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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환_“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

醉月 2009. 10. 10. 09:43

제18회 조찬강연회(2009.7.20)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    

연사 : 인요한(John Alderman Linton)│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주최 : 朴正熙대통령기념사업회

제18회 조찬강연회가 6월 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미국인이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인요한 박사는 이날 특강에서 한국의 번영을 가능케 한 3대 요소로 “박대통령의 리더십, 부지런한 근로자, 억척스런 어머니”를 들었다. 그는 또 오늘의 한국이 박대통령이 이룩한 터전에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며 이를 잘 지켜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박사가 미국인의 시각에서,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성찰한 한국의 과거와 미래 분석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제가 키가 좀 큽니다. 키 큰 사람이 속이 없다고 하는데 한국 속담 틀린 것을 아직 발견 못했습니다.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어르신들 모시고 강의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벌벌 떨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우리를 잘살게 만든 기반을 닦아주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또 ‘잘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강의 시작하기 전에, 여기 저희 집안을 잘 알고, 저를 도와주신 분을 소개합니다. 삼대가 선교를 했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우리 조상들은 한국을 많이 도왔지만 저는 거꾸로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 여기 앉아계십니다. 유준 박사님이십니다.
 
 
  가족사 그리고 한국과의 인연
    제가 공부도 잘 못한 사람인데 의과대학에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연세대학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욱 더 친밀감이 가고 그렇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 집안에 대해서 배경설명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은 남부입니다. 남북전쟁이 미국에 일어나면서 리 장군(Robert E. Lee`1807~1870)이 백악관에 불려갔어요. 링컨이 리 장군에게 북쪽 군인 총사령관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리 장군이 큰 고심을 했어요. ‘버지니아가 고향인데 버지니아가 어디로 붙을지 모르겠다, 연합에 나갈지 남을지.’ 그래서 대통령께 “제가 제 고향하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5일 만에 버지니아가 남부로 붙기로 결의하자 남부로 말을 타고 들어가, 북부 총사령관 오퍼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남부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이게 역사의 비극이면서도 남북전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요. 사실 링컨도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미국이 강해진 것은 리 장군 때문이에요. 왜냐?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전쟁에서 질 때는 깨끗이 지자! 게릴라전하지 말고 북부가 이겼으니 전쟁을 그만하자.’ 멋있게 남쪽을 다 설득을 해서 조용하게 전쟁을 끝내도록 한 분이 리 장군입니다.
 
  미국이 그때 잃은 병력이 65만 명입니다. 합병증 환자까지 합하면 한 100만 명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시시피를 재건하면서 전쟁 끝나고 첫 예산 중 5분의 1이 의족이었습니다.
 
  주 예산의 5분의 1, 그만큼 피해가 컸는데 거기에서 미국이 미국식을 알았어요. 우리가 엄청난 전쟁을 치르면서 거의 65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여태까지 치른 전쟁사망자를 다 합쳐도 그때 사망자 숫자가 안 됩니다. 그렇게 남북전쟁 때 미국사람이 많이 죽게 되었지요.
 
  어쨌든 그 역사가 끝나고 한국하고 인연을 갖습니다. 시작의 단추는 사실 조금 잘못 끼웠어요. 솔직한 역사적인 얘기를 하자면…. 무슨 얘기냐면 일본하고 을사조약을 해가지고 미국이 스페니쉬와 전쟁(Spanish-American War)으로 필리핀을 갖게 되고 한국을 일본에 맡기는 을사조약이 있었지요. 어쨌든 조금 아름답지 않게 출발을 했는데 미국과 한국의 두 국가가 그렇게 출발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알렌과 언더우드는 북 장로교 출신으로서 한국 땅에 오셔서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을 세웠고, 저희 조상은 1895년에 유진 벨(Eugen Bell)이라는 분이 한국에 도착해서 2년간 언어를 배우고 1897년에 북장로교인들이(전쟁으로 남장로교는 남쪽, 북장로교는 북쪽으로 나누어진 겁니다. 미국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쪽에 가서 선교를 열심히 해라.”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라도가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동학후세들도 있고 그 골치 아픈 동학사건이 일어난 곳에 가서 선교를 잘해 봐라.” 그래서 저희 진외조부님께서(할머니의 아버지가 됩니다.) 1897년에 나주에 내려가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사실 나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당시 향교가 강해서…. 처음 목포에 가셔서 학교를 두 개 세웠어요. ‘영흥’하고 ‘정명’을 세우고 그 다음 1900년도 초에 광주에 올라와서 ‘숭일’과 ‘수피아’ 학교를 세우고 저희 집안의 마지막 큰 업적은 저희 할아버지가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대전서부터 전라도 지역선교를 맡게 되고 저희 할머니가 1899년 목포 태생입니다. 아버지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고 저는 1959년, 태어날 때 예수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전주가 고향은 아니고 순천에 계시던 어머님이 병원에 와서 잠깐 신세만 지고 54년도에 순천에 파송 받았던 우리 부모님하고 같이 저는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Kitchen Stove”와 한국의 온돌문화는 가치관의 기본 <박정희 대통령, 프로레슬러 장영철 선수 접견(1964. 2. 25)>

