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율곡이 반했던 ‘작은 금강산’…자연에서 세상 이치를 보다

醉月 2022. 10. 14. 08:57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오대산 소금강 1569 율곡 遊山길

단풍이 미처 내려오지 않은 오대산 소금강에 다녀왔습니다. 소금강 계곡의 차고 맑은 물길을 따라가는 숲길을 걸었습니다. 이 길을 450여 년 전에 율곡이 걸었습니다. 그때 소금강은 푸른 학이 산다고 해서 ‘청학산’이라 불렀다지요. 율곡이 탄성과 감회로 적은 청학산 산행기가 지금까지 전합니다. 옛 유학자들은 자연에서 삶의 도리나 세상의 이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율곡의 문장을 따라 걷는 길은, 자연을 걷는 길이되 사유의 길이기도 합니다. 율곡의 뒤를 따라 수많은 선비가 소금강을 드나들었던 이유입니다. 소금강 탐방로 구간 중 구룡폭포까지 왕복 6.2㎞의 ‘1569 율곡 유산길’은 ‘길이 역사가 되고, 자연이 인문이 되는 길’입니다.

강릉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옛 선비들, 산에서 노닐다

옛사람들은 산에 가는 것을 등산이 아니라 ‘유산(遊山)’이라 했다. 그들에게 산(山)은 ‘오르는(登)’ 곳이 아니라 ‘노니는(遊)’ 곳이었다. 노니는 방법도 다양했다. 경관 감상에 취하는가 하면 피리와 노래 그리고 춤을 곁들이기도 했으며,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기도 했다.

산을 대하거나 즐기는 태도는, 정치적 지향에 따라 달랐다. 조선 중기, 훈구파와 사림파가 치열하게 맞붙던 시절에 이런 태도의 차이는 특히 극명하게 드러났다. 훈구파가 자연을 즐기는 방식은, 집안에 앉아서 다른 사람이 다녀와서 쓴 기행문을 읽거나 그림을 보면서 이른바 ‘와유(臥遊·누워서 노닐다)’하는 것이었다. 반면, 사림파는 직접 산에 올라가서 경관을 감상하는 것으로 자연을 즐겼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풍류를 즐기거나 글을 짓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의 법칙을 관찰하며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들은 산 곳곳을 살피며 명칭을 따지고 의미를 캐물었다.

옛 유학자들에게 산은 그냥 산이 아니었다. 흐르는 물을 보면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또 가득 찬 곳에서 비워진 곳으로 흘러가는 사물의 이치를 생각했고, 내리막 뒤에 오는 오르막의 고행 속에서 공부법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만물의 이치와 원리가 함축된 상징의 공간이었다. 내로라하는 명소에 남긴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그들이 훌륭한 풍경에 걸어둔 탄성과 감탄사만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름난 대학자나 옛 선비들의 자취가 새겨진 곳을, 요즘 식으로 ‘인플루언서가 다녀간 명소’쯤으로 해독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금강산을 필두로 지리산이며 설악산 등 이름난 명산에는 옛사람들이 남긴 글이 첩첩이 쌓여 있다. 그중에서 오대산 소금강산으로 간다. 소금강은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명승 1호로 지정된 곳. 그때는 청학산(靑鶴山)이라 불렀다. 그 계곡에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율곡이 걸었던 길이 있다. 때는 사림파가 득세하던 시절. 율곡은 그 길을 걷고서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를 남겼다. 소금강을 노닐었던 여행기이자 산행기다. 율곡이 걸었던 길을 따라 소금강 계곡을 걷는다. 명승의 공간마다 발을 멈추고 대학자가 필시 탄성과 함께 써내려갔을 문장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걷는 길이다.


# 학이 사는 암봉 이야기에 매료당하다

1569년 4월.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율곡은 외할머니 간병을 위해 사직서를 쓰고 외가인 강릉에 내려와 있었다. 열여섯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의고 십 년 뒤에 아버지까지 잃은 율곡은 외할머니에게 각별했다. 유년시절을 외갓집에서 보냈으니 부모를 다 잃은 그에게 외할머니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했을까.

