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20

醉月 2013. 11. 11. 12:42

공자는 아들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과정시례

▲ 작자 미상, ‘과정시례’ 곡부문물출판사
40대의 공자는 어떻게 살았을까. 본인 스스로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후부터 ‘불혹(不惑)’은 사십의 대명사가 됐다. 불혹의 주인공이 공자다. 공자는 안영(晏嬰)의 반대로 제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하고 노나라로 귀국했다. 37세 때였다. 귀국한 뒤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스승으로 모시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치인이 돼 자신의 포부를 펼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공자는 귀족 가문인 삼환(三桓)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자 관직에 나아갈 마음을 접었다. 그는 황금 같은 40대를 제자 양성과 공부하는 것으로 보냈다. 공자는 물가를 거닐며 제자들에게 물의 덕을 가르쳤고 그들의 포부를 물어 꿈을 키워줬다.

가르치는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다 보니 많이 알게 됐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알다 보면 자연스레 자기 나름의 체계가 생긴다. 박학다식해진다. 공자가 그랬다. 공자는 자신을 ‘많이 배워서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배운 것들을 하나로 꿰뚫고(一以貫之)’ 있는 사람이라고 자평했다. 한 우물만 계속 파다 보면 나름대로의 안목과 통찰력이 생기는 법이다. 사람들은 이상한 물건이 발견되면 공자에게 물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말(馬), 붉은 새, 특이한 과일에 대해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일이관지’하며 공부하는 틈틈이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를 편수했다. 14년 동안 공자의 생활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 세월이 오죽했으랴.

이것은 필자 같은 후대 사람의 생각이고 공자는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부(富)라는 것이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들고 길을 트는 자라도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만일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따르겠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부유함과 마찬가지로 귀하게 되는 것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공자는 그것이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면 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막연하게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이끌리듯 살아야 할까.

아니다. 준비를 해야 한다. 언제라도 누가 부르면 달려 나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공자는 “장인이 자기가 맡은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의 연장을 날카롭게 해놓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렇게 연장을 갈고 기다려도 다른 사람이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원망해서는 안 된다. 공자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력 없음을 걱정하라”고 가르친다. ‘논어’에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지위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근심하라’라거나 반대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줄 만하도록 되는 것을 추구하라’고 깨우친다. 이것은 ‘자신에 대해서는 엄중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가볍게 책망’하는 삶의 철학이다. 이런 철학이 있어야만 ‘원망을 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실천하기가 쉬운가.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하고 있어도 세상이 나를 써 주지 않으면 준비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학맥과 인맥이 얽히고설킨 세상에서 백 없고 돈 없는 사람은 무슨 수로 출세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자신이 불행한 원인을 온통 세상 탓으로 돌릴 때 공자는 “군자는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고 일갈한다. 공자의 준엄한 가르침은 그뿐만이 아니다. 공자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군자 되기를 다그친다. 군자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자신의 기량만 펼치고 싶다는 소인에게 거듭 자족하라고 충고한다. 그게 과연 가능한 걸까. 어쩌면 이 말은 무너지려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공자가 스스로에게 다짐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의 가르침을 찾아 수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남에 대한 가르침은 그렇다고 치고 공자는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과정시례(過庭詩禮·정원을 지나가며 ‘시경’과 ‘예기’를 가르치다)’는 공자가 아들 공리(孔鯉)에게 공부에 대해 묻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공자가 정원에 홀로 서 있을 때 아들 공리가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공자가 아들을 불러세우고 물었다. “‘시경’을 공부하였느냐?” 공리가 대답했다. “아직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시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사람과 사귀지 못한다.” 아버지의 걱정을 들은 공리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와 ‘시경’을 공부했다. 며칠 후 또 공자가 정원에 홀로 서 있었다. 아들 공리가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공자가 공리를 불러세우고 물었다. “‘예기’를 공부하였느냐?” 공리가 대답했다. “아직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예기’를 공부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처세할 수 없다.” 공리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와 ‘예기’를 공부했다.

