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장

이내주_우리 민족의 전통무기

醉月 2009. 12. 19. 15:40

전통 기병의 무기와 그 무예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알렉산더>와 같은 전쟁영화에서 지축을 흔들면서 한 무리가 되어 무서운 속도로 적진을 향해 돌 진하는 기병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통쾌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전율과 공포를 느낀다. 승마장이나 경마장 에서 몇 마리의 말이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아, 대단하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이러한 말이 수백 마리(아니 수천 마리)가 일거에 쇄도해 온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은가.

 

그렇다. 접전 시 이처럼 적 진영 돌파를 주 임무로 수행한 부대가 바로 기병(騎兵)이었다. 기병은 화석연 료를 태우는 내연기관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전쟁에서 가장 유일하고 확실하게 기동력을 제공하였다. 무 장한 인원을 빠르게 적군에게 접근시켜서 적 진영을 교란하거나 아니면 적보다 먼저 유리한 요충지를 점령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인간의 평균 키가 그리 크지 않았던 옛날에 말 위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기마병이야 말로 일반 보병병사가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상대임에 분명하였다. 더구나 기마병이 마상에서 양손으 로 칼이나 창을 휘두르고 갑주로 자신을 방호하고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물론 우수한 말의 획득 과 사육, 그리고 기마병의 훈련 등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으로 인해 그 병력 규모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보병을 상대해서는 가히 천하무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고학자들은 출토된 고대 유물들을 근거로 우리에게도 북방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상도 김해 지역의 고대 가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최근에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 유물, 그리 고 무엇보다도 북한지역에 남아 있는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 기마병의 늠름한 모습 등에서 이러한 주 장의 타당성을 엿볼 수가 있다. 그렇다. 우리나라 고대국가 시대에 기병중심의 기마전은 전투형태의 주류였 으며, 이때 ‘동이족’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각궁을 이용한 기사(騎射)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삼국 모두 기병 양성에 주력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대륙 북방민족과의 끊임없는 항쟁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에서 기마전 이 널리 성행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과거에 기병이 사용했던 무기와 장비, 그리고 갑주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전통기 병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그 옛날 말갈기를 휘날리며 만주벌판을 내달렸던 우리 조상들의 상무정신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2. 고구려 요동정벌의 비밀병기 : ‘철갑기병’

삼국시대 기마병의 모습은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고구려 시대 고분벽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고분벽화들 - 안악2&3호분, 덕흥리 고분 벽 화, 약수리 고분 벽화, 쌍영총 및 무용총 벽화 - 에는 갑주를 착용하고 마상에서 무용(武勇)을 뽐내고 있는 고구려 기마병의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벽화를 상세히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 기병의 무장 및 보호 장구에 대해 알 수가 있고, 무엇보다도 광개토대왕이 벌인 정복전쟁의 비밀병기가 바로 고구려 철갑기병이 었음을 식별할 수가 있다. 물론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도 기병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지만, 그래도 가장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여 요동정벌이라는 과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고구려 기병 부대였다.

 

이처럼 삼국이 기병대를 적극적으로 육성함에 따라 말을 부리기 위해 필요했던 기마용 부속장비, 즉 마구 류가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기마병이 어떠한 마구류를 사용하였는가는 쌍영총의 기마 인물도 및 기마 인물형 토기 등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제반 마구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 등에 타고 있는 기사가 안정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었던 안장과 등자(鐙子)를 꼽을 수가 있다. 안장이 말 등 에 탄 기사의 몸을 전후로 잡아준데 비해 등자는 그를 좌우로 고정시켜 주었다. 그 덕분에 바야흐로 기사 가 말과 한 몸이 되어서 양 손을 사용하여 활을 쏘거나 창을 휘두르고 무엇보다도 기병대의 고유기능이랄 수 있는 돌격을 감행할 수가 있었다. 말과 일체화된 기병이 전 속력으로 달려왔을 때 발생되는 충격력은 가 히 상상을 초월하였다.

