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세계문화유산 지정된 조선왕릉

醉月 2009. 8. 13. 04:30
광해군 무덤은 능일까, 묘일까?
9가지 궁금증으로 풀어보는 왕릉과 권력의 비밀, 세계문화유산 지정된 조선왕릉
글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 [pym1204@aks.ac.kr]
 
조선의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왕조실록>과 종묘, 종제례악에 이어 왕릉까지 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조선의 왕실문화는 온전히 전 세계인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조선의 왕릉에 얽힌 이야기를 9가지의 궁금증으로 나눠 풀어본다.

 
세종대왕의 능인 여주 영릉의 모습. 왕릉의 구성 요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6월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33차 회의에서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의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확정했다. 조선 태조의 건원릉(健元陵)부터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유릉(裕陵)까지, 왕릉 40기가 한꺼번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유네스코는 조선의 왕릉이 자연지형과 조화를 이룬 독특한 건축·조형양식을 보이며, 유교문화의 영향 아래 장례 전통과 풍수사상을 집약해서 보여줄 뿐 아니라 6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도 40기에 이르는 왕릉이 완벽하게 보존된 점을 지정 사유로 들었다.

이 밖에도 조영 방식의 독창성, 현재까지 계승되는 제례(祭禮)문화의 전통성, 왕릉 조성 당시와 조성 이후 기록의 온전한 전승 등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

조선 왕릉은 이렇게 조선의 역사·건축양식·생태관·철학 등이 온전히 담긴 문화의 결정체로서,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조선의 왕릉이 일반의 관심을 끌고 있다. 조선 왕릉에 얽힌 이야기를 9가지 궁금증으로 나눠 풀어본다.

#1. 왜 ‘묘’가 아니라‘능’인가?

건원릉·헌릉·태릉 등과 같이 왕의 무덤에는 ‘능(陵)’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왜 ‘묘(墓)’가 아니고 능일까? 봉건시대 한 나라의 왕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한마디로 존귀함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왕 또는 왕실과 관련한 일체의 용어나 행위에는 금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궁중 관련 그림에는 단지 왕의 자리만 그릴 뿐 절대 왕을 그릴 수 없었다. 왕이 사용하는 도장인 어보를 직접 찍었거나 왕의 휘(이름)를 적은 경우에는 또 반드시 비단으로 만든 면지를 붙여 가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왕과 관련한 용어도 일반 백성과는 사뭇 달랐다.

왕이 승하하면 붕(崩) 또는 훙(薨)이라 하여, 일반인의 졸(卒) 또는 사(死)와 차이를 두었다. 이 같은 원칙에 따라 백성의 무덤인 묘(墓)와 달리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이라 하여 따로 구분했다. 나아가 왕실 안에서도 신분에 따라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에 차등이 있었다.

왕과 왕비는 능(陵), 세자와 세자빈은 원(園)이라 했는데, 나중에는 왕을 생산한 후궁의 무덤도 원(園)이라고 했다. 반면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일반인과 똑같이 묘(墓)라고 한다.


2009년 6월8일 봉행된 헌릉 기신제의 한 장면.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황실의 위상을 격하하면서 위기에 처했으나 해방 이후 다시 재현했다. 지금도 전주 이씨 각 파에서 수백 명의 후손이 참여한다.

#2.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

조선은 성리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로, 성리학은 조선의 기초 이념일 뿐 아니라 정식과 일상의 삶을 지배했다. 특히 성리학에 바탕을 둔 관혼상제(冠婚喪祭) 사례(四禮)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는 가장 기초적 예제(禮制)로 자리 잡았다. 특히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고 그 혼백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제례의 성립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왕릉의 조성과 제향은 상례와 제례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례였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핵심은 예악사상이며, 왕릉에는 그 정수가 집약적으로 구현돼 있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사후(死後)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신성한 영역이며, 왕위의 영속성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따라서 왕릉의 조성과 관리는 국가적 사업으로 준엄하게 시행했으며, 각 분야의 인재가 대거 참여했다. 따라서 왕릉은 눈에 보이는 석물이나 조경과 같은 단순한 유물·유적의 가치를 넘어 성리학적 이념과 철학을 현실에서 구현한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3. 왕은 27명인데 왕릉은 왜 40기?