강릉에 있던 율곡이 소금강 계곡을 오르기로 한 건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하기야, 여행이란 건 대부분 그렇게 시작되는 게 아닌가. 율곡은 소금강 탐방을 가게 되기까지의 전말을 유산기(遊山記),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산행기인 유청학산기에 꼼꼼하게 적어 놓았다.

그 글에 나오는 한 장면. 마을 사람들과 둘러앉아 경치 좋은 산수 얘기를 하다가 율곡이 말한다. “대관령 동쪽으로는 유람하는 이들이 대개 한송정과 경포대를 가는데, 둘 다 강과 바다의 경치이지 산과 계곡 중에는 빼어난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그 말을 들은 유생 박대유의 답이다. “내가 들으니 연곡 서쪽에 오대산으로부터 백 리를 뻗어온 산이 있고, 그 가운데 골짜기가 있어 매우 맑으며 그 깊숙한 곳에 ‘푸른 학(靑鶴·청학)’이 암봉 위에 깃들여 있으니 참으로 선경인데, 유람하는 사람들이 이르지 않으므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더라.”

이 말을 듣고 매료당한 율곡은 “나도 모르게 심신이 시원해졌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곳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동생 이우와 이모부 권화를 비롯한 일행을 모으고 그해 4월 14일로 탐방 날짜를 잡았다. 오죽헌에서 출발한 율곡의 첫 행선지는 강릉 바닷가에 있던 이모부의 정자. 그곳에서 보름달 아래 배를 띄우고 술잔을 기울이며 늦도록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말을 타고 소금강으로 출발했다. 강릉의 바다에서 연곡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였다.

율곡이 오대산 소금강을 향해 걸었던 건 자그마치 453년 전의 일. 하지만 길 위에는 율곡의 자취가 여태 남아 있다. 시문을 짓고 바둑을 두었다는 골짜기에는 암각 바둑판이 있고, 바위 사이로 술잔을 띄워놓고 풍류를 즐긴 ‘유상곡수(流觴曲水)’의 공간도 있다. 율곡이 지나간 뒤에, 그의 산행기를 읽고서 자취를 좇아 후학들이 그 길을 다시 걸었다. 그들이 보고자 한 건 자연경관이 아니라, 대학자의 생각과 자취였으리라.

# 식당암까지 가서 되돌아온 이유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은 가마를 타고 산에 올랐다. 세상의 도리를 궁구하던 대학자들이 가마에 앉아 가파른 산길을 가면서도 가마꾼의 고초 따위에는 마음이 쓰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퇴계도 소백산을 오를 때 가마를 탔고, 남명 조식과 점필재 김종직도 지리산을 가마를 타고 올랐다. 피리 부는 광대나 춤추는 기생을 앞장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율곡은 말을 타고 소금강 입구까지 가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계곡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여행이었다. 백사장에서 삭정이를 주워다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었고, 누추한 절집의 초라한 판잣집에서 잠을 잤다.

소금강 기행은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인 1569년 4월 16일. 율곡은 소금강 탐방로 초입이라 할 수 있는 식당암까지만 보고서 발길을 돌렸다. 지금이야 식당암까지는 소금강 주차장에서 십자소와 연화담을 지나면 금방이지만, 그때는 계곡 저 아래부터 걸어왔을 테니 제법 먼 걸음이었다. 율곡은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깊은 산중의 금강산성(아미산성)이나 ‘청학이 깃들여 산다는 곳’까지 가고 싶어 했으니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식당암에는 나라 잃고 금강산으로 향하던 마의태자가 군사를 훈련하고 밥을 지어 먹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바위 이름이 밥을 먹는 ‘식당(食堂)’과 똑같은 이유다. 식당암은 맑고 깊은 계곡물 옆에 너럭바위가 펼쳐지고 주위로는 협곡의 암벽과 바위기둥 모습이 무협지 속 배경처럼 보이는 근사한 명승이다. 여기까지 와서 율곡이 더 오르지 않고 돌아간 건 날씨 때문이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날이 흐린 데다 식당암 너머로는 산길이 아주 험해질 것 같아 율곡 일행은 하산해 되돌아가기로 했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율곡은 식당암을 지나 구룡폭포와 만물상, 그리고 백운대까지 보고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에서의 감회를 과연 어떤 문장으로 남겼을까.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유청학산기’에 감회 남겨

