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인도, 중국과는 또 다른 대국

醉月 2011. 7. 25. 07:22

통일된 지 2000년 된 중국 통일된 적이 없는 인도

인도엔 진시황 같은 인물 없어 아쇼카·아우 랑제브 때 거의 통일
영국이 식민 지배할 때도 독립 토후국 500개가 전역에 존재

인도인들 끝없이 정체성 논쟁
언어·종교·민족으로도 정체성이 설명 안 되는 나라

▲ 아그라성에서 본 타지마할. 아우랑제브의 부황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지었다.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 의해 아그라성에 갖혀 있다가 죽었다. 유폐되어 있는 동안 아내가 묻혀 있는 타지마할을 보며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1687년, 인도 역사상 어떤 지도자도 해내지 못한 대업 성취에 근접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인도 대륙의 통일이었다. 이 무굴제국의 여섯 번째 황제는 북인도를 통일한 대제국을 물려받았고, 남인도까지 영토로 만들기 위해 통일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우랑제브의 나이 69세, 제국의 황도인 델리에서 권좌를 잡은 지 29년이 되던 해였다.
   
   아우랑제브는 이때 남인도의 데칸고원에 자리잡은 ‘데칸 술탄 국가’ 중 강력한 두 나라를 정복, 병합했다. 1686년 9월 12일에는 비자푸르 왕국(1527~1686년)을 무너뜨렸고, 1687년 9월 21일에는 골콘다 왕국(1512~1687년)을 9개월의 포위 공격 끝에 격파했다. 골콘다성(城)은 오늘날 인도 의약산업의 메카인 하이데라바드의 대표적 관광 명소다.
   
   무굴제국의 수석 판사는 비자푸르와 골콘다 왕국을 상대로 한 아우랑제브의 전쟁을 반대했다. 두 왕국은 무굴제국과 같은 이슬람 국가였다. 무굴제국의 지도층이 수니파 무슬림인 데 반해, 이들은 무슬림 중 소수파인 시아파라는 게 다르기는 했다. 무슬림 간의 전쟁을 수석 판사는 극력 말렸고, 그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하고 말았다. 아끼는 신하가 자신의 정부에서 물러나는데도 아우랑제브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만큼 통일전쟁에 대한 그의 의지는 강력했다.
   
   
   무굴제국의 영광
   
   데칸고원과의 인연은 많았다. 부왕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 왕자를 데칸 태수로 두 번이나 보냈다. 두 번째 데칸 태수로 임명된 1653년, 35세의 아우랑제브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우랑가바드란 도시를 만들고 그곳에서 지역을 통치했다. 대제국의 황제가 된 그가 군대를 몰고 데칸고원에 온 건 세 번째다.
   
   아우랑제브는 데칸고원의 두 강력한 왕국을 굴복시키면서 무굴제국의 영역은 이때 최대 판도를 형성했다. 아우랑제브는 이제 인도 역사상 자신의 최대 라이벌인 아쇼카 왕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는 아프가니스탄부터 북인도, 중인도를 영토로 만들었고, 남인도는 속국으로 삼았다.
   
   아우랑제브는 제국의 또 다른 수도 아그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데칸고원에 눌러앉았다. 조정을 이미 아우랑가바드로 옮겨왔다. 대업을 당대에 마무리 짓겠다는 필사적인 의지의 표현이었다.
   
   1695년 10월 19일 아우랑제브는 다시 전쟁의 북을 울리게 했다. 이번엔 남인도의 또 다른 강대한 세력인 마라타가 상대였다. 힌두교도인 시바지가 이끄는 마라타 왕국은 1674년 제국임을 선언하고 아우랑제브에 도전해 왔다. 무굴은 시바지가 죽은 뒤 그를 계승한 아들(삼바지)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지도자를 잃고도 마라타인들은 끈질겼다.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라타인의 성을 빼앗을 수는 있었으나, 이를 지키지는 못했다. 성을 빼앗긴 마라타인들은 몇 달 후 수비가 약해진 틈을 타 무굴 군으로부터 성을 다시 빼앗았다. 치고 빠지기, 이런 일이 되풀이됐다. 아우랑제브는 친정에 나서 수없이 많은 성을 빼앗았으나 수없이 빼앗겼다. 6월이면 몬순을 알리는 먹구름이 처음 몰려오는 남인도의 끝에 근접할 수가 없었다.
   
   
   아우랑제브의 죽음
   
   나이가 들수록 신앙심이 깊어진 아우랑제브는 저녁에 혼자 있을 때면 펜을 들어 이슬람 경전 코란을 필사했다. 황제가 펜으로 쓴 코란을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들었고, 그 돈으로 빈민층 복지기금으로 쓰게 했다. 아우랑제브는 연승 때 거의 모든 걸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걸 잃고 있었다. “무굴제국은 너무 커져서 한 사람이나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통치될 수가 없을 정도가 됐다.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덩치가 큰 동물을 삼킨 보아뱀과 같았다. 적들을 이길 수는 있었으나 영원히 누를 수는 없었다”고 후대의 사가들은 평했다. 데칸고원 정벌을 위해 친정을 시작한 지 십수 년이 지났고, 그의 나이 81세였다. 그는 이미 무굴의 어떤 선대 황제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더구나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갑옷을 입고 있었다.
   
   황위 계승 전쟁에서 형들과 동생을 죽이고, 능력 없는 맏형을 황위에 밀어올리려던 아버지(샤 자한 황제)를 아그라의 성에 잡아 가둔 일도 아득한 옛일이 됐다. 타지마할을 만들었던 부황 샤 자한은 자신이 만든 타지마할이 바라다보이는 아그라성에 8년간 연금되어 있다가 1666년 1월 죽었다. 노 황제 아우랑제브는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아우랑제브의 장군들은 고대 그리스신화 속 시시포스 신화와 같이 헛일을 반복하는 데 진저리가 났다. 철군을 간청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비겁하다며 이를 물리쳤다. 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아우랑제브 군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데바푸르라는 도시에서 아우랑제브는 치명적인 병을 얻었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랑제브는 신하들의 간청에 굴복, 1705년 12월 6일 바하두르푸르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아흐마드나가르라는 곳으로 옮겨 1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90세였다. 아우랑제브는 죽어서도 제국의 수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 아우랑가바드 인근에 묻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아잔타 석굴을 보러 가는 길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돌라타바드 인근의 한 이슬람 성자 옆에 지극히 소박한 무덤을 만들었다. 흰 대리석판이 그가 영면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토후국들의 반란
   

중국은 진나라의 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전역을 통일했다. 지금부터 2232년 전의 일이다. 진시황이 황허(黃河) 인근의 땅인 셴양(咸陽·함양)에 통일국가를 세웠고 이후 중국 땅에 들어선 왕조는 중국의 영토를 사방으로 넓혔다.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인 청은 최대 강역을 확보했고, 오늘의 중국은 그 영토를 물려받았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중국 땅에는 몇 개의 국가가 동시에 들어서 분단된 적이 있었지만 대체로 통일된 나라를 유지해왔다.
   
   인도는 중국과 완전히 다르다. 통일국가가 들어선 적이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다. 인도 땅을 거의 다 아우른 제국은 두세 차례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아우랑제브 시대의 무굴제국과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재위 기원전 274~232년) 때, 그리고 영국령 인도(1858~1947년)였다. 하지만 오늘날 인도·파키스탄 영토를 아우르는 전역을 직할령으로 둔 통일국가는 없었다.
   
   아우랑제브가 90세에 죽은 직후 무굴제국은 급속도로 와해됐다. 무굴의 구심력이 약해지자 제국의 태수들과 토후국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인도는 다시 사분오열됐고, 외침과 내전으로 혼미했다. 무굴의 황제들은 실세들에 권력을 빼앗기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죽어야 했다. 현명한 황제들은 예술과 오락에 몰두해야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인도 전역을 사실상 지배한 세력은 바다 건너 유럽에서 왔다. 영국은 무굴제국에 간청, 아라비아해의 항구도시 수라트에 1608년 상관을 열면서 인도에 진출했다. 영국은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와 경쟁하면서 인도를 야금야금 삼키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와 인도를 놓고 수차례 전쟁을 벌여 인도 정복의 결정적 발판을 만들었다. 1757년 콜카타 인근에서 벌인 플라시전투로 벵골만 지역에 향후 식민 지배를 위한 전초기지를 닦았고, 이후 마라타 왕국, 시크 왕국, 네팔 왕국, 아프가니스탄 왕국과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인도의 패자가 됐다. 영국은 이때까지도 형식적으로는 델리의 무굴황실을 인도 제국의 통치자로 인정했으나, 1857년 세포이항쟁이 일어난 뒤에는 간접통치를 직접통치로 바꿨다. 영국령 인도제국을 세웠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령 인도제국의 황제로 공식 즉위했다. 영국의 인도 통치는 효율적이었다. 인도 곳곳에 직할령을 두었으나 수없이 많은 토후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무엇이 인도이고, 누가 인도인인가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의 상황은 영국의 현란하고 복잡한 인도 지배를 잘 보여준다. 인도 땅에는 500~600개의 토후국과 추장국이 존재했다. 초대 인도 총리가 된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토후국들을 인도 공화국에 포함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됐다. 마지막 인도 총독이었던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의 정무비서관이었던 V.P. 메논은 인도 독립을 전후해 수백여 개의 토후국과 추장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여 이들 국가가 인도로 통합하도록 하는 데 무려 2년의 시간을 들였다. 1947년 등장한 현재의 인도도 통일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1947년 당시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영국령 인도의 일부분이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갔다.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인도 대륙을 아우르는 통일국가는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통일국가가 없었다는 점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가 독립운동을 벌일 때도 장애로 작용했다. 인도라는 단일국가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인도인 스스로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식민 지배자 영국은 인도의 독립 추진 세력에게 ‘역사상 인도란 나라가 어디 있느냐. 뭘 독립하겠다는 것이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며 대응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31년 3월 18일 영국 런던의 공연예술장인 로열 알버트홀에서 했던 인도 관련 연설은 특히 유명하다. 처칠 총리는 “인도란 추상이다. 인도는 유럽과 같은 정도의 정치적 인성이라고 하겠다. 인도는 지리학적 용어다. 그건 적도보다도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도의 정체성 논란은 오늘도 인도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다. 무엇이 인도이고, 누가 인도인인가라는 의문이다.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고 인도인들은 말한다. 인도의 작가이자 기업인인 산크란트 사누는 “식자층에서도 대화 중 툭 튀어나오는 이야기가 인도라는 나라는 영국인이 만들어낸 것이란 주장”이라며 “이는 인도는 인위적인 존재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18개 언어 인정할 만큼 민족·종교 다양
   