조선에는 태조부터 마지막 황제인 순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27위의 왕이 있었다. 27위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후일 왕으로 추존된 덕종·원종·진종·장조·문조 등 5명을 포함한 것이고, 실제로 재위한 왕은 22명이다. 그러나 추존 왕도 공식적으로는 왕으로 인정하며, 그에 따라 모든 격식도 재위한 왕과 동일하게 지키기 때문에 그들의 무덤 역시 능이 된다.

27위의 왕이 있었는데도 이번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릉은 40기인 이유는 능역의 조성 방식에 따른 차이 때문이다. 왕과 왕비를 함께 안장한 능이 있는 반면 능역을 별도로 조성한 경우도 있다. 왕과 왕비를 함께 안장한 경우는 모두 21기이고, 같은 능호를 붙여도 합장한 예와 봉분을 달리하면서 한 능역에 모신 쌍릉·삼연릉·동역이강릉·동원상하봉 등 구체적 조성 방식에는 차이가 많다.

왕과 왕비가 반드시 한 능역에 안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 경우에는 별도의 능호를 붙이는데,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경우 중종은 정릉(靖陵), 원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온릉(溫陵),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는 희릉(禧陵), 또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는 태릉(泰陵)으로 모두 4기의 별도 능역을 가지고 있다.

원래 공식적인 조선의 왕릉은 42기이고, 여기에 쫓겨나 묘(墓)로 불리는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를 합치면 모두 44기다. 그러나 이번 문화유산 지정에서는 왕실의 정통성을 감안해 두 폐주의 무덤과 현재 북한지역에 있는 2기의 왕릉은 제외했다. 태조의 원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은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으며, 2대 정종과 안정왕후(安定王后)의 후릉(厚陵)은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에 있다.

#4. 왕릉은 왜 모여 있을까?

왕릉은 왕이 머무르는 도성에서 100리 이내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은 관리에 유리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왕이 열성(列聖)의 왕릉에 행차하는 능행(陵幸)과 관련이 있다. 왕은 국가의 최고통치자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도성을 비우고 떠나 있을 수 없다.

곧 왕이 능행 후 돌아올 수 있는 하루 거리에 왕릉을 조성한 것이었다. 일례로 1748년 8월 영조는 부왕인 숙종과 두 계비인 인현·인원왕후를 모신 서오릉의 명릉에 행행했다. 숙종은 능에 올라 석물과 곡장을 둘러보고 오열한 뒤 다시 정자각에서 제향을 올렸다. 왕이 자주 왕릉에 거둥(임금의 나들이) 할 수 없기에 이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익릉과 경릉에 들러 또 제향을 올린 뒤에야 환궁했다.

인근의 창릉과 순회묘는 직접 가지 못하고 승지를 보내 대신 제향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지리적 특징은 조선의 왕릉이 일정한 지역 내에 밀집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동구릉·서오릉이라고 부르는 왕실 능역이 그 예다. 동구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위치한 9기 17위의 왕과 왕비의 능을 총칭하는 말이다.


헌릉의 석호. 잡귀로부터 왕릉을 보호하는 의미로 봉분과 곡장 사이에 밖을 향해 배치했다.

동구릉의 조성은 태조의 건원릉을 이곳에 정하면서 시작됐다. 태조가 승하하자 하륜은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길지(吉地)를 물색해 양주(楊州) 검엄(儉嚴)을 능지로 정했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순조의 세자였다 추존된 문조의 수릉(綏陵)이 아홉 번째로 조성된 1855년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으로 부르기도 했음이 실록에 전한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건원릉을 둘러보고는 그 산세의 오묘함에 감탄해 “어떻게 하늘이 이와 같은 땅을 만들어냈는가? 분명 사람이 만든 인공 산일 것”이라고 찬탄하기도 했다.