여러분 루즈벨트 대통령이 공황이 일어나고 나서 미국사람들을 다시 일으켰던 것은 무슨 사상이었느냐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결국은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새마을 사업을 일으키면서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여러 가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도 있지만 그 생각과 그 사상이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걱정되는 부분을 오늘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은 70년 전에, 저희 아버지가 공황 때 살았는데요,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을 지켜준 것은 가족의 힘이었습니다. 가족이 국력이었습니다. 어디서 미국사람들이 그런 훈련을 받고 미국이 튼튼해졌냐 하면요. 미국의 “Kitchen Stove”였습니다. 서부시대에는 돈이 많지 않았어요. 미국 방들의 온도는 대략 5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모두 밤에 잠자려고 하면 두꺼운 이불…. 지금 냉장고 온도가 5도입니다. 따뜻한 방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부엌난로에서 무슨 교육을 배웠느냐면, 노인들이 가르쳤어요. 숙제도 부엌난로 앞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시고 엄마 아버지도 계시고 그래서 미국의 힘은요 “Kitchen Stove!? 부엌난로 앞에서 미국사람들이 강해진 거예요. 그게 가족의 힘입니다. 가치관입니다.
 
  제가 좀 주제 넘는 얘기지만요. 유준 박사님 사랑받고 좋은 학교 나와서 또 제일 젊은 부서장으로 왔습니다. 제가 지금 19년째입니다.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로 30대에 왔습니다.
 
  지금 나이가 만 50입니다. 일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경험들을 할 수 있었느냐 하면요. 정말 이런 기회가 저한테 주어졌는데 클린턴도 제가 만났어요. 부시하고도 대화 나눴어요. 또 카터하고는 아산에 내려가서 없는 사람들 ‘사랑의 집짓기운동’하면서 일주일 동안 같이 지냈어요. 노대통령도 만났고, 전에 김대중 대통령도 여러 차례 만났고, 이명박 대통령도 만나고 제가 자랑하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제가 교육받은 사람으로 저를 만들어 준 그곳을 여러분들한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곳이 어디였느냐면 전라남도 순천의 안방 아랫목 교육이었습니다. 학교교육의 얘기가 아닙니다.
 
  겨울 추울 때 나무로 혹은 낙엽으로 군불 떼고 들어앉아서 교육 받았던 것…. 그러면 어른들이 우리한테 얘기해 줘요. ‘여수·순천 사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6.25는 어땠다. 과거에 호랑이가 있었다. 언제 심고 언제 걷고….’ 이런 걸 다 우리한테 가르쳐 줬어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런 건 돼, 인간의 됨됨이는 이렇게 하면 돼. 이거는 안 돼’ 이걸 가르쳐줬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런데 미국의 가정은 벌써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도 그대로 따라 해요. 결혼한 사람의 50%가 헤어져요. 못 참아서 무너지는 이유가 잘살기 때문에 그래요. 중앙난방 때문에 그래요. 이제 노인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인간교육을 받을 장소가 없어요. 그래서 무서운 말로 ‘방콕’이라고 하죠. ‘방에 들어가서 콕 박힌다.’ 다 아이들이 인터넷 앞에 가고 텔레비전 앞에 가고 정말 무섭습니다.
 
  온돌방 문화가 저한테 아주 정말 튼튼한 교육장소가 됐고, 나중에 유준 박사님 같은 분이 저를 도와주셔서 저는 특혜를 받고 입학을 하고, 또 공부를 마치고 미국 가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들어와서 당당하게 누구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소중한, 어렸을 때 그 교육입니다.


