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論……………1
Ⅱ. 花郞徒의 起源과 成立.2
1. 花郞徒의 起源…2
2. 花郞徒의 成立……5
Ⅲ. 花郞徒의 構成과 修練方法.8
1. 花郞徒의 構成……8
2. 花郞徒의 修練方法…10
Ⅳ. 花郞徒의 役割과 性格 및 意義12
1. 花郞徒의 役割…… 12
2. 花郞徒의 性格……… 13
1) 統一以前의 花郞徒의 性格. 13
2) 統一以後의 花郞徒의 性格.17
3. 花郞徒의 意義……21
Ⅴ. 結論…………22
-參考文獻-……25
Ⅰ.序論
三國중 가장 늦게 執權 國家 體制를 갖춘 新羅가 여러 가지 불리한 條件에도 불구하고 三國 統一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것은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그 중의 하나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花郞徒 組織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라 할 수 있다.
이 花郞徒는 新羅 社會의 社會構造의 이해를 위해서 또 新羅의 통일 전쟁의 수행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고 그 결과 花郞徒의 起源이나 組織 및 機能등에 대하여 다각도의 검토와 연구 업적이 나오게 되었다.
이 중 花郞徒 문제를 포괄적으로 집대성 한 것이 1943년에 간행된 日人學者 三品彰英의 『新羅花郞의 硏究』이다. 三品의 연구는 신라 화랑도에 관해서는 당시만 해도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고 이후의 모든 화랑도 연구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화랑의 문화적 성격을 南方文化와 관련하여 파악하고 北方文化에 속하는 고구려나 만주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三品彰英의 남방문화권설에 대해 李基白은 고구려의 경당에 대한 검토를 하여 고구려에도 화랑도와 비슷한 靑年集會所가 있었음을 밝히고 나아가 三品氏의 남방문화권설을 비판하여 三品氏의 한계성을 극복하였다.
한편 三品氏 이후 화랑도 문제를 전반적으로 검토한 李基東은 인류학·사회학·심리학 등 인접 과학의 학문적 성과를 원용하여 신라에서 화랑도가 성립되게 된 배경을 살피고 이 花郞徒가 골품 체제라고 하는 엄격한 身分制 社會에서 수행한 기능과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게 된 화랑도의 조직과 수련에 대해 새로운 정리를 하였다.
지금까지의 화랑도에 관한 연구는 骨品制 연구와 더불어 가장 많은 연구가 행해졌고 또 신라 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해명하는 데도 기여하는 바가 많았다.
오늘날 花郞精神의 계승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화랑도가 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바와 신라사의 전개에 끼친 영향은 확실히 큰 것이었다. 오늘날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民族的 念願과 결부하여 이를 다시 한번 고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本稿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신라 中古期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로써 화랑도의 구성 조직과 이 조직이 신라 사회에서 수행한 역할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花郞徒의 起源과 成立에 대하여 살펴보고 삼한시대 이래의 토착 신앙과 불교가 공인되고 확대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가지는 호국적 신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화랑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되는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中古期의 화랑도가 新羅社會를 전반적으로 통제하고 있던 골품 체제라는 사회 身分制 속에서 수행한 기능과 통일 이전의 花郞徒와 통일 이후의 花郞徒의 변천되어 가는 性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花郞徒의 起源과 成立
1. 花郞徒의 起源
花郞徒의 起源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史料는 [三國史記] 眞興王 37년조 말미의 다음 기록이다.
"봄에 비로소 원화를 받들게 되었다. 처음에 군신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염려하여 무리를 모아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수용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미녀 2인을 뽑았는데, 하나는 남모라 하고 다른 하나는 준정이었으며, 모인 무리가 삼백여명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어여쁨 다투며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주였다. 준정은 사형되고 무리는 화목을 잃고 흩어졌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뽑아 곱게 치장하고 화랑이라 하여 받들게 하니, 무리가 그름 같이 모여들었다.
혹은 소로 道義를 닦고, 혹은 歌樂을 즐기며, 山水를 遊娛하여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므로,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간사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그 중에 착한 자를 가려 조정에 추천하였다."
이 내용에 의하면 화랑도의 전신은, 여성 수령과 그를 따르는 삼백여 명 무리로 구성된 원화조직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三國遺事」' 권 3 彌勒仙化, 末尸郞 眞慈師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 24대 진흥왕의 姓은 김씨이고, 왕은 천성이 풍미가 있어 신선을 크게 숭상하였다. 人家의 娘子들 가운데 아름다운 자를 뽑아 원화를 삼고, 사람을 뽑아 무리를 만들고 그들에게 孝悌와 忠信을 가르치려 하였으니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大要이다.
이에, 남모랑과 교정랑을 두 원화로 취하였다. 모여든 무리가 삼, 사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한 후,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들고 묻어 죽였다. 그 무리들이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서로 울며 흩어졌다.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어 노래를 지어 거리의 소동들을 꾀어 길에서 부르게 하였다. 그 무리들이 이를 듣고 남모의 시체를 북천 속에서 찾아내었다. 이에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이르러 대왕이 명령을 내려 원화를 여러 해 동안 폐지하였다. 왕은 또한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여 반드시 風月道를 먼저 일으키고자 다시 명령을 내려 良家의 남자 중 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고,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國仙으로 삼았다. 이것이 花郞 國仙의 시초이다."
위의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는 , 화랑 제도의 설치에 대하여 그 기원을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다만 진흥왕代에 인재 선발을 위해 설치하여, 후에 인재 등용 기관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으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랑은 仙徒이다. 우리니라 에서 神宮을 받들어 하늘에 큰 제사를 지내는 것은 燕나라가 동산에, 魯나라가 태산에 제사지내는 것과 같다. 옛날에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길러서 이름을 國花라 하였는데,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로써 원화로 삼다가, 지소태후가 이를 폐지하고 화랑을 두어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화랑이라 불렀는데, 화랑이란 명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전에 선도들은, 다만 神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여 國公들이 그들을 따라 나란히 다녔고, 후일에 선도들은 道義로써 서로 勉勵하였으므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화랑 제도의 기원은 神宮의 제사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의식의 집행자가 처음에는 여성이었으나 후에 남성으로 바뀌었고, 처음에 신궁에서 신만을 받드는 행사가, 후에는 시대와 사회의 변천에 따라 면려하는 사회 교육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국가에 유능한 인물을 등용시키는 인재 등용기관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랑도는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기록에서처럼, 진흥왕 37년 (578)에 제정되었다기 보다는, 그보다 시기를 앞서 잡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울주 천전리 書石의 銘文에 의하면, 법흥왕代에 이미 郞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거니와, 화랑인 斯多含은 진흥왕 23년에 이미 출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첫 번의 화랑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랑세기]에 의하면 只召太后가 주관하여 화랑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법흥왕代이거나 지소태후의 섭정시기인 진흥왕 초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밖에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성행 연구는 많으나 그 주장 또한 다양하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李基東은 "화랑도는 삼한 시기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청소년 조직으로, 골품제도가 확립된 6세기에 접어들어 그 조직이 국가에 의해서 半官 半民 단체의 성격을 띠는 화랑도로 개편된 것"으로 보고 있다.
