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이순신의 "리더십"

醉月 2009. 2. 26. 09:24

 

     

필자 :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 대령 임원빈

 

1.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 다시 읽기


해전에서 승리하려면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인 최신 함선, 첨단 무기체계 그리고 소프트웨어적 전투력 요소인 리더의 전략전술과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임진왜란 해전의 승리는 혁신된 조선 수군과 위대한 수군 지도자 이순신의 리더로서의 역량이 결합하여 일구어낸 합작품이다.


▶ 관점의 전환

필자는 이순신을 연구하기에 앞서 『손자병법』을 번역하고, 연구하였다. 중국의 도한장(陶漢章)이 지은 『손자병법개론』 번역서(1996년)를 내고, “손자의 철학사상 연구”(1996년) “손자의 용병술과 현대적 적용”(1997년) 등의 논문을 쓰고 난 뒤 궁금한 생각이 문득 머리에 스쳤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 제독은 과연 어떻게 싸워 전승무패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까? 해전을 살펴보고 그가 친히 쓴 「장계」와 『난중일기』를 읽어보면서 ‘아, 이럴 수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손자병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전쟁승리의 원리가 이순신이 치렀던 모든 해전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자는 이순신이 구사한 대표적인 전쟁승리의 원리가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되어 있는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는 이른바 병력 집중의 원리임을 강조하였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해전에서 병력 집중을 통해 항상 우세한 상황에서 해전을 벌였지 열세의 해전, 불리한 해전을 결코 벌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명량해전(13척 대 300여척)과 한산해전(54척 대 73척)을 예로 들어 이순신은 열세의 상황에서 용전분투하여 승리했기 때문에 위대한 장수라는 도식 하에 연구를 진행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 것이 바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싸움을 잘하는 자는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이다(古之善戰者, 勝於易勝者也)”라는 구절이었다. 한 마디로 10:1, 100:1로 싸우는 자가 훌륭한 장수이지 거꾸로 1:10, 1:100으로 싸우는 자는 병법의‘병’자도 모르는 형편없는 장수라는 말이다.

이와 더불어 필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주제가 이순신이 지휘했던 조선수군의 정체였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해전에서의 승리 요인을 논할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함정의 성능이나 무기체계와 같은 하드웨어적 요소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순신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는 임진왜란 때의 해전의 승리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제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순신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는데 있어서 해전 승리의 다른 요소들 예컨대, 함선의 성능이나 무기체계 등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 수군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이나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과 같은 무기체계의 역할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이순신의 위대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꾸준히 발전해 온 수군의 조직, 함선의 개발,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으로 대변되는 선진 무기체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기초하면 이른바 혁신된 세계 일류 수준의 조선 수군이 존재했었고, 이를 지휘한 위대한 수군 지도자 이순신의 리더로써의 역량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막강한 전투력이 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주요 원인이라는 해석의 구도가 정립된다.

해전에서의 승패에 장수가 지니는 리더십 역량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는 이순신과 원균의 비교에서 잘 드러난다. 똑 같은 함선과 무기체계로 무장한 조선수군을 지휘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원균은 칠천량에서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패배를당했는데 반해 이순신은 임진년 옥포해전부터 순국하는 노량해전까지 20여회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장수의 리더십 역량이 해전 승패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임진왜란의 해전 승리에 대한 이해와 해석 관점을 전제로 앞으로 다음과같은 순서로 글의 내용을 전개해야 할 것 같다. 먼저 고대로부터 내려 온 우리의 해양 전통의 연장선에서 조선 수군의 정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거기에는 독립된 수군 조직의 보유 과정, 어떻게 함선과 무기체계가 개발되었는지 등의 내용이 포함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조선 수군의 가용한 전투력을 이순신이 어떻게 극대화시켰는지를 그의 병법 이른바 전쟁 승리의 원리를 중심으로 다루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수군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을 십이분 발휘하게 한 이순신의 리더십을 살펴 볼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어떠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는 어떤 수양 방법을 통해 민족적 성웅의 인품을 갖추게 되었는지, 나아가 장수로써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여 부하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 있게 하였는지 등이 포함될 것이다.

나아가 지면이 허락된다면 이순신의‘자살설’,‘혁명설’,‘명량해전 철쇄설치설의 허구성’등 독자들이 평소 궁금해 하는 내용도 다루어 볼 작정이다.독자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   

 

 

 

2. 조선 수군의 전통과 연원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해양강국이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편성된 고려 말의 수군을 계승하여 해전을 전문으로 하는 독립된 군으로 발전시켰다.

 

▶ 2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독립된 수군이 존재했었다.

1990년대 중반 필자가 처음 이순신 제독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가졌던 의문 가운데 하나는 조선 수군의 존재였다.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성능을 지닌 함선과 첨단 무기체계가 필수적인데 과연 임진왜란 당시 우리의 수군은 어떤 함선과 무기체계를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해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실체에 대해서는 일부 전문 연구자들만이 알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임진왜란의 해전 승리를 설명하는데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순신 이외에서 해전 승리의 요소를 찾는 것 자체가 그 분의 위대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해전 승리의 중요한 요인인 함정과 무기체계라는 변수를 제외한 채 한참동안이나 임진왜란의 해전 승리가 설명되고 해석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음의 물음을 한 번 돌이켜 보자. 이순신은 홀로 싸웠나? 아니다.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싸웠다. 조선 수군은 온전히 이순신이 홀로 건설하였나? 아니다. 조선 수군은 고려 말부터 독립된 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수군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반도(半島)라는 지정학적인 특성을 가진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해양강국이었다.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가 그렇고, 백제가 북경 옆 발해만 연안을 다스렸다는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 그러하며, 신라의 장보고 대사의 활약이나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해상토호세력이었다는 사실 또한 이를 반증해 준다.

고려 수군이 상비군화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왜구의 출현이었다. 고려 고종 10년(1223년)부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왜구가 침입한 횟수는 무려 393회에 이른다. 40년 동안 거의 매달 왜구와의 전쟁이 있었던 셈이다. 공민왕 말기에 이르러 고려 조정은 왜구들을 육지에 상륙시키지 않고 바다 위에서 격퇴하는 해전주의(海戰主義) 전략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수군의 편제도 점차 정비되어 도절제사(都節制使), 절제사(節制使),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 수군만호(水軍萬戶) 등을 임명하여 군선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바다에 익숙한 해안 지역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수군 사졸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 말엽의 수군 조직과 편제는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점차 완비되었다. 수군의 정원도 책정되어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50, 402명이 전국 8도에 분산 편성되었으며, 성종 대에 편찬된 《경국대전》〈병전(兵典)〉에는 48,800명이 정원으로 책정되었다. 이는 당시 중앙군 전체< 병력 11만 명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이며, 조선시대 전기의 인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500만?700만으로 추정해 볼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군기의 해이 여부를 떠나 임진왜란이 발발할 시점에 조선에는 해전을 목적으로 정비된 2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독립된 수군이 존재했었고 그 병력 규모는 약 5만 여명에 달했으며, 각 도에는 당상관인 정3품(正三品)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고 그 휘하에 종3품인 첨절제사 (僉節制使), 종4품인 만호(萬戶)라는 직책의 수군 지휘관을 편성 운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침략하는 물목인 영남, 호남의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능력 있는 무인(武人)을 계급에 관계없이 천거하게 하여 등용하였다. 일본의 침략 징후에 따른 위기감이 조정 안팎에 널리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우리 귀에 익숙한 장수들이 천거되어 수사급(水使級) 지휘관 이른바 함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이 바로 그들이다.

종6품인 정읍 현감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 하기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정3품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의 7계급 특진에 대해 조정 대신들과 대간(臺諫)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국왕인 선조는 이를 과감히 단행하였다. 실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 부임한 이순신은 전쟁 준비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7계급 특진되었는지 그리고 국왕이 자신을 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호남의 물목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 매우 훌륭하고도 적절한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3. 조선시대에도 해군력 증강사업이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은 최신예 함선과 첨단 무기체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아가 혁신된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혁신된 마인드를 지닌 수군 장수 이순신이 있었다.

 

▶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 주력함인 판옥선

 

임진왜란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주요 무기체계는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 등의 이른바 화약 무기였다. 해전에서 함포가 사용되기 전 동ㆍ서양에서의 보편적 해전 전술은 원거리에서는 인명 살상용 화살이나 적의 함선을 불사르기 위한 불화살을 쏘면서 접근하다가, 근접하면 충돌하여 함선을 격파시키거나 또는 배에 올라가 백병전을 벌여 적을 제압하는 이른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 주종을 이루었다.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은 고려의 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에 의해 개발된 화약과 화포는 왜구 섬멸전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우왕 6년(1380년) 8월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宣) 등이 전선 100여 척을 이끌고 가서 진포구(鎭浦口: 현재의 금강 어구)에 정박해 있던 왜선 500척을 화포로 불태운 진포 해전, 우왕 9년(1383년) 5월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 장군이 함선 47척을 이끌고 왜선 120척을 추격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섬멸한 관음포 해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해전사상 최초의 함포를 사용한 해전이다. 화약무기가 실전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이 육전(陸戰)이 아니라 해전(海戰) 이었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다지는 태종 일대(一代)에 이르러 화약무기는 새로운 무기체계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화약무기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제조하는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이 세워지고, 여기서 만들어진 화약 무기는 서북변경 지대에 광범위하게 배치되었으니, 바야흐로 육전(陸戰)에서도 화약무기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세종 대에 이르면 화약무기는 또 한 번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화포 공격을 전담하는 화포군(火砲軍)이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약 및 화기의 성능이 개량되어 기존의 화포에 비해 파괴력 및 사정거리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명종 대에 이르러서는 왜구와 수많은 해전을 치르면서 총통과 발사체인 대장군전(大將軍箭)의 효용성이 입증되었다. 이에 따라 명종 10년(1555년)부터 명종 20년(1565년) 사이에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 등과 같은 대형화포가 대대적으로 주조되었는데, 이 때 만들어진 화포류는 임진왜란 해전에서 주력 무기로 사용되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 2월 22일에 녹도(鹿島) 만호진(萬戶陣)을 순시하면서 총통 쏘는 것을 점검하였으며, 3월 27일에는 좌수영에서 만든 거북선에서 총통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4월 12일에는 몸소 배를 끌고 바다 가운데로 나아가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의 시험 사격을 실시하였다. 적어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완벽한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 건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논의가 있었다. 특히 중종 때에 있었던 삼포왜란(三浦倭亂)은 이런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중종 16년(1521년) 병사(兵事)에 능통했던 참찬관 서후(徐厚)가 대선(大船) 건조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당시 왜구의 주요 해전 전술이 배를 계류하고 기어 올라와 검을 주무기로 싸우는 등선육박전술 (登船肉薄戰術)인데,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적이 칼을 빼어들고 기어오를 수 없을 정도의 큰 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종 39년(1544년)에는 판중추부사 송흠(宋欽)이 중국인과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널빤지로 사방을 가린 대선(大船)을 건조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적들이 기어오를 수 없도록 사방을 널빤지로 가린 대선을 건조하여 운용한다면 군졸들이 안전하게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니 앞서 서후가 제기했던 것을 더욱 구체화 한 것이었다.

