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초기를 풍미한 정치가 한명회는 “자기 손 안에 세상이 들어 있다”라고 말했다. 손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손 안에 세상이 다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볼 때 사람의 작은 손 안에는 온갖 중요한 구조물이 촘촘히 들어 있다. 가히 세상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 손은 열네 개의 손가락뼈와 다섯 개의 손바닥뼈, 그리고 여덟 개의 손목뼈 등 무려 27개의 뼈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2백6개인 사람의 뼈 중 25% 이상이 양쪽 손에 몰려 있는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의 몸에는 압력을 느끼는 ‘파치니 소체’라는 감각수용체가 있는데, 손끝에 이 수용체가 몸 전체의 25%나 집중되어 있어 촉각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특히 손가락에는 1㎠마다 100개 정도가 몰려 있기 때문에 작은 자극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손으로 더듬어 주변을 파악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손은 눈과 더불어 주변 환경과 인체의 감각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세포의 자살로 만들어지는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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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의 구조물은 세포의 증식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나 손가락과 발가락은 일정 부분의 세포가 자살해 만들어진다. 태아 단계에서 손이 발생할 때 몸통에서 주걱 모양으로 손이 먼저 나온다. 손과 발을 만드는 뭉툭한 모양의 세포덩어리 속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한데 엉겨 붙어 있는 형태이다.
이것이 다섯 손가락의 손으로 온전하게 나타나려면 엄지와 검지, 검지와 중지, 중지와 약지, 약지와 소지(새끼손가락)들 사이에 어떤 공간이 생겨나야 한다. 이를 위해 손가락 위치가 아닌 나머지 부분의 세포들이 자살을 해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손 모양을 만든다. 엄지에서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네 개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세포들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온전한 모양의 손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발과 발가락 역시 세포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한 동물의 발가락도 마찬가지 원리로 형성된다.
이들은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그 과정을 PCD (Programed Cell Death)라고 부른다. 손과 발 세포의 자살은 발생과 분화의 과정 중에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는 절차이다. 세포가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이 죽는 것이 전체 개체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던져 전체를 살리는 희생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듯 세포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타의적인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세포가 손상되어 어쩔 수 없이 죽게 되는 ‘세포 타살’이다. 타의적인 죽음은 네크로시스(necrosis), 자의적인 죽음은 아포토시스(apoptosis)라고 부른다. 그런데 세포가 타의적으로 죽을 때와 자의적으로 죽을 때의 모습은 좀 다르다.
보통 타의적인 죽음은 세포 안으로 물이 급격하게 유입되어 세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물이 계속 유입되면 마치 풍선이 팽창하듯 세포의 부피가 팽창해 ‘펑’ 터져 죽는다. 반면, 자의적인 죽음은 좀 초라하다. 생체 에너지인 에이티피(ATP)를 적극적으로 소모해나가다가 세포가 차츰차츰 쪼그라들어 죽는다. 단편화된 세포 조각들을 주변의 식세포가 시체 처리하듯 잡아먹으면서 자살이 일단락된다.
이렇듯 ‘세포 자살’에 의해 만들어진 손가락의 길이는 남녀 간에 다소 차이를 보인다. 남자의 경우 두 번째 손가락(검지)이 네 번째 손가락(약지)보다 짧은 데 비해 여자는 검지와 약지의 길이가 비슷하거나 검지가 좀 더 발달되어 있다. 즉, 남자는 약지가 긴 반면 여자는 검지가 약간 긴 편이다. 따라서 어느 손가락이 더 긴가를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호르몬의 차이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검지와 약지의 길이는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랄 때 어떤 호르몬에 많이 노출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에 많이 노출되면 약지가 길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검지가 길어진다. 즉, 남녀를 막론하고 검지가 긴 사람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많은 사람이고,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많은 사람은 약지가 길다.
다섯 개의 손가락 모양이 다른 것은 단백질의 양(量)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라게 하는 ‘소닉 헤지호그(Sonic Hedgehog)’라는 단백질이 많은 경우에는 새끼손가락(또는 발가락)이 되며, 가장 적은 곳에서 엄지가 자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학설이다. 이에 대해 “뭉툭한 손에서 손가락이 자라나게 하는 단백질의 분포 형태가 태아의 성장 단계에 따라 손가락마다 달라져 다섯 손가락이 제각각 다른 모양을 갖게 된다”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고민 털어놓을 때는 검지가 긴 여자를 재미있는 사실은 다섯 손가락 길이의 비율에 따라 성격적 특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만약 내 고민거리를 잘 들어주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상대를 찾고자 한다면 먼저 손가락 길이부터 살펴봐야 할지도 모른다. 손가락의 길이와 포옹력 사이에는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럴까.
