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길’이 많아서 행복하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혹은 북한산 둘레길, 부산 갈맷길. 남한강 물길…. 산과 물 그리고 들과 해안이 있으면 그곳엔 ‘걷기 좋은 길’이 호젓하고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다. 걷는 길의 운치와 여정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내 안의 나’와 이야기하게 한다. 마음을 내려놓고 놀며 쉬며 먹으며 걷다 보면 각박한 도시생활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풀리고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얻는 힐링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이런 힐링에다 진지한 영혼의 울림까지 보태진다면 어떨까?
# 종교의 자취를 따라 순례길 속으로 들어가다 굳이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마음 속 ‘경건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명상의 순례길은 매혹적이다. 삶이 절박하지 않더라도 애절한 기원은 없더라도 행장을 꾸려 떠날 수 있는 순례길이 있다면…. 그 길에서는 거창한 다짐이나 각오는 오히려 불편하다. 그저 마음의 주머니 한쪽에 ‘나’를 담고 걸어 보는 길이다. 우리에게도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4대 종단 관계자들이 조성한 전주, 완주, 익산을 잇는 180㎞ 전라북도 순례길이 있다. 외국에 있는 순례길로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 예수의 12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총 800㎞에 이르는 긴 순례길이다. 일본에도 1200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 성지 순례길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훨씬 더 긴 길이다. 일본의 4개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四國) 섬에 있는 88개 절을 순서대로 참배하며 섬을 일주하는 오헨로(お遍路) 순례길이 그것이다. 도쿠시마(德島)현의 1번 사찰인 료젠지(靈山寺)를 출발해 시코쿠를 시계 방향으로 돈다. 총 88개 사찰과 20개의 벳카쿠(別格·번외사찰)를 도는 1400㎞ 장정으로 다 걷자면 보통 45일 정도가 소요된다. 순서의 반대로 돌기도 하는데 정해진 순서대로 도는 것보다 3배가량 힘이 더 든단다. 오헨로 순례길은 원래 스게가사라 불리는 삿갓과 하쿠이라는 수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나무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 이 외에도 염주와 지레이라 불리는 종, 와게사(목에 걸어 가슴에 드리우는 약식 가사), 반야심경을 적은 경본 등 10여 가지 물품을 소지한다. 본인 또는 다른 사람의 소원 성취를 기원하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극히 종교적인 채비다. 본래 종교색이 짙은 길이었으나 최근에는 도보 체험형 관광코스로 알려지면서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산행이나 트레일을 즐기기 위해 이 길을 걷는다. 이 길을 걷기 위해 오헨로를 찾는 이들이 해마다 30여 만 명에 이를 정도다. 이달 초순 시코쿠 관광추진기구의 안내로 제주올레팀과 사흘 동안 오헨로 순례길을 걸었다. 오헨로 순례길이 제주올레와의 ‘우정의 길’ 협약을 맺으면서 이뤄진 첫 번째 행사였다. 내년 1월 두 번째 ‘우정의 길’ 행사는 제주의 올레길에서 열린다.
이른 아침 일행은 기차로 가가와(香川)현 다카마쓰(高松)역을 출발해 30여 분 후 고쿠분(國分)역에 내린다. 신선한 공기가 완연한 가을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첫 번째 방문지는 80번째 사찰인 고쿠분지(國分寺). 시골 마을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절에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즐비하다. 고보(弘法) 대사의 석상을 비롯해 수백 개의 불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연못과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전각들이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을 느끼게 해준다. 순례자의 예를 따라 절 우물에서 손잡이가 달린 바가지로 물을 떠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뜻이리라. 둘러보는 데 30분이 채 안 걸리는 아담한 경내. 노부부 ‘오헨로상(오헨로길을 순례하는 사람)’의 반야심경 암송이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어우러진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한적한 마을길을 빠져나오면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동행이인(同行二人)’이란 팻말이 순례길을 안내하고 있다. ‘두 명이 동행한다’는 뜻이니 가족이나 지인들과 짝을 이뤄 순례를 하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란다. 길을 함께 걷는 ‘두 명’은 순례자 자신과 고보 대사를 뜻한다. 오헨로 순례길은 당나라에서 귀국해 불교 진언종을 창시한 고보 대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수행의 길이다. 고보 대사는 승려인 것 외에도 서도, 교육, 예술, 토목 등 다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슈퍼맨’으로 일본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동행이인의 순례길은 그에 대한 추앙과 자신에 대한 위로를 함께 하며 걷는 ‘동반의 길’인 것이다. 나무 그늘이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높이 400m 산을 오르다 보니 이마에 땀이 맺혀 얼굴로 흐른다. 순례의 고행을 전해주는 듯하다. 안내를 맡은 시코쿠관광추진기구의 다무리 씨의 설명. “여기가 오헨로 순례자들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코스다.” 