 

직접적인 살상무기가 아니면서 전쟁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도구로 등자가 꼽히고 있다. 초기에 등자 는 몸체는 나무로 만들고 발바닥이 닫는 표면에는 철판을 덧대어서 미끄럼과 마모를 방지하였다. 그래서 서양역 사에서는 등자의 사용을 중세 천년에 걸친 기사시대를 연 원동력으로 보고 이를 무기발달사 상에 ‘혁명적 사 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등자는 말을 탈 때나 마상에서 다른 행동을 할 때 단순히 기사의 발을 거는 마구의 일종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이외에 마구류에는 말방울, 말띠 드리개, 말띠 꾸미개, 그리고 재갈 등이 있지 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등자였다.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에 등장하는 기마병의 호쾌한 모습에서 고구려인의 상무적 기상을 엿볼 수가 있다. 비록 여기에서는 적군이 아니라 사슴과 호랑이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지만, 이들의 무기와 장 비를 통해 당시 고구려 기마병의 무장 상태를 엿볼 수 가 있다. 더욱더 구체적으로는 평남의 덕흥리에서 발견 된 고분벽화에서 그 옛날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요동지역을 호령하였던 고구려 철갑기병의 모습을 살필 수가 있다. 그림에 보면, 기사들은 철편으로 제작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철제 투구를 쓰고 있으며, 심 지어는 말에게도 철제 갑옷을 입히고 있다. 이렇게 무장한 대규모 기병대가 지축을 흔들면서 요동 벌판 요 소요소에 고구려의 깃발을 꼽고 다녔음을 생각할 때, 어깨가 절로 들썩임을 자신도 모르게 느낄 수가 있다.

 

그러면 고구려 철갑기병의 무장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986년에 경남 합천 성산리의 가야고 분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두 가지 유물이 있었다. 바로 철로 제작된 갑옷과 투 구였다. 당시에 상당량의 철 생산을 자랑하던 가야인들이 남긴 유물로 짐작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어떻 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 해답의 열쇠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내게 되었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무사의 모습에서 철갑 및 철 투구로 온몸을 감싸고 장창과 칼로 무장하고 있는 고구려 기마병을 식별해 내었던 것이다. 그는 삼각형 또는 사각형 모양의 철판을 작은 쇠못이나 가죽 끈으로 연결하여 제작된 찰갑(札甲, 쇠비늘) 형태의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는 착용자의 몸의 체형에 맞추어서 제작된 신체형 갑옷이고, 몸 전체를 감싸 보호할 수 있는 전신 찰갑이었다.


물론 이 갑옷은 가야에서 유행한 판금갑옷에 비해 방호력 측면에서는 뒤졌지만, 착용자가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찰갑과 짝을 이루어 철 투구도 제작되었다. 갑옷을 입은 고구려 기마병은 머리와 목 부분을 투구로 보호 하였다. 고구려 기병의 투구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이 상단부가 좁고 하단부가 약간 넓은 길쭉한 철편을 여러 개 이어서 몸통을 만들고 가운데 부분에 사발 모양의 철판을 올려놓아 완성한 이른 바 ‘종장판주(從長板冑)’였다. 이러한 반원형의 투구 좌우 아래로 철편을 이용하여 ‘볼 가리개’와 ‘목 가리개’ 를 덧붙여서 얼굴 옆면과 머리 뒷부분을 보호하였다.

 

이외에, 형태는 비슷하지만, 오각형이나 사각형의 작은 철판을 이어 붙여서 만든 소찰주를 쓰고 있는 기마병 의 모습도 드물게 찾을 수가 있다. 이처럼 철편을 덧대어서 만든 고구려의 투구는 서양의 그리스시대나 중세 시대에 사용된 일체형 투구에 비해 방호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전투 시의 활동성 면에서는 월등하였다. 더 구나 고구려의 기마병은 자신만 무장한 것이 아니라온 몸을 갑옷으로 감싼 개마(鎧馬)를 타고서 전장에 나아갔다. 이처럼 풍부한 철 생산을 바탕으로 정예의 철갑 기병대를 양성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걸쳐서 요동벌판을 호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반세기에 걸쳐서 진행된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기병은 어떠한 훈련을 받았을까? 삼국시대에 전장의 승패를 결정짓는 데 기병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평소에 마상무예가 적극 권장되었다. 마상무예의 핵심은 말타기와 활쏘기가 결합된 형태인 기사술(騎射術)이었다. 동이족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는 각궁으로 유 명하였다. 그러다보니 주무기인 활을 중시하게 되었고, 그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활쏘기 훈련이 강조되었 다. 을지문덕이 한 개의 화살로 날아가는 기러기 몇 마리를 한꺼번에 잡았다는 일화는 그만큼 활쏘기가 일 반화되고 중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승마하기도 어려운데,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로 표적 을 명중시켜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평소에 기사술이 매우 중시되었으리란 점을 암시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시대에 기병들이 어떻게 활을 쏘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다. 고구려 고 분벽화인 무용총의 ‘수렵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수명의 기마무사들이 활을 이용하여 노루와 호랑이 등 을 사냥하는 그림인데, 이들의 사냥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 각궁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특이하게도 한 명의 기마무사는 안장에 앉은 채 상체만 뒤로 틀어서 화살을 쏘는 모 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활쏘기 방식이 고구려의 벽화는 물론이고 백제나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되는 바, 이것이 삼국시대의 전형적인 활쏘기 기법으로 여겨진다. 평소에 상당한 훈련이 없이는 도저히 구사할 수 없 는 고난도 무예로 평가할 수가 있다.