용인정신병원 이유상 박사팀은 지난 8월 말에 열린 한국심리학회에서 “대학생 1백60여 명을 대상으로 검지와 약지 길이를 조사한 결과, 검지와 약지 길이의 비율에 따라 여러 심리적인 특성이 다르게 나타났다”라고 발표했다. 여기서 말한 검지와 약지 길이의 비율은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약지나 검지의 길이가 다른 손가락과 비교해 얼마나 긴지를 말한다. 이를테면 여성의 경우, 검지가 상대적으로 유난히 긴 여성일수록 남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회사 내에서 유난히 남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함께 걱정해주는 여자 선배가 있다면 그녀의 손가락을 살펴보라. 그녀의 검지(둘째 손가락)가 남보다 유달리 길어 보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 대해 이유상 박사는 “여성이 양육 등을 맡으면서 아이 및 배우자와 정서적인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해 공감 능력을 진화시켰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여자와는 정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검지가 상대적으로 긴 남자일수록 우울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면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설혹 같은 팀 내에 종종 불안해하고 우울해 보이는 남자 후배가 있다면 그의 손가락을 살펴보자. 역시 검지가 길고 약지(넷째 손가락)가 다른 남자보다 짧을 것이다.
물론 검지와 약지의 길이의 비율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다른 나라에서도 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 비율과 성격적인 특성을 조사해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은 손가락 길이의 비율과 성격적 특성에 대한 이번 주장이 학계에서 확실하게 검증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최초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영국의 심리학 저널에는 ‘손가락 길이가 학문의 잠재성을 나타낸다’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국 바스 대학의 심리학자들은 일곱 살 난 남녀 어린이 75명의 손가락 길이를 측정하고 영어·수학 점수와 비교했다. 그 결과 약지가 검지보다 더 긴 남자아이들은 수학을 더 잘했고, 반대로 검지가 더 길거나 비슷한 여자 아이들은 영어를 더 잘했다. 검지가 길면 언어를 잘하고 섬세하며 약지가 길면 수학에 뛰어나다는 이야기이다. 언뜻 보면 그저 그런 ‘손가락 점’ 정도일 것 같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점쟁이가 아니라 영국의 저명한 심리학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내용들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공간 능력이나 수학 능력을 높게 만들어주고,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언어 능력을 좋게 만들어준다는 과학자들의 이론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약지 긴 남자는 바람 피울 확률도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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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갑부로 알려진 워렌 버핏은 손가락의 길이가 전체적으로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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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국의 학술지에서는 손가락 길이와 부(富)의 상관관계를 다루기도 했다. “성공은 별자리가 아니라 손가락 길이에 있다”라는 내용이다. 그 비밀은 약지와 검지의 길이 차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약지가 길수록 성공적인 미래를 기약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길이가 길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남자의 약지가 검지보다 긴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을 놓고 볼 때 유난히 약지가 긴 것을 뜻한다. 오른손 검지 대 약지의 비율이 매우 낮은, 즉 약지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긴 사람을 말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팀은 잘나가는 증권 트레이더를 대상으로 수익률을 조사했는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약지가 긴 사람이 짧은 사람보다 무려 여섯 배나 돈을 잘 버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검지가 짧을수록 공격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약지가 길지 않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일도 아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기 때문이다.
검지보다 약지가 상대적으로 길수록 부자가 될 확률도 높지만 바람을 필 확률 또한 높기 때문이다. 돈 많은 남자가 한눈을 잘 판다는 얘기가 그냥 나왔겠는가. 바람 잘 피는 남자는 여자에게는 오히려 피하고 싶은 남자일 것이다. 약지가 아무리 길어도 중지보다 긴 경우는 드물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만일 약지가 중지보다 긴 경우의 남자가 있다면, 남성호르몬이 철철 넘치고 정력이 왕성해 희대의 플레이보이가 된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일명 ‘카사노바 패턴’이라고 부른다. 또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마크 브리드러브 교수팀에 따르면, 동성애자도 남성과 여성 모두 약지가 상대적으로 길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반면, 약지보다 검지가 길수록 비교적 차분한 성격을 가지며 바람을 피울 확률이 낮다. 따라서 바람을 피워도 부자가 될 남자를 원한다면 약지가 아주 긴 남자를,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오직 나만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원한다면 검지가 긴 남자를 찾아라. 어느 쪽이든 선택은 여성의 몫이다. 하지만 손가락의 길이만 보고 성격을 단정하거나 부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성격 형성에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하고, 아무리 약지가 길다고 한들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까.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다섯 손가락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 그런데 과학자들에게는 다 같은 열 손가락이 아닌가 보다. 많은 과학자는 사람의 다섯 손가락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손가락으로 엄지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엄지는 다른 손가락과 안정적으로 맞붙일 수 있다는 데 이유가 있다(엄지와 다른 손가락으로는 동그라미를 만들 수 있다). 엄지는 다른 네 손가락과 각각 맞붙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다른 네 손가락끼리는 서로 맞붙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엄지 아래에 있는 두툼한 근육인 ‘엄지맞섬근’ 때문에 사람의 엄지는 강한 힘을 내며 크게 회전할 수 있다.
물론 엄지와 검지를 맞붙일 수 있는 다른 영장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존 네이피어 교수는 그의 저서 <손의 신비>에서 “침팬지의 경우 엄지와 검지를 맞붙일 수 있지만, 엄지가 지나치게 짧고 검지는 지나치게 길다는 문제 때문에 물건을 쥐고 있는 모습뿐만 아니라 살짝 잡고 있는 모습조차 무척 불안정해 보인다”라고 전한다. 사람만큼 엄지손가락을 사용해 안정적으로 쥘 수 있는 동물은 없다는 말이다.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의 적당한 길이 비율로 가능해진 안정적인 맞붙임 구조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