현재 동구릉에는 광대한 숲에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해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현릉(顯陵),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목릉(穆陵),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숭릉(崇陵),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휘릉(徽陵), 경종의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원릉(元陵), 헌종과 효현왕후(孝顯王后)·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의 경릉(景陵), 순조의 원자인 문조와 비 신정익왕후(神貞翼王后)의 수릉 등이 있다.

서울의 동쪽에 동구릉이 있다면 서쪽인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는 5기가 자리해 서오릉이라고 한다. 서오릉의 출발은 1457년 조성된 추존왕인 덕종의 경릉에서 비롯한다. 조선의 7대 왕 세조의 세자 장(璋)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이 적합한 능지로 추천됐고, 세조는 직접 답사한 다음 능역으로 정했다.

이후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 숙종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익릉(翼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을 함께 지칭하는 명릉(明陵), 영조의 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홍릉(弘陵)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오릉 인근에는 이 밖에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묘도 1970년 이곳으로 이장됐다. 일반인이 40기의 왕릉을 일일이 답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는 몇 달에서 전문적인 부분까지 알려면 몇 년이 걸린다. 동구릉과 서오릉은 왕릉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기 때문에 많은 왕릉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좋은 유적지다.

#5. 성스러운 자리에 웬 石馬?

왕릉은 시신을 모신 능을 기준으로 조성하는데, 능역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 능역으로 들어서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참도(參道)로 이어져 있다. 홍살문의 본래 명칭은 홍전문(紅箭門)으로, ‘전(箭)’에 해당하는 우리말 ‘살’의 뜻을 빌려 읽는 데서 유래했다.

정자각(丁字閣)은 ‘정(丁)’ 자 모습을 한 데서 비롯한 건물로, 제향을 올리는 공간이다. 능에서 바라볼 때 정자각 오른편에는 망료위(望燎位)라는 돌이 있어 제향이 끝날 무렵 이 돌에서 축문을 태운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 돌로 만든 참도는 혼령이 다니는 신도와 왕이 거둥하는 어도로 나뉘는데, 어도를 신도보다 낮게 조성한다.

정자각 앞 왼편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수복방과 제수를 준비하는 수라간 등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이 위치한다. 정자각 뒤편으로는 둔덕이 능원(陵原)까지 이어지고, 능원은 한 단계 높은 석축으로 조성한다. 능원 위는 봉분 앞에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첫째 단에는 석마(石馬)와 무인석을 배치하고, 둘째 단에는 문인석을 한 쌍씩 배치한다.

마주한 문인석 중앙에는 불을 밝히기 위한 장명등(長明燈)을 세웠다. 셋째 단에는 상석에 해당하는 혼유석(魂遊石)을 두고, 그 뒤로 능침(陵寢)을 조성했다. 혼유석 좌우로 망주석(望柱石)을 두고, 능침 둘레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각각 두 쌍씩 여덟 마리를 좌우로 배치한다. 봉분 뒤로는 곡장(曲墻)을 둘러 삼면을 담장으로 둘러쌌다.

예부터 능원 주변에는 일반인의 접근은 물론 수목 벌채, 분묘 설치, 농지 개간, 토석 채취를 엄금했기 때문에 그 원형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 왕조의 능원 대부분에는 능침·참도·홍살문·비각·정자각 등만 남아 있을 뿐, 조성 당시 정자각 좌측에 세운 수라간·재실·향대청(香大廳)·전사청(典祀廳)·공수청(公需廳)·서원청(書員廳) 등의 부속건물이 남아 있는 예는 드물다.