박정희, 근로자, 어머니… 남한을 일으킨 3대 힘 <탱크부대열(1972년 국군의 날)>
우리 자신들을 좀 비춰봅시다. 제가 북한얘기를 좀 섞어가면서 할 거예요. 왜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느냐면 북한이 워낙 못 살고 워낙 어렵기 때문에…. 38선으로 나눠진 남쪽은 세계에서 10대 경제 안에 들어가고 북쪽은 어떻게 된 걸까?
 
  개성에서 평양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차가 아주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막 ‘부앙’ 떨리고 그러는데 안내원이 “남조선이 우리보다 좀 앞선 것을 얘기해보라우!” 그러더라고요 이북말로…. 그래서 ‘이거 또 무슨 정보원 아닌가, 보위원 아닌가?’ 하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제 저도 전라도 깡패기질이 있습니다. 우리 고향이 순천극장파도 있고, 시민극장파도 있고 복잡해요. 파도 많아요. 그래서 이 친구보고 “정말 얘기해 보라우?” 그러니까 이 친구가 “얘기해보라우!”, ‘좋다. 무엇이든 물어봐라, 다 이야기해주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이 사람한테 40분을 강의를 했어요. “첫째, 우리가 잘사는 까닭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 다음은 당신 정주영 알지 않느냐? 정주영만 있는 게 아니었고 거기 이병철도 있었다. 박태준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박정희로부터 특명을 받고 특혜를 받고 엄청난 공장들을 세우고 국가를 발전시켰다. 우리 어렸을 때는 나는 전라도에서 컸기 때문에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너무 너무 너무 잘 몰랐다. 박정희가 위대한 사! ! 람이었다. 중국이 오늘날 잘살게 된 것도 우리보다 박정희를 공부했기 때문에 저렇게 잘산다. 중국도, 싱가포르 이광요도 박정희사상을 배운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위대한 사람이다. 뭐 인권문제 가지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데 기본 생계가 보장되어야 인권도 논할 수 있는 거다. 남조선에서 보릿고개를 없애 준 사람, 그게 박정희다.”
 
  “두 번째, 잘살게 된 까닭은 남쪽에 있는 근로자들 때문이다. 구로공단에서 16시간씩 일했다. 자본주의(이 사람은 공산주의자예요. 공산주의자한테 설명하려면 기본부터 얘기해야 돼요.)에서 잘 살려면 돈을 모아야 된다. 돈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 위해서 16시간씩 공장을 돌리고 심지어 남조선 여자들이 머리카락까지 팔았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다.”
 
  맨 마지막에 “세 번째, 남조선이 잘사는 이유는 한국의 여성들 때문이다. 근면·절약정신. 당신 한국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아냐?” 그건 공감하더라고요. “북쪽여자들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이 근면·절약 정신교육. 이런 걸 우선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제가 “그것이 한강의 기적이다. 박정희와 재벌 총수들, 근로자들의 헌신적인 힘! 희생! 세 번째 여자들! 우리 어머님들 때문에 잘산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이 양반이 뭐 좀 시큰둥해요. “줄 잘 섰디뭐?”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거 무슨 얘기요?” 난 못 알아들었어요. “남조선 아이들은 미국 뒤에 줄섰고, 우리는 소비에트 러시아 뒤에 줄 서가지고 이렇게 돼버렸다.” 중국 얘기는 하지도 안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 자보고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필리핀은 미국 뒤에 백 년 전에 줄을 섰는데 왜 이렇게 못살죠?” 박수 안 칩니까?(웃음)
 
 
  한국인들 이제는 타협을 배워야 할 때
 
  여러분!
 
  박정희 대통령이, 또 한국 민족의 우수성이 없었다면 기적을 못 이뤄냈을 겁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아부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말합니다.
 
  미국에 이민가면 한국 사람들이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요. 5년이면 80% 이상이 새 집을 마련해요. 미국 사람들은 30년이 돼도 그걸 못해요. 대단한 일입니다.
 
  그게 어떻게 된고 하니, 제가 무슨 마음으로 미국을 갔냐면 제가 굉장히 가난했어요. 84년도에 우리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제가 의과대학 2학년 때예요. 가족회의를 했는데 “더 이상 아무리 어려워도 엄마가 가진 것을 더 쓰면 안 되겠다. 다 스스로 해결해라. 이제 끝이다.” 그래서 뉴욕을 들어갔는데 뉴욕이 얼마나 어려웠느냐면 할렘에 가서 살았습니다. 밤으로 창밖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또 뭐를 깨달았느냐면 법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하냐? 엄청 중요한 겁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언제 내 와이프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아이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그런 환경 속에서 한인교회를 나갔는데 한인 전라도 아주머니한테 방법을 들었어요.
 