중종을 뒤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은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있던 1555년(명종10년)에 드디어 신예 함선인 판옥선(板屋船)을 만들어 한강에서 사열식을 가졌다. 임진왜란 발발 37년 전의 일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선정된 판옥선은 이후 10여 년 동안 대대적으로 건조되었다. 1566년(명종 21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맹선(猛船)의 숫자를 기준으로 판옥선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하였다. 바야흐로 조선 수군의 판옥선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대ㆍ중ㆍ소맹선의 척수는 병력이 상시 배치된 군선 (軍船) 488척이며 전시에 대비해 평소에는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무군선 (無軍船) 251척을 포함하면 총 729척이다.

판옥선은 선체 위에 하체의 너비보다 넓은 상장(上粧)을 설치하여 그 사이로 노를 내밀어 저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판옥선의 함선으로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격군을 각각 1, 2층의 갑판에 분리시켜 두어 각자의 기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판옥선은 함선 자체가 클 뿐만 아니라 전투원들이 2층 갑판 위에 배치되어 있어서 적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었다. 셋째로 적 특히 왜구가 접근하여 공격하고자 하여도 마치 성벽과 같이 설치된 2층의 높은 상장으로 말미암아 배에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서후나 송흠 등이 건의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 함선이 바로 임진왜란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 수군의 총통 이른바 함포 중심의 무기체계는 해전에서의 새로운 전술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와 같은 무기체계의 변화에 따른 해전 양상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기존의 보편적 해전 전술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고수하는 일본 수군을 맞이하여 함포 중심의 혁신된 무기체계로 무장한 조선 수군이 전투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본 함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일본 함선이 총통의 유효 사정거리에 도달했을 때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그들이 조선의 함선에 접근하기 이전에 격파해야 했다. 이순신이 벌인 대부분의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조선의 함선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모두 격파, 분멸되었다. 이순신은 혁신된 무기체계인 함포전의 대가였다. 이것이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의 함선 피해는 거의 전무했던 반면 일본의 함선 피해는 격파되거나 분멸되어 대부분 침몰되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일정 거리에서의 포격전에 만족할 이순신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돌격선인 거북선 건조에 착수하였다. 일본 수군을 보다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신예 함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해전에서의 거북선의 역할은 적의 지휘선이나 주력함을 목표로 삼아 지자, 현자총통을 쏘면서 돌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개전 초기에 적의 지휘부를 무력화 시키는 데 있었다. 거북선의 덮개는 돌격하는 과정에서 적선과 충돌하여 서로 접하게 될 때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특기로 하는 왜병이 칼을 들고 뛰어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막강한 포격 능력을 지닌 판옥선과 돌격 능력을 지닌 거북선이 결합하여 창출해 낸 조선 수군의 막강한 전투력! 이것이 전라좌수사 이순신 지휘 하의 조선 수군의 실체였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돛을 달고, 총통을 설치하여 시험사격을 마치고 전투세력으로 합류시킨 날은 임진년(1592년) 4월 12일, 정확히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이었다.     

 

 

 

4.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비록 전체의 전투력은 열세하더라도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 전투국면에서는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이 전쟁 승리의 법칙 이른바 병법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이순신은 언제나 가용한 모든 함선 세력을 통합, 운용함으로써 분산되어 있는 일본 수군에 대해 상대적 절대 우세 상황을 조성할 수 있었다.

 

▶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병력 집중의 원리

 

이제까지 임진왜란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을 설명하면서 잘못 된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전 승패에 결정적 요소인 함선의 성능이나 무기체계 같은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를 배제하였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순신을 홍길동전이나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일당백(一當百)의 초인(超人)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과학이지 신화가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최소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투국면에서는 아군의 전투력이 적보다 강해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동안 늘 ‘이순신은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맞아 용전분투하여 승리했기 때문에 위대한 영웅이요, 성웅이다’라는 도식 하에 이순신을 이야기해 왔을까? 그것은 위대한 영웅에 대한 무반성적, 무비판적 찬사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정기의 고취를 위해 이순신을 논의했던 일제시대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비약적 경제 성장을 위해 국민적 의식의 통합이 필요했던 제3공화국 시절에는 역사적 사실이든, 그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설화성 이야기이든,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이든지에 관계없이 그것이 이순신의 위대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아무 것도 문제 될게 없었다. 모두 다 이순신의 성웅적 면모나 위대성을 존경하고 찬양하기 위한 공통의 목적에 일정부분 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설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꾸며진 이순신의 모습이 아니라 군사전문성을 지니고, 혁신 마인드를 지녔으며, 탁월한 리더십 역량을 갖춘 위대한 수군 장수 이순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꾸며진 모습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 모습이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잘못 꾸며진 내용을 가지고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것은 오히려 그분이 가지고 있는 위대성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순신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잘못된 편견과 오해 중의 하나는 그는 언제나 열세의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맞아 싸워 이겼기 때문에 위대한 장수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영웅사관의 관점이다. 그리고 그 예로는13척으로 133척을 물리친 명량해전, 55척으로 73척과 싸워 승리한 한산해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 제1차 출동에서부터 제4차 출동까지의 16회의 해전에서 부산포해전을 제외하고는 수적인 면에서도 결코 열세의 해전을 벌이지 않았다. 거꾸로 이순신은 언제나 통합된 세력으로 상대적 절대 우세를 조성함으로써 분산되어 있는 열세의 일본 수군에 대해 일방적이고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던 반면 일본 수군은 언제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손자병법》에 “싸움을 잘하는 자는 승리하기에 쉬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이다(善戰者, 勝於易勝者也)”라는 구절이 있다. 1: 10, 1: 100으로 싸워 이기는 자가 유능한 장수가 아니라 거꾸로 10 :1, 100:1로 싸우는 자가 유능한 장수라는 말이다. 이순신은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는 이른바 병력 집중의 원리를 해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적용하였다.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함대별, 부대별 독립 작전을 거의 펼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전라좌수영의 모든 함선 세력 또는 전라좌ㆍ우수영의 모든 함선 세력 또는 전라좌ㆍ우수영, 충청수영, 경상우수영의 모든 함선 세력을 집결시킨 상태에서 해상 작전에 임하였다.

임진년(1592년) 제1차 출동에 동원된 조선 수군의 함선 규모는 전라좌수영의 >모든 세력을 망라한 것으로써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모두 85척이었다. 협선이나 포작선은 함선간의 이동이나 정보 탐색, 군수 지원을 위해 동원된 것이라고 볼 때 실제 전투가 가능한 전투함은 판옥선 24척이었으며 여기다 원균이 끌고 나온 경상우수영의 전선 4척을 추가하면 총 28척이 1차 출동 때의 함선 규모이다. 첫 해전인 옥포에서 30여 척의 일본 함선과 조우했는데 해전 결과 일본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을 포함해 총 26척을 격파, 분멸하였다. 척수로도 85척 대 30여 척으로 우세였으며, 함선의 성능이나 무기체계의 질적 우세를 포함하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전투력의 차이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당일 오후 합포에서 5척을, 이튿날에는 적진포에서 13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임진년 제2차 출동의 첫 해전인 사천해전에는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함선 26척(판옥선 등 전투함, 지원선 제외)이 참여하여 조우한 13척을 모두 격파, 분멸하였다. 이어서 당포에서도 조우한 21척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당항포해전 직전에는 전라우수영의 이억기 함대 25척이 합세하여 함선이 모두 51척(지원선 제외)에 달했으며 조우한 26척 모두를 어렵지 않게 격파할 수 있었다. 나아가 율포에서 만난 7척도 모두 격파, 분멸하였다.

임진년 제3차 출동에는 한산해전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수군의 함선 규모는 대략 55척(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수군의 함선 세력은 대선 59척, 소선 50척으로 총 109척이다)이었으며, 일본 수군은 73척(대선 36척, 중선24척, 소선 13척)이었다. 척수 면에서도 결코 열세인 해전이 아니었다. 해전의 결과 적의 대선은 총 36척 중 35척이 격파된 것을 포함하여 총 73척 중 59척이 격파되었다. 일방적이고도 완전한 승리였다. 이어서 이틀 뒤에 벌어진 안골포해전에서는 해전을 회피하고 포구에 정박해 있는 42척을 공격하여 절반 이상을 격파하였다. 제3차 출동에서 조선 수군은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함선 세력이 통합된 상태에서 해전을 치른 반면 일본 수군은 견내량에 73척, 안골포에 42척이 분산된 상태에서 각개 격파되었던 것이다.

임진년 제4차 출동에서는 전투 함선 74척을 포함해 총 166척의 함선이 동원되었다. 전라좌수영을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의 자취를 수색하면서 부산포로 향하였다. 수색과정에서 장림포에서 6척, 화준구미에서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절영도 앞 바다에서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그야말로 토끼몰이식 해전이었다. 부산포에는 500여 척의 일본 함선이 포구에 정박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 수군 함대는 조선 수군의 위용에 압도되어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육지에 진을 치고 조총으로 대응하였다. 조선 수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여 100여 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 분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임진년(1592년) 네 차례의 출동 중에 조우한 일본의 함선은 총 768척이었으며, 이들은 16회에 걸쳐 총 336척이 각개 격파 또는 분멸되었다. 만약 일본 수군이 통합되어 운영되었다면 조선 수군이 아무리 질적으로 전투력이 우세했다할지라도 이처럼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 이른바 ‘병력집중의 원리’야말로 임진왜란의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병법의 핵심 원리였던 것이다.     