 

기병의 또 다른 무기는 창(槍)이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보면, 갑주로 온 몸을 감싼 기마무사가 긴 창 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원거리에서는 활을 주무기로 했겠지만, 실제로 접전단계에서는 창으 로 승부를 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평소에 말 위에서 창을 쓰는 훈련인 기창술(騎槍術)이 강조되었 음을 알 수가 있다. 마상에서 창을 어떻게 휘둘렀는지에 대해서 오늘날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구려 삼 실총의 공성도 벽화에 그려진 서로 쫓고 쫓기는 두 기병의 기마전에서 기창술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한 손에 장창을 든 기마병이 휙 돌아서면서 자신을 추격하는 기사가 찌르는 창을 손으로 잡고서 대결을 벌이 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양손으로 창을 머리 높이까지 치켜든 자세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상대 방을 찌르는 동작과 이를 한손으로 잡아서 빼앗는 고난도의 기창술이 과시되고 있다.

 

3. 삼국시대 이후 기병과 그 무기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후삼국시대를 끝내고 서기 918년에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후 거의 5백년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에 고려인들은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 북방민족과 전쟁을 치루었고, 고려말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왜구는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힌 ‘골칫덩어리’였다. 이처럼 계속된 외침에 시달리면서 고려는 이에 대응하여 무기를 발전시키고 무예를 연마했다.

 

고려의 무기와 무예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후삼국 통일전쟁 시에 왕건은 기병대를 이용하여 여러 번 후백제 군대를 무찔렀다. 이때 왕건의 기병대는 창, 칼, 그리고 각궁으로 무장하 였는데, 각궁의 위력은, 지난 호에서 소개한 바대로, 사정거리가 약 250미터에 달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왕건 의 군사력이 막강하였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후삼국통일의 견인차는 효과적인 기병의 운용이었다. 그 덕 분에 고려 초에는 자연스럽게 기병 중심의 무예가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기병보다는 보병 위주로 군대조직이 변경되었다. 그러다보니 무기 및 무예도 보병 위주로 흐르게 되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여진족에 대응할 목적으로 일종의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설치하 면서 재차 기병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별무반을 구성한 신기군(神騎軍), 신보군, 항마군 중에서 신기군이 바로 기병이었던 것이다. 기병 중심으로 전투를 전개하는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고려군도 기병을 강 화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기병에 관한 무예가 발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활의 불꽃은 곧 사그러졌다. 여진 정벌이 끝난 후에 별무반이 해체되면서 기병의 위상도 떨어지게 되었다.

 

바야흐로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기병이 재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주 방어대상이 북방 의 야인들이었기에 이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기병 중심의 군사조직을 유지해야만 했다. 이러한 연유로 최초 과거시험부터 무과에 기병 관련 내용이 포함되었다. 조선의 무과 시험과목은 무예와 강서(講書)로 대별되었다. 무예는 활쏘기와 창을 쓰는 보병무예 및 기사(騎射)와 격구로 이루어졌고, 강서는 병서와 유교경전 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비록 유희적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평소에 기병 훈련방식으로 많이 애용된 것이 격구(擊毬)였다. 이는 서양의 폴로경기와 유사하게 말을 타고 숟가락 모양의 장시(杖匙)라는 긴 막대기로 공을 치거나 퍼 담으면서 행하던 공놀이로 무과의 정식 과목이었다.

 

특히 격구 놀이가 갖고 있는 군사적 중요성을 간파한 세종대왕은 “격구를 잘하는 자라야 승마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격구 경기에 임하기 위해서는 기마술이 능란해야 하며 다양한 마상용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무예 실력을 구비하고 있어야 했다. 세종대에는 격구 이외에 털로 만든 공을 마상에서 활로 쏘아 맞히는 모구(毛球)도 유용한 마상무예 훈련방식으로 유행하였다.