   사누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반도라는 지형에 맞춰진 인도의 지리적 통합, 문화적 통합을 예로 들면서 인도가 단일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도의 대표적 고대 서사시 중 하나인 마하바라타의 내용이 그 증거 중 하나란다. 마하바라타는 인도 전역을 아우르는 배경과 서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드리트라슈트라의 부인 간다리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제2도시인 칸다하르 출신이며, 드로파디는 오늘날 잠무-카슈미르 출신이고, 아르준이 결혼한 신부는 동북부 나가의 공주라고 사누는 말한다. 사누는 인도 최고의 힌두교 행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북인도 사람들이 남인도의 최대 힌두 성지인 티푸파티 사원에 순례를 가고, 남인도 사람들이 북인도의 갠지스 강변에서 열리는 쿰바 멜라 축제에 몰려가는 걸 보면 인도인들의 문화적 연대와 통일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유엔 사무차장과 인도 외교차관을 지낸 작가이자 현역 하원의원인 샤시 타루르(Shashi Tharoor)는 이탈리아와 인도를 비교해 인도의 정체성과 인도라는 국가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18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오랜 분리주의 시대를 뒤로하고 단일국가로 출범했을 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마시모 타파렐리 다젤리오(Massimo Taparelli d’ Azeglio)는 “이탈리아는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이탈리아인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샤시 타루르는 “네루는 인도를 만들었지만 이 같은 말을 할 유혹을 받지 않았다. 인도와 인도인은 이미 수천 년간 존재해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는 국가적 정체성을 갖지만 그건 전통적인 어떤 기준에도 근거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일 언어도 단일 민족도 단일 종교도 인도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도 헌법은 18개의 다른 언어를 인정하고 있으며 100만명 이상이 구사하는 말만 해도 35개에 달한다. 수없이 많은 민족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힌두, 이슬람, 시크,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가 병존하는 게 인도다. “결국 인도 민족주의는 언제나 생각 속에서 존재해온 민족주의였다”고 샤시 타루르는 말했다. 인도의 시성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많은 걸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땅이라고 설명했다. 타고르는 “인도라는 생각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돼야 한다는 강한 인식에 반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수수께끼 같은 나라
   
   인도라는 정체성은 1947년 독립 이후 오늘까지도 시험대에 올라 있다. 분리주의 세력이 인도 도처에서 중앙정부에 도전하고 있다. 실제로 인도 독립 1년 전인 1946년 여름 인도 북동부 지역의 나가 민족의 일파는 ‘영국이 떠나면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했고, 1947년 여름에는 비슷한 주장을 트래방코르 왕국(인도 최남단), 카슈미르 왕국(인도 최북단), 하이데라바드 왕국(중부의 이슬람 국가)의 왕들이 폈다. 남동부의 타밀 지역에서는 강력한 타밀 정당인 드라비다 카자감이 1947년 8월 15일 인도 독립일을 조문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펀자브 지역의 일부 시크교도는 칼리스탄이라는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많은 영국인들은 인도에 대해 독립했으나 통일된 인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폭발하던 분리주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잦아들었다. 1950년까지 500개의 토후국은 인도로 통합됐고, 남동부 타밀 지역의 드라비다인 정당들도 1963년 정강에서 독립 추진 방침을 삭제했다. 동북부의 또 다른 민족 그룹인 미조인들은 1965년 분리 투쟁을 시작했으나 20년 뒤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아삼주의 분리주의자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무장투쟁을 격렬하게 벌였으나 지금은 많이 약화됐다. 1980년대에는 시크 분리주의자들이 무장 소요를 펀자브주에서 일으켰으나 오늘날은 안정돼 있다.
   
   온갖 혼란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1947년 이후 많은 영국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단일국가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지구상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칭송받고 있다. 수수께끼와 같은 나라가 인도다. 특히 외부인은 이해하기 힘들다. 단 며칠 인도를 여행하고 와서 인도가 이렇더라고 예단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

 

11세기 이전 인도에는 역사서가 없었다

11세기에 첫 역사서 등장 인더스 문명 등 기록 감감
“역대 왕들의 순서도 몰라” 고대 역사 미스터리로

마하바라타 등 서사시 많지만 역사 기록에는 소홀
그리스인 침략자·중국 구법승들이 고대 인도사 기록

중국은 기원전 221년 이전에 첫 사서 인도가 중국에 1300년 늦어
“역사감각 약하다” 현대 인도인들 자기 비판

▲ 북인도 바이살리에 있는 아소카 왕 석주. photo 라집 쿠마르
영국 동인도회사의 캘커타 조폐국에서 일하던 제임스 프린셉(1799~1840)은 인도의 옛 동전 수집이 취미였다. 금은화 성분 분석 시험관(Assay Master)인 프린셉은 인도 북서지방에 있었던 인도·그리스계 왕국(박트리아)이 주조한 동전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주조된 가장 오래된 동전은 간다라 지방의 인도·그리스 왕국 메난드로스 1세(재위 기원전 165 혹은 155~130년) 동전이다. 치세에 맞춰 메난드로스의 얼굴을 집어넣어 제작된 이 동전은 그때까지 그리스인 통치자들이 만든 동전과는 달랐다. 메난드로스 왕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내용은 같으나 서로 다른 두 개의 문자로 표기했다. 동전의 앞면엔 그리스 문자로, 뒷면에는 고대 인도 문자의 하나인 카로슈티 문자로 표기했다. 프린셉은 메난드로스 1세 동전에 써있는 그리스 문자와 비교하며 고대 인도 문자 해석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에 앞서 19세기 많은 영국 출신 고대 인도 언어학자들이 완성하지 못한 카로슈티 문자 해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메난드로스 왕의 동전 말고도, 간다라 지방의 그리스계 지배자들은 두 개의 문자를 사용한 동전을 다수 남겼고 이게 프린셉의 문자 해독을 도왔다. 그는 카로슈티 문자 9개와 합성어 한 개를 새롭게 해독하는 데 성공했고 카로슈티 문자 해독에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프린셉의 연구는, 이집트를 원정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마을 로제타에서 발견한 로제타석으로부터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해낸 방식과 같다. 로제타석에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또 다른 두 개의 문자로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금석문의 주인공 피야다시 왕은?
   
   1837년 프린셉은 인도 고대사 연구에 이정표가 되는 금석문을 해독해 냈다. 쓰러져 가는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의 한 폐허에 서있는 오래된 둥근 돌기둥의 글 내용을 읽어냈다. 델리와 알라하바드 등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도처에 서있는 19개의 돌기둥과, 금석문이 있는 암석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프린셉의 판독으로 이 석주들에 금석문을 새긴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드러났다. 석주를 세운 주인공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피야다시 왕’이었다. 금석문의 내용은 피야다시 왕이 제국의 신민을 향해 발표한 포고령이었다.
   
   피야다시 왕의 석주는 부처가 태어난, 오늘날 네팔땅인 룸비니에서도 발견됐다. 룸비니의 석주에는 “즉위 20년이 지나 피야다시 왕은 이곳을 방문하고 경배드렸다. 여기는 사카족의 성인인 붓다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피야다시 왕)는 석상과 석주를 하나 세워, 신이 여기에서 태어났기에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으며 수입의 단 8분의 1만 내면 된다”고 적고 있다. 룸비니에서 발견된 금석문은 피야다시 왕이 석가를 숭배하는 독실한 불교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야다시 왕이 누군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피야다시는 왕의 이름이 아니고 공식적 호칭이었다.
   
   인도의 옛 불교 문헌에는 많은 전승과 신화가 나온다. 이들 문헌에서 먼 옛날에 마가다왕국을 통치했다는 아소카 왕(재위 268~232)이 특히 유명했다. 디비야바다나, 아소카바다나, 마하밤사(大史·스리랑카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아소카 왕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봐서는 비슷했으나 세부적으로는 많이 달랐다. 역사학자들은 불교 문헌에 나오는 어떤 내용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야다시 왕은 아소카 왕”
   

▲ 메난드로스 왕이 발행한 동전의 앞뒷면. 앞면은 그리스 문자로, 뒷면은 고대 인도 문자로 쓰였다.

프린셉에 의해 델리와 알라하바드의 석주가 해독되면서 석주 속 주인공 ‘신들의 사랑을 받는 피야다시 왕’에 대한 보다 완전한 그림이 그려졌다. 학자들은 점차 피야다시 왕이 불교 문헌과 전승에서 그렇토록 칭송을 받고 있는 아소카 왕일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피야다시 왕이 아소카 왕이라고 완벽하게 확인된 건 프린셉이 델리의 석주문을 해독한 지 78년이 지나서였다. 1915년 광산 기사 C. 비던(Beadon)이 인도 남부 하이데라바드 공국의 작은 부락 마스키(Maski)에서 아소카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발견했다. 이 돌에 새겨진 금석문 포고령에는 학자들이 그렇게 찾던 글씨 아소카란 이름이 ‘피야다시 왕’이란 글자와 나란히 나와 있었다.
   