 

 

 

5. 화력집중의 원리


병력집중이 해전 전체국면에서의 병력운영의 원리라면 화력집중은 구체적인 전투현장에서의 화력운영의 원리이다. 이순신은 해전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적의 지휘선이나 주력함에 화력을 집중하여 유리한 형세를 조성하였다.  

 

▶ 화력집중은 구체적인 전투현장에서의 우세를 조성하는 방법이다.


동일한 병력과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전투력은 배가되기도 하고 극소화되기도 한다. 이순신은 해전이 시작되면 항상 적의 지휘선이나 주력함을 식별하여 화력을 집중시킴으로써 공격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병력집중을 통해 전체 전장(戰場)에서의 우세 상황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화력집중을 통해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전투현장에서까지 우세 상황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임진년(1592년) 제2차 출동 중의 당포해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왜선은 크기가 판옥선만한 것 9척과 중ㆍ소선 12척이 선창에 나뉘어 정박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층루가 있는 한 대선 위에는 높이가 3, 4장이나 될 듯한 높은 층루가 우뚝 솟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휘장을 두르고 휘장의 사면에는 ‘황자(黃字)’를 크게 써 놓았습니다. 그 속에 왜군 장수가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지라,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으로 곧 바로 충돌해 들어가면서 용(龍)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치쏘고또 천자, 지자총통으로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쏘아 그 배를 격파하게 하고 뒤따르고 있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번갈아 쏘게 하였습니다. 중위장 권준이 돌진해 들어가 왜군 장수를 쏘아 맞혔는데, 활을 당기는 소리에 맞추어 거꾸로 떨어지므로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그 왜장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적도들은 겁이나 도망치는데......”

일본 수군 장수가 탄 지휘선은 붉은 비단휘장을 두르는 등 호화로운 장식을 하고 있어 식별하기에 매우 용이하였다. 이순신은 해전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거북선을 일본 수군의 지휘선을 향해 돌격시키면서 뱃머리의 용(龍)의 입에 설치된 현자총통으로 공격하여 기선을 잡고 이어서 현측에 설치된 천자ㆍ지자총통으로 대장군전 (大將軍箭)을 발사하여 적선을 격파한다. 그 다음에는 침몰중이거나 어느 정도 파괴된 적선에 대해 뒤 따르던 판옥선에서 일제히 불화살을 날려 분멸(焚滅)을 시도하는 한편 갑판위에서 허둥대는 일본 수군 장수와 병사들을 향해 철환과 화살을 마구 쏘아 댄다. 마지막으로 철환이나 화살을 맞고 바다에 떨어진 일본 장수를 건져 올려 목을 벤다. 이것이 이순신이 구사한 해전 전술의 일관된 패턴이었다. 가용한 화력을 일시에 적의 지휘선에 집중하여 전광석화처럼 격파하고 적의 장수를 사살하여 효시(梟示)하는 해전 전술은 개전초기에 일본 수군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일본 병사들의 사기를 꺾어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이중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해전 전술은 삼일 뒤에 벌어진 당항포해전에서도 보인다.

우리의 여러 전선은 사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공을 하고 돌격장이 탄 거북선이 또 층각선(層閣船) 밑으로 충돌해 들어가면서 총통을 치쏘아 (적장이 위치한) 누각(樓閣)을 쳐부수었습니다. 또 여러 전선이 불화살로 층각선의 비단장막과 베로 된 돛을 쏘아 맞히자 맹렬한 불길이 일고 누각 위에 앉아있던 일본 장수가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이순신은 가장 먼저 거북선을 투입하여 적장이 탄 층각선을 총통으로 공격하여 어느정도 무력화시킨 다음, 이어서 뒤따르던 여러 판옥선에서 불화살을 쏘아 분멸(焚滅)을 시도하는 한편 적장이 위치한 누각(樓閣)에 화살 공격을 집중함으로써 일본 장수를 사살하였다. 그런 다음 장수를 잃고 우왕좌왕하면서 달아나려고 하는 일본 함선들을 포위하여 모조리 격파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3대승첩 중 하나로 꼽히는 한산해전에서 사용한 학익진(鶴翼陣)은 판옥선의 현측에 배치된 각종 총통의 화력을 적의 핵심전력이나 지휘부에 집중시키기 위한 진형법이다.

“먼저 판옥선 5, 6척을 시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 습격할 기세를 보였더니 여러 배의 적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 나왔습니다. 바다 가운데 나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학익진(鶴翼陣)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 승자 등의 여러 총통을 쏘아서 먼저 2, 3척을 쳐부수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사기가 꺾여 도망하였습니다. 여러 장수나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뽐내어 앞을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불화살을 번갈아 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았습니다. 일시에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여 거의 다 없애버렸습니다.”

이순신은 와키자카의 일본 함대를 좁은 견내량으로부터 넓은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는 한편 일시에 학익진(鶴翼陣)을 벌여 선두에서 추격해오는 일본 함선 2, 3척에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순식간에 격파하였다. 이렇게 초전에 승기를 잡은 이순신 함대는 병력과 화력을 그 다음의 목표로 단계적으로 이동, 집중시켜 축차적으로 격파함으로써 모든 전투국면에서 절대 우세를 점유하였던 것이다.

불가사의한 승리로 전해지는 정유년(1597년)의 명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화력집중의 원리’를 구사하였다. 『난중일기』에 묘사된 명량해전을 보면 이순신은 일본 수군 장수가 탄 배 1척과 그 휘하의 2척을 집중공격하여 격파시키고 바다에 빠진 일본 수군 장수 마다시(馬多時)를 건져내어 목을 잘랐다. 이를 지켜 본일본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으며, 반대로 상승의 기세를 탄 조선 수군은 일제히 지자, 현자총통을 쏘며 돌격하여 에워싸고 있던 적선 31척을 모조리 깨트림으로써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른바 ‘화력집중의 원리’는 싸움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전투현장에서 유리한 형세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써 이순신이 벌인 대부분의 해전에서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6. 주동권(主動權) 확보의 원리

주동권(主動權)은 전장의 상황을 아군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권한이다. 주동권 확보의 요체는 승리하기에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어느쪽이 선택했느냐에 있다. 어려웠던 해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싸울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해전에서의 주동권을 확보하였다.

 

 

▶ 명량해전에서 조차 이순신은 싸울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주동권을 확보하였다.

 

《손자병법》에 “적을(아군에게 유리한 장소로) 끌고 오지, 적에게(유리한 장소로) 이끌려가지 않는다(致人而不致於人)”는 구절이 있다. 한 마디로 적을 끌어내어 내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싸우도록 하지 거꾸로 적에게 이끌려가서 적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선수군의 통합함대는 임진ㆍ정유왜란 기간 중 오직 한번 칠천량해전에서만 주동권을 빼앗겼는데, 그 결과는 조선 수군의 궤멸이라는 치명적 패배였다. 조정의 강제적인 출동명령은 수군 지휘관으로 하여금 주동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앗아갔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수군 통합함대는 전 출동기간 중 피동(被動)의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칠천량 해역은 조선수군이 싸우고자 한 장소가 아니었다. 정유년(1597년) 7월 14일 아침 부산포로 출동한 조선 수군은 폭풍을 만나 공격다운 공격도 못해보고 저녁 무렵 가덕도로 후퇴하여 상륙하였는데 여기서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게 400여명이 살해당했다. 7월 15일 조선 수군은 다시 함대를 수습하여 영등포를 거쳐 칠천량 앞 바다로 후퇴하여 정박하였다. 결과적으로 그곳은 일본의 지상군과 수군에 의해 포위된 일종의 함정과 같았다. 7월 16일 오전 4시경 겹겹이 포위된 상태에서 야간 기습을 받은 조선수군은 해전다운 해전을 해보지도 못한 채 결국 궤멸되었다. 주동권 확보에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진년(1592년) 제1차, 제2차 출동에서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배치상황을 정확히 알고 해전에 임했던 반면에 일본 수군은 그렇게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해전을 위한 준비도 미흡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지상전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만에 빠진 채 해안 곳곳에서 노략질에 여념이 없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조선수군과 해전을 벌여야 했다. 일본 수군은 철저히 피동(被動)의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잘 조직되고 통합된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항상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전에서의 주동권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제3차 출동 중에 벌어진 한산해전에서도 이순신은 해전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주동권을 장악하였다.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은 유인술을 구사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편하고 나아가 전과(戰果)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해역이 좁은 견내량 보다 넓은 한산도 앞바다가 유리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이 서로 부딪힐 염려가 있고 또 싸우기에도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狀啓(1)》, 見乃梁破倭兵狀)

한산도 해전을 앞 둔 이순신은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평소 해전에서 불리할 경우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하는 일본 수군의 행태를 보아 온 이순신은 육지로 도주할 수 없는 한산도 앞 넓은 바다를 해전 장소로 정하고 견내량에 있는 일본 수군 함대를 유인하였던 것이다. 한산도 앞 바다에는 조선 수군의 주력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인하던 5, 6척의 함선을 포함해 총 58척에 달하는 조선 수군 통합함대는 사전의 작전계획에 따라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제히 총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일본 함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하였다.