부모에게 모든 자식은 다 귀하다. 많은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한 이유도 귀하고 귀한 자식이 행여 불행해질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성인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공자 또한 자식의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공자가 자식이 몇 명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들 공리 외에 딸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논어’ 공야장에 보면 ‘비록 포승줄에 묶인 채 감옥 안에 있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은 공리 외에 언급된 바가 없다. 그렇게 귀한 아들을 가르치는 교육 현장이 ‘과정시례’다. 그런데 어째 조금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담백하다 못해 심심하다. 당시 공자는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 정도 인물이라면 자신의 아들에게 뭔가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은 필자같이 소견 좁은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당시 공자의 제자 중에도 필자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논어’ 계씨에는 ‘진항(陳亢)’이라는 사람이 공리에게 아버지로부터 “뭔가 특별한 것을 들었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나온 대답이 위의 이야기다. 공리의 대답을 들은 진항은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물러나 기뻐하면서 말했다. “하나를 물어서 셋을 얻었으니 시를 얻었고, 예를 들었으며, 또 군자가 그의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항이 진짜 얻고 싶었던 답은 세 번째였으리라. 진항의 태도는 ‘자신의 능력 없음을 탓하라’는 공자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그런 모습이 어찌 진항뿐이겠는가.

공리는 ‘공자성적도’에 두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는 공리가 태어났을 때 노나라 군주 소공(昭公)이 잉어(鯉魚)를 하사해서 이름을 리(鯉)로 지었다는 ‘명명영황(命名榮貺)’ 장면 때 등장한다. 두 번째가 위의 ‘과정시례’ 때다. 공리는 50세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공자의 사상은 공리의 아들인 손자 급(伋)에게 전해졌다. 급은 자(字)가 자사(子思)로 남송 유학자 주희(朱熹)에 따르면 자사가 ‘중용(中庸)’을 지었다고 한다. ‘과정시례’의 이야기는 발전을 거듭해 후세에는 ‘정훈(庭訓)’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 됐다. 공자의 정훈은 ‘시경’과 ‘예기’를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귈 수 있고 세상에서 처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려준 가르침이다. 공자의 정훈은 지금도 유효한가. 한번 실험해 볼 일이다

 

불혹의 공자가 강물을 보고 생각한 것은
증점욕기

▲ 양기성, ‘증점욕기’ 만고기관첩, 종이에 연한 색, 37.9×29.4㎝, 일본 대화문화관
비가 쏟아진다. 쉴 새 없이 온다. 피해가 심각하다. 우리뿐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다. 쓰촨성에서는 폭우로 수백 명이 사망했고 이재민 200만명이 생겼다고 한다. 필자는 7월 초에 동(東)티베트를 다녀왔다. 쓰촨성 청두(成都)공항을 출발해 루얼까이 대초원을 본 후 마지막에 지우자이거우(九寨溝)에 있는 지우황공항에서 청두공항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지우황공항을 떠나 청두공항으로 향한 직후부터 폭우가 시작됐다. 버스로 이동했던 도로는 물에 잠겨 끊어지고 건물은 물속에 둥둥 떠 있는 지경이 됐다. 하루만 일정이 늦었어도 지우황공항에서 출발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하마터면 이 땅을 밟지 못하고 수장될 뻔했다. 물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지만 수많은 생명을 순식간에 빼앗아가기도 한다. 이런 물을 보고 공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공자는 노(魯)나라에 돌아온 후 기존의 흩어진 서적을 다시 쓰고 제자를 가르치며 불혹의 나이를 맞았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주로 묻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가르치는 틈틈이 그는 자주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제자 자공(子貢)이 강물을 바라보는 까닭을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강물이 흘러가는 것은 끊임이 없는데, 이것은 도(道)가 전승되고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물의 흐름에는 이와 같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으니, 군자는 흐르는 강물을 반드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물을 보며 도를 생각했다. 필자가 폭우를 피해 목숨 건진 것만을 운 좋게 생각할 때 공자는 물이 가진 덕과 물의 원리를 들여다볼 줄 알았다. 성인과 소인은 이렇게 차이가 크다.

물은 민심을 반영하기도 한다. 좌구명(左丘明·춘추시대)이 지은 ‘국어(國語)’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기원전 842년에 주(周)여왕이 자신의 폭정을 비난한 사람을 죽이는데도 백성은 아무 말도 못했다. 왕이 그걸 자랑 삼아 말하자 대신 소목공이 이렇게 간했다.