   프린셉의 아소카 석주 글 내용 해독은 고대 인도사 연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그간 영국학자들은 인도의 고대사가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종교 문헌과 서사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데 답답해 했다. 불교와 힌두교, 자인교의 문헌자료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사람 이름이 나와 있으나 이들 자료는 신뢰하기 힘들었다. 어디까지가 신화인지, 무엇이 사실인지 구분해 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고대 인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그리스와 스리랑카, 중국 등 외국의 사료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예컨대 인도사에 최초로 연대기를 부여한 사가는 기원전 327년 오늘날 파키스탄 땅을 침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온 마케도니아 장군 네아르코스(Nearchos)이다. 네아르코스는 기원전 312년 죽기 전에 자신이 가본 인도와, 알렉산드로스군이 귀환하기 위해 인더스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가 아라비아해를 건너고,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한 항해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이 인도 측 기록에는 한 줄도 나와 있지 않다. 코끼리 군대를 몰고 나와 알렉산드로스와 맞선 서인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국의 포루스 왕의 무용담은 그리스 문헌에만 나올 뿐이다.
   
   
   그리스 측 자료로 인도 역사 추측
   
   아소카 왕의 할아버지이자 북인도의 첫 통일제국 건설자로 얘기되는 찬드라굽타 시대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당시 인도에 대해서도 그리스 측 자료로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제국의 동쪽을 차지한 셀레우쿠스 1세는 북인도의 패자인 찬드라굽타의 수도(파탈리푸트라·오늘날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에 대사를 보냈다. 메가스테네스 대사는 기원전 317년부터 312년까지 5년간 이 도시에 주재한 뒤 돌아가 ‘인디카’란 책을 썼는데 찬드라굽타 시대의 북인도 모습은 이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가 세운 아소카 석주 금석문의 해독으로 이제 연구자들은 인도 고대사를 뒤덮고 있던 어둠을 뚫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력한 열쇠를 손에 쥐게 됐다. 불확실한 전승과 불교 문헌 자료에 연대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석가모니의 입멸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됐고, 오래된 몇몇 불교 경전의 명칭, 기원전 3세기 불교 교단과 불교의 전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소카가 새긴 금석문은 오늘날 남인도의 IT 중심도시 벵갈루루 인근에서도,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에서도 차례차례 발견되어 아소카 왕의 광대한 제국의 크기가 확인됐다. 인도 역사서는 금석문이란 역사적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아소카에게 고대 인도 사상 최대 강역을 확보했던 지배자란 명예를 부여했다.
   
   아소카의 통일제국 이후 인도에는 또 다시 역사 자료의 암흑시대가 왔다. 어떤 통치자도 당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헌을 인도인들은 생산하지 않았다. 다만 구전되던 힌두교 경전과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문자로 기록됐다. 인도인은 위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냈지만 역사 기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10세기 이전의 인도에 대해서는 중국 여행자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인도 기록 남긴 첫 중국인은 승려 법현
   

▲ 아소카 석주의 고대 인도 문자를 해석한 제임스 프린셉은 힌두 성지 바라나시를 그린 소묘화를 다수 남겼다. 프린셉은 현대 ‘바라나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인도를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 최초의 중국인은 4세기 말 동진 때 승려 법현이다. 구법승 법현은 399~414년에 인도에서 15년간 머무른 뒤 귀국, ‘불국기’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또 다른 유명한 구법승 현장(602~664)은 7세기 초(629~645) 인도를 방문하고 귀국해 ‘대당서역기’란 책을 썼다.
   
   인도인이 쓴 첫 역사서는 12세기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 전역과 전 시대를 다루는 통사(通史)도 아니고, 최북단 카슈미르 지방사를 기록한 역사서였다. 카슈미르 왕국의 브라만 계급이었던 칼라나(Kalhana)가 1149~1150년에 카슈미르 역사서 ‘라자타랑기니’를 썼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 문자로 쓰여졌으며 카슈미르 지역의 왕조사를 고대부터 저자가 살아있던 당대까지 다뤘다.
   
   12세기가 되어서야 역사책을 처음으로 낸 세계 4대 문명권 인도를, 아시아의 또 다른 대국 중국과 비교해 보자. 인도는 중국에 비해 역사 기록에 관한한 너무 늦다. 고대 중국의 위대한 학자 사마천이 ‘사기’ 집필을 끝낸 게 기원전 91년이다. 중국 최초의 사서로 불리는 ‘상서(尙書)’는 중국의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통일 전쟁을 마무리짓기 전 시대인 선진(先秦) 시대에 나온 걸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역사책은 중국보다 1300년 이상 늦은 것이다. 고대 인도는 서사시에 관한 한 고대 그리스 못지않게 탁월한 작품을 남겼으나 역사 기록에 관한 한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인도에 역사책이 없다는 지적은 12세기 인도를 방문한 무슬림 학자 알비루니(973?~1048)의 책에서 나온다. 알비루니는 아프가니스탄 도시 가즈니의 술탄인 마흐무드의 북인도 약탈 전쟁에 따라왔다가, 인도를 연구한 저술 ‘인도의 역사(타아리흐 알 힌드·Ta’rikh al-Hind)’를 썼다. ‘인도학의 설립자’라고 불리는 알베루니는 ‘인도의 역사’에서 “불행하게도 힌두인들은 역사적인 일들의 순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왕들의 연대기를 말하는 데 매우 부주의하며, 정보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면 어쩔 줄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언제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꼬집었다.
   
   
   “힌두인들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알비루니보다 몇백 년 뒤 인도에 온 영국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1922년판 ‘캠브리지 인도 역사’는 “인도에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나 중국의 사마천과 같은 역사가가 없다”고 말했고, 인도인이 쓴 최초의 역사서 ‘라자타랑기니’를 영어로 번역한 영국인 마크 오럴 스타인 경은 “인도의 힌두인들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고 흔히 얘기된다”고 번역서 서문에서 말했다.
   
   이 같은 외국인의 지적에 대해 인도 학자들도 일부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인도의 저명한 민족 사학자였던 라메시 찬드라 마줌다르(1888~1980)는 1968년 저서 ‘고대 인도’에서 “인도 문화의 심각한 결점 중 하나는 역사를 쓰는 걸 인도인이 싫어했다는 점이다. 인도인은 상상할 수 있는 문학에 전념했으며 문학에서 탁월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 기록을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1세기 최초의 역사서가 나온 뒤에는 중세 인도인의 역사 기술은 크게 달라졌는가?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바부르나마’라는 자신의 생애에 대한 탁월한 자서전을 남겼고, 그의 후계자이자 2대 황제인 후마윤도 자서전을 쓰면서 전 시대와는 다른 흐름을 보였다. 특히 바부르나마는 당대 유럽의 어떤 황제에서도 볼 수 없는 역사적 문건이요,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후대의 사가로부터 평가받는다.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아크바르의 전기도 남아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와 무굴제국을 세운 무슬림들은 사마르칸트에서 제국을 일궜던 자신들의 조상 티무르가 자서전을 남겼듯이 그들도 새로운 땅 인도에 와서 산 기록을 붓을 들어 남겼다.
   
   
   무굴제국 기록도 외국인 여행가가 남겨
   

▲ 아소카 석주 겉면의 고대 인도 문자.

무굴 황제들이 일부 회고록을 남겼지만 무굴제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철저했느냐는 또 다른 얘기다. 무굴제국 시대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알기 위해 증거를 찾으려면 여전히 외국인에 의지하고 있다고 얘기된다. 2007년 ‘무굴의 세계(The Mughal World)’란 책을 쓴 인도인 에이브러햄 이랠리(Abraham Eraly)는 “무굴 인도의 일상생활을 알기 위해 찾아본 자료들은 모두 외국인 여행가들의 글이었다. 나는 이 글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고 실토했다. 무굴제국에 대해서도 좋은 책들은 아직도 외국인의 손에 의해 나오고 있다. 영국 작가 윌리엄 다를림플(William Darlymple)의 ‘무굴의 마지막 황제’ ‘흰색 피부의 무굴인들’이 대표적이다.
   
   영국령 인도 시대에 대한 연구를 인도인이 하기 싫어하는 건 이해할 만하다. 당시 영국의 동양학자들이 인도에 대해 광범위하고 상세한 기록을 수없이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7년 8월 15일 인도·파키스탄의 독립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인도인의 회고록이 거의 없다는 건 인도인들에게 기록 습관이 없음을 비판받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인도 현대사 연구도 다르지 않다. 인도는 독립 이후 군부의 정치 개입이 없었던 매우 드문 신생독립국가였다. 영국에서 같은 날 떨어져 나온 인도의 다른 형제 파키스탄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여러 차례 권력을 잡았다. 인도 군부는 왜 파키스탄 군부와는 달랐나 하는 주제는 인도 현대사의 큰 관심거리다. 이 문제는 여전히 인도 역사학자들에게 무관심 지대에 들어있다는 비판이 있다.
   
   이 시대 인도인의 역사 기록에 대해서도 인도인 스스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인도 크리켓의 역사’ ‘발리우드 역사’를 쓴 저명한 인도계 영국 언론인 미히르 보스(Mihir Bose)는 저명한 역사잡지 ‘히스토리 투데이’ 기고에서 “인도처럼 풍부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인도인 역사학자, 특히 큰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인도가 어떻게 모습을 드러냈는지를 설명하려는 대학의 역사학자도 거의 없다. 저명한 인도인 중 자서전을 쓰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서사시를 만들고 구전문학을 중시했던 인도와, 역사서 쓰는 걸 중시했던 중국인의 차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인류의 위대한 문명권인 두 국가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왜 이토록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일까? 그런 차이가 인도인과 인도 역사에 어떤 구별되는 점을 만들어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역사 기록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후대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말을 하는 인도인은 있다.