불가사의한 해전으로 평가되는 명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싸울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주동권을 확보하였다. 회령포에서 12척을 수습한 이순신은 300여 척의 일본 수군의 추격을 피하며 이진, 어란포, 벽파정으로 후퇴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과연 어디서 싸워야 승산이 있을까? 명량해전이 있기 하루 전 이순신은 진도의 벽파정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陣)을 옮겼다. 그 이유가 《난중일기》에 보인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앞 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鳴梁)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陣)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고 싸우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 (《亂中日記》 丁酉年 9월 15일)

명량의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병법의 원리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관운장(關雲長)이나 장비(張飛)같은 힘센 장수가 외나무 다리를 지키고 있을 경우 수백 명이라도 당해낼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적군이 아무리 많더라도 외나무 다리를 타고 오는 자는 한 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300여척의 일본 수군 함대를 명량의 좁은 물목에 가두어 놓고 조선 수군은 13척 모두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물목 바깥의 넓은 해역에 위치하여 싸운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의 장소로 선택함으로써 13대 300이라는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량의 좁은 물목은 일본 수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역으로 조선 수군에게는 가장 유리한 해전 장소였던 것이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싸울 장소를 먼저 선택한 쪽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었다. 소서행장 군의 철군퇴로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은 사천ㆍ남해ㆍ부산 등지에 있던 일본 수군이 소서행장 군을 구하기 위해 전면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바로 봉쇄를 풀고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다. 소서행장 군을 계속해서 봉쇄할 경우 앞뒤의 적에게 협공을 당하게 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해전 장소로 노량의 물목을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전장의 주동권을 확보한 셈이다.

주동권은 고유한 것이 아니어서 쌍방 모두가 쟁취할 수 있다.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변화시키고, 피동을 주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지휘관의 몫이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같은 열세한 해전에서조차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해전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해전 승리의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7. 지리(地利) 이용의 원리

<<맹자>>에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의역하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장에서의 시간적 조건은 공간적 조건만 못하고, 공간적 조건은 인화단결만 못하다는 것이니 지형의 이점을 안고 싸우는 것이 비록 인화단결보다는 못하다 하더라도 전쟁 승패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명량해전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지형의 이점을 잘 활용한 데 있다.


이순신이 지형의 이점을 활용한 사례 가운데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 30의 열세 상황을 반전시켜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이다.

정유년(1597년) 7월 통제사 원균 지휘하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통제사 원균조차도 일본군에 살해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8월 3일 진주의 굴동에서 통제사 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8월 17일 장흥에 도착하여 회령포에서 전선 12척을 수습하고, 이진을 거쳐 8월 24일 어란포에 도착하였다. 8월 27일 어란포에서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 패배이후 처음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는다. 조선 수군의 잔여 세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고 서해안을 따라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수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순신은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다음 전라우수영으로 다시 진을 옮기는 9월 15일까지 해전 준비에 임하는 한편 300여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을 무찌를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였다.

9월 14일 육지로 정찰을 나간 임준영이 돌아와 “일본 함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벌써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명량해전 하루 전이 9월 15일 진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진을 옮긴 이순신은 장수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고 싸우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亂中日記》, 丁酉年 9月 15日)

이순신은 열세인 조선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펼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명량의 좁은 물목을 등지고 싸울 경우 수효가 적은 조선수군조차도 전투력을 동시에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명량의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한 것은 우세한 일본 수군 함대를 좁은 물목에 가두어 놓고 열세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명량해협 입구에 포진시켜 기다리고 있다가 해협을 빠져 나오는 선두함선을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량의 지형적 여건을 이용하여 수적 절대 열세를 만회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순신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 수군은 전체 300여 척의 함선 가운데, 협수로에서 기동이 원활하지 않은 대선인 아다케〔安宅船〕를 제외시키고, 판옥선보다도 작은 세키부네〔關船〕133척을 주력 함선으로 하여 명량해전에 투입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 함선 133척은 조수를 타고 명량해협을 빠르게 통과하여 조선 수군 함선 13척을 공격하는 것으로 명량해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실제 전투 국면에서는 133척 가운데 31척이 조선 수군 함선 13척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양상으로 해전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볼 때 당초 이순신이 계획하였던 것처럼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병법의 원리가 정확히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란포에 집결되어 있었던 일본 함선의 척수를 기준으로 보면 최초 13척 : 300척이라는 절대 열세 상황에서 명량의 좁은 물목은 13척: 133척으로 열세 상황을 완화해 주었으며, 실제 해전 국면에서는 다시 13척: 31척의 상황으로 열세 상황이 크게 축소되었다. 결국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이용하여 1: 30의 열세 상황을, 1: 3으로까지 완화시키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임진년(1592년) 이후 해전 상황이 증명하듯이 1: 1의 경우 화력 면에서나 함선 성능 면에서 일본 함선은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비록 어려운 해전이었지만 조선 수군의 판옥선 13척은 에워싸고 있던 일본 함선 31척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명량해전은 조선의 판옥선 1척이 일본의 세키부네 3척 이상을 대적할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제외한 모든 해전에서 좁은 협수로를 무대로 해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의 명장 이순신도 1: 30 이상의 절대열세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명량의 지형적 이점을 등에 업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그런 까닭에 어제 진(陣)을 한산도로 옮겼습니다.

‘지리(地利) 이용 원리’를 적용한 두 번째로 주목할 만 한 사례는 한산도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한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이다.

임진년(1592년) 4차례의 출동에서 총 16회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다음해인 계사년(1593년) 7월 진(陣)을 한산도로 옮겼다. 일본군이 남해, 서해의 바닷길을 따라 호남을 침범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왜 부산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한산도를 지키는 일에 몰두하였을까? 그 이유는 임진년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과 조우할 경우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육지에서 조선 수군과 대치하는 일종의 ‘요새함대’ 전략을 구사하고 있어서 전과를 확대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웅천이나 안골포, 김해나 양산 등지에 성을 쌓고 웅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제쳐두고 부산포를 공격할 경우 자칫 앞뒤의 적에게 포위되는 피동(被動)의 형국에 노출 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호남으로 통하는 바닷길을 막아 일본군의 전쟁 수행 의도나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유가 이순신이 현덕승(玄德升)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글에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약에 호남이 없다면 이는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어제 진(陣)을 한산도로 옮겨 바닷길을 막을 계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李忠武公全書』 卷十五, 書, 答玄持平德升)

한산도는 바닷길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는 호남의 관문이다. 부산에서 바닷길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거제도 안쪽 바다의 물목인 견내량이나 바깥 바다인 옥포만 쪽을 경유해야 하는데 한산도는 두 방향으로 오는 적을 가로막을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한산도를 지키는 것은 나라의 울타리에 해당하는 호남을 지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의 경제적 기반인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군의 본토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호남 길목 차단 전략임을 확신하였다. 이순신은 정유년(1597년) 통제사에서 파직될 때까지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칠천량해전 패배 이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조정에서 수군의 세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육전(陸戰)을 명하자 장계를 올려 수군의 역할을 환기시키고 전의를 불태우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임진년(1592년)부터 정유년(1597년)까지 한산도를 지켰던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임진년(1592년)부터 5, 6년간 도적들이 곧바로 전라도와 충청도로 돌격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臣)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해 볼만 합니다. 이제 만약 수군을 모두 없애신다면 이는 도적들이 다행이라고 여기는 바이며, 이로 말미암아 호남의 바닷길을 따라 한강에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臣)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李忠武公全書』 卷九, 附錄一, 行錄)

계사년(1593년) 이후 본격적으로 구사되었던 한산도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한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은 임금인 선조와 조정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 때문에 선조의 불신감과 미움의 감정이 증폭되어 급기야 통제사에서 파직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새로 통제사가 된 원균 또한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원균 지휘하의 조선 수군은 부산포로 출동하게 되고, 이 한 번의 출동으로 이순신이 6년여 동안 건설해 놓았던 최대, 최강의 조선 함대는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다.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정유년(1597년) 이전까지 보전되었던 호남이 초토화되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적의 총칼 앞에 무참히 살육되었다. 정유재란의 결과는 이순신이 한산도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여 구사해 왔던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이 얼마나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는지를 반증해 주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의 정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치렀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8. 정보획득의 원리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승리를 위한 작전계획은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수립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미 앞서 살펴 본 전쟁 승리의 원리도 정확한 정보가 아니면 제대로 구사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정보획득의 원리는 다른 모든 병법의 기초인 셈이다.

 

▶ 이순신은 정보수집 및 활용의 귀재였다.


이순신은 정확한 정보 없이는 결코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0일 뒤인 5월 4일에야 제1차 출동에 들어가는데, 이렇게 지체된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왜 수군 함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해전이 있게 된 5월 5일 옥포만 포구에 있는 일본 수군 함대를 제일 먼저 발견한 자는 정보 수집을 위해 앞서 보냈던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었다. 같은 날 합포에 일본 수군 대선 5척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한 것도 사전에 파견한 탐망선에서였다.

이순신의 정보 수집에 대한 노력은 임진년(1592년) 첫 출동에서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조선수군은 일본 수군의 함선세력과 활동장소를 훤히 꿰뚫고 있었던 반면에 일본 수군은 상대적으로 남해연안의 지리에 어두웠고, 설상가상으로 초기에는 경계나 정보수집을 위한 탐망선 운용에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파죽지세의 지상전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일본군은 조선수군의 존재를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다.

임진년(1592년) 제2차 출동 때부터 이순신은 일본 수군 함대 색출을 위한 탐망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운영하였다. 드디어 6월 2일 오전, 이순신은 일본 함대가 당포 선창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대선 9척, 중ㆍ소선 12척으로 도합 21척이었다. 이순신은 먼저 거북선을 투입하여 지휘선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함포 공격을 실시하여 21척 모두를 격파, 분멸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지역의 일본 수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또 다시 탐망선을 풀었다.

“6월 4일 이른 아침에 당포 앞바다로 나아가 진을 치고, 작은 배로 하여금 적선을 탐망하게 하였는데......”(《李忠武公全書》 卷二, 玉浦破倭兵狀)

이순신은 정보수집을 위한 탐망선 운영을 전방위로 넓혀 갔다. 또 그는 탐망선 이외 현지인들에게서도 적에 대한 1급 정보를 입수하곤 했다. 다음은 당포해전 다음에 이루어진 당항포해전 직전에 정보를 입수했던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초5일은 아침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가 늦어서야 걷혔는데, 거제로 도망친 적을 토벌하려고 돛을 올려 바다로 나오는데 거제에 사는 귀화인 김모 등 7, 8명이 조그마한 배에 같이 타고 와서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포에서 쫓긴 왜선이 거제를 지나 고성 땅 당항포로 옮겨 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李忠武公全書》 卷二, 玉浦破倭兵狀)

이순신은 정보를 입수한 즉시 함대를 출동시켜 당항포 어귀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 대ㆍ중ㆍ소선 총 26척을 공격하여 모조리 격파하였다. 6월 7일 율포에서 일본 함선 7척을 추가로 격파한 이순신은 6월 8일 조선수군 주력함대를 마산 앞 남포 앞 바다에 진을 치도록 하고,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까지 탐망선을 파견하여 일본 수군의 흔적을 탐색하였다.