“그것은 백성의 입을 틀어막는 것에 불과합니다. 백성의 입을 막으면 강물을 막는 것보다 더 큰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둑을 쌓아 강물을 막았다가 일단 둑이 터지면 다치는 사람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물을 다스리는 사람은 응당 물길을 소통시켜 물길에 걸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그들을 인도하여 말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하고, 다하지 못한 것이 없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지만 물 자체는 잘못이 없다. 물을 다스리는 사람이 문제일 뿐이다. 물이 위험하다 해서 막아서는 안 된다. 물은 흘러야 한다. 민심도 역시 마찬가지다. 공자가 바라본 물이 쓰촨성 폭우처럼 다리가 끊어질 정도로 격렬한 물은 아니었을지라도 항상 부드럽게 흘러가는 고요한 물도 아니었을 것이다. 공자는 때론 고요하고 때론 요동치는 물의 외형적 모습을 너머 물이 가진 고유의 성질을 바라봤다. 공자는 자주 노나라 도성의 동북부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강변을 거닐며 제자들에게 도에 대해 가르쳤다.

공자는 ‘요순우탕문무주공’으로 이어진 유학의 도가 자신을 통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그런데 과연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자들도 자신처럼 물을 보며 도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리 소리 높여 가르치면 뭐하겠는가. 스승의 사상이 제자들에게 계승되지 않는다면. 제자들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은 스승 공자의 궁금증이 ‘논어’의 ‘선진’편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공자와 제자의 대화를 다룬 ‘논어’의 기록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일 것이다.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등의 제자들이 공자를 모시고 앉아 나눈 대화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만약 누군가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공자는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아야 군자답다”고 말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생겨 누군가 나의 능력을 알아주고 채용할 의사가 있다고 치자. ‘그럼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각자의 포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미래를 생각한다. 만약 내가 어느 기업체의 회장이 된다면, 내게 써도 써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큰돈이 생긴다면, 내가 유명하게 된다면 등등 항상 가정법을 쓰며 산다. 그러나 생각은 항상 거기까지다. 구체적 계획 없이 막연하게 ‘~한다면’에서 생각이 멈추기 때문에 계획은 구체성을 잃는다. 공자의 질문은 이런 막연한 생각에 대한 질책이자 자신의 가르침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점검하고 싶은 스승의 욕심에서 나왔다.

성질 급한 자로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삼 년 안에 백성들이 잘살 수 있도록 다스리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다. 공자는 웃었다. 염유와 공서화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하지만 예로 그 뜻을 다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증석의 차례가 됐다. 증석은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엉뚱한 대답을 했다.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고 나면,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다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무릎을 치며 화답했다.

“나는 점(點)과 함께 하겠다.”

증석은 이름이 점으로 증자(曾子)의 아버지다. 증자는 ‘효경(孝經)’을 지었다고 하는데 공자의 가르침 중에서 ‘수제(修齊)’의 맥을 이어 공자의 손자인 자사에게 전해줬다.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의 대답은 일상생활을 담담하게 즐기는 성인(聖人)의 도를 체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경지였다. 모든 계획은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삶의 철학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높은 자리가 생겨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배운 바대로 실천하며 살겠다는 대답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양기성(梁箕星·?~1755)이 그린 ‘증점욕기(曾點浴沂)’는 증점의 대답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이다.

기수에서 아이들 세 명이 헤엄치며 놀고 있다. 아직 물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얘기가 궁금해 그쪽을 쳐다본다. 그들 앞에는 어른 여섯 명이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다. 한 명은 증점일 것이고 나머지는 함께 공부하는 도반일 것이다. 어른과 아이들 사이에는 나무 두 그루가 교차해 서 있다. 자연스러운 만남이지만 어른과 아이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보여주고자 함이다. 그들의 모습에는 일상을 누리는 자의 넉넉함과 행복이 담겨 있다. 이런 행복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랜 시간 공부하고 수신(修身)한 진짜 목적이다.

지금 우리는 사는 데 급급해 이런 본래 목적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도를 생각하기는커녕 그저 자신의 안전을 챙기는 데 급급하다. 날마다 비가 내리는 요즘, 거침없이 흐르는 물줄기를 보면서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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