목매(木魅)니 하는 표현 또한 도깨비를 지칭한다. 이는 도깨비 신앙이 절구공이나 도리깨 같은 것의 나무붙이 신에서 비롯된 것과 관련이 있다. 지금도 도깨비 하면 늘 방망이를 들고 다니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가. 두두리 신앙은 당초 비형랑 설화에서 출발하여 널리 유포되었고, 고려 때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채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 인용은 그 신앙 형태가 벽에 두두리 그림을 그려놓고 치성을 드리는 방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진평왕은 어째서 비형랑을 시켜 두두리 무리에게 다리를 놓게 했을까? 다리는 이곳과 저곳을 연결 시켜주는 구조물이다. 다리는 막힌 곳, 건널 수 없는 곳을 이어주는 소통의 상징이다. 왕은 비형이 궁궐을 넘어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의 이물(異物)과 교통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제지와 방해로도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자, 왕은 오히려 이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맡김으로써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 결과가 바로 귀교였던 셈이다. 두두리 들은 왕의 요구에 협조하여 하루 밤 만에 돌다리를 완성함으로써 서로 차단되었던 두 세계 사이에 소통의 가교를 놓았다. 이런 것은 진평왕이 석종의식에 입각해서 신라의 불국토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세력들을 끌어안고 가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여우로 변한 길달
「도화녀 비형랑」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은 길달(吉達)이다. 그는 비형랑에 의해 조정에 들어왔던 도깨비였다. 먼저 글을 읽어 보자.

왕이 또 물었다. “귀신의 무리 중에 인간 세상에 출현하여 조정을 보필할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국정을 보좌할만 합니다.” 왕이 말했다. “함께 오너라.” 이튿날 비형과 함께 뵈니, 벼슬을 내려 집사로 삼았다. 과연 충직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각간 임종(林宗)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하여 아들로 잇게 하였다.
임종이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누문(樓門)을 세우게 하고, 매일 밤 가서 그 문 위에서 자게 했다. 그래서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서 달아나 숨었다.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래서 그 무리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가사를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혼령이 아들 낳으니 聖帝魂生子
비형랑의 집이 바로 여길세. 鼻荊郞室亭
날고 뛰는 귀신의 무리들이여 飛馳諸鬼衆
이곳에는 머물러 있지를 말라. 此處莫留停

향속(鄕俗)에서는 이 가사를 붙여서 귀신을 ?는다.

왕은 두두리들이 놓은 다리를 보고, 차제에 그들을 중용해서 쓸 작정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비형랑의 추천을 받은 길달이 궁궐로 들어와 비형랑과 함께 집사의 직임을 받았다.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충직함으로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도깨비들은 통상 새벽 종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광명한 세상에는 출현하는 법이 없지만, 필요할 경우 그들은 백주 대낮에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왕은 길달을 각간 임종의 아들로 삼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아낌없는 신뢰를 보였다.
왕이 비형랑에게 귀교를 놓게 했던 것처럼, 임종은 길달에게 흥륜사 남쪽에 누문(樓門)을 세우게 했다. 길달은 역시 두두리들의 도움을 받아 누문을 세웠다. 임종은 길달에게 매일 밤 문 위에서 잠을 자며 지키게 했다. 그는 누문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이제 수문장의 노릇까지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비형랑의 귀교(鬼橋)와 길달의 누문(樓門)의 성격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다리가 앞서 말한 대로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한다면, 길달의 누문은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는 통제의 기능이 앞선다. 문이 없으면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을 텐데, 누문을 세움으로써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을 검열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더욱이 길달은 밤마다 누문에서 잠을 자며 밤 사이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도록 그곳 문을 지켰다.