 

실전용으로 기병에게 강조된 무예는 궁술과 더불어 창술이었다. 마상에서 창을 사용한 것이었기에 흔히 기창술로 불렸고, 이는 각종 무예시험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기마병이 무예를 익히는 데는 마상에서 창을 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졌기때문이다. 실전(實戰)에서 말을 타고 접전을 벌일 때 가장 효과적인 무예가 바로 창술로서 주로 도주하는 적을 말을 타고 추격하여 찔러 죽이는 방향으로 발전 하였다. 평소에 이러한 무예를 숙달시킬 목적으로 조선 초기에 실전용 마상무예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 삼 갑창(三甲槍)이었다. 이는 여섯 명의 기사들이 서로 편을 나누어 말을 타고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교전을 벌 이는 훈련방식이었다.


무기만 다를 뿐 방식은 유사하게 진행된 삼갑사(三甲射)도 실전용 마상 무예훈련방식으로 애용되었다. 이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을 타고 달아나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아 죽이는 무예로서 평소에 상당한 훈련이 요구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가면서 화약무기의 발달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전통무기와 무예 개발을 등한시 한 결과 창술과 격구 등을 연마하였던 기병의 무예는 쇠퇴하였다. 효종 대에 북벌을 준비하면서 요동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기병을 육성하였지만, 이러한 분위기 역시 효종 사망 이후에는 흐지부지되었다.

 

조선 후기인 영조 대에 기존의 궁궐숙위 및 호종의 임무를 담당하던 부대를 개편하여 기병 중심의 독립 부대인 용호영(龍虎營)을 설치하였다. 특이하게도 용호영의 기마병들은 조총이나 창이 아니라 편곤(鞭棍)으 로 무장하였다. 농기구인 도리깨 모양의 편곤은 장창에 비해 휴대하기도 쉽고 신속하게 휘두를 수 있는 이 점을 갖고 있어서 기동력을 생명으로 하는 기병에게는 적합한 무기로 선호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경기병 체제로 기병부대가 운용되었지만, 수석총과 같은 성능이 향상된 개인화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기병의 위상은 더 이상 피어나지 못하였다.

 

 4. 나오는 말

우리나라 역사상 전쟁은 대부분 성곽이나 산성을 거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하 는 활과 화살 위주의 무기체계가 발전하였다. 그러다보니 넓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기마전은 북방의 국경지대 에서 야인을 상대로 한 소규모 접전만 있었을 뿐 매우 드물게 이루어졌다. 또한 기병은 보병에 비해 그 유지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기에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대규모 기병부대를 장기간 유지하고 운용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병의 역할과 그 기여를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철갑 기병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으로서 만주의 대평원을 말 타고 달리며 호령하였다. 비 록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우리 민족의 활동범위가 한반도로 축소되면서 전쟁에서 기병의 역할이 줄어들기 는 하였지만, 북방의 국경을 침탈한 야인들을 물리치면서 꾸준히 역량을 축적하고 관련 무예를 개발해 왔 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기병의 무예가 왕조 초기부터 무과시험의 필수 과목으로 포함되면서 기병에 대한 관 심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화약무기가 발달하면서 기병의 위상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였지 만, 조선시대에 무과에 응시하려는 자는 필히 마상 무예를 연마해야만 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장에서 낙마하여 버드나무 껍질로 부러진 다리를 묶고서 마상무예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 다른 병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위축되면서 우리 전통 군대에서 기병의 존재 자체가 희 미해진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기병과 그 무예는 비록 등락은 있었을지언정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후기 에 작성된 전국의 말 사육장 분포 현황을 그린 지도를 보면 그 수가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을 새삼 깨달을 수 가 있다.

 

우리 군대 역사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으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오늘날 망각된 병종처럼 되어 버린 전통시대 기병을 재인식하는 기회를 갖고자 육군박물관에서는 2010년에 ‘한국의 기병’이라는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리는 바이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전통무기 - 활과 그 무예 -

 

흔히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가족단위로 흩어져 살던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자 그 수가 늘어나면서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고 이것이 심화되어 무력충돌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서로 죽이고 빼앗는 피곤하고 불안한 인류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장에서 적자(適者)는 생존하고 부적자(不適者)는 소멸하든가 적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인류 역사 발전의 기본법칙이 형성되었다. 다윈이 규명한 자연계의 생존원리가 인간세계에도 예외가 아니었 음을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과 사의 갈림길을 결정하였는가?