申采浩는, "화랑은 본래 상고 蘇塗祭壇의 武士, 곧 그때의 선비라 칭했는데 고구려에서는 衣를 입어 衣仙人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해 화랑이라 하였다."고 하여, 화랑의 기원을 소도 제단의 무사에서 찾았다. 崔南善은 화랑도를 '부루교단'이라 하였으며, 이 교단의 단장은 風月主, 原花, 國仙 또는仙郞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이 교단에서 지키는 신조와 덕목은 풍월도, 풍류도, 화랑도 또는, 선풍이라 일컬으니, 그 언어는 모두 '부루'에서 나왔고, 부루는 상고 조선의 고유한 신앙인 태양 숭배, 곧 '밝의뉘(광명세계)'가 변한 말이요, 이 '부루'가 한자로 적을 때 '風流'라고 이름 한데까지 변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호상은 우리 배달 나라의 배달 임금인 단군께서 배달 사람들에게 '얼'과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가르침이 곧 '배달길·배달교'이며 배달님은 배달길을 잘 알고 실행하여 배달 나라와 겨레를 잘 만들고 기르고, 잘 지키는 것을 맡은 임자요, 주인이라고 밝히면서 덧붙여
"우리 배달 나라의 신묘한 道요, 敎인 배달길과 배달교를 신라에서는 한문을 빌려 風月道 혹은 風流道라 하였으며, 풍월도의 '風'은 옛날에 발함 풍자요 또 발함은 배람이라고도 하며, '月'은 달 월자다. 이들 '발'과 '배'와 '달'을 합쳐 보면 풍월도는 '발달길'이요, '배달길'이란 말이다. 풍류도의 '流'는, 흐를 류자인 동시에 달아날 류자이므로, 풍류도 역시 '발달길'이요, '배달길'이다. 신라에서 맨 먼저 풍월주라 하였다가, 그 후에 이를 花娘 - 花郞이라 하였으므로, 풍월주는 발달님이고 배달님이 며, 또 이것의 다른 이름이 곧 花郞이다." 고 하여 화랑도의 근원을 단군 한배검의 배달교에서 찾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화랑도의 연원이 상고대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桓檀古記]의 다름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檀君世紀]에 "무술 20년 (BC.1763) 소도를 많이 세워 天指花를 심고, 미혼자제가 독서와 활 쏘는 것을 익히니 그들을 國子郞이라 하며, 국자랑이 돌아다닐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를 꽂으므로 사람들이 이들을 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 "는 구절이 있고, [太白逸史]에 의하면 "삼한의 옛 풍속에 소도 제천 의식이 있었고, 그 소도가 선 곳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 미혼자제에게 忠·孝·信·勇·仁의 五常과 讀書, 習射, 馳馬, 禮節, 歌樂, 拳搏 겸 劍術등의 六藝를 가르쳤으며, 女郞을 원화라 칭하였고, 男郞을 화랑 또는 天王郞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소도와 더불어 화랑도가 있었고, 소도는 한웅천왕 때에도 있었으므로 화랑도는 삼한(고조선) 이전 한웅천왕 때부터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화랑을 仙人, 仙郞, 仙風이라 칭하였는데 [三國史記]에 단군왕검을 仙人이라 하였고, 현재 잔존하고 있는 강화도의 三郞城은 단군왕검 때에 축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삼랑성의 "郞"이 화랑의 "郞"과 같은 글자이다. 이렇게 볼 때 화랑도의 연원은 단군왕검 시대나 그 이전 시대로 소급된다.
따라서 화랑도는 신라에 와서 처음 창설된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 또는 그 이전 한웅천왕 시대의 소도 의식과 더불어 있었던 것을 신라 시대에 와서 부활 재조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신라는 고조선이 붕괴되자 고조선의 유민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라는 [三國史記]의 기록을 생각해 볼 때 화랑도가 한때 단절되었다가 신라의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부활, 재조직된 것이 분명하다.
2. 花郞徒의 成立
新羅에서 花郞을 一名 [風月主]라 한 것은 原始宗敎 [밝의 뉘]의 교리가 後에 時代와 地方에 따라서 [부루]로 變하게 되어 鄕札로써 [風流]로 表記된 데서 온 것이다. 花郞集團은 이 [부루敎團] 의 後身이며 花郞을 [風月主]라 부른 緣由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또한 花郞徒의 本來 名稱으로 [風月道] 혹은 [風流道] 라 하였으니, 이는 한마디로 말하여 風流道는 槪念的인 이름이고 花郞徒는 形式的인 名稱인 것이다.
風流道를 花郞徒로 改稱하게 된 由來는 花郞이 바로 風流道의 修練徒요 同時에 國家 目的達成의 主役이라는 點에서 花郞存在의 意義와 價値를 固定시킨 말이다. 이로부터 花郞이라는 말을 新羅에 있어서 囑望的 對象으로 된 것이다.
花郞徒를 一名 國仙徒라고 하는데 이 意味는 "國"은 古朝鮮을 의미하며 "仙"은 古語에 宗敎를 示唆한다. 즉 仙은 古朝鮮時代의 檀君崇拜의 형태를 가진 唯神的 信仰에서 出發한 原始仙敎요 또 仙은 神과 音이나 뜻이 서로 相通하니 地上神人을 意味한 듯 하며 神人인 檀君을 仙人이라고도 하였다.
花郞徒를 一名 國仙徒라고 하는데 이 意味는 "國"은 古朝鮮을 의미하며 "仙"은 古語에 宗敎를 示唆한다. 즉 仙은 古朝鮮時代의 檀君崇拜의 형태를 가진 唯神的 信仰에서 出發한 原始仙敎요 또 仙은 神과 音이나 뜻이 서로 相通하니 地上神人을 意味한 듯 하며 神人인 檀君을 仙人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해 國仙의 名稱에 대하여 金煐泰는 國仙은 나라의 神仙의 뜻이 아니라 미륵을 가리키는 彌勒佛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花郞徒의 우두머리를 花郞 (風月主, 源花仙郞) 이라 하고 國仙은 花郞 中의 上首花郞 즉 最高花郞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國仙은 國家的 權威를 가진 全風月徒의 최고 통솔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敎團에서 지키는 信條와 德目을 風月道 風流道花郞道 또는 仙風이라 일컬으니, 그 語源은 다 [밝은뉘] 가 變轉한 [부루] 에서 나온 말이다.
'郞'이 許多한 男性의 人稱에 接尾하고 있어 꽃같이 아름답게 장식된 少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할 수도 있듯이 花郞이란 名稱은 貴族 少年의 늠름한 威儀와 恍惚한 脈飾에서 稱與된 愛稱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의미와 내력을 갖고 있는 花郞의 명칭이 中古期의 신라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며 제도로써 성립되었는가를 그시대 상황을 통해 살펴보자. 한 時代에는 그 시대 나름의 독특한 文化가 있다. 文化란 바로 그 시대의 産物이기 때문이다. 그花郞徒가 비록 신라의 中古期에 국가적 제도로써 成立하였으나 그것은 앞 章에서 살펴본 대로 이전의 韓國 古代社會의 精神的 傳統에 연원을 두고 있었으며, 그 명칭 또한 傳來의 유풍을 승습한 것이었다. 따라서 花郞徒가 신라에서 成立할 수 있었던 배경은 三韓 중에서도 村落共同體的 性格을 늦게까지 가지고 있었던 新羅의 保守性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5세기이래 新羅의 國家社會는 점차 親族的이며 分枝的인 사회 조직을 기반으로 발전되어 갔으며 또 階級分化가 促進되면서 三韓時代의 각 村落共同體의 均衡은 파괴되어 갔다. 6세기 초 신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서 對外的 팽창을 도모하고 州郡制와 地方軍制가 정비되면서 法制化의 時期가 到來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당시 高句麗와 百濟는 국가 형성 이후 수백년 동안 체제의 정비와 武力的 능력을 保有하여 신라의 敵對 勢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그 팽창 과정에서 야기되는 무력충돌을 극복해야만 했고 그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靑少年 集團
의 軍士化와 국가적 육성의 요구가 대두되었다. 결국 화랑도는 사회의 保守性에 의하여 늦게까지 남아 있던 氏族共同體的인 전통과 諸思想을 융합한 기반 위에 성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앙 집권화가 되어 가는 일련의 法制化의 변화 과정에서
