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28

醉月 2013. 11. 27. 09:57

뼛속 스며드는 맑은 기운 혼을 깨우는 대쪽 선비 정신

경북 봉화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봉화 닭실마을.

 

경상북도의 최북단 봉화군은 북쪽으로 소백산을 사이에 두고 단양군과 마주하며 서쪽으로는 영주시, 남쪽으로 안동시와 이웃한다. 동쪽의 울진 땅을 건너면 동해 바다다. 봉화를 찾는 이들은 대개 단양과 영주를 거치지만, 내가 디디는 행로는 안동의 도산서원을 거쳐 북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따라서 내게는 안동, 봉화의 접경을 이루는 청량산이 곧 봉화 땅으로 드는 관문이다.

 

찻길이 홀연 강줄기와 나란히 하는 데서부터 눈에 잡히는 산봉들의 모습이 범상치 아니하다. 높고 기이한 산을 더욱 훤칠하게 하는 이 강줄기가 바로 청량산 기슭을 돌아 이현보 종택 앞으로 흘러가는 낙동강 최상류 물길이다. 강줄기는 이어 이육사 시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른 뒤 퇴계 선생의 묘소 뒷산을 휘감아 돌고 도산서원을 거쳐 안동호로 든다. 빼어난 산수가 인걸을 낳고 키운다는 말은 이 산과 이 물길에서 실감하게 된다.

 

화려한 산의 자태는 강을 건너 산의 품 속에 든 뒤에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산길이 제법 길고 경사가 있지만 청량사까지는 누구든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데, 이곳 절 마당에서 마주하는 산 풍경이 실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반공(半空)에 솟은 산봉우리들은 마치 푸른 바다에 뜬 돛배 같기도 하며, 햇빛을 반사하는 너럭바위와 무성한 숲은 출렁이는 수면 같다.

맑은 가을날의 청량산은 말 그대로 만산홍엽이다. 눈길 가는 데마다 선홍빛, 주황빛 단풍이 드리워져 산속에 든 이의 속살마저 붉게 물들일 듯싶다. 절 뒤편에 난 등산로는 단풍 터널과 다를 바 없다. 단풍에 취하며 걷다보면 더욱 놀랍고 황홀한 경치를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땀 흘린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분의 복이다. 이른바 6.6봉(12봉우리)의 빼어난 풍광이 차례로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청량산에 기대는 마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인봉은 청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870m)다. 가장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먼 데서도 위용이 선연한 그 봉우리다. 정상에 서면 발 아래로 병풍처럼 늘어선 기암절벽들이 내려다보이고, 먼 데의 크고 작은 산들은 물론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장인봉 동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선학봉이다. 청량산 열두 봉우리의 이름은 조선시대의 유학자 주세붕이 풍기군수를 지내던 때 직접 이곳을 유람하며 지었다고 전하는데, 이 봉우리가 마치 학이 날아오르는 듯한 형세를 하고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산은 그 자체로 위엄과 기품을 갖기도 하지만, 명류의 문필과 언사에 힘입어 이름값을 더하는 경우도 많은데 청량산도 예외는 아니다. 주세붕뿐만 아니라 신라의 명필 김생과 문장가 최치원이 이 산을 거들고 있는 데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학자 이퇴계가 화룡점정의 훈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何處無雲山

어딘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마는 淸凉更淸絶

청량산이 더욱 맑고 빼어나다네 亭中日延望

정자에서 매일 이 산을 바라보면 淸氣透人骨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네

-퇴계의 시 ‘망산(望山)’

 

청량산에 관한 퇴계의 여러 시문 가운데서도 그 애정이 가장 짙게 드러나는 시편이기에 이 시는 청량사 경내의 돌에도 새겨져 있다. 퇴계에게 산수는 자신의 학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라서 산수는 언제나 반성과 규범의 대상으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 지고한 가치는 맑음과 꼿꼿함(淸絶)인데 이는 곧 퇴계 자신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퇴계가 청량산을 주희(朱熹)가 머물던 중국 무이산(武夷山)으로 자주 상정하곤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평생 주자를 공부하면서 스스로 그 세계를 더 넓고 깊게 했던 퇴계는 실제로 무이산을 가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여 자신의 이상향 무이산을 청량산으로 옮겨올 도리밖에 없었다.