바로 적대적인 양자 간의 무장력의 차이였다. 누가 상대적으로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느냐가 특히 고 대 근력시대의 전투에서는 승패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전투는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공간이기에 전투에 임하는 양측은 사력(死力)을 다해서 가장 좋은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려고 한다. 이러한 면에서 당대의 최 신무기는 바로 해당국가의 경제력 및 과학기술력의 결정체라고 단정할 수가 있다. 물론 무기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인간과 결합될 경우에만 진정한 힘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무기라고 하더라도 사용자의 운용방식에 따라서 전투의 승패를 가르게 된다. 개별적으로 이를 추구할 시 이 는 흔히 ‘무예’라고 불리며, 집단을 이루어 조직적으로 움직일 경우에 이는 ‘무기체계’라고 정의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에 살면서 과거 전사들의 무기와 그 운용방식에 대해 관심 을 기울여야 하는가? 넒은 의미에서 이는 왜 역사를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상통한다. 전쟁사(military history)도 역사의 일부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질문은 일반인들이 역사를 무용한 것으로 오 해하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외적을 맞이하여 어떠한 칼을 어떻게 휘둘렀고, 어떠한 활을 어떻게 쏘았으며, 그리고 안전을 위해 어떠한 갑옷을 착용하였는가 등에 대해 현재에 몸담고 있는 우 리가 굳이 알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역사는 자연과학에서 하듯이 우리의 손에 가시적 인 무엇인가를 쥐어줄 수가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이러한 싸움에서 이 기고자하는 욕망은, 비록 무기의 형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볼 때 전쟁 승패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인간이 발휘하는 ‘창의성’에 놓여 있었다. 하지 만 창의성은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실상을 아는 지식적 토대 위에서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다. 과거 전쟁과 무기로부터 상수적인 교훈을 얻어서 이를 바탕으로 현대전쟁을 창의적으로 수행할 때, 전투에서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떠한 무기를 갖고서 외침에 대항해 왔는가? 오늘날 전쟁이 컴퓨터와 첨단항법 장치 등을 이용한 네트워크전이라고 하지만, 이의 원천을 추적해 보면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활, 칼, 창 등에 그 맥이 이어져 있다. 비록 이러한 무기에 대한 이해가 현대전 수행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하더 라도 우리는 이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각의 무기마다 그 속에는 우리 선조들 이 강토를 수호하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욕구에 미흡하나마 도움을 주 기 위해서 <우리 민족의 전통무기>라는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내용을 게재할 것인가? 나름대로 고심한 끝에 시간상으로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무기의 유형으로는 근력 및 화약무기에서부터 직접적인 가해력이 없는 간접무기까지, 그리고 게재지의 성격상 흥미 를 불러일으킬 만한 주제로 설정하였다. 무엇보다도 해당 시대에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만한 주제로 선별하 였다. 향후 1년간에 걸쳐서 연재될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전통무기 : 활과 그 무예

 2. 전통 기병과 그 무기 : 고구려 철갑기병, 조선의 기병 등

3. 침략자에 대응한 고려의 공(수)성 무기 : 검차, 운제 등

4. 현대판 ADD : 최무선 <화통도감>에서 화약무기 개발하다

5. 개인화기의 원조 : 총통(세총통 - 승자총통), 삼안총 등

6. 현대판 다연장 로켓탄과 포 : 신기전과 화차의 결합

7. 포탄과 투발수단의 발달 : 석환/철환을 거쳐서 ‘비격진천뢰’로, 완구

8‘. 애국 혼을 달래다’: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에 반영된 애국심

9. 무기에 투영된 ‘세계화’의 흔적들 : 조총, 불랑기포, 홍의포 등

10. 신호체계와 그 수단들 : 깃발, 악기, 봉수

11. 조선의 병서들 :‘조상의 지혜’가 녹아 있는 보물창고들 12. 대원군의 국방강화 정책 : 소포와 중포 제작, 삼군부 청사 신축
 
활을 잘 다룬 우리 민족 활은 화약무기가 등장하는 고려 말 이전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서 활용되어 온 우리 민족의 대표적 인 투사무기였다. 활은 그 특성상 전쟁 시에는 무기가되지만 평화 시에는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사냥 도구 로 인류 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 무기발달사에서 흔히 중국은 창, 일본은 칼, 그리고 우리는 활이 대표성을 가진 무기로 꼽히고 있다.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 族)’이라 부른 것도 바로 활과 관련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이미 삼국시대부터 활은 우리 민족의 전쟁사에 서 없어서는 안 될 무기가 되었다.