 

외부 세력의 침공로 아프가니스탄 루트가 있는 서쪽 국경을 막아라!

북쪽을 두려워한 중국, 서쪽을 두려워한 인도

북쪽·동쪽은 험준한 산맥 천연 요새 역할
남쪽으로는 인도양이 방어선 외부세력 침공 못해

무굴제국·델리 술탄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쳐들어와 나라를 세운 경우
알렉산드로스·칭기즈칸·티무르… 약탈당한 역사 수없이 많아

식민통치 시절 영국도 아프가니스탄 통한 ‘러’ 침공 경계
독립 이후에는 파키스탄, 최근엔 중국 국경 경쟁이 위협적

▲ 인도아대륙으로 쳐들어온 침략자들은 카이버고개를 통과해야했다. 카이버고개는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 있다. photo 제임스 몰리슨
카불의 왕이 된 바부르는 “기후가 정말 기분 좋고, 이런 면에서는 세계에 이런 곳이 없다”고 자신의 회고록 ‘바부르나마’에 썼다. 서기 1504년. 중앙아시아의 한 토후국에서 나이 12살에 부왕의 급서로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서 잃고 얻기를 반복하다가 카불에 가서 운 좋게 술탄의 자리에 오른 직후였다. 그는 카불을 사랑했다.
   
   바부르는 꽃을 사랑했고, 카불에 정원을 만들었다. 유명한 무굴식 정원의 출발이라고 할까. 그는 카불에서는 포도, 석류, 살구, 복숭아, 배, 사과, 모과와 비슷한 마르멜로, 대추, 인스티티아 자두, 아몬드, 호두와 같은 과일이 나오며, 생산량도 대단히 많다고 회고록에 썼다.
   
   바부르의 나라 카불에선 전 세계에서 온 상인을 볼 수 있었다. 서쪽으로는 오스만제국에서, 동쪽으로는 거란에서도 상인이 왔다. 교역량이 많았다. 말은 매년 7000~1만마리가 상인들의 손에 끌려 카불에 도착했다. 오늘날 인도·파키스탄인 힌두스탄에서는 매년 1만5000~2만벌의 의류가 수입됐다. 힌두스탄에서 오는 상품에는 노예와 흰색옷, 설탕과자, 정제설탕, 약품, 향료가 있었다.
   
   바부르 필생의 목표는 중앙아시아의 최대 도시인 사마르칸트의 군주 자리였다. 그의 5대조(祖) 티무르가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섰던 사마르칸트, 그곳의 이슬람대사원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신께 예배 드리는 걸 보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마르칸트를 호령했던 ‘100일 천하’의 기억은 강렬했다. 1498년의 일이었으니 불과 6년 전이었다. 할아버지의 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나 강한 적, 그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우즈베크인 술탄이 사마르칸트의 새로운 지배자였다.
   
   바부르는 이슬람 동쪽 세계의 중심지인 사마르칸트 대신, 카불의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힌두쿠시산맥 산록의 끝인 카이버고개(Khyber Pass)를 내려가면 인더스강이 있고, 그 너머 힌두스탄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고 했다. 바부르는 참모회의에서 논의한 끝에 “힌두스탄을 침입하기로 마침내 결정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카불의 바부르, 아그라에 입성하다
   

▲ 책 읽고 있는 바부르.

1505년 바부르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힌두스탄으로 내려서자 풀이 다르고, 나무가 다르고, 야생 동물들, 다른 사람들을 발견했다. “나는 놀라서 충격을 받았고, 참으로 경이의 공간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힌두스탄은 티무르 할아버지(재위 1370~1405)가 점령했던 땅이었다. 바부르는 델리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이 북인도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북인도는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불을 둘러싼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아 북쪽에선 우즈베크인들이, 서쪽에서 페르시아인들이, 남쪽에서 아프간의 다른 세력들이 카불을 위협했다. 힌두스탄 원정을 위해 처음으로 말안장을 올린 뒤 21년이 지났다. 바부르는 이제 결정적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1526년 초 병력 1만2000명을 이끌고 다섯 번째 출격에 나섰다. 펀자브 지방을 가로질러 델리 북서쪽 80㎞ 지점인 파니파트에서 델리의 이브라힘 술탄의 군대와 만났다. 이브라힘의 병력은 10만에, 전투 코끼리는 1000마리였다고 바부르는 회고록에 썼다. 바부르군은 적의 압도적 규모에 놀라서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바부르군에는 적에게 없는 게 있었다. 신병기인 화승총이었다. 이웃나라인 페르샤를 통해 배워온 오스만제국의 선진 군사 기술이었다. 1526년 4월 12일 파니파트평원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바부르는 화승총과 포병 기술을 앞세워 이브라힘을 꺾었다. 이브라힘 로디는 전사했다. 델리 술탄 시대라고 불리던 이슬람왕조 시대가 이로써 끝이 났다. 4월 25일 바부르는 델리에 들어갔고, 5월 10일 술탄왕국의 또 다른 수도 아그라에 입성했다. 바부르는 회고록에 “힌두스탄 전 제국이 아프간인들의 손에 마침내 들어갔다”고 적었다. 바부르는 북인도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그가 아그라를 수도로 해서 세운 나라 이름은 무굴제국이었다. 무굴제국은 중세 인도를 대표하는 나라이고 바부르의 손자인 아크바르(재위 1556~1605), 샤 자한(재위 1628~1658), 아우랑제브(재위 1658~1707) 등 처음 6명의 위대한 통치자를 거치며 인도사에 우뚝 섰다.
   
   인도는 서쪽 국경을 두려워했다. 서쪽의 아프가니스탄 루트를 통해 수없이 많은 외적이 쉬지 않고 밀려들었다. 바부르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로 쳐들어왔다. 중국은 북쪽 국경을 두려워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북쪽의 몽골·만주·흉노가 최대 위협 세력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이 동서로 길게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북쪽의 외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천혜의 방어벽
   

▲ 영국은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1842)에서 참패했다. 카불에서 후퇴해 잘랄라바드 요새로 살아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다.


   인도는 서쪽 국경을 제외한 다른 방면은 모두 천혜의 방어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북쪽의 히말라야산맥을 돌파해 넘어오는 외적은 거의 없었다. 동쪽 국경지대도 미얀마와의 사이에 험한 산악지대여서 이곳을 통과해 침공해 온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일본군이 2차대전 중이던 1944년 미얀마에서 인도 진공 작전을 폈을 때 이 루트를 이용한 바 있다. 일본군은 험로를 뚫고 들어가려다 참패했었다. 인도의 남쪽에는 거대한 인도양이 있어 천혜의 방어벽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대륙의 황금을 노리는 야심가들은 아프가니스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카이버고개를 지나 힌두스탄에 내려와야 했다.
   
   카이버고개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아대륙(지금은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해발 1070m 높이의 협로이다. 카이버고개를 통과해 인도로 들어간 고대의 가장 유명한 정복자는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기원전 4세기에 쳐들어 와 인도의 코끼리 부대와 싸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북인도 깊숙이 진격하려 했으나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고 오래도록 떠나와 지친 장병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남은 제국의 후대 통치자 중 한 명이었던 데메트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200~180)는 인도 땅에 쳐들어온 또 다른 그리스인이었다. 데메트리우스는 기원전 180년에 인도의 북서부 지역을 침공, 오늘날 파키스탄 도시인 탁실라에 왕국을 세웠다.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의 불교 문화가 버무려진 간다라 문명의 주인공이 그들이었다.
   
   이들에 이어 아프가니스탄 쪽에서 인도로 쳐들어온 정복자는 4세기 때 훈족이 있었다. 또 11세기 아프가니스탄 가즈니 왕조의 마흐무드, 12세기 후반 역시 아프가니스탄 구리 왕조의 무함마드가 있다. 몽골제국도 1221년부터 1327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년 이상 수차례 북인도를 침공했다. 몽골은 카슈미르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북인도의 중심인 델리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수많은 정복자들이 힌두스탄 평원에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으나 인도 땅에 눌러앉은 경우는 많지 않다. 인도대륙이 덮고 습기가 높아 고원지대에 살던 이들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즈니의 마흐무드는 11세기 초반 거의 해마다 북인도에 내려와 각지를 공략하며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1000년부터 1025년까지 마흐무드는 최소한 17회 인도를 향해 군사를 일으켰으며 매년 여름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갔다. 가즈니의 마흐무드처럼 오늘날 인도의 힌두신자들이 혐오하는 사람도 없다. 그는 점령지를 영토로 편입하지 않고, 인도의 힌두사원을 노략질하고, 건물에 큰 피해를 준 뒤 떠난 무자비한 침략자로 본다. 그는 거대한 힌두사원 도시를 일부러 겨냥했고, 유명한 힌두사원 도시 마투라와 솜나트 사원을 파괴, 약탈했다. 특히 인도 서부 오늘날의 구자라트주인 해안도시 솜나트의 힌두사원에 대한 1025년 약탈은 유명하다. 마흐무드 술탄은 힌두신 시바의 성기 모양인 링감 신상을 파괴하고 가즈니로 갖고 가 이슬람사원의 출입구에 놓고 밟고 지나가게 했다.
   