제3차 출동 중에 있었던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는 한산해전이 있기 하루 전 미륵도(彌勒島)의 당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현지인인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일본 함대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견내량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 지휘부는 조선 수군이 코 앞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반해 이순신은 밤새도록 어떻게 하면 일본 수군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작전계획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탐망선의 적극적인 운영은 두 가지 면에서 유익하였다. 하나는 전투에 앞서 적의 세력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사전에 승리할 수 있는 작전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함대의 불필요한 기동을 최소화함으로써 노를 젓는 격군(格軍)들의 피로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모든 전략전술과 작전계획은 언제나 사전에 획득한 정확한 정보 분석을 토대로 수립되었다. 계사년(1593년)의 장계는 이순신의 정보수집체계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이 거느린 함선은 전선이 42척이고 정탐용 작은 배가 52척이며, 우수사 이억기가 거느린 함선은 전선이 54적이고 정탐용 작은 배가 54척이며, 전쟁기구는 배의 척수에 따라 정비하였습니다.”(《李忠武公全書》 卷三, 請湖西舟師繼援狀)

이 기록을 토대로 계사년(1593년) 기준 전라좌우수영의 함선세력을 정리해 보면 함선 세력 가운데 전투함이 96척이요, 탐망선이 106척이다. 특히 일본군과의 접적지역에 있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는 탐망선이 전투함보다 10척이나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계사년(1593년)부터 정유년(1597년)까지 한산도에 통제영을 둔 이순신은 일본군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탐망선 이외에 별도로 육상의 정찰부대를 운용하였다. 거제도의 안쪽 바다로 통하는 칠천량 앞 바다를 감시하는 영등(永登) 정찰부대와 거제도의 바깥 바다로 통하는 해로와 웅천 및 가덕도 앞 바다를 감시하는 대금산(大金山) 정찰부대 그리고 고성 쪽의 육지와 바다를 감시하는 벽방산(碧芳山) 정찰부대가 그것이다. 이 부대의 활약을 통해 이순신은 안골포, 가덕도, 제포, 웅포, 거제 등을 오가는 일본 수군과 고성 쪽의 일본 지상군의 동태를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육로로 정찰 임무를 띤 군관을 직접 보내 거제 동쪽의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였다.

정확한 정보 없이는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던 이순신은 가등청정을 잡으러 출동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닷길이 험난하고 또한 적이 반드시 여러 곳에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릴 것이니, 배를 많이 거느리고 간다면 적이 알지 못할 리 없고, 배를 적게 거느리고 가다가는 도리어 습격을 당할 것입니다.”(《再造藩邦志》)

한 마디로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기초하여 수군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이순신의 입장이었다. 이는 전투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조정의 정보 획득 및 분석 능력에 대해 신뢰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그 자신이 파직되어 투옥되고 임금을 능멸하였다는 죄로 죽임을 당할지언정 거짓 정보에 기초하여 병사들을 죽을 곳으로 내어 모는 그러한 무모한 작전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정 명령에 따른 단 한번의 출동으로 칠천량에서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원균은 자신의 자리를 위해 부하들의 생명을 담보로 했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영예를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써 조선의 최후의 보루였던 수군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9. 만전(萬全)의 원리

이순신이 7년 간 20여 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준비태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듯이, 전쟁에서 준비없는 승리란 없다. 이제까지 피상적으로 소개된 이순신의 승리에는 많은 극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 승리의 배후에는 언제나 피와 땀으로 점철된 철저한 전투준비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거북선 건조는 철저한 전투준비태세의 백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4년전(1588년) 임금인 선조가 대신들에게 유능한 무인(武人)을 계급에 관계없이 천거하도록 한 것은 일본의 침략 징후에 대한 일종의 대비책이었다. 비록 조선이 왜란에 대비하여 체계적인 전쟁 준비를 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순신 같은 유능한 무장(武將)을 발탁하여 호남의 길목인 전라좌수영을 책임지도록 한 것은 매우 적절하고도 훌륭한 인사조치 였다. 아마도 이것은 임금인 선조가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내린 조치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 이래 실로 눈코 뜰새 없이 전비태세 확립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임금인 선조가 자신을 종6품인 정읍 현감에서 어느날 갑자기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특진, 임용시킨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전쟁이 발발하는 해인 임진년(1592년) 1월부터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하기 위하여 관할 부대인 순천ㆍ보성ㆍ낙안ㆍ광양ㆍ흥양 등의 5관(官)과 사도ㆍ방답ㆍ여도ㆍ녹도ㆍ발포 등 5포(浦)를 차례로 순시하여 업무에 충실한 부하들에게는 포상을 내리고 불성실하거나 나태한 병사들은 엄하게 처벌하였다. 그러나 1년 2개월 동안 일본의 침략을 확신하면서 준비한 조치들 가운데 백미는 거북선 건조이다.

고려 말 진포해전(1380년), 관음포해전(1383년)에서 세계 최초로 함포를 사용한 고려 수군의 함포운용술을 계승, 발전시켜 200여 년 동안 그것을 운영해 온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 이르면 함포운용술에 관한 한 최상의 단계에 와 있었다. 바야흐로 해전에서의 함포시대가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조선 수군의 해전 전술은 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천자ㆍ지자ㆍ현자ㆍ황자총통으로 대변되는 함포를 쏘아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주요 해전 전술로 삼고 있는 일본의 배가 접근하기 이전에 격파 또는 분멸하고, 그 다음에는 침몰하고 있는 배의 갑판위에서 우왕좌왕하거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적에 대해서는 활을 사용하여 살상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기존의 함포 중심의 해전 전술 패턴을 활용하면서도 공격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개전 초기에 적의 지휘선을 향해 돌진하여 격파할 수 있는 새로운 함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도 수군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발포 만호 시절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렇게 하여 개발된 것이 돌격선인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모델로 하여 위에 덮개를 씌운 것이다. 해전에서의 거북선의 역할은 가장 앞장서 적의 지휘선이나 주력함을 공격 목표로 삼아 돌진하면서 각종 총통을 쏘아 격파함으로써 개전 초기에 적의 지휘부를 무력화시키는데 있었다. 거북선의 덮개는 적선과 충돌하여 서로 접하게 될 때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특기로 하는 일본 병사가 칼을 들고 뛰어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거북선의 위력은 견고하게 만들어진 선체와 적의 함선에 포위되더라도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기동성, 그리고 거북 덮개와 널빤지에 의해 은폐된 각종 총통의 가공할 화력에 있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돛을 달고, 화포를 설치하여 사격훈련 등을 실시하고 전투세력으로 합류시킨 날은 임진년(1592년) 4월 12일이었으니, 정확히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이었다. 이렇게 볼 때 호남의 길목인 전라도 좌측 해안을 책임지고 있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1년 2개월 동안 거의 완벽한 전투준비를 갖추었던 셈이다. 그러나 고려 말 이후 200여 년 동안 해전을 전문으로 하여 독립된 군(軍)으로 발전되어 온 조선 수군이 없었다면 그리고 왜구들의 해전 전술에 대비하여 발전되어 온 함포 중심의 무기체계나 신예 함선인 판옥선이 없었다면 천하의 명장 이순신도 그토록 완벽한 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서의 해전의 승리! 이것은 해양민족으로써 수 천 년 동안 면면히 계승, 발전되어 온 우리의 빛나는 해양전통과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춘 위대한 수군 지도자 이순신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준비되지 않은 승리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 

 

 

 

10.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원리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은 뒤에 싸워서 항상 승리하지만,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우고 나서 요행으로 승리하기를 바란다. 이른바 전투는 이기게 되어 있는 싸움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순신은 전투에 관한 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해전은 결코 벌이지 않았다.

 

▶ 이순신은 한산해전에 임하면서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전과(戰果)를 극대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다.