 

오늘날 삼국시대의 활이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활은 나무와 뿔 및 뼈와 같은 유기물로 제작되었기에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 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고구려 시대 무덤에는 활 쏘는 무사의 모습이 벽화로 남겨져 있다. 고구 려 무사들은 맥궁, 단궁, 경궁, 그리고 각궁 등 다양한 종류의 활을 사용하였는데, 이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 진 것이 바로 ‘각궁(角弓)’이다. 이는 길이가 1미터 이내의 짧은 활로서 기병들이 마상에서 다루기에 적합하 였다. 각궁이란 말 그대로 나무나 대나무로 된 활 몸체에 동물의 뼈를 조각내어서 덧붙인 일종의 합성활 (composite bow)이었다.

 

높은 탄력성을 지닌 각궁의 명성은 이미 주변 민족과의 충돌이 빈번했던 고구려 시대부터 널리 퍼져 있 었다. 오늘날 북한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면 마상에서 날렵한 몸놀림으로 맹수를 향해 각궁을 날리고 있는 고구려 무사의 그림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또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각궁의 화살이 박혀 있는 호랑이 두개골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각궁의 놀라운 관통력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동야승>의 저자 역시 우리 민족의 대표적 무기로 서슴없이 활을 꼽았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활이 우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활을 만드는 재료 측면에서 주변 민족에 비 해 월등하게 양호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활은 나무나 대나무 등의 단일재로 제작된 단순한 형 태의 활이었던데 비해, 각궁은 여러 가지 재료들을 결합해서 만든 첨단의 합성활이었다. 각궁은 두 개의 판 을 풀로 합치거나 나무로 된 활의 몸체 뒷면에 동물의 심줄이나 특히 물소 뿔을 덧대어 만들었다. 처음에는 주로 물소 뿔만을 덧대었으나 점차로 새로운 재료들이 추가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면 정통적인 각궁의 제작에 는 무려 일곱 종류의 재료 - 대나무, 물소 뿔, 쇠심줄, 구지뽕나무, 참나무, 민어부레풀, 화피 - 가 사용되었 다. 이처럼 다양한 재료와 특별한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각궁은 우수한 탄력성으로 인해 주변 민족에게 가 장 위협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각궁 제작에 핵심적 재료였던 물소 뿔, 즉 한자로 수우각(水牛角)은 어떻게 입수하였을까? 우리 가 잘 알고 있듯이, 기후 여건상 우리나라에는 물소가 서식하지 못한다. 물소는 주로 아열대 지방인 중국 남 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야생적으로 서식하였다. 따라서 물소 뿔은 중국을 왕래하는 사절단이나 대만이 나 유구 등 남방지역과 교역하는 상인을 통해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기에 구하기도 힘들었고 당연히 가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더구나 우리나라 각궁의 위력을 잘알고 있던 중국에서는 물소 뿔을 일종의 군사 전략물 자로 취급하여 이것이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기에 대대로 각궁 제작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래서 조선시대에 상시적으로 물소 뿔(색깔이 검었기에 ‘흑각’이라고도 불림)을 공급받기 위해서 한반도 남쪽지방에서 물소를 사육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기후조건이 맞질 않아서 실패하였다.

 

왜 하필이면 물소 뿔이어야만 했을까? 우리나라의 전통 황소도 뿔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황소 뿔도 각궁 제작 재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황소 뿔은 그 길이가 작아서 여러 조각을 겹쳐야만 각궁의 몸체를 감쌀 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활의 탄력성이 뒤떨어지고, 제작 후 접 착제의 성능이 약화되어 덧댄 뿔 조각이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에 비해 물소 뿔은 경우가 달랐다. 즉, 물소 뿔은 황소 뿔에 비해 단단하였기에 가공하기도 수월하였고, 무엇보다도 길이가 길어서 활 몸채의 한쪽 마디를 별도의 이음매 없이도 덧댈 수가 있었다.

 

물론 각궁의 높은 탄력성의 비밀이 물소 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활 몸채의 바깥 부분에 붙인 소의 힘줄도 탄력성 증진에 숨은 공로자였다. 소의 힘줄은 소의 척추와 근육에 붙어 있었기에 질기고 신축성이 뛰어났다. 따라서 이 힘줄을 활의 중심 부분에 민어부레풀을 이용하여 접착하였을 때 강한 인장력을 제공 함은 물론 활이 부러지는 것을 방지하면서 우수한 복원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다루기가 수월한 적당한 크기에 뛰어난 위력을 지닌 각궁이었기에, 비록 제작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 리 선조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 왔던 것이다.