   
   치욕의 아프가니스탄 루트
   
   투르크계인 티무르(재위 1370~1405)는 인도인에게 잔혹한 정복자로 기억되어 있다. 중앙아시아에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북인도로 내려와 1398년 12월 델리를 함락시켰다. 그는 델리 입성에 앞서 포로 10만명의 목을 쳤다. 티무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델리 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짧은 시간 내 검 앞에 놓였다.
   1시간에 이교도 1만명의 목이 잘렸다. 이슬람의 검은 불신자들의 피로 씻겨졌다. 그날 모두 10만명의 미신 숭배자가 죽었다. 큰 전투를 벌이는 날 10만명의 포로들을 짐으로 둘 수는 없었다”고 기록했다. 무시무시한 학살이었다.
   
   바부르가 세운 무굴제국이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졌을 때인 1739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재위 1736~1747)는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해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까지 쳐들어 왔다. 나디르 샤는 델리의 붉은성에 들어가 약탈했으며 무굴 황제의 상징인 공작 옥좌를 빼앗아 갔다. 공작 옥좌에는 유명한 다이아몬드인 코이누르가 장식되어 있었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오늘날 영국 여왕의 왕관에 박혀있다. 나디르 샤가 인도에서 실어간 금은보화는 어마어마했다. 나디르 샤는 이란으로 돌아간 뒤 3년간 제국의 시민에게 세금을 면제해 줄 정도였다.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의 부하들도 델리와 아그라성에 들어간 뒤 금은보화만 챙겨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자고 황제에게 요구했다. 바부르는 수하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느라 애를 먹었다. 부하들이 공기가 맑고 기후가 좋은 카불로 귀환 준비를 서둘렀던 것이다. 바부르는 회고록에 기록했다. “나는 병력들이 술렁이는 걸 보고 장군들을 회의에 즉각 소집했다. ‘스스로 나의 친구라고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앞으로 (카불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하지 말라. 다만 적합한 이유를 대는 사람이 있으면 떠나게 하겠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방면은 19세기 인도를 장악한 영국에도 위협적이었다.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급격히 넓혀오는 제정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기 위한 외교적·군사적 시도를 계속해 왔다. 아프가니스탄을 놓고 영국과 제정러시아는 계속해서 줄다리기 벌였고 이는 훗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고 불린다. 영국은 제정러시아의 진출 시도의 최종적 목표가 인도라고 봤고, 제정러시아가 인도로 가는 교두보인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영국은 아프가니스탄과 무려 세 차례나 전쟁(Anglo-Afghan War)을 벌였다. 이때마다 영국은 카이버고개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에 갔고 때로 아프가니스탄인의 끈질긴 저항에 밀려 몰살당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이때 못 푼 한을 1979년 12월 소련 때 풀려고 아프가니스탄에 탱크를 밀고 내려왔다가 고전하고 결국 1989년 2월 철군하기도 했다.
   
   
   서쪽은 침공로이자 문명의 길
   

▲ 카불의 ‘바부르 정원’에 있는 무굴제국 제1대 황제 바부르의 무덤.

인도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는 지금도 서쪽 국경인 아프가니스탄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접한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파키스탄 정보부는 아프가니스탄의 반정부 세력을 내내 지원하고 있다. 소련이 카불에 들어와 있을 때는 아프가니스탄 반정부 세력인 탈레반을 지원했고,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또 반대 세력에 무기를 댔다. 지금도 파키스탄 정부는 카불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탈레반을 다시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는 달리 또 다른 이유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적극 돕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은 파키스탄에 위협이 되고, 파키스탄이 서쪽 국경 문제에 힘을 쏟을수록 인도와 접한 동쪽 국경에는 전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대륙에서 보면 서쪽의 아프가니스탄 루트는 외적의 주 침공로였지만, 새로운 문명과 기술이 유입되던 문명의 길이기도 했다. 헬레니즘 문화, 이웃 페르시아 문화, 아랍 문화가 이 길을 따라 들어와 인도 문명에 광채를 더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 갖고 온 헬레니즘 문화는 인도아대륙 서북쪽에 위대한 그리스·인도 하이브리드 문화인 간다라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스인 얼굴의 부처상이 대표적 유물이다. 인도가 자랑하는 아그라의 세계문화유산 타지 마할은 페르시아 건축가의 작품이다. 중동의 문명 선진국 이란은 인도의 이웃 나라로서 끝없는 문화·예술 분야의 상상력을 인도에 전했다. 무굴제국 시대에 유행했던 세밀화는 페르시아의 호라산 지역 화가들이 만들어낸 화풍이었다.
   
   오늘날 인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국경은 북쪽이다. 중국이 티베트를 장악하고 인도와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다. 히말라야 산중에 어떻게 국경선을 그을 것인가를 놓고 양국은 1962년 말 한 달 동안 전쟁을 치른 바 있다. 평화적 해결을 위해 양국은 이마를 맞대고 있으나 해결책이 쉽게 나오지 않고 있다. 국경에서 지금도 총성이 나고 있다는 보도가 인도 언론에서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모로코 여행가 이븐 바투타 14세기 ‘이슬람 왕국’ 델리의 9년 기록

이븐 바투타의 인도, 마르코 폴로의 중국

아랍·이슬람인 우대 정책 관직에 집까지 제공
“델리는 아랍인들 몰려드는 문명 세계의 중심지”

중국인들 인도 불교 성지로 순례 델리 궁정 찾아온 중국 사신단 기록도
중국 황제 “인도에 절 짓고 싶다” 제의

▲ 델리의 쿠툽 미나르. 이슬람 제국시대가 델리에 남긴 대표적 유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븐 바투타(1304~1368 혹은 1369)가 인도 땅에 도착한 건 1333년 9월 중순이었다. 모로코의 이 여행자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거쳐 오늘날 파키스탄 땅인 신드에 내려섰다. 당시 북인도의 지배자는 델리 술탄 왕국의 무함마드 빈 투글룩이었다. 이븐 바투타가 국경을 넘자,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의 국경 관리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국경 관리는 이븐 바투타의 용모와 옷차림, 동행자와 시종, 심부름꾼 수, 데려온 가축의 수, 거동과 자리에 앉을 때의 의례 등 모든 행동에 대해 상세하게 묻고 관찰했다. 관리는 이슬람권의 동쪽 끝인 모로코의 탕헤르에서 온 이 서른 살 된 남자에 대한 서면 보고서를 작성, 역참을 이용해 수도 델리로 파발을 띄웠다.
   
   이븐 바투타는 신드에서 델리의 술탄에게 바칠 물품을 구입했다. 술탄에게 바칠 말과 낙타 30마리와 기타 물품을 이라크 상인으로부터 샀다. 돈은 신드의 상인에게 빌렸다. 델리의 술탄은 물품을 받으면 몇 배로 보상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상인들은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국경지대에 있다가 델리를 향해 떠나는 외국인에게 돈을 기꺼이 빌려준다. 이븐 바투타도 수천디나르를 빌렸다. 그건 이븐 바투타 시대, 약삭빠른 인도 상인이 돈을 버는 상술이었다.
   
   신드 지방의 대도시 물탄에 가자 세관 직원이 나와, 이븐 바투타의 동행인들 중 상인에게는 휴대 물품의 4분의 1을 관세로 요구했다. 관리들은 이븐 바투타에게 입국 목적을 물었다. 당시 델리 왕국은 이민을 목적으로 국경에 도착한 사람에게만 입국을 허가했다. 이븐 바투타는 인도 입국을 위해, 살러왔다고 말을 해야 했다. 그러자 법관과 공증인까지 데려와 관련 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를 거부하는 이븐 바투타의 동료 중 일부는 입국이 불허됐다.
   
   이로써 중세의 가장 유명한 세계 여행가 중 한 명인 이븐 바투타의 인도 생활 9년이 시작됐다. 이븐 바투타 이전에 델리에 들어간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그가 남긴 인도 여행기는 단연 발군이었다. 이븐 바투타의 책 ‘여행기’를 통해 이슬람권의 동쪽 끝 나라 인도의 막대한 부와 자세한 생활상이 알려지게 됐다. 이 여행가 덕택에 우리는 인도의 수도 델리의 14세기 초반 모습과, 델리의 이전 역사를 접할 수 있다. 이븐 바투타보다 조금 앞서 동방여행에 나섰던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1254~1324)는 주로 중국 관련 기술로 유명하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시대 중국을 잘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븐 바투타는 비슷한 시기에 인도를, 마르코 폴로는 중국 이야기를 지중해 세계에 알린 셈이 된다.
   
   
   델리 술탄 행렬 땐 화포로 금전 쏘아
   
   이븐 바투타가 찾은 델리는 이슬람 왕국이었다. 북인도에 최초의 이슬람 제국이 델리를 수도로 해서 들어선 게 1206년이었다. 아프가니스탄 도시 가즈니의 통치자가 북인도를 정벌하고, 그의 장군에게 이곳을 통치하도록 했다. 델리 지사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주군이 죽자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역사상 ‘델리 술탄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시작이다. 델리 술탄 시대는 5개 왕조가 319년 동안 각기 길고 짧은 역사를 만들어갔고, 1527년 바부르가 세운 무굴에 멸망했다. 이븐 바투타가 델리에 들어갔을 때는 델리 술탄 시대의 세 번째 왕조인 ‘투글룩 왕조’ 시대였고, 당시 통치자는 이 왕조의 두 번째 임금 무함마드 빈 투글룩이었다.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초반 자신의 눈으로 본 델리에 대해 “중요하고도 웅장한 도시로서 아름다움과 든든함을 겸비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성벽이 있다. 델리는 인도뿐만 아니라 동방 이슬람에서도 가장 큰 도시로서 부지가 넓고 건물도 많다”고 ‘여행기’에 적었다.
   