임진년 1차 출동에서 치른 옥포해전을 비롯한 세 번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끈 이순신 지휘 하의 조선 수군은 해전에 관한 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사기 또한 충천하였다. 이순신은 거의 모든 해전에서 일본의 수군을 좁은 포구로부터 넓은 바깥 바다로 유인하여 격멸하는 함대결전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다. 좁은 포구에서 해전을 할 경우 형세가 불리함을 느낀 일본 수군이 육지로 상륙하여 도주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다.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싸우는 해전전술은 승리에 대한 확신없이는 사용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 대표적인 해전이 임진년 3차 출동 중에 벌인 한산해전이다. 임진년 1, 2차 출동 때의 해전이 남해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 수군에 대한 기습공격이었다면, 3차 출동에서의 한산해전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위해 나름대로의 준비를 갖춘 일본 정예 수군함대와의 한판 승부였다. 이순신 함대는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 소속의 전선 59척이 주력이었고, 일본 수군 함대는 판옥선과 크기가 비슷한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이 13척으로 도합 73척이었다. 이순신은 한산해전에 임하면서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산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2년 6월 7일 견내량에 일본 함선 7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밤새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되어 싸우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李忠武公全書』卷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이순신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또는 ‘우리는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과(戰果)를 극대화할 수 있을까’에 있었음이 위의 인용문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요약하면 첫째, 견내량은 해역이 좁아 당시로서는 큰 배에 속하는 판옥선의 기동이 불편하여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둘째, 이전의 해전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적들은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배를 버리고 곧장 육지로 도망할 것이다. 셋째, 이와 같은 제한점을 극복하고 전과(戰果)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격파해야 한다. 이순신의 구상은 밤새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사전에 수립된 작전계획에 따라 이순신은 판옥선 5, 6척을 견내량에 보내 공격을 시도하였다. 일종의 유인술(誘引術)이었는데, 적들은 일시에 돛을 달고 달려 나왔다. 조선의 함선 5, 6척이 뱃머리를 돌려 한산도 앞바다로 퇴각하자 일본 수군 함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다 한 가운데로 따라 나왔다. 거짓으로 퇴각하던 조선의 함선들은 한산도 앞 바다에 이르자 기다리고 있던 수군 본대와 합류하면서 뱃머리를 돌려 함께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조선 수군 함대는 선두에서 추격해 오는 일본 함선 2, 3척에 화력을 집중하여 깨뜨린 것을 시작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일본 함대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도합 59척을 일시에 격파하였다. 일본 함대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함선 피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명피해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산해전의 전투결과는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일본 수군에 비해 월등하였음을 반증해 준다. 거기다 화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진형법인 학익진의 운영 등 이순신의 주도면밀하고도 탁월한 병법의 구사는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군(軍)에서의 리더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나 철저한 준비없이, 감정에 휩싸여 또는 도박하는 심정으로 전쟁에 임해서는 안된다. 전쟁의 결과는 부하 병사들의 생사(生死)문제 뿐만 아니라 국민의 안위(安危) 나아가 국가의 존망(存亡)까지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요행이라는 것이 없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스스로는 천행(天幸)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는 승리를 위한 제반조건들을 최선을 다해 갖추어 놓고 싸움에 임하였다. 결국 요행도 승리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의 진정한 위대성은 열세한, 그래서 보통사람으로는 승리할 수 없는 극악한 상황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병법의 구사를 통해 열악한 조건을 승리할 수 있는 우세한 조건으로 전환시켰던 그의 탁월한 군사전문가적 역량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순신의 병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필자는 앞에서 이순신의 병법을 ‘병력집중의 원리’, ‘화력집중의 원리’, ‘주동권 확보의 원리’, ‘정보획득의 원리’, ‘지리(地利)이용의 원리’, ‘만전(萬全)의 원리’,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원리’ 등 일곱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순신의 위대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기를 희망해 본다.    

 

 

 

11. 한산해전 다시보기

한산해전하면 생각나는 것이 54척 대 73척의 열세의 해전, 학익진 그리고 거북선이다. 그러나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조선 함대의 규모는 대선 59척, 소선 50척으로 총 109척이다. 척수 면에서도 조선 수군은 열세가 아니었다. 이제 영웅은 언제나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워 이겨야한다는 기존의 편견에서 벗어나 앞에서 살펴 본 병법의 관점에서 임진왜란 3대 승첩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해전의 승리요인을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한산해전은 이순신 병법의 실체를 가장 잘 확인해 볼 수 있는

   대표적 해전이다.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신예 함선과 첨단 무기체계로 대변되는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와 병법과 리더십으로 대변되는 소프트웨어적 전투력 요소에서 우위에 있어야 한다. 아래에서는 소프트웨어적 전투력 요소 가운데 하나인 병법의 관점에서 한산해전의 승리요인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적용된 병법은 ‘정보획득(情報獲得)의 원리’이다.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 함대를 통합한 이순신 함대는 한산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임진년(1592년) 7월 6일 미륵도의 당포에 정박하였다. 동풍이 강하게 불어 더 이상 전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 그 섬에 숨어 살고 있던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적선 대ㆍ중ㆍ소선을 모두 합해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경 거제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도착하여 현재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를 토대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격파할 작전계획을 구상할 수 있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조선 수군이 코 밑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일본 수군과 밤새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조선 수군! 이미 해전의 초기 단계부터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게 지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적용된 병법은 ‘병력집중(兵力集中)의 원리’이다. 병력집중은 우세한 전투력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병법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제3차 출동에서도 이순신은 가용한 전라좌우수영, 경상우수영의 함선을 모두 동원하여 통합하였던 반면에, 이순신 함대를 격파하라는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은 일본 정예 수군은 통합되지 못했다. 협판안치(脇坂安治) 지휘하의 일본 수군이 먼저 출발하여 견내량에 도착했을 때, 구귀가륭(九鬼嘉隆) 및 가등가명(加藤嘉明) 지휘하의 일본 수군은 안골포에 머물러 있었다. 만일 협판안치의 일본 수군이 안골포에 있었던 일본 수군 대ㆍ중ㆍ소선 42척과 통합된 상태에서 해전을 벌였다면 이순신도 그처럼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셋째로 적용된 병법은 ‘주동권확보(主動權確保)의 원리’이다. 주동권 확보의 요체는 아군에게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편리하고 나아가 전과(戰果)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좁은 견내량 보다는 넓은 한산도 앞바다가 유리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이미 싸우기 하루 전에 일본 정예 수군과의 해전 장소를 물색하였고 그들을 조선 수군이 싸우기에 유리한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계획된 전술진형이었던 학익진을 펼쳐 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해전 장소의 주도적 선택! 이 또한 한산해전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넷째로 적용된 병법은 ‘화력집중(火力集中)의 원리’이다. 한산해전에서 사용된 저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은 조선 수군의 화력을 적의 핵심 전력이나 지휘선에 집중시키기 위한 진형법이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선두에서 따라오는 일본 함선 2, 3척에 화력을 집중하여 순식간에 격파함으로써 개전 초기에 일본 수군의 사기를 꺾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바다 가운데 나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면서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여러 총통을 쏘아서 먼저 2, 3척을 쳐부수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도망하므로 여러 장수나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뽐내어 앞을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번갈아 쏘니....”(『李忠武公全書』卷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학익진은 결국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체계인 총통의 화력을 소수의 일본 함선에 집중하여 일시에 격파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인 전투 국면에서의 절대 우세를 선점하기 위한 진형법이었던 것이다. 병력을 통합하여 전체 함대 세력의 우위를 조성한 이순신은 화력집중을 통해 구체적인 전투 국면에서도 우세를 확보함으로써 승리의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다섯째로 적용된 병법은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원리’이다. 앞에서도 이미 한 차례 살펴보았듯이 이순신은 한산해전에 임하면서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전과(戰果)를 극대화 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다. 다음의 장계가 그것을 반증해 준다.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되어 싸움하기에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李忠武公全書』卷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해전 결과 일본 함대의 함선 73척 가운데 59척이 격파, 분멸된 반면 조선 수군의 함선은 단 한 척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순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반증해 준다. 이순신은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해전은 결코 벌이지 않았다. 그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승리하는 군대는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놓고 싸운다(勝兵, 先勝而後求戰)”는 이른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원리’를 철저히 준수하였다.

이순신이 구사한 해전전술과 해전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한산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결코 열세가 아니었다. 해전이 있기 하루 전에 일본 수군의 함대 규모를 파악한 이순신은 해전 장소로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를 택했다. 이는 열세의 함대가 선택할 수 있는 방책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이미 해전이 있기 전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총통으로 무장한 조선 수군의 함선 1척이 지니는 전투력이 일본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1, 2차 출동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한산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일본의 조선 침략 전략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해로가 막힘에 따라 수륙병진 전략이 난관에 부딪히고, 한양 북쪽으로 진격하였던 일본의 선봉부대들은 군수지원 및 퇴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은 곡창인 호남이 보전됨으로써 장기전을 치를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해인 계사년(1593년) 이순신은 한산도에 통제영을 건설하였다. 이후 정유재란 직전 통제사에서 파직될 때까지 이순신은 한산도를 중심으로 거제도 내해(內海)와 외해(外海)를 가로 막는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을 구사하였다. 일본 수군은 호시탐탐 호남 진출을 노리고 있었지만 한산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위력을 실감한 그들은 감히 견내량을 돌파하여 조선 수군과의 결전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12. 리더십의 개념 정의

리더십(leadership)을 필자는 ‘리더의 도(道)’라고 정의한다. 젠틀맨십(genthemanship)을 ‘신사(紳士)의 도(道)’, 이른바 신사도(紳士道)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면 도(道)는 무엇인가? 도(道)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쉽게 표현하면 원리(原理, principle) 또는 정신이다. 원리(原理)는 변하지 않는 근본 이치요, 정신은 마음의 활동이다. 곧 리더십은 ‘리더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원리 또는 정신’인 것이다. 리더십은 리더와 구성원 그리고 그들이 속한 환경을 상호 매개 변수로 하여 발휘 된다. 그런 면에서 리더십을 구체적으로 정의해 보면 ‘리더십은 리더가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십이분 발휘토록 유도하여 조직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게 하는 원리 또는 이를 위해 리더가 견지해야 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리더십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리더, 구성원, 환경이며 이를

   변수로 하여 다양한 리더십의 방법론이 제기된다.


리더십이 리더의 ‘보편적 원리’라는 점에서 볼 때 리더에 관통하는 보편적 원리에 대한 객관적 인식 작업이 필요하다. 또 한편 리더십은 리더가 공유해야 하는 ‘보편적 정신’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실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리더십의 결과는 언제나 리더의 자질이나 인품과 매우 큰 상관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십 구성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요소 이다. 리더는 어떤 자질을 지녀야 할까? 리더는 전문성, 혁신 마인드, 역사의식, 인격 이른바 전문성(專門性), 혁신성(革新性), 역사성(歷史性), 인격성(人格性)을 지녀야 한다. 하나하나가 모두 참으로 획득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요즈음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리더십과 관련한 수많은 서적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논의들이 시류에 편승한 것이거나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리더십 이론을 들고 나와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리더십은 실천 주체를 떠나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리더십은 단순히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실천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십에는 안 것을 행위로 옮기려는 실천 주체의 일관되고도 지속적인 마음의 활동, 이른바 정신이 수반된다. 이렇게 볼 때 리더십에 관련한 다양한 이론들을 숙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리더의 주체적 역량, 이른바 전문성, 혁신성, 역사성, 도덕성을 함양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A라는 리더와 B라는 리더가 똑같이 리더십 이론을 숙지했다 하더라도 리더십 발휘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주체적 역량에서 A와 B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의 주체적 역량,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전문성이나 인격성을 배제한 채 논의되는 리더십 이론은 공허하기 마련이다.