 활의 천년 배필 : 화살 그렇다면 각궁만 갖고 있으면 만사형통이었는가? 아니다. 각궁의 위력이 아무리 우수하다 한들 이것이 무 기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하나, 즉 화살이 있어야 했다. 바늘에 실이 필요하듯이 활에는 그에 어울리는 화살이 받쳐주어야 하고, 그래야 해당활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 은 각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화살이 나쁘면 그 성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적군을 죽이는 것은 바로 화살이기 때문이다.

 

화살은 나무를 이용한 가느다란 막대기에 머리 쪽에는 화살촉을, 꼬리 쪽에는 깃털을 붙인 것으로 활의 탄력을 빌려서 적을 살상하는 투사무기이다. 각궁으로 대표되는 활을 중시하였듯이, 화살도 마찬가지로 삼 국시대부터 칼이나 창 못지않게 중요한 무기로 주목을 받았다. 화약무기가 등장한 조선시대에도, 신기전에서 볼 수 있듯이, 화살은 여전히 무기로서 무시 못할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화살을 날려 보내는 활쏘기가 조 선시대에 무과 시험의 한 자리를 차지하였고, 더 나아가서 양반사회에서 군자의 도(道)를 수양하는 한 방편 으로 중시되었음은 화살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그렇다면 화살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영화나 사극에서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장면을 많이 보아왔기에 화살은 별로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물론 전장에서 화살은, 전투가 종료된 후에 수거하여 재사용하기도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일회용 소모품이었다. 그렇다 고 이를 아무렇게나 만들었다가는 소중한 각궁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가 있었다. 궁수는 활의 탄력을 이용하여 쏘기만 하면 되지만, 실제로 날아가서 살상효과를 내는 것은 화살 자체였기에 화살은 활 못지않 게 중요하였다. 화약무기가 과학적 탄도를 갖고서 발사되었듯이, 화살도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집적한 채 날 아갔던 것이다.

 

화살은 그 용도와 목적에 따라 길이 및 무게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화살의 무게를 결정한 것은 화살대 자체보다도 머리 부분에 부착된 화살촉이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살상효과를 내는 부품으로 매우 중요하였 기에 그 형태와 재질이 다양하였다. 일반적으로 화살촉 끝부분의 형태에 따라서 유엽형, 도자형, 도끼형, 그 리고 송곳형 등으로 나누었다. 재질 상으로는 돌촉, 청동촉, 그리고 철촉 순으로 발달해 왔다. 화살의 목적 에 따라서 화살대의 길이를 조절하였고, 과녁의 성격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화살촉을 선택하여 양자를 결 합하였다. 마지막으로 화살의 비행방향을 정확하게 유지시켜주는 일종의 방향타가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바 로 화살의 꼬리부분에 부착되어 비행 중인 화살을 빠르게 회전시켜 준 깃털이었다. 깃의 재료로는 털이 촘 촘하여 공기의 저항에 강했던 꿩의 날개털이 가장 선호되었다.

 

화살에는 화전, 철전, 효시, 그리고 유엽전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지만 가장 각광을 받은 것은 편전(片箭)이 었다. 대부분의 전통무기 박물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편전은 그 크기가 약 0.4미터에 불과해 ‘애 기살’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이처럼 편전은 그 길이가 보통 화살의 절반도 안 되었기에 우리는 자연스 럽게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발사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편전은 나무로 만든 ‘통아’라고 불린 대 롱에 넣어서 발사하였다. 작은 화살의 길이에 온 탄력을 받았기에 편전은 빠른 비행속도, 1천 보에 이르는 긴 사거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통력이 뛰어났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북쪽 국경지대에서 기병 중심의 야인 들에 대항하는 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였다.