왕릉의 석물에는 왕과 왕비를 보필하고 신성한 능침에 접근하는 잡귀를 쫓는 의미가 담겨 있다. 능역 안은 오로지 혼령만을 위한 신성한 공간으로, 그 안에서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홍살문의 붉은 색도 잡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장명등도 실제로 불을 밝히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귀신이 불을 싫어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석양과 석호 역시 잡귀를 쫓아 능침을 지키는 상징적 의미다. 혼유석은 일반 무덤에서는 상석(床石)으로 사용하지만, 왕릉에서는 정자각에서 제향을 봉행하기 때문에 상석의 기능은 없고 혼령이 노니는 자리로 마련한 것이다. 혼령이 멀리 노닐다 보고 찾아온다는 망주석에는 세호(細虎)라는 다람쥐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하나는 오르고 다른 하나는 내려가는 모습이다.

#6. 왕릉은 책 속에도 있다?

이번 세계문화유산 지정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조선의 왕릉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왕릉과 관련한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든 문화의 척도이자 꽃은 책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은 화려한 문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이 밖에도 실무 기록인 <등록>, 왕실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선원록>과 <돈녕보첩>, 왕의 어필과 어제 시문 등 조선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각종 ‘의궤’는 국가의 의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이미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바 있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임시 관서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해 국장을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빈전(殯殿)과 산릉(山陵)은 별도의 도감을 두어 추진했다. 산릉도감은 능 자리를 정하는 일부터 조성공사, 인력수급 등 왕릉 조성을 전담하는 한시적 기구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산릉도감의궤’에 기록했다. 일례로 인조의 장릉(長陵)을 조성할 때는 연인원 27만 명을 동원했다고 적고 있으니, 조선에서 왕릉을 만드는 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궤와 함께 주목되는 기록은 ‘능원지(陵園誌)’다. 조선 왕실의 서고였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는 모두 93종 109책의 조선시대 능원지가 소장돼 있다. 이들 능원지는 국내외에 다른 예가 없는 유일본 자료로, 여기에는 능원을 조성하는 과정과 절차를 비롯해 조성 이후의 관리와 운영 등 조선 왕조 능원제도에 관한 기초정보가 종합적으로 수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능원지는 건축·풍수지리·제례(祭禮)·비지문(碑誌文)·고문서·미술 등 한국학 제반 분야와 관련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능원지는 남북한에 남아 있는 44기의 조선시대 왕릉을 비롯해 원·소(園所)까지 포괄할 정도로 자료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7. 왕릉이 이렇게 작아?

조선의 왕릉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왕릉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중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평지에 대규모로 건설된 중국의 왕릉이 웅장하면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인공미를 보인다면, 조선의 왕릉은 자연의 일부로 인식될 만큼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미가 두드러진다.

조선의 왕릉에는 풍수사상이 보태져 주변 경관과 형세에 어울리도록 자연의 일부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릉의 아름다움에는 성리학적 이념도 작용했다. 장대하고 화려하기보다 소박함과 안분(安分)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사고는 조선의 왕릉으로 하여금 한 차원 높은 아름다움을 지니게 했다.

문화적 수준은 양과 규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당대인들의 철학이 어떻게 또 얼마나 담겨 있는지가 그 척도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왕릉은 500년 조선 왕실이 지녔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한 공간이라고 해서 왕릉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모습을 지닌 것은 아니다.

개개의 왕릉에는 각각의 사연이 숨어 있다. 동구릉에 있는 태조의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에서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을 기본으로 조성했다. 태조 이성계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와 쌍릉으로 묻히기를 바라며 신덕왕후의 정릉을 축조했다.

그러나 신의왕후(神懿王后) 소생인 태종은 신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부왕인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나아가 본래 도성 안 정동에 있던 정릉(貞陵)을 양주로 옮기고 정자각을 허물어 태평관의 재료로 사용하는 한편 석물은 땅에 묻어 흔적조차 남기지 말도록 명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현종 때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정릉으로 능역을 조성해 옮겼다.

도성에서 100리 안에 왕릉을 조성하는 예에서 벗어난 대표적 사례는 단종의 장릉(莊陵)이다.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노산군으로 강봉됐다 사육신의 복위운동이 발각돼 영월로 유폐돼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당시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고 하는데, 영월의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수습해 몰래 매장했다.