  영어로 융자라는 것이 “mortgage”죠. 발음하기 힘든 단어예요. ‘r’ 때문에. 우리는 ‘R’하고 ‘L’하고 ‘ㄹ’하나로 합쳐서 발음하잖아요. 좀 힘들죠.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하냐면 “집사는 거 일도 아니여~! 그거 돈 좀(전라도 말로) 모타 갖고 그냥 은행에 가서 모가지 대면 돼! 모가지!”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본 얘기 중에 가장 진리예요. “mortgage” 모기지를 이 할머니가 “모가지”로 알아들었는데 은행이 내 목을 잡고 있으니까 모가지라는 건 확실해요. 하여튼 미국에 이민 간 할머니조차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유태민족은 그렇게 못해요. 불가능해요.
 
  제가 이제 조금 조심스럽게 여러분들한테 좀 몇 가지 비판을 하려고 해요. 좋은 얘기 많이 했죠? 나쁜 얘기 좀 해도 되겠죠?
 
  외국인들이 제 사무실에 진료 받으러 오면 “Korean들이 danger(위험)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전불감증, 그것은 다 나쁜 것이 아니다.” 고속성장할 때 자본주의에서 가장 돈을 빨리 벌고 일어서는 방법은 어음을 여기서 끌어서 저기 막고 오늘만 어떻게 넘기면 내일은 돈 버는 거거든요. 웃으면서 제가 “그건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전인자에 안전이라는 것은 빠져버리고 없어져버렸다.” 좀 성급하죠?
 
  그 다음에 국회니 어디 회의를 해 보면 영어로 “compromise” 타협을 잘 못해요. 참 너무 너무 가슴 아픈 때가 많아요.
 
  미국이 생길 때 한 쪽에서는 주당대표 찍자고 하지요. 한 쪽에서는 인구비례로 대표를 세우자! 싸우다 싸우다 상원하고 하원이 생겼어요. 상원에서는 주대표제, 하원에서는 인구대표제 이것이 어떤 대표적인 미국의 타협국회문화입니다. 타협을 배워야 돼요. 지금 한국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모든 사람들이 소모를 하고 있어요. 성숙하면 타협을 해야 돼요. 타협하는 것이 서로 이기는 것이지 서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돼요.
 
김천과 영주를 잇는 경북선 개통식(1966.11.9)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없는 점 아쉬워
 
  그리고 잘난 사람을 끌어내리는 데 또 소질이 있어요.
 
  링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백 배 더 독재했습니다. 신문사 300개 문 닫았어요. 주의회를 재판도 안하고 연금을 시켰어요. 대법원장 불러 가지고 “당신 까불면 감옥에 넣어버리겠다!” 남북이 나눠지고 전쟁이 날 것 같으니까 링컨조차도 그런 극단의 처방을 냈어요.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관이 없어요. 이거 바뀌어야 됩니다. 미국사람들은 링컨이 잘못한 부분은 땅속에 묻어버렸어요. 나타나지도 않아요. 방문해 보셨죠?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가보면 링컨이 예수님 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되어 있어요. 아쉽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누가 업적을 냈을 때, 이순신장군 어떻게 했어요? 서울에 돌아와 보니까 왕이 감옥에 넣어 버렸어요. 금속활자가 서양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을 앞섰어요. 200년을 앞섰는데 백과사전에 보니까 흐지부지 돼버렸어요. 발견은 200년 먼저 했는데 아마도 금속활자를 못 만든 사람들이 금속활자 만든 사람을 암매장시키지 않았을까, 그렇죠?
 
  사촌이 땅을 사면 유태인들은 잔치를 벌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세력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배 아프기는커녕 잔치를 벌여야 될 일이에요. 남 잘 된 것을 축복해 주고 축하해 주고 그런 문화로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최근에 제가 와서 느낀 것은….
 