   델리의 술탄이 가진 부(富)에 이븐 바투타는 감탄했다. 그가 전하는 술탄의 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은 이렇다. “술탄의 행렬이 지나가는 성문부터 궁문까지 이어지는 거리의 벽은 온통 비단으로 장식한다. 비단을 깔아 그 위를 술탄 행렬이 밟고 지나간다. 행렬 앞에는 수천 명의 노예 보병이 걸어가고 뒤에는 수많은 사람과 군사가 따라간다. 언젠가 술탄이 수도로 돌아오는 걸 봤는데, 코끼리 부대에 3~4문의 화포를 싣고 가면서 환영 인파를 향해 금전과 은전을 마구 쏘아대니 사람들은 그걸 줍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성에 들어와서부터 궁전에 이르기까지 내내 이렇게 했다.”
   
   이븐 바투타는 전설도 한 가지 소개한다. 무함마드 술탄의 아버지 기아숫딘 투글룩 술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수조 하나를 만들어놓고는 거기에 금 한 덩어리를 통째로 녹여 부었다고 한다.”
   
   지방의 지사들이 군주에게 바치는 진상품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븐 바투타는 “주지사들이 예물이나 세금으로 모은 재물을 헌상할 때는 금은제 대야나 주전자 같은 기명을 제작하기도 하고, 금이나 은으로 벽돌 같은 덩어리를 만들어 통째로 헌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군대 지휘관·궁정 관리에 외국인 임명
   
   술탄의 외부 행렬은 화려했다. 명절 아침 술탄을 위해 16마리의 코끼리가 준비됐다. 코끼리는 비단과 금, 보석으로 단장되어 있고, 술탄 전용으로 누구도 타지 않았다. 코끼리의 등에는 보석을 박은 비단으로 만든 일산(日傘)이 꽂혀 있는데, 일산대는 순금으로 만들었다. 코끼리마다 보석을 박은 비단 방석이 놓여 있고, 술탄은 그중 한 마리를 골라 탔다.
   
   이븐 바투타는 인도 술탄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도착하자마자 큰돈(6000탄카카)과 가구가 완비된 편안한 집을 제공받았다. 술탄은 배경이 불분명한 이븐 바투타를 왕궁의 법관(말리크 법학파)으로 임명하고, 연 1만2000디나르의 수입이 나오는 식읍 3개를 하사했다. 술탄은 아랍인들을 몹시 좋아하고 존중했으며, 그들의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이븐 바투타가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을 만난 건, 인도에 들어간 뒤 해가 바뀐 1334년 6월 8일이었다. 무함마드 술탄은 페르시아어로 이븐 바투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온 건 매우 경사입니다. 당신에게 자비와 은고를 베풀 것입니다.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곳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이븐 바투타는 술탄의 손에 일곱 번이나 입을 맞춰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탄은 페르시아어 외에 아랍어도 할 줄 알았다. 술탄은 아랍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아랍인을 ‘주인’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이븐 바투타는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이 군대 지휘관은 물론 궁정 관리의 대부분을 외국인으로 임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술탄은 외국인을 ‘낯선 사람’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고, ‘친애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게 했다. 이븐 바투타와 비슷한 시기에 델리 술탄 왕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인도의 시인이자 역사가인 이사미(?~1350?)도 아랍인과 이슬람인을 우대했던 델리 술탄에 대해 전하고 있다. 이사미는 저서 ‘푸투후스 살라틴’(Futuh-us-Salatin·1349~1350년작)에서 아랍인과 다른 외국인들이 ‘촛불 주변의 나방처럼’ 델리로 모여들었다고 쓰고 있다.
   
   
   4개의 도시가 합쳐진 델리
   
   이슬람 왕이 이슬람 세계에서 오는 인재를 후대했다는 건 당시 북인도 내 정세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 시대보다 약 9년 전 통치자이자 델리 술탄 왕조기의 위대한 군주 중 한 사람인 알라웃딘 칼지 술탄(재위 1296~1316)도 외국인을 중용한 측면에선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무슬림 역사학자 굴람 사르와르 칸 니아지(Ghulam Sarwar Khan Niazi)는 저서 ‘알라웃딘 칼지 술탄의 삶과 일’(1921년작)에서 “이슬람권은 선진 문명과 선진 군사 기술을 힘으로 북인도를 정복했으나, 인구의 절대 다수인 힌두 국민을 통치하고, 주변의 힌두 왕국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다. 델리의 술탄은 이로 인해 많은 무슬림 학자나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의 제국으로 와서 자신의 제국 통치를 돕기를 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다.
   
   “알라웃딘 칼지 술탄은 문학의 위대한 후원자였고, 다른 미술 발전에 상당한 추동력을 제공했다. 알라웃딘 술탄의 재위기에 사람들이 본 가장 놀라운 일은 모든 나라 국적이고 과학자와 전문가들 엄청난 수가 술탄 주변에 몰렸다는 점이라고 우리는 바라니로부터 듣고 있다. 수도인 델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바그다드에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카이로의 경쟁자가, 콘스탄티노플과는 같았다. 이들은 문명 세계의 중심지이다.”
   
   이븐 바투타는 황궁 외에도 델리의 여러 건축물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늘날도 델리의 최대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쿠툽 미나르 유물 지역을 그도 방문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쿠툽 미나르는 거대한 이슬람 첨탑과, 그 옆의 이슬람 사원 건물로 유명하다. 지금 대사원 건물은 많이 무너졌으나, 옆에 있는 72.5m 높이의 붉은 사암으로 된 첨탑은 700년 전 여행자가 보았던 때나 다름없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이븐 바투타는 코끼리 세 마리가 나란히 탑의 계단을 걸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적고 있다. 필자도 델리에 살 때 쿠툽 미나르 지역에 자주 갔고, 이후 여행 갈 때도 한번씩 들른다.
   
   델리의 도시 구조에 대해 이븐 바투타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4세기 당시 델리는 4개의 도시가 붙어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 오래된 도시는 이슬람 시대 도래 전 델리에 있던 힌두 왕국이 건설한 옛도시 델리가 있다.(이곳에는 오늘날 랄 콧 Lal Kot이라는 성곽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이후 이슬람 지배자들이 세운 세 개의 도시, 즉 시리(Siri), 투글루카바드, 자한바나흐가 들어서 있다고 했다. 이들 4개의 옛 성곽 도시의 건물들은 지금은 모두 폐허다. 그중에서 투글루카바드는 엄청난 길이(28㎞)의 성곽 일부가 남아있으며 그 옆에 그 성곽 도시를 지은 왕 기아숫딘 투글룩의 아름다운 무덤 건물은 지금도 잘 보존돼 21세기 관광객을 즐겁게 하고 있다.
   
   
   궁정 관리 부패 만연 “임금 10% 착복”
   

▲ 델리에 들어선 네 번째 도시 ‘투글루카바드’의 술탄 무덤. 이븐 바투타가 인도에서 주군으로 모신 술탄이 이곳에 누워 있다.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당시 인도 델리 왕실 관리의 부패에 대해서도 재밌는 언급을 남겨 놓고 있다. 그는 연봉으로 1만2000디나르를 받았는데 인도 궁정의 관리들은 급여를 10%를 떼고 준다고 했다. 이븐 바투타는 “술탄이 누구에게 얼마를 지불하라고 하면 통상 1할은 깎는다. 예컨대 10만디나르라고 하면 9만디나르를, 1만디나르라고 하면 9000디나르만 지불한다”고 적고 있다.
   
   델리의 궁정에는 중국 황제가 보낸 사신이 찾아오기도 했다. 남인도의 바닷길을 통해 도착한 사신 규모는 적어도 15명쯤 되고, 그들의 시종은 100명쯤이었다. 시기는 1342년 초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 황제의 이름을 이븐 바투타는 책 ‘여행기’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연대기를 따져 보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혜종(재위 1333~1370)이다.
   
   중국 황제가 델리의 술탄에게 어떤 선물을 보내왔는지도 우리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00명의 노비와 500필의 공단, 사향 5맛누, 보석을 박은 비단옷 5벌, 수놓은 화살통 5개, 칼 5자루 등을 보내왔다. 중국 황제는 한 가지 요청을 해왔다. 중국인들의 순례지인 카라질 지역에 불교 사찰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왔다.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은 ‘우상 묘당’이라고만 표현했으나, 북인도에 불교 성지가 있는 걸 볼 때 불교 사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슬림인 인도 술탄은 이같은 요청에 대해 무슬림 땅에서는 인두세를 납부해야만 (이교도의) 사찰 건립이 허용된다. 이런 세를 낼 용의가 있다면 건립을 허용하겠다”는 회신을 작성했다.
   