대외 팽창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전투능력 보유집단이 중앙으로 흡수 編制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즉 [欲興邦國]이라는 國家的 目的을 達成시키는 데 必要한 人材敎育의 方法으로 採擇하여 武力强化와 人材養成의 目的에서 傳來의 靑少年修養團體를 國家的 차원에서 組織化시킨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背景과 必要性에 의해 성립된 花郞徒의 淵源은 어디에 起因하는 것일까? 崔致遠의 鸞郞碑序에 '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 했으니 여기의 '國'은 新羅國이며 "實乃包含三敎" 라 한것은 三敎의 성격을 包含했다는 뜻이다. 또 [仙史] 는 단군 이래의 기록인 것이니 花郞徒 정신은 外來思想인 儒敎, 佛敎, 道敎의 三敎思想이 傳來되기 전에 三敎를 包含할 수 있는 우리의 思想에서 起源한 것으로서 그 思想의 淵源을 上古思想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花郞制度의 연원도 三國時代 以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花郞徒의 淵源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申采浩는 멀리 三韓時代의 "蘇塗祭壇의 武士" 에서 그 起源을 구했고 崔南善은 花郞의 起源을 [부르교단] 에 두고 韓國古有의 [밝은뉘]信仰에 花郞徒를 原始的 形態에 附會시켰다. 한편 金忠烈은 그來源은 옛날의 [南女群聚 相就歌戱] 하던 風俗의 一端에 두었으며 邊太燮과 李基東 등은 삼한 사회의 청년집단의 共同體的인 遺制에 기원을 두었는데 모두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주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村落의 모든 청소년들을 組織에 결합시키는 要素가 대개 특정된 神에 대한 共同의 崇拜나 儀式이라고 생각할 때 花郞의 起源은 三韓時代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村落共同體의 유풍을 간직하고 있던 諸集團에서 存在했을 집단 구성원간의 유대 특히 활동적이며 생산적인 활동의 주체인 청년층의 협동 유대관계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共同神을 중심으로 하던 것과는 달리 國家 또는 王朝를 중심으로 하여 신라 사회에 알맞게 再組織한 것이 화랑제도로 성립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思想的 연원을 三韓時代 청년 조직의 巫覡的呪術的인 山神 崇拜思想으로 추정한 見解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고대 샤머니즘을 包含한 天神思想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 實體的 存在 問題에 있어서는 구체화되고 조직적인 '靑
年組織' 이라기 보다는 사회 생활 내지는 생산 관계에 있어서의 협동체 및 단순한 集團으로 파악하고 싶다. 이러한 연원을 유추할 수 있는 花郞徒가 國家에 依하여 正式으로 制度化된 확실한 年代는 알 수 없다. 이미 언급했듯이 花郞徒의 제정에 대한 記事는 眞興王 元年時부터 보이고 眞興王 23年條에 斯多含이 花郞으로서 大伽倻 征伐에 종군하여 軍功을 세웠다는 記事도 있다. 또한 蔚州君 斗東面 川前里 書石의 銘文 가운데 보이는 '乙巳年' 이 法興王 12年 乙巳에 比定할 수 있어 花郞徒 制定을 法興王代 까지 소급하는 見解도 있다. 그러나 眞興王 37
년에 와서 國家의 切實한 要求 아래 正式으로 그 制度가 設定되기 전부터 私設團體로서의 宗敎的 集團들이 수 많은 郞徒를그 門下에 두고 宗敎的 敎育을 實施하여 왔으며 國家 有事時에는 政治的 軍事的 領域까지 進出하여 國家 危難의 防牌가 되었다.
이러한 점이 그 사이의 經緯를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花郞制度의 국가적 성립은 法興王代의 律令 領布를 계기로 法制化의 경향이 현저하던 당시부터 국체화되기 시작하여 眞興王 37年에 와서 中國의 制度가 우리 傳來思想에 淵源을 둔 民間組織과의 조합으로 成立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Ⅲ. 花郞徒의 構成과 修練方法
1. 花郞徒의 構成
眞興王이 朝廷에서 정식으로 花郞制度를 제정한 國家的 目的은 어디에 있었던가? 安鼎福은 [用人之術] 로 보았고 崔南善은 人物 練成機關으로 보면서 考選法으로 취급하였다. 李基白은 敎育的 기능을 갖는 기관으로 李瑄根은 人材養成과 武士 정신고취로 보았는데 모두 타당하게 생각된다. [三國史記] 卷 4 眞興王 本紀 記事에 의하여 花郞徒 制定의 당초의 目的이 人材發見 및 推薦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인물의 양성과그 登用에 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은 목적으로 제정된 花郞徒의 組織은 [三國史記] 와[三國遺事] 의 花郞 관계 가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알 수 있다. 즉 花郞徒는 一代에 몇 개의 花郞 집단으로 나뉘어있고 이를 중앙으로 통제하는 것이 소위 花主였다고 추측된다.
日常人이 받드는 花郞과 조정에서 받드는 花主를 구별해야 하기 때문에 國仙은 花郞의 上首 花郞인 것을 알 수 있다.
一代에 속하는 花郞集團의 숫자는 적어도 7개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앙 조정에는 花主 國仙이 있고 그 밑에 소수의 花郞들이 있어 郞徒를 거느렸다. 또한 各個의 花郞集團은 花郞한 명과 僧侶郞徒 한 명 그리고 花郞을 따르는 많은 수의 徒衆즉 郞徒로 구성되어 있다. 各個의 花郞集團에 소속된 郞徒의숫자는 잘 알 수 없으나 대체로 7백 내지 8백명에서 1천명에 미치는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花郞은 郞花의 師傳였다고 볼 수는 없고 花郞과 郞徒가
組織的으로 構成된 것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私조직이요 따라서 종적, 횡적으로 聯繫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이유로 는 花郞斯多含의 경우 千餘人의 郞徒가 있고 花郞 추대 연령이 15세로 많은 郞徒의 師傳이 되기는 어렵지 않은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花郞의 修練이 일정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아니고 名山大川을 순례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郞徒를 모두 거느리고 다닐 수도 없을 것 같다. 따라서 花郞은 한 門戶의상징적 存在로 衆庶人의 領導的 위치를 가진 中樞人物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경우 花郞徒의 구성원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가 문제이다.
먼저 花郞의 신분 관계를 살펴보면 현존 문헌 사료에 나타난花郞 출신 성분은 眞骨 출신이었다. 例를 들면 眞興王代의 斯多含, 眞平王代의 金庾信, 金欽春, 近郞, 竹旨郞, 太宗武烈王代官昌, 孝昭王代 夫禮郞, 憲安王代의 金應, 眞聖女王代 孝宗郞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花郞이 귀족 출신이어야만 했던 이유로는 첫째 당시 신라 국가가 귀족 지배적이라는 점과, 둘째, 이러한 단체를 운영함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셋째, 지도자는 계급적 지위와 높은 수준의 학문과 교양이 필요하다고 보는것이 합당한 분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花郞은 단순한 貴族出身이란 요건뿐만 아니라 美貌의 男性으로서 衆望에 의해추대되었던 것 같다. 僧侶花郞의 경우 그 출신 성분은 확실치않으나 三國時代의 승려들의 最高 귀족층의 한 분자였으며 동시에 최고의 지식인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시 귀족출신으로 규정지어도 별 無理가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신분으로 구성되는 花郞徒는 그 집단의 年齡이 15-17세로 추정된다. [三國史記] 卷 1의 金庾信傳(上)에 의하면 그는 15세에 花郞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三國史記] 에 立傳된 화랑들을 보면 그 연령이 대개 15-16세로 나타난다.
眞興王代 斯多含은 15, 16세때 大伽倻정벌(562)에 출전하였고 (卷44 斯多含傳) 武列王代 官昌은 黃山전투(660)에서 16세로전사했다. (卷 47 官昌傳), 花郞인 金膺廉 (후의 景文王) 은 15세때 臨海殿 宴會에 초청되었다(卷11, 憲安王 4년 9월로). 따라서 화랑의 適齡은 15세이며 그 修練年限은 대체로 3년간으로 추측한 견해가 옳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郞徒의 年齡 또한 花郞의 同年輩 혹은 그 이하의 소년들로서 조직된 것이 아닌가한다.
이러한 花郞徒의 組織을 一絲不亂한 것으로 보거나 國仙을 最高 統制機關 또는 最高敎育行政機關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하여 金忠烈은 花郞徒가 국가적 운동의 主役이었음에도 국가는 이를 직접 統轄장악하여 조직하거나 규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私事로이 自律的으로 運用되도록 放任했다는 데 妙가 있다고 보았다.
