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무등산 단풍기행

醉月 2013. 11. 14. 01:30

광주 무등산 원효계곡의 정자 풍암정으로 이어지는 숨 막힐 듯한 단풍숲길. 풍암정 주위의 계곡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는 단풍나무가 사라진 뒤, 그 정취를 기억하기 위해 정자로 드는 길에 심은 단풍나무들이 이렇듯 찬란하게 자라났다. 물감을 엎지른듯 치렁치렁한 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호젓한 이 숲길 위로 지금 가장 황홀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사화(士禍)의 시대였던 조선 중기. 남도 땅에 한때 전쟁의 영웅이었으되
역모의 굴레를 쓰고 억울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갔던 한 선비가 있었다. 김덕령.

‘양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는 전설을 후광처럼 두르고 다녔던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그러나 김덕령의 ‘충(忠)’을 선조는 역모 가담의 죄목으로 얽어매는 것으로 되갚았다.
음모는 집요했고, 심문은 가혹했다. 선조가 묻는다. “어서 역모를 자백하라.” 김덕령이 답한다.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
김덕령은 자신의 억울함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형틀에 매인 채 여섯 번의 지독한 심문을 받던 그는 형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비통하고 억울한 죽음이었다.
그가 죽고 난 뒤 백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과 핍박이 모두 그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믿었다.
영웅의 죽음을 애달파했고, 더러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많은 김덕령의 전설이 만들어진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죽었지만 날개 단 호랑이로, 단숨에 산을 뛰어넘는 장수로 백성들의 꿈에 출몰했다. 화려한 입신양명의 영광은 좀처럼 당대를 건너가지 못하지만, 억울한 누명과 비통한 죽음은 안타까움 속에서 오래 전설로 남는 법. 그의 죽음이 그랬다.

죽여서 이긴 자는 끝내 졌고, 죽어서 진 자는 종래에는 이긴 셈이었다.
광주광역시와 전남 담양이 만나는 무등산의 동쪽 자락에 그의 자취가 깊게 새겨져 있다.
그 길을 아껴 두었다가 지금 찾아가는 이유는 거기가 이 계절에 가장 화려하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해서 한편으로는 처연하고 아름다운 곳. 사당과 정자를 잇는 그 길에 깊은 가을의 핏빛 단풍이 한창이었다.
지난 주말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이번 주말쯤이면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정점의 순간을 지나가리라.
거기서는 단풍이 그저 풍경으로만 독해되지 않는다. 덧대진 역사와 사람의 향기로 그곳의 단풍은 더 잠엄하고 비장하게 불붙는다.

그래서일까. 누구든 최고라 일컫는 내장산보다 그곳의 단풍이 더 깊고 짙었으며 가을볕은 더 찬란했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호젓하기까지 했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 배웅하고 싶거든, 그곳을 찾아갈 일이다. 거기에 지금 가장 화려한 단풍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으니….

풍암정으로 드는 길가의 자그마한 저수지 풍암제의 모습. 이른 아침 바람이 정지한 순간, 붉고 노랗게 물든 가을 숲이 거울같이 고요한 수면 위에 그림자를 찍어냈다.


# 풍암정, 세상을 등진 아름다움

광주 무등산의 북쪽자락. 김덕령의 자취를 순서대로 밟자면 원효계곡의 정자 풍암정은 뒷부분에나 등장해야 하겠지만, 거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곳의 경관이 가장 빼어나기도 하거니와 지금 풍암정으로 드는 부드럽게 굽어지는 길이 온통 단풍으로 불붙어 있으니 행여 그 단풍이 지고말까 싶어 마음이 바쁜 탓이다.

풍암정. 단풍(풍·楓)과 바위(암·巖)로 이름을 삼은 이 정자의 주인은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중으로 바람처럼 찾아든 김덕보였다. 김덕보는 김덕령의 동생이다. 그는 왜 여기로 찾아들었던 것일까. 기록을 뒤적여 보자.

형 덕령이 역모에 연루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단숨에 한양으로 올라갔다. 형이 갇힌 의금부 앞에서 뜬눈으로 엿새를 기다렸다. 역모 죄의 처단은 가혹한 법. 연루되면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사돈과 친구까지 모조리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만일 형이 진짜 역모에 가담했다면 그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러나 그는 숨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1596년 8월 21일. 드디어 의금부 문이 열리고 형 덕령은 시신이 돼서 들것에 실려나왔다. 전장의 벼랑 끝으로 나아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의병장을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했던 선조가 역모의 이름으로 처단했던 것이었다.

