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과 강원 지역의 첫눈이 대설주의보에 이은 소담스러운 폭설로 쏟아지고 나서 성큼 겨울의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사실 이즈음 여행지를 고르는 일은 한 해 중 가장 어렵습니다. 가을은 지나고 겨울의 한복판은 아직 먼 이즈음의 풍경은 어디든 황량합니다. 단풍은 죄다 낙엽이 돼서 떨어져 버렸고, 폭설로 내린 첫눈도 곧 녹아내리면서 눈부신 설경은 이제 자취도 없습니다. 그런데 초겨울이 더 빼어난 정취를 뿜어내는 곳이 있으니 날이 추울수록 코발트빛이 더 짙어지는 푸른 호수와 차갑게 산굽이를 굽이치는 겨울 강입니다. 흰 입김을 뿜으며 호숫가와 강변에 서면 펜화처럼 서 있는 알몸의 숲 너머로 짙푸른 물색에서 ‘초겨울의 서정’이 느껴집니다. 충북 단양에서 남한강의 물길을 따라 제천의 청풍호로 이어지는 겨울 강을 따라간 건 이런 서정의 풍경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길 위에는 흑백의 농담만으로 그려진 간결한 수묵화 같은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초겨울의 강변에서는 푸드덕거리며 오리떼가 날아올랐고, 호반의 물억새는 겨울 빛에 환하게 반짝거렸습니다. 강변마을의 흰 서리로 뒤덮인 밭 사이의 외딴 집 굴뚝에는 화목 난로의 흰 연기가 낮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날이 추워질수록 사물의 경계는 뚜렷해졌고, 풍경은 세필(細筆)로 그려진 것처럼 선명해졌습니다. 이런 초겨울의 호수와 강변의 풍경들을 가장 아름답게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봤습니다. 그렇게 찾은 자리가 제천의 비봉산과 다불리마을, 단양의 장회나루와 제비봉, 그리고 단양읍에서 고수재 너머 영춘면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이었습니다. 강을 끼고 호수까지 굽이굽이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수평의 시선으로 달리는 여정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그보다 뽀드득뽀드득 잔설을 밟고 수직의 높이까지 딛고 올라가 굽이치는 남한강의 장쾌한 전경과 청풍호의 진청색 물빛을 내려다보는 맛이 몇 배 더 빼어났습니다. 잔설이 흰 뼈처럼 드러난 산자락을 아홉 폭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호수와 강의 푸른 불빛이 어찌나 선명하고 아름답던지요. 다불리마을의 산정에서, 제비봉의 계단 위에서, 겨울 강 굽이치는 영춘면을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내내 독자들에게 그곳으로의 여정을 권할 생각에 가슴이 다 두근거렸을 정도였습니다.
# 단양에서 제천… 겨울 강과 호수를 따라가는 길 겨울 강과 호수를 따라가는 여정의 한쪽 끝을 충북 단양으로, 나머지 한쪽을 제천으로 삼는다. 초겨울 강의 정취야 다른 곳도 이 못지않겠지만, 굳이 단양과 제천을 이은 까닭은 이쪽의 물길이 남한강의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봄볕의 벚꽃과 여름 숲의 초록, 가을의 현란한 단풍의 색감을 다 지워버린 뒤에는 특히 더 그렇다. 흰 뼈만 남아있는 겨울 강과 호수의 풍경만으로 견줘본다면, 이 구간의 아름다움에 명함을 내밀 만한 곳을 찾기 어렵다. 먼저 단양부터. 장회나루와 제비봉에서는 겸재 정선의 그림 ‘인왕제색도’처럼 묵은 종이의 누런 질감 위에 수묵화처럼 치솟은 바위를 굽어볼 수 있다. 영춘면에서는 제법 큰 마을을 거대하게 U자로 굽이치는 빼어난 전망을 만날 수 있다. 제천도 못지않다. 산중의 오지마을 다불리에는 옥순대교를 굽어보는 장쾌한 전망대가 있고, 비봉산 정상에서는 청풍호 너머로 잔설이 뒤덮인 월악산과 주흘산, 황학산의 산줄기를 360도 시야로 품에 안을 수 있다. 한쪽 끝이 단양이고 다른 쪽 끝이 제천이라면 남한강 물길을 따라가는 길은 단양이든 제천이든 양쪽 어디서든 출발해도 좋겠다. 하지만 선택하라면 단양에서 출발해 제천 쪽으로 가는 게 더 낫다. 물길의 순방향으로 흐르는 길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줄곧 오른쪽 어깨 쪽에 강을 끼고 달리는 길이라 단양에서 출발하면 반대편 차선으로 갈 때보다 물과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의 방향을 정했다면 겨울 강과 호수를 따라가는 여정의 출발지점은 단양군 영춘면의 북벽으로 정하고 종착지점은 제천시 청풍면 비봉산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마을을 U자로 굽이도는 단양 영춘 일대의 남한강의 물길에서 여정을 시작해서 청풍호에서 가장 광활한 시야가 펼쳐지는 제천의 비봉산에서 마무리하는 코스다. # 북벽 앞의 강변에서 ‘압도’의 경관을 만나다 영춘면소재지 부근 상리의 느티마을 앞에는 북벽이 우뚝 서 있다. 차고 맑은 물이 거침없이 휘돌아나가면서 바위산 한쪽을 깎아서 병풍 같은 직벽을 완성해놓은 곳이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른바 ‘신단양팔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경관이 범상치 않다. 400m쯤 이어지는 우람한 석벽에다 ‘북벽’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조선 영조 때 영춘현감이었던 이보상이다. 그가 석벽에다 ‘북벽(北壁)’이란 글씨를 암각해 넣었다. 이곳 북벽은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몰려들어 봄의 철쭉과 가을 단풍을 즐기던 명소였다. 멀지 않은 곳에 단양팔경의 명승이 있음에도 옛 선비들이 여기로 몰려들었던 건 단양팔경 못지않은 경관 때문이었으리라. 멀찌감치서 보기에는 별 특별할 것 없어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북벽의 맞은편 백사장에 서 보면 눈앞을 막아선 압도적인 북벽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북벽 일대는 또 정선과 영월에서 베어낸 나무로 뗏목을 엮어 물길을 따라 서울 광나루까지 운반하던 이른바 ‘뗏꾼’들의 소리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던 곳이었다. 