花郞을 뽑고 國仙을 추대하던 초기에는 국가에서 風月主니 花主니 하는 統轄體制를 두었지만 일단 花郞徒가 완전히 국가적 운동체제로 軌道에 오르자 國家는 다시 이를 각기 집단과 門閥의 자율적 운용 하에 放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一花郞 一門戶格으로 花郞의 문호가 있어 郞徒가 따랐고 花郞과 郞徒가 組織的으로 構成되어 운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그 理由로는 화랑을 따르는 郞徒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결국 花郞徒는 國家의 필요한 靑少年 人材를 확보, 양성하려는 軍事的 교육기관의 임무를 띠고 출발하였으나 法律로써 强制力을 가지도록 제정된 公的인 국가기관이 아니라 半官半民의 성격을 띤 청소년 조직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2. 花郞徒의 修練方法
花郞徒의 修練方法은[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라 한 기록을 통해서 어느 정도 살펴 볼 수 있다.
첫째의 [或相磨以道義] 는 氏族의 전통과 신앙은 崇拜하면서 相互扶助, 和合團結하는 사회정의를 연마-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花郞이 理性的인 슬기를 터득하여 그 사회에서의 우수한 엘리트로서의 자격과 여건을 갖추는데 그 근본적인 目的이 있는 것이다.
둘째의 [或相悅以歌樂] 은 원시사회에서 共同的으로 찾아볼 수 있는 歌舞的인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역시 道義 연마와 연관이 있으며, 이 方法을 통하여 서로의 友情과 集團의 공동의식을 도모하고, 엘리트로서의 수양에 보다 더 예술적인 정서적 訓練을 위한 것이다. 즉 보다 快活하고 보다 멋진 생활을 영위하기 위함이었다.
셋째의 [遊娛山水] 는 내 나라의 멀고 가까운 名山과 大川을 두루 돌아다녀 국토와 대자연에 끝없는 애착심을 갖게 함이다.
그런데 간혹 花郞의 遊娛山水를 花郞徒 운동 사상 후대적인 혹은 말기적인 현상으로 보려는 論者들이 있다. 즉 孫晋泰氏는 삼국 통일 이후 평화시대의 文弱에 빠진 花郞團들이 遊娛-社交를 目的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나, 아는 단순히 놀고먹는 유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시사회에 있어서의 聖地巡禮라는 신성한 종교적인 기능을 가졌다는 것에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花郞徒의 생활은 心身練磨, 道德修行, 親睦團結, 情緖娛樂等, 청소년 생활의 전반에 걸쳐 必要한 修行을해 나갔다.
이러한 수행을 하는 花郞徒는 그 敎育의 최종적 목표가 國家에 必要한 인재 양성에 있었다. 즉, 花郞徒의 敎育目的은 賢佐忠臣을 양성하는 治人敎育으로서 國家에는 충성을, 백성에게는 人望있는 政治人을 양성함에 있다. 良將과 勇士를 기르는 군사 교육적 목적, 즉 당시 치열한 삼국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國防人材를 양성하려는데 있다. 孝悌忠信-勇敢-信義의 도덕적 인간 형성이 또한 수련 목적의 하나였으니, 이는 圓光法師의 世俗五戒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세속오계는 처음부터 정식으로 國家的 승인을 얻은 것이 아니라 眞平王代에 花郞 貴山과 項이 함께 圓光法師를 찾아가 받은 終身之戒로 불교의 10가지 菩薩戒와는 다른 臣者된 사람이 지켜야 할 戒銘이었다. 前述한 바와 같이 圓光의 세속오계는 역시 貴山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고, 貴山의 戰死를 계기로 하여 花郞五戒로 보편화되었다. 이 오계 中에도 臨戰無退는 당시의 三國間의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인 만큼 가장 비중하게 작용한 듯하다. 세속오계는 花郞徒의 德目으로서는 물론 가장 완숙한 이념으로서도 모든 花郞의 수행 지침이 되었다. 따라서 圓光의 세속오계는 儒-佛-仙, 三敎 조화 사상의 바탕에 시대적 요구인 戰訓을 가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花郞徒가 위와 같이 國家에서 必要로 하는 인재 양성을 目標로 하였기에 그 교육과정 또한 매우 중요하다. 花郞徒의 교육과정은 宗敎敎育의 과정을 비롯하여 知的인 교육과정과 함께 活動的인 교육과정인 사회적-정서적 활동과 군사훈련 등이 있다.
花郞徒의 교육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宗敎敎育의 과정으로서 그들은 神靈과 交融하는 주술적 神儀를 行하였으며, 도시에 神의 계시를 받아 정신을 통일하였다. 또한 花郞들은 신앙을 통하여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確立하여 갔다. 知的교육과정으로는 儒-佛 -道 3敎를 硏讚하였다. 花郞들은 高名한 학문의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글을 배웠고, 文字敎育도 배웠으며, 詩-尙書-禮傳 등을 배웠다. 情緖敎育課程으로는 歌舞와 風流를 배웠다. 花郞徒들은 儀式이나 出征의 마당에서, 또는 행군이나 陳中에서, 그리고 산수 수려한 곳에서 지낼 때는 춤과 노래와 풍류로 사기를 돋구었다. 이러한 과정은 현존 향가 14首 중 7首가 花郞에 의해 지어지거나 關係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軍事的 교육과정으로 검술이나 遁甲立成法 그리고 弓射 등을 연습하였다. 이들은 무예뿐만 아니라 精神力의 수련도 쌓았다. 花郞制度는 新羅의 지도 측에 속하는 특수 인물의 선발 법인데, 일반적으로 활쏘기와 말타기의 능력을 복 등용하였으니, 대개 당시의 인재 등용이 武를 기준으로 行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花郞徒의 敎育方法은 集團生活을 通한 敎育과 실재 경험을 통한 학습 방법이 특색이라 하겠다. 이에 대하여 朴贊氏는 集團的 寄宿제도라 하였으며 韓基彦氏도 起居를 같이 하고 함께 다니는 동안 서로 人品을 알아서 國家에 천거하니 인재 등용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던 것이라 하였다. 前記한 바와 같이 花郞徒들은 國土를 순례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인격을 陶冶하는 적응 훈련을 실시하여 유사시에는 체험에 依한 행동을 不辭 할 수 있는 투쟁 정신을 연마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이 花郞徒는 軍事的 訓練과 정서적 훈련을 단체적-경험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삼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속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花郞制度를 重創하였던 眞興王의 이념에 부응하였으며. 이것은 花郞制度가 가지는 敎育的 의미와 함께 훗날 삼국 통일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Ⅳ. 花郞徒의 役割과 性格 및 意義
1. 花郞徒의 役割
花郞徒는 新羅中古期의 時代的 産物로 制度化되었고 또 그 役割을 담당하였다. 花郞徒가 제도화되는 新羅 中古時代는 대내적으로 국가 체제의 확립기라 할 수 있고 對外的으로는 신라가 급격한 영토 팽창을 거듭한 끝에 百濟와 高句麗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는 위기 속에 있었다. 이 시기의 화랑도의 수련은 개인적으로는 人格完成을 기하고 국가적으로는 人才양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화랑도의 역할에 대하여 柳東植은 情緖的 기능, 宗敎的기능, 軍事的 기능, 敎育的 기능으로 요약하였고 朴贊은 人才登用 기관으로서의 기능과 人才 敎育 기관으로서의 기능으로 분류하여 國家的 요망에 따른 人才양성 기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李基白은 征服 전쟁 수행에 대응하는 戰士團으로서의 意義 이외에도 貴族 統一策의 한 表現 이라고 함축성 있게 말했다.
이러한 기능 이외에도 花郞徒는 하급 귀족의 자제가 낭도가 됨으로써 당시 사회의 流動性을 저지하고 있던 엄격한 골품제도 로부터의 脫皮를 가능케 했다. 다시 말하면 화랑도는 골품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신분간의 갈등을 緩和하는 사회적 완충제의 역할을 했다.