453년전 외가 강릉 왔던 율곡
靑鶴 얘기 매료당해 산행 결정
절경‘식당암’까진 도착했지만
날씨탓, 만물상·백운대는 못가


후대 선비들도 여정 따라가

구룡폭포 등 명소 금강산 닮아
길 위엔 ‘암각 바둑판’등 자취
율곡이 이름지은 비선암·경담
식당암 바위에 글씨도 새겨져


 

 

# 금강산과 닮은 명소가 곳곳에

소금강은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소금강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면 오대산 노인봉(1338m)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노인봉을 이렇게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소금강에서 시작하는 코스가 낮은 해발고도에서 시작하며, 계곡이 워낙 길고, 마지막 정상구간은 진이 다 빠질 정도로 가팔라서다.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엄두도 못 낸다. 이쪽에서 노인봉 정상까지 가려면 6시간이 넘게 걸린다.

노인봉은 다들 소금강의 반대편, 그러니까 진고개 쪽에서 오른다. 진고개 정상은 해발 960m. 거기서 출발하면 노인봉 정상까지 표고 차가 378m에 불과하다. 진고개 휴게소에서 출발해 1시간 30분이면 노인봉에 올라설 수 있다. 정상에서 소금강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은 줄곧 내리막이어서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사정이 이러니 소금강으로 들어서는 이들은 대개 노인봉을 목표로 오는 등산객이 아니다. 소금강 계곡 길을 걸으며 풍광을 즐기다가 어느 지점쯤에서 되돌아 나오는 행락객들이다. 열에 아홉은 무릉계, 금강사, 식당암을 지나 소금강의 대표 명소인 구룡폭포까지만 다녀온다. 율곡이 되돌아간 식당암까지는 왕복 1시간 20분 남짓. 구룡폭포를 다녀오려면 2시간쯤 걸린다. 추천해 달라면 구룡폭포를 지나서 만물상까지 보고 오는 데 ‘한 표’다. 만물상까지는 왕복 3시간 20분쯤이 소요되지만, 만물상까지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소금강에는 금강산과 닮은 곳이 여럿 있다. 금강산 련주담과 소금강 연화담이, 금강산 구룡폭포와 소금강 구룡폭포가, 금강산 만물상과 소금강 만물상이 닮았다. 청학산이라 불렸던 산 이름이 어느 결에 ‘소(小)금강’으로 바뀌어 불린 이유다. 형님 격인 금강산의 웅대한 경관을 ‘작은 금강산’인 소금강의 아기자기한 경관에다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구룡폭포와 만물상만큼은 닮은꼴이다.

#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차고 맑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무릉계를 지나다가 인평대군 6대손인 조선 후기 학자 이병원의 ‘옥계(玉溪)’라는 시의 문장 한 줄을 떠올린다. ‘바위를 만나야 물이 기이함을 드러낸다(遇石水逞奇).’ 소금강을 두고 쓴 글은 아니지만, 그는 계곡 가에 지은 친구의 정자에 걸어 둔 글에서 “바위가 있고 물이 없으면 멍청하고 추잡한 것에 불과하고, 물이 바위가 없으면 아득히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것일 뿐”이라고 적었다.

그 글의 결론은 이렇다. “바위는 지극히 강한 존재이고, 물은 가장 약한 존재다. 강한 것과 약한 것이 서로 부딪친 다음에야 기예가 드러난다. 바위는 지극히 고요한 존재요, 물은 지극히 움직이는 존재다.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서로 적신 다음에야 그 효용을 다한다.”