 

 

 

봉화 닭실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

 

수년 전, 나는 퇴계보다 수백 년 늦게 태어난 이로움 하나로 중국 푸젠(福建)성에 있는 무이산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 눈부신 경치를 보는 가운데도 자주 퇴계와 청량산을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마지막 여정으로 들른 주자의 서당, 그리고 뜻밖에도 서당 한쪽 벽면에 걸린 퇴계의 초상을 봤을 때의 놀라움과 반가움이란! 아, 마침내 선생께서도 예까지 오셨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가졌다. 극진한 데 이른 이들은 마침내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악수하고 함께 소요한다는 사실 말이다.

 

金鷄抱卵의 길지

 

봉화 청암정.

 

영남 유림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안동, 영주 지방엔 향교, 서원과 함께 정자가 많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이 두 지역을 남서쪽으로 접하는 봉화는 특히 정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현재 남아 있는 옛 정자만도 103개에 달한다고 하니, 이는 그만큼 이 땅의 산수가 빼어나고 옛 선비들의 걸음이 잦았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봉화의 정자 중에서도 형식구조상 가장 빼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청암정은 봉화읍 ‘닭실마을’에 있다.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마을 뒤편을 두르고 있으며 앞으로는 개천이 휘감아 돌면서 너른 들판을 펼쳐놓고 있는 마을이다. 들판 쪽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의 형국이라고 해서 일찍이 ‘닭실’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현지인들은 ‘달실’이라 더 많이 부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안동의 내앞마을(천전리), 풍산의 하회, 경주의 양동과 함께 삼남의 4대 길지로 꼽았다. 이런 선입관 탓인가. 마을을 보며 마을로 들어가는 걸음걸이가 절로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푸근해지는 느낌이다. 규모와 함께 모양새까지 제대로 갖춘 기와집들이 각기 제 앉을 곳에 앉아 있고, 턱없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흙돌담들이 마치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듯이 바깥 길, 안길을 나누고 있는 풍경 또한 친근하고 어여쁘다. 잘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들판과 쏟아지는 가을 햇살만으로도 모든 것이 넉넉해 보이는 마을이기에 무슨 무슨 드라마, 영화의 촬영지였다며 큼지막하게 서 있는 입간판쯤은 되레 흉물스러워 보인다.

 

청암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권벌의 종택과 함께 마을 한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담장과 안쪽의 무성한 나무들로 인해 바깥에서는 정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작은 쪽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어느 늪지대에 온 양 오래된 물 냄새가 먼저 후각을 자극한다.

 

옛 선비가 글을 읽던 독서당을 지나 몇 발자국을 옮기면 청암정 정자다. 사방 날개를 쳐든 형세의 팔작지붕 정자가 큼직한 바위 하나를 올라타고 있다. 바위는 물길로 둘러싸여 있다. 오랜 풍상을 담은 고목들이 연못에 허리를 걸치기도 하고 뿌리를 내밀고 있기도 하다. 사람이 정자로 오르는 길은 오직 하나, 물길에 걸쳐놓은 좁은 돌다리뿐이다. 서너 걸음이면 금방 건널 수 있는 물길. 그러나 막상 정자가 있는 바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마치 피안의 세계에라도 온 듯 아연 저편 세상이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기록에 따르면, 권벌은 1526년 거북 모양의 이 너럭바위에 정자를 세웠다. 둘레에 연못을 파는 바람에 바위는 물에 떠 있는 거북 형상이 됐다. 전하는 얘기가 재미있다. 청암정을 처음 지었을 때만 해도 둘레엔 연못도 없었고 정자의 마루방도 온돌 구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방에 불을 넣을라치면 바위가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나. 때마침 지나가던 승려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바위는 거북 형상인지라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같으니라. 그래서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서 물길을 돌렸다.