그 후 중종 때에야 비로소 노산군묘를 찾고, 숙종에 의해 추복(追復)돼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고 했다. 그러나 추존된 능의 예에 따라 다른 왕릉에 비해 소략하게 조성했다. 한편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는 열여덟 나이에 단종과 생이별한 후 동대문 밖 숭인동에 거처했다.

82세로 돌아가자 양주 군장리에 모셨다 숙종 때 단종과 함께 추복돼 사릉(思陵)이라고 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한 많은 생을 생각해 능을 영월 장릉이나 양주 사릉으로 합장하자는 논의가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8. 왕릉은 산 자의 공간?

왕릉은 종묘와 함께 조선 왕실의 전례(典禮)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다. 시신을 안장하는 왕릉과 망자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종묘는 불가분의 관계다. 종묘는 통상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과 함께 ‘종묘사직(宗廟社稷)’으로 지칭되면서 왕조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소다.

그러나 왕과 왕비의 삶에서 보면 승하한 뒤 시신을 모신 왕릉과 신주를 모신 종묘의 친연성은 더욱 강하다. 주지하다시피 종묘는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미 등록됐고, 2001년 5월에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됐다.

이번 왕릉의 문화유산 등록은 종묘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와 함께 비로소 조선 왕실의 문화를 온전히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조선의 왕릉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도 살아 숨 쉬는 소통의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능역을 정해 조성하고 안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왕릉에는 봄·가을로 제향하고, 돌아가신 날에는 기신제(忌晨祭)를 지낸다. 따라서 세계가 먼 왕은 어렵더라도, 선왕의 능을 찾는 왕의 능행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통상 왕이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데, 세자를 대동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제례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의식이며, 이 순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소통하는 시간이다. 왕릉은 단지 왕과 왕비가 묻힌 망자의 공간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가 끊임없이 소통하는 살아있는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지금도 왕릉에서는 연례적으로 기신제가 봉행된다.

이 점이 유네스코에서 조선 왕릉을 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다. 전주이씨대종약원에서 주관하고 종묘대제기념사업회에서 설행하는 기신제는 지금도 수백 명에 이르는 각 파의 후손이 참반해 역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소통의 장이 된다. 이러한 봉행의식 역시 조선 왕조의 전통과 왕실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적 보고다.

#9. 왕릉은 더 있다?

조선 왕실의 장례·제례문화는 왕릉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자와 세자빈, 왕을 생산한 후궁의 무덤인 원(園)과 쫓겨난 두 왕의 무덤인 묘도 온전히 남아 있다. 물론 규모와 격식에서 왕릉과 차이가 있지만, 왕릉에 준해 조성한 점을 감안하면 왕실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소현세자의 소경원(紹慶園)과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등 세자나 세손의 원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왕을 생산한 후궁 7명의 원도 그 사당인 칠궁(七宮)과 함께 온전히 남아 있다. 인종의 사친인 인빈(仁嬪) 김씨, 경종의 사친인 희빈(禧嬪) 장씨, 영조의 사친인 숙빈(淑嬪) 최씨, 진종의 사친인 정빈(靖嬪) 이씨, 장조의 사친인 영빈(暎嬪) 이씨, 순조의 사친인 수빈(綏嬪) 박씨, 영왕의 사친인 귀비(貴妃) 엄씨는 모두 원으로 추숭됐으며 그 사당인 혼궁(魂宮)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한다.

따라서 왕릉과 종묘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즈음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문화유산인 원·소(園所)와 칠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왕실문화에 주목하는 것은 문화적 영향력의 파급 때문이다. 왕실의 문화는 사대부를 거쳐 일반 백성의 삶에 영향을 미쳐 기층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왕릉은 조선시대 사람의 장례와 제례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거기에는 당대인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대인이 우리의 전통문화로 들어가는 통로의 하나가 바로 왕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