옛 선비들이 자연을 보는 시선이 이 글에 있다. 옛사람들은 기이한 명승지에서도 자연의 외피(外皮)가 아니라 자연을 관통하는 의미를 생각했다. 계곡의 바위와 물에서 강한 것과 약한 것, 고요한 것과 역동적인 것의 만남을 보는 식이다. 소금강을 율곡의 자취를 따라 걷는다면 ‘길’이란 공간의 경험을 넘어서 옛사람들의 사유까지도 따라가 보는 것이 어떨까.

계곡에 놓인 철제 다리를 건너 식당암에 당도하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율곡은 산행기 유청학산기에서 소금강 탐방의 정점이었던 식당암의 빼어난 경관을 가장 공력을 들여 묘사했다. 1569년 4월 16일 늦은 오후 무렵. 율곡이 남긴 그날의 식당암 풍경을 좀 길지만 적어보자.

“사방을 두루 돌아보니 바위산이 솟아 있고 푸른 잣나무와 키 작은 소나무가 그 틈바구니를 기워 누비고 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두 산 가운데 냇물의 근원이 매우 먼 데, 흐름이 거센 곳에 폭포를 이뤄 맑은 하늘에 천둥소리가 골짜기를 뒤흔드는 듯하고, 고인 곳은 못이 되어 차가운 거울에 흠 하나 없는 듯 깊고 맑고 아름답고 푸르러 낙엽이 붙지 못하고 굽이굽이 돌아 나간다. 바위의 형상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하고, 산그늘과 나무 그림자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섞여 햇볕이 보이지 않았다. 흰 바위를 거닐며 맑은 물상을 가지고 놀았다.”

# 바위에 새겨진 문장과 이름들

율곡은 식당암에서 작은 술자리를 펼치고서 눈에 보이는 명소마다 이름을 지었다. 서쪽의 기이한 형상의 봉우리를 ‘촉운봉’이라 했고, 깔고 앉은 바위 식당암을 ‘신선이 숨었다’는 뜻의 ‘비선암(秘仙岩)’이라 고쳤으며 비선암 아래 바위 사이의 못을 ‘거울 경(鏡)’ 자를 써서 ‘경담(鏡潭)’이라 했다. 일행이 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자리의 바위를 즉석에서 ‘취선암(醉仙岩)’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일. 사물의 본질에 맞는 이름을 공자는 ‘정명(正名)’이라 했다. 바른 이름은 성격과 모양을 정의한다. 소금강의 깊은 산중 오지에 숨어 있는 빼어난 경관을 알아보고 이름을 달아준 일을, 율곡은 재야의 인사를 천거해서 뜻을 얻게 만드는 일로 은유한다. 그 대목이 유청학산기에 있다.

“오대산이나 두타산은 여기(소금강)에 비유하면 그 품격이 낮은데도 오히려 이름을 떨치고 아름다움을 전파하여 관람하는 자가 끊이질 않는데, 이산은 중첩된 봉우리와 골짜기 속에 광채를 감추고 숨겨 찾아오는 사람 없다. 세상 사람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산은 아무 손익이 없지만, 물리란 본시 그렇지 않다. (중략) 아! 세상에 지기(知己)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산뿐이겠는가.”

소금강에는 도처에 글씨다. 계곡 위에서 구르다 멈춘 거대한 바위마다 크고 작은 글씨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율곡의 뒤를 좇아 소금강을 찾아들었던 옛 선비들이 새겨놓은 것들이다. ‘무슨 무슨 계(契)’라는 모임의 명칭을 새기고 그 아래 계원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BTS가 다녀간 명소’쯤 되는 곳을 계 모임에서 단체여행을 왔던 기록인 셈이다.

식당암의 너럭바위에 앉아 어지럽게 새겨진 이름 사이에서 꼭 찾아봐야 할 글씨가 있다. 율곡이 식당암 아래 못에 붙여준 이름인 경담이란 글씨다. 서인 소론의 영수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새긴 글씨다. 율곡을 숭모하는 기호학파의 거물이었던 윤선거는 율곡의 유청학산기를 탐독하고 형 윤순거와 윤순거의 아들인 조카 윤진과 함께 소금강으로 찾아들었다. 율곡이 다녀간 지 95년이 흐른 1664년의 일이었다.