동생 김덕보는 형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열흘을 걸어 고향 광주 땅으로 돌아왔다. 역적의 시신을 수습하고 옮기는 일도 참형을 면치 못하는 중죄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주 석저촌의 차가운 땅에 형을 묻었다. 덕보는 이미 두 해 전에 큰형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잃은 터였다. 전란의 와중에 두 형을 다 잃은 슬픔은 그를 삼켰다. 형을 죽인 세상도, 임금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지리산으로 몸을 숨겨 밭을 갈고 날품을 팔았다. 철저한 은둔이었다. 그렇게 6년을 사라졌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세운 정자가 풍암정이었다.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길을 앞에 두고 있는 풍암정은 푸른 이끼로 뒤덮인 바위 사이의 수묵의 그림 같은 공간에 세워져 있다. 광주와 담양 일대의 정자 중에서 단 한 곳 소쇄원만 뺀다면 가장 빼어난 정자로 꼽기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다. 정자는 전나무와 노송 사이에 세상을 등진 선비의 형형한 눈빛처럼 빛난다. 그러나 풍암정의 진짜 아름다움은, 지금은 자취도 없지만 주위의 단풍이었던 모양이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 그가 풍암정에 들렀다가 남긴 글을 보자. “수많은 기암괴석 사이에 100그루가 넘는 단풍나무가 끼어 있어 시냇물조차 붉게 물들었다. 수석의 빼어난 경관을 비교해 보면 모두 이곳을 따를 수 없다.” 담양 일대의 소쇄원과 식영정 등 이름난 정자를 두루 둘러보았을 그가 “‘모두’ 이곳을 따를 수 없다” 했을 정도였으니 단풍에 물든 가을날 풍암정의 옛 정취는 얼마나 뛰어났던 것일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긴 하지만, 100그루가 넘었다는 단풍나무를 둘러친 풍암정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원효계곡의 이끼 낀 바위 틈새에 세워진 풍암정의 모습. 세상을 등진 채 은거했던 선비의 형형한 정신이 묻어나는 곳이다.


#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만날 수 있는 자리

풍암정 주위에 있었다는 단풍은 지금 풍암정으로 드는 길 위에 있다. 풍암정의 김덕보를 기억하기 위해, 형 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또 정자 주변의 황홀했던 단풍을 잊지 않기 위해 오래전에 일부러 심어둔 것들이다. 그렇게 심어 기른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나 어둑한 터널을 이루고 있다.

풍암정을 찾아가려면 차량용 내비게이션이나 네이버 같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지도 서비스는 무용지물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지에 풍암정을 입력하면 약속이나 한 듯 인근의 시멘트 농로를 빙빙 돌다가 논바닥 한가운데 엉뚱한 자리로 데려다준다. 먼저 무등산분청사기박물관을 찾고, 거기서 비포장 외길을 따라 들어가면 풍암정을 찾아갈 수 있다. 박물관에다 차를 세워두고 풍암정까지의 1.5㎞ 남짓의 인적 드문 그 길을 걷는다면 거기서 이 가을 최고의 단풍을 만나게 된다.

여기의 단풍나무는 치렁처렁 가지와 잎이 유난히 풍성하다. 다른 단풍 명소들의 여윈 단풍나무들과는 아예 격이 다르다. 길 양쪽으로 가지를 뻗은 단풍나무가 서로 손을 맞잡고 하늘을 가린다. 단풍이 어둑한 터널을 만든 형국인데 그 붉은 터널 속을 걸으면 마치 굵은 붓으로 찍어낸 붉은 물감이 어깨로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게다가 이 길에는 호젓함까지 더해진다. 그러니 단풍 행락객의 물결과 트로트 유행가로 떠들썩한 내장사와 백양사의 단풍 길보다 능히 한 수 위라 할 수 있겠다.

지난 주말에는 풍암정으로 드는 길 끝은 물든 단풍으로 화려했지만, 초입의 단풍나무들이 아직 초록의 기운이 남아있었다. 그러니 초겨울 추위가 막 지나간 딱 지금부터 이번 주말쯤까지가 이 길 위의 단풍이 정점을 지나는 시간이겠다.