영춘면소재지 일대는 남한강이 U자와 S자를 그리며 돌아나가는 자리다. 그 모습을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북벽교 다리건너 강변우회로 쪽이다. 이 길은 차량통행이 워낙 뜸한 곳이라 차선을 막고 차를 세운대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다. 우회로의 고갯마루 도로 위에 서면 물길이 크게 굽어 돌아가는 자리에 영춘면소재지 일대가 마치 섬처럼 봉긋하게 떠 있다. 이곳의 풍경은 특히 노란 외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저물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 푸른 어둠이 드리우는 시간에 잔설로 뒤덮인 강변 마을 집들의 따스한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 풍경 같다. # 소백의 연봉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자리 영춘면에서 단양읍까지는 줄곧 강을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바짝 끼고 달리는 길이다. 시간만 잘 맞춘다면 이 길 위에서 강줄기 너머의 산자락으로 지는 황홀한 낙조를 만날 수도 있다. 길은 가곡면사무소와 덕천교를 지나면서 고도를 높인다. 고수재를 구불구불 넘어가는 길이다. 발치 저 아래로 남한강의 물길이 굽이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달린다. 고갯마루에 당도하기 전에 왼쪽으로 급하게 U턴처럼 꺾이는 샛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좁고 가파른 시멘트 도로를 위태롭게 올라가면 길 끝에 두산마을이 있다. 거기서 산길을 따라 더 가면 두산정상의 활공장이다. 지금은 마을에서 활공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눈으로 덮여있어 두산마을에 차를 세우고 제법 가파른 길을 15분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두산 활공장은 패러글라이딩 이륙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구태여 활공장을 찾아가는 이유는 여기서 소백산의 긴 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 활공장 정상에 서면 흰 눈을 모자처럼 쓰고 있는 연화봉과 비로봉, 국망봉, 신선봉 등 해발 1400m를 넘나드는 소백의 봉우리들이 파도치듯 펼쳐진다. 누구에게든 권할 만한 풍경이지만 두산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이 워낙 좁고 가팔라 눈이 내린 직후이거나 운전에 자신이 없다면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편이 낫겠다. 되돌아 나와 고수재를 넘어가면 이내 단양읍이다. 단양읍을 관통하는 5번 국도를 타고 내처 단성면 쪽으로 물길을 따라가는 길을 가도 좋고, 고수대교를 건너자마자 별곡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도담삼봉을 보고 다시 돌아 나와도 좋겠다. 도담삼봉이야 더 설명할 필요없는 단양팔경을 대표하는 명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면 당연히 들러봐야 할 것이겠고, 몇 번 가봤던 곳이라도 야간조명이 켜지는 해 질 무렵에 찾아가본다면 전혀 다른 멋을 느낄 수 있겠다. 어둠이 먹물처럼 주위를 다 지워버린 자리에 조명을 받으며 홀연히 떠 있는 도담삼봉의 모습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내니 말이다.
# 겸재 정선의 오래 묵은 산수화 속으로 들어가다 단양읍에서 단성면으로 찾아들어 청풍호를 끼고 달리는 36번 국도로 접어들면 여기서부터는 강이 아닌 호수의 풍경이다. 강 건너 말목산 아래로 진청색의 호수가 펼쳐지는 길에는 청풍호를 통틀어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빚어내는 장회나루가 있다. 청풍호 유람선이 들고나는 선착장 이쪽 구담봉의 경관과 호수 건너편 가은산의 거대한 석벽이 겹쳐지는 풍경을 감상하는 자리다. 이 정도의 풍경만으로 감탄이 저절로 나오지만, 장회나루 일대의 경관의 진면목을 보겠다면 뒤로 돌아서서 마땅히 제비봉을 올라야 한다. 호수를 등 뒤에 놓고 제비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호수의 물길을 따라가는 길이니 산을 다 오를 건 없다. 초겨울 호수의 경관을 즐기는 게 목적이라면 짧으면 15분, 길어도 30분이면 족하다. 흙길을 나무로 다져 만든 계단길을 지나서 잠깐 능선을 타면 철제 사다리가 나오는데, 서너 개쯤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내키는 자리에서 뒤로 돌면 산수화에나 나옴 직한 풍경이 펼쳐진다. 너른 시선으로 보면 건너편 말목산과 가은산의 산세와 호수가 한데 어우러져 풍경이 마치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진다. 시선을 당겨서 구담봉과 가은산의 석벽을 들여다보면 볕을 받아 노란빛으로 빛나는 바위에서 마치 오래된 화선지의 질감이 느껴진다. 활엽수들이 다 지고 난 뒤에 석벽에 드리운 바위 그림자와 색 짙은 침엽수들은 마치 붓이 지나간 자리같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 생각해보니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그림과 꼭 빼닮았다. 오래된 화선지같이 바랜 듯한 바위색이 그렇고 절묘하게 솟은 암봉의 형태가 또 그렇다. 그 오래된 그림 속으로 날렵한 유함선이 떠가는 모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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