석공과 동행한 그는 식당암 바위에다 경담을 비롯해 청학산(靑鶴山), 천유동(天遊洞), 비선암(秘仙岩)이란 글씨를 세 명의 이름과 함께 새겼다. 식당암에서 바위를 살피다 보면 그 글씨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디 그들뿐일까. 율곡이 다녀간 뒤로 수많은 이가 소금강을 드나들었다. ‘홍길동전’의 허균도, 조선 중기 학자 허목도 소금강을 유람했다.

# 오죽헌과 송담서원…율곡의 자취

율곡의 걸음을 따라 소금강 계곡을 목적지로 삼았다면, 오가는 길에 강릉의 오죽헌과 율곡기념관, 또 율곡의 위패를 모신 강동면 언별리의 송담서원은 꼭 찾아가 보자. 율곡이 나고 자란 오죽헌이야 따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만큼 이름난 명소. 오죽헌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 오죽헌 담장 한쪽 끝에 있는 ‘어제각’이다.

율곡이 세상을 뜬 지 200여 년이 지난 뒤인 1788년 정조 임금은 오죽헌에 율곡의 쓴 격몽요결 원본과 어린 시절 쓰던 벼루가 보관돼 있다는 말을 듣고 그걸 궁궐로 가져오라 해서 친히 보았다. 그러고는 벼루 뒷면에다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다가는 머리글을 지어 붙이고는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정조가 지어서 벼루에 새긴 글은 이렇게 끝맺는다. ‘용(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구름(명성)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에 남았도다’ 책과 벼루의 보관 책임을 맡은 강원도 관찰사가 건물을 지었는데 그게 어제각이다. 어제각은 본래 오죽헌 안의 문성각 앞에 세워졌는데 1976년에 오죽헌 정화사업을 한다며 헐어버렸다가 1987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했다.

오죽헌 앞마당 한쪽의 오죽헌율곡기념관도 들러봐야 할 곳이다. 기념관에는 신사임당의 그림과 신사임당의 맏딸이자 율곡의 누이인 이매창과 동생 이우의 매화도와 국화도 등 그림과 글씨, 교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한쪽에 그림과 글씨로 이름을 날렸던 율곡의 동생 이우를 기리는 재미있는 재현품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율곡의 동생 이우의 서법을 두고 “참깨에 ‘龜(구)’ 자를 썼으며 콩을 쪼개서 쪼개진 한쪽 면에다 오언절구의 시를 썼는데 글씨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고 평했다. 강릉의 한 공예작가가 이글을 근거로 참깨와 쪼갠 콩에다 쓴 글씨를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율곡의 위패를 모신 송담서원은 본래 구정면 학산리에 있었는데 사액을 받으며 송담서원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송담서원에는 ‘신사임당초충도병’이라는 여덟 폭 병풍이 소장돼 있었는데, 1804년 강릉에 큰 산불이 나서 서원까지 불이 옮아붙는 와중에 분실됐다가 강릉 민가에서 발견돼 이를 입수한 이가 1965년 강릉시에 기증했다. 이 병풍의 그림이 5000원권 뒷면의 도안이다. 고즈넉한 마을 안쪽에 들어선 송담서원은 규모는 작아도 반듯하고 단정한데, 문제는 늘 문이 잠겨 있다는 것. 가보라 권하지는 못하는 이유다.

■ 소금강과 청학산

율곡은 소금강에 앞서 금강산을 여행한 적이 있다. 신사임당이 세상을 뜨자 상(喪)을 치르고 나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두루 돌아봤다. 그 때문일까. ‘작은 금강산’이란 뜻의 ‘소금강’이 율곡의 작명이라는 게 정설처럼 전해진다. 하지만 율곡은 소금강이라 부르지 않았다. 줄곧 ‘청학산(靑鶴山)’이었다. 소금강이 아니라 본래 이름 청학산으로 부르자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