그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는 매혹적인 풍경 하나 더. 풍암정으로 드는 길가에는 자그마한 저수지 풍암제가 있다. 고요한 저수지 뒤편으로 멀리 무등산의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가까이로는 수면 위로 물가의 노랗게 물든 단풍이 도장처럼 찍히는 자리다. 바람에 수면이 일렁이는 낮보다는 바람이 자는 고요한 아침 이른 시간쯤에 풍암제 제방에 서본다면 물에 비친 단풍의 색감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음이 새삼스러워지리라.

의병장 김덕령의 묘소와 영정을 모신 제각이 있는 충장사. 여기도 지금 불붙은 단풍이 한창이다.


# 억울한 죽음이 여태 살아남은 까닭

풍암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김덕령을 기리는 사당인 충장사가 있다. 석저촌에서 김덕령의 묘를 옮겨오고 번듯한 건물을 지어 유물관과 그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1974년 유족들이 정부보조금 200만 원으로 기단을 지었고, 때마침 광주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족들의 건의를 받아 즉석에서 2000만 원 지원을 결정해 지어진 게 지금의 충장사다. 박 전 대통령의 이런 결정이 군부권력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뤄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수근거렸지만, 지금도 충장사의 영정 앞에는 하루도 향불이 꺼지지 않는다.

김덕령이 처음 역적의 모함에서 풀려난 건 그가 죽은 지 65년이 지난 뒤였다. 전국에 기록적인 가뭄이 들어 민심이 돌아섰을 때 현종은 전국 8도에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 전말을 보고하도록 했다. 흉흉한 민심을 되돌리려는 방편이었다. 그때 전라도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올라왔고 현종은 그의 면죄를 허락했다. 현종은 죽은 김덕령에게 병조참의란 벼슬을 내렸고, 이어 숙종이 병조참판의 벼슬을 더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 하나. 그의 죽음이 그랬듯이, 그가 죽은 뒤에 이뤄진 명예회복도 어쩌면 민심을 되돌리려는 방편이나,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려는 권력자들의 입맛과 필요에 의해 이뤄진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정조 임금은 달랐다. 정조는 김덕령에게 시호 충장공과 정려비를 내렸고, 종1품인 좌찬성 벼슬을 줬다.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친히 충효리라 지었으니, 그 이름이 지금까지도 충효동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충효동에는 거대한 왕버드나무 세 그루가 ‘김덕령나무’의 이름으로 여태 살아있다.

오래전에 한 사람이 죽었지만, 그 죽음은 억울함으로 아직 살아남았다. 김덕령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적잖은 전과를 올리긴 했으되 따지고 보면 혁혁한 대승을 올린 건 아니었다. 김덕령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시기는 마침 임진왜란에 명이 개입하면서 일본과 종전회담을 벌이던 중이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말로 싸우고 있던 때였으니 적에 대한 도발이나 공격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억울함’ 때문이 아닐까. 억울한 삶을 살았던 백성들이 끝내 그의 죽음을 잊지 못했고, 지금도 그의 영정 앞에 향불을 사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충장사에는 지금 가을이 가득 고여 출렁이고 있다. 담장 곁의 단풍나무들이 선혈처럼 잎을 떨구고 있고, 중문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노란 은행잎이 융단처럼 깔렸다. 거기 깃든 의미를 지워버리고 풍경만으로 본다 해도 놓치기 아쉬운 곳이다.

# 술 취해 부르는 노래를 듣다

김덕령을 따라가는 행로에다 두 곳을 더 보탠다. 그중 하나가 환벽당 부근의 취가정이다. ‘취가(醉歌)’라면 ‘술 취해 부르는 노래’란 뜻이다. 취가정은 평생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고 시를 짓고 은둔했던 선비 권필과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소박한 정자다. 권필과 김덕령. 이 두 선비는 무슨 인연이었을까. 김덕령이 죽고난 뒤의 일이다. 어느 밤 권필은 꿈속에서 죽은 김덕령의 시집을 얻는다. 꿈속의 시집에 김덕령의 시가 있었다. “취했을 때의 이 노래는 아무도 듣는 이가 없어라”로 시작하는 시였다. 권필은 꿈속에서 읽은 김덕령의 시를 써서 남겼다. 이름하여 ‘취시가(醉詩歌)’다. 그게 진짜 꿈속의 김덕령의 시였는지, 아니면 권필이 김덕령의 감정에 이입해 지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사실 권필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광해군의 외척을 빗대 힐난하는 시를 지었다가 조정으로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 들것에 실려서 풀려나긴 했지만 석방된 이듬해에 숨을 거뒀다. 김덕령은 선조가 죽였고,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죽였다. 이렇게 죽은 두 선비는 저승에서나마 함께 술상을 받았을까. 취가정이란 이름처럼 거나하게 취해서 노래 한 소절 함께 불렀을까.