  김대통령 시절에 그 분이 저한테 물었어요. 문화개방을 하려고 하는데 “성문화가 들어오지 않겠느냐? 서양의 헐리웃이 우리를 점령하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냐면 “걱정을 하지 마세요. 한국문화 튼튼합니다. 절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난 봄 터키의 한 가게에서 콜라를 사려고 하는데 아줌마가 계산하러 나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왜 이렇게 안 나오는가 했더니 대한민국 사극을 옹기종기 앉아서 보고 있더라고요. 터키말로 어쩌고저쩌고 해서 보니까 우리 사극이에요. 이란에서도 한국 사극이 최고 인기라고 합니다. 그것이 한류문화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걱정하는 것은 개방에 있어서 이제는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그런 시대는 지났고 무한경쟁시대에 걱정할 것 없는데 약간의 “신대원군 끼”가 있어요.
 
  저도 세브란스에서 훈련을 받고 그렇게 공부 잘 못하고 해서 꼴등하다시피 했는데 미국에 가서 세브란스에서 교육받은 것 가지고 나가니까 제가 중간이 아니라 우수한 쪽에 들어갔어요. 그게 세브란스 교육이에요. 나가서 힘을 겨뤄보니까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좀 교만하게 들려서….
 
 
  박정희 어른이 기초를 닦은 대한민국의 희망
 
  희망을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 항상 대한민국의 희망을 얘기하면 이상하게 박정희 어른으로 또 돌아와요. 왜냐하면 기반입니다. 기초입니다. 그것을 일찍 깔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희망은 조선사업입니다.
 
  LNG선을 영하70도, 그 액체 LNG를 보관할 수 있는 조선소 기술이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최고입니다. 1위예요. 특허가 있어서 흉내도 못 내요. 극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포항제철에서 박태준의 후배들이 지금 철을 만들어내는데 전세계적으로 거치는 코크스(Cokes)라는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철을 만듭니다. 아무리 철 값이 떨어져도 생산능력이 있고 수익이 남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IT산업. 전 세계에서 고속인터넷이 제일 완벽하게 깔린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게 제 마지막 비판이자 칭찬입니다. 과소평가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자신을 과소평가하는지, 과소평가할 것도 있지만 자랑할 것도 많습니다. 삼성전자가 지난 5년 동안에 소니(Sony)를 앞섰는데 최대 10년을 앞섰답니다. 가면 갈수록 격차가 마라톤처럼 소니는 출발점에 가있고 삼성은 지금 마라톤의 끝을 뛰고 있습니다. 엄청 앞섰습니다. 삼성, 대단한 기업입니다. 누가 만들었죠? 기아자동차가 미국의 최악 불황일 때 최악의 지난 1년 동안 미국자동차 시장점유율을 6% 올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제 연금을 미국 쪽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제도가 있는데 금융위기에 미국이 거덜 난 것 같아서 한참 심사숙고하다가 우리 아버지하고 똑같은 결정을 내려서 ‘연금을 여기서 받고 여기서 죽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북한의 실상
 
육여사 서거 후 박대통령의 59회 생신날 가족과 함께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재미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한테 이북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선택을 잘못해 가지고 이북이 어떻게 저렇게 망가졌는지…. 이북이 저렇게 살 필요가 없어요. 전쟁 전에는 평양이 서울보다 더 잘 살았다고 그래요. 전기도 남아돌아가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는지…. 재미난 것은 인권을 노리면서 김일성이 이렇게 나왔어요. “머슴과 지주를 없애겠다.” 이게 좀 조심스러운 말이고 내가 총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열린사회예요. 할 말은 하고 죽어야 되겠어요. 그 사회는 머슴과 지주가 당원하고 인민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97%가 소위 인민입니다. 그런데 인민은 농노입니다. 그저 협동농장에서 죽어라 일해가지고 그렇게 못 살아요. 3%가 소위 그 사람들이 없애겠다는 지주 쪽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지주는 머슴한테 선을 더 베풀었어요. 먹여 살렸잖아요 최소한. 그런데 먹여 살리지도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북 비판할 때 그거 꼭 나눠서 욕하세요. 97%는 죄가 없어요.
 
  제가 15년 동안 스물 몇 번을 다니면서 정말 답이 안 나오고 그 부패한 관료들하고 일을 하면서 아주 질려 버렸어요. 정말 희망이 없어요. 그러나 ‘다 굶어죽어도 싸다’, 이건 심한 말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봉건시대로 간 겁니다. 300년 뒷걸음 해버렸고 하루가 갈수록, 하루가 가면 우리는 일주일 앞서고 북한은 일주일 뒤처집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통일이 아쉬운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산가족! 지금 나이들이 많아요. 이산가족들이 그 유일한 인맥이에요. 통일이 빨리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맥 때문이지 이산가족만 없었으면 그렇게 급하지도 않습니다.
 