처음 비형랑은 귀교를 놓아 인간과 두두리들 사이에 가교를 마련했고, 그 다리를 건너 길달이 인간 세상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막상 인간에 소속된 길달에게 주어진 역할은 흥륜사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는 수문장 노릇이었다. 두두리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길달이 이제 인간계에 소속되면서 도리어 두두리 무리를 차단하는 앞장에 서게 된 것이다. 길달이 여우로 변해서 달아나 숨은 것은 본래 그가 속했던 도깨비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비형은 다른 두두리들을 동원해서 그를 붙잡아 오게 하고, 그를 죽여 버렸다. 배신에 대한 징벌이다. 귀신이 여우로 변하는 예는 예전 설화에서 수도 없이 많다. 『삼국유사』의 「원광서학(圓光西學)」조와 「밀본최사(密本摧邪)」조에도 귀신이 여우로 변하였다가 불법의 위력 앞에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앞서 밤마다 황천으로 달려가 두두리들과 노닐던 비형랑은 어느새 두두리들의 벗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제 비형랑은 두두리들의 대변자가 아닌 왕의 대변자를 자임하고 나선 셈이다. 두두리들은 그런 비형랑을 더 이상 자신들의 리더로 인정하지 않고 두려워하며 달아나 버렸다. 그리하여 두두리들의 벗이자 대장이었던 비형랑은 이에 이르러 성격이 완전히 변모된다. 귀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나 방황하던 그가 인간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귀신들이 두려워 떠는 무서운 존재로 변했다.

소통의 다리는 끊어지고 누각 문은 굳게 닫혀버리고 말았다.
비형랑은 마침내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의 문신(門神)이 되었다. 주문처럼 시를 써서 붙이기만 하면 귀신들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평왕이 비형랑을 궁중에서 길러 집사로 삼고,

그를 매개로 두두리들까지 끌어들였던 당초 의도는 일단 성공했던 셈이다.


비형랑은 권좌에서 밀려난 진지왕의 혼백이 인간의 여인과 교통해서 낳은 아들이다. 그는 사람이되 귀신의 아들이었고, 귀신이면서 사람의 자식이었다. 그의 비범성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그의 풍문은 대궐에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만치 강력했다. 왕은 그의 존재를 방치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진평왕이 즉위 원년부터 상황(上皇)이 천사(天使)를 시켜 옥대(玉帶)를 하사했다는 신화를 유포하고, 내제석궁의 섬돌을 밟아 부서뜨리면서까지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려 한 것은 당시까지 그의 지위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증좌다. 그로서는 진지왕의 추종세력들을 일단 끌어안고 가는 모양새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고, 그 화합과 포용의 상징적 존재가 바로 비형랑이었다. 비형랑은 왕의 의도대로 야성을 버리고 왕의 불교적 신앙 체계 속으로 순치되었다. 한때 그와 한편이었던 두두리의 세계는 이제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고 말았다.
두두리들은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고, 이제 불법(佛法)이 지배하는 광명의 세계만 남게 되었다.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는 본래 진지왕의 폐위와 진평왕의 즉위 사이에 끼어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설화는 도깨비의 대장이었던 비형랑이 도깨비들이 무서워 떠는 존재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도깨비로 대변되는 토착적 신앙체계가 불교의 막강한 힘에 의해 와해되고 견인되었음을 보여준 이야기로 이해되기도 한다.

비형랑과 용춘(龍春)
여기에 한 가지 더 음미할 사실이 있다. 진지왕에게는 왕비인 박씨 지도부인(知道夫人)과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 하나 있었다. 그는 용춘(龍春) 또는 용수(龍樹)로 불려진 인물이다. 사실 진평왕이 비형랑보다 더 신경 썼어야 마땅할 인물은 바로 용춘이다. 그런데 훗날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이기도 한 용춘에 대한 기록은 적어도 진평왕 초기 기사에서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진평왕 44년(622) 봄 2월 기사에서다.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사신(內城私臣)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요컨대 진지왕의 혈육이었던 그는 진평왕이 비형랑을 궁중에서 거두어 기르고, 집사의 직임을 맡기며, 귀중을 부려 다리를 놓게 하는 활약을 벌이는 동안에 단 한차례도 거론 된 바 없다.


앞서 『화랑세기』는 진지왕의 폐위를 주도했던 인물이 그의 어머니였던 사도부인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머리를 깎은 승려의 신분이었다. 도덕적으로 방탕한 아들 진지왕의 행동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왕이 바랐던 전륜성왕의 꿈을 짓밟는 일련의 행동을 보고 폐위를 결심했을 법하다. 폐위 당시 진지왕이 20대의 나이였음을 감안한다면 용춘은 당시 비형랑과 나이 차이가 거의 없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진지왕의 폐위는 국인(國人)의 여론을 업은 왕실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고, 진평왕으로의 권력 이양은 노리부공과 같은 중신의 중재에 의해 큰 유혈 사태 없이 이루어졌던 듯하다.