또한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주지하는 바와 같이 花郞도 불교의 彌勒信仰과 결부되었다. 당시 신라인은 석가를 국왕에, 미륵을 화랑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화랑이 지니는 宗敎的 면이 彌勒信仰과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화랑운동 그 자체는 미륵 신앙과 결부된 메시아 運動이 아니라 現世肯定的인 信仰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화랑과 결부되어 나타난 신라 中古時代의 미륵 신앙은 왕실과 귀족계급의 理想國家 건설에 대한 현실적인 열망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花郞徒의 役割을 간략하게 결합해 보면 인재 양성의 敎育的 기능 전사단으로서의 軍事的 기능 신분 계층의 갈증을 완화시키는 社會的 기능 주술적 宗敎祭儀로서의 신앙적 기능 情緖 함양과 歌舞遊娛의 예술적 기능 儒佛道를 포함한 思想 연마의 기능을 감당한 것으로 종합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기능이 原初的이며 本質的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속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集團이 사회적 시대 배경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어 온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2. 花郞徒의 性格
1) 統一以前의 花郞徒의 性格
花郞徒의 性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花郞徒의 活動이 가장 왕성했던 中古시대 즉, 統一以前의 花郞과 統一以後의 花郞의 성격을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적절한 方法일 것이다.
그 이유는 花郞의 활동과 그 정치-사회적 機能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변천해 갔을 것이며 특히 신라 하대로 내려오면서 花郞徒는 眞骨貴族들의 私兵的-門客的 性格을 띠는 조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中古시대의 일반적 時代相을 개관해 보면, 對外的인 面에서 이 시대는 新羅가 급격한 영토 확장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百濟-高句麗 兩國으로부터 양면 공격을 받게 되는 시기이다.
다시 말해서 眞興王代의 야심적인 영토 팽창은 눈부신 성공을 거둬 서기 560년대에는 그때까지 新羅歷史上 최대의 版圖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中古시대가 끝날 때까지 약 1세기 동안 신라는 失地回復을 꿈꾸는 麗-濟 兩國으로부터 끊임없는 침입을 받게 되어 일종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善德女王 (632-647) 말경에는 신라의 국가적 存立마저 위태로운 형편이 되었다. 고구려의 大莫離支 淵蓋蘇文과 백제의 義慈王은 서로 연합하여 신라의 국경 지대까지 쳐들어 왔던 것이다. 고구려 군대의 끈질긴 공격을 받아 漢江 상류의 신라군 요새는 함락 직전에 놓여 있었으며, 백제 군대는 험난하기 짝이 없는 智異山을 넘어 狹川에 있던 신라의 서부 방면군 사령부인 大耶城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新羅의 서부 국경선은 王京인 慶州에서 가장 가까운 낙동강 동쪽의 慶山 방면까지 후퇴하기 위하여 거꾸로 일대 反擊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太宗武烈王代였다.
바야흐로 守勢에서 攻勢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의 조국 수호 전쟁은 三國統一 전쟁으로 大轉換을 맞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화랑도의 軍事的 活動이 최고로 요구되는 時期이기도 했다.
한편 對內的인 面에서 볼 때 이 시대는 국가 체제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다. 官職上의 法制化 뿐만 아니라 이에 相應하여 전국민을 신분적으로 等級 區分하는 法制化가 강행되었다. 즉 이시대는 骨品制가 확립되어 신라 사회가 점차 카스트制的인 성격을 띠는 골품제적 사회로 확대, 강화되어 가던 移行期에 해당한다.
골품제가 강화됨에 따라 각 신분 계층이 固着되고 이에 따라 신분 계층간의 사회적 流動이 정지되자 사회계층간에 軋轢, 葛藤은 深化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최고 귀족인 眞骨層과 王室 사이에도 끊임없는 緊張이 감돌았다. 李基東 博士는 이것을 奈勿王系氏族의 집단주의 이념과 智證王系 直系의 王者 支配 意識 葛藤에서 緣由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中古時代는 정치적, 사회적인 의미엣 갈등의 요인을 내
포하고 있던 시대였거니와 바로 이러한 때에 花郞이 국가적으로 制定되어 그 全盛期를 맞게 되었다.
中古時代의 신라가 처한 對外-對內的인 政治-社會的 特性은 花郞徒의 成立과 發展을 가능케 하였는데 그러면 이 시대에 있어서 花郞徒가 지니는 특성은 어떠한 것일까? 먼저 화랑의 성격을 注目되는 것은, 花郞徒가 政治-社會的으로 갈등을 완화하는 완충 장치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花郞徒의 완충적 성격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眞骨에서 平民에 이르기까지의 靑少年으로 하여금 일체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지배계층 내에서의 조화와타협의 기능이다.
첫 번째 성격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花郞徒가 眞骨貴族을 비롯하여 王京內의 下級 貴族, 平民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사회 계급을 망라하여 조직된 청년 단체라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그것은 여러 사회계층을 연결하는 通社會集團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목표를 위해 3년간 함께 수련하고 유사시 戰陣에 臨하여 생사 고락을 같이하게 됨으로서 결국 귀족계급과 평민 사이에는 정신적인 일체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비록 신라의 花郞徒가 처음부터 국가권력을 옹호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어 이를 일종의 정치적 압력단체로 파악할 수 없다는 난점은 있으나 어떻든 이것이 신분의 장벽을 넘어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형성되어 공동 목표를 위해 공동생활을 하는 단체라는 사실만은 크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화랑도가 신라에 있어 하급 귀족의 자제라고 해도 花郞徒의 郞徒가 됨으로서 당시 사회의 유동성을 저지하고 있던 엄격한 身分制度로 부터의 탈피를 어느 정도 가능케 했다고 할수 있겠다.
한편 支配層 內에서의 갈등의 조정이라고 하는 성격은 法興王이후 王者中心이 지배를 지향하는 왕권 세력과 귀족의 집단 지배 체제를 유지하려는 귀족 세력과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면 충분히 성립할 수 있으리라 본다. 즉 新羅는 貴族의 子弟를 花郞으로 삼고 이를 中心으로 청년 집단을 조직하여 정복 전쟁의 수행에 대응하는 戰士團으로서의 성격을 수행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귀족을 하나로 통합하고 나아가 귀족의 자제인 화랑을 우대함으로서 王權과 진골 귀족 세력과의 造和내지 타협을 이루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측면은 中古時代의 정치 체계에서 花郞이 차지하는 현실적인 위치와도 잘 부합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는 眞骨勢力과 王權의 對立이 첨예화되었던 때로 화랑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력 사이에서 일종의 緩衝制的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골 귀족 출신이면서도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며 현실의 왕권을 지지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 몇 가지 사실로 보면 花郞徒가 王京안의 거의 모든 사회계층으로 연결-망라한 포괄적인 집단이었으므로 골품제도와 같은 엄격한 身分制社會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신분간의 갈등-알력을 조절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統一以前 화랑의 성격에 있어서 특히 注目되는 것은 軍事的 性格이다. 이 시기는 화랑도의 군사적 활동을 최고로 요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6세기라는 시대는 신라에 있어서 中央執權化 시대인 동시에 法制化-組織化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때 中央軍 조직도 편성되기 시작하여 眞興王 5年(544) 에는 6停의 基幹이 된 大幢이 만들어졌는데, 이로써 중앙군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군부대의 편성이 긴요하게 되었다.
이점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진흥왕 대의 伊飡異斯夫가 가야를 정벌할 때 斯多含이 從軍을 청하여 마침내 貴幢裨將이 되어 出征하게 되자 그의 郞徒 중에서 그를 따라 나선 자가 많았다고 한 사실이다.
이것은 청년 조직으로서의 화랑집단이 국가 유사시에 전쟁에 투입될 수 있는 예비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랑도는 바로 이 같은 時代的 背景 속에서 국가에 의해 公的인 기구로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三國統一때까지의 약 1세기 동안 신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國難期를 맞이하여 조국 수호 전쟁이라는 어려운 고비를 겪는 동안에 화랑도로서 일차적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은 군사적 과업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忠-孝-信-勇-仁을 표방하는 世俗五戒가 시대정신과 國策에 순응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고 또 그대로 실천된 臨戰無退의 정신에서 알 수 있듯이 花郞의 군사적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三國史記] 列傳에 실려 있는 화랑과 郞徒의 무용담은 국난기에 즈음하여 화랑도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신라의 시대정신을 구현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인 것이다.
먼저 斯多含은 根本이 좋은 귀족의 자제로 풍모가 뛰어나게 깨끗하고 준수하여 志氣가 방정하였으므로 이 때에 사람들이 花郞으로 받들기를 청하여 마지못하여 화랑이 되었는데 그 낭도가 무려 일 천명에 이르고 모두에게 환심을 얻게 되었다.