한 칸짜리 방을 들인 정자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쌓인 낙엽을 하릴없이 뒤적이면서 가을바람이 지나갔다. 다들 잎을 떨궜지만 수양버드나무 한 그루만 늘어진 가지에 아직 초록의 잎을 단 채 취한 듯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김덕령의 비극은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죽은지 이태 뒤에 그의 부인 흥양 이 씨가 담양의 추월산 8분 능선의 아슬아슬한 벼랑 위의 암자 보리암에서 몸을 던졌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쫓기던 부인은 까마득한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죽음으로 남편의 뒤를 따른 것이 었다. 담양호를 끼고 있는 추월산은 ‘가을 추(秋)’에 ‘달 월(月)’을 쓰는 산답게 가을 그윽한 단풍의 정취가 가득한 산이다. 화려한 단풍은 없지만, 그윽하고 소박하다. 보리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사다리를 덧댔어도 가파르기 그지없다. 숨이 턱에 차서 오른 암자에서 담양호를 굽어보는 자리. 여기서 400여 년 전의 서러운 죽음과 꼬리를 물고 이어진 비극과 그의 죽음의 억울함에 함께 가슴을 치던 백성들을 본다. 죽어서 다시 살아난 단단했던 한 사내의 삶을 본다. 바야흐로 핏빛으로 물든 단풍이 죽음처럼 비장하게 떨어지는 가을의 끝자락이다.


풍암정 가는 길=호남고속도로 동광주톨게이트를 지나 문흥분기점에서 제2순환도로로 갈아탄다. 이어 무등산, 두암지구 쪽으로 이어지는 무등로를 따라 지산유원지 입구에서 무등산, 충장사, 가사문학관 방면으로 좌회전해 무등로를 따라가면 원효계곡을 따라 풍암정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나게 된다. 내비게이션에 풍암정을 입력하면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주니 주의하자. 무등산분청사기박물관이나 전시실을 입력해 찾아가는 게 가장 간명하다. 충장사와 충효동, 취가정 등이 인근에 있어 걸어서 다 돌아볼 수 있다. 충장사에서 시작해서 취가정까지 이어지는 ‘무등산 역사길’을 걸으며 도보여행으로 돌아볼 수도 있다. 담양의 추월산은 담양호를 가운데 두고 순창의 강천산과 마주 보고 있다. 추월산도 담양과 순창에 걸쳐져 있는데, 보리암을 찾아가려면 담양 쪽에서 올라야 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광주의 무등산 자락에 있는 신양파크호텔(062-228-8000)이나 무등파크호텔(062-226-0011)이 맞춤한 숙소다. 호텔이 좀 낡긴 했지만 두 호텔 모두 인터넷 호텔 예약 사이트를 통하면 조식을 제외하고 10만 원쯤에 묵을 수 있다. 두 호텔 중에서 굳이 권하자면 광주시내의 야경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신양파크호텔 쪽이 좀 더 낫다. 무등산 아래 지산유원지 쪽에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명선헌(062-228-2942)은 고급스러운 한정식을 내는 식당이다. 홍어부터 병어구이, 낙지무침, 떡갈비 등이 다양하게 차려진다. 4인 기준 한 상에 16만 원. 손님이 3명이나 2명이어도 ‘한 상’부터 주문을 받으니 4명을 맞춰서 가야 한다. 부근의 남가정(1688-6634)은 떡갈비 한정식으로 유명한 곳. 퓨전 한정식은 1인 1만5000원, 2인상부터 주문을 받는다. 동원게장백반(062-223-7200)은 상호 그대로 게장을 내는 백반집. 간장게장과 고추장게장을 함께 내는데 모자라면 게장을 더 내준다. 내놓는 게의 크기가 작긴 하지만 1인 8000원으로 게장백반치고는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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