한편 용춘의 다른 이름이 용수(龍樹)인 것도 흥미롭다. 용수는 남인도의 승려로 대승불교를 크게 발흥시킨 인물이다. 후세에서는 그를 제 2의 석가, 또는 8종의 조사로 일컫는다. 앞서 석가모니 집안의 이름을 끌어와 작명했던 진평왕 직계의 작명 방식을 고려한다면, 용춘에게 용수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 또한 진평왕이나 사도부인이었을 것이다. 용춘이 음탕했던 아버지와 달리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인물로 성장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읽을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용춘의 부인이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난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라는 사실이다. 왕은 자신과는 사촌간인 용춘을 아예 사위로 삼았다.


비형랑은 진평왕 즉위 직후 궁궐로 불려가 거기서 자랐다. 그는 성장한 후 집사부의 요직에 소속되었고, 귀중을 부려 귀교를 놓고 길달을 추천해 흥륜사 문루를 세우게 하며, 변심하여 협조를 거부한 길달을 처단하는 등, 진평왕을 위해 지속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길달을 처단한 시점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20여년 뒤에 갑자기 이찬의 지위에 오른 용춘이 내성사신이라는 실권을 지닌 실세로 등장한다. 다시 7년 뒤인 진평왕 51년(629)에 용춘은 대장군이 된다. 그는 진평왕대 후반에 승승장구하며 국가의 핵심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형랑과 용춘은 결코 겹쳐서 조우한 적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비형랑의 존재가 아예 흔적조차 없다. 『삼국유사』만으로 볼 때 이 두 인물은 겹쳐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비형랑은 바로 용춘이 아니었을까? 호방하고 낭만을 알며,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인물 진지왕은 부왕과 왕비가 머리를 깎고 승려로 살았던 극단적인 종교적 쏠림 속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던 캐릭터였다. 하지만 신라 왕실의 개방적인 성관념에서 보면, 그의 행동은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는 폐위 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런 그를 두고 신라인들은 전통 신앙체계 속에서 귀신의 너울을 씌워 도화녀와의 사랑을 통한 비형랑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비형랑은 궁궐의 종교적 자장 속에서 귀중의 대장 노릇을 하던 야성을 점차 잃고 마침내 왕실의 수호자로 거듭 났다. 비형랑의 정체는 진지왕 사망 당시 강보에 쌓여 있었던 용춘 바로 그였을 것이다. 도화녀와의 염문은 또 다른 실제의 사건이었을 테고.


이후 비형랑, 아니 용춘은 몇 차례의 시험을 거쳐 왕의 사위가 된다. 그는 마침내 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라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국가의 원훈이 되었다. 성골의 계보에 집착했던 진평왕이 딸 선덕을 최초의 여왕으로 세우는 무리수를 두었을 때도 용춘은 묵묵히 그를 도왔다. 적어도 용춘에게 진평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몰아낸 원수라는 의식은 전혀 없었던 듯하다. 그에게 진평왕은 오히려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장인이었다. 왕위의 승계가 쿠데타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여론을 등에 업은 왕실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비형랑의 방황은 왕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기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더 가까워 보인다.


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진덕여왕을 이어 태종 무열왕에 오르게 됨으로써, 진지왕계는 다시 진골왕조를 열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밤마다 호위무사 50명을 따돌리며 대궐 담을 뛰어넘던 콧날 오똑한 왕자님은 적극적으로 왕을 보좌하면서 불교의 아우라 속에서 왕의 사위가 되고, 훗날 삼국 통일을 견인한 태종 무열왕계의 계보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들은 이렇듯 행간에 유장한 함축을 내포한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의 구조는 대단히 허술해서 허튼 것 같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모두 상징과 은유로 압축된 짚 파일이다. 이것을 풀면 비로소 이야기들의 속살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