 

돌다리를 건너 정자로 올라가는 형식 또한 이상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옛사람들의 소박하면서도 천진한 세계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일 수도 있지만 우리 현대인이 잃어버린 꿈의 원형이 이런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권벌은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선 뒤 이조정랑, 직제학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지만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고향에 돌아와 살던 그는 15년이 지나 다시 조정에 나가 형조참판, 병조판서를 지냈다. 1545년 소윤 윤원형의 세력이 대윤 윤임의 세력을 축출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탄핵을 받아 파면됐다. 몇 해 뒤, 함경도 삭주로 귀양 갔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래미 마을 만회고택.

 

청암정 마루에는 이황, 채제공, 이광정 등 여러 명현의 글을 새긴 현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허목이 쓴 ‘靑巖水石’ 현판 글씨가 이름 높다. 허목이 이 글을 쓸 때가 88세. 곧이어 세상을 떠났으니 이는 곧 그의 절필이기도 한데 글씨의 기운은 놀랍도록 당차고 굳건하기 때문이다.

 

 

 

 

 

바래미 마을의 忠節


목을 걸고도

굴하지 않던 선조의 혼이

샘물 되어 마르지 않고 있었다


하늘에서 하늘빛으로 살던 혼은

이승이 근심스러워 밤이슬로 내려와

바래미 뒷산 청청한 소나무 뿌리에

머물다가 샘물 되어 있었다


세월이 이끼 되어 고풍스런

내리사랑이 끊이지 않는 마을


죽어도 눈감지 못한 혼은

이승에 까치로 태어나

아침마다 감나무에 내려앉아

까악까악

후손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하덕조의 시 ‘바래미’ 전문

 

‘바래미’는 봉화읍에 있는 한 마을의 이름이다. 해저리(海底里)의 또 다른 이름인데 ‘바다 밑’이란 뜻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 일대의 지대가 낮아서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위의 시가 들려주는 바래미의 자랑은 대대로 이어지는 조상들의 후손에 대한 내리사랑이다. 나라와 후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조상들은 하늘에서 하늘 빛 혼령으로 떠돌다가도 이승이 걱정스러우면 샘물이 되어 혹은 까치로 태어나 후손의 영혼을 흔들어주는 것이다. 산골의 작은 마을에 이런 엄숙하고 거창한 시어들이 동원되는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바래미는 독립유공자를 14명이나 배출한 애국 충절의 마을이다. 마을에는 이들 기개 높은 지사들이 마셨던 샘물이 있다. 큰샘이라고 불리는 이 샘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찬물이 나오는 명천으로 알려져 있다.

 

바래미 항일독립운동은 이곳에 생가를 둔 심산 김창숙이 1919년 마을 안 만회고택에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만국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면서 시작됐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사건 때도 마을에서는 황소 쉰 마리 값을 모아 김창숙에게 전했는데, 뒤늦게 이 일이 발각되어 온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왜경의 감시와 핍박은 더욱 심해졌지만 선조의 애국충정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들이 비밀결사단체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펼쳐나갔다. 1933년 발각되어 많은 고초를 겪은 ‘독서회 사건’이 그 예다.

 

조상들의 충절을 기리는 듯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무궁화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반듯반듯한 골목길과 황토를 바른 흙담들도 여느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분여 마을 안길을 걸으면 만회고택을 만날 수 있다. 만회 김건수 선생이 건립한 전통 와가인데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다.

이웃한 남호구택은 이 지역 부호 남호 김뢰식이 살던 집이다. 그 또한 상해임시정부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때 전 재산을 저당잡혀 자금을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92년 경상북도의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된 사실에서 보듯이 바래미 마을은 전통의 양반촌을 대표하는 마을이다. 의성 김씨 세거 집성촌인 이곳에 처음으로 김 씨의 뿌리를 내린 입향조는 김성구인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현재 마을에는 중요민속자료인 만회고택을 비롯해 ‘개암종택’ ‘해관구택’ 등 문화재로 지정된 옛집만도 여섯이나 된다. 따라서 바래미는 경북 북부지방 유교문화의 보고(寶庫)인 동시에 대쪽 같은 선비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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