   이븐 바투타가 델리의 술탄 곁을 떠날 수 있었던 건 바로 중국 사신 때문이었다. 술탄은 답례 차원에서 사신을 중국에 보내기로 하고, 이븐 바투타를 특사로 임명했다. 무함마드 빈 투글룩 술탄은 이븐 바투타의 특사 임명 이유에 대해 “당신이 여행과 유람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술탄이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답례품 목록도 우리는 이븐 바투타를 통해 알 수 있다. 선물 목록은 길고 화려했다. 안장과 굴레까지 갖춘 말 100필, 노예 100명, 춤추는 힌두 여자 노예 100명, 값비싼 비르미야 면포 100필, 오색 비단옷 100벌, 솰라히야라는 옷 104벌, 쉬린 바프 천 100필, 샨 바프 천 100필, 다섯 가지 색으로 100필씩 융직 500필, 오스만산(産) 아마 천 100필, 모전 100개, 대형천막 1기, 돔 6기, 금제 촛대 4개, 은제 쪽빛 촛대 6개, 금제 주전자가 딸린 금제 대야 4개, 은제 대야 6개, 수놓은 술탄의 옷 10벌, 보석을 박은 술탄의 머릿수건 10개, 보석을 박고 수놓은 화살통 10개, 칼집에만 보석을 박은 칼 10자루, 보석을 박은 장갑 한 켤레, 남자 노비 15명 등…. 중국 황제가 보내온 선물보다 훨씬 많고 값비싸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보다 높은 평가
   
   1342년 7월 22일이었다. 이븐 바투타는 성대한 환송식을 치르고 중국으로 출발했다. 인도 땅에 들어온 지 8년10개월이 지났다. 이븐 바투타는 병력 1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떠날 남인도 항구 캘리컷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델리에서 약 130㎞ 떨어진 지점에서 힌두 반군의 공격을 받아 그는 일행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반군 규모는 10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이었다. 그는 반군에 포로로 붙들렸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다. 이쯤해서 그는 술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델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천생 여행객인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인도로 내려가 동방세계의 끝인 중국을 목표로 여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인도를 떠나기 전 남인도 서해안의 당시 사정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남인도의 대표적 무역항 중 하나인 캘리컷에 가보고는 “세계 방방곡곡의 상인들이 모여든다. 세계적으로 큰 항구 중 하나다. 중국과 자바, 예멘, 페르시아에서도 온다”고 감탄했다. 이곳의 지배자는 힌두 왕이며, 상권은 바레인 출신의 아랍인이 잡고 있고, 숱한 선박을 보유하고 중국·예멘·페르시아와 교역을 하는 선박왕이 있다는 이야기도 이븐 바투타는 전한다. 그는 이 항구에는 중국 선박 13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큰 중국 선박에는 1000명이 승선한다며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븐 바투타는 델리에서 자신과 함께 떠났던 중국 황제의 사신을 남인도에서 만났다. 이들은 조난당했으나 중국 상인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였다고 그는 말한다. 이븐 바투타는 이후 몰디브와 스리랑카, 벵골만, 미얀마, 인도네시아 자바섬,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거쳐 중국까지 갔다. 중국에서 다시 바닷길로 인도까지 돌아왔고, 그곳에서 바로 아라비아해를 가로질러 고향인 모로코를 향해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21세기의 한국에도 인도 수도 델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책은 한 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700년 전 모로코의 이 여행자가 남긴 델리와 인도에 대한 자세한 기록에 후세인은 감탄할 뿐이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비슷한 시기에 동방 여행을 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보다 높이 평가받는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은 ‘카더라’가 적지 않은 데 반해, 이븐 바투타는 직접 경험한 일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이 지은 황궁 붉은색 사암 성곽 안에 보석 장식 대리석 건물들

델리의 ‘붉은성’, 베이징의 자금성

델리, 1648~1857년 무굴제국의 수도 천문학자들이 길일 골라 천도
가수·광대 등 동원 거대한 천도행사 레드포트, 자금성보다 작은 규모

1857년 세포이항쟁 직후 17대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때 망국
영국 점령 후 군 병영으로 사용 내부 건축물들 많이 사라져

▲ 델리의 무굴황성
인도 수도 뉴델리의 옛 황성 레드포트(Red Fort)를 보러가는 길이었다. 2005년 여름 조선일보 뉴델리 특파원으로 부임한 직후였다. 뉴델리 시내의 주요 볼거리인 인디아게이트와 대통령 관저를 둘러보고 올드델리(Old Delhi)로 향했다. 올드델리는 옛 무굴제국의 수도이고 올드델리에 레드포트가 있다. 뉴델리 한복판의 인디아게이트에서 동북쪽으로 차를 타고 10분쯤 갔을까? 갑자기 길이 극도로 혼잡하다. 올드델리 지역이 시작됐다.
   
   얼핏 봐서는 어디까지가 뉴델리인지 어디서부터 올드델리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두 지역은 딱 붙어 있다. 뉴델리의 한복판인 인디아게이트에서 올드델리 황성까지의 직선거리는, 구글 어스 프로그램을 화면에 띄워놓고 재니 약 5㎞. 매우 가깝다. 흔히 두 지역은 사이클 릭샤가 길에 다니느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다. 델리국가수도(NCT·National Capital Territory of Delhi) 당국은 손님을 뒤에 태우는 자전거인 사이클 릭샤의 운행을 올드델리에서만 허용하고 뉴델리에서는 불허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교통질서가 어지러운 인도인데 사이클 릭샤까지 도로에 나오니 그 혼잡도가 극에 달한다. 휴! 인도다. 교통체증과 어지러운 거리, 소음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던 차창 오른쪽 밖으로 어느 순간 거대한 붉은색 성이 보였다. 레드포트다. 거대한 성곽, 압도적인 크기다. 성곽 앞의 녹색 잔디와 붉은색 성곽이 주는 색의 대비가 뚜렷하다. 큰 나라의 황제는 저 정도의 황성을 갖는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영국 점령 후 15개 건물만 남아
   
   레드포트에 가까이 가니 성곽 주변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다. 동양의 또다른 거대한 황성인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과 이 점은 마찬가지다. 명과 청의 황궁이었던 자금성도 적이 성곽을 넘어 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황궁 주변을 깊이 파고 물을 채워 놨다. 왕의 거처란 느낌만을 주는 조선의 궁전 담장과는 다르다. 레드포트는 적과 격한 전투를 한판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레드포트를 자금성과 비교하면 규모는 조금 작다. 자금성보다 황성이 된 시기도 계산해 보면 228년 늦다. 자금성은 명의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재위 1402~1424) 때부터 국가의 권력중심지가 됐고, 레드포트는 1548년에 북인도제국의 황성이 됐다.
   
   레드포트는 외관은 장중하나 기자의 눈에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점에서 중국인이 세운 자금성보다 좀 떨어진다. 자금성은 전체적인 외관이나, 정문인 오문(午門)을 보면 거대하면서도 단순미가 느껴진다. 건물 전체 윤곽을 이루는 직선과 사선, 그 아래쪽의 출입문이 만드는 아치 모양은 위압적이면서도 조형미를 갖고 있다. 기자는 건축에 문외한이지만 레드포트의 외관은 좀 투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드포트의 정문 격인 라호르 게이트 옆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고 들어간다. 오늘날 파키스탄의 대도시 라호르 쪽으로 난 문이라고 해서 라호르게이트라고 불린다. 게이트 앞의 안내문에 ‘델리에 세워진 7번째 도시’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델리 지역에는 지금까지 많은 도시가 들어섰는데, 무굴제국의 극성기 때인 5대 샤 자한 황제가 자신의 신도시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했고, 레드포트는 샤 자한의 황성이다.
   
   라호르게이트와 이어져 있는 시장통을 지나면 황성의 속살이 나온다. 황성 내부는 라호르게이트 쪽에서 보면 가로로 길게 배치된 구조다. 황실에서 가장 은밀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침전과 같은 공간이 제일 안쪽에 있고, 대접견실과 같은 공적 공간은 그 앞에 배치되어 있다. 황실의 공간과 행정부처의 공간으로 나눠진다고 할까? 레드포트의 내부는 영국이 델리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크게 파괴됐다. 그 안에 병영을 짓는다고 전각들을 상당 부분 철거해 원형이 훼손됐다. 황제의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사무 공간에 있었던 건물들은 몇 개 남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수는 15개라고 했다.
   
   
   평탄한 지형에 탈권위적 구조
   
   황제의 전용구역을 보면서 인도인이 지은 건물은 탈권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황제 전용구역의 가장 앞쪽에 자리잡은 대접견실(디완이암)에 있는 옥좌는 절대군주의 자리치고는 높이가 그리 높지 않다. 사람의 키 높이 정도에 옥좌 자리가 있다. 베이징의 자금성을 보면 궁전 뜰에서 황제의 전각에 오르려면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 하고, 전각 안에서의 황제 자리는 또 높았다. 레드포트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황성 내부는 평탄한 지형이고 건물은 수평적이고 탈권위적 구조다.
   
   대접견실 뒤로는 황제의 침전과, 황후의 침전, 황제의 소접견실 등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들이 일렬로 서 있다. 건물 사이에 별도의 담을 쌓아 놓지도 않았다. 왕래가 쉽고, 옆 건물에서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구조다. 건물 구조는 당대 인도인, 혹은 현대 인도인의 기질까지도 드러낸다고 본다.
   
   황제의 개인 공간에는 함맘, 즉 목욕탕이 있다. 함맘은 아랍·이슬람 문화의 일부다. 이집트 카이로의 구시가지 한복판에도, 터키의 이스탄불 시내에서도 함맘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슬람제국인 무굴의 술탄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목욕탕을 만들고 목욕을 즐겼다. 함맘 옆에는 작은 모스크가 있다. 모티마할은 샤 자한의 후계자 아우랑제브가 만든 개인 모스크이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신과 대화하며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레드포트 건축가의 솜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은 바로 황제의 구역이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대접견실, 그 뒤로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소접견실, 황제의 침전, 황후의 침전이 극히 아름답다. 대리석 건물 벽에 박아놓은 반(半)보석 꽃무늬 장식이 화려하다. 달이 밝은 밤에 보면 붉고 파란 색깔이 빛을 받아 빛난다고 한다. 소접견실(디완이카스)의 기둥 한쪽에는 “지상에 천당이 있다면 이곳이다”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샤 자한 황제가 만든,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웠던 옥좌가 있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옥좌는 없어졌지만 그곳에 박혀있던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중의 하나는 지금은 영국 여왕의 왕관에 박혀 있다고 한다. 레드포트의 주인공은 샤 자한. 그럼 샤 자한의 입을 통해 레드포트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무굴제국 두 개의 수도, 델리와 아그라
   
   내 이름은 샤 자한, 무굴제국의 5대 황제다. 황위에 오른 지 21년이 지났다. 이슬람력 1058년, 서기로는 1648년이다. 아그라 황성 바로 옆을 지나는 야무나강을 보며 아그라는 너무 어수선하다고 생각했다.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워졌다. 야무나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델리에 짓고 있는 새로운 황성 ‘랄킬라(붉은성이라는 뜻, 영어로 Red Fort)’가 곧 준공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도시 공사를 시작한 지 9년3개월이 됐다. 4대조 바부르 황제가 세운 제국은 이제 반석 위에 올라서 있다. 영토는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는 데칸고원까지 뻗어 있다. 제국은 극성기를 맞고 있었다. 내 이름 샤 자한은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황제’라는 뜻이다. 샤 자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굴제국의 위세는 동방세계는 물론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까지 떨치고 있다.
   