리더십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리더십 적용의 대상인 ‘구성원’ 요소 이다. 구성원들은 과연 어떤 성질을 지닌 존재인가? 리더가 어떻게 해야 구성원들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까? 구성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인(動因)은 과연 무엇인가? 이렇게 볼 때 구성원들의 생리적 특성, 행동 양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 논의되는 리더십 이론 또한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제기된 동ㆍ서양의 이론만 하더라도 그리 간단치가 않다. 토마스 홉스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설’, 순자의 ‘성악설(性惡說)’,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고자(告子)의 ‘성무선무악설(性無善無惡說)’, 인간은 ‘이익을 좋아하고 해로운 것을 싫어한다(好利惡害)’는 한비자의 인간이해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 또한 리더십 이론 정립을 어렵게 하는 요소이다. 이쯤 되면 어느 것이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설명한 이론인지를 선택하는 것보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성질들을 인간이 어느 정도는 모두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더십에서 문제되는 것은 리더와 구성원이 속한 ‘환경’요소 이다. 전쟁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군대사회와 민간사회는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나 리더십 방법론에 있어서 군대사회와 민간사회는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지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하는 군대의 경우 리더와 구성원인 병사들은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을 버려서라도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전시(戰時)의 경우 리더와 병사들은 더욱 열악하고 급박한 환경에 노출된다.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심각한 상황에서 리더는 어떻게 병사들의 전투 역량을 극대화시켜 주어진 부대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다음 회의 글에서부터는 위에서 언급한 리더십 이해의 틀을 기초로 이순신의 리더십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13. 위대한 리더가 되기 위한 토대 - 인문적 소양

이순신은 무인(武人)이었지만 문인(文人)적 소양까지를 겸비하였다. 22세가 되어 무과(武科)로 진로를 결정하지 전까지만 해도 그는 희신(羲臣), 요신(堯臣) 두 형을 따라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문과(文科)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유년기, 청년기의 이순신의 이력은 그가 문무(文武)를 겸비한 위대한 영웅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명장(名將)이나 유능한 리더를 꿈꾸는 사관생도들이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병자년(1576년) 무과(武科) 시험 때의 일화

   - "이것은 무사(武士)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무과 시험을 준비한지 6년째인 28세(1572년) 되던 가을에 처음으로 무과 시험에 응시하였다. 그런데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며,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순신은 이후 4년 동안 무과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드디어 32세가 되던 병자년(1576년) 봄에 있었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게 된다. 무과시험에는 『육도(六韜)』ㆍ『삼략(三略)』ㆍ『손자(孫子)』 등 무경의 중요내용을 암송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이순신은 대부분의 과목을 무난히 통과하였다. 그런데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는 병서를 암송하는 데 이르러 시험관이 장량(張良)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았다 했으니 장량이 과연 죽지 않았을까?”

이 질문의 요점은 장량이 만년(晩年)에 신선술(神仙術)에 정통한 적송자를 찾아가 신선술을 배워 죽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한 이순신의 견해를 물은 것이다. 장량이 누구인가? 그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가 망하고 초(楚)나라의 항우(項羽)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쟁패할 때 유방을 도와 통일제국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군사지략가요 병법의 대가이다. 그런데 그런 장량이 만년(晩年)에 신선이 되었다는 설이 항간에 널리 펴져 있던 참이었다.

결국 시험관은 동양의 정통종교인 도교(道敎)에서는 불로장생술(不老長生術)을 수련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이순신의 생각을 떠 본 것이다. 이순신은 대답하였다.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요(有生, 必有死), 『통감강목(通鑑綱目』에도 ‘임자(壬子)년 6년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신선술에 심취한 사람들이 꾸며낸 말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순신은 장량이 신선이 되었다는 설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논박하였다. 하나는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유학적 관점이요, 다른 하나는 주희(朱熹)가 지은 『통감강목』이라는 역사서적에 장량이 죽었다는 기록에 근거한 사실주의, 증거주의적 관점이다.

사실 시험관은 이순신을 시험해 보고자 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무경(武經)에 정통하였다 하더라도 무인(武人)인 주제에 이 정도의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질문은 던진 시험관은 유학적 세계관과 경전에 정통한 문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시험관의 문신으로서의 우월감과 무인에 대한 경시의 태도가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적 세계관에 의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따라서 영원히 살려는 것은 인간의 욕망에 불과하며,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유학에서의 인생의 목표는 신선이 되어 영원토록 살거나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이치에 합당한 삶 이른바 ‘의(義)로운 삶’, ‘올바른〔是〕삶’, ‘선(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순신은 시험관의 질문에 유학적 세계관에 부합하는 답변을 정확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통감강목』이라는 역사서적의 기록을 근거로 장량의 죽음을 확인하면서, 진리는 상상이나 억측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당당하게 펼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대 이상의 답변에 직면한 시험관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이것은 무사(武士)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문신(文臣)들은 유학의 경전을 주요 시험 과목으로 하는 문과 과거 시험을 통과한 조선의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순신의 문인(文人)적 소양은 그들과 어깨를 견주어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순신은 자신의 내면적 정감을 시(詩)와 일기(日記)를 통해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문학적 자질, 역사적 교훈이 담겨있는 역사서적 읽기를 통해 정립된 올바른 역사의식, 그리고 ‘의리(義理)에 죽고 의리(義理)에 사는’ 당시의 주류적 세계관이었던 유학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소유한 무인(武人)이요 리더였다. 그는 전통사회에서의 리더 교육체계 이른바 문학(文), 역사(史), 철학(哲)의 인문적 소양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전인(全人)적 교육체계를 가장 충실히 소화한 조선의 대표적 리더였던 것이다. 미래의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바로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어떤 ‘인문적(人文的) 소양(素養)’을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이정표가 아닐 수 없다.     

 

 

14. 리더의 인격도야를 위한 방법 - '순수 감성'의 힘 기르기

‘순수 감성’과 ‘이기적 욕망’은 서로 상반된 마음의 힘이다. 우리는 가끔 정의(正義)와 불의(不義)를, 또는 선(善)과 악(惡)을 구별하지 못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정의나 선을 행함으로써 오는 불이익이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고 정의(正義)나 선(善)을 실천에 옳길 수 있을까? 필자는 이를 위해 ‘순수 감성’의 힘을 기를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순수 감성’은 리더의 도덕적 주체를 정립시켜 줄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 시(詩) 짓기와 일기(日記) 쓰기를 통한 감성의 순화,

   검명(劒銘)을 활용한 감성의 힘 굳세게 하기 "


유치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우리의 교육 체계 속에는 음악, 미술, 시(詩), 체육 등 이른바 예술, 문학, 체육과 관련된 과목이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바쁜 세상에 수능에도 관계없고, 실용성도 없는 그런 과목들을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런 질문은 좀 과장하면 인간의 가치나 인간 사회의 구성원임을 포기하는 우문일 따름이다.

예술, 문학 교육은 인간을 금수와 구별된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전인(全人)교육의 중요한 수단이다. 유ㆍ불ㆍ도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통사상에서는 인간을 선(善)한 존재로 간주한다. 일종의 성선설(性善說)이 동양의 주류적 인간관인 셈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생리적 욕구체인 몸 중심의 무한한 이기적 욕망에 의해 그것이 왜곡되어 악한 행동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선한 본성이 무한한 이기적 욕망을 누르고 행위의 세계에 까지 발현될 수 있을까?

이순신이 살았던 유학의 나라 조선의 양반 계층인 지식인들은 시(詩) 짓기가 생활화되어 있었다. 시 짓는 수준이 곧 한 사람의 지식과 교양을 가늠하는 척도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에 있는 삼백편의 시에 관통하는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也)”라고 하였다. 유학에서 시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바로 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순수한 감성을 체험하고, 회복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시를 쓸 때 경험하는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보존하고 길러내는 일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기적 욕구를 넘어 타인이나 인류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첩경임을 공자는 간파했던 것이다.

그 충실한 실천가 이순신! 그의 시에는 언제나 임금과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애절한 마음이 가득차 있다. 다음은 이순신의 대표적 시인 한산도가(閑山島歌)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 어디선가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시를 짓던 날은 아마도 음력 보름 쯤 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한국적 정서에서 달은 언제나 슬픔을 상징하고, 그리움을 투영하는 대표적 사물이었다. 임진왜란이 장기화되면서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해상 경계인 견내량과 거제 외해의 물목을 가로막는 호남길목차단전략을 수행하며 한산도를 지키고 있었다. 바다의 최일선에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책임진 수군 최고 책임자로서의 중압감과 고민 그리고 외로움과 슬픔이 절절이 스며있는 시이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 보름이 되면 어김없이 둥근 달이 바다위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어김없이 시상과 연결되어 시로 표현되었다.

“한바다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 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떳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이루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활과 칼을 비추네.”

달은 이순신의 시 뿐만 아니라 일기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음력 15일은 달의 모양이 가장 큰 보름이다. 15일을 전후하여 군영에 다급한 일이 없을 때면 일기에 어김없이 달이 등장하면서 나라 걱정,어머니 걱정에 대한 상념이 투영된다.

“달빛은 배 위에 가득차고 혼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온갖 근심은 가슴을 치밀어 자려야 잠이 오지 않다가 닭이 울어서야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계사년 5월 13일)

“달빛은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닭이 울었다.”(계사년 7월 15일)

“이 날 밤 바다의 달은 밝고 맑은 것이 잔물결하나 일지 않았다. 물과 하늘이 한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건 듯 분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계사년 8월 17일)

또한 달과 더불어 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상념의 대상이 어머니였다. 생신 날이나 설날 또는 군무가 한가한 때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에 대한 소회가 일기에 보인다.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계사년 5월 4일)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도 나이 여든이나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을미년 1월 1일)

“맑았으나 동풍이 크게 불었다. 동쪽으로 가는 배가 도무지 내왕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어머님 안부를 듣지 못하여 답답했다.”(병신년 8월 12일)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은 마음의 감성을 순화시킨다. 또한 어머니를 그리고 임금을 생각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을 촉발시킨다. 자연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하여 사적인 욕구가 없다. 어머니를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또한 사적인 욕구가 없다. 이순신은 자연을 매개로 한 시 쓰기를 통해 부단히 마음의 감성을 순화시켰으며, 일기쓰기를 매개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반성 작업을 통해 순수 감성의 힘을 키워나갔다.