 무예로서의 활쏘기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활이 그 명성을 유지한 이면에는 활 자체의 성능 못지않게 이를 사용한 궁수의 실 력도 중요하였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아무리 훌륭한 성능을 갖고 있는 무기라고 하더라도 무기 자체로는 아무런 효력을 나타낼 수가 없다. 이것이 적합한 인간과 결합될 때 비로소 내재된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활에 적합한 인간은 어떻게 양성되었는가? 바로 평소 훈련을 통해서였다. 활의 민족 답게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활쏘기를 매우 강조하였다. 이민족들의 침략이 심할수록 활쏘기 훈련의 강 도가 높아졌다. 다른 무기에 비해 활은 명중률을 향상시키기가 쉽지 않다.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훈련이 없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칼이나 창과 같은 단병기와는 달리 활은 멀리 떨어진 적군 을 명중시켜야만 무기로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료에 의하면, 활쏘기는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에 무관은 무예와 병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는데, 이때 무예의 시험과목에 활쏘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활 쏘기는 군사훈련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관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해야만 했다. 물론 놀이의 성격도 갖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활쏘기 훈련의 연장이었다. 이들은 편을 나누어 단체전을 하거나 간혹 인접 부대를 방문하여 그곳의 무관들과 원정경기를 벌이기도 하였다. 기본적 으로 조선은 장병전술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에 칼쓰기나 창쓰기 등은 소홀히 되었을지언정 활쏘기는 항 상 강조되었다. 그 덕분에 조선 장병들의 활 솜씨는 주변의 중국이나 일본보다 월등하였기에 그 비결은 간혹 이들 인접국가의 정탐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에 활쏘기는 양반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소양으로 강조되어 문관들도 이에 힘쓰게 되었다. 활쏘기가 평소 군사훈련으로서의 기능도 있지만, 사대부가 덕을 함양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 단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활쏘기야 말로 유교의 덕을 쌓는 길이며 동료들과 어울려 활 쏘기 시합을 하는 것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군자의도를 행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활쏘기가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른 데는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역대 왕 들의 활쏘기에 대한 개인적 참여와 장려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이성계의 뛰어난 활솜씨는 재론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여러 일화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조선의 역대 왕들도 선대의 유업을 이어받아서 활쏘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 육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정조대왕의 대사례 기록화인 <고풍(古風)>에 보면, 정조의 활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육군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는 대한제국 시 고종황제가 쓰던 ‘호미각궁’을 통해 볼 때, 사대부의 활쏘기는 한말까지 이어 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전통무기라고 할 수 있는 활에 대해 총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각궁으로 대변 되는 양질의 활과 편전으로 대변되는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화살, 그리고 평소에 부단한 훈련을 통해 고 도의 기량을 갖춘 궁수, 이러한 삼박자가 어우러져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활은 한민족 전쟁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자치하여 왔다.


그렇다면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 민족이 이처럼 활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 말해, 활이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전통무기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물질적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사계절 이 뚜렷한 덕에 탄력성이 높은 활 몸체 제작 재료가 풍부하였던 점을 꼽을 수가 있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경우에는 기후가 습윤하여 대나무 이외에는 탄력 있는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서 는 질문에 충분하게 답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보다 중요한 요인이 더해져야만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무기가 무기라는 무생물과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결합으로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 해답이 놓여 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기병전술과 수성전술을 중심으로 주변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왔다. 삼국 시대의 전쟁방식은 주로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로 전개되었다. 정면에서 보병이 적군을 상대하는 동안에 기병은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적 진영을 와해시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적 진영의 취약부분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침략하는 적군의 병력이 많았기에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갖춘 기병이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병용 주무기로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지만 탄력성이 높은 각궁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몸을 돌려서 활로 달아나는 적군을 쏘아서 살상하는 방식 이 기병 무예훈련의 기본이 되었다. 이러한 기병 중심의 전술체계는 거란족 및 여진족 등 북방 이민족의 침 략을 많이 받았던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야인들을 물리치고 북방 영토 개척을 이룩한 조선시대에도 지속되 었다.

 

다음으로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전투가 대부분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 을 들 수가 있다. 평지가 대부분인 유럽 지역과는 달리 한반도는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 다. 따라서 평상시에 주거지 주변의 요충지에 산성을 구축하고 평지에서 생활하고 있다가 적군이 침략하면 산성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방어하는 이른바 수성전(守城戰)이 중시되었다. 화약무기가 사용되기 이전에 는 수성전투에 가장 적합한 전투방식은 접전이 필요한 단병전술이 아니라 가능한 한 원거리 공격으로 적군의 산성 접근을 막는 장병전술이었다. 이러한 전투방식에 가장 적합한 무기가 바로 활과 이를 다루는 활쏘기였 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각국의 전통무기는 해당국가의 군사문화라는 소프트웨어와 지형과 기후라는 하드웨어 의 결합을 통해서 중요도가 결정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따 라서 전쟁에서의 승패는 역사적으로 과연 누가 당대에 자국의 제반 여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무기를 개발 및 발전시키고 이의 성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무기체계를 구비했느냐에 크게 달려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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