  이산가족을 볼 때 꼭 죄를 지은 것 같아서 통일이 빨리 돼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집사람이 중국으로 엘리트 북한의사들을 데리고 나와서 교육을 시켰어요. 평양에 있는…. 최고 3일 정도 교육받다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임플란트 교정치과에서 제일 첨단을 가르치는데 한 3일 지나니까 “이런 것 가르치지 마세요. 우리는 마취할 시약도 없는데 이런 것 배워 봐야 머리만 아픕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28개의 뇌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깜짝 놀랐답니다. 도장을 28군데를 받았대요. 무슨 뇌물이 필요하냐? 그 뇌물이 뭔지 몰라도 돈이 많이 들 것 같고 당황하지 않아요? 여러분 한번 맞춰 보세요. 뭘 요구했을 것 같아요? 돈? 선물? 유에스비(USB:컴퓨터 이동식 저장장치)입니다. “컴퓨터에 꽂는 장치 용량 제일 많은 것에 남조선 사극을 좀 담아 달라. 최대한 가능하다면 지난 것까지도 담아 달라. 최신 것.”, “이거 가지고 가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총살 아니냐?” 그랬더니 “아~ 일 없습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지우고 들어가서 파일을 복구시키면 돼요.” 들어가서 지우! ! 고 조작하면 어떻게 또 나온대요. 그러니까 세관 통과할 때 누가 보면 없는 걸로 되어 있고…. 그래가지고 거기에 있는 고관들한테 최고 인기선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 쯤 되는데…. 무쏘는 사고 1년 반 만에 폐차를 시켰어요. 견디지를 못했어요. 갤로퍼 수명이 3년이에요. 그런데 어디를 갔느냐면 원산, 함흥, 김책, 청진, 단천, 함경남도의 가장 북부에 가면 단천이 있습니다.
 
  단천휴게소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 다음 날 새벽에 청진까지 한번 가보자 했더니 열 몇 시간이 걸린대요. 아마 한국 같으면 고속도로로 한 두 시간 걸릴 거예요. 그래서 단천에서 김책까지 가는데 혼이 났습니다. 비포장도로 마천령 고개를 넘고…. 함경남도와 북도 사이에 일제시대 때 길이 그대로예요. 변한 것 하나도 없어요. 그래가지고 들어가는데 이북호텔은 평양을 떠나면 정말 지내기가 힘듭니다.
 
  최고급 호텔, ‘청진 관광 려관’에 도착을 했어요. 도착을 해가지고 우리 형님은 가서 항상 말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남의 돈을 모금해 가지고 오니까 제일 싼 방 주세요.” 그러면 그 쪽 얘기는 항상 똑같아요. “3등실 돈 가지고 일등실에서 주무세요.” 호텔 선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위대한 장군님이 주무셨던 방에 가서 우리 단장은 자라.” 그래서 제가 호기심에 갔더니 몇 월 며칠 위대한 장군님이 거기서 주무셨답니다.
 
  다음 제가 뭐가 급했냐면요. 여러분한테 이 얘기를 해야 제 머리로만 대화가 가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도 대화가 갈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제가 가서 뭘 했느냐면 목욕을 하고 싶어요. 비포장도로로만 열 몇 시간을 달렸으니 머리에다가 흙을 한 삽 올려놓은 것 같아요.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뭐를 제일 고민했는지 아세요? 평양 밖의 좀 후진 호텔은 이틀 걸러 한 번밖에 더운물을 안 쏴줘요. 십 분씩 이틀에 한 번밖에 안 쏴줘요. 더운물을 ‘쏴준다’고 그래요. ‘혹시 이 호텔이 격일이 아닌가?’ 하고 고민을 한 거예요. 오늘 안 쏴주는 날일까 봐.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나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더운물…” 더운물 말 딱 나오니까 “우리 십 분씩 쏴주겠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아주 작은 것도 고마워요. 그래서 호텔방에 올라와서 7시 5분 전부터 옷 다 벗고 목욕탕 앞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세 가지 장비가 필요해요. 바케쓰가 하나 있어야 돼요. 그걸 목욕탕 속에 잘 빠트려야 돼요. 사회주의 국가는요, 목욕통 청소를 안 해요. 밑에 진흙이 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찬물을 받아놓고, 그거는 !! 장실용 물이거든요. 그걸 슬그머니 빠트려 놓고 그 다음 미리 빠트려놨어요. 그 다음에 세숫대야 하나 놓고 바가지 갖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영락없이 딱 정각이 되면 물이 나와요. ‘퀄퀄퀄퀄’하고 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걸 또 빨리 받아내야 합니다. 왜? 녹물이에요. 관이 오래됐거든요. 그 다음에 더운물 갖고 목욕을 시작했는데 여러분은 거짓말 같으실 텐데요. 거짓말 아닙니다. 갑자기 세상이 새까만 거예요. 정전이 된 겁니다. 온 호텔방을 기어 다니며 배낭 속에 플래시를 찾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거 찾는데 한 3분 걸렸어요. 여러 번 찾았어요. 찾아가지고 왔는데 처음에 3분 보냈죠, 찾는데 3분 보냈죠, 그래서 한 3분밖에 안 남았어요. 딱 목욕탕 앞에 갔는데 ‘전두환 아버지 감사합니다.’
 