나아가 검(劒)에다 명(銘)을 새겨 감성의 힘을 더욱 굳세게 하였다. 이순신이 평소 마음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애용했던 검명(劒銘)은 두 문구가 남아있다.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떠는 도다(三尺誓天, 山河動色).”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붉은 피가 산과 강을 적시도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첫 번 째 검명(劒銘)에서 날이 새파랗게 선 칼을 두고 하늘에 맹세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걸고 결의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 검명(劒銘)에서 한 번 휘둘러 그들의 피가 산과 강에 물들도록 한다는 것은 맹세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왜군에 대한 이순신의 무한한 적개심과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하는 결의와 각오가 묻어나는 비장한 검명(劒銘)이다.

마지막 노량해전은 단 한 척의 왜선도 단 한명의 왜놈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평소의 맹세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순신은 죽음으로써 이 맹세를 지키고자 하였다.

타인을 위한 희생과 봉사, 나라와 백성을 위한 죽음! 무한한 욕구로 가득찬 생리적 욕구체로서의 인간에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시 짓기와 일기 쓰기, 검명의 활용 등을 통해 감성의 힘을 기를 수 있었지만 가치 다원화, 진리 다원화 시대를 살아가는 요즈음의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금수(禽獸)와 구별되는 인격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바야흐로 ‘감성의 순화’, ‘순수 감성 회복하기’, ‘감성의 힘 기르기’ 가 리더 자질 함양의 중요한 화두임을 제2의 이순신을 꿈꾸는 리더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15. 무과 시험 준비를 위한 10년의 공부는 그가 위대한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순신은 우리민족을 위해 하늘이 낸 인물임이 분명하지만 위대한 인물이 되기까지 그에게는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는 22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무과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한 번의 낙방을 거쳐, 3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과에 합격하였다. 10년의 공부가 있었던 것이다. 활쏘기 등의 무예 익히기와 무경칠서로 대표되는 병법서에 대한 공부는 그가 위대한 장수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 이순신은 초급 군관 시절부터 무인으로써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순신은 22세부터 무과 시험에 뜻을 둔 이래 6년간의 준비를 거쳐 28세에 처음으로 치른 무과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뜻하지 않은 낙마(落馬) 사고 때문이었다. 이후 절치부심(切齒腐心)의 4년간의 준비를 통해 32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비로소 무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10여 년간의 인고(忍苦)의 세월이 있었기에 그는 초급 군관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이 파직과 백의종군을 거듭하며 미관말직을 전전하다 어느 날 갑자기 유성룡의 천거에 의하여 정읍현감(종6품)에서 전라좌수사(정3품)로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준비된 무인(武人), 이순신은 초급 장교 시절부터 실력 있는 장수로 인정받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무과에 합격(1576년)하여 종9품인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종8품), 충청병사 군관 등을 거쳐 1580년에는 종4품인 발포 만호가 되었다. 4년 만에 5계급을 승진한 것이다. 초고속 승진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시점(1576년)은 바야흐로 북쪽의 오랑캐들이 변방을 호시탐탐 노리던 시기였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이후 조선은 세 번 오랑캐와의 전쟁을 치렀다. 1583년의 니탕개난과 1587년의 녹둔도 전투 그리고 오랑캐의 녹둔도 침입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진 1588년의 시전부락 전투가 그것이다. 니탕개난 때 이순신은 함경도 남병사 이용의 군관으로 참여하여 니탕개난을 주도한 3인의 대추장인 ‘니탕개’, ‘울지내(또는 울기내)', ‘율보리’ 중 2인자 격인 울지내를 유인하여 체포하는 공을 세웠으며, 녹둔도 전투에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격퇴하였으나 북병사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는 일이 있었고, 그 이듬해에 있었던 시전부락 기습작전에서는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있기 전 북쪽 오랑캐와 벌인 모든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역전의 장수였다. 그 시절 선조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였던 북쪽 오랑캐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당시 장수들 가운데 이순신과 같은 풍부한 실전(實戰) 경험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투 결과 논공행상의 과정에서 이순신을 포상해야한다든지 아니면 보고 계통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처벌해야 한다든지에 대한 분분한 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순신이 있었음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덧 조정 안팎에서 이순신은 꽤 유명한 장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력 때문에 1589년 ‘계급에 관계없이 유능한 장수감을 천거하라’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의 인사정책이 시행될 때 이순신은 병조판서 정언신과 이조판서 이산해에 의해 추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등용이 단순히 누구의 천거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진 것이 아니라 10여년의 무관 관료 생활을 통해 드러난 그의 공적과 능력에 기초한 것임을 말해 준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이순신의 이름과 경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북쪽 오랑캐와의 전투 때에 이미 이름이 조정에 오르내렸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에 의해 이미 천거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사간원에서는 이순신을 종6품인 정읍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7계급 특진시키는 인사에 대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관작의 남용에 의해 인사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건의에 대해 선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높고 낮음을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선조실록』 선조24년 2월 16일)

선조는 사간원 대간(臺諫)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단행하였다. 위의 실록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순신의 장수로서의 능력과 실력에 대한 돈독한 믿음과 신뢰 때문이었다.

조선의 수군 병사들은 이순신과 함께 하는 해전이라면 물불의 가리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이순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순신의 리더로서의 군사전문성 이른바 실력은 부하 장수 및 병졸들을 마음으로부터 복종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리더의 실력! 리더의 전문성! 그것은 부하나 구성원들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주어 리더를 믿고 따르게 할뿐더러 그들의 역량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16. 리더에게 역사의식이 필요한 이유

리더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리더가 속한 사회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리더는 역사에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이끄는 조직과 사회에 대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의 존망(存亡)과 부하들의 생사(生死)를 좌우할 수 있는 군의 리더인 경우 더더욱 그렇다. 전쟁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명분이 있을 때라야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 이순신이 멋있는 리더, 위대한 리더로 추앙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지닌 역사의식 때문이다.


필자는 역사의식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의 의지’라고 정의한다. 진정한 역사의식은 단순한 앎의 차원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아래에서는 리더의 역사의식과 관련된 몇 가지 사례 그리고 이순신이 견지했던 역사의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차 세계 대전 때에 프랑스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콜티즈 장군은 ‘파리를 사수하라’,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파리를 불태우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파리를 불태우는 것 뿐이었다. 콜티즈는 고민에 빠졌다. 세계 문화 유산이 즐비한 파리는 프랑스만의 파리가 아니라 전 인류의 파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의 진격 속도를 조금 늦추기 위해 과연 파를 불태워야 하나..... 파리 사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 히틀러는 전문을 통해 콜티즈를 몰아붙였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콜티즈는 대답하였다. ‘예, 파리는 불타고 있습니다’. 허위보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인류적 가치를 지닌 파리는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적 필요성’과 ‘인류적 가치의 보존’ 사이에서 고민한 콜티즈는 목숨을 걸고 후자를 택했던 것이다.

『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법의 대가, 정치가로써의 제갈공명을 존경한다. 유비를 도와 촉나라의 중흥을 꾀하고 때로는 위나라의 조조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에 실패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제갈공명이 존경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당시 유비의 촉나라는 조조의 위나라나 손권의 오나라에 비해 형편없이 약했으며 삼국을 통일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나라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갈공명이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응하여 그와 의기투합한 이유는 유비의 촉나라가 한나라 황실을 계승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촉나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일이야말로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의리(義理)가 승리해야 한다는 제갈공명의 역사의식! 그것이 후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일 것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의리지향적(義理指向的) 역사의식의 소유자였다. 공자가 『논어』에서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라고 한데서 드러나듯이 유학에서 제시하는 보편적 가치는 의리(義理)이다. 따라서 유학적 세계관으로 의식화된 조선의 리더들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으며, 이것이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이 활약하게 되는 사상사적 근거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피신을 하고, 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이 일본군들의 총칼 앞에 스러져가는 참상에 직면한 이순신! 과거 수천년 동안 조선의 은혜를 받아 온 일본인들의 패륜적 침략행위에 분개한 이순신! 그는 이 전쟁의 목적은 바로 반인륜적(反人倫的), 패륜적(悖倫的)침략행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철저히 응징하여 “역천(逆天)과 순천(順天)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한 마디로 이 땅에 하늘의 이치 이른바 천리(天理)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 아울러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이순신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 한명의 일본병사, 단 한척의 일본 함선도 제나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를 제시하였다.

노량해전 직전 순천에서 해상봉쇄를 당하고 있던 소서행장이 뇌물을 보내 진린 도독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마음이 흔들린 진린이 소서행장 부대를 놓아주려하자 이순신은 그를 다그친다. “이 적들은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미 한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요, 또 명나라에 있어서도 역시 죽여야 할 죄를 지었는데 도독은 도리어 뇌물을 받고 화의를 하려 하오”. 이순신의 논리정연한 질책에 결국 진린도 뜻을 함께하고자 하였다. 진린은 뇌물을 받고 소서행장과 싸움을 회피하고 있는 육지 쪽의 중국 장수 유정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차라리 순천의 귀신이 될망정 의리상(義理上) 적을 놓아 보낼 수 없다.” 이순신에 동조하여, 의리(義理)를 위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군을 응징하는데 끝까지 최선을 다한 중국 장수 진린 또한 훌륭한 리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인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 그래서 정의(正義)가 승리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그렇기 못할 경우에는 일본인들은 역사의 대의(大義)를 저버리는 침략행위를 또 다시 되풀이 할 것이다(실제로 300여년 후 일본은 또 다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린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 한 척도, 단 한 놈도 돌려보내선 안 된다’”. 이것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소서행장의 부대를 끝까지 봉쇄하고 나아가 이들을 구원하러 출동한 일본 수군을 끝까지 격파하고자 했던 이유이다. 일본군에 대한 이순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적개심의 배후에 그가 지녔던 유학적 역사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서의 단순한 승리를 넘어 역사에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이순신의 역사의식! 그에게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역사의 정기(精氣)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정의(正義)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위대한 리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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