眞興王 23年 伽倻國 정벌에 斯多含은 나이 15-16세로 임금에게 여러 번 종군할 것을 간청하였다. 임금은 그 의지를 가상히 여겨 許諾하기에 이르고, 사다함은 貴幢裨將 직책으로 郞徒들을 이끌고 싸움에 나아가 큰공을 세우고 勝戰하여 돌아와 임금으로부터 큰공을 받았다.
다음으로 官昌은 신라의 장군 品日의 아들로 어려서 花郞에 추대되었다. 儀表가 都雅하고 사람과 사귀기를 잘했으며 騎馬와 활쏘기에 능하여 16세에 관직에 천거되었다.
서기 660년 新羅가 唐 연합하여 百濟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벌였을 때 官昌은 副將으로 출전하여 礪山戰鬪에 참가하였다. 官昌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병 몇을죽였으나 곧 포위를 당해 사로잡힌 몸으로 百濟 元帥인 階伯앞에 끌려나오게 되었다. 階伯이 官昌의 투구를 벗겨 보고는 그가 소년이고 또한 그 용맹스러운 것을 사랑하여 官昌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돌아온 官昌은 적장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며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었으나 階伯은 또 그를 사로잡아 목을 잘라 말안장에 달아매어 돌려보냈다.
品日이 죽은 아들의 머리를 자고 소매로 피를 씻어 주며 "내 아들의 面目은 산 것과 같다. 능히 國事를 위하여 죽었으니 후회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를 본 新羅軍은 크게 분개하여 모두 결사의 뜻을 세우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여 百濟軍을 大敗시켰다.
또한 원광법사로부터 世俗五戒의 가르침을 받은 귀산과 추항은 수년 후에 百濟가 군사를 일으켜 阿莫城을 포위할 때 함께 출전하였는데, 이때 귀산이 말하기를 "내 어째 법사에게 용사는 싸움 마당에서 물러서지 않는 다는 것을 들었거늘 어찌 감히 도망하여 달아나겠는가."라고 하며 臨戰無退의 정신을 준수하다가 전사하였다.
진골 출신 낭도 였던 金歆運은 어렸을 때 "누구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다."하는 이야기를 듣고 감개 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스스로 격려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同門에 있든 僧 轉密이 "이 사람이 만약 적진으로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655년 (태종 2년) 에 百濟가 高句麗와 함께 변경에 침입했을 때 이의 토벌을 위해 戰場에 나아갔던 金歆運은 "大丈夫가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거늘 사람들이 이를 알던 알지못하던 이는 한가지인데 어찌 감히 名譽만 구하리요." 라하고장렬히 전사하였다.
다음은 三國統一에 공을 가장 많이 세운 花郞으로 金庾信을 들수 있다. [三國史記]列傳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데 이를 통해 볼 때 金庾信은 통일기의 花郞의 대표 격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金庾信은 진평왕 12년 (595) 에 태어나 15세에 花郞이 되었고 18세에 이르기까지 수련을 하였다. 그후 35세 되던 해인 진평왕 46년 (629) 에 高句麗의 娘擘城 공격에 첫 출전하여 큰공을세웠다. 후에 金庾信은 押梁州 君主가 되었다가 善德王 13년(644) 에 蘇判이 되었고 그해 9월에는 上將軍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百濟의 加兮城, 省熱城, 同火城 등 7城을 공격하여 크게승리하였다.
이밖에도 金庾信은 高句麗와 百濟를 멸망시키고 唐軍의 세력을 몰아내는 등 역사에 남을 많은 업적을 남기며 三國統一의 이같이 화랑들이 戰功을 세운 것을 볼 때 날이 갈수록 화랑이 盛況을 이루어서 [三國史記] 眞興王條의 기록을 보면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뽑혀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부터 길러진다."라고 했다. 또한 [三國史記] 列傳 金歆運條에 三代의 화랑이 무려 二百餘人이라고 함을 미루어 볼 때 화랑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또한 史記에 기록되지 않은 화랑의 숨겨진 업적이 수 없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화랑들은 국가 유사시에 靑年戰士로서 선두에 서서 싸웠으며 그 같은 武士道는 화랑 집단의 성원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광범하게 파급되어 하나의 時代精神으로 형성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原動力이 되었다고 본다.
이상에서 이 시대에 활약한 화랑과 낭도들의 武勇談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삼국 통일 이전이 화랑은 統一戰爭이라는 대과업을 목표로 어려운 고비를 겪는 동안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띄게 된 것이 軍事的인 과업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통일 이전의 화랑은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軍事的인 性格이강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統一以前 花郞徒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政治的·社會的으로 갈등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던 骨品制下의 新羅中古期에 전 사회계층을 망라하여 조직된 화랑도는 社會의 유동성을 원활히 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眞骨勢力과 王權의 對立이 첨예화되어 있던 이 시기에 화랑은 대립되는 두세력 사이에서 일종의 緩衝制的인 구실을 하였다. 또한 三國統一期의 조국 수호 전쟁이라는 군사적 과업이 화랑도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업이었으며 이 때의 화랑들은 수련기간 중이라도 국가의 유사시에는 出征軍에 편성되었고 成業 後에는 대체로 국가의 정규 부대인 幢·停에 편입되어 정식군인으로 활동하였다.
2) 統一以後의 花郞徒의 性格
먼저 통일 이후 新羅의 對外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高句麗, 百濟, 新羅의 세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그것이 치열할 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中國을 비롯한 주위 여러 나라와의 관계가 얽혀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이러한 대립 항쟁은 드디어 7세기 중엽에 이르러 高句麗와 百濟가 망하고, 新羅는 韓半島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新羅를 도와 百濟와 高句麗를 함께 멸망시킨 唐이 新羅를 무시하고 東方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에 新羅는 결국 唐의 침략을 물리치고 그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新羅는 물론 高句麗의 옛 땅에서 唐軍을 완전히 축출하지는 못하였다. 이 과업은 高句麗의 流民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서 渤海가 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高句麗, 百濟, 新羅의 세나라가 정립하여 항쟁하던 형세는 統一新羅와 渤海가 南北에서 대립하는 형세로 바뀌게 되었다.
三國時代에 있어서의 對中關係는 주로 항쟁의 역사였다. 물론 외교적인 同盟이나 문화의 輸入과 같은 접촉도 있기는 하였으나, 武力的인 抗爭이 주가 되어 왔었다. 그러나 統一 뒤 唐이 군사적 침략을 포기하므로 해서 新羅와 渤海는 모두 唐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對唐關係의 변화는 新羅와 渤海의 관계에도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게 하였다. 즉 新羅와 渤海는 모두 唐의 문화를 흡수하기에 노력하게 되었다.
이러하여 兩國은 모두 唐으로부터 문화적 선진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승인 받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 다음과 간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그 하나는 唐에 있어서의 新羅와 渤海의 爭長事件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의 賓貢科에서의 登第序列에 관한 문제였다. 이 두 사건은 新羅와 渤海 사이의 대립의 양상이 唐을 매개로 한 文化的인 優劣의 경쟁으로 기울고 있음을 나타내 주도 있다.
이와 같이 統一新羅는 唐, 渤海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대외적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新羅 사람들이 통일 전 1백년 간의 가혹한 生存戰爭을 치르던 동안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안전과 평화였다.
한편, 신라가 半島를 통일하여 막대한 영토와 人口를 支配하게 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안으로도 새로운 政治·社會的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新羅人 자신은 이러한 발전을 上代가 끝나고 中代가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三國統一을 달성하므로 말미암아 한층 高揚된 中代 왕실은 국민들에게 평화 세계의 실현을 선전하고 약속했다. 다만 그것은 신라를 위한 永續的인 질서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사실 聖德王 때까지는 王權의 專制化로 眞骨 貴族들을 억누르는데 어느정도 성공하여 표면상 平和의 세계를 謳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王室과 眞骨 貴族 사이의 현존하는 緊張을 억제하는 데 불과했을 뿐이며, 緊張 자체를 해소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平和世界의 虛像이 노출되고, 또한 이를 선전했던 국가권력이 쇠퇴의 도탄을 보이기만 하면 그 긴장은 거세게 폭발적으로 분출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景德王 (742-765) 때의 말년에 노출되기 시작했던 이같은 불길한 徵候는 그의 어린 아들 惠恭王 때 (765-780) 에 폭발되어 汎眞骨貴族 연합 세력의 大動亂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太宗武烈王 계통의 中代 왕실은 타도되고 말았다.