두 시간 정도 계단길과 급한 경사로를 오르니 비로소 산마루에 다다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느껴진다. 여기서부터 다시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걷는 숲길이 계속된다. 울창한 삼나무 숲의 청량한 기운이 몸과 마음을 맑게 헹구어내는 듯했다. 두 시간 정도 숲길을 내려가니 82번째 사찰 네고로지(根香寺)가 보인다. 사람을 괴롭히는 도깨비를 잡아 뿔을 보관하고 있다는 전설이 담긴 고즈넉한 숲 속의 절. 역시 아름드리 나무가 경내에 가득하니 오랜 시간이 담겨 있는 고찰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815년 고보 대사가 창건해 천수관음상을 본존으로 안치했다고 전해진다. 절 이름은 나무의 뿌리로 조각한 본존 불상이 오래도록 향기를 발산한 데서 유래하였단다. 인왕문(仁王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안쪽 정면에 본당이 있고, 본당 앞 회랑 형식의 관음당(觀音堂)에는 전국 각지의 신자들이 봉납한 3만 구 이상의 작은 관음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작은 불상을 조각하는 데 기울인 정성이 대단하다. 다시 한 시간 산길을 내려 기슭의 마을에 이르니 귤과수원이 펼쳐진다. 노란 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모습이 제주를 닮았다. 적어도 이 구간만큼은 제주의 올레길을 걷는 기분이다. 이쯤에서 13㎞의 순례길을 마무리한다. 5시간 남짓 제법 높은 산을 오르내리며 걸었던 순례길. 무릎이 뻐근하고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전망대 두 곳과 휴게소 한 곳이 있을 뿐 달리 순례자를 위한 시설은 없다.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산길 곳곳에 이정표처럼 자리 잡고 있는 불상들로부터 땀에 대한 위로를 받으며 고행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긴다. 가가와현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우동의 도시’로 이름난 곳이다. 오죽하면 가가와현을 ‘우동현’으로 개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을까? 인구 100만 명에 우동집이 무려 900여 곳이나 된다. 깔끔한 맛이 특징인 사누키우동에서 ‘사누키’란 가가와현이 속한 시코쿠 지방의 옛 이름이다. 사누키우동은 말린 정어리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서 국물이 맑고 맛이 간결하다. 쫄깃한 면 또한 특징이다. 탄력 있는 면발이 주는 식감은 사누키우동을 다른 우동과 차별화한다. 사누키우동은 기본이 되는 가케우동부터 쇼유우동(간장우동), 자루우동, 붓카케우동, 가마아게우동 등 다양하다. 일본의 우동집에서는 후루룩거리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우동을 먹을 때 소리를 내는 것이 예의란다.
태평양과 접해 있는 고치(高知)현을 통과하는 오헨로 순례길에서는 걷기 전에 먼저 아침 해를 만나볼 일이다. 고치현은 구로시오(黑潮) 난류가 흐르는 바다를 끼고 있다. 해류가 흐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해변에는 구로시오 온천이 있다. 이 온천의 매력이라면 노천탕에서 바다 위로 불끈 솟아나는 일출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장쾌하게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깨가 쫙 펴지는 기분이다. 여기서 일출을 감상하며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나서 길을 시작한다면 금상첨화겠다. 고치현의 한적한 시골 기차역인 도시쿠레(土佐久札)역에서 순례길에 올랐다. 추수가 끝난 논길을 따라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이쪽의 순례길은 느낌에 있어 우리나라 남도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감나무들이 가을날의 정취를 물씬 전해 준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손짓으로 일행을 불렀다. 서 이사장이 가리킨 손끝에 순례자들에게 이른바 ‘보시’를 하는 오쿠덴 하쓰코(90) 할머니가 있었다. 이름하여 ‘오셋다이’. 순례길 중간중간에서 순례자들에게 차와 음식 등을 선물하며 스스로 공덕을 쌓는 일을 말한다. 순례길에 오른 이들에게 걷는 것이 종교에 바쳐지는 공덕이라면, 오셋다이를 행하는 주민들이 순례자를 대접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공덕을 쌓는 일이다. 오쿠덴 할머니는 쉬어 갈 수 있도록 나무 의자 몇 개와 테이블을 준비해두고 테이블 위엔 ‘미깡’이라 부르는 귤과 복주머니를 놓아두었다. 할머니는 안 입는 기모노 천으로 복주머니를 손수 만들어 순례자들에게 귤과 함께 선물했다. 호주머니에 넣은 말랑한 귤에서 훈훈한 정이 느껴졌다. 제주 올레 관계자들이 올레길의 표지인 ‘간세’(게으른 조랑말)의 형태로 디자인한 냉장고 자석을 답례품으로 건네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둘째 날의 순례길도 첫날에 이어 숨이 턱까지 차는 계단길이 나타나면서 400여m 고지를 오르는 등산으로 이어졌다. 100여 년 수령의 아름드리 삼나무가 빼곡한 숲길을 따라 12㎞를 걷는 길. 전체 구간 중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약 7㎞ 구간은 맨발로 다녀도 괜찮은 부드러운 흙길이다. 피톤치드가 온몸에 적셔지는 듯하다. 다 걷는 데 3시간 남짓 소요됐다. 마을로 내려서지 않고 줄곧 숲을 따라가는 이 길은 오헨로 순례길 중에 만나는 본격 트레일 코스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타키란 생다랑어를 겉만 살짝 익힌 뒤 회처럼 잘라낸 음식을 말한다. 다타키의 본고장이 바로 고치현이다. 뼈를 제거한 두툼한 다랑어 살을 짚풀 화덕에 짧은 시간 굽는다. 겉은 짚불에 잘 그을려졌지만 속은 진홍빛 횟감 그대로다. 생다랑어 속살을 마치 김으로 싼 듯한 모습이다. 편두부 썰 듯 썰어 쪽파와 마늘, 소스와 함께 담아 낸다. 다타키는 고치가 고향이다. 속살의 부드러운 식감에 짚풀의 향기가 더해진다. # 순례 셋째 날, 주민들의 따스한 차 대접을 받다 셋째 날에는 좀 쉬운 코스를 택했다. 버스로 해발 700m 미사카도게(三坂峰) 정상까지 오른 뒤에 46번 사찰인 조루리지(淨瑠理寺)와 47번 야사카지(八坂寺)까지 10㎞쯤 이어지는 하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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