  왜 갑자기 전두환 얘기가 나오느냐면 제가 광주항쟁에서 통역한 사람이에요. 하루 통역한 게 화근이 되어 가지고 아주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었어요 5공화국 때. 그래서 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제가 불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병영훈련을 자원해서 갔어요. 학생 병영훈련을 가서 열심히 9박 10일 동안 산을 뛰어 다니고 총도 쏘고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그 병영훈련에서 뭘 배웠는고 하니 ‘3분 목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3분 목욕’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해봤고 그래서 ‘전두환 아버지 감사합니다.’ ‘3분 목욕’을 가르쳐줬으니까. 그래서 거기서 3분 목욕을 하고 걸어 나오는데 ‘청진 시민 여러분 저는 3분 목욕을 해냈습니다.’ 걸음이 팔자걸음이에요.
 

 
  소중한 이 국가를 잘 지켜야
 
  여러분 제가 이 얘기하러 온 거 아니에요. 3주 후에 연희동에 공중목욕탕이 있어요. 3천 5백 원에서 4천 원으로 올랐다가 다시 4천 5백 원. 지금 다시 4천 원으로 내렸습니다. 거기 들어갔는데 아주 불이 훤하더라고요. 갑자기 청진 생각이 나는 거예요. 찬물도 퀄퀄 나오고 더운물도 퀄퀄 나오고…. 제가 벽을 보고 혼자서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 너무 고마워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마음껏 목욕하는 거 한 번도 고맙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냥 눈물이 나는 거예요. 혹시 노인들이 볼까봐 얼굴에다가 샤워를 끼얹고 그랬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때도 안 울었어요. 놀래가지고…. 근데 거기서 펑펑 우는데 ‘아! 이것이,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거구나’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소중한 메시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깔아놓은 바탕에 대단한 국가를 세우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엄청 많아요. 우리 다 재벌 같이 삽니다. 여러분들이 손자손녀, 여러분 자녀한테 다 얘기해야 됩니다. 여행갈 수 있는 것, 자기차 운전하고 할 수 있는 것, 친구 만날 수 있는 것, 가서 통닭하고 생맥주 마실 수 있다는 것, 따뜻한 방에서 자는 것, 여름에는 다 에어컨 켜고 지내는 것, 여러분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이 국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얻은 것이 많은데 우리가 잘 지켜나가야 됩니다.
 

  연사약력
  1959년 12월 8일 생
  국적 미국
  1980∼1982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의예과 수료
  1987.2.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2000.8.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
  2003.8.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1987∼1988 미국 뉴욕주 Flushing Hospital 소아과 수련의 과정 수련
  1988∼1991 미국 뉴욕주 Catholic Medical Center of Brooklyn Queens 가정의학과 수련의 과정 이수
  1991∼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부교수
  1991∼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소 소장
  1992∼현재 재단법인 순천기독결핵재활원 이사
  1996∼현재 대전 국제학교 이사
  1997∼현재 대한항공의료자문위원
  2005∼현재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대외협력이사
  2007∼현재 국가청렴위원회 위원
  2007∼현재 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2007∼현재 국가이미지개발위원회 위원
 
  수상
  1996.3.2. 내무부장관 공로상
  1998.4.7.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장
  2002.12.24. 대통령 표창장
  2005.10. 국민훈장 목련장
 
  자격 면허
  1987.2. 대한민국 의사 면허 - 1987년
  1988.7 미국 뉴욕주 의사면허 - 1989년
 
  저서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2006, 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