이처럼 中代의 안정과 평화는 약 1백년 간에 그치고 말았거니와, 王室과 貴族들은 이 시대의 번영을 최대로 향유하면서 홀로 太平을 노래하였다. 하긴 三國統一을 達成할 때까지는 貴族들도 일반 민중과 다름없이 간장과 고난의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貴族들은 이 기간 도안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統一을 成就하자 그들을 많은 戰利品과 토지, 목장을 얻게 되었으며, 더욱이 그 뒤 장기간 平和가 계속되자 전쟁터에서 발산되었던 그들의 에너지가 이제는 奢侈와 享樂을 추구하는 일상생활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바야흐로 살벌한 軍國主義 시대로부터 一轉하여 安逸한 시대적 분위기로 변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통일 이후의 화랑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三國史記] 에 位傳된 화랑에 대한 기록이나 鄕歌와 관련된 기사가 주목된다.
삼국 통일 후 신라의 화랑들 역시 中古시대부터의 활동을 계속하였을 것이라 믿어진다. 하지만 통일 후 전쟁이 없었고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어느 정도 강화되었고 엄격한 골품제가 시행되었기에 그와 같은 정치,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화랑의 활동이 가지는 사회와의 의미는 더욱 커진 것이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사료를 통하여 통일 후 화랑의 활동변화를 알아볼 수 있다.
"天授 3年 (AD 692년) 임진 9월 7일에 孝昭王이 大玄薩飡의 아들 夫禮郞을 국선으로 삼았다. 주리를 신은 화랑이 있다. 무리가 천여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安常이란 사람을 더 친히 하였다. 天授 4年 (AD 693년) 계사 3월에 그가 무리를 이끌고, 金蘭에 出遊하였다. 北溟 방면까지 이르렀다가, 적에게 잡혀갔다.
그의 무리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돌아 왔지만, 安常만은 혼자서 쫓아갔으니, 때는 3월 11일 이었다……."
"경문대왕의 諱는 膺廉이니, 나이 열 여덟에 國仙이 되었다. 스물이 되었을 때에, 憲安大王이 郞을 불러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물었다. '郞이 國仙이 되어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무슨이상한 일을 본 것이 있느냐?'
"신이 아름다운 일을 행하는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효종랑이 나와 놀다가 이 광경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에게 청하여 집에 있는 곡식 백섬과 의복을 보내 주고 또 지은을 산 주인에게 그 몸값을 갚아 주고 양민이 되게 하니 효종랑의 무리 기천명도 각기 곡식 1섬씩을 내어 지은에게 주었다."
첫째는 孝昭王代의 國仙이었던 夫禮郞이 말갈적에게 잡혀간사건이 일어났을 때 安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낭도들이 그대로 돌아왔다는 기록이며, 두 번째는 膺廉은 國仙으로 4방을 여행하며 지방의 여러 상황을 살핀 기록이며, 세 번째는 孝宗郞과 그 낭도들은 가난한 孝女 知恩을 도와준 기록이다. 위의 기록들은 모두 통일 후 화랑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新羅下代에는 전반적으로 반발의 경향이 현저해진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국가 권력이 쇠퇴하여 이기적인 眞骨貴族을 통제할 힘을 喪失하였는데, 이로써 귀족들의 謀叛, 叛亂이 연달아 일어났다. 하긴 이같은 혼란한 情況 속에서 통일 전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과업이 다시금 중요성을 띠게 되었으며, 이점 화랑운동이 활발해 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실제로 822년 金憲昌의 반란을 진압할 때 2명의 화랑이 출전하고 있음이 [三國史記] 卷10 憲德王本紀 14년 3월 條의 記事에 特書되어 있다.
"14년 (822) … 웅천주 도독 金憲昌은 그 아버지 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明基와 安樂의 두 郞은 각기 종군할 것을 청하여 明基는 무리들과 함께 황산으로 나아가고 安樂은 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시기의 화랑의 성격은 통일 전과는 크게 달랐다. 중고시대의 화랑은 국왕과 진골 귀족간의 일정한 세력 균형을 전재로 하여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이념상 국왕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무엇보다도 현실의 국가기구와 왕권을 지지하는 조직이었는데 반하여, 9세기의 화랑은 진골 귀족의 '聯立'이라고 하는 그 시대상을 글대로 반영하여 진골 귀족들의 私兵的, 門客的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金憲昌의 叛亂을 討伐할 때 동원된 군사력이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오히려 귀족의 私兵이 주축을 이룬 것 같고, 또한 국가의 군대일 것으로 짐작되는 일부 군사력도 其實 국왕개인의 군대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요컨대 화랑이 국가권력에 대한 진골 귀족층의 壓力團體的 性格을 띠는 조직으로 변질되었음을 看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통일 후의 화랑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향가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 향가는 신라의 노래이며, 그 작가는 주로 승려와 화랑들이 많았다. 특히 통일 후의 화랑 중에는 유명한 향가 작가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三國遺事] 의 기록을 통해서 그러한 화랑들을 살펴보겠다.
"第 5 居烈郞, 第 6 實處郞, 第 7 寶同郞 등 세 花郞의 무리가 楓岳에 놀려고 갔다. 그때 彗星이 心大星을 침범하였다. 郞徒들이 의심스럽게 여기고 꺼리어서, 여행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이때에 融天師가 향가를 지어 부르니, 彗星이 곧 없어지고 왜적까지고 물러가서, 도리어 경사스럽게 되었다. 대왕이 기뻐하면서, 郞徒들을 楓岳으로 놀러 보냈다."
景德王 19年 (AD 760년) 경자 4월 1일에 해가 둘씩이나 나타나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朝元殿에다 재단을 차리고,
靑陽樓에 왕이 나아가 인연이 있는 중을 기다렸다. 이때 月明師가 지나가므로 그를 불러 기도문을 지으라고 하니 月明이 말하길 "저는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다만 향가를 알 뿐이고, 梵聲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황이 향가라도 지어라 하여 月明이 도솔가를 지어 바쳤는데 잠시 뒤에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景德王이 나라를 다스린지 24년에 玉嶽, 三山의 神들이 가끔 現身하여 殿庭에 모시었다. 3월 3일에 王이 歸正門 누상에 臨御하여 좌우에게 묻기를 누가 능히 길에서 한 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냐 하였다. 이 때 마침 한 중이 있어 王께 데리고 가니 王이 기뻐하며 그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물으니 忠談이라고 대답하였다. 王이 가로되 "내가 들으니, 耆婆郞을 찬미한 忠談師의 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가?" 忠談이 그러하다고 대답하니 王이 자신을 위하여 安民歌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忠談이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통일 후의 화랑에 대한 기록 가운데 鄕歌에 대한 내용이 많음을 볼 때에 통일 후의 화랑들을 통일 전 화랑과는 다르게 [相悅以歌樂]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즉 道義 연마보다는, 노래를 부르고 서로 즐기기를 좋아하였다.
이상에서 통일 후 화랑은 놀이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놀이란 네덜란드의 文化史家 호이징하가 遊戱하는 人間에서 만들어 낸 바로 그 개념이다. 호이징하는 놀이를 문화의 근원이라고까지 보는 입장인데, 그에 의하면 놀이는 본디 眞蘖함과 兩立되는 것으로서, 이 兩者는 각기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兩者가 일정한 거리를 둔 긴장 관계에서만 참된 문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전성기의 화랑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이시기의 화랑의 놀이적 성격은 조국 수호, 나아가 삼국 통일이라는 현실의 목표, 곧 군사적 과업에 의해서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국 통일 후 화랑은 매우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신라는 中古時代 최대의 과업이었던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자, 화랑의 군사적 성격은 시들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통일 후 일찍이 체험한 적이 없는 장기간의 평화를 謳歌하게 되었는데, 이같은 安逸한 시대적 분위기가 군사적 기능을 喪失한 화랑의 놀이적 기능을 한층 助長했을 것은 확실하다.