   무굴제국의 수도는 그간 델리와 아그라 두 곳 사이를 오갔다. 제국의 창업주 바부르 황제는 아그라에 나라를 세웠다. 할아버지 후마윤 황제는 아그라에서 나라를 이어받았으나 관리를 잘못해 지방 태수에게 빼앗기고 페르시아까지 쫓겨갔었다. 절치부심하고 나라를 찾는 데 성공한 뒤에는 델리에서 통치했다. 후마윤 황제는 불운했다. 뜻밖의 사고로 복위 339일 만에 신의 곁으로 갔다. 델리의 황성 내 황실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사흘 만에 사망했다. 후마윤의 미망인이자 나의 할머니인 하미다 바누 베굼은 델리에 후마윤 할아버지를 위한 멋진 묘당(廟堂)을 짓고는 1558년 델리를 떴다. 하미다 바누 베굼은 어린 아들 아크바르를 설득해, 델리가 지세가 좋지 않으니 천도하자고 했다고 전해진다.
   
   아그라가 다시 제국의 중심지가 된 지 90년. 나는 이제 아그라를 떠나 다시 델리로 돌아가려 한다. 내게 아이를 14명이나 낳아준 사랑하는 황후 뭄타지 마할(1631년 사망)이 죽은 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아그라의 황성에서 보이는, 야무나 강변에 황후를 위한 묘당 타지마할이 한창 올라가고 있다.
   
   
   “아무리 써도 돈이 줄지 않는다”
   

▲ 레드포트 내 황제 가족을 위한 공간. 소접견실, 침전, 목욕탕,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photo 아룬 가네시


   나는 타지마할 등 후대에 건축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건축을 남겼다. 황후도 죽고 이제 아그라를 떠나기로 했다. 후마윤 할아버지의 수도 델리로 돌아간다. 후마윤 황제가 살던 옛 황성이 아니라 새 황도를 세웠다.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새 황성에 대해서는 내가 살아있을 때 황실 도서관장이었던 무함마드 타히르(1627~1666)가 남긴 나의 전기 ‘샤자한나마’를 보시라. 당시 상황이 짐작될 것이다.
   
   “성채는 천국을 닮았으며, 야무나 강변, 델리시 외곽에 건설됐다. 전지하신 분(샤 자한)은 앞에서 언급한 강의 제방 위에 기후가 온화하고, 쾌적한 자리를 고르고 그곳에 장엄한 성곽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물줄기가 흘러야 하며, 성에서 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야 했다. 오랜 물색 끝에 델리시에서 가장 먼 외곽과 살림가르(城) 사이에 있는 부지가 선택됐다. 착공 행사는 그리 요란하지 않았다. 이슬람력 1049년 1월 9일(1639년) 금요일 밤에 고귀한 건물의 초석이 놓여졌다. 제국 전역에서 장인들이 명을 받고 모였다. 치세 21년인 이슬람력 1058년 3월 24일(서기 1648년 4월 18일)에 완공됐다. 공사는 9년3개월여가 걸렸으며 공사대금으로 6000만루피가 소요됐다.”
   
   황성과 함께 조성한 신도시에는 나의 이름을 붙였다. ‘샤 자한의 거처’라는 뜻의 ‘샤자하나바드’라고 했다. 성곽도시다. 천도를 위한 길일을 골랐다. 인도인은 길일을 많이 따진다. 아그라를 떠나 1648년 4월 19일 레드포트에 들어갔다. 야무나강 쪽으로 난 궁성문을 이용했다. 천도를 축하하기 위해 나는 성대한 행사를 명령했다. 나의 치세를 기록한 황실 사관들의 당시 기록을 종합해 보도록 한다.
   
   “이란과 투란, 카슈미르와 힌두스탄에서 온 가수들이 노래를 했고, 춤꾼과 광대들이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황성은 거대했다. 황성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 사아압둘라 칸은 6만루피 상당의 카펫을 특별접견실용으로 바쳤고, 알리 마르단 칸은 아람가, 즉 침전(寢殿)용 카펫을 진상했다. 사아압둘라 칸은 시를 지었고, 그걸 침전 벽에 새기도록 했다. 대접견실의 지붕과 벽, 기둥에는 투르크산 벨벳 양단과 중국산 실크가 내걸렸다. 대접견실 앞의 뜰에는 벨벳으로 만든 큰 천막, 캐노피가 세워져 있었다. 네 개의 은제 기둥이 캐노피를 받쳤고, 아마다바드에 있는 황실 공방 장인들이 준비한 캐노피의 크기는 가로 65.7m 세로 40.5m, 높이는 21m였다. 캐노피의 주변은 은제 난간으로 둘러져 있었고, 캐노피 안에는 1000명 이상이 들어갔다. 황제는 특별히 만든 옥좌에 앉았고, 옥좌 주위에는 금제 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황제의 앞에는 왕자들과 고관들이 앉아 있다. 샤 자한은 대연회를 열고 정부의 고관들에게 선물과 명예를 하사했다. 제위 후계자인 다라 키코 황태자는 예복 한 벌과, 코끼리 한 마리, 20만루피를 받았으며 2만잣을 받는 지위로 승급됐다. 사아둘라 칸은 예복 한 벌과, 7000잣과 6000수와르를 받는 지위로 승진했다. 마크라맛 칸은 예복 한 벌과 5000잣 및 5000수와르를 받는 지위로 승급됐다.”
   
   
   메카 방향 서쪽을 향해 건설
   
   황성은 가로 918m 세로 495m 크기의 팔각형 모양이고, 메카 방향인 서쪽을 향해 있다. 담 높이는 강 쪽은 18m, 육지 쪽은 33.5m다. 아그라 인근의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캐어온 붉은 사암으로 지었고 황성 둘레는 3㎞다. 레드포트에는 4개의 큰 출입문, 2개의 작은 출입구, 21개의 감시탑이 있고, 서쪽으로 난 라호르게이트가 주 출입문이다.
   
   레드포트 안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 그곳은 나의 옥좌다. 나의 옥좌가 그 유명한 공작좌(孔雀座)이다. 수많은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를 박아 만들었다. 샤자하나바드와 레드포트를 만든 기념으로 찬드니 촉의 장인들에게 만들도록 했다. 당시 나의 궁성을 찾아왔던 한 유럽인 보석상(Tavernier)은 650만파운드스털링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알다시피 인도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이아몬드가 나는 나라였다. 세상의 많은 군주들이 얼마나 힌두스탄의 다이아몬드를 탐냈는지? 인도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바부르 황제가 북인도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아그라에 들어갔을 때 바부르보다 먼저 아그라에 진입한 그의 아들 후마윤이 바쳤다는 다이아몬드는 유명하다. 바부르 황제는 그의 자서전 ‘바부르나마’ 중 아그라 입성 직후 “괄리오르의 힌두왕족들이 후마윤에게 붙들린 뒤 보석들을 자발적으로 바쳤다. 그중에는 유명한 다이아몬드 하나가 있었다. 너무 값나가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전 세계가 하루 쓰는 비용의 절반 가격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가 나의 옥좌인 공작좌에 들어가 있던 다이아몬드라고 일부에서는 얘기한다.
   
   
   세포이항쟁의 마지막 전장, 레드포트
   
   나의 치세에도 큰 다이아몬드가 발견돼 황실로 들어왔다. 황실 사관인 이낫 칸이 기록한 ‘샤자한나마’를 보면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골콘다의 광산에서 나온 놀라울 정도로 큰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보석상들은 15만루피라고 판정했다.
   
   나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죽은 뒤 무굴제국의 구심력은 약해졌다. 나라나 사람이나 영고성쇠가 있는 법이다. 극성기를 지나면 국가 구성원의 씩씩했던 기상은 약화되고, 사회는 느슨해진다. 왕권은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졌다. 변방의 수비선이 약화됐고, 서쪽 국경선에서 외적이 자주 들어왔다.
   
   나의 공작좌는 페르시아의 임금인 나디르 샤(재위 1736~1747)가 델리의 황성까지 쳐들어와 들고 갔다. 델리 북서쪽에 등장한 시크왕국의 병력이 1783년 3월 11일 레드포트에 진입하기도 했다. 레드포트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무굴제국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내가 만든 레드포트는 이후 무굴제국의 끝을 지켜봤다. 내 후손으로 마지막 황성의 주인이었던 바하두르 샤 2세(재위 1837~1857)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지배에 반기를 든 세포이들의 얼굴마담이 됐다가 1857년 옥좌에서 끌어내려졌다. 무굴의 17대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결국 오늘날 미얀마로 끌려가 양곤에서 가택 연금된 채로 살다가 이국땅에서 죽고 말았다.
   
   영국인들은 무굴제국의 간판을 공식적으로 내려버렸다. 레드포트는 1857년 세포이항쟁의 마지막 전장으로 변해 크게 손상됐다. 영국인은 레드포트의 높은 담장을 파괴하기 위해 대포를 퍼부었다. 이후 레드포트는 제국의 중심지에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군대가 주둔하는 병영이 되었다. 황성 안의 아름다운 많은 건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멋대가리 없는 병영 건물이 들어섰다. 1947년 8월 15일 레드포트에서 인도 독립을 알리는 인도의 삼색기가 올라가기까지 레드포트의 주인은 영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