3. 花郞徒의 意義
花郞徒는 신라 시대에 있었던 修鍊團體이며 그 기원은 그 이전사회에서 비롯되었다. 신라가 집단 내부의 강한 유대라는 전통적 기반을 眞興王代에 와서 새 시대에 알맞게 再組織하여 개편한 것이 화랑도이다. 그러므로 화랑도는 우리 固有思想( 信仰 )이 基調가 되고 部族社會의 祭天( 行事 ) 大會와 風俗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새로이 발전하는 국가적 현실에 적용시켜 조직한 것이라 하겠다. 花郞徒는 신라가 3국간의 항쟁에서 대외적 팽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탄생하였지만 종래 靑少年集團이 가지고 있던 傳統的인 宗敎的 性格에서 高等宗敎로서 전래되어 온 儒·佛·道와 연결되었다. 새로운 外來思想인 三敎는 서로 調和되어 우리 고유 신앙과 융합되었고 또한 그것은 花郞徒의 지도 이념이 되었고 國家的 理念으로 昇華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우리 固有思想은 상실되지 않고 主體가 되어 三敎를 消化하여 우리의 思想으로 정착되게 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라 하겠다. 新羅의 中古期는 國王을 중심으로하여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또 영토
확장을 위한 치열한 정복 사업을 추진해야 할 시대였다. 이러한 時代的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종래 신라 사회의 보수성으로 인해 보다 강인하게 유지되어 온 집단을 내부의 유대감, 외적과 용감히 싸울 수 있는 戰士團, 또는 國家的 중견 인물을 양성하는 실체로 구체화되어야 했다.
그 구체화의 실현이 바로 화랑도 였다. 그러므로 花郞徒 精神의 핵심은 국가에 대한 忠誠心과 용감하게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길 수 있는 戰爭訓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花郞徒의 戒銘인 世俗五戒는 文武를 겸비할수 있는 國家의 有益한 人物로 길러 내는 국가적 運動과 個人的 修養에 적합하게 창안된 것이다. 그러한 요구는 花郞徒의 精神인 동시에 그 시대의 보편적 윤리이며 價値觀이 되었다.
또한 佛敎 역시 신라 사회의 새로운 이념으로 채용되어 花郞徒와 결합되었다. 국왕은 국가의 체제를 보다 공고히 정비하기 위하여 佛敎를 사상적인 구심체로 이용했다. 이에 貴族이 승려가 되기도 하였고 또한 승려들도 화랑이 되거나 花郞徒의 구성원으로 편성되었다. 圓光法師와 같은 高僧이 花郞의 지도 이념이 된 [世俗五戒]를 創案한 것만 보아도 花郞徒와 佛敎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儒敎는 종교라기보다는 學問과 思想으로서 花郞徒의 理念形成 및 윤리적 체제화에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佛敎와 儒敎는 신라 화랑도의 世俗五戒에 그 사상적 배경이 될 수 있었다. 世俗五戒의 精神으로 訓練된 花郞徒는 國家와 社會의 中堅人物로 養成되었으니 戰時에는 勇敢한 軍隊가 되어 護國의 役軍으로 忠誠을 바쳤고 官職에 나가면 賢明한 忠臣이 되어 국가에 기여하였다. 國難 속에서 成長한 신라 花郞徒는 유능한 人材의배출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열세인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三國統一의 課業을 達成함으로써 그 時代의 精神을 구
현할 수 있었다. 한편 骨品制度에 의한 신분제 사회에서 제정되어 국가적으로 이루어진 花郞運動은 계층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신분 계층간의 갈등을 緩和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結局 花郞徒는 3국 항쟁기에 신라의 지도적 人物로養成하는 靑少年 團體로서 新羅史에 있어서 政治 軍事的으로 뿐만 아니라 社會的으로도 새로운 轉機를 만들었으며 敎育 및 精神史의 입장에서도 民族 傳統의 主된 脈을 形成함으로써 커다란 위치를 점하고 있다.
Ⅴ.結論
以上으로 花郞徒의 成立, 構成組織과 機能, 그리고 性格에 대해서 부족하나마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花郞徒의 여러 측면을 연구해 온 學者는 적지 않은 수에 이르지만 본래 花郞徒에 관계되는 基本 史料가 많지 않다는 것이 어려움으로 지적되어 왔다.
위에서 서술한 內容을 요약해 보면, 斯盧國을 母體로 한 신라는 4세기에 들어서게 되면서 중앙의 집권력이 보다 강해지는 전환기를 맡게 되고 金氏 王位 세습권 확립은 小國연맹체단계의 首長들을 중앙 귀족으로 轉化시켜 나가는 토대가 놓여지게 하였다.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智證王때의 일로 이때 牛耕이 시작되어 농업 생산력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麻立干 대신에 王號를 사용하였으며 州郡제도를 실시하였다.
법흥왕대에 율령의 반포, 兵部의 설치, 上大等제도의 채택 등으로 통치 체제를 갖추고 "建元"이라는 年號를 세워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갖게 되고 불교를 수용하여 통일국가를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진흥황대에 와서 영토가 팽창됨에 따라 내부적으로 확대된 왕권과 정치체제에 걸맞은 인재의 배출이 요구되었으니 이에 화랑도의 제도적 성립을 보게 된다.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은 삼한 시대부터 토착신앙인 산악 신앙과 법흥화대에 공인된 불교의 미륵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전래의 巫俗的인 귀신 숭배나 山神신앙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일체감을 가지고 조직을 확대시키는 기반을 제공하였던 것이고, 화랑은 귀족 자제로서 귀족 세력의 상징적 존재였다는 점에서 미륵을 화랑에 비유하기까지 하여 당시 신라인들의 이에 대한 돈독한 신앙을 상상하게 한다.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삼한 小國단계의 청년 조직에서 유래한다는 三品彰英의 說이 대체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후 국토가 팽창하고 왕권이 증대한 진흥왕대에 이르러 정치적, 사회적인 구조 변화로 말미암아 화랑도로 개편되었다고 한다.
화랑도는 한 명의 화랑과 한 명의 승려낭도 그리고 많은 낭도들로 구성되었으며 조직의 중심 인물인 화랑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진골 귀족 가문출신으로서 美貌와 德行이 있는자이고 時人의 推奉으로 화랑으로 뽑혔으며 그 成業기간은 대개 15∼18세까지의 3년간으로 본다.
화랑도의 조직에서 화랑을 보좌하고 화랑도의 敎化와 자문을 담당한 자가 승려 낭도이다. 승려 낭도의 출신 성분은 최고 지식인층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고 그들은 화랑도에 섞여서 知的·精神的 방면에서 활동하고 특히 도덕적 교육에 일정한 구실을 담당하였다. 화랑 집단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낭도는 진골신분이나 6두품이하의 두품신분도 있었고 또 일반 평민 출신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한 시대에는 여러 화랑 집단이 동시에 조직되어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제화랑도집단을 전체적으로 통괄하고 조절하는 花主가 있었다.
화랑도의 수련 방법은 『道義相磨』와 『歌樂相悅』과 『遊娛山水』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誓約을 통해 修練으로 얻어진 일정한 원칙을 집단 성원의 內面에 定着시킨 것으로 보인다.
화랑도의 기능으로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갈등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던 골품 체제하의 신라 中古期에 전 사회계층을 망라했다고 볼 수 있으며 진골 세력과 왕권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있던 이 시기에 화랑은 대립되는 두 세력 사이에서 일종의 緩衝劑的 구실을 하였다. 또한 삼국통일기의 조국 수호 군사적과업이 화랑도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업이었으며 화랑도들은 수련기간중이라도 국가의 유사시에는 出征軍에 편성되어 나아갔지만 성업 후에는 대체로 국가의 정규 부대인 幢·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화랑도들이 成年이 되어 낭도 조직은 저절로 해산되었다고 하더라고 낭도 시절의 교우 관계가 성인이 된 뒤에도 동료관계로 존속하면서 그들의 정치·사회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화랑과 낭도의 관계는 骨品이 峻別되는 실제 